일 자 | 지 역 | 교통편 | 시 간 | 주 요 일 정 | 식 사 |
제1일 | 인 천 인 천 목단강 돈 화 이도백하 | KE823 | 06:00 0845 1030 | ★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출국장 집결 ★ [공항 샌딩을 도와줄 직원과 미팅 예정 (담당자 추후 통보)] 인천 국제 공항 출발 목단강 하이량 공항 도착 [비행시간 2시간 10분 소요] 가이드 미팅 후 ▷ 돈화로 이동 (2시간 30분 소요) ▶ 돈화 방문지 예정 ▷ 이도백하로 이동 (3시간 소요) 석식 후 호텔 투숙 및 휴식 | 중:현지식 석:무제한 삼겹살 |
HOTEL | 일산 일란 호텔(4성) OR 동급 |
제2일 | 이도백하 북백두 두도구 용 정 연 길 | | | 호텔 조식 후 ▷ 북파로 이동 (40분 소요) ▶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짚차 등정, 백두산 천지 조망 (찦차=봉고차) ▶ 높이 60여m,마치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 같은 장백폭포 ▶ 화산의 뜨거운열이 지하수를 데워 지표면에 온천수가 흐르는온천지대 ▷ 두도구시로 이동 ▶ 두도구성당 (예정) ▷ 용정으로 이동 ▶ 일송정 차창관광 ▶ 우리민족이 간도지방에 처음 자리 잡은 곳인 해란강/용문교 차창 ▶ 민족 시인 윤동주시인이 다니던 학교인 용정중학교/윤동주시비 ▷ 연길로 이동 (30분) 호텔 투숙 및 휴식 | 조:호텔식 중:송이밥 +제육복음 석:연변식 |
HOTEL | 한성 세기 호텔(4성) OR 동급 |
제3일 | 연 길 도 문 훈 춘 연 길 | | | 호텔 조식 후 ▷ 도문으로 이동 (1시간 소요) ▶ 만강 접경지대 조성된 5KM 길이의 공원으로 북한과 중국의 경계를 나타내는 비석이 있으며, 북한의 남양시를 가까운거리에서 조망할수 있는 강변공원 [뗏목투어] ▷ 훈춘으로 이동 (1시간 30분 소요) ▶ 중국, 러시아, 북한 3국의 접경지대인 방천 ▶ 육포도 성당터 (예정) ▷ 연길로 귀환 ▶ 연길 성당 (예정) ♣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전신맛사지(1시간) 석식 후 호텔 투숙 및 휴식 | 조:호텔식 중:닭백숙 석:현지식 |
HOTEL | 한성 세기 호텔(4성) OR 동급 |
제4일 | 연 길 안도현 목단강 | | | 호텔 조식 후 ▷ 안도현으로 이동 (1시간 30분 소요) ▶ 대령 성당 (예정) ▶ 팔도구 성당 (예정) ▷ 목단강으로 이동 (4시간 30분 소요) 석식 후 호텔 투숙 및 휴식 | 조:호텔식 중:현지식 석:현지식 |
HOTEL | 동방 명주 호텔(4성) OR 동급 |
제5일 | 목단강 인 천 | KE824 | 11:35 15:10 | 호텔 조식 후 ▷ 공항으로 이동 목단강 출발 인천 도착 후 해산 ★ 감사합니다 ★ | 조:호텔식 중:기내식 |
** 상기 일정은 항공 및 현지사정에 의하여 다소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성당 방문은 미정이며, 추후 행사 확정시 재확인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 |
북간도 성지 순례
서론
한국천주교 근대사에서 연길의 등장은 1908년 9월14일로 기록 되고 있다. 왜냐하면 조선대목구장 뮈델주교는 바로 이날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방문하여 선교 파견 문제를 논의하였기 때문이다.
「...1908년 9월 14일 저녁, 한 초로의 신사가 뮌헨에서 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튀르켄벨트 역에서 내려 늪지대를 걸어가고 있었다. 긴 사제복을 입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그는 훗날 기회 있을 때마다 이날의 추억을 즐겨 이야기했다.
그 신사는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온 조선 대목구장 귀스타부 샤를 마리 뮈델 주교였다. 그는 자신의 대목구에서 자신을 도와줄 수도회를 찾고 있었다. ....뮈델 주교가 로마에서 포교성성 장관 안토니오 고티 추기경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추기경은 상트 오틸리엔의 주소를 주었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1909년 2월 20일, 뮈델 주교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노르베르도 베버 아빠스가 맺은 교육 사업 계약을 승인하였다. 이로써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회가 공식적으로 한국 진출을 하게 되었다. (1909년 12월 11일 백동 수도원 원장좌 자립 수도원 설립 인가)
백동(혜화동)에 자리 잡은 베네딕도회의 교육 사업은 출발 첫 순간부터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로 대단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 사업은 계속 진행되어 숭공 기술학교는 마침내 개교(1910년 9월) 되었고, 교내 목공소, 철공소 완공으로 고급이론과 실기의 균형을 맞추어 갔다. 이때 숭공기술학교의 수준은 일상 실용품에 이어 고급 승용차 부품 디자인까지 성공하여 서울 장안의 명성은 대단했다. 기술 학교에 이어 인문 계통의 숭신학교(1911년 9월 16일)의 개교도 강행하였다. 그러나 교육 사업에 대한 일본의 간섭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1913년 9월, 인문 계통의 숭신학교는 설립한지 2년만에 폐교 당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조선총독부의 포교규칙 발표(1915년 8월16일)는 교회의 활동을 더욱 위축 시키고 있었다. 1921년 7월, 숭신학교에 이어 숭공 학교도 폐교 당함으로써 백동(혜화동)에 자리 잡은 베네딕도회의 백동(혜화동)교육 사업은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서울대목구에서 원산대목구로 분리 설정되어 베네딕도회에 사목권이 위임(1920년 8월) 되었다. 베네딕도회의 사우어 아빠스는 원산대목구장으로 임명과 함께 주교로 서품(1921년 5월1일)되면서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도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베네딕도회는 1921년 5월, 원산 선교본부 설립으로 함경남북도 일대와 북간도 선교 사업이 시작되었다. 베네딕도회는 새로운 선교지 개척보다는 이미 서울대목구에서 개척한 본당들의 관리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본당 관리는 학교 사업과 함께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훗날 통계에 따르면 본당 수보다 학교 설립 숫자가 훨씬 많았다고 한다.
원산대목구장 주교 사우어 아빠스는 서울대목구로부터 인수 받은 삼원봉, 용정, 팔도구 본당 첫 사목 방문(1921년 8월 20일∽9월9일)을 실시하였다. 이 본당들은 한국교회가 이미 오래전부터 관리되고 있었다. 미래의 연길대목구장 데오도로 브레허 신부가 바로 이 시기에 북간도 선교를 위해 출발(1921년 9월 24일)하였다. 그로부터 7개월 후(1922년 3월 19일) 연길현과 의란현이 북만주대목구에서 원산대목구로 편입되었다. 이때 원산대목구의 영토는 한반도 전체보다 훨씬 넓었다.
원산대목구장 주교 사우어 아빠스는 북간도 본당들의 사제 파견을 시작하였다. 용정(갈리스토 히머신부,1921년 6월)과 팔도구(카니시오 귀겔켄신부,1921년 6월)에 이어 삼원동(빅도리노 차일라이스 신부, 1922년 10월17일), 연길 국자가(테오도로 브레허 신부, 1922년 12월 6일), 팔지(육도포)에 카니시오 귀겔켄신부(1923년 6월 14일)를 파견하였다.
카니시오 귀겔켄신부는 팔도구, 팔지에 이어 훈춘본당(1924년 6월 26일)에 초대신부로 부임하는 진 기록을 남겼다. 북간도 끝머리 부금 본당(초대 주임 마임라도 슈바인베르거 신부, 1924년 7월 14일)에도 신부가 파견되었다. 부금에 이어 가목사 본당(필립보 렌츠, 1926년 가을), 그곳에서 멀지 않은 돈화 본당(리보리오 모르겐슈바이스, 1926년 6월), 그리고 팔도구 성당 근처 대령동 본당(비오 엠멀링, 1926년 8월6일)이 설립되어 북간도 교회는 거대한 공동체로 급성장해 갔다.
북간도 본당들은 원산대목구에서 의란 자치구(1928년 7월3일)와 연길지목구(1928년 7월19일)로 분리 설정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연길지목구(지목구장-데오도로 브레허 신부)는 원산대목구의 관구안에 예속되면서 완전 자치구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연길지목구는 제도적으로 원산대목구에 사제 양성을 위탁해야만 했다. 이것이 원산대목구와 연길지목구의 특별한 관계였다. 이러한 인연은 훗날 연길의 많은 인재들이 한국천주교회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제2대 수원교구장을 역임한 김남수 안젤로 주교와 베네딕도회의 이동호 아빠스등이다.
새로 분리 설정된 연길지목구는 모원인 원산대목구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은 전혀 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은 계속되었다. 두도구 본당(초대 주임신부 코르비니아노, 1929년 10월4일)에 이어 합마당 본당(보니파시오 쾨슬러 신부, 1930년 8월), 그리고 백초구(왕청) 본당(보니파시오 쾨슬러 1930년)이 설립된 것이다.
연길지목구는 만주사변(1931년 9월18일)으로 전쟁의 광풍속에 휘말리게 된다. 전쟁 발발 7개월만에 만주국이 수립(1932년 3월1일)되면서 사회가 안정되는 듯 하였으나 혼란은 전보다 더 악화되어갔다. 왜냐하면 기득권을 쟁취한 일본과 이에 맞서는 무리들은 서로 연합하여 일본과 극렬하게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을 제외한 세력들은 일반적으로 마적들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적들이란 한국의 독립군, 만주국을 부정하는 중국군과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공산당들이었다. 이런 와중에 교회의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는데 용정본당 주임신부, 콘라도 라프의 피살 사건(1932년 6월2일)이었다. 그는 공소 방문을 마치고 본당에 돌아오면서 일본군의 불신 검문 중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살 당한 것이다. 교회는 경악했다. 본당 사목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사회 혼란은 한층 더 가중되어 갔다. 적과 아군의 구별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득권 세력인 일본에 대한 저항과 함께 교회도 점진적으로 지방 공산당의 공격 대상이 되어 갔기 때문이다.
연길지목구는 원산지목구로부터 분리 설정된지 6년만에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1934년 8월1일)되면서 초대 아빠스로 테오로 브레허 신부가 임명되었다. 교회는 새로 임명된 아빠스를 중심으로 사회 혼란을 뚫고 나가려고 했다. 특히 청소년 교육을 강화했다. 유행처럼 퍼져 나가는 새로운 이념, 볼세끼 사상(공산주의)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이 일은 용정본당에서 제2차 타르치시오 소년 연합대회(1934년8월6일)로 구체화되었다. 연길지목구의 이런 시도는 한국천주교회 사상 보기 드문 결실을 맺게 되었다. 가톨릭 소년 잡지(1936년4월1일)가 탄생되는 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원고는 용정에서 모아지고 편집.출판은 서울에서 진행(김해경) 되었다. 그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청소년 관련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였으며 발행된 잡지는 흑룡강성 부금과 가목사에서부터 시작되어 서울과 제주도까지 보급되었다. 이런 청소년 교육 열정에도 불구하고 볼세비끼 사상은 무서운 세력으로 성장하여 학서동 성모 경당(1934년 10월 17일)이 그 지역 공산당에 의해 파괴되고 대령동 본당 방화(1935년 2월23일)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길지목구는 성장을 지속해 가고 있었다. 신참본당 설립(1936년9월), 용정상시본당 설립(1936년9월)에 이어 목단강 본당 설립(1939년10월5일)과 삼도구 본당 설립(1940년9월), 도문성당 설립(1941년6월29일)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가톨릭 소년 잡지(1936년4월1일)가 출판되던 해, 연길지목구 첫 번째 방인사제, 김충무 클레멘스, 한윤승 필립보의 사제 서품이 있었다. 연길지목구(1928년 7월19일)는 분리 설정된지 9년년만에 대목구(1937년4월13일)로 승격과 함께 대목구장은 주교로 성성(1937년9월5일) 되었다. 그러나 방인사제 양성은 여전히 원산지목구 덕원신학교에 의탁해야만 하는 특별한 관계를 지속해 갔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1939년9월1일)이후 북간도는 급변해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 원산대목구는 일본의 교회 사목에 깊숙이 간섭함으로써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로 분리 설정(1940년1월12일)되는 일이 일어났다. 원산대목구의 주교좌 성당 설립를 불허하는 일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짙은 먹구름은 연길대목구 교육사업에도 큰 변화를 갖어 왔는데 일본은 전쟁 대비를 위해 연길의 모든 혜성학교를 국유화(1944년1월5일)해 버렸다. 뿐만아니라 1945년5월 일본군은 덕원 신학교를 징발하고, 연길에 주둔하고 있었던 관동군은 용정 성당을 징발 후 곧바로 연길수도원을 점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많이 기울러 가고 있었다. 주변 강대국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소련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연길을 쑥대밭으로 만든 후 뒤 늦게 일본에게 선전포고(1945년8월8일)를 하더니 곧바로 한국의 국경을 넘어 갔다. 이어서 소련은 연길을 장악(1945년8월17일)해버렸다.
연길대목구는 교구로 승격 후 심양대교구로 편입(1946년4월11일)되었다. 그런데 연길은 지방 공산당원들의 조직적인 봉기로 하루 아침에 공산화가 되더니 피바람을 몰고왔다. 연길수도원 폐쇄(1946년5월20일)와 함께 성직자 수도자 체포 및 투옥이 감행되었다. 신참본당 주임 신부 세르바시오 루드비히가 공산당에 의해 첫 번째 희생자(1946년5월25일)가 되었다. 뿐만아니라 선교사들은 대부분 남평수용소(1946년7월7일)에 투옥되고 만다. 교회는 강력히 정부에 항의 하였으며, 마침내 석방(1948년5월15일)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성직자 수도자들은 공산당의 감시와 구금되는 일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1947년7월28일∼11월초, 레지날도 에그너, 라이문도 아크먼, 허창덕 치릴로, 베트둘포 메츠, 베르트라모 알베르트, 아이키르도 시프치크, 우르슬라 사이, 박정숙 데레사--팔도구에서 구금). 연길 공산당의 감시와 구금이 지속되자 한국인 수녀들은 연길을 탈출(14명)하여 서울의 샬트로바오로회 수녀회 집결하게 된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연길의 선교사들에게 본국 귀국을 허가하여 데오도로 브레허 주교 아빠스등 제1진 외국선교사들이 본국 귀환(1949년12월12일)하게 된다. 그러나 연길 선교사들이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잔류 선교사들은 방인 사제들과 함께 일정 기간(완전철수-1952년10월13일)사목 활동을 계속해 갔다. 목숨을 건 선교 사업이 계속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반종교 선전활동을 전개(1951년 5월)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속에서도 선교의 열정은 여전했다. 연길을 떠난 수녀들은 전 연길수녀원장 니콜라 쾌술러 수녀를 중심으로 부산에서 새로운 출발(1953년)을 시작하였다.
연길을 떠나 본국 귀환했던 데오도로 브레허 주교 아빠스는 1년후 쌍트 오틸리엔에서 선종하게 된다. 데오도로 브레허 주교 아빠스의 뒤를 이어 왜관 베네딕도회에 머물고 있던 디모테오 비털리 몬시뇰이 연길교구 서리로 임명(1954년4월9일)된다
(기타 사항)
1-연길시 천주교회성당 봉헌식(1986년9월14일)
2-훈춘시 천주교회성당 봉헌식(1988년6월19일)
3-중국 공산당 최초로 연변지역 출신 방인사제 서품,엄태준 아브라함 (1989년 10월)
4-팔도구 성당 봉헌식(1992년7월29일)-오틸리엔 연합 후원
5-팔도구 성당신축 100주년, 팔도구 교우촌 건립90주년 기념행사
6-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 북방선교협의회 창립(총재 이동호플리치도 아빠스) 1994년9월28일
7-용정시 성당 봉헌식(1995년9월14일)-오틸리엔 연합 후원
8-선문진(차조구) 성당 봉헌식(1996년8월22일)
9-도문시 성당 봉헌식(1996년8월24일)-오틸리엔 연합 후원
10-연길시 천주교회에서 천주교 북간도 전래100주년 기념행사
11-팔도진 병원 축복식 )-오틸리엔 연합 후원으로 건축
12-목당강시 성당 봉헌식(1998년9월)
13-돈화시 성당 봉헌식(1999년9월)
순례 첫날
1-목단강 본당
역사의 주인공은 늘 우리들이다. 바로 내가 지금 이 순간 역사를 써 내려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학당을 기억하고 있다. 동학당 사건, 그것은 조선 시대, 1894(고종 31)년에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동학도와 농민들이 일으킨 농민 운동으로.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횡포와 착취에 농민들이 항거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한반도 주변 국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었다. 중국 대륙을 자극한 것이다. 의화단 난이 바로 그것 이다. 중국 청(淸)나라 말기, 중국 산동의 선사에서 정체가 분명치 않은 도사님들과 신도들이 한국의 동학당 사건을 모방하여 폭동을 일으킨 일이 바로 의화단 사건이었다. 그들의 명분은 적어도 외세를 몰아내는 일이었다. 천주교가 과연 외세였는가? 천주교 신자 역시 그들의 동족이며 이웃이었는데...., 아무튼 그들은 재래식 무기, 즉 긴 칼과 창, 그리고 햇불로 무장하더니, 성당으로 몰려갔다. 폭도들은 좋은 나라 재건이 아닌 그들만의 세상을 위해 살인과 방화를 시작한 것이다. 햇불은 삽시간에 성당을 집어 삼키었다. 맹렬한 화염속에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간혹 화마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신자들은 성당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던 폭도들의 칼과 창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였다. 이러한 일은 부활 대축일이후 성신강림 축일을 준비하는 시기로, 1900년 6월 어느날, 동북삼성, 선사(禪寺)에서 시작되었다. 결과는 대단했다. 동북 삼성의 모든 교회 공동체들은 이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페허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날이후 타다 말은 성당들은 시꺼먼 연기 자국을 남기면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갔다.
청의 중앙 정부는 의화단 폭동이 일어 난 초기, 무척 당황했다. 폭동 진압군을 서둘렀다. 폭동은 최초 동북 삼성에서 시작되었으나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전국은 대 혼란에 빠져 들어 갔다. 청의 중앙 정부 일부 관리들은 폭도들의 거센 파괴력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진압군 출병을 멈추고 한동안 관망 상태로 머물렀다. 이들에 의해 외세가 정말로 물러 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청의 관리들은 오히려 폭도들을 두둔하기에 이르렀다. 의화단 폭도들의 희생양이 된 천주교회 피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다. 천주교회는 청의 중앙 정부를 향해 거센 항의를 했다. 인적 물적 피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지적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부는 침묵과 방관으로 일관해 갔다. 급기야 서방국가들은 연합하여 의화단 난의 진압에 나섰다. 화력과 조직에서 월등히 앞서 서방 연합군은 폭도들을 단숨에 제압하였다. 의화단 사건은 청의 중앙 정부의 엄청난 배상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일로 중앙정부의 금고가 바닥나자 청은 급격히 쇠락하더니 급기야 중국 정부를 낳았다. 그날이후 동북 삼성의 천주교회는 폐허속에 목자도, 양들도 보이지 않는 황무지로 변해 갔다. 동북 삼성의 성당들은 대부분 외부의 세계와 인연이 완전히 끊겨 잡초만 무성히 자라나고 있었다.
베네딕도회 소속 데오도로 브레허 신부가 북간도 선교를 위해 답사(1921년 9월 24일)를 시작한지 7개월 후(1922년 3월 19일) 연길현과 의란현이 북만주대목구에서 원산대목구로 편입되었다. 의화단 사건이후 무려 20년간 이 지역이 교회 사목으로부터 방치된 셈이다. 물론 판공을 빌미로 하여 간간히 사목자들의 방문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북부 지역 신자들은 저마다 살아 갈 길을 찾아 교회를 떠나 버린 상태였다. 혹 남아 있더라도 냉담한지 오래 되었다.
영고탑(黒龍江省 牧丹江市 寧安縣)은 1913년경 대형 화재로 도시의 소멸 위기를 맞는다. 인구 만명의 거대 도시, 모피 거래의 중심지이며 울창한 원시림속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대단히 주목을 받고 있는 도시 중에 하나였다. 영고탑 대형 화재 원인은 불분명했다. 소문만 풍성할 뿐이다. 소문중에 특별한 내용도 있었다. 청나라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세력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방화되었다는 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의 주인공 역시 누구인지 불분명하였다. 그 지역의 자리를 잡고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수 민족인지 아니면 신흥 세력으로 등장하는 이들인지 알 수 없었다. 그곳에 정착하기 시작한 일본인들도 많은 의심 받고 있었다. 아무튼 시 전체가 대형 화제로 도시 기능을 잃어 버리자, 목자없이 건물 존재로 명맥을 유지하던 영고탑 교회 공동체는 성당들과 부속 건물 마져 멸실되자 또 한 번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베네딕도회 소속 데오도로 브레허 신부는 최초 영고탑 답사(1921년∼1922년 겨울) 중 도시의 대형 화재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었다.
8년 전(1913년)만해도 이곳에는 벽돌로 지은 성당과 학교, 신자들을 위한 큰 집회장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도시2/3가 화염에 휩싸여 재로 변했고 감실조차 지킬 수 없었다. 성당의 담이 무너져 막힌 길조차 치우지 못했다. ....신자들은 본당 건축 공사를 할 때 가진 것을 다 내 주었고 남은 재산은 화재로 다 잃었다. 공동체는 갑자기 와해되었다. 내가 이곳에 왔을 때문 열심한 신자가 50명 뿐 이었다. ....[분도 통사968쪽]
재만 남은 장소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없었다. 영고탑은 의화단 사건이 일어 난지 30년 세월이 훌쩍 지나 갔으며, 북만주 대목구에서 원산대목구 관구 아래 연길지목구로 변경되는 우여 곡절이 있었지만, 사목자의 파견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세월은 많은 것을 변화 시켜 놓았다. 교회뿐만아니라 사회 역시 대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세계 공산당 창설(고민테론-1919년) 이후 중국 공산당(1921년)은 북간도 공산화를 위해 사회 곳곳에서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사변에 이어 만주국이 수립(1932년 3월1일)은 중국공산당으로 하여금 사회 혼란을 한층 더 강화시키는 명분을 제공한 셈이었다. 교회 공동체는 일본에 이어 공산당으로부터 제거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범 지역으로 주목 받고 있던 곳은 두만강 주변 본당들이었다. 소련국경 인근 여덟개 호수 지역의 육도포 본당을 맡고 있던 호노리오 신부는 공소 방문을 포기하고 본당 내 은밀한 곳에 숨어 지내야만 했다. 때로는 밭에서 잠을 잤다. 1932년 8월 12일, 마적(지방 공산당 조직)이 습격하자 열린 창문으로 도망쳐 생명을 목숨을 부지하기도 했다. 호노리오 신부는 두 시간 떨어진 두만강 저편 한국의 국경도시 경흥으로 피난했다. 연길지목구장 데오도로 브레허 신부는 이 소식을 듣고 이번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선교사가 본당에 곧바로 복귀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호노리오 신부는 지속적으로 생명의 위험을 안고 살았던 본당 신자들 가까이에 머물렀다. “전 지역이 엄청난 공포에 사로 잡혔다. 주민 대부분은 밤을 지샜다. 많은 사람들이 자포상태에 빠졌고, 거의 미쳤다”. 호노리오 신부는 잠시 피난 온 경흥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었다.
...위험천만한 상황 때문에 피난 온 것이지만, 나는 한국이 더 좋았다. 이곳은 한국에서도 경치가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이 지역 해변의 가파른 암벽은 바다를 향해 절벽을 이루고, 파도는 주위를 적신다. 바위에 부딪혀 높이솟아 올라 거품을 뿜어내던 파도는 떨어지면서 맑은 바닷바람에 반짝이는 무지개 빛깔을 입힌다. 이곳은 청진, 나진, 웅기등 활기찬 항구 도시가 비탈진 언덕을 올라가며 마을을 이루어 검푸른 물결속에 자기 모습을 비추고 있는 한국의 마을이다. 나에게 이곳은 그리스도교의 빛이 전파되어야 했던 신대륙보다 더 사랑스럽다. 게다가 이곳은 적지 않은 신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신앙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집과 농토를 버리고 만주에서 한국으로 도망쳤다.....
...북간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횡포는 한반도보다 20년은 앞서갔나 보다.... 자유와 굶주림에 못이겨 두만강을 넘었던 한국인들이 공산당들의 횡포에 시달리다 한국으로 되 돌아 오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연길지목구장 데오도로 브레허 신부는 결단을 내렸다. 육도포의 본당 신부, 호노리오를 영고탑으로 불러 드린 것이다. 현지의 교회 상황을 상세하게 탐문하고 오라는 지시였다. 사목자가 영고탑을 떠나 간지 30년을 훌쩍 넘긴 시기에 교회가 다시 공식적으로 선교사를 파견한 것이다. 호노리오 신부는 지목구장의 명을 받고 그곳에 도착해 보니 지목구장의 말과 주변 환경은 사뭇 달랐다. 성당도, 신자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호노리오 신부는 성당을 본당 설립에 적당한 곳을 발견하여 중개업자를 통해 그곳의 토지를 교회 명의로 관청에 등재하게 했다. 명의 변경에는 몇일이 걸려야만 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두 시간 거리의 목단강으로 갔다. 그곳은 신흥 도시로 개발 중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오고 갔다. 그 많은 사람들중에 신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아무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루 온종일의 탐문은 그를 많이 지치게 했다. 저녁 무렵 한국인 거주지의 식당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누군가 ‘센푸, 찬미예수님’ 하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용정 출신, 한국인 아가씨, 안나였다. 호노리오 신부는 그녀로부터 신자들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안나는 신자들의 소식을 이렇게 들려 주었다.
...25명 내지 30명의 신심깊은 한국의 옹기장이들이 이 도시(목단강)에 반쯤 허물어진 중국인 움막에 자리를 잡고 옹기가마를 설치했다. ...안나는 그들에게 선교사를 안내하였다. 신자들은 깜짝 놀랐고 기뻐하였다. ,,,고해성사 그리고 신흥 도시로 변해가는 그곳의 변두리 움막에서 선교사(호노리오 신부)는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했다. ...신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며,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선교사를 보내 주시도록 기도할 것을 권하였다. ...탐사 소임을 다한 그는 연길로 돌아왔다. 이틀 후 그는 목단강 주임신부 자격으로 그곳으로 되돌라 갔다.
목단강 주임 호노리오 신부는 한국인 공동체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는 중국말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을 정하는 것은 선교사가 아니다. 목단강 기차역에서 내린 호노리오 신부는 한국인 공동체를 가기 위해 마차를 잡았다. 그런데 그를 한국인 공동체로 태워다 준 마부는 중국인 신자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한중공동체가 혼합된 목단강 본당이 탄생되었다. 설립 3개월 만에 한국인 200명, 중국인 50명의 완벽한 본당의 탄생이었다. 성당과 사제관, 학교, 지원 숙소등 모두 완벽한 건축 자재가 사용된 시설물이었다. 목단강 본당은 부근 본당들의 모원 역할을 담당하여 목단강 시내 중국인 공동체 분가와 함께 신흥 도시로 부상되는 신참 본당도 분가 시켰다. 목단강 주임 호노리오 신부는 목단강 본당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마침내 성당탑에 십자가가 설치되어 십지가가 도시를 환하게 밝힐 날이 찾아 왔다. 10월 말로 향해 가던 화창한 날이었다. 성당위로 만주의 쪽빛 하늘이 펼쳐졌고, 가을 태양은 강렬한 빛을 내 뿜었다. 본당신부는 좁은 탑 꼭대기로 올라가 십자가를 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숭고한 순간이었다. 꼭대기에서 밝은 태양이 빛났고, 크고 넓은 도시위로 빛을 뿜어냈다. 이 높은 곳에서 저 아래 사방으로 퍼져있는 이교도의 어두운 밤 속으로 태양 빛을 보내야만 했다. 이 태양빛이 도시와 도시 주변만 비추어서는 안 된다. 이 태양빛은 목단강 전 지역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따사로운 태양빛은 이 성당 탑꼭대기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 저 멀리 국경지역 까지 다다라야 한다. 그러면 따사로움 아래 신앙의 씨앗이 꽃을 피우게 되어 모든 지역이 하느님 정원으로 변모할 것이다......
목단강 본당은 새롭게 부상한 신흥 국제 도시였다. 한중일 모든 신자들이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일이 모습이 이채롭다.
...남성 신자들중에 훈장이 달린 제복의 일본 장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군도를 자기 앞에 내려 두었다. 장교 옆에는 국방색 전투복 차림의 일본 병사 몇 명이 있었는데 이들도 무기를 자기 앞에 내려두었다. 기모노 차림으로, 일부는 하오리를 입고 경건하게 무릎을 꿇은채 바닥에 앉아 있는 일본인 신자도 있었다. 이 들과 조금 떨어져 중국인 신자들이 앉아 있었다. 변발한 머리에서 빛이 났다. 이들 중 부유한 인사들은 몸에 꼭 맞는 긴 중국 겉옷을 걸치고 있는 반면, 가난한 신자들은 저고리와 바지 차림이었다. 한국인 신자석은 일본인과 중국인 앞에 있다. 한국인 신자들은 대부분 흰색 두루마기 차림이며, 양반 몇 명은 두루마기가 없으면 서양식 의복을 입는다.
신자 대다수가 한국인이므로 교중미사는 한국어로 봉헌했다. 그러나 일본인과 중국인 신자들도 주일의무를 지키려 미사에 참례했다. 이들은 미사 전후로 공동기도를 바쳤다. 미사 강론은 한국어 외에도 일본어, 중국어를 번갈아 가며 했다. ....이러한 목단강 성당들은 1945년 대 참사(소련군 진입과 공산당 봉기)로 끝나고 말았다.
순례 첫날
2-돈화 본당
북간도는 교통 수단의 영향을 많이 받아 기차 노선에 따라 본당들이 설립되어 갔다. 그리고 본당과 본당간의 거리는 반경 50Km 내지 100Km가 보통이다. 그러니 오늘날 한국의 교구 정도 되는 셈이다. 때로는 200Km 이상 되는 곳도 있다. 오늘날에도 비슷하다. 추수할 곳은 많은데 일꾼이 없다....!
베네딕도회 선교사, 데오도로 브레허 신부는 1923년 3월 처음으로 돈화를 방문하여 한국인 본당 설립을 목적으로 나흘간 머물렀다. 그런데 그때 한 노인(중국인)이 그에게 말했다.
...저희는 어머니가 먹을 것을 줄 수 없는 아이처럼 가련합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다시 이교도들 세상속에 있습니다. 신앙의 가르침 안으로 깊이 빠져 들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신부님이 없기 때문에 이교도 세계에 다시 쉽게 빠져 버렸습니다......(분도통사 957쪽)
돈화 본당은 1900년경 부유한 중국 신자의 통큰 봉헌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1914년 세계제1차 전쟁 발발로 선교사의 생명의 위협을 느낀 길림교구 주교(파리외방전교회 소속)는 오지에 파견 신부(프랑스 신부)를 교구로 불러 드렸다. 이때부터 돈화 본당은 공소로 전락하면서 신자공동체 역시 급속히 와해되어 갔다. 교구는 본당 관리자를 선정하여 재산권 일체를 위임하였으나 사후 관리는 전무했다. 교구와 본당 간 교류가 단절되자 문제가 생겨났다. 관리자가 본당을 사유화한 사건이다. 돈화 본당은 성당과 사제관, 그리고 부속학교 건물이 있었다. 본당 관리자는 일차적으로 사유권을 주장하면서 본당 신자들의 출입을 금지 시켰다. 사회가 안정되자 길림교구는 돈화 본당 주임신부를 다시 파견하였으나, 관리자는 새로 임명된 주임 신부마저 완강히 거부하면서 문제는 심각해저 갔다. 1922년 8월 15일, 마적들의 습격으로 도시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성당과 부속 건물은 안전했다. 마적들은 제의를 입고 돈화시를 활보하는 일이 벌어졌다. 마적들은 교회의 설득으로 제의를 돌려주었다. 미사 도구는 안전했다. 늘 마적들의 표적이 되었던 교회는 비밀 장소를 만들어 보관한 덕분이었다.
돈화 본당은 베네딕도 선교사들에 의해 복구되어 갔다. 외교적인 노력으로 교회 문서를 재구성한 것이다. 남은 숙제는 와해된 신자 공동체 부활이었다. 1923년, 테오도로 브레허 신부는 학교를 개교하고 전교 회장을 채용하였다. 이어서 본당 관리인도 채용하였다. 전교회장은 1923년과 24년에 각각 20명의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본당 관리인은 주임신부가 부재중인 틈을 이용하여 지난번 관리인처럼 문제를 일으켰다. 자신 주머니 채우는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1926년, 리보리오 모르겐슈바이스는 사제 서품 받은 지 11개월 만에 돈화 본당을 맡았다(주교관내 거주하면서 겸직). 본당 내 두 교사들이 그의 사목을 도왔다. 그들과 함께 흐트러진 신자들을 찾아 가는 모습을 살펴보자. 돈화에서35리 떨어진 곳에 신자가 이사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가는 모습이다.
...길도 없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숲 속에서 몇 시간 헤매자 작은 농가가 있는 빈터가 나타났다. “파이프 담배로 달래 온 굶주림도 이제는 못 버티겠다. 리보리오 신부와 동행인은 열한시간 동안 걸었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주민들이 옥수수 알갱이들을 물에 넣어 소금과 양념 없이 푹 끓인 것을 방문자에게 나누어 주고 신자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마침내 칠흑 같은 숲에서 움막 하나가 나타나고 이 움막에 신자 네 명을 포함해 열여섯 명이 살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세시경 “원시림에서 최초의 미사”가 봉헌되었다. 리보리오 모르겐슈바이스 신부는 힘겨운 여정으로 신자 70명을 숲에서 찾았다. 1931년 만주사변은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렸다.
... 수 많은 중국인이 옛 고향 중국 본토로 다시 돌아가 보호받으며 살고자 했다. 다른 이들은 도시나 안전한 취락지로 이주했다. 도시 밖에 살던 한국인들도 대부분 남쪽(남쪽-장춘 또는 심양 방향, 북쪽-도문, 훈춘등 한국 국경 부분)으로 돌아갔고, 도시에 남은 신자들은 60명 뿐이었다.
돈화는 만주국의 수도, 장춘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일본군은 장춘 시내 외곽에 중요 군사시설을 설치해 갔다. 돈화는 비행장이 들어섰다. 돈화가 일본의 신흥 군사 도시로 급부상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들었다. 신흥도시, 돈화는 전과 전혀 다른 구성원들로 채워져 갔다. 늘 깊은 산중에서 농사를 고집하던 한국인들의 생활도 점차 안정되어 갔다. 도시 성장에 따라 신자 수도 급속히 늘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성장은 결코 저절로 되는 것도,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다. 현지 봉사자의 적극적인 참여, 바로 그것이었다.
돈화의 두 번째 본당 신부(1936년 10월)는 라이문도 아커만이었다. 그는 교사이며 청년회장인 장토마스와 동정녀 추마리아의 헌신적인 봉사로 돈화의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사실 라이문도 아커만 신부는 의란 지역(부금,1923년-흑룡강성)에서 사목했던 관계로 한국말을 전혀 몰랐다. 추 마리아 동정녀는 한국말에 능숙한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본당 신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성당은 신자들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본당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성당과 부속 건물이 오랜 시간 속에 낡고 허물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지어야 하는지 아니면 대대적인 보수해야 하는지 걱정스러웠다. 데오도로 주교는 보수를 택하였다. 모원인 원산대목구의 수사님들의 솜씨를 믿기 때문이다. 과연 수사님들의 건축 실력은 대단했다. 아주 적은 돈으로 돈화 본당은 새롭게 재구성 되어갔다. 뿐만아니라 본당내 밴드부를 만들어 함께 즐기면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제 모든 것이 새로워 졌다. 건물뿐만 아니라 구성원들도 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데오도로 주교는 1937년 10월 24일에 거행된 축복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성당을 보수하는 경비는 절감했다. 성당을 수리하지 않았다면 아예 새러 지어야만 했다 견진성사와 축복식은 굉장한 잔치였다. 나 보다 더 기뻐한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처움부터 돈화 선교에 지독했던 가시밭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견진자들은 아주 훌륭히 준비하여, 교리 문답 암송할 때 중국식 발음이 전혀 나지 않았다. 견진자들은 놀랄 정도로 훌륭하게 대답하여 나는 대단히 흡족했다. 성당은 꽉 찼다. 수사들의 연주, 성가, 강론, 신자들의 기쁨이 본당 위로 넘쳤 흘렀다. 견진성사와 학교 축복식에 이어 일본 영사, 군인, 관료들과의 피할 수 없는 식사가 있었다. 이런 모든 일은 신앙적, 선교적 교회의 사회적 부활을 축하하는 행사였고, 교회가 민족안에 뿌리 내릴 것을 약속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문살에 창호지를 붙혀 팽팽하게 한 성당 창문으로 몰려 든 만주 전통 의상을 입은 구경꾼들의 모습이 작은 사진에 보인다. 축하 미사를 드리는 동안 신자들은 폭죽을 터뜨렸다. 폭죽소리가 얼만 요란한지, 성찬 전례 중 성혈을 흘릴 뻔했다. .... 수 백명의 한국인 신자도 한국인 성당을 원하고 있다. ....임시로 만주 어린이와 한국인 어린이는 새로 축성된 학교에 함께 등교한다. 물론 수업은 나누어 진행한다. 그러나 한쪽이 상대방의 장소를 빼앗은 격이 되었고 본당 신부는 교실하나를 사제관으로 사용한다. 교실은 얇은 벽 하나로 분리된다. 한 교실에서 큰 소리로 수업하면 다른 교실에서 더 크게 소리 지른다. 이런 고함소리를 본당신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듣는다. 본당신부에게도 안정을 취할 사제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두 가지 언어로 수업과 강론을 준비할 수 있다.....
성당 보수는 임시 처방이었다. 한중 두 공동체는 각각의 독립된 성당을 원하였지만 그 일은 쉽지 않았다. 재 보수된 성당 건물 일부가 또다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자 서둘러 새 성전 건립을 시작한 것이다. 세계 제2차 대전으로 독일로부터 송금이 차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당 신축은 계속되었다. 개인적으로 미국의 신자들과 친분이 있는 수사님 덕분이었다. 돈화 본당 신축 중에 아주 특별한 사항은 성당 가까이에 있는 일본 경찰 서장의 적극적인 행정 지원이었다. 뿐만아니라 그는 가끔 성당 신축 현장에 나타나 감독 역할까지 해 냈다. 성당 신축금, 그리고 적극적인 행정적인 지원이 합쳐지자 돈화 본당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재건축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내부 시설도 예술적 가치와 전례적 품격을 동시에 갖추어 나갔다. 획기적인 일은 제대가 신자들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건축을 설계한 알뷔노 슈미트 신부는 후에 한국에서 전개한 건축 개념을 이때 발견한 것이다. 1942년10월 성당 봉헌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돈화 본당 성전 봉헌식은 연길 지목구가 치른 행사로 마지막이 되었다. 봉헌식 이후 성당의 마무리 공사는 계속 되었다. 너무 서두른 탓으로 부실 공사를 초래했다. 성당은 습기로 여러 군데 손상되기 시작했다. 그곳을 고치려 해도 자재(페인트)가 없었다. 경찰서장이 전근 가는 바람에 도움 받을 곳도 없었다. 주일마다 한중 두 공동체를 돌보는 일은 주임신부, 라이문도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한국인들이 자기들의 거주 지역에서 본당까지 오려면 한 시간 이상 걸렸다. 한국인들은 분가를 간절히 원했다. 유 라파엘 회장과 동생 가브리엘이 사제관으로 사용될 집과 인근 부지를 희사했다. 라소 페추 수사와 아밀라리오 굼프 수사가 신속하게 집을 수리하여 보좌 신부를 맞이하였지만 길림의 일본 당국이 허가를 해 주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한 지붕 아래 두 신부가 한중 신자를 분담하여 본당을 운영해 갔다. 두 공동체는 특별한 다툼없이 서로 양보하며 잘 지내고 있었다. 심지어 학생들끼리 다투어도 이들은 태연하게 받아드렸다.
순례 둘째날
1.-두도구
두도구 본당의 제1대 주임은 코르비아노 슈래플 신부였다. 그는 1927년 4월 사제서품을 받고 동아시아로 건너가, 말라리아에 걸려 삼개월 동안 덕원에 있었다. 그후 1928년 10월 새로 설립된 연길로 파견되었다. 스믈여덜 살의 코르비아노 슈래플 신부는 신자들의 성대한 영접을 받으며 우마차를 타고 두도구에 부임했다. 그가 새로 시작해야 할 땅은 선교회에 속한 땅이 아니라 시에서 빌린 땅이었고 그가 들어간 집은 일주일 전만 해도 이교도 가족이 살았던 집이었다. 입주 첫 소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집은 이곳 형편으로 보자면 깨끗한 한옥이지만 유럽 기준에서 보면 초라한 오두막에 불과하다. 목조로 보강된 얇은 흑벽위에 초가 지붕이 놓여있다. 초가 지붕은 장마가 지나면 새로 지붕을 이어야 한다. 집에는 방이 세 칸 있는데 하나는 복사(전교회장과 봉사자)와 그의 가족, 조금 큰 방은 경당으로 사용한다. 방마다 벽에는 신문지를 붙혀 놓았고, 제대 옆과 벽면에는 흰 종이로 도배했다. 벽과 마찬가지로 흙바닥에도 신문지를 깔아 놓았다. 창살에 창호지를 바른 문을 통해 희미한 빛이 들어온다. 손가락 크기만한 구멍으로 수주 동안 만주의 칼바람이 소리를 내며 들어오기도 했다. 방이 너무 낮아서 성찬 전례때 성체가 종이 천장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등유통 두 개위에 제대개 차려지고, 십자가 하나와 촛불 두 개로 제대를 꾸민다. 제대옆 작은 나무 가방에 성물과 제의를 보관한다...
본당에는 공소 15곳이 속해 있었다.... 수년전부터 사제는 일 년에 두차례 하루나 이틀간 공소를 방문했다. ...“시간이 부족하여 교리를 깊게 할 수 없었다.” 새 신부는 걱정스럽게 자문해 본다. “나 중에 정말 나아질까?” 르비아노 슈래플 신부는 전교회장에게 줄 돈을 조달하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위로한다. “미래에는 분명 은총이 충만하게 넘처흐를 것이다.” 르비아노 슈래플 신부는 2년간 두도구에 머물렀다.
두도구 본당의 제2대 주임은 암브로시오 하프너 신부(1931년)였다. 그는 1932년 혼란기(만주사변)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다. “중국 의용군, 혈맹당원과 볼세비키자들이 만주국 건국이래 공동으로 일본에 저항했다.” 접경도시 회령과 나남에 군대가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마을이 습격당했다. ...외딴 곳에서 홀로 살던 신자들은 ...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초라한 오두막집에 사는 사람은 늘 두려움에 떨었다.
...시골에 살던 신자 두명이 8월27일 마적에게 납치되어 몸값 500엔을 주고 풀려났다. 탈주하려 했지만 한 사람이 귀머거리여서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은 마적에게 발각되어 대들보에 매달렸다. 마적들은 이들의 옷을 찢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때렸다. 여러 마을의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몸값을 모았다.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신자들은 한 달간 잡혀 있으면서 느낀 하느님과의 일체감을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료 수사들도 외딴 시골에 오기를 꺼려서 두도구 본당 주임신부, 암브로시오는 외롭게 생활했다. 그 와중에도 열심히 사목한 결과, 신자 수는 늘어났다. 1934년 용기 내어 성체 성혈 대축일에 시가 행렬을 감행했다. 전 신자들이 참여한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본당 발전은 초기 단계를 넘어섰고, 큰 성당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재정은 바닥 상태....,
...두도구 본당 주임신부, 암브로시오는 보다 많은 사회 활동의 필요성을 느껴, ...양로원으로 사용할 집을 구입하고, 1936년 서품을 받은 한윤승 필립보 신부의 부친에게 책임을 맡겼다.
현재 이곳에는 70세 노인 세분이 거주한다. 노인들은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다. 고아들도 큰 위험에 방치되어 있다. 술도가에서 고아들을 데려다가 술을 만드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불쌍한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이 선교회의 최우선 과제일지 모른다.
데오도로 브레허 아빠스는 1936년 긴급을 요하는 두도구 새 성당 공사를 감행했다. 1층에는 6학급과 교무실, 2층 중앙에는 빈민학교, 서쪽에는 성당으로 건축 계획을 세웠다.
1940년 9월, 4대 두도구 본당 주임으로, 군대로 하이글 신부가 왔을 때, 두도구 학교의 학생수는 200명을 상회하는 정도였고, 교사 6명이 있었다. 빈민학교에는 나이가 많아 소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여학생이 40명 있었다. 그런데 2층의 성당은 여전히 미완성 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며, 사제관은 이 지역에서 가장 작고 초라했다. 사제관은 집무실, 옷장과 침대뿐인 침실, 그리고 헛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이유로 새로 부임한 4대 두도구 본당 주임, 군대로 하이글 신부는 많이 불평해. .
4대 두도구 본당 주임, 군대로 하이글 신부는 1939년, 연길에서 서품을 받았고, 1940년 장티프스에 걸려 자주 요양해야만 했다. 그는 우선 말을 배워야 했다. 그는 혼자 읽고 쓸 수 있을 때까지 김이기의 조카인 노아가다 자매의 도움일 받아 강론을 준비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김이기의 운명에 관한 흥미로운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는 성탄절에 또 다시 장티프스가 재발되어 2년간 고통속에서 지냈다. 그는 2년 후 좀더 사목이 편한 돈화 본당으로 갔다.
2.-용정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연길에서 오다보면 용정시 외곽에 있는 주택 단지 바로 앞 왼쪽에 인상적인 복합 건물이 있다. 넓은 정원 뒤 붉은 벽돌담 위로 성당 건물이 솟아 있고, 종탑은 멀리 서도 잘 보였다. 곰꼼하게 손본 종탑은 정성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건물 중앙에 큰 기둥 장식이 있는 성당 옆에는 튼튼하게 지은 큰집이 있었다. 거기에는 수녀 세명과 노인 몇몇이 거주하고 있었다. 격자문 바로 뒤가 바로 사제관이다.
❑이 지역은 아직도 ‘용우물. (龍井)이라는 지명을 쓰고 있다. 1932년, 지역 모습 묘사(김 바오로)
용정은 연길 지목구에 속해 있고 성도(省都)는 아니지만 이 지역에서 가장큰 도시이다. 혜란강 변의 울창한 산림지역인 이곳에는 40년전((1890년)부터 한국인과 중국인 농부, 상인들이 이주하여 정착했다. 이주민 수는 급격히 증가했고 숲이 사라졌고 수많은 마을이 생겨났다. 대부분의 사람이 물결 모양의 들판과 구릉지, 바위가 많은 산마루에 이르기까지 경작지를 일구어 농업에 종사한다. 토양은 비옥하다. 현재(1932년) 이곳에는 한국인 20,000명, 중국인 4,000∼5,000명, 일본인 1,000명이 거주한다. 일본인들은 이주 한국인을 뒤따라왔고 자신들의 안전과 한국인들의 안전을 빌미로 영사관을 세웠다. 중국 당국에 문의하지도 않고 강력한 경찰력을 이곳에 투입했다. 최대 규모의 일본 영사관이 용정에 있다. 일본인들은 용정을 이지방의 중심지로 생각하기 때문에 갖은 방법으로 이 도시를 지원하고 있다. 용정에는 은행, 우체국, 전화와 전신, 전기, 중등학교를 포함한 수 많은 학교가 있다. 한국상점, 일본상점, 중국상점에는 생활용품들이 구비되어 있다. 사람들은 양복을 살 수 있고 이발도 할 수 있다....
❑1929년 성당 노후화 심각하여 다시 지어야만 했다.
종일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성당 지붕의 작은 기와 사이에서 물길을 냈다. 이 물길은 계속 무릴을 빨아드리는 종이 천장을 향해 있었다. 어느날 아침 종이 천장 삼분의 일이 찢어진 체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더러운 빗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빗물은 천장이 찢어질 때 마룻바닥 위로 떨어진 시꺼먼 흙과 뒤섞여 죽같이 되어 바렸다. 온통 쓰레기 장으로 변했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종이 천장을 걷어내고 자비의 주님께 비를 그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더, 가을이 되어 새 종이 천장을 만들어 풀로 붙였다. 이번 여름에 천장을 수리하려고 한다.
❑만주 사변(滿洲事變) 혹은 9·18 사변은 일본 제국이 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을 조작해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을 말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1918년) 이후, 일본이 지원하는 중국의 군벌 봉천파(장쭤린)는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 밀리기 시작하여 일본 본국 정부는 장쭤린에게 퇴각을 권고했고, 만주에서 그를 보호하려 하였다.(1927년) 일본 정부의 시각에 반발해, 관동군의 일부 참모들이 모의하여 장쭤린을 암살(1928년)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관동군과 봉천파의 협조는 종결되고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국민당 정부에 합류(1929년)하였다. 국민당 정부는 반일 공세를 전개하였고, 세계 경제 대공황(1929년)과 겹쳐 만주에서 일본의 이권이 타격을 받았다. 일본이 이러한 위기를 타파하고자 만주 전체를 침략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만보산 사건(1931년 7월) 등이 터져 나와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이때, 관동군은 다시 한번 계략을 꾸며 자작극인 류타오후 사건(1931년 9월)을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은 1932년 1월까지 만주 전역을 점령, 3월에는 괴뢰정권으로서 만주국을 성립시켰다.[1] 이러한 일은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국제 연맹은 1933년 2월 리튼 보고서를 채택하여 일본의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1] 만주 사변은 1945년까지 계속된 중국과의 15년 전쟁의 시작이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서막을 이루는 것이었다.[1]
1993년-성당 축성
3.-연길
만주 땅, 그곳을 우리는 간도(서간도, 북간도) 이라고 부른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부족 생활을 하던 청은 1644년 명을 멸망 시켰다. 조선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만 조선이 매년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청은 조선과의 협약으로 서간도 지역을 봉금지역(封禁 폭50Km-길이500Km)으로 만들었다. 이 곳에 들어오면 죽음이었다. 마을과 도시도 모두 폐허로 만들었다. 그러나 연2회 동지사 오가 던 길, 그리고 장사꾼의 무역 거래는 예외였다. 유일한 한중 교역 통로였던 것이다. 19세기 서앙 선교사들도 이 길을 택하였다. 이런 땅이 1715년 이래 조선 동북쪽에도 생겨 났다. 1890년 이후 조선의 많은 이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1907년 연길의 관청도 이를 장려하였다. 1909년 중국이 비무장 지대(간도)에 군대를 주둔 시킬 때까지 간도 지역의 국적 문제가 논란 되었다.
미래의 연길 대주교, 데오도로 신부의 선교 답사 메모장
미래의 연길 대주교, 데오도로 신부가 연길 답사 과정에서 깨닭은 한 가지는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고, 그 뜻에 조건없이 순명했다. ‘하느님의 누룩’을 분배하고 그 누룩이 어디서 발효 해야할 찌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었다.
1921년 5월 27일, 길림의 오퀴스트 가스패 주교 서품식에 뮈델주교는 주례, 원산지목구 보나파시오 주교, 대구의 드망 주교는 공동 집전하였다, 교황청은 연길과 의란을 북만주로부터 원산 대목구로 위임하여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자연 재해는 대단했다. 특히 가뭄으로 세상은 몽땅 타 들어갔다. 평근 45도, 그늘에서도 40도가 넘어 갔다. 시청에서 8월5일 기우제를 지낼 정도였다. 농산물 흉작으로 850세대 떠나다. 수천세대 식량 부족에 허덕이었다. 영세자750에서 600으로 줄었다.
연길에서 30km 외딴 곳 팔도구는 최문식 베드로 신부가 서울로 돌아간 후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에 의해 빠르게 부활하고 있었다. 800호, 4,000명 주거하고 있었으며, 해성학교 학생수도 200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광장에는 중국공안소가 둘이 있었고, 일본경찰서, 중국군부대...., 중국전화국, 우체국등이 있는 소도시로 발전해 갔다.... 용정에서 7시간, 연길에서 6시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최문식 신부 시절 본당 사목회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미래의 연길 대주교, 테오도로 브레허 신부는 팔도구 방문후 한 겨울, 두만강 끝머리 훈춘 답사를 시작했다.
❑훈춘 성당은 너무 초라했다. 추운 겨울의 사제관은 방바닥 틈새로 연기 나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환기를 위해 방문을 몽땅 열었더니 따끈따끈한 온돌이 얼음으로 변해 버렸다. 지독한 강추위였다. 어쩌나.... 선교사 신부는 난로도 돈이 없어 구입 못하고 털외투로 한동안 강추위 이겨 나가야만 했다.
훈춘에서 연길로 가는 길은 늘 강물이 넘첬다. 누구든 그곳을 가려면 한국과 중국을 두 번 이상 왔다 갔다 해야만 했다. 교통마저 불편한 훈춘 본당 개척은 통나무 27개로부터 시작되었다, 통나무는 어느새 창문, 문, 바닥, 가구등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1924년 9월 1일, 육도포와 태평촌 사람들은 자기들 힘으로 사제관과 성당, 외양간을 꾸며가고 있었다. 이와 같이 두만강 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본당, 루치오 신부 편지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선교 잡지에 아래와 같은 글로 소개되고 있었다.
......바람이 심하다. 바람은 두꺼운 옷을 뚫고 들어 온다. 바람부는 날 아침 방안의 온도가 영하15도 그럼에도 건강은 양호하다. 실외에서는 몸을 잘 감싸고 있어야 한다. 얼굴과 귀를 털모자로 완전히 감싸지 않으면 불에 덴 것처럼 화끈 거린다. 성당은 영하20도, 성혈로 축성하기 전 물과 포도주는 얼어버려 녹혀야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선교활동의 고난이자 기쁨이었다......
❑인수인계
*1922년 9월25일 팔도구 학교에서 사용할 교과서를 구하려 연길에 왔다. 북만주 대목구의 건물과 토지가 베네딕도 선교회에 위탁 접수되다
*1922년12월6일 데오도로 브레허 신부는 짐을 옮기었다. 행정구역은 쉬엔, 현(縣), 현청과 법원, 교육청, 군대와 경찰서.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이 중요 선교 활동 지역-4개현이 간도-가운데 섬, 일본도 붙인 이름, 4개현에 일본은 영사관 설치, 20Km 떨어진 용정에는 총영사관, 은행, 일본 병원, 영국 병원, 간도에서 가장 큰 용정은 주민 2만5천명 정도였다.
*1922년12월 6일 이사(데오도로 브레허) 14년전(1908년) 북만주 대목구 프랑스 신부가 있었고 부유했다. 서울 대목구 프랑스 신부들이 삼원봉과 용정, 팔도구에 한국인 신부가 있었고 연길은 북만주대목구 신부가 돌아 가 텅비어 있었다. 3-5년마다 성사를 주기위해 북만주 신부들이 왔다. 연길에서 길림까지 열흘 거리였고 산속 협로에 마적들의 은신처가 있기에 일부 구간은 매우 위험했다. ---제대로 된 신자는커녕 건물 관리인조차 거주하지 않았다. 황량한 부지에 북쪽 담벼락에 집세채가 있었다. 진흙벽에 초가 지붕을 올린 성당, 성당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관리인 생계를 위한 남학교, 다른 쪽은 축일에 신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사제관은 끔찍했다. 수년간 붙은 때를 끌로 긁어내고 12월11일 정리, 외교인들이 빌려갔던 탁자와 의자, 책상 회수하였다.
성당의 초가 지붕은 새고 있었다, 성작과 제의의 보관 상태는 양호한 상태였다. 땅에 묻어 놓았다고 한다. 서쪽의 건물은 비가 새고 석가래는 외교인들이 땔감으로 망가지고 여학생 교실은 마구간과 석탄 창고로 사용중이였다. 시설은 좋지 않았지만, 있는 것만으로 고맙다. 어째거나 연길의 사제관은 세상 어느 곳보다 더 아름답다
*공소 방문에 나섰다. 무산 공소였다, 중국인 신자 200명이 있던 곳으로 건물이 두 채 있었다. 성당과 학교... 지금은 한가정 10명뿐이다. 예전에 공소를 기증했던 분이었다. 다른 다섯집은 세례받은 기억만 있을 뿐이다. 연길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시간 공소는 가족 70명중 30명 세례 받은 사람들이다.
❑데오도로 브레허 신부는 1923년 1월15일, 농가에서 옮아 온 빈데로 고생이 심하였다. 부상의 몸으로 북쪽으로 말 세필에 짐을 싣고 수천킬로미터 연길지목구 여행을 떠났다.
*누나에게 편지를 쓰다
통행증 발급-군대의 호위병을 받을 수 있다. 중국인 수행원 웨이가 독일제 소총을 등에 메고 앞장을 서다. 중국식으로 짚신을 싣고 그 위에 가죽통을 덧신었다. 가운데 신부님, 그 뒤에 한국인이 허리에 권총을 차고 따라오다. 첫날, 60킬로미터 떨어진 왕청현을 향하였다. 정오쯤 중국인 신자가 나타나 신부냐고 인사를 청해 왔다. 5Km 떨어진 자기집으로 초대하여다. 그는 7년동안 성사를 보지 못했지만 묵주기도 바치며 신앙생활 지속하고 있었다. 식사 대접후 40Km 떨어진 왕청현 전교회장집에 저녁 8시에 도착하였다.
*1923년 1월21일, 새벽5시에 출발했다. 외딴 신자 가정집 봉성체 방문이었다. 얼어붙은 골자기를 지나 눈덩이 산위로 길이 이어젔다. 11시쯤 외지고 가난한 한국인 마을에 도착, 외인들은 말을 돌보고 신자들은 고해성사와 영성체 준비하고 있었다. 식사후 합마당으로 출발하였다. 밤 10시 도시에 도착하여 말들 보호를 위해 한 시간 걷기 후 여관 찾았으나 대부분 거절하였다. 마적으로 의심되었나 보다. 겨우 허름한 곳의 허락 후 말 도난 방지위해 작은 외양간에 간신히 들여보내고 방을 배정 받아보니 난방이 엉망이었다. 창틀로 찬바람 윙윙 들어왔다. 찬 방바닥에 조금 눕고 서너 시간 휴식 후 또다시 여행 강행하여야만 했다.
*1923년 1월22일, 새벽1시에 말먹이 주고, 사람들은 굶고 말안장 보니 가죽띠가 꽁꽁얼어 있어서 설치하기가 쉽지 않았다. 추운 날씨였기에 한지로 발을 동여맸다. 반시간 말을 걷게 하고 신나게 달렸다. 오전 9시에 중국 식당에 들렀다. 말을 먼저 먹이고, 우리도 따듯한 물과 함께 야채를 먹었다. 오전11시 길을 나섰다. 영고탑에 인접한 목단강의 빙판길을 세 시간 달렸다. 목단강은 의란현의 수도인 삼성 옆을 지나 송화강으로 이어젔다. 말의 편자가 아직 새것이었다. 산길이 아닌 경우에 육로보다는 얼음 위를 달리는 편이 더 빨랐다. 어둠속 산위의 숲들이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밤 9시에 낙타봉 마을에 도착하였다. 나라에서 경영하는 여관에 도착하였다. 요행이 영고탑으로 가는 군인들이었다. 군인들은 새벽1시에 협로를 향해 출발 예정이다. 우리는 새벽 4시에 일어 날 예정이었다
*1923년 1월23일, 새벽4시에 출발, 날은 어둡고 추웠다. 길은 얼어 붙었다. 아침 6시경 우리는 원시림으로 진입했다. 숲이 갈수록 우거져 두려움이 몰려왔다. 7시30분경 눈이 깊이 쌓인 지점에서 군수송 행렬을 따라 잡았다. 오후1시경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내려가는 길은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숲은 정말 아름다웠다. 겨울 숲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여름 숲은 더 말해 무엇하랴... 늘 마적들이 들끓는 곳이기도 하다. 또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휴식을 취한 우리는 세시간 달렸다. 코에 걸린 안경이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도록 몇 번이고 커다란 말 등에서 몸을 숙여야 했다. 숲 가장 자리에 있는 여관에서 말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우리가 먹을 만 한 것은 눅눅한 과자 몇 조각과 뜨거운 물밖에 없었다. 다시 말에 올라 다섯 시간을 달렸다. 달리는 동안 농가나 사람은 없었다. 밤 10시에 마린호에 도착하였다. 비로서 우리는 우동과 독한 소주를 먹고 따듯한 침상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내일은 늦잠을 잘 수 있었다. 이제 영고탑까지는 60Km만 가면 된다. 우리가 잠자리에 들기 전 기마병 장교가 찾아왔다. 우리에게 여행 목적지와 목적을 물었다. 지사가 발급한 통행증을 보여주자 그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우리는 귀환할 때 기마병 호위를 부탁했다.
*1923년 1월24일, 우리는 오전 9시에 우리는 출발했다. 대체로 오전 6시부터 8시까지 제일 춥기때문이었다. 산과 협로를 피해 다시 목단강 강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강의 폭은 100M, 얼음 두께는 1-1.5M 정도 였다. 저녁 5시쯤 강을 벗어나면서 노인을 만났다. 나흘 전 도착 예정이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보초를 서 가며 신부가 무사히 도착하기를 매일 저녁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성당터에 들어서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작은 건물, 뒤죽박죽 된 페허의 잔해가 석양속에서 유령처럼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 중국 선교의 현주소를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8 년 전 이곳에는 본당신부와 벽돌조 성당, 남학교와 여학교, 신자들이 모임을 가지던 큰 건물이 있었다. 어느 날 밤, 모든 것이 이 도시의 2/3와 함께 소실되어 버렸다. 화염이 엄청난 속도로 몰려와 성체와 성작을 구할 틈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대로였다. 본당신부는 길림으로 돌아갔다. 가난한 신자들은 건물 잔해를 정리하는 것은 고사하고, 도로를 막은 무너진 담조차 치우지 못했다. 신부는 떠났고 신자들이 온 힘을 다해 지은 그 본당의 잔해를 정리하는데 필요한 인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화제로 전 재산을 잃은 본당은 급속히 해체되었다. 많은 신자가 길림의 다른 본당으로 이주해 갔다. 나머지 신자들은 여러 해 동안 냉담자로 살았다. ...50명에 불과했다. ........당분간 나 혼자 연길현과 의란현이라는 방대한 두 지역을 담당해야 했다.
휴식이 찾아왔다. 허지만 신자들이 찾아 와 기꺼이 성사를 주고 저녁9시에 첫 미사가 있었다. 신자들은 하루 빨리 와야만 새 출발도 가능할 것이다...
*1923년 2월11일, 영고탑을 출발하여 450Km 떨어진 밀산으로 향했다. 신부없이 8년동안 200여 신자가 있는 곳이었다.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군인 12명의 호위속에 데오도로 신부는 30Km 떨어진 목단강에 도착하였다.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말을 타고 달렸다. 군인들이 길을 잃어 건널목 지기가 길을 일러 주었다. 두시간안에 기차가 오니 말을 너무 빨리 달리지 말라고 했다. 며칠 동안 밀을 타고 황무지를 달렸다. 거대한 숲 너머로 러시아 땅이 보였다. 말발굽 아래로 눈가루가 휘날렸다. 목능역에 도착하여 통행증을 제시하며 호위병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이름 틈타 마적들이 마을을 습격할찌 우려가 되기 때문이었다. 40KM에 달하는 장재령은 마적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돌로 만든 망루까지 가지고 있었다. 몇해전 중국인 신부가 마적에게 몽땅 털린 사건이 있었다. 동사 직전에 여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했다. 데오도로 신부는 밤에 혼자서 여행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다들 자살행위라고 만류하였다. 신부는 우울한 심정으로 협로 방향으로 몇 킬로미터 달리다가 외딴 마을에서 신자집을 발견했다. 이들도 7년 동안 신부의 방문을 받지 못했다. 5명에게 세례를 주고 밥 12시에 미사를 봉헌했다, 어두운 새벽 길을 떠나려하자 만류하였다.
영고탑으로 돌아 오는 길에 마적들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신속하게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었다. 신부는 마지막 협로를 통과하기 위해 모인초 기병대에서 다시12명의 호위병을 구했다. 밥 12시에 말에 올랐다. 그 날은 90Km를 갔다. 도중에 숙소나 말을 먹일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말의 기운을 북돋으라 중국 병사들이 찐빵을 독한 소주에 적셔 말에게 먹였다. 말들은 배불리 먹이를 먹은 것처럼 힘차게 달렸다.
데오도로 신부는 부활절에 연길에서 150Km 거리에 있는 돈화를 방문 길에 올랐다. 그러나 합이파령 협로를 넘어야만 했다. 이 협로는 장관재령만큼 위험했다. 다행이 호위병 덕분에 모든 길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
*1923년 9월23일, 돈화 본당의 상황은 우울했다. 마지막 신부가 길림으로 돌아가던 10년전, 신자 100명과 성당을 포함한 아름다운 선교부지였다. 주교가 고용한 관리인이 그사이 성당을 자기 소유물로 여겨 성당에서 기도하려던 신자들을 쫓아냈다. 신부는 신자3명을 찾아 내 그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돈화 본당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큰 공동체가 있었다. 그곳에는 건물이 세군데 있었다. 그렇지만 누군가 마루 바닥과 서가래를 뜯어 간 상태였다. 파손된 재대만 남아있었다. 옛 신자들도 만나기 힘들었다. 신부가 그곳을 떠나려고 하는데 마적이 처 들어왔다. 신부는 옆길을 이용해 다른 신자 가정집으로 갔다. 10Km 떨어 진 신자 가족을 초대하려고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공교롭게 심부름꾼이 200마리 말을 흠쳐 몰고 가던 마적단과 마주쳤다. 다음 날 아침 미사후 신부 일행은 재빨리 그곳을 빠져 나왔다. 20Km 정도 전 속력으로 달렸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합이파령 협곡 건너 편에 도착하였다. 그곳으로부터 75Km를 더 달려 팔도구의 어느 신자촌에 도착해 묵게 되었다. 서둘러 말을 모느라 녹초가 되었다. 저녁에 80명에게 성사를 주고 이튼날 오후 2시 팔도구로 돌아 왔다.
선교사 데오도로 신부는 누나 수녀에게 이렇게 소식을 전했다.....
누님, 몸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가슴 아품니다. 신자들에게는 지도와 보살핌이 절실한 실정입니다. 그들을 둘러싼 이교도 문화에 저항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 저는 32일동안 극심한 추위와 위험 가운데 말안장 위에 앉아 있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거룩한 천사가 지켜주고 계심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올겨울 저는 그동안 신앙을 떠난 400 여명이나 찾아 냈습니다. 그들이 돌아 오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누님, 작년에 기근 때문에 멀리 이사 간 230명을 찾아냈습니다. 그들과 함께 ‘위령의 날’과 함께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을 겸해서 미사를 지냈습니다. 분위기가 좋았지요. 풍작 덕분에신자들은 다시 배불리 먹게 되었습니다. 그 덕에 영혼도 건강해진 것은 물론입니다. .... 제병이 떨어져 돌아와 보니 주교님께서 격식을 갖춰 제 영명 축일 축하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선물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주교님께서 연길 전 지역을 관할하는 지역장 겸 수도원장으로 임명하신 것입니다. 살랑하는 동료들도 축하해 주려고 왔지만, 저는 내키지 않습니다. 제 뜻대로도 할 수 없는데, 높은 직책이 무슨 소용이란 말씀입니까? 동료 수도자 한 사람 한 사람 염두에 두면서 어떻게 학교와 본당까지 꾸려 간단 말입니까? 누님도 이미 힘든 시기를 겪으셨다는 것 저도 압니다. 그러니 제 심정을 더 잘 이해하시겠지요. 본당이 가난해 활동이 어려운 판국에 다른 직무까지 추가되니 너무 힘듭니다.
연길 신학생들의 등교길
❑1928년, 짧게는 35Km, 길게는 120Km의 강행군 끝에 연길 전역에 신학생들이 용정에 도착했다.
폭우로 도로가 사라지고 눈 앞에는 발목까지 빠지는 진흙땅만 있었다. 거기다가 물살이 거센 강을 건널 다리도 없었다. 20Km를 걸어 일단 삼원봉에 도착했다. 그곳에 있던 신부는 강행군으로 지친 신학생을 더 이상 못가게 말렸다. 지친 몸을 추스르고 회령까지 남은 40Km를 강행군 하라고 일렀다. 9월17일 아침을 든든이 먹고 행군에 나섰다. 다리가 없는 강, 다섯 개를 건너야 했다. 도중에 쉴만한 식당 같은 곳도 없었다. 어쩌다 무나 배추 밭이 굶주린 나그네를 손짓했다. 신학생 35명이 거의 초주검이 되어 늦은 저녁 회령에 도착했다 다음날 신학생들은 19시간 여행 끝에 덕원에 도착하였다.
*신학생 마적에 납치 사건-1935년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학생 마적에게 붙잡혔다. 삼일만에 탈출후 3주간 고생끝에 용정 하시본당에 도착, 그 후유증으로 학업 중단하고 만다.
4.-도문
도문은 두만강 강변에 있는 국경도시였다. 파멸로 치닫는 일본의 전횡으로 크게 고통받던 시기에 연길대목구의 마지막 본당인 도문본당이 설립되었다. 이곳은 고향을 떠나 중국으로 피난 갔던 한국인들, 한국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만주로 몰려들던 일본인들이 잠시 머물던 중간 기착지였다. 1945년 이후에는 반대로, 즉 중공군의 인민 재판을 피해 북한으로 도망쳤던 사람들의 중간 기착지였고, 그 이후에는 다시 상황이 변하여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가고자 하는 이들의 중간 기착지였다.
도문에는 유동 인구가 너무 많아 시내 거주 신자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이 점이 바로 문제였다. 어찌되었던 공소가 설립되었고 때로는 연길에서, 때로는 훈춘에서 사제가 방문했다. 데오도로브레허 주교아빠스는 안셀모 신부를도문에 파견하였다. 1932년 일본이 만주를 참탈할 때까지만 해도 도문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어촌에 불과하였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도문의 주민수는 4만명 이었다. 거의 반은 일본인이었다. 수백에 불과했던 중국인을 제외하면 나머지 주민은 한국인이었다. 일본의 정책에 따라 도문은 10년만에 대도시로 성장했다. 철도가 지나면서 군인 3,000명이 생기고 큰 세관이 들어섰다. 두만강을 지나는 다리로는 옛 철교 외에 1941년 건립된 자동차와 사람이 지나는 다리가 있었다.
고층 건물과 대현 진열대가 즐비한 중앙로를 지나면서 이곳이 만주땅이라는 사실조차 잊었다. 갓길에 있는 작은 일본인 가옥과 한국 초가집을 보노라면 다시 만주땅에 있음을 깨닭았다. 볼품없이 보이는 개신교 벽돌 예배당은 이런 혼잡함과 딱 어울렸다. 이 도시는 예배당 건물외에 다른 이교도 사원이나 그리스도교 사원이 없었다. 베네딕도회 선교회 성당은 거창한 일본 영사관에 가려 산비탈에 작으마하게 서 있었다. 함석 지붕에 벽돌 건물이었다. 1934년 성당 부지는 경작지 한 가운데 있었고 신발은 진흙 범벅이 된 채로 들어가야 했다. 의심 많은 일본 관리들은 외국인이 국경에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데도 본당 설립은 성사되었다. 이는 하늘의 도우심이며 무엇보다도 공동체에 감사해할 일이었다.
....본당 공사때 한국인 청년들이 가장 열심이었다. 작은 종이 산간 벽지와 시내에 처음으로 울려 퍼질 때 기쁨은 한없이 컸다. 이제신자 공동체는 중심을 잡았다. 성가와 전례문을 연습하였다. 신부의 바이올린 반주가 이끄는 저녁 기도 소리가 여름내내 이교도 사는 도시에 퍼졌다. 성당은 주일 미사하기에 너무 작았다.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모두가 주일마다 참석하여 서로 격려 하였다. .... 훗날 소련의 진군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5. 훈춘
한국에 온 지2년도 안된 젊은 선교사 엑베르토 신부는 육도포 본당을 맡았었다. 여덟 개 호수가 시작되는 곳이자, 두만강이 범람하면 가장 늦게 물이 빠지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엑베르토 신부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공소와 학교를 찾아 다녔다. 사람들의 영적 고통뿐 아니라 육체적 고통까지 살펴야 했다. 신부는 열다섯 나이에 세계1차 대전에 참전하여 4년간 위생병으로 근무하면서 얻은 지식으로 외상, 말라리아, 설사, 궤양등 치료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병에 점염되기도 하였다. 1925년에서 1932년까지 북한과 소련 사이에 좁게 낀 중국땅에 육도포 본당과 훈춘 본당이 있았다. 1925년 육도포 본당에서 분리된 훈춘본당은 육도포 북쪽 50Km 지점에 있었다. 호노리오 트라이버 신부가 육도포의 위험한 상태에서 탈출한 후, 1932년 일본인들은 소련에서 활동하던 마적단의 은신처인 육도포를 폐허로 만들었다. 남평 수용소를 제외하고는 1950년까지 엑베르토 신부가 이 역을 맡았다.
루치오 엑베르트 신부가 여느 때처럼 훈춘 본당 신부 카니시오 퀴겔겐 신부를 방문하는 길이었다. 50Km나 되는 길을 하루 만에 걸어 갈 생각이었지만, 강한 눈보라 때문에 훈춘에 거의 이르러서야 탈진하고 말았다. 친절한 소련인이 루치오 신부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가 음식을 벅인 덕에 목숨을 부지했다. 루치오 신부는 마침내 9시가 되어서야 카니시오 신부집에 도착하였다. 그는 돌아 올때도 눈길을 하루 만에 걸어왔다. 그는 새해 첫 공소 방문 나섰다. 무리한 탓에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는 열이 40도나 올랐다. 의사 처방은 2주간 휴식이었다. 환자 몸으로 부활 대축일 미사를 신자들과 함께 성대히 봉헌하였다.
8월초의 일이었다. 엑베르토 신부도 힘든 일을 처음 겪었다. 장마철이 되자 끝없이 내리는 비에 ‘여덞개 호수’ 지역이 물에 잠겨 큰 호수로 변해버렸다. 두만강도 범람했다. 성당이 고립되어 신자들은 가슴팍까지 차는 물길을 헤치고 미사에 참례하러 왔다. 공소를 돌보려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만강 좁은 지류를 통해 물이 빠지기 까지 몇주가 걸렸다. 그 뒤 엑베르토 신부는 폐렴에 걸려 공소가 별로 많지 않은 훈춘에서 지내며 요양했다. 훈춘 본당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았다. 중국 기옥 한 채에 경당, 사제관, 부엌이 다 있었다. 마당 앞뒤로 길이 있지만 물이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고였다. 신자들은 맨발에 고무장화를 싣고와 성당에 도착해서야 양말을 신었다.
1932년 4월까지 이 지역은 평온했다. 그러나 그 이후는 달랐다. 행패를 일삼는 볼세비끼주의자들과 질서가 무너진 틈을 타 겁 없이 날뛰는 마적들 때문이었다. 경찰은 붙잡은 마적의 목을 경종을 울릴 목적으로 도심밖으로 통하는 길목에 걸어 두었다.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경찰서장이 기습을 당해 공관에서 납치되었다. 마적이 습격하자 성문을 열어주고 마적을 따라 도주한 사건도 있었다. 지난해에는 이런 일로 인해 공소 방문이 불가능했다.
6.-안도현
여섯 개나 되는 지명 뒤에 있는 흘러간 역사속의 장소를찾는 일은 쉽지않다. 옹성시, 옹성라자, 옹성랍자, 명월구, 밍웨꺼우, 안도..., 모두 한 곳을 의미한다. 대령동 본당에서 걸어서 가려면 10 ∼ 13시간 걸린다. 요즘 우리는 이 구간을 편안한 열차로 간다. 철도 노선과 나란이 있는 곳곳에 늪지와 진흙구덩이가 뒤범벅되어 있었다. 예전에 이 길을 가려면 어떤 희생을 치러야 했을찌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길을 걸어 다니던 선교사의 발은 상처 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말을 타고 가면 지금 한 시간 반이면 가는 길을 이삼 일 동안 가야했고, 수레를 수렁에서 꺼 내기 위해 몇 시간 허비해야 했다.
아도 신부가 쓴 <옹성라자에서의 하루>에서는 안도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었다. ...웅대하고 아름다운 두 산악 계곡이 갈라지는 곳, 모든 것을 압도하는 크고 높은 암벽 아래 작은 중국 장터 마을 옹성라자가 있다. 추운 겨울 날, 뽀드득 소리를 내며 눈길을 걸어 성당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암벽 오른 쪽 모서리에 모여 있는 초가지붕에 작은 초가집들은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본당은 산기슭에 자리한 한국인 가옥 한 가운데 있었다. 초라하게 보이는 경당에 잠시 들른 후, 몸을 녹이기 위해 벽돌로 소박하게 지은 사제관으로 들어갔다. 난방이 되고 있음에도 벽 곳곳에 얼음이 얼어 있었고, 창문은 꽁꽁 얼어 있었다. 돈화에서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
첫댓글 만주 선교사 체험으로 말을 타고 하루 정도 만주 벌판을 달려보는 체험도 의미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