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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1
#벨기에신앙고백서 9.삼위일체의 성경적근거(3)
In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the angel Gabriel says to Mary, the mother of our Lord: "The Holy Spirit will come upon you, and the power of the Most High will overshadow you; and therefore that holy one to be born of you shall be called the Son of God."
누가복음에서는 천사 가브리엘이 우리 주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교부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려 하는 열심이 지나친 나머지, 동정녀 마리아를 감히 ‘하나님의 어머니’라고까지 격상해 부르는 신성모독에 가까운 해석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시라 하시더라도,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과 영원 전부터 연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시다. 따라서 이 고백서에서 동정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라고 한 표현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 인성이시라고 보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마리아의 육신의 형질을 취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그녀의 태에 조성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성자 하나님과 연합하시고 성부의 독생자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인성을, 죄로 인해 비참하게 부패해버린 이 땅의 인간의 수준으로, 그것도 여자의 태 속에 있어야 할 씨로 까지 한없이 낮추셔서 마리아의 태를 빌려 잉태되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까지 그리스도의 인성이 낮아지셨어도 성자 하나님과의 연합은 변함없이 유지되셨다.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는 것은 단지 그분의 신성이신 성자 하나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성도 해당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마리아의 인성에서 취하여 조성되신 것으로 하려면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그러해야 한다. 하지만 육체의 형질은 수긍할 수 있어도 영혼의 형질은 과연 어떻게 취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필연적으로 봉착하게 된다. 사람의 영혼은 나뉘거나 분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순수 단일체이기 때문에 성경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으므로, 예수님의 육체는 마리아에게서 취한 것으로 하되 영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육체에 부여하셨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시려면 예수님의 영혼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부여하신 것으로 할 수는 없었으므로,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될 때마다 각자의 영혼을 그 때 그 때 만드셔서 부여하신다는 영혼창조론을 주장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영혼창조론은 성경 전체의 문맥을 살펴봐도 부합하지 않는데다가 사람의 원죄의 유전과 구원받지 못하는 악인들의 영혼의 창조 시점에서의 상태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어서 성경에 근거한 이론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께서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셨다고 한다면, 그분의 인성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원본이 되시므로 이 땅의 인성 수준으로 낮추신다는 것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으며, 영혼창조론 같은 억지스러운 해석을 하지 않아도 된다.
And in another place it says: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be with you."
또한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교회와 성도들을 축복하면서 성자의 은혜라고 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하는데, 이는 분명 하나님의 둘째 위격이신 성자 하나님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도 함께 아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도 바울의 축복 문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근거가 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께서 영원 전부터 계셨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창세 전에 구원하시기로 선택된 성도들을 위해서 우리에게 아무 것도 바라시거나 원하시거나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죽음의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성도들을 위해서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죽음을 맛보게 하셨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와 교통하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약속하신 바,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보혜사로서 교회와 성도들 각자에게 보내셔서 위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아래로는 같은 신앙을 가진 교회와 성도들을 연합하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한글 성경에는 성령과 물과 피라고 되어 있으나, 다른 번역에는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분은 성자 하나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와 연합하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포함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 전부터 계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또한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다. 한글 성경의 ‘성령과 물과 피’를 하나님의 세 위격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피는 육체와 희생을 상징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의미하고, 물은 생명과 근원을 상징하므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열심당원
오늘날 한국교회,심지어 개혁주의를 자처하는 자들조차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저지르는 유대주의적인 열심당원주의.기독교국가/정부를 만들려하는것,특정 정치/경제이념만을 성경적인 것이라 주장하는것 등이 모두 이에 속하는 것이다.
#20211221
#성육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연합의 시작이 아니다.그분의 위격적 연합은 영원전 성부께로부터 독생하실때 비롯된 것이다.성육신은 영원전부터 영광의 인성이 이땅의 비천한 인성으로 한없이 낮아지신 사건이다.
#여호수아 #Joshua 19:49-51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다
49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50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51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준 시기는 각 지파가 자기들이 분배받은 땅을 모두 정복하여 얻고 난 후가 아니라 아직 기업을 얻지 못한 일곱 지파들에게 그들이 차지해야 할 땅을 제비만 뽑고 난 후인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여호수아의 역할과 임무는 모든 지파들에게 기업을 지정해 주는 것으로 거의 마무리 되었고 그 땅을 차지해야 하는 의무는 전적으로 각 지파에게 달린 것이었다. 모든 지파들은 사실 자기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준 여호수아에게 공경의 의미를 담아 자기들의 기업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었어야 했으나, 게으름과 두려움과 타성 등의 이유로 기업을 차지하지 못해서 정작 여호수아에게 아무 것도 줄 수가 없었으므로 여호수아에게 주어야 할 기업은 그가 속한 지파인 에브라임에서 전담하게 되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자기 지파 에브라임의 산지인 딤낫 세라를 요구했다고 했는데, 이는 그의 신앙으로 미루어봤을때 자기자신을 위한 기업을 요구하려 하지 않았으나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마땅한 기업을 줄 것을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여호수아는 평야가 아닌 산지를 요구했다고 했는데, 갈렙이 점령한 헤브론 산지나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추가로 할당받은 지역이 산지라서 불평했다고 한 것으로 봤을 때 통상적으로 가나안 땅의 산지는 평야에 비해서 사람이 거주하기에 그리 좋지 않은 척박한 땅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좋은 땅은 백성들로 먼저 차지하게 하고 정작 가장 큰 수고를 기울인 자기자신을 위해서는 척박한 산지를 요구하는 겸손함을 내비친 것이었다.
#20201221
#민수기 #Numbers 17:1-13
아론의 지팡이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 중에서 각 조상의 가문을 따라 지팡이 하나씩을 취하되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대로 그 모든 지휘관에게서 지팡이 열둘을 취하고 그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그 지팡이에 쓰되
3 레위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라 이는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각 수령이 지팡이 하나씩 있어야 할 것임이니라
4 그 지팡이를 회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5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에게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6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매 그들의 지휘관들이 각 지파대로 지팡이 하나씩을 그에게 주었으니 그 지팡이가 모두 열둘이라 그 중에 아론의 지팡이가 있었더라
7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
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9 모세가 그 지팡이 전부를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가져오매 그들이 보고 각각 자기 지팡이를 집어들었더라
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11 모세가 곧 그 같이 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12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13 가까이 나아가는 자 곧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
광야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막상 여호와께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니 도리어 자기들끼리 모여 가나안과 전쟁했다가 참패 당한데다가 자기들의 패역함 때문에 가나안 땅을 얻지 못한 책임을 모세에게 떠넘겨 고라 무리를 앞세워 반역하였고 고라 무리가 여호와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했는데도 그 책임까지 모세에게 지워 돌로 쳐죽이는 심판을 하려 하였다. 사실 이정도의 완악함과 패역함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이 백성은 순식간에 진멸을 당해도 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상식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도저히 갱생불가한 광야 백성을 혹독하게 다루시기보다는 도리어 아론의 지팡이에서 새순이 돋고 꽃이 피며 살구 열매를 열리게 하셔서 백성들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확증을 삼으신다. 즉, 백성들이 아무리 완악하고 패역하더라도 그대로 보복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스스로 깨닫고 인정하며 수용할 수 있도록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 것이다. 이런 방식은 여호와께서 하셨으니까 망정이지, 만약에 우리들이 했다면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판단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미련한 방식은 분명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지극히 지혜로운 방식임에 틀림이 없다. 고라 무리가 갑자기 갈라진 땅 밑으로 삼키워 몰살 당하는 것을 보고도 눈하나 꿈쩍 안하고 모세를 대적했던 백성들은 고작 아론의 지팡이에서 새순과 꽃과 살구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보고서는 희한하게도 자기들이 여호와 앞에서 전부 망하게 생겼다고 두려워 떨며 모세에게 간구하게 된 것이다. 생명이 없는 나무 막대기에서 생명을 맺게 하신다면 그 반대로 생명이 있는 것에서 언제든지 생명을 거두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백성들은 아론의 지팡이를 보고서는 그제서야 여호와와 모세를 자기들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으나 그것들에 감화되어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많지 않다. 도리어 사도들은 전도라는 미련해보이는 방식으로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이로 인해서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할 때 수천명씩 회심했던 것이다. 세례 요한 또한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이적을 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천국이 임박했으니 회개하라는 선포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게 하였고, 죄와 심판을 선포함으로써 분봉왕 헤롯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잡다한 행사와 이벤트가 넘쳐나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복음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일 수도 있다. 복음의 능력이 없으니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교회로 이끌기에는 부족해 보인다고 지레짐작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단번에 끌 수 있는 인간의 지혜로운 방식으로 대체하고 채워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회에서도 정작 복음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단기적으로 사람을 끌어모을 세속적 방식만 남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지푸라기가 산처럼 쌓여있다 한들, 알곡 한 바가지만큼의 가치가 있을리는 만무하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더 나아가 교회 밖 세상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가장 강력하게 드러낼 수 있는 지혜의 방식은 다름아닌 복음의 능력으로 교회에서 새 순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피며 맛있는 열매를 맺는 것이다.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 교회에 복음과는 상관없는 어떤 흥미 위주의 행사를 요구해서는 안된다. 또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한다면서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런 가시적으로 신비스러운 것들은 잠시나마 자기에게 위안을 주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할 수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 자기 만족과 탐욕에 기반하므로 도리어 자기 신앙을 해롭게 할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론의 지팡이로 삼아서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써 새 순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소망하며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중생 이후 평생에 걸쳐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보편적인 신앙활동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론의 지팡이 같은 우리 인생에서 성령의 순과 꽃과 열매가 지속적으로 나고 피고 열리는 모습을 세속인들이 볼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20171221
#학개
아마도 예전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앞으로도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 교회건물을 증축할 때 교인들을 미혹하기 위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구절일 것이다. 담임목사나 유명 부흥강사가 이 구절을 강단에서 ‘힘있게’ 외치면, 순수한 우리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아니면 혹시나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재산을 가져가실까봐 두려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건축헌금에 동참하곤 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교회건물을 짓는데 쓰라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인가?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성전을 짓지 않는다고 책망하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는 자신은 사람이 지은 성전에 연연해하지 않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신다. 동일하신 하나님이신데 왜 다윗에게 하신 말씀과 포로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이렇게 상반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그 마음을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비록 다윗을 피를 많이 흘렸다고 해서 성전 건축을 못하게 하셨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순수한 마음을 기쁘게 받으신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비록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솔로몬을 위해서 성전 건축 재료를 온 힘을 다해서 모으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포로 백성들은 어떠한가? 비록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주축이 되어서 성전 재건축을 진행해왔으나, 여러 대적들의 집요한 방해로 인해 수 년 동안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그러다보니 백성들도 슬슬 지치게 되고 회의감이 팽배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을 소망함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성전 재건축을 명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전 재건축을 명하시면서 무엇으로 만들라고 하셨는가?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지으라고 하셨다. 솔로몬의 성전과 같이 온갖 귀한 재료를 가지고 지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한낱 천으로 지은 성막에도, 온갖 금은보화로 치장한 성전에도 계신 하나님께서는 나무로 지은 초막집과 같은 성전에도 친히 계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을 소망하는 백성들의 그 마음과 자발적 헌신을 바라시는 것이다.(교회 건축헌금을 종용하는 목회자들은 이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즉,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외적인 무언가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즐거워하며, 자발적으로 헌신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호세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아들여 자녀 셋-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을 낳는다.그런데 고멜이 낳은 그 세 명의 자녀는 과연 호세아의 친자녀들이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고멜이 낳은 세 자녀가 호세아로부터 낳은 자녀인지 명확한 기록이 없고, 1장 2절에서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고멜이 음란한 여인이었더라 하더라도 호세아의 아내가 되어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통해서 자녀를 낳았다면, 음란한 자녀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고멜은 호세아가 아내로 맞이한 후에도 자신의 음행을 그치지 않고 다른 남자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서 자녀들을 낳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음란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처럼, 호세아더러 음란한 여인 고멜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호세아는 자신의 재물로 고멜의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온다.내 생각에 아마도 호세아는 예전부터 고멜과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더 나아가서 어쩌면 호세아는 꽤 오랫동안 고멜을 혼자서 사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억지로 생길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더러 음란한 여인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호세아의 고멜에 대한 마음을 보시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
나혼자 소설을 써보자면, 호세아는 오랫동안 고멜을 흠모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고멜이 음란한 길을 가게 되는 것을 보고서 호세아는 매우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고멜을 데려다가 아내를 삼으라는 말씀을 듣고서, 호세아는 한편으로는 걱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비록 음란한 여인이지만 자신이 오랫동안 사랑해온 여인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는데 있어서 내심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세아의 그런 일말의 기쁨은 매우 혹독한 괴로움을 가져오게 된다. 자신의 아내가 된 고멜은 음란한 행위를 끊지 않는다. 그리고서는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자녀를 셋이나 키우게 된다. 어떤 때는 고멜이 스스로 팔려가자 고멜을 데려오기 위해서 비싼 값을 치르기도 한다. 고멜을 향한 호세아의 일방적 사랑은 이다지도 괴로운 댓가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호세아가 그런 괴로움을 견뎌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조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억지로 한 것인가?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그는 고멜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기쁘게 순종했을 것이라고 본다.
음란한 여인인 고멜과 그녀의 음란한 세 자녀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호세아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기구한 가정사를 표징으로 삼으신 것이라면, 고멜과 세 자녀가 나중에는 자신의 음행을 호세아에게 진정으로 뉘우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