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3:11에서는 "그들의 마음에 영원이라는 개념을 넣어 두셨다." 고 하셨다. 여기서 그들이란 사람의 아들들, 즉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사물들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바로 앞 절에서는 그분은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게 만드셨다. 라는 구절이 있어 그들이 모든 것을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적으로 보면 '그들'이란 모든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자기의 본성을 유지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토끼가 사자를 보면, "걸음아 나살려라" 하면서 도망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면 생물이 아닌 사물은 어떠한가? 뉴우튼은 사물의 모든 물체는 자기 운동을 지속하려 한다는 점에서 정지한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고 등속으로 운동하는 물체는 계속 등속을 유지한다는 운동 제1법칙을 발표했다. 다만 외력이 존재하지 않는 조건에서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물체의 본성은 자기 수명을 지속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수명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수명이 끝나는 것은 외부적 원인에 의한 것이다. 더 큰 힘이 그의 생명을 중지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이다. 우리가 어릴 때 들은 '석수장이'의 동화는 그것을 잘 알려준다. 이 자연 안에 절대 강자는 없다. 사물은 반드시 더 큰 힘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죽음을 일으키는 외부적 요인을 없애면 인간의 수명이 연장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한편 창 2:17에서 불순종의 대가가 죽음이라는 것은, 불순종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나쁘게 하므로 더 이상 생명이 지속될 수 있는 원인들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생명의 실과가 바로 그것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생명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차단되는데 그 원인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 것이 생명의 실과였다. 그것을 하느님이 허락하셨으나 불순종한다면 그것을 계속 제공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인간이 자기의 방식으로 영원한 삶을 갖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자유 의지를 표명하였으므로, 그 방식을 존중하여 그렇게 살아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하느님께 예속되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스스로의 방식으로 행복을 찾겠느냐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 창세기의 내용에 의하면 선악의 실과는 바로 그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것은 불순종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선택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만 후자는 하느님, 즉 자연과의 관계를 나쁘게 하기 때문에 "땅은 너에게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낼 것이며, 너는 들의 식물을 먹어야 할 것이다" 라 선언된 것이다. 더 이상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특혜를 베풀지 않고 스스로 연구하고 개척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오늘도 생명과학자들은 노화를 질병으로 간주하고 인간 수명을 늘이기 위해서 부지런히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