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를 기부한 김영한 할머니 법명은.,길상화(吉祥華)
젊은 시절 시인 백석(白石)과의 소설 같은., 러브 소토리.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열 여섯살에 집안이 몰락하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스스로 한성 기생 ''眞香''이 되었다.
가곡과 궁중무를 배워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잡지에 수필을 발표하며 미모에 시와 글, 글씨, 그림,
춤, 노래 등 다재다능한 기생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스물 세살. 영한은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스승이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를 거절당하게 된다.
하여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한.,그녀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이 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된다.
김영한 보다 네 살 더 많았던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있다 우연히 만난.,기생 김영한.
<;시인 백석>;
백석은 첫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 것”
하지만 백석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키게 된다.
그러나 결혼식날 밤 집을 빠져 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영한이 거절하자 백석은 1939년 만주로 떠나게 된다.
이것이 두 사람 사이에 영원한 이별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 뒤에.,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그녀가 떠난 후 그녀가 서울로 돌아간 뒤였기에
만날 수 없었고 그것이 영영 이별
백석은 그후 북한 체제 속에서 핍박을 받으면 기구한 삶을 살게된다.
늘 사랑과 고향 같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관심이 있었던 그에게
정치이념은 의미가 없었고 당성이 부족하고 늘 사랑타령이나 하는 시인
백석은 북한 체제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백석은 1950년대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최근에 1990년대 중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백석을 평생 그리워한 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김영한 기념비>;
그리고 성공해 당대의 요정인 대원각을 운영
1997년 2억원을 출연 <;백석문학상>;을 제정했다.
같은 해 7000여 평의 대원각 대지와 건물 40여 동 등
1천억원대 부동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 설립
김영한 보살
성북동 길상사 <;침묵의 방>;은 하루 이용객 600 명
참선수행을 하는 <;시민선방>;은 1500 여 명이 찾는다.
수녀들도 즐겨 명상하는 길상사는 대체 어떤 절일까?
이곳은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인 대원각 터.
우리나라 3대 요정이 위치한 곳은 공교롭게 청와대 인근.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정치권력 심장부와 함수관계일까?
조선시대 왕이 민정시찰을 나갔다가 쉬어가던 기방.
조선시대 궁궐기생 소춘풍과 성종과의 몰래 한 사랑.
우리나라의 3대 요정은 베일에 가려진 안가와 같았다.
주지육림의 바다이고, 밀실정치의 총본산이었던 대원각,
부정과 협잡과 야합의 상징이었던 7000 여평 요정 대원각
드넓은 땅과 숲 속에 40동의 건물을 자랑하고 있었던 요정.
국내 최대 요정인 대원각의 주인은 김영한(金英韓) 할머니.
1987년 김영한 할머니는 설법차 LA에 온 법정 스님과 첫 만남.
이 자리에서 김영한 할머니는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그러나, ''무소유''를 화두삼아 살아온 법정스님은 정중하게 사양.
이때부터 10 여년간 김영한 할머니와 법정스님 간 기이한 실랑이.
"제발 제 시주를 받아주십시오, 스님."
"나는 그 시주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싯가 천억원 대 재산을 조건 없이 시주하겠다는 김영한 할머니
''받을 수 없다.''는 법정스님의 끈질긴 실랑이는 10년간 되풀이
아마도 이런 기이한 실랑이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
결국, 김영한 할머니가 10년 만에 두 손을 들며 실랑이는 끝났다.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 후, 등기를 이전
1996년 5월 20일에 대원각은 송광사 재산일 뿐, 법정스님과는 무관.
여기에 법정스님을 따르는 불자들의 정성과 신심이 모아졌다.
하여, 기존 건물을 개보수, 새로운 사찰인 길상사가 태어났다.
지리산 자락 거림 도장골 입구에 하계 휴양소..길상사.
1997년 12월14일 길상사 개원식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
이날 길상사의 회주(會主) 법정스님은 개원 인사말로 다짐.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도량.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 법명을 주고
아울러, 108 염주 한 벌을 손수 할머니 목에 걸어주었다.
천억 재산을 시주한 보답으로 목에 걸린 108 염주 한 벌.
법정스님이 목에 걸어준 염주를 만지고 또 만지던 할머니.
“내가 평생 일군 터에 부처님을 모셔 한없이 기쁩니다”
1년 후인 1999년 11월13일 오후 길상사 경내를 마지막 산책.
"나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주세요.”
다음날인 11월14일 108 염주 한 벌을 목에 건 채 83세에 운명.
12월14일 거림 길상사에 눈 내리던 날, 스님들이 재를 뿌려준다.
그녀의 육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 영혼은 살아있다.
***백석 시인이 김영한 할머니에게 직접써준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길상사(吉祥寺)의 역사는 매우 짧으면서도 그 설립 계기가 특이해 잘 알려져 있다.
이 사찰은 19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80년대 말까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최고급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사찰로서
성북동 깊숙한 산자락의 대원각 주인이었던 김영한 여사가
7000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 여 동 등 1천억원대의 부동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극락전 (길상사의 본당이라 하겠다)
경 내 - 아담하고 단정함
도심속의 숲그늘에 불교 신도가 아니더라도 잠시 쉬어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다
극락전 뒷편 계곡 좌측에는 작은 건물들이 층층이 있는 것이
방갈로, 별채로 보이는데 요정이었을 때 사용하던 곳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침묵의 집
잠시....비어진 공간에서 벽을 바라본체 묵상을 한다.
향내음이 그윽하다.
길상화 공덕비
관세음보살 석상은 천주교 신자인 한국 조각계의 거장 최종태 씨가
불모(佛母)를 자청해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관세음보살님으로
불기 2544년(2000년) 4월에 봉안되었다고 합니다.
지 장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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