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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二元)의 선악 지식과 종말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갖추어야 덕목으로 ‘지혜’와 ‘명철’과 ‘지식’을 꼽는다. 이 세 가지를 겸비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성막의 일을 맡긴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안에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지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홀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명철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금과 은과 놋으로 제작하는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정교한 일을 하게 하셨다.”(출 35:30-33)
율법시대에 지상에 세운 성막은 장차 복음시대에 각 사람 안에 세워질 성전의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기 안에 하나님의 집을 지어야 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영을 충만히 받아 지혜와 명철과 지식을 겸비해야 한다. ‘지혜’는 통찰력이며, ‘명철’은 분별력이다. 그렇다면 ‘지식’은 무엇일까? 지식은 삼라만상을 헤아리는 능력이다. 지식은 어떤 사물에 관한 명료한 의식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사물에 관한 개개의 단편적인 사실적‧경험적 인식, 엄밀한 뜻으로는 원리적·통일적으로 조직되어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판단의 체계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지식은 정신의 양식이다.
그런데 절대로 먹어서는(알아서는) 안 되는 지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되는 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말씀해 주지 않는다. 그냥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만 알려 주신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고 싶은 말을 직접 명령하거나 알려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소크라테스처럼 인간에게 질문을 던져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도록 산파 역할을 할 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삶을 통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답을 찾으려는 노력 그 자체가 정답이다. 그 정답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지혜’와 ‘명철’과 ‘지식’이다. ‘지식’은 좋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원(二元)의 ‘선악 지식’만은 인생을 전혀 망하는 음부의 길로 끌고 가버린다. 에덴에서의 선악과 이야기는 인생들이 살아가는 실존 방식을 잘 설명해 준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뜻은, 하여 선악을 맺는 나무가 되었다는 뜻은, 처음 사람의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 준다. 에덴의 아담에 대한 이야기 방식은 인간을 진단하는 데 있어서 참으로 탁월하다. 성경이 왜 생명의 양식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아는 것이 힘이다.’ 이것은 처음 사람의 세계관에서 그러하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힘의 우위를 확보하는 가장 큰 첩경은 지식이다.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사람이 강력한 힘을 차지한다. 지식은 반드시 그 옳고 그름을 낳는다. 지식은 선악의 어머니라는 말이다. 지식의 나무에 맺힌 열매가 옳고 그름이며 선과 악이라는 말이다. 지식의 생성은 에고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지식은 이기적인 자아를 중심으로 정렬된다.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조차도 철저히 인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과학적인 지식이 끊임없이 객관을 지향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류를 중심으로 해석체계가 설정되고 있을 따름이다. 수학적 엄밀성과 객관성을 중심으로 체계를 세운 과학지식의 결정체인 우주선을 일례로 살펴보라. 그 같은 지식체계가 인류를 중심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중심으로 체계가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이 숭상하고 있는 기술 이성조차도 과연 객관에 기반하고 있다고 누구라서 장담할 수 있을까? 선악 지식은 찌르는 칼이다. 자신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가장 큰 무기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기준으로 인생들은 서로에 대해 관계를 설정하려 한다.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 혹은 이렇게 해야 하는데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식이다. 즉 특정한 기준을 중심으로 상대에 대해서도 혹은 자신에 대해서도 판단하고 재단하게 된다. 나에게 유익한 것이면 ‘선하다’ 하고 나에게 불리한 것이면 ‘악하다’ 한다. ‘너는 틀렸고 악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따라서 ‘화’의 근원도 따지고 보면 이 ‘선악 지식’ 때문이다. 지식은 달콤한 유혹이다. 지식은 힘을 길러주는 강력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지배한다. 객관적인 지식이든, 이전부터 알고 있는 지식이든, 지식은 에고를 중심으로 생성되고 해석되고 적용된다.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있는 우리 인생들의 처연(凄然)한 실상이다. 인생들이 ‘선(善)’이라고 하는 ‘선’은 따라서 ‘선’이 아니다. 자신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기능하는 모든 것을 ‘선’이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 ‘선’이고, 나에게 ‘선’인 것이 상대에게는 ‘악’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의 전쟁은 거기서 비롯된다. 우리 인생들이 아무리 ‘선’이라고 해도 결국 그것이 ‘선’일 수 없는 까닭은 이기적인 자아를 중심으로 한 해석체계 때문에 그러하다. 성경을 들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더욱 첨예하게 지식의 특성이 나타난다. 경전을 빗대어 이단으로 규정하는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인류의 모든 전쟁은 종교전쟁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더욱 극단적인 스스로의 ‘선’에 빠져 그 외의 것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야 말로 ‘선악과’를 먹고 있는 인생임을 자증(自證)한다. 교리(도그마)는 종교적 지식체계다. 교리는 대개 신에 대한 지식체계인데, 이것이 얼마나 큰 선악의 지식으로 작용하는지 끔찍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교리적 지식체계는 그에 반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섬뜩하다. 이게 ‘아담’ 곧 사람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은 것이 원인이 되어서 오늘날 우리도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처음 사람은 모두가 그러하다는 것이 에덴의 아담 이야기다. 에덴의 아담 이야기는 그 같은 우리 인생의 실존을 드러내주고 있는 이야기다. 처음 사람(아담) 안에서는 누구나 예외 없이 그러하다. 우리는 모두 이기적인 자아를 중심으로 태어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에덴 이야기를 통해서 진단하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마지막 날’이란 우주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위와 같은 선악의 세계관이 끝나는 날을 의미한다. 처음 사람의 때를 마치고 두 번째 사람으로 태어나는 때를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40, 44, 54)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악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생명’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선악의 지식이냐, 아니면 생명의 로고스냐.’다. 때가 가까웠다는 이야기는 예수 당시부터 있었던 이야기다. 이 말을 오해한 사람들이 당시에도 ‘종말론적 광란’을 일으킨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같은 광기는 도처에서 반복되고 있다. 처음 사람을 유월하여 두 번째 사람으로 넘어가는 유월절, 선악이 아닌, 생명의 속성이 충만하게 되고 거룩함이 넘쳐나는 때가 도래하는 ‘오순절’과 모든 열매를 거둬서 창고에 들이는 수장절은 두 번째 사람 내면의 여정이기도 하다. 하여 처음 사람의 시대는 ‘크로노스’라는 시간에 종속되었다면, 두 번째 사람의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에 편입된다는 뜻이고, 이것은 끊임없이 위로부터 생명의 에너지를 교감하며 영성의 깊이가 더해지는 영성의 시간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에서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할 때의 시간은 곧 ‘카이로스’의 시간을 일컫고 있다. 이를 크로노스의 종말의 때가 가까웠다는 것으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너무 깊은 오해에 빠져 있는 것이다. 본래, 육신의 생존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어야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스런 본능이다. 그래서 ‘처음 사람’이라고 한다. 육체의 생존방식이 정신에 그대로 반영된다. 우리 인생은 ‘처음 사람’으로만 산다면 비록 하나님을 믿을지라도 본능으로만 사는 ‘동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성경의 규정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도덕을 만들고 윤리를 규정하고 각종 법률과 제도를 갖추고 성경을 들고 하나님과 예수의 이름을 빌어 미려한 종교를 구축한다 해도 본질적으로 ‘직립 보행하는 동물’일 뿐이라는 것이 성경의 진단이다. 인간의 정신이 약육강식의 세계에 노출되어 있는 동물의 형상일 뿐이다.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그 같은 세계관에서 한 번 더 새로워진다는 이야기다. ‘생명’의 질서에 의해 살게 된다는 의미이며, 이기적인 자아가 선악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에서 생명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리로 살아가는 삶이 전개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생명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선악에 경도된 인생들은 알 수 없다.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선악의 체계에 의해 잘 짜인 시스템에서 생명의 시스템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선악의 세계에 대한 반란이며, 소동하게 하는 것이고, 혼란스러운 것이며, 선악의 세계관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생은 선악의 세계를 극복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이기는 자’란 선악의 세계관을 넘어선 자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과 흔히 말하는 우주 종말론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처음 사람은 선과 악의 가치관, 그 같은 세계관에 젖어 살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주의 종말을 가정하고 상정한다. 선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우주의 종말과 관련해서 읽고 해석하려 한다. 인생이 우주의 종말에 대해서 관심 갖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해도 보편적인 관심 사항이기도 하다. 인생이 내일을 예측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갖고 예측해 볼 수는 있지만, 동시에 신비하게도 한치 앞도 알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류의 지혜는 모든 과학과 통계 자료를 동원하여 예측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종합하여 예측시스템을 갖추려 한다. 종말에 대한 호기심 또한 누구나 갖게 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신비가 아니라 약점일까? 그것은 약점이 아니라 신비이며 생명의 오묘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의 약점으로 이해하는 인생들! 하여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그 같은 것을 토대로 점쟁이가 발흥하고 술객들이 기승을 부린다.
‘종말론’은 그 같은 인생들의 심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종말론’은 그 뿌리에 ‘선악’이 자리 잡고 있다. 종말론 사상은 철저히 ‘선악사상’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고 있는 처음 사람들이 주창하게 되어 있는 선악의 연장으로 ‘종말사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종말사상은 흑사병처럼 기독교인들에게 감염되어 있다. 죽음의 병이다. 그것은 단지 시한부 종말론 자들에게 한정한 말이 아니다. 성경의 핵심 사상은 ‘부활’이다. 종말론은 부활을 거세시킨다. 온통 부활이라는 말로 치장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성경의 핵심인 부활을 실종시키는 음모(?)가 담겨 있다. 부활은 사망의 권세에 갇혀 무덤 속에 죽어 있는 ‘나사로(하나님의 도우심)’가 다시 사는 것이다. 선악의 무덤에 갇혀 있는 존재가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다.
선악이 무덤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살아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덤 문을 굳게 닫아놓은 채,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부활을 거세시키고 있으니 종말론의 페스트가 얼마나 지독한 질병인지 알 수 있다. 마르다 역시 ‘마지막 날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을지라도 오늘날 ‘종말론’에 감염되어 있는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성경은 ‘우주의 종말과 인간의 사후’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이것은 신비다. 흔히 기독교는 ‘내세 종교’라고 말한다. 그것은 신학자들의 해석일 뿐 정작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현세의 생명 사상이다.
내세 종교는 역설적이게도 내세 종교일 수 없다. 내세 종교는 현세를 오도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내세조차 오도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마르다의 이야기가 이를 잘 말해 준다. 부득불 종교라는 표현을 써본다면 현세 종교만이 내세 종교다.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으로 삼분하여 시간을 나누면 과거(어제), 현재(오늘), 미래(내일)다. 어제와 내일은 ‘오늘’로부터 구원된다. 오늘 ‘부활’은 어제를 새롭게 한다. 오늘 ‘부활’은 내일을 구원한다. 오늘은 내가 나로 사는 날이지 나를 희생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날이 아니다. 오늘의 희생으로 내일 부활하게 된다는 것은 사기이며 혹세무민이고 거짓말이다. 우리는 오늘을 버려둔 채, 내일 어떻게 되는가에만 관심을 갖는다. 스스로를 속이고 자위하기 위한 함정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버린 것이다.
성경은 내일(종말론적 내일)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성경의 예언은 종말론이 아니다. 성경은 두 번째 사람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예언자들은 오로지 ‘아들’에 대해 예언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는 말 속에 예언의 전부가 담겨 있고 함축되어 있다.
처음 사람 속에 있는 ‘나’는 죽어 있는 ‘나’다. 즉 선악으로 사는 ‘나’라는 말이다. 그때의 나는 무덤이고 사망이다. 죽은 나사로다. 거기서 부활한 ‘나’는 다시 태어난 ‘나’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나’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면, 우리도 마침내 ‘내가 나’가 되게 되어 있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부분이다.
오늘 ‘내가 나’가 되면, 어제의 처음 사람은 오늘의 ‘나’를 위해 존재했기에 비로소 어제는 거룩해진다. 비록 선악의 세계에 경도되었던 어제라 해도 오늘 ‘내가 나’로 살게 되면 어제인 처음 사람이 토대가 된 것이기에 어제는 저절로 거룩해지는 것이며, 어제가 더욱 신비롭게 되는 것이다. 선악의 세계조차 오늘로 말미암아 거룩해진다는 말이다. 오늘 ‘내가 나’로 산다면 내일도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다. 종말의 때에 상급이 어떻고 하는 식이 아니라, 내일은 오늘의 나로 말미암아 ‘내가 나’인 그것으로 말미암아 구원된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대로 현현되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고 세상 죄에서 구원할 자라면 ‘내가 나’가 되는 순간 비로소 ‘여호와’는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로 이어지는 이름의 값을 하게 된다. 무덤 속의 내가 ‘나’로 부활하기 때문에 예수는 거기서 구원자로 등장한다. 여호와가 예수가 되고 부활한 ‘나’가 비로소 ‘나’가 된다.
따라서 성경이 종말을 함구하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마지막 날’을 종말론으로 혹세무민하는 종교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발흥하고 있는데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랴.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하신 것이다.
우리가..죽기전에...잠깐은... 한번쯤...생각해보고...가자 ! 2000년이 넘고넘어....그리도...기다리는 사랑이...있는지를....! 창조주앞에...까불지말라 ! 너희가...영원히...죽을까하노라 ! 너희가...별을...따랴 ! 너희가...달을...만들것이냐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개나 소,돼지에게 성경책을 주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짐승들에게 먹을것을 주면 짐승들은 주인을 좋아라한다 ! 너희가....짐승이냐 ? 이제...너희와 약속된...용서의... 기다림의 시간이 다가왔음이라 !
창조주앞에.... 바짝...업드려... 두려움을...생각하고...참회하라 ! 그리고..지금도 기다리시는... 주님꼐...돌아오라 !
어찌하여 말벌의 침과 전갈의 독침은 두려워하면서 너의 영혼을 잡아 먹는 사탄은 두려워하지 않느냐 ! 너의 눈은 멀었으며 너의 귀는 어두워졌으며 너의 마음의 빛은 꺼져 사탄의 어둠에 갖혀있음이라 ! 인간의 썪어질...육체는... 인간의 삶의 ...목표도...목적도...전부...아니다 인간이 어찌하여... 개나...돼지나...닭이나..소처럼.... 저차원의 동물로 남아...사단과 악마의 자식으로..살려하는가! 숨어 살아있는....영원한...다음세상이 있음을...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라 ! 죽은후에는...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뿐이다 ! 사후에는 잠든 너의 영을 깨울수도 없으며 너의 영은 거듭날수도 없다 !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라 ! 그길로 가는 법은...오직한길... 하나님이...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게 주신... 생명의 성경 말씀...뿐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창조주... 하나님은 반드시 계신다 ! 어리석은 자들아....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혜어보라 ! 그...끝도없이...많은 별들을... 만드신이는 석가도...마호메트도...교황도...목사도...신부도 성황당 고목나무도...돌부처도...돌아가신...내부모도... 하느님도..하늘님도 아니며...하날님도 아니라 ! 모두 ..아니다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창조주는..오직...한분! 하나님 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그들도...모두..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며, 죄인이다 ! 못 알아 듣는자는....짐승이다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신은
오직 한분...창조주...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의 무한하신 참사랑으로 돌아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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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막이 지혜..이건 아닌데.
법궤가 무언지 아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