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와 편한 휴식을 취하며 옛 여행 사진들을 넘겨보는데 그보다 더 먼 옛 추억을 불러다 주는 사진들이 있었다.
그 단상들을 따라 가본다.
"외할매~ 익이 왔심더~"
싸립문 열고 들어서면 방문 벌컥 여시며,
"아이고, 우리 구이기, 외할매 보고 싶어 또 왔구나~"
규익이 발음이 안 돼 늘 내 이름을 구이기라 부르시던 외할머니 반겨주시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다.
하늘색 장화...
검은색 장화 일색일 때, 어머니는 무슨 마음이셨는지 하늘색 예쁜 장화를 사주셨다.
그날부터 비 오는 날만 기다렸는데, 사는 일이 다 그렇듯 기다리지 않을 땐 흔하던 비가 왜 그리 내리지를 않던지...
드디어 비 온 날, 비 그치길 기다리지 못하고 골목으로 뛰쳐나가 물고인 웅덩이는 다 밟고 다녔다.
온몸 비에 흠뻑 젖은 채 철벅 철벅~ 힘껏 물 튕기면서...
겨울방학 외할머니댁 이른 새벽엔 이불속으로도 한기가 밀려들었다.
그때쯤이면 자작자작 아궁이에 불 때는 소리 어렴풋이 들렸고, 등이 조금씩 따뜻해져 오면 외할머니 군불에 담긴 사랑을 품고 맛있는 새벽잠을 다시 들였다.
요즘이야 잔치를 벌여도 외식이 주류라 힘들게 없다.
예전 잔치는 얼마나 힘들었던가...
불편한 부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부쳐도 부쳐도 모자라던 전이며 구워도 구워도 끝이 보이지 않던 잔치 음식들, 마당 가마솥에는 하루종일 국이 끓고 있었다.
내 나이 여덟에 돌아가신 큰고모, 장례도 잔치였던지 내 어머니 큰 고모댁 좁은 부엌에서 하루 내내 일어서 허리 펼 틈 없으셨다.
철없으니 고모 돌아가심이 슬픈 줄도 몰랐고, 이리저리 어수선한 마당에서 모처럼 만난 사촌들과 놀고 있는데, 어머니 눈 마주칠 적마다 손짓으로 부르셨다.
부엌으로 들어가면 이리저리 눈치 살피시며 내 입에 전 한 귀퉁이 뚝 떼어 넣어주셨는데 맛은 좋았지만 왠지 죄짓는 것 같아 마음 편치 않았다.
그때부터 어머니 눈 피해 다녔는데 애써 눈 맞추려 애쓰시던 어머니, 그 모습 지금도 내 가슴에 짠한 아픔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첫댓글 사진 속 추억들은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더군요.
외할매.
참 정겹지요.
이번 토요일에 두 돌 맞는 손자한테
외할매,해보라고 하면 아직은
발음이 어려운지 그냥 함미라고
하네요.
고모님 장례식이 여덟 살 소년에게는
장례식인지 잔치인지 헷갈렸겠지요.
부엌으로 살짝 불러
전을 먹여주시던 어머니.
사랑입니다.
마음자리 님, 글 잘 읽었습니다.
돌아보면 추억은 감정선에 가장 민감한 코앞에서 늘 서성거리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느낌이 좋아서 자꾸 추억을 끄집어내나 봅니다.
당시에는 귀한 전이지요.
제사나 명절에나 볼 수 있었으니까요.
어머니와 어린 아들 간의
애정어린 교감이 찡합니다.
어머니 눈길을 피하셨다는 마음자리님의
고운 마음에 또 찡합니다.^^
눈 맞추면 자꾸 오라고 손짓하는 바람에 사람들 사이로 몸 감추고 다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ㅎ
저도 여름방학이면 외갓집에 자주 갔는데,
딸부잣집이라 온 외손주들이 모여드는 통에
외할머니와 외숙모께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릴 적이지만 외손주 중에 제법 똘똘하다고
유난히 아껴주시던 외할머니가 그립습니다.
저도 방학만 되면 외가를 갔는데...
홀로 외할머니 모시고 살던 외숙모가
많이 힘드셨을 겁니다.
나중에야 외숙모 힘들다고 가지마라 하시던 어머니 그 마음이 이해되었지요.
장화가 작아질까 발이 크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지요 .
옛적 사진은 아련한 슬픔의 흔적이라
저는 사진은 잘 보지 않습니다.
우리엄마는 솜씨가 좋으셔서 잔치집
상차림(?)이 엄마의 몫이었죠 .
엄마 눈을 피하셨다는 마음자리님ㅎㅎ
저는 아예 잔치집엔 안 갔습니다.
고모집이 저희집과 너무 가까워 안 가볼 수도 없었어요. ㅎ
슬픈 날 같은데 문상 온 손님이나
음식 장만하는 친척분들이 별로 슬퍼보이지 않아 이상하다 느꼈던 기억도 납니다.
저는 아주 어릴 적엔 숫기가 부족해서
큰집가서 제사를 지내고도 밥을 안먹고 집으로 돌아온 기억이 납니다.
그 돌담들, 봄이면 진달래 만발하던 뒷동산...
덕분에 저도 잠시 기억을 소환해봅니다.^^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던 소년이 남같지 않습니다. ^^
큰집은 저도 왠지 어려워 갈 일이 있어도 안 가려고 꾀를 부리곤 했어요. 대신 외가에는 반겨주시는 외할머니가 계시니 틈만 나면 가려고 애를 썼구요. ㅎ
개구쟁이 짓은 다 하는 꼬마지만,
체면은 차릴 줄 아는 꼬마...^^
그래서, 엄마는 늘 마음님을 챙기고
마음님의 마음 한 곳은 그리움을 남깁니다.
형님을 행님이라고 발음 하듯이
저의 외할머니도 향이를 행이라고 합니다.
옛사진은 빛도 바랬고,
뒷배경도 별로지만,
마음 한 곳을 차지하는 그리움은
진하기만 합니다.
저도 저를 잘 모르겠어요. ㅎㅎ
호기심이 무척 많았던 꼬마였음은 분명한 것 같은데요. ㅎ
마음자리님의 글에서 자주 나오는 경상도 사투리는
요즘 아이들은 잘 쓰지 않는 깊은 맛이 느껴지는
어른들의 사투리입니다. 정겨워요.
"왔심더" 라는 등의...
제 아들도 사춘기 지나면서부터 눈 맞추기를 않더라구요.
남자들은 다 그런가? 억지로 얼굴 부여잡고 엄마 눈 좀 봐~할 때가 종종 있어요.
어릴적 시골 외가집의 추억은 늘 정겨움이죠.
점심식사 후 차 마시며 읽는 글에서 미소가 절로 나옵니다.
늘 안전운전 하시길...
사투리는 의도적으로 쓰는 편입니다. 젊은이들이 말을 줄여 하는 말들을 못 알아듣는 것이 많은데 이러다가 우리들의 사투리도 금세 사라지고 말 것 같아서... 글에라도 남겨두고 싶은 의도로. ㅎ
여러 지방 사투리들이 글에 많이 남겨지면 좋겠어요.
마음자리님의 외할매 소리에
한번도 뵙지 못한 외할머니가 그리워집니다.
방학이면 외삼촌 댁에 가곤 했지만
외할머니의 사랑과는
다를 것 같아요.
그럴 것 같습니다.
외삼촌도 반겨주셨지만, 외할머니만큼은 아니셨어요. ㅎ
속 깊은 어머니의 사랑이 한 눈에
보이는듯해요.
여덟 살때도 참 어른스러웠어요.
그러게 골목대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저 정도로 속 깊다 할 수 있을까요?
한쪽에선 곡하고 한쪽에선 떠들썩 한데 어머니가 급히 제 입에 넣어주는 그 전을 먹기가 눈치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ㅎ
어렸을적 생각 납니다..
초상치르는 것도 우리들 눈엔 잔치같은
분위기 에...
어머니 슬쩍 손짓 따라서 가면 아무도몰래
재빠르게 입속에 맛난거 넣어 주시던
그모습 생생 하지요.
이름도 발음 편하게들 부르셨어요.
수영이...쉬엥이.......창규...챙기..
할머니들 이렇게 부르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