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FILM2.0 2006. 07. 11
왕우가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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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왕우 특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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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1 / 주성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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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7월 13일 개막하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가장 주목할 만한 게스트 중 하나는 왕우다. 이미 몇 년 전부터 그의 영화들이 ‘쇼 브라더스 특별전’ 형식으로 상영됐기에 그리 낯설지는 않다. 이소룡과 성룡의 등장 이전 최초의 범아시아 액션 스타로 군림했던 왕우 특별전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홍콩영화사의 진정한 4대 천황을 꼽으라면 왕우, 이소룡, 성룡, 주윤발이다. 쉽게 말해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저 네 사람만으로도 수십 년간 아시아 영화시장을 호령했던 홍콩영화사 전체가 정리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뒤의 세 명에 비해 왕우는 그다지 한국의 젊은 관객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소룡은 그 독특한 아이콘으로 인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아는 것 같은’ 인물이고, 성룡과 주윤발은 여전히 중요한 현재형의 이름들이다. 하지만 왕우는 너무 오래 전의 사람이다. 아니, 분명 10여 년 전까지 활동한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과거의 인물로 느껴진다. 그것은 스타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홍콩영화계가 짧은 기간에도 지나치게 역동적인 변화과정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홍콩영화계는 언제나 선구적인 작품 혹은 배우들이 앞서나가며 주도권을 주고받으며 이어져왔다. 그렇게 늘 새로운 스타는 앞선 스타를 완전히 밟으면서 등장했다. 저 네 명의 개성이 완전히 다른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브래드 피트는 공존할 수 있지만 왕우와 성룡은 그럴 수 없고, 송강호와 박해일도 공존할 수 있지만 성룡과 주윤발은 같은 영화에서 함께 살 수 없다. 홍콩영화는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그 장르와 스타일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다.
왕우가 1980년대 초반까지 왕성한 활동을 벌이면서도 국내 관객들이 쉽게 그를 잊게 된 것은, 새로운 스타가 등장함과 동시에 거의 완전히 산업이 재편되는 홍콩영화계의 특성에 기인한 바 크다. 바꿔 말해 왕우는 이소룡과 성룡이 등장하기 이전 홍콩영화계 최고의 스타였고, ‘아시아 영화시장’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최초의 범아시아 엔터테이너였다. 물론 그의 팬들은 세계 도처에 있다. <용호의 결투> <독비권왕대파혈적자>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 시리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스티브 오데커크의 경우 왕우가 감독하고 주연한 <호학쌍성>(1976)의 필름을 그대로 가져와 왕우의 얼굴만 자신의 얼굴로 바꿔 넣어 <퓨전 쿵푸>(2002)를 만들기도 했다.
왕우의 등장은 무척 중요하다. 1950년대까지 홍콩영화계는 광동어영화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이른바 무협영화는 <화소홍련사>와 <황비홍> 시리즈 등으로 그 본격적인 싹을 틔어갔다. 중요한 변화는 60년대 들어 시작된다. 북경어영화 제작자들의 합리적이고 치밀한 제작, 배급능력을 바탕으로 북경어영화가 서서히 시장을 장악해갔다. 그들이 동남아시장을 거의 장악해버리자 광동어영화의 해외수출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 그 중심에는 홍콩영화사상 가장 강력하고 규모가 컸던 영화사 쇼 브라더스의 약진이 있었다. 1961년 이미 10개의 스튜디오, 16개의 야외세트, 전속 연기자와 스탭들이 5천여 명에 가까운 할리우드형 영화왕국이었다. 왕우는 바로 쇼 브라더스가 낳은 첫 번째 최고 스타였고, 쇼 브라더스가 계속 시장의 주도권을 쥐게 만들어준 흥행불패의 보증수표였다. 또한 무협영화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변발도 대머리도 하지 않은 채 늘 날카로운 눈매와 훤칠한 키의 호리호리한 몸매로 등장한 그는 홍콩영화계 최초의 ‘현대적’ 스타였다. 특히, 장철 감독과 더불어 ‘죽어야 사는 남자’ 이미지를 완성하여 쇼 브라더스의 황제로 군림했다.
그런 그가 올해 부천영화제를 찾는다. 수년 전 부천영화제를 찾았던 <방랑의 결투>의 정패패와 <복수>의 강대위로부터 이어지는 홍콩영화계 최고의 게스트다. 더불어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원제: 독비도), <금연자>, <용호의 결투>(원제: 용호투), <마소진보형구>, <영웅본색>, <독비권왕대파혈적자> 등 6편의 영화들이 상영된다. 정선새 감독의 <마소진보형구>(1972)는 역시 같은 감독의 <패왕권>(1972)과 <천왕권>(1972)으로부터 이어지는 속편이다. 왕우가 택시 운전사로 출연하는 <영웅본색>은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1986)의 오리지널 작품인 용강 감독의 <영웅본색>(1967)과는 무관한 작품이다. 이렇게 왕우가 쇼 브라더스로부터 독립하고, 감독을 겸한 이후 영화의 저작권과 수급 문제로 인해 그의 대표작과 현대물들을 망라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왕우의 세계’를 체험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7)와 <금연자>(1968), 장철과 왕우의 최고봉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이하 ‘<외팔이>’)는 장철 감독 스스로 자신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무협 스타일을 시도한 첫 번째 영화라고 말하는 작품이다. 홍콩에서 1966년 4월 호금전의 <대취협>이 개봉했고, 1967년 7월 <외팔이>가 개봉하면서 홍콩영화계는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됐다. 당시 홍콩에서는 007 영화와 스파게티 웨스턴, 일본 사무라이영화들이 엄청나게 큰 인기를 얻었고 <외팔이>를 비롯한 영화의 흥행에는 그 영향이 컸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가 홍콩에서 1964년 개봉해 이후 속편들도 큰 흥행을 기록했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나 <츠바키 산주로>도 흥행대결에 합류했으며, 1965년에는 <자토이치> 시리즈 또한 차례로 개봉해 성공을 거뒀다.
<외팔이>에서 왕우가 지니고 있는 안티 히어로적인 이미지는 앞서 만들어진 장철, 왕우 콤비의 <단장의 검>(1967)의 연장이면서 그것의 새로운 변주이자 총합이라 할 만하다. 방강(왕우)은 아버지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스승을 구한 이후, 그 문파로부터 거둬져 무술을 익히며 자란다. 하지만 스승이 그를 신뢰하는 것을 질투하는 사형들은 스승의 외동딸과 함께 사사건건 그를 괴롭히고, 마침내 그는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부러진 칼을 챙겨 문파를 떠나려 한다. 사실 그를 흠모하고 있던 외동딸은 그를 막으려다 실수로 그의 오른팔을 자르고 만다. 피를 흘리며 도망치던 방강은 근처 강가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여인(초교)에 의해 간신히 목숨을 구하고, 그녀와 함께 살게 된다. 검객으로서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방강은 아버지가 남긴 부러진 칼을 하나뿐인 손에 든 채 무술을 연마한다.
<외팔이>는 홍콩영화계에 무척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장철은 <외팔이>를 통해 ‘백만 불 감독’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외팔이>가 백만 홍콩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린 첫 번째 홍콩영화였기 때문이다. 홍콩영화로서는 최초로 핸드헬드 카메라가 사용됐기에 그 속도와 동작에 있어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고 이후 많은 무협영화들이 그 안에 머물렀다. 또한 이후 <금연자> <철수무정> <보표> 등 거의 모든 장철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한 예광의 데뷔작이 바로 <외팔이>다. 기자로도 활동하다가 무협, 공상과학 소설가로 활동하며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하기도 했던 그는 이소룡의 <당산대형> <정무문> 등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으니 왕우와 이소룡 모두 보여주는 ‘고독한 안티 히어로 고수’ 이미지의 원류를 짐작케 한다. 그렇게 <외팔이>를 봐도 알 수 있듯 왕우와 이소룡 모두 버디 무비라던가 남과 협력해서 힘을 발휘하는 인물이 아니라 오로지 혼자 활약하는 액션 스타다.
한편, 치명적인 신체적 약점을 지니고 살아가는 ‘외팔이 검객’이라는 설정 자체는 천재적인 맹인 검객 이야기인 <자토이치> 시리즈로부터 온 것이었다. 하지만 <외팔이>가 보여주는 육체에 대한 고통과 쾌락이라는 모순된 이중주와 잔혹미는 이후 장철 영화의 개성을 부여한 육체성의 시작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자토이치 역할로 유명한 배우 가츠 신타로가 왕우를 영입하여(물론 그 자신도 자토이치로 출연하여) 외팔이 검객과 맹인 검객의 대결을 그린 <외팔이와 맹협>(1971)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다는 사실이다.(왕우는 토호영화사 제작이었던 이 영화에 출연하면서 쇼 브라더스와 법정싸움을 벌였다) 또한 <외팔이>의 엄청난 흥행에 힘입어 1969년 왕천림 감독은 <독비도>(<외팔이>의 원제)를 모방해 코미디를 가미한 <신경도>를 만들었다. 왕천림은 바로 1990년대 홍콩영화계에 ‘카지노 무비’붐을 일으켰던 패러디의 제왕 왕정 감독의 아버지이기에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금연자>는 공식적으로 호금전 감독의 출세작이자 정패패가 ‘금연자’로 출연한 <대취협>의 속편이다. 하지만 단순한 속편을 원하지 않았고, 호금전과 자신은 분명 다르다고 생각한 장철은 예광에게 시나리오를 부탁하며 ‘금연자’라는 설정 자체만 남겨두고 은붕(왕우)을 주인공으로 몽땅 바꾸길 원했다. 결과적으로 <금연자>는 장철 감독만의 개성을 본격적으로 남기기 시작한 첫 번째 작품이 됐다. 장철 스스로도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작품 중 하나’라고 말했고, 그의 조감독 출신이었던 오우삼도 ‘<외팔이> <유협아> <복수>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장철 감독 영화’라고 말했다. 금연자는 강호를 떠나 산속에서 한타오(나열)와 함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편, 방랑자 은붕은 자신의 사매이자, 짝사랑의 대상인 금연자를 강호로 끌어내기 위해 적들을 죽인 자리에 늘 금연자의 비녀를 둔다. 그러나 은붕을 만나기 위해 강호에 들어온 금연자는 곧 위험에 처하고, 은붕은 그를 구하기 위해 칼을 빼든다. 역시 금연자를 사랑하는 한타오 또한 금연자를 찾으러 나온 상황, 은붕과 한타오는 금연자를 사이에 두고 갈등하는 가운데 피할 수 없는 결투를 벌이게 된다.
<금연자>는 장철 감독 스스로도 일본 사무라이영화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외부 신들은 실제로 모두 일본에서 촬영됐다. 또한 이때부터 일본 촬영감독 유키오 미야키와의 오랜 파트너십이 시작된다.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는 왕우의 무모하고 초인적인 비장미는 그야말로 <금연자>에서 최고조를 이룬다. 다소 가냘픈 몸매에 세련된 외모, 기존의 액션 배우들과 차별화된 모던한 이미지도 그의 남다른 매력 중 하나였다. 왕우가 매력적인 것은 그가 사리사욕에 가득 찬 인물이라는 점에서다. 스스로 공명심을 추구하지도 않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제 맘대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자유인이자 방랑객이지만 결정적으로 사회화가 덜 된 미숙아다. 왕우의 액션이 ‘세게’ 다가오는 것은 그가 늘 이기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라도 질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다. 왕우는 피를 뒤집어쓴 채 극한의 위기에 몰렸을 때 최고의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그렇게 <금연자>는 다대일 결투 장면 사상 세계 영화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학살을 펼쳐 보인다. 흰 옷에 피 칠갑을 한 채 죽기 직전까지 화살과 창과 채찍까지 든 무수한 적들과 쉼 없는 대결을 벌인다. 대량의 피와 잔혹한 폭력, 남자 주인공의 처절한 ‘순교’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장철식 폭력 미학이 꽃을 피운다. 그 죽음의 순간만큼은 <방랑의 결투>를 넘어 호금전의 <협녀>(1971)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초월성과도 맞먹는다. 스티븐 테오는 <금연자>를 두고 ‘호금전의 시도에 전혀 뒤지지 않을 바로크-시적인 성취’라고 말했다.
<용호의 결투>(1970)와 <독비권왕대파혈적자>(1976), 감독 왕우의 진면목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와 <금연자>가 이미 몇 년 전 부천영화제를 통해 첫 선을 보인 영화들이라면, <용호의 결투>와 <독비권왕대파혈적자>는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자 ‘감독 왕우’로서 완성한 영화들이다. 왕우의 감독 데뷔작인 <용호의 결투>는 이른바 맨손 액션이 주가 되는 ‘권격’ 영화의 효시라 할 수 있다. 타란티노가 존경을 바쳤다는 정창화 감독의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 이소룡 주연의 <정무문> 역시 <용호의 결투>의 계보 안에 자리해 있다. 무도관을 중심으로 살아남은 제자가 복수를 하고, 가라테 등 외국 무술과 겨룬다는 점에서 이후 ‘화교사회의 영웅’으로 등장한 이소룡에게 미친 영향은 특히 크다. 말하자면 <용호의 결투>는 중국인과 외국인 간의 본격적인 무술대결을 다룬 최초의 무술영화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같은 해 만들어진 장철 감독의 <복수>처럼 중화민국 초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다루면서 중국인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까지 던졌던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유도를 배워 돌아온 조이(조웅)가 충의무관으로 쳐들어온다. 하지만 관장(방면)의 실력 앞에 무릎을 꿇은 그는, 얼마 뒤 가라테 고수 기타지마(나열) 일당을 끌고 돌아온다. 그들은 관장을 비롯해 무관 사람 모두를 몰살하고 온 마을을 지배한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뇌명(왕우)과 그의 여자친구 소령(왕평)은 복수를 꿈꾼다. 혹독한 수련 끝에 철사장과 경공을 익힌 뇌명은 조이 일당의 도박장에서 무고하게 해를 입고 자살한 이웃을 보고는 기타지마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영화는 왕우가 비록 장철과 쇼 브라더스를 떠났지만 당가 무술감독을 비롯 기타지마 일당으로 등장하는 나열, 진성, 왕종 등 장철 영화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 그럼에도 강간 장면이 직접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편집의 묘미보다는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액션 신 등 뚜렷한 차이점을 확인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역시 앞서 말했듯 검술영화에서 권격영화로의 일대 전환이라 할 것이다. 손가락으로 두 눈을 단숨에 내지르는 등 그 단순 과격한 묘사는 확실한 그만의 서명을 남긴다.
<외팔이> 시리즈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왕우는 <용호의 결투>로 독립한 뒤, <흑백도>(1971)를 시작으로 점차 자신의 활동무대를 대만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홍콩과 대만을 활발히 오가며 감독 겸 배우 겸 제작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가 대만에서 만들었던 대부분의 영화들은 왕우의 감독 데뷔작인 <용호의 결투>의 ‘권격영화’ 자장 안에 있으며, 또한 장철 감독과 함께 완성했던 자신의 죽음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변주했다. 근현대 혹은 현대, 파트너 없이 오직 왕우 혼자 악의 세력과 대결하는 가공할 육체의 판타지는 그의 영화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특히 그는 강대위와 함께 출연한 <독비쌍웅>(1976) 등 자신의 ‘외팔이’ 캐릭터를 착취에 가까울 만큼 변주했다. <외팔이 드래곤>으로 잘 알려져 있는 <독비권왕>(1971)은 자신의 외팔이 캐릭터를 되살림과 동시에 <용호의 결투>처럼 자신이 몸담고 있던 무도관을 박살낸 일본의 가라테 고수, 한국의 태권도 고수, 인도의 라마승 등 세계 각국 고수들과의 한판 대결을 그리고 있다. 한때 유행했던 전자오락 ‘스트리트 파이터’식의 글로벌 대결이 여기서 펼쳐진다고 보면 된다.
<독비권왕대파혈적자>는 바로 <독비권왕>의 속편이다. 전편에서 외팔이 왕우에게 사랑하는 제자들을 잃은 라마승 금강이 복수를 위해 그를 찾아오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지닌 ‘혈적자’라는 무기다. 하몽화 감독의 <혈적자>(1975)에 등장한 바 있는 그것은 이른바 ‘플라잉 길로틴’으로 요요처럼 날려서 상대방의 목을 통째로 뽑아버리는 무기다. 바로 <킬빌>에서 유바리 고고(구리야마 치아키)가 들고 다니는 작은 철퇴가 그것의 변형이다. 타란티노는 이 영화에 대한 애정도 깊어서 오렌 이시이(루시 루)의 후반부 장면에서 <독비권왕대파혈적자>의 주제음악까지 사용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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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재 구상 하시느라 방장님 마니마니 애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