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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성령충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성령충만
손양원목사 옥중편지(아들 동인에게/1945.7.27)
부산에 있는 아들 동인에게
(1945년 7월 27일)
먹고 입는 것이 귀해졌다 하여 마음까지 잃지 않아야 하고, 음식을 잘 먹는 것보다 마음을 잘 먹는 것이 좋고, 의복으로 몸을 단장하는 것보다 선행을 옷입듯 할지니라.
돈에 서러움을 당하고 먹을 것이 없다 하여 돈과 밥을 더가까이 할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청렴하는 것이 도인(適人)의 태도니라. 그래서 모든 만물은 다 볼 탓이요, 마음 가질 탓으로 좋고 좋지 않음이 있을 뿐이니라. 물질이 귀함을 탄식하지 말라. 물극도통(輸極道通)이라. 물질이 극하면 도를 통하는 이치요, 배부르고 안일하면 음란과 모든 죄가 저절로 나오지만 춥고 배고프고 곤고하면, 회개와 도심(道心)이 발하게 되는 것이니라. 또한 지금 물질이 귀하다 함은 너와 나뿐 아니라, 전 세상 판국의 환난이니 단념함보다도 이 중에 서 번뇌 근심의 우울에 빠짐보다도, 생명의 진리의 도를 구 할 뿐이니라.
물질은 구하고자 하나 구해도 얻지 못하고, 사람의 생사는 임의로 좌우됨이 아닌즉, 범사를 주께 맡겨 자연히 태연히 걷는 걸음에서 주의 섭리의 권고가 있을지니, 너회들은 항상 기뻐 범사에 감사의 생애를 보내라. 이것이 기독자(基督者) 니라. 평시 범상 시에는 누구나 기뻐 않으리요. 고난과 역경 중에 감사하고 기뻐함이 신앙생활이다. 고난을 피하려고 염려하지 말고, 도리어 감수(甘受)하고 극복
하라. 피하려고 애쓰는 자는 근심이 더해지고, 감수하는 자는 진리 발견의 기쁨이 충만하리라! 고난을 감수하니 마음 속(心中)이 낙원이 요, 만사를 극복하니 용사보다 강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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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목사 옥중편지(아들동인에게/1945.8)
부산에 있는 아들 동인에게
(1945년 8월 일자미상)
소자들아 삼가 죄를 범하지 말라.대개 사람이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 되어 일생을 고통으로 살게 되느니라. 나는 무엇보다도 너희들이 행여나 죄를 범할 까봐 늘 가슴에 염려한다. 물론 너희들이 그렇지 않을 것만은 의심치 않으나, 행여나 마귀의 세력에 유혹이 될까봐 아버지 된 나로서 어찌 생각이 없을 수 있겠느냐. 나는 지금이같이 수금(團禁)중에 있어도 어릴 때부터 주의치 않은 습관 죄악과 아직도 싸우고 있다. 죄의 씨란 어찌도 무섭고 강한지 말할 수 없다.
너희들은 깨끗하나 행여나 내 죄가 너희들에게까지 미칠까하여 주께 간절히 빈다. "하나님이시여! 예수의 공로로 아담의 원죄를 없이함 같이 내 죄가 자녀에게 성신의 능력으로 미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빈다. 성경 중에 "너희가 죄를 대적하되 피 흘리기까지는 힘쓰지 아니하고(히브리서 12장 4절)"라고 훈계하셨는데 즉 여기서
(1) "죄"란 죄는 가장 두렵고 무서운 것이니, 죄를 범하면
①심신이 고민하여 지옥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② 늘 공포심이 생기고
③ 기쁘고 슬픔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無善悲感心)
④하나님과 사람(神人)앞에 수치를 당하게 되어 부모 형제 친구에
게까지 근심을 끼치며 대개는 망신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옥보다 무서운 것은 죄니라. "대개 죄의 값은 사망이니라. "
(2) "죄를 대적하되"란 말 즉 죄를 원수시하고 또한 대적하여 용납하지 말라(對敵不容). 가령 지금 돈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고 황금만능으로 필요하고 보배가 되었으나, 이러한 돈으로 죄를 범하게 되면 보화가 아니라 나의 원수로 알아 대적하여야 하고, 또한 좋은 여자 얌전하고 훌륭한 여성을 좋아했으나, 그 여자로 말미암아 죄를 범할 경우에는 사랑하는 누이가 아니라 나를 대적하는 원수가 되나니, 그러므로 돈과 여자는 지옥으로 화함이나 염병같이 피하고 독사같이 멀리함이 제일 방책이니라.
(3) "피 흘리까지"란 말은 이렇듯이 무섭고 강한 죄악이니 여간한 힘과 노력으로 이러한 죄를 이겨볼 수 없고, 피 흘리는 데까지의 힘과 의지가 아니면 승리의 맛을 보지 못하나니, 그 이유는
①죄는 아담 때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유전인 연고요
② 부정모혈 (父精母血)로 받은 죄 씨가 연고요
③어릴 때 3살 버릇부터 버룻이 된 연고요
④마귀의 세력이니 너무도 강하고 묘한 연고로
피 흘리는 데까지의 인내가 아니고는 도저히 이러한 죄악을 이기지 못하느니라. 결사적 의지라야 된다. 결사적 인내라야 한다.
(4) "힘쓰지 아니하◎'란 것은 즉 계속적 노력이니 죄를 한가지 이겼다고 백가지 죄를 다 이기는 것도 아니고, 한번 이겼다고 영구한 것도 아니다. 인생의 대 원수는 ① 육체의 욕심 ②세상의 허영 ③마귀의 유혹이나 이 세가지 원수를 날마다 때마다 삼가 싸워 이겨야 하느니라. 뻔히 이런 죄를 범하면 금생과 내생에 고통이 될 것을 잘 알지만,조금 참아보다가 나중에 범죄하게 되느니라. 이는 다의지가
강하지 못한 탓이니라. 그러므로 옛날 성자들을 보면 다 무서운 노력과 인내의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느니라. "죽을지언정"하는 피 흘리는 인내적 의지라야 한다.
어떤 이는 나는 본래 의지가 약한 자이기 때문에 할 수없다고 하나, 이런 자는 죄와 싸우기 싫어하는 고난을 피하는 비겁한 핑계에 불과할 뿐이다. 싸우지 않으면 승리도 없고 이기지 못한 자는 면류관도 없나니, 또한 힘쓰는 자는 주께서 도와 승리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정진 노력하고 자강불식 (自强不息)하라. 지를 이기는 데는 강한 의지여야 하니 의지를 늘 단련하라.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
는 부디 아버지를 본받지 말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요, 못난 자 중 못난 자다. 아버지를 본받지 말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요, 못난 자중 못난 자다. 나는 죄딘이나 너희는 의로운 자 되기를 바라고, 나는 못난 자나 너희들은 모든 인간 중에 가장 잘 난 자 되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다. 이것이 부모 된 자의 사랑의 욕심인 것 같다. 더 구나 이러한 시국에 죄를 범치 아니하는 것이 국민의 제일의 길이
다. 우리는 기독자이니 모든 국민의무에 남에게 모범적 행위와 모든 의무에 솔선하여 보국 정신에 미혹하지 말라.
끝으로 부탁할 것은 믿음制과 지식(知」을 함께 구비해야 되나니 진리에 이르는 길이 두 방면이 있으니 ① 신건7)의 실천에서 지 (知)에 이르는 길 ② 지 (知)로써 신(信)하게 되는 길이다. 로마 법황(교황)은 "무지는 신앙의 어머니"라 하고, 학자는 "지가 신앙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양 극단이니, 지(知)는 신(信)으로써 정확함을 중하게 되고, 신(信)은 지(知)로써 그 신성(神聖)함을 생각하게 되어, 이 둘은 양립 하여 서로 들이게 되나니 둘이 아닌 한 진리에 등 입구이니라. 상대적 병행이 아니라, 상조적 동지가되나니 엄밀한의 미에서는 "무신(無信)의 지(知)로" "무지(無知)의 (信)"은 있을 수 없느니라. 철학은 지로써 합리적이요, 종교는 신으로써 초리적(超理.的)이니, 유사 이래로 신(信)으로써 일류와 지적 일류로서 내려오는 신(信)은 올바른 신령 중(神靈中) 즉 우주 진리 영 중(字宙眞理靈中) 실 생활이나, 지(知)는 창조물을 학구 역상하여 신(神)에게까지 일생에 연구 노력으로 삼는 것이다. 또한 학자는 일상 생활에서 80%까지 잠재 의식의 지배에서 산다면 이 정도에서 전통저 생활이라 하나, 우리는 그보다도 정신능력으로 100% 완전한 생활을 하게 하나, 우리는 그보다도 정신능력으로 100% 완전한 생활을 하게
되느니라. 신앙이란 인간이 자유로이 취사 선택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신앙은 우주를 관통할 때 유일한 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천하만민치 유일한공도(公適)니라. 기회는 다시 오지 않으나 어둔 밤은 급속히 오느니라.
급할 때는 마땅히 힘써야 하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기다리지 닫느니라, 공자님의 사우(四友)는 너와 나의 사우 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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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목사 옥중편지(부인과 아들에게/1943.8.18)
부인 정양순여사와 동인에게
(1943년 8월 18일)
병고 중에서 얼마나 신음하십니까?
이 같은 성염(盛炎)에 고열도 심한데 가중병고(加重病苦) 하니 설상가상이외다. 그러나 신애(神愛)와 진리는 기후와 환경을 초월하니 안심하소서. 꽃 피고 새 우는 양춘가절에만 신애(神愛)가 있을 뿐이 아니라 백설이 분분한 엄동 혹한 중에도 신애 (神愛)는 여전하며 오곡 백과가 성숙하는 양추 9월만에 (神愛)가 있을 뿐 아니라 한천출배 (汗泉出盃)를 이루는 이같은 염천에도 신애는 여전하오며 금전 옥루에서 산해 진미를 먹어 신애를 찬미 할 뿐이 아니라 수간두옥(數間斗屋)속의 기한 질고 중에서도 신애를 찬양할지니 항상 기뻐하시고 범사에 감사하소서. 당신의 신앙이 능히 그 병고를 극복 하실 줄 믿고 나는 안심합니다.
여보시오!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도 욥의 고난이 더욱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도 욥의 인내가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솔로몬의 부와 지혜는 나중에 타락의 매개가 되었으나 욥의 고난과 인내는 최후에 영화가 된 까닭이외다.
영화는 최후를 보아서 알 것이외다. 참다운 지혜는 죄악을 떠나는 것이겠나이다. 안심과 희락은 만병의 보약이오니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시고 부디 병석을 떠나소서.
동인 동신아 아버지를 대신하여 할아버지를 잘 공양하여라. 아버지가 보고 싶으냐? 할아버지와 어머님을 잘 모셔라 할아버지의 기력이 어떠하시며 침식이 여전하시냐?
나는 너희들에게 부탁하고 만사를 잊어 버린다.5월 20일에 무기 구금형을 받고 만 3개월이 되나 아직도 상경치 못했다. 하루라도 일찌기 가는 것이 자유할 것 같으나 오히려 여기에서 배을 점도 있어서 범사에 감사한다.
금월 말 경에는 갈 듯도 하나 이도 미상이다.
지난 달 23일에 동인이 엽서는 4일 만에 잘 보았다. 그럼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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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목사 옥중편지(아버지에게/1943.9.25)
평양에 계신 부친 손종일 장로에게
(1943년 9월 25일)
천부 홍은중 백수 노부님의 기체 안강하심과 만수무량 하심을 복축불기 (伏祝不己)이오며 또한 처자 가솔 균안도 주께 안탁하나이다. 소자도 하기지덕(下祈之德)으로 철창 생활이 나마 꼭 만 3년 되는 날까지 주의 품에서 영육이 은혜중에서 안강하옴을 감사천만합니다.
아버님이여! 오늘은 때마침 9월 25일을 당하였습니다. 지금부터 4년 전 이 날 밤 9시 본가를 떠나 여수 유치장에 들어가니 45분이였었나이다. 그래서 오늘까지 옥에 갇힌 죄수의 몸이 되었나이다.
또한 이제는 구금소로 갈 결정서를 받아 수일 간에 광주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안심하시기를 바라나이다.
본가를 멀리 떠나 옥중에 들어오니
밤도 깊고 옥도 깊고 마음에 가득찬 수심도 같다.
밤도 깊고 옥도 깊고 마음에 가득찬 수심도 깊으나
주와 함께 동거하니 항상 기쁨이 충만하도다.
옥중고생 4년은 아주 많은 날이나
주와 함께 동락하니 하루 같도다.
과거 4년 동안 평안히 보호하여 주신
미래에도 그 같으실 주님이심을 확신하노라
옛날 요셉과 바울과 함께 하시던 하나님은 오늘에 소자와 함께 하시며 나를 안보하신 주는 또한 부주와 처자와 함께 하실 것을 믿고 안심하고 경성으로 향하나이다. 불초의 양원은 무엇보다도 부주님의 머리가 희게 세어가심을 심히 탄식 하나이다. 금년 1월 4일에 3년만에 부주님을 뵈옵는데 갑자기 백수를 뵈을 때 소자는 참으로 비감하였나이다. 이 웬일인가 죄악 세상의 탓인가 세월의 탓인가 생각하다
소자의 탓으로 반성하였나이다. '소자를 교양하시기에 진액이 마르셨고 옥중 불효자를 위하심이로소이다'라고 깨달았나이다. 아버님 불초의 죄는 해서복걸(海恕伏乞)이옵고 주께 염려 맡기시어 안심을 또한 복걸하나이다. 소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빌기를 마지 않나이다.
(하나님이시여 나의 육체의 아버지는 비록 죄악 세상을 보는 눈은 어두어졌을지언정 하늘의 영광을 보는 눈은 더욱 명료케 하옵시고, 또 인간의 음성을 듣는 귀는 멀어졌을지라도 주의 음성 듣는 귀는 밝게하여 주시고, 다니는 다리는 연약 하여졌으나 날마다 에덴 낙원에 걸어가서 기뻐하시게 하시고, 그래서 인간의 교제 대신에 하나님으로 더불어 영교 생활과 이 세상을 멀리 떠나 지상에서 부터 천국
생활자가 되 게하여 주시옵기 간절히 비옵나이다'라고 날마다 주께 간구하오니 아버님께서도 남은 생활을 영적 생활로써 만족을 누리소서, 대성 공자님께서 70세에 도덕 생활에 자유의 사람이 되지를 아니하였습니까? 엎디어 비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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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목사 옥중편지(교우들에게/1944.9.9)
옥종면 북방리에 사는 신도들에게
(1944년 9월 9일)
"얼마나 고생들 하십니까? 두번이나 고맙게 거듭 보내주신 봉함은 반길이 보았아오나 병고와 생활 곤난에 그 같은 고생 이야 참으로 마음 아프오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주시되 감당 할 범위 안에서 시험과 또한 시험을 받을 즈음에 피할 길을 열어 주시오니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고, 안심하여 주시옵소서
밤이 지나가면 낮이 오는 법이요,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게 되는 것이오니 팡명한 낮을 맞이하기 위하여 어두 운 밤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양춘가절(陽春佳節)을 위하여 엄동설한(嚴冬雪寒)의 고생을 참고 견디지 않을 수 없겠지요. 고로 고생을 겁내지 말고 도리어 기뻐 기다리사이다.
우리들만 고생한다고 할찌라도 능히 고생을 참고 이기겠는데 하물며 온 세상이 다 당하고 있는 대동지고(大同之苦) 이겠나이까? 부디 안심하시기를 엎드려 주야로 구하나이다.
무엇보다도 어떠한 고난일지라도 다 자족하게 여깁시다. 불만한 자는 천하를 다 얻어도 오히려 불편 할테요, 자족을 느끼는 자는 한 줌의 밥과 한 숟가락의 물에도 기쁨이 있으리다. 고로 모든 염려는 주께 맡기고 범사에 기뻐하며 항상 즐거워 하사이다. 근심은 만병의 근원이나 즐거움은 백병의 양약이 되 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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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목사 설교/시대에 적합한 일꾼이되라
시대에 적합한 일꾼이 되라
마10:16-42,9:35-38
구약시대에도 여호와께서 시대 시대를 따라 16선지 13사사를 내시 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와 사사의 교훈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초 림에 관한 중심이었고, 신약 사도의 교훈의 중심은 주의 재림에 관한것이 그 골자이었습니다. 구약 성서 말라기서에는 율법 종교의 타락 상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적합한 교역자,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교역자는 과연 어떤 인물알까?
1. 사랑의 일꾼(요 21:15~17) (아가페의 사랑)
목자를 사랑하며 양을 사랑하는 목자가 되라. 주의 일꾼의 첫 자격 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나 감언이설이나 육적 사랑, 지상에 인간들의 사랑이 아닙니다.
①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적합한 사랑 ② 인간의 영혼이 영원에 미치는 사랑,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던 사랑, 베드로가 오순절에 외치던 사랑, 주님의 바리새 교인 책망하던 사랑, 이러한 골자적 사랑이 기독교의 사랑입니다. 십계명 총 대지가 사랑입니다.
2. 지혜의 일꾼(마 10:16)
지혜를 말씀하시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니까 지혜롭게 하라는 것 입니다.
① 이리에게 잡혀먹지 않는 지혜
② 도리어 이리를 잡을 수 있는 지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유혹 이야기)
③ 생명을 보호하는 지혜
④성경 교리 진리, 오늘 시대는 하나님의 뜻을 사로 잡으려는 악마 가 대 활동 중입니다.
⑤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지혜, 그렇다고 하여 이중 인격이나 회색 분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진리의 중심을 의미한 것입니다.
진리에 선명한 태도에서 그리스도와 벨리알을 구별하여 양의 선두에 나서서 양을 이끌지니라.
3. 모험적인 희생적 일꾼 (눅 14:26-27)
십자가 지고 나온 자 주님의 제자로써 다 희생하고 나왔으니 ①물 질 ② 육체 ③ 명예 ④ 모든 것, 큰 것 위하여 작은 것, 영원 위하여 잠깐을 희생하는 일꾼이 되라 (계 2:10, (까마귀와 선지자 이야기)
ᄆ결 론ᄆ
1. 그간 3년 간 공적은 수고가 컸습니다. 수고하신 선생님들의 산고의 고통, 학생 자신의 해산의 수고도 말 할 수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수고보다 미래가 문제입니다.
2. 이상하게도 두 졸업생, 주 앞에 선 두 종입니다. 옛날에 주께서 12제자,70 문도를 보내시던 때에 둘씩 둘씩 보내셨습니다. 둘의 수는 계시록의 두 증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3. 계시록 중에 두 촛대와 두 감람나무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향기로운 두 감람 기름입니다.
(계 2장,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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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되지 않은 손양원목사의 글
십자가 생활에 불충한 나를 향하여 ....
행복하여 지기를 원하면서 의를 위하여 신고(辛苦)당하기를 꺼리는자,땀도
흘리지 않고 눈물도 뿌리지 않고 눈물도 뿌리지 않고 피도 쏟지 않고 그러
나 많은 행복을 절탐(切貪)하는 어리석은 자를 많이 만나는 중 그 중에도
나는 첫째로 꼽히는 자인가 한다.
과거 인류지사를 통하여 땀흘리지 아니한 위인이 어디 있으며,물을 뿌리
지 아니한 영웅이 어디 있으며 피를 쏟지 아니한 성도가 어디 있는가?
자본을 드리지 아니한 상인을 나는 못보았고 씨를 뿌리지 않는 곳에서 걷
으려는 농부도 나는 못 보았으니 행복은 신고(辛苦)의 대가 임에랴
사람이 심는대로 걷우게 될지니 수고 없이 안락을 탐하다가 패망을 거두
지 말고 수고로 씨를 뿌린 곳에서 안락을 얻고저 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겠
노라.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셨나니라.그러나 나는 이
처럼 넓은 거리를 걸어가기를 좋아하니 사망에 문으로 드러 감인가 하노
라.
공로 없는 행복을 구하고저 하는자 안일에서 평화를 누리는 자의 그 눈앞
이 위험하리라.
천국은 힘슴으로 빼앗는다는데 나의 용력은 왜 이럴까?예수께서는 십자가
를 유업으로 받은 우리 여러 신자에게 "겟세마네"의 땀이 피방울이 되는
십자가의 고배가 최험 되기를 원하시나니 예수 가라사대"누구든지 나를 따
라 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하
셨읍이다.세인이 체험치 못하는 진정한 부귀영화의 안락은 고난역경에서
기쁜 찬송을 부르는 자가 아니겠느냐
희노애락애오욕(喜努哀樂愛惡慾) 인간 칠정은 거문고의 칠음율이 되리로
다.빈(貧)은 애처로 삼고 고(苦)를 선생으로 삼고 비천을 궁전으로 삼고 자
연은 친구로 삼는 생활에 진정 미(味)의 쾌락을 직감하리라.
양원아........너는 무겁고 괴로운 십자가를 지고 좁고도 험한 갈보리 형곡
을 향하는 로선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느냐?밭 갈기를 예비한 암소가 어찌
멍에를 꺼리 겠으며,전쟁에 나간 군인이 어찌 죽음을 무서워 하겠느냐.내
몫에 태인 십자가 내 어이 하리있까?기쁘게 지고 나아가리라 너는 십자가
지기를 꺼리지 마라 다시 지상에 돌아오지 못할지니라
1934년 1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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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목사설교/성전을 더럽히지 말라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
마 24:27-25:2
오늘날 교회가 부패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사실상으로 성전을 함부로 쓴 까닭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성전으로 알지 않습니다. 그 예를 들면
(1) 공회당처럼 아는 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나 회합하면 누구나 다 모여서 할 수 있는 줄 압니다.
(2) 학교같이 압니다. 그래서 무슨 학습 강연이나 교육적인 것은 해도 좋은 줄 압니다.
(3)구락부처럼 압니다. 청년 남녀가 모여서 희희락락하는 일도 있고
(4) 극장같이 압니다. 그래서 성극(聖劇)이란 이름을 붙여놓고 함부로 강단을 더럽힙니다. 신자가 예배당을 지어 놓으면 신께 바치는 거룩하게 구별하는 의미에서 헌당식(獻堂式)예배를 보는 법입니다.
성전이란 무슨 집이냐
집이 크다고 성전이 아니고 화려하다고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이란 옛날 이름이고 오늘날은 예배당이라고 하는데 성전이라고 하거나 예배당이라고 하거나 그 뜻은 무엇인가?
예배당이란 하나님 중심의 회합처(會合處)입니다. 즉 ① 하나님을 모시는 집이요 ②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이요 ③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으로 시제(試製)하는 곳이요 ④ 영원한 영의 양식을 먹는 곳이요 ⑤ 성도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그런고로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더럽히지 않아야 합니다. 솔로 몬의 성전이 더렵혀 질 때에 느브갓네살왕을 통하여 불살라 버리셨고 스룹바벨이나 대 헤롯이 지은 성전도 더러워 질 때에 로마군대를 통해서 헐어 버리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계실 수 없을만큼 더러워진까닭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에 이 교회들이 부패해 진 것은 어떤 까닭이냐 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노회나 총회가 이처럼 혼란해지는 것도 까닭없는 일이 아닙니다. 마태 24:2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이거나 계시록 2:5에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신 말씀들은 모두가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강단을 남용하지 말라
오늘날 부르는 예배당이 옛날 성전이듯이 오늘날에 부르는 강단이란 옛날 성전 안에 있는 지성소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성소가 성전 안에서 중요한 곳이었던 것처럼 강단도 예배당 안에서 가장중요한 곳인 것입니다. 그것은 지성소가 하나님께 바로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던 것인데 똑같이 강단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곳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은 성경 말씀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 듯 싶습니다. 강단 위에 성경은 공연히 펴놓고 복음을 전한다는 미명(美名)을 걸어 놓고 성경에 있는 복음의 말씀은 전하지 않고 사이비(似而非)한 학술 강연으로 사람의 귀만 즐겁게 하거나 자기의 주의와 사상과 경륜과 포부(抱負)를 선전하려고 하며 또한 자기의 구변이나 재주를 나타내려고 하며 강단을 남용하니 어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따라서 믿는 마음은 독초로 병들게 하고, 영혼은 기갈로 인하여 메말라 가니, 어찌 자멸이 안 되겠는가?
거룩했어야 할 강단이 더렵혀졌기 때문에 나타난 그 벌은 과거 환 난 시대에서도 맛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일제 말엽에 더렵혀진 삼천 강단은 오늘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일본정신이니 종교 보국이니 혹은 종교의 의식이니 해서 남용하 던 당시의 강단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무슨 영향을 주고 있는가, 또 강단은 하나님의 뜻, 성경의 진리, 신앙의 체험 등으로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마음에 평안을 받도록 하는 강단이 되어야 할텐데, 어떤이는 자기의 평소에 가졌던 감정풀이로 듣는 이를 공격하여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니 강단 남용도 분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단에서는 무엇을 전해서 하나님께 옳은 제사가 되고 형제 에게 기쁜 복음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여 남용을 절대 금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설교 원리를 간증합니다.
(1) 나의 설교란 강도학(講道學)원리에 꼭 「성경 말씀에만 터를 닦고」한대로 66권이 본문이요 제목이요 대지(大旨)도 소지(小旨)도 이를 기초로 합니다. 성경에서 성경으로 전부를 삼고, 성경으로 성경을 풀고 싶습니다. 성경에 묻고 성경에서 대답하고 싶습니다. 서론도 성경이요
내용도 성경이요 결론도 성경이 되게 하고져 합니다. 즉 성경으로 시작하여 성경으로 마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대도(大道)와 기독교의 교회를 분명히 전하고 싶습니다.
(2)그런고로 나의 설교의 내용은
① 학술적이기보다는 도리적(道理的)으로 ②도덕적 행위 교훈보다 는 생명적인 복음으로 ③사상보다도 교리적인 것을 가르치고져 하며 ④ 이론보다도 실제적으로 ⑤ 일시 귀를 즐겁게 하는 감정보다도 의지적인 진리의 내용을 밝히고 싶숩니다.
그것은 본래부터 기독교의 본질이 그렇고 성경 내용의 진리가 그렇고 나의 받은 사명이 그런줄 아는 까닭입니다.
(3)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평이(平易)하게 명확하게 증거해서 유식 무식간에 노인도 젊은이도 남자도 여자도 알기 쉽게 하고져 합 니다.
쉽게 쓴 것을 왜 어렵게 하겠는가?
ᄆ결론ᄆ
이렇게 성경만을 중심으로해서 복음을 전하면 전해지는 말씀 여하는 말 할 필요도 없고 말씀이 전해지는 강단도 거룩해져서 강단이 순수한 하나님의 제단이 될 것입니다. 성전을 더럽히지 않으려면 강단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