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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배설의 신보와 Korea Daily News는 한국의 정세를 외국에 알리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는 헐버트가 발행하는 월간잡지 Korea Review가 유일한 영어 정기간행물이었고
하지(J. W. Hodge)가 Seoul Press Express라는 뉴스 불레틴을 일간으로 발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Korea Review는 매호 40페이지에 불과한 조그만 잡지였으므로, 서울은 영어 저널리즘의 공백지대나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
더구나 한국은 러일전쟁 이후 국제적인 관심이 쏠린 지역이었으므로 신보와 Korea Daily News의 출현은 한국 안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을 둘러싼 국제여론에 미묘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때마침 신보 창간 무렵에 일본이 한국에 요구한 황무지(荒蕪地)
개간권 문제에 대해 한국 국민들 사이에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이 반대운동은 항일 민족진영을 규합하는 계기가 되고 있던 때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유리한 입장을 활용하면서 한국과 체결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근거로
대장성 관방장을 지낸 나가모리(長森藤吉郞)를 내세워 강압적으로 황무지 개간권을 따내려 했으나 한국민들의 반대가
워낙 거세자 이를 성공적으로 관철시키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는 배일감정이 팽배하고 반일운동이 조직화되어 전개되기 시작하자 당황한 일본은 이 계획을
유보하기로 했다. 그러나 일단 공개적으로 제기했던 요구를 철회하는 데도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일이며, 내각 안에서도 단합을 해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은 이 문제를 유보해 두는 대신에
제1차 한일협약의 조인에 성공했다.
2) 황무지 개간권 요구와 배일운동
신보와 영문판 Korea Daily News가 창간된 시점은 일본에 대한 한국민의 반대운동이 거의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다.
황무지 개간권 반대운동이 전국적인 규모의 반일 민족운동으로 확대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러한 반일운동은 한국 신문만이
아니라 일본에서 발행되는 신문에도 반영되었다. 일본에서 발행되던 대표적인 영어신문 Japan Chronicle이 황무지 개간권
문제에 대해 장문의 논설을 게재한 것은 7월 28일자였다.
일본의 영어신문 가운데 가장 독립적인 논조로 발행되던 재팬 크로니클은 “한국의 보호((Protecting Korea)”라는 논설을
통해 일본의 요구가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일본의 침략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논설은 일본에서는 외국인들의 토지 소유가
금지되어 있을 뿐 아니라 홋카이도(北海島)의 소유권도 없는 땅을 개발하겠다는 외국인들의 요청에 대해서까지도 전국적인
격분을 불러일으켜 마침내는 해당 장관이 물러나게 된 일까지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한국에서 한국인들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는 그렇게도 끈덕지게 요구하던 권리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대 적용하기를 거부하는 데는 일인들이 뛰어난 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한국과 일본의 신문들이 각기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논설을 싣고 있던 때에
창간된 신보가 이를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현재 신보의 창간호부터 15호까지는 실물이 보존된 것이 없으므로
창간 당시의 정확한 논조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주한 영국공사 조단이 본국에 보고한 것을 보면 배설은 KDN 창간 직후인
1904년 7월 22일자에 외부협판 윤치호(尹致昊)의 “The Waste Land Scheme”을 독자투고란에 게재함으로써 일본의 요구가
부당함을 비판했다. 또 현존하는 신보 첫 호인 8월 4일자(제16호)에는 바로 Japan Chronicle의 논설 “Protecting Korea”를
제목도 그대로 인용하면서 거의 절반을 전재했다.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일본이 재팬 크로니클의 고발에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고 질문을 던졌다. Korea Daily News는
이어서 8월 16일자 논설 “Nagamori Again”(신보는 18일자에 “장삼(長森)씨의 문뎨 론”으로 번역)에서 일본 時事新報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Korea Daily News는 이 문제에 대해 자기 자신의 주장을 독자적으로 펴지는 않고, 윤치호의 익명으로
쓴 투고와 두 일본 신문의 논설을 소개하면서 황무지 개간권 요구가 부당하다는 의견을 첨가한 정도였다.
일본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인용하고 한국인 독자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함을 지적한 투고를 게재함으로써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을 비판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배설은 처음에 Korea Daily News를 창간했을 때에는 주한 일본공사관으로부터 성의 있는 지원을 받았다고 스스로 말했다.
이와 같은 지원을 해준 사람은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이었던 하기와라(萩原守一)였다.50) 배설은 영어신문을 발행하면서
일본 정책의 변호에 노력하려 했으나 나가모리 사건에 관해 하기와라와 충돌하는 바람에 배일적 태도를 갖기에 이르렀다고
말하기도 했다.
배설이 일본의 정책을 비판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배설과 하기와라의
불화였던 것이다. 하기와라는 을사조약 체결을 한국에 강요하는 데 실무역을 맡았던 주한 일본공사관의 제 2인자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비해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이 화려했으며 정치적인 배경도 튼튼했다. 그는 강압적인 수단에 능한 외교관이었다.
맥켄지는 하기와라가 “자기의 조국을 위해서 열성적인 야망을 지닌 일본의 젊은 정치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하고,
“그의 매력적인 외관(winning exterior)의 저변에는 앞길을 가로막는 하찮은 것들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인상을 풍기는 사람”
이라고 그의 인상을 묘사했다.
맥켄지는 러일전쟁 직전 한국에 왔을 때 하기와라를 처음 만났는데, 그 후 2년 동안 한국에서 일본이 강경한 조치를 취했을 때에는
언제나 하기와라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고 썼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때에도 그의 철권은 외교관들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났었다는 것이었다.
하기와라는 1867년에 長州에서 태어나 1895년 동경제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원로 정치인 야마가타 아리또모(山縣有朋)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야마가다의 집안에 입양되어 야마가다가 막말(幕末)시대에 하기와라(萩原鹿之助)로
불리던 성(姓)을 이어받았으므로 야마가다는 그의 정치적인 후견인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895년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하여 12월 28일 인천주재 대리영사로 한국에 와서 이듬해 10월 17일까지 근무했다.
그 후 베를린과 브뤼셀의 일본공사관에서 근무하다가 하야시 다다쑤를 수행하여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도 참석했었고,
소련․영국․이태리 등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그는 1901년 6월 18일 주한 일본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한국에 부임했다.
그는 이때부터 동경제대 정치학과 출신이었던 하야시(林權助)와 함께 일본의 한국침략 정책을 ‘강력하게’ 수행하는 데
수완을 발휘했다. 그에게는 같은 長州 출신의 원료 정치인 야마가다의 후광이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시 고종을 협박했던 한국 주차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대장도 같은 장주 출신으로
야마가다 계보였다.
3) 배설과 하기와라의 반목
배설은 일본의 한국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한 반대운동이 한창 고조되고 있을 때에 신보와 KDN을 창간하였다.
황무지 개간권 반대 여론은 조직적인 항일 민족운동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한국의 반대가 워낙 거세자 일본은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하는 대신 한일협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하여 이를 관철하였다. 한국은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한 명을 재정고문으로, 외국인 한 명을 외교고문으로 각각 임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인 재정고문으로는 메가타(目賀田種太郎)가 임명되었고,
외교고문으로는 주미 일본대사관의 고문이었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가 임명되었다.
일본은 이 조약 후 마루야마(丸山重俊)를 경찰 고문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의 재정, 외교, 경찰권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다.
또 일본군은 서울과 그 근방의 치안을 담당한다고 한국에 통보하여 일본군이 한국을 실질적으로 점령한 상태에 놓였다.
영국의 한반도 정책은 일본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주한 영국공사 조단(J. N. Jordan)은 일본공사 하야시와는
개인적으로도 극히 친밀한 관계였고, 한국에 관한 정보를 대부분 일본측으로부터 입수했다.
반면에 한국은 외교면에서 언제나 소외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간된 신보와 KDN은 창간 직후부터 일본의 한국 황무지 개간권 요구가 부당함을 지적하여
일본측의 미움을 샀다.
황무지 개간권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던 장본인이고, 을사보호조약 체결에도 크게 활약했던 주한 일본공사관의
서기관 하기와라는 배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기와라는 일본공사관이 신문발행을 지원해 주기로 했던 약속을
취소해 버렸을 뿐 아니라, 배설이 AP통신의 서울주재 통신원직을 맡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도 했고,
일본공사관에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다.
하기와라의 이러한 태도에 배설은 크게 반발했고, 신보와 KDN은 일본을 더욱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마침내 배설과 하기와라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말았다.
조단은 배설의 반일신문이 영일 우호관계에 커다란 장해 요인이 된다는 보고서를 영국 외무성에 보냈다.
외무성은 이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일본이 배설을 스스로 처리하도록 일본의 손에 넘기는 방안과
영국이 직접 처벌하는 두 가지 방안을 놓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는 못한 채 결정을 유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요구에 따라 조단이 영국 외무성에 배설의 처리 문제를 재차 독촉하자 마침내 영국은 배설의 처리를
일본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일본이 군률(軍律)을 적용하여 배설을 한국에서 추방할 경우, 영국은 이를 묵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국이 이러한 방침을 정했을 때에 배설의 신문은 휴간 중이었다.
배설은 제2회 영일동맹이 체결되기 하루 전날 신문을 다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조단은 이제 배설 처리 문제를 일본에게 맡기겠다고 일본에 통보했다. 하야시는 배설을 일본의 군률에 따라 처리하되
본국 정부와 협의한 뒤에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조단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이 때 영국 외무성은 배설 처리 문제의
방침을 바꾸었다. 러일강화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러시아와 일본간의 전쟁상태는 끝이 났으며,
따라서 일본이 영국 시민을 재판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는 논리였다.
영국인이 한국에서 누려야 할 치외법권(治外法權)을 포기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배설을 처벌할 필요가 있다면
영국의 법률인 추밀원령(樞密院令)을 적용하는 것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인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이듬해 2월 서울에 일본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등박문이 통감으로 부임했다.
이리하여 배설 문제는 일본공사 하야시의 손에서 이등박문에게로 넘어갔다. 영국공사 조단도 한국을 떠났고
헨리 코번(Henry Cockburn)이 주한 영국대리공사로 부임했다. 코번은 조단에 비해 일본 당국과 그다지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
영일관계에서 배설 처리 문제는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4) 고종의 밀서사건
고종은 일본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밀어내기 위해 국제여론에 호소해 보기도 했고, 러시아와 미국의 개입을
요청해 보는 등의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 보았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한 노력 가운데 하나가
영국 트리뷴(Tribune)지 특별통신원 더글러스 스토리(Douglas Story) 기자에게 수교한 밀서 사건이다.
고종의 밀서는 여섯 항목이었다. 첫째 고종황제는 을사조약에 조인하거나 동의하지 않았으며,
둘째 일본이 조약 내용을 일본이 멋대로 발표하는 것도 반대이며, 셋째 황제는 독립주권을 터럭만치라도
다른 나라에 넘겨준[讓與]한 적이 없다, 넷째 일본이 억지로 빼앗은 외교권도 근거가 없으며,
내치(內治)에 관해서 한 건도 허가하지 않았다, 다섯째 황제는 통감의 주재를 허가한 적이 없고,
황실의 권한을 조금이라도 외국인이 마음대로 행사하도록 허가한 적이 없다,
끝으로 황제는 세계 열강이 한국을 집단보호 통치[신탁 통치]하되 그 기한은 5년이 넘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독점적인 한반도 진출을 반대하고, 한국의 중립화를 열강이 공동으로 보장해 달라는 종래의 외교방침을 밝힌 내용이었다
. 밀서는 1906년 1월 29일 날짜로 되어 있었다.
이 밀서는 스토리 기자가 가지고 나가서 중국 치푸(芝罘) 주재 영국 영사 오브라이언 버틀러(Pierce Essex O’Brien-Butler)에게
전달되었다가 북경주재 공사 새토우(Sir Ernest Satow)에게 전달되었다. 스토리는 밀서에 관한 내용을 영국 트리뷴에 보도하여
영국을 비롯한 한국, 일본, 중국 등의 신문에 보도되었다. 트리뷴은 스토리가 지푸에서 타전한 기사를 1906년 2월 8일자 3면 머리에 실었다.
“한국의 호소, 트리뷴지에 보낸 황제의 성명서, 일본의 강요, 열강국의 간섭요청
”(Korea’s Appeal/Emperor’s Statement to the Tribune/Coerced by Japan/Powers Asked to Intervene)이라는 제목이었다.
기사는 한국의 지위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이며, 황제는 실질적으로 포로의 신세다. 일본군은 궁중을 둘러싸고 있으며,
궁중에는 일본 스파이들이 가득 차 있다. 을사보호조약은 황제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 라는 리드로 시작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의
경위와 한국의 정치 실정을 소개한 다음에 고종이 스토리에게 준 밀서 6개항을 영문으로 번역 게재했다.
스토리가 보낸 이들 기사는 트리뷴지에 실린 다음에 로이터 통신을 타고 거꾸로 동양으로 되돌아와 한국, 일본, 중국의
신문들에 다시 실리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신보-KDN이 2월 28일자 논설란에 트리뷴의 기사를 소개했고,
헐버트의 코리아 리뷰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을 인용하여 한국 황제가 을사보호조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고종의 밀서는 이와 같이 영국․일본․중국 그리고 한국 등의 여러 신문에 보도가 되었지만 한국에서 정작 크게 문제가 된 것은
1년이 지난 뒤인 1907년 1월이었다. 申報와 KDN은 트리뷴지에 게재된 고종밀서의 사진판까지 게재하여 이등박문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5, 일본의 배설 추방공작과 재판
1) 외교안건으로 문제제기
일본이 배설의 처리 문제를 영국에 공식으로 다시 제기한 것은 1907년 4월이었다.
1905년 11월에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뒤, 일본은 거의 1년 반 동안이나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은 채
자체 내에서 은밀히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7년 1월 신보와 KDN이 고종의 밀서 사진을 게재하자 일본은 배설 문제 처리를 적극적으로 서두르게 되었다.
일본은 4월 11일 배설 문제에 관한 각서를 주일 영국대사관에 전달함으로써 이에 대한 외교공세를 시작했다.
배설을 추방에 동의하거나 신문을 폐간시키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배설은 일본의 억압에 결코 굴하지 않을 것이며 한국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는 일본에 대한 비판을
결코 중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주한 영국 총영사 코번(Henry Cockburn)은 배설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일 소요사태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추밀원령[the Order in Council]의 법 조항으로 보아서는 배설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추밀원령의 조항은 영국 국민이 한국 정부와 국민 사이에 적대감을 조장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배설을 처벌하려면 한국주재 일본 관리와 한국인 사이에 적대관계를 조장하는 기사를 게재하는 출판물도 처벌할 수 있도록
이미 발효중인 1904년 추밀원령 제75조를 개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현행 추밀원령으로 배설을 처벌한다면 일본 통감부를 실질적인
한국 정부로 인정해 주는 결과가 된다는 외교상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코번이 추밀원령의 개정을 주장한 것은 법을 개정하여
배설을 추방하거나 신문발행을 중단시키자는 목적이 아니었다. 코번은 추밀원령의 조항을 좀더 구체적으로 명시해 둠으로써
배설로 하여금 준수해야 할 법률 조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면 배설의 행동이 지나치게
과격해 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추밀원령을 새로 공포하기만 하면 배설을 처벌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으로 믿었던 일본은 추밀원령을 빨리
공포해서 배설을 처벌해 달라고 영국에 여러 차례 독촉했다. 영국 외무성도 처음에는 새로 제정된 추밀원령으로
배설을 처벌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코번의 건의에 따라 법무성에 문의해 보기도 하고 자체 내에서도 다시 검토해 본 결과
새 추밀원령이 아니라 1904년에 공포한 추밀원령으로 약식 영사재판에 부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이로써 외무성은 이 문제에 대해 세 번째로 방침을 바꾼 것이 되었다. 조단이 배설 문제를 처음에 보고했던 1904년에는
배설 처리를 일본에 맡겨 일본이 배설을 추방하도록 영국이 묵인하기로 했다가, 1907년 5월에는 새 추밀원령을 공포하여
정식재판에 회부하기로 했고, 9월에는 이를 다시 번복하여 1904년 추밀원령에 따라 약식 영사재판에 회부하기로 한 것이다.
영국 외무성이 이와 같이 몇 차례나 방침을 바꾼 것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첫째는 한국의 국제정치상 지위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가 애매했다. 한국은 독립국가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통감부가 통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배설이 한국민들에게 반일감정을 조장하는 것을 한국 정부에 대한 공격 행위로
볼 수 있느냐 아니냐를 규정하기가 어려웠다. 배설이 일본 통감부를 공격한 것을 한국 정부에 대한 공격과 동일시 한다면
영국은 일본의 한국 통치를 승인해 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었다.
둘째는 영국인의 치외법권을 보호하는 문제였다. 만일 배설을 일본 당국이 직접 추방하도록 영국이 승인한다면
영국은 한국에서 영국인이 누릴 수 있는 치외법권을 포기하는 선례를 남기게 될 것이었다. 이 문제도 배설 한 사람을
처벌하느냐 마느냐 하는 차원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영국민의 권리 보호라는 원칙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었다.
셋째는 추밀원령의 법조문의 해석 문제였다. 코번이 여러 차례 지적한 대로 법조문을 그대로 따르느냐 아니면
좀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해석하여 판결을 내리느냐 하는 것도 애매했다. 이러한 몇 가지 문제들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다. 또 영국 외무성에서는 한국의 실정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서울과 동경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이 보내는 보고서를 토대로 방침을 정할 수밖에 없었다.
코번은 이 사건에 대해 영국의 외교정책에 순응은 하면서도 일본의 대한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코번의 이러한 태도도 본국 외무성이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망설이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2) 추방 위협과 영국의 재판 준비
일본이 배설의 추방공작을 추진하면서 영국에 그의 처벌을 요구하는 동안 한국에서는 1907년 초부터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신보사의 사세도 이 무렵에 급격히 신장되었다.
배설은 이해 5월에 새로 한글판 신보를 창간했고 발행부수도 늘어나서 1907년 9월 무렵에는 국한문, 한글,
영문 세 가지 신문의 발행부수를 합치면 1만부가 넘었다.
신보의 발행부수는 당시 한국에서 발행되는 여타 신문의 전체 부수를 합친 것보다 배가 넘는 것이었다.
신문의 발행부수도 많았지만 한국에서는 신문에 대한 신뢰도가 몹시 높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신보의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양위했을 때에 신보가 한국인들을 선동했기 때문에
한국인들과 일본 경찰 사이에 유혈충돌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났다고 주장하고 배설의 추방을 더욱 강력히 요구했다.
일본은 배설 문제 처리를 위해서 샴[태국]에서의 릴리 사건과 일본에서 있었던 블랙 사건을 선례로 삼아 줄 것을 영국에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은 신중히 검토한 끝에 1904년의 추밀원령으로 배설을 약식 영사재판에 회부하기로 했다.
일본 통감부는 정식으로 배설에게 경고를 발했다. 경성이사청 이사관 미우라(三浦彌五郎)는 배설을 찾아가서
신보가 보도한 한국 황제의 일본 납치설 때문에 한국에 큰 소요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38명이 죽었으니
그 책임은 전적으로 신보의 기사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군대해산 후에 의병의 항일투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배설의 신문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우라는 자신의 방문이 공적(公的) 성격을 띤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일본군의 계엄 상태에 놓여 있는 서울의 정세로 보아
배설에게 실력으로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암시했다.59) 일본은 동경의 외무성, 한국에 설치된 통감부, 주영 일본대사관이
총 동원되어 영국에 대해서 배설을 추방하거나 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마침내 영국도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배설을 재판에 회부하기로 했다.
통감부는 의병들의 봉기가 배설의 신보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일본의 친일 영어신문 Japan Mail도 신보에 실린 논설들이
그대로 의병대의 창의문(倡義文)으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신보가 의병봉기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고 비난했다
배설에 대한 재판은 불안정한 한국의 치안상태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황태자가 방한하기로 되어 있었으며,
일본에 대한 신보의 공격은 수그러지지 않고 있다는 여러 사정을 고려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현지 정세에 가장 민감하게 접하고 있던 코번은 재판의 절차문제를 가지고 일본 당국과 더 이상 승강이를
벌이고 있기에는 사태가 절박 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3) 1차 영사재판
1907년 10월 14일 오전 11시, 주한영국총영사관에서 배설에 대한 영사재판을 열렸다.
재판은 주한 영국 총영사 코번(Henry Cockburn)이 재판장이 된 영사재판이었다.
코번이 배설에게 전달한 소환장은 다음과 같은 10건의 기사가 ‘소요를 일으키거나 조장시켜 공안을 해친 것’으로 되어 있었다.
1) KDN 9월 3일, “지방소식과 논평, 지방의 곤란(Local News and Comment, The Trouble in the Interior)”
2) KDN 9월 10일, “지방곤란(The Trouble in the Interior)”
3) KDN 9월 12일, “지방곤란”(신보, 9월 18일자)
4) KDN 9월 21일, “의식의 주인은 어디 있는가”
5)KDN 9월 24일, “시골로부터의 간단한 이야기(Plain Tales from the Country)”
6)KDN 9월 26일, <우리는 심한 전투소식을 들었다>로부터 시작해서 <유럽인들로부터>로 끝나는 기사.
7) KDN 10월 1일,<南道로부터의 믿을 만한 소식>으로 시작해서 <말뚝에 기대어 놓고 그를 쏘았다>로 끝나는 기사.
8) 신보 9월 18일, “지방곤난”(KDN의 9월 12일자 번역)
9) 신보 10월 1일, “귀중쥴을 認여야 保守쥴을 認지”
10) 신보 10월 8일, “筆下春秋”(한글판은 “시평론”)
재판정에는 지방법원의 판사 자격이 된 코번을 비롯해서 피고 배설, 영국 영사관원 홈스, 레이(Arthur Hyde Lay),
통감부 외사과장(外事課長) 고마쓰(小松綠), 영국교회 주교 터너(Arthur Beresford Turner), 퇴역소령 휴즈(Major Hughes) 등이 참석했다.
통감부를 대표하여 증인으로 나온 고마쓰가 신보와 KDN이 평화를 해치고,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유발했다고 주장했다.
재판장 코번은 고마쓰의 말은 증거가 못된다고 말하고, 나는 사실을 원하는 것이지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반면에 배설의 증인으로 나온 휴즈 소령은 배설의 반대신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배설: 당신은 신문의 기사가 공안을 해치도록 선동한 것으로 보는가.
휴즈: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귀하는 항상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무장 저항운동은 자살적인 정책이니 그만두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이튿날 코번은 배설에게 6개월 동안 근신을 명하는 판결을 내렸다.
앞으로 6개월 동안 과거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 300 파운드의 벌금을
납부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코번은 배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것은 그 기사가 발행된 주변 상황을 고려한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에는 일본군과 많은 일본인 거류민들이 있다는 점, 한국의 여러 지방에서 한국인들이 무기를 들고 저항했으며,
의병들과 일본군간에 충돌이 일어났었다는 점, 일본인들에게 적대감을 품은 한국인들이 서울에 많이 있다는 점,
일본 황태자가 며칠 안에 방한할 것이라는 점 등의 상황을 놓고 볼 때에 배설이 발행한 기사들은 공공의 평화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할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배설은 신보의 논조를 다소 신중하게 만들었으나 배설은 어떤 사태가 오더라도 벌금 300파운드의 손실을
입을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필요한 경우에 그만한 기부금은 어렵지 않게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배설은 자신이 발행하는 신문이 강력한 항일 논조를 견지하는 한 한국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영국 총영사관 직원 홈스(Ernest Hamilton Holmes)는 배설이 단순히 돈벌이를 위한 욕망에서 항일 논조를 견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설과 가진 솔직한 대화를 통해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일본의 신문은 재판의 결과로 배설이 많은 벌금을 물게 되었고, 장차도 이와 같은 행동을 되풀이한다면
그는 추방되고 말 것이라는 기사들을 실었다. 이런 소문을 들은 한국인 가운데는 배설이 납부해야 할 벌금을
자신들이 대신 내겠다고 성금을 거두어 가지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성금은 총액이 300파운드를 초과할 정도였다
배설은 근신기간이 만료되자 일본당국을 공격하고 통감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대한제국의 내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배설의 두 차례에 걸친 재판이 열리던 때는 의병들의 항일무장 투쟁이 가장 치열히 전개되던 무렵이었다.
1907년 8월 한국군대가 해산될 때부터 1911년 6월 사이에 있었던 일본 병력과 무려 2,852회의 충돌이 있었고,
사망자는 17,779명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민간인과 부녀자, 그리고 어린이들까지 무차별로 살해했다.
통감부는 의병들의 소요가 배설이 신보를 통해 폭동을 선동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외교교섭의 과정에서 영국과의 동맹관계를 내세워 배설을 ‘정치적’인 문제로 처리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영국은 극동에서 영국이 누리는 치외법권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법적’ 절차에 따라 다루려 했다.
양국의 이러한 시각차이는 이 교섭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통감 이등박문은 영국이 배설을 처벌하지 않는데 불만을 표시했고
배설의 처리를 근원적이고도 신속하게 매듭지어 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는 영국이 끝까지 배설의 처리를 지연시키는 경우에는
영일간에 일어날 수 있는 외교적인 마찰을 무릅쓰고라도 배설을 일본이 직접 추방하고 말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4) 제2차 재판: 3주일간의 금고형
1908년 6월 영국은 배설을 두 번째로 기소하여 재판을 진행하였다.
통감부의 제 2인자인 서기관 미우라(三浦彌五郞)는 통감 이등박문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배설을 고소하였다.
이등박문이 미우라에게 권한을 위임하였다는 사실은 실지로는 이등박문 자신이 고소한 것을 의미했다.
영국측에서는 상해에 있던 영국청한고등법원(英國淸韓高等法院:H.B.M.'s Supreme Court for China and Korea)의
판사 보온(F.S.A Bourne)과 검사 윌킨슨(H.P. Wilkinson)이 한국에 와서 3일에 걸쳐 주한영국총영사관에서 재판을 진행하였다.
배설은 재판에 대비해서 자신의 변호인으로 고베에 있을 때부터 잘 알고 있던 크로스(C. N. Crosse)를 선임했다.
이는 한․영․일 세 나라가 관련된 동양 역사상 처음 보는 특이한 재판이었다.
재판은 6월 15일 10시부터 서울의 영국 총영사관 구내에 있는 이전 영국 경비대가 쓰던 건물에서 열렸다.
이 재판은 영국과 일본 양측이 다 같이 큰 관심을 가졌지만, 누구보다도 재판을 주시하고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한국인들이었다.
동경의 맥도날드는 재판이 열리기 하루 전에 코번의 신변을 보호해 달라는 편지를 일본외상 하야시에게 보내기까지 했다.
맥도날드는 현재 한국인들의 감정이 격앙되어 있으며 스티븐스를 암살한 사례를 보더라도 한국인들 가운데는
그들이 신뢰하는 배설을 재판에 회부한다하여 코번이나 주한 영국 총영사관 직원을 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그러므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이를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달라고 일본측에 요청한 것이다.66)
고소의 구체적인 사유가 된 기사는 4월 17일자 스티븐스 암살 기사와 4월 29일자
“백매특날(百梅特捏)이 부족이압 일 이태리(不足以壓一伊太利)”, 5월 16일자 “학계(學界)의 화(花)” 두 논설이었다.
배설의 변호인 크로스는 이 사건을 정치적인 재판으로 유도했다. 크로스는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소요의 원인은
일본의 대한정책이 잘못된 데서 비롯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통감부 서기관 미우라가 재판정에 출두하여 변호인의 신랄한
반대신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재판은 3일 동안 진행되었고, 4일 째인 18일 판사는 결국 배설에게 3주일간의 금고형을 언도했다.
또 복역이 끝난 뒤에는 6개월간 근신할 것을 서약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추방될 것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유죄판결 언도가 났을 때에 재판정 바깥에 몰려 있던 많은 한국인들의 격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군중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진해서 돈 4,000환을 가지고 와서는 배설에게 부과된 벌금을 자신이 갚겠다고 말했고,
변호인 크로스의 노고를 치하해서 연회를 베풀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배설은 6월 18일 오후에 금고형(禁錮刑)을 언도 받았으나 그를 상해로 싣고 갈 군함이 올 때까지는 일단 석방되었다가,
이틀 뒤인 6월 20일 출두명령을 받고 총영사관에 들러 거기서 곧바로 인천으로 떠났다.
그는 오후 4시에 총영사관에 들렀는데 곧장 서울역으로 가서 5시 20분발 인천행 기차를 타야 했던 것이다.
배설이 상해로 가서 복역했던 이유는 서울에 있는 형무소는 일본 관할 하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 형무소가 있는 상해로 가서 복역케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배설을 어떻게 상해까지 보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에는 인천과 상해간에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배편이 없었기 때문에 서울-상해 간을 내왕할 때에는
일본을 경유하도록 되어 있었다.
배설이 그런 경로를 거쳐 상해로 가는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일본의 사법권 관할 하에 놓이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해결책은 배설을 인천에서 상해나 홍콩으로 직접 보내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배설을 인천에서 상해로 직접 싣고 갈 수 있도록 요코하마에 정박중인 영국 군함 Clio호가
단 한 사람의 죄인을 상해로 호송하기 위해 인천에 왔고,배설은 이 배를 타고 상해로 호송되었다.
그런데 배설이 서울역을 떠난다는 소문이 퍼지면 많은 군중이 서울역에 몰려와 한바탕 데모를 벌일 것을
우려했던 영국 총영사관은 그에게 가족과 인사를 나눌 여유도 주지 않고 인천으로 보냈다.
배설이 상해에 도착하자 그곳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이 그를 면회하려고 몰려왔으나
면회가 금지되자 위문품을 전달하려 했다.
5) 양기탁 재판과 노스 차이나 헤럴드 소송
일본이 배설의 추방을 영국에 요구하고 있는 동안 1907년 초부터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신보사의 사세도 이 무렵에 급격히 신장되었다. 배설은 이해 5월에 새로 한글판 신보를 창간했고 발행부수도 늘어나서
1907년 9월 무렵에는 국한문, 한글, 영문 세 가지 신문의 발행부수를 합치면 1만부가 넘었다.
신보의 발행부수는 당시 한국에서 발행되는 여타 신문 전체의 부수를 합친 것보다 배가 넘는 것이었다.
통감부는 배설이 상해에서 복역하고 있는 동안 신보사의 실질적인 제작 책임자였던 총무 양기탁을 체포하여 신보를 중심으로
한 항일 민족세력에 타격을 주려 했다. 배설의 재판은 이와 같이 배설 한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항일 저항운동을
분쇄하기 위한 일본의 전략이었다. 양기탁을 체포한 것은 자발적인 항일운동으로 전개된 국채보상금을 횡령했다는 혐의였다.
영국은 양기탁의 체포가 치외법권을 누리는 배설에 대한 탄압의 일환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영일간에 심각한 외교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재판 끝에 일본인 판사가 주심인 재판부는 양기탁의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통감부는 양기탁의 구속과 재판으로 한국인들의 국채보상운동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이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성공을 거두기에는 벅찬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참된 의미는 의연금의
모금 액수보다는 한국 민족진영이 이러한 운동을 통해 응집력을 과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통감부는 이 사건을 통해서 이 운동의 추진세력을 분산시키고, 한국 일반 민중에게 좌절감을 안겨 주는 성과를 올린 것이다.
통감부는 한국민들의 의병활동을 무력으로 억누르는 한편으로 평화적인 자주독립 운동의 중심세력을 분열시키고
와해시켜 버린 것이다. 일본은 또한 이 사건을 통해서 대외적인 결의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서 어떤 나라가 간여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양기탁이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재판 받는 동안에 일본의 신문들은 배설이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허위사실을
보도하여 배설의 명예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동시에 국채보상운동을 와해 시키려했다. 그러나 일본신문에 대해서는 배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상해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는 노스차이나 데일리 뉴스와 그 자매지인 노스차이나 헤럴드를 상대로 배설은 명예훼손의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여 1908년 12월 상해의 영국청한고등법원에서 열린 재판결과
배설은 승소했다. 배설이 N-C 데일리 뉴스로부터 받아낸 보상금은 3,000달러(멕시코 온화)였다.
6, 국내외의 애도 속에 죽은 義人
배설은 재판에 따르는 스트레스와 과로 등으로 1909년 5월 1일 서른 여섯 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의학적인 사인은 심장확장증(dilation of the heart)이었으나, 그 전 해에 있었던 자신에 대한 재판과 상해에서의 복역,
양기탁 재판 때의 국채보상의연금문제로 인해 조사 받은 스트레스 등이 겹쳐 그의 건강을 크게 해친 것이 죽음의 원인이었다.
평소에 그가 독한 브랜디와 담배를 즐기는 등 약한 심장을 지닌 사람으로서는 적당하지 않은 생활을 해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배설의 죽음에 대해서 많은 한국 사람들이 애도했다. 만함은 배설의 일생이 투쟁으로 일관되었으며,
한국인들은 가장 믿었던 벗을 잃었다고 썼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는 이렇게 애도했다.
죽다니 웬 말이냐, 정말이냐 풍설이냐, 꿈이냐 생시냐 한양전보가 과연 적실하며 신문식자가 과연 옳게 되었나뇨…
하늘이여 왜 이다지도 무심하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오적, 칠적은 양총을 놓아도 죽지 아니하며 폭
발약을 던져도 죽지 아니하며…대한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영국 의사 한 사람은 마흔도 못 살고 죽었으니
천도가 어찌 무심치 않느냐, …아아, 동포여 눈물이 있으니 이런 때 부득불 뜨거워지리로다.
배설은 이처럼 한국인들이 죽음을 슬퍼하는 가운데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람들이 묘비 건립을 위해 성금을 냈는데, 이 돈으로 1910년 2월에 묘비를 세웠다.
묘비문은 장지연이 지어 새겼으나 곧 한일합병이 되자 일제는 그 비문을 깎아 버렸다.
반세기가 지난 1964년 4월 편집인협회가 중심이 되어 전국 언론인들이 다시 성금을 거두어
일제가 깎아버린 비문은 그대로 두고 장지연이 지은 비문을 다시 새겨 세웠다.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5월 21일, 통감부에 매도되었다.
통감부는 신문 발행을 계속했던 배설의 후계자 만함(萬咸; Alfred Weekley Marnham)에게
700파운드를 주고 신보를 인수했다. 당초에 만함이 예상했던 금액은 500파운드였으므로
만함은 이 흥정에 만족했고, 통감부도 몇 년 동안 골칫거리였던 이 문제가 영원히 해결되었다는 데
대해서 크게 기뻐했다. 한일 강제합방과 함께 항일 신문 대한매일신보는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는
비운에 처했다.
배설 묘비문
아! 여기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 공의 묘가 있도다. 그는 열혈을 뿜고 주머귀를 휘둘러서 2천만 민중의 의기를 고무하며
목숨과 운명을 걸어놓고 싸우기를 여섯 해 동안이나 하다가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곧 공의 공다운 점이고
또한 뜻 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비를 세우는 까닭이로다. 공은 서기 1872년에 영국에서 탄생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이 가난하여 상업에 종사하더니 나이 열일곱에 일본에 건너와서 누거만(累巨万)의 재산을 모았으나
얼마 후에 실패에 부딪쳐 울적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다가 마침 일로전쟁이 터지게되매 서울에 와서 신문사를 창설하였으니
때는 정히 광무 8년 7월 이러라. 가재(家財)를 털어 사용(社用)에 충당하며 용왕매진(勇往邁進)하여
감히 기휘(忌諱)에 부딪치는 말을 직필(直筆)하매 이럼으로써 책책(嘖嘖)한 명성이 널리 세상에 떨치게 되었더라.
그러다가 필경 남의 모략에 걸려 상해 감옥에 구금되었고 수십일 후에 석방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통분한 나머지 병에 걸리게 되어
드디어 다음 해에 영서(永逝)하고 말았으니 때는 곧 1909년 5월 1일이요 나이 겨우 37세라 양화진에 장사지내니라.
임종 직전에 유언하기를 “나는 죽지만 신문은 영속시키어 한국동포를 구호하기 바란다”하였으니 애닯기 그지 없도다.
유족으로는 아들 하나이 있어 겨우 여덟 살이었다. 내 일찍이 상해에서 그를 만나 날이 새도록 함께 통음(痛飮)할 적에
비분강개하여 그 뜻이 매우 격렬하더니 이제 공의 묘를 위하여 글을 쓰게 되매 허망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이제 명(銘)하여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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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사단법인 베델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의 <영국인 베설(베델) 선생의 한국 사랑과 항일 투쟁사>를 옮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