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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진혁 수석연구원 (삼성경제연구소)
경제학의 속성
물리학자, 화학자, 경제학자가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었다. 몇 시간 동안 먹을 것을 찾던 그들 앞에 통조림이 하나 떠내려 왔는데, 안타깝게도 통조림 따개가 없었다. 물리학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돌로 내리쳐서 깡통을 땁시다." 그러자 곁에 있던 화학자가 황급히 물리학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러면 내용물이 망가질지 모르니 불로 가열합시다. 그러면 뚜껑이 열릴 겁니다." 이 때 조용히 있던 경제학자는 이런 제안을 했다. "여러분, 자! 우리 지금 여기에 통조림 따개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날 밤, 경제학자는 통조림을 먹었다고 ‘가정’하고 잠을 자야 했다.
이 이야기는 1970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의 유명한 유머이다. 이 유머에서 우리는 경제학의 속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즉 경제학에서는 이론을 전개할 때 흔히 가정을 한다. 분석하기 어려운 복잡한 현실에 대해서는 ‘일단 이렇다고 치고’ 하는 식으로 가정을 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전통 경제학의 수많은 가정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가정은 바로 경제주체인 인간에 대한 것이다. 즉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는 가정이다. 다시 말해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아인슈타인처럼 생각하고, 컴퓨터처럼 기억력이 뛰어나며, 간디처럼 의지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간주해 왔다. 게다가 경제학의 다른 가정들이 도전받는 와중에도 이 가정만큼은 마치 성역처럼 유지되어 왔다.
오랜 가정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행동경제학
하지만 과연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일까? 예산을 훨씬 뛰어넘는 가격에 충동구매도 많이 하고, 당첨될 확률이 극히 낮은 로또복권이 큰 인기를 얻는 등 실제로는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인지심리학자이면서도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여 화제가 되었던 다니엘 카네만(Daniel Kahneman) 교수는 바로 경제학의 제1번 가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즉, 그는 “인간은 미래가 불확실할 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아니라 비합리적이고 편향된 사고에 의해 판단하고 결정한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카네만 교수는 그 원인을 인간의 ‘확인 편향(confirmation bias)’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에 따라 모든 정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것이다. 쏟아지는 정보는 많지만 모든 정보를 정확히 살피고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기대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성에 앞서 감정이 먼저 개입된다는 이야기이다. 선거에서도 후보자의 선거공약이나 업적을 따지기 보다는 평소에 느꼈던 감성적 판단으로 후보를 지지하는 경우가 많다. 아는 만큼만 보이기 때문이다.
카네만 교수는 이처럼 심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경제적 의사결정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 결과로 태동한 것이 바로 ‘행동경제학’이다. 그는 기존 경제학이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며, 경제의 주체인 인간의 행동과 심리에 대해 과학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동경제학의 연장선, 뉴로 마케팅
이처럼 경제학과 심리학의 융합으로 태어난 행동경제학은 기업 경영에서도 점점 활용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기업들이 마케팅전략을 수립할 때 심리학자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 또 제품의 기능을 강조하기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광고를 하는 것 등이 좋은 사례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행동경제학을 마케팅에 응용한 뉴로 마케팅(Neuro Marketing)도 뜨고 있다. 즉, “소비자의 구매결정은 이성적이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감성적으로 내려진다. 따라서 인간의 무의식적인 반응을 분석해서 마케팅에 접목하자!” 라는 것이 이른바 뉴로 마케팅의 등장배경이다. 예를 들어, 백화점에서 주부들이 주로 찾는 점심이나 늦은 오후에 잔잔한 음악을 틀고, 회전율을 높여야 하는 패스트푸드점은 빠른 음악을 주로 트는 것이나, 세일 상품에는 빨간색 가격표를 붙이는 것이(빨간색이 흥분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뉴로 마케팅의 사례이다. 또 인쇄광고의 왼편에는 사물이나 사람, 오른편에 글을 배치하는 것도 뉴로 마케팅의 일환인데, 우뇌는 시각 정보, 좌뇌를 언어 정보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심리학뿐만 아니라 의학, 특히 신경과학도 마케팅에 접목되는 추세이다.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 CT, 시선추적기(eye-tracker) 등을 사용하여 소비자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을 읽어내고 이를 마케팅에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뉴로 마케팅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이성적 소비자보다는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소비자가 최근 소비시장의 주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출간된 마틴 린드스톰(Martin Lindstorm)의 바이얼러지(Buyology) 라는 책에 따르면, 소비자 구매의 90%는 무의식적 작용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구매결정의 60%는 4초 만에 이루어지고, 구매행위가 남한테 잘 보이는 슈퍼마켓에서 고가 제품 매출이 증가한다고 한다. 또 쇼핑카트의 크기가 2배 클 경우 수비자는 30% 더 구매하며, 가격이나 용량보다는 ‘1+1’이나 ‘한정판매’ 제품을 더 구매하는 경향이 있다고도 한다. 또 소비자 대상으로 마케팅 조사를 할 경우 소비자들이 언어로 표현하는 영역은 5%에 불과하고, 소비자 자신도 모르는 숨겨진 무의식의 영역이 80%에 이른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현상들 때문에 소비자의 무의식과 감정의 세계를 탐구하는 뉴로 마케팅의 활용 범위와 사용 횟수가 더욱 증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뉴로 마케팅의 흥미로운 법칙들을 쉽게 풀어낸 책
이 책은 수많은 마케팅의 법칙 중 뉴로 마케팅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인간의 무의식, 감정, 감각 등과 관련된 49가지를 엄선하여 소개하고 있다. 더욱이 실제 마케팅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현상과 사례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서 손쉽게 술술 읽힌다는 것도 독자로서는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너무 쉽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책의 무게감이 다소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겪는 익숙한 사례들 속에서 신기하고 때로는 교묘한 마케팅의 법칙이 숨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자연스럽게 복잡한 마케팅의 세계로 다가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알파벳의 법칙을 설명하면서 기아자동차의 K7 개발에 얽힌 이야기나 현대카드 사례를 드는 식이다. 알파벳의 법칙이란 알파벳이 가지는 상징성과 간결함을 이용해 소비자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마케팅 기법을 의미한다. 알파벳이 지니는 상징성 내지 간결함은 소비자들에게 원하는 메시지를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전달함으로써 기업이나 제품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또한 복잡하고 어려운 개념을 단순화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성보다는 소비자의 감성을 겨냥한 마케팅 기법의 일종이다. 기아자동차는 준대형 고급 승용차 K7을 새로 출시하면서 차명을 선택하기 위해 약 15개월 동안 해외 유수의 네이밍 컨설팅 회사 및 신경과학 권위자의 자문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기아자동차는 새로 출시되는 차량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을 찾기 위해 국내 및 해외 소비자 200여 명을 대상으로 단어 연상, 시선 추적,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 측정 등 뇌 반응 추적이라는 과학적 검증방법을 동원했다고 한다. 결국 기아자동차는 브랜드적인 정체성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직관 내지 무의식까지 반영해서 K7 이라는 브랜드명을 도출해낸 것이다.
친숙하지만 재미있는 사례를 통해 복잡한 법칙을 쉽게 풀어내면서도, 동시에 저자는 최신 연구동향도 적절하게 풀어놓음으로써 독자의 호기심을 계속 붙들어 놓는다. 알파벳 법칙의 경우에는 미국 마케팅 서비스 업체인 스트레티직 네임 디벨로프먼트(Strategic Name Development)의 최신 조사 결과를 소개하고 있다. 즉, 미국 소비자들은 브랜드의 첫 알파벳 글자에 따라 그 브랜드의 속성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C, S, B로 시작되는 브랜드 네임은 전통적인 분위기가 연상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코카콜라(Coca-Cola), 시어스(Sears), 버드와이저(Budweiser) 등 장수 브랜드가 이들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많이 때문이다. 반면 브랜드명이 Q, X, V로 시작하는 경우 혁신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한다. 이들 알파벳은 많이 쓰이지 않는 자음들이기 때문에 신선하게 느껴지는데, 특히 X도 과거의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그 이미지가 변화하고 있다. 또한 여성들에게 어필하는 브랜드 네임을 정할 때는 L이나 V로 시작하는 단어가 좋으며,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에서는 단연 X가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뉴로 마케팅을 4가지 그룹으로 분류
한편, 49가지나 되는 마케팅의 법칙들을 두서없이 나열하지 않고 나름의 분류에 따라 체계적으로 기술한 점도 이 책의 독창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뉴로 마케팅과 관련되는 마케팅의 영역들을 크게 무의식, 감정, 감각, 의식의 4가지 그룹으로 구분하여 정리했다. 첫째, 무의식은 인간의 깊은 잠재의식과 관련된 것으로서 생명유지, 모성애, 성욕 등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에펠탑 효과(자꾸 보면 정이 든다), 1등의 법칙(1등만 기억되는 세상), 칵테일 효과(원하는 것, 바라는 것만 인식된다), 소크라테스의 법칙(자기합리화로 소비한다), 밴드왜건 효과(친구 따라 강남 간다) 등 소비자의 충동구매의 대부분을 설명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둘째, 감정은 인간의 기분(mood), 감성(emotion), 느낌(feeling) 등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감정을 이용한 마케팅의 법칙으로 청개구리 효과(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한다), 콩코드 법칙(울면서도 겨자를 먹는다), 스탕달 신드롬(너무 좋아 심장이 뛴다), 자이가르니크 법칙(궁금한 건 못 참는다) 등 13가지를 만날 수 있다. 셋째, 감각은 본능에 가까운 소비자의 말초적 반응을 의미한다. 미학적, 상징적 요소가 보다 중요시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마케팅에도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과 관련된 법칙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알파벳의 법칙(상징성과 간결함으로 감성을 자극하라)뿐만 아니라 크레쇼프 효과(몽타주로 호기심을 자극하라), 실루엣의 법칙(감출수록 더 궁금하다), 다홍치마 효과(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등이 좋은 사례이다. 끝으로 넷째, 의식이란 인지, 이성, 논리, 정보처리, 합리성, 사회성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보통 좌뇌를 바탕으로 한 이성적이며 정보 중심의 소비자 반응을 설명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보증 효과의 법칙(전문가의 신뢰를 팔아라), 빅 마우스 법칙(입소문으로 팔아라), 플라시보 효과(의식과 믿음이 행동을 지배한다), 프레이밍 효과)프레임에 따라 선택이 달라진다) 등과 같은 마케팅 법칙들이 이성적인 소비자들을 유혹하는 비장의 카드이다.
읽기 쉽고 사례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제1번 독자는 마케팅에 관심이 있는 경영학도일 것이다. 기업 현장에서 마케팅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분들에게는 그동안 경험으로 체득했던 마케팅 업무와 소비자의 반응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독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한편,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의도적인 자극이 여러분의 무의식과 감성을 건드리고 있을지 모른다. 굳이 마케팅 관련 공부나 업무를 하지 않는 독자들을 위해서도, 이 책에는 현재를 살고 있는 소비자의 한 사람으로서 알아두면 좋은 상식들이 많이 녹아있다는 점에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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