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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 Letter(138) 2011. 1. 19
주안에서 사랑하는 문대헌 형제 부부에게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1:9-11)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주님의 존귀하신 이름으로 안부를 전합니다.
지난 달에는 여러 가지 일로 참으로 분주하였습니다. 연말을 맞이하여 결산해야 할 여러 보고서, 성탄 축하모임, 신년수양회 준비, 요한이 군 훈련입대 등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신년 수양회 이후 메시지를 정리하여 보낸다는 것이 벌써 2011년 새로운 한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세월이 너무나 빠른 것 같습니다. 새해를 맞이하고 나니 자신이 한국 나이로 벌써 60이라고 합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세월입니다. 제 아내는 지난 1월 3일에 만 60의 생일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마음의 나이는 40대라고 하면 알맞은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되었습니다. 지나온 날보다는 이제 남은 날을 먼저 생각하여야 할 시점에 이른 것 같습니다. 그 동안 많은 시간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때론 즐거움과 기쁨으로, 때로는 고통과 아픔을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함께 하였던 동고동락의 시간들을 인하여 감사를 보냅니다.
요한이는 지난 달 23일에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여 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내일(1.20) 퇴소합니다. 입소하던 날부터 혹독한 겨울 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난히 금년 겨울은 추운 날씨의 연속이었습니다. 흔히들 한국의 겨울날씨를 3한 4온이라고 하였었는데, 올해는 3한 4빙이라고 합니다. 요한이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계획이 있었을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이 많을수록 주님의 은혜와 영적 성숙도 많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대와 감사가 됩니다. 4주간의 기초군사 훈련을 마친 후 다른 병사들은 앞으로 20개월을 임지에 가서 부대생활을 하여야 하지만, 요한이는 병역특례로 남은 박사과정에서 앞으로 2년 더 연구하면 군필이 됩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신년 수양회 때 함께 나누었던 메시지를 간단하게 요약하여 보냅니다. 개인의 영적인 삶과 사역에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금년부터는 이제까지 매달 보내던 편지를 시간적 여유가 될 때에 준비하여 보내고자 합니다. 본래 시작할 때의 계획은 100회를 보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벌써 138회째가 되었습니다. 지난 11년이 넘도록 매달 빠지지 않고 보내려고 가끔씩 힘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보내고자 합니다. 행여나 보내지 않더라도 이해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2011년 새해에는 목표한 여러 가지 일들이 주님의 도우심으로 넉넉히 성취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건강하며, 가정과 사역가운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소망이 더욱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형제 자매들의 사랑과 기도에 감사하며, 박 남 규 부부 서신
복음의 능력
• 서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그의 저서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 복음주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지는 최고의 권위, 죄인의 구세주로서의 예수님의 위엄과 영광, 성령의 주권, 개인의 회심의 필요성, 복음전도의 우선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동체로서 교회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우리가 바로 서면 세상이 바뀝니다. 진짜 예수를 만나 변화된 우리를 세상에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세상은 바뀝니다. 한 사람을 통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옥한흠 목사님의 설교 중에서)
1. 복음의 유일성(살전1:5, 2: 2, 4, 8, 9 3:2)
데살로나가 성도들의 분명한 회심의 역사는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과 확신의 결과이었습니다. 바울은 세 안식일에 걸쳐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강론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울에게 큰 기쁨을 주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참으로 복음의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행17:1-4) 물론 그 당시에도 바울을 대적하여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오늘날처럼 복음 자체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나 위협은 그다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복음의 절대성에 대한 위협적인 도전현상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다원주의(多元主義) 사상은 가장 심각한 도전입니다. 다원주의는 기독교가 최종적이며 유일하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한낱 우리의 의견일 뿐인 것을 가지고 누군가를 개종시키려는 시도를 순진한 오만이라고 비난합니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대응은 겸손하면서도, 개인적인 우월감을 조금도 드러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최종성을 계속해서 주장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유일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며 유일하신 신인<God-man>이시다는 변함없는 확신이 요구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유일하며, 그분만이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탄생),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죽음),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부활)이가 없으므로, 오직 그분만이 죄인들을 구원할 자격이 있습니다. 이런 자격을 갖춘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대한 알렉산더, 위대한 나폴레옹, 위대한 소크라테스, 위대한 석가, 공자라고 부를 수 있지만, 위대한 예수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분이 아니라, ‘유일하신’(the Only)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경쟁자도 없고 후계자도 없습니다.(행4:12, 요14:6)
(2) 우리가 굴복해서는 안 되는 현대의 풍조는 윤리적 상대주의입니다. 오늘날 모든 면에서 성경에서 제시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준들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1960년대 성 혁명 이후 급속한 변화의 물결입니다. 일부일처제의 위협, 이성간의 결혼에 대한 도전으로 동성애의 합법적 허용, 혼전동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상대적 윤리적 가치가 성경의 도덕적 절대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원주의에 도전에 맞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옹호하는 진리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윤리적 상대주의에 맞서서 진리의 순종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물의 흐름에 따라가는 죽은 물고기가 아니라, 물의 흐름을 거슬러 가며, 문화의 주류까지도 거스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죽은 물고기만이 물의 흐름을 따라갑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For those God foreknew he also predestined to be conformed to the likeness of his Son, that he might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우리는 세상적인 풍조에 순응하는 제자가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며(non-conformity), 주님의 형상을 본받는(conformed)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이며 신학자인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생애 마지막 저서 <제자도>에서 “제자의 첫 번째 특성을 불순응(non-conformity)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풍조를 본받지 않고 단연히 거부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기준을 순종하는 제자가 참된 제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2. 복음의 분명한 결과(Clear conversion)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metanoia, 메타노이아)는 마음의 변화, 즉 ‘육신의 마음’ 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회심은 또한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기에 죽음이라는 단어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경건하지 못한 세상적인 사고방식과 기준들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몇 년 전 주님께로 가신 이중표 목사님의 별세(別世)신앙이 한 때 한국교회에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생소한 개념이어서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그토록 강조하고 암송하던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세상과는 별세하였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이별하고 세상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아직도 세상적인 풍조와 가치체계와는 더 이상 타협하지 말고 철저하게 주님 중심의 주재권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진정한 제자도의 원리를 삶 가운데 구체화시켜 나가는 삶을 강조한 것입니다. 제자도의 핵심을 잘 이해 하셨으며, 성도들에게 강조하셨고, 몸소 그 정신으로 사시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께로 가셨습니다. 마지막 임종순간에 “할렐루야”를 외치셨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회심은 마치 더러운 의복처럼 입었던 옛 아담, 즉 우리가 지녔던 이전의 타락한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형상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2-2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과거로부터 완전하게 돌아서려면 때로는 고통스러운 희생이 따를지도 모르며, 심지어 가족이나 재물까지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눅14:25-33) 우리는 회심의 이러한 여러 가지 면들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우리는 이제 과거와는 달리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아래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행동의 변화가 따릅니다.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은 우리의 도덕적 기준과 윤리생활 양식의 전반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이것은 ‘회개’가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마3:8)를 나타내어 보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사고방식과 관점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행동의 변화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 이 두 가지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해야만 합니다.(고후10:5, 요13;13) 이런 면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회심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명확합니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1:9-10)
(1) 먼저 그들은 우상을 버렸습니다. 과거로부터 온전히 돌아섰습니다. 과거 시제가 분명합니다. 자기들 스스로 우상을 버렸다는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우상이 무엇이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든 우상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우상은 곧 탐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3:5-6) 돈, 사람, 명예, 권력, 인기 등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의 첫 자리가 되어야 할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나의 삶에 있어서 우상은 무엇입니까? 비록 우리가 이방신을 섬기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2011년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의 삶의 동기를 새롭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그들은 현재 참되신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습니다. 현재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습니까? 혼합주의(syncretism)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신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왕하17:33)
제자의 삶은 하나님도 섬기며, 세상의 것도 즐길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현재의 나의 삶 가운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고 하는 여호수아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3) 미래에 대한 소망이 분명합니까?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1:10)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들의 믿음생활의 기간이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회심의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소망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삶을 온통 송두리째 흔들어 놓게 됩니다. 과거로부터 온전히 돌아서서 현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며, 미래에 대한 소망을 확실하게 세워줍니다. 그 소망의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우리의 부활도 확실합니다. 참으로 복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소망 없는 이와 같이 살아가지 않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복스러운 소망가운데 날마다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복음의 능력
변하지 말아야 할 전도 메시지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깊은 확신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새 생명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가 우리의 복음인 것을 우리는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이것만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만이 모든 사람에게 유일한 희망인 것을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당시 로마는 최고로 발달된 과학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발달된 과학이 한사람의 영혼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 은 알았습니다. 또한 최고의 군사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군사력이 한 사람의 영혼도 자유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당시의 로마는 최고의 철학적인 지식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지식이 한 사람의 영혼을 진정으로 해방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1)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복음입니다.(행5:20, 요6:68, 겔20:13,21)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2:25)
(2) 성화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롬8:1-2, 딤후1:9-11, 벧후1:3-4)
(3) 승리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요일4:4, 요일5:4-5, 시37:31)
세상 풍조로부터, 죄로부터, 또한 여러 가지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승리하며 살게 하는 능력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와 지배로부터 자유케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4) 소망의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롬15:13, 살전4:16-18)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우리가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참으로 주님의 강림에 대한 소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오늘날 소망 없이 살아가는 세대 가운데 주님의 강림과 장차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소망 가운데 살아가도록 합니다. 얼마나 복스러운 소망인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후2:16-17)
결론적으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마련하여 놓으신 복음(고전15:3-4)의 능력에 사로잡혀, 이 복음으로써 온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복음 증거의 삶에 더욱 헌신해야 합니다.
능력있는 증인의 삶
능력 있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음의 능력을 온전히 의뢰하고 이와 같은 삶에 자신을 더욱 계발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1:5)
1. 기도의 능력(살전1:2, 3:9-10, 5:17, 5:25)
기도는 불신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단단한 바위 덩어리를 깨뜨릴 때 어떻게 합니까? 먼저는 정(丁)이라고 하는 뾰족한 쇠끝을 가지고 계속 바위를 뚫어나갑니다. 그리고 그 움푹 파인 구멍 속으로 다이너마이트를 밀어 넣어서 불을 붙이면 바위가 갈라지는 것을 종종 보곤 합니다. 먼저는 영혼들의 마음을 기도로써 계속 준비시켜 나가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폭발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1)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통로이며, 또한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통로이기도 합니다.(행10:1-, 고넬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2) 사람을 구원시키시는 하나님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역사는 인간의 기도와 항상 조화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의 한 부분이기도 한 것입니다.
(3) 사람들을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애써 수고하며 노력하지만 영혼들의 믿음을 온전케 하심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살전3:10) (고전3:6-8)
기도의 사람, 기도의 능력을 믿고 나아갈 때 능력있는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말씀의 능력(살전2:13, 히4:12)
영혼을 구원함에 있어서 기도가 정(철끝)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습니다. “내 말은 불과 같고 바위를 부수는 망치와 같다.”(렘2329)고 하였습니다.
(1)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의 말씀입니다.(딤후3:15- 구원에 이르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2) 사람들을 성장시키는 능력입니다.(딤후3:16-17 말씀은 온전케 하는 능력입니다)
(3)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게 하는 능력입니다.(딤후2:15 인정된 일꾼으로 세우는 능력)
말씀의 사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고 선포할 때 능력있는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사랑의 능력(살전2:8, 3:1- 3:8)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형편을 그냥 앉아서 기다리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참다못하여 동역자 디모데를 대신 보내어 그들의 형편을 알아보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네비게이토 2대 회장이셨던 Lorne Sanny 선교사님은 “사랑이란 비이기적으로, 무조건 용납하고, 서로의 필요를 섬겨주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1)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날 감성시대에는 감동을 주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이어령 교수가 쓴 <낙타의 눈물>이라는 재미있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낙타가 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프랑스 말에 “낙타같은 사람”이라는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매우 이기주의자를 가리키는 욕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낙타는 새기를 낳아놓고서도 돌보지 않는 모성애 없는 이기적인 낙타들이 있다고 합니다. 새끼가 굶주려 죽게 생겼는데도 젖은 물론이고 가까이 오면 발로 차 얼씬도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미에게 버림받은 새끼 낙타는 불쌍하게도 죽게 됩니다. 뜨겁고 불모의 땅, 사막의 환경에서 살다보면 자신만의 생존을 위해 아마 그렇게 비정한 낙타들이 생기는 모양입니다. 이럴 때 몽골 사람들은 매정한 어미 낙타를 다스리는 독특한 비방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전통적인 현악기인 마두금을 잘 연주하는 악사를 초청하여 낙타를 앞에 놓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연주회를 엽니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 자식 손자를 많이 키워본 할머니가 자장가와 같이 다감다정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구슬픈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면 마두금 연주와 할머니의 구슬픈 노래를 듣고 낙타의 눈에는 눈물방울이 흘러내립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린 낙타는 모성애를 되찾아 제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정을 들여 잘 키운다고 합니다.
바로 사랑의 감동입니다. 사랑의 능력입니다.
(2) 성장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의 형제여, 성도들에게 베푼 그대의 사랑이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고, 또한 내게도 큰 기쁨과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를 한 형제로 받아들이십시오”(빌레몬서1:7)
육신의 자녀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자녀들도 사랑이라는 영양분을 먹고 성장합니다.
(3)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자 하며, 온전한 믿음을 세워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4-15)
사랑의 사람, 사랑의 능력을 입고 살아갈 때 능력있는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4. 성령의 능력(살전1:5)
네비게이토이 핵심가치 가운데 한 가지는 성령의 능력주심과 인도하심(The Empowering and Leading of Holy Spirit)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주심을 믿고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1) 성령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불러일으킵니다.(요3:3-5, 고전12:3, 롬8:1-2)
(2)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십니다.(행1:8, 행4:31)
(3)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에 놀라운 성화의 능력을 부여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소망이 넘치도록 합니다.(롬15:13)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거룩하여 집니다.(롬15:16)
-성령을 통하여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롬15:18)
-성령을 통하여 사랑의 삶이 넘치게 됩니다.(롬15:30)
성령의 역사와 능력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효과적이고 능력있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5. 본된 삶의 능력(살전1:6, 7 살전2:14)
(1) 본된 삶은 최고의 권위입니다.(딤전4:12-)
-본된 삶은 모든 장애들을 극복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2) 본된 삶은 성장의 통로입니다.(벧전2:21, 고전11:1)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이 나타나야 합니다.
(3) 행동으로 나타나는 본이 되어야 합니다.(행1:1, 요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
본된 삶을 살아갈 때 강력하고 능력있는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재생산의 비전
1. 삶의 핵심가치(살전2:19-20)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2:19-20)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핵심가치(존재목적)
-바울의 삶에 소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기쁨은 무엇이었습니까? 자랑스럽게 여긴 면류관은 무엇이었습니까? 목숨까지 주기를 즐거워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사모의 대상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의 삶의 대의명분은 복음의 진보를 위해 사는 것(빌1:12-), 형제 자매들의 믿음의 진보를 위해 사는 것(빌1:25-),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는 삶의 진보를 위해 사는 것(빌1:20)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각 장마다 주님의 재림 때에 함께 나타날 성도들, 즉 자기가 전도하여 주님께로 돌아온 영혼들의 믿음이 굳게 서서 주님오실 때까지 온전히 보전되기를 위해 노심초사하게 기도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3:7-8)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것이 믿음 안에서 세워진 영혼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영원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우리는 항상 무엇이 영원히 남아있을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을 망치는 3가지 요인이 있다고 종종 나누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Do nothing) 다음은 중요하지 않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Do wrong thing) 또한 일을 하기는 하되 너무 여러 가지 일에 분산하여 하는 것입니다.(Do many things) 우리의 인생은 제한적입니다. 시간이 제한적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제한적입니다. 우리의 자원이 제한적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모두 성공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한 가지 일에 집중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일꾼들을 세우는 일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합니다.
2. 재생산의 기초
☛ 너희-→마게도냐-→아가야-→각 처로 퍼져 나갔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전1:8)
재생산의 기초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성숙된 자신이 재생산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자기 일터(직장, 지역사회)가 바로 재생산할 수 있는 사역지입니다.
(1) 복음으로 분명하게 거듭난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벧전1:23)
(2) 성숙된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살전3:10, 엡4:13-)
(3) 헌신된 나 자신이 바로 재생산할 수 있는 기초입니다.(요12:24)
♦ 성숙되고(mature), 헌신되고(dedicated), 열매 맺는 제자(fruitful disciple)들이 되어야만 재생산을 할 수 있는 견고한 기초가 될 수 있습니다.
3. 동역자 디모데(살전3:1-2)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동역할 동지는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살전3:1-2)
디모데는 바울에게 징모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Soldier), 그리스도 복음의 일꾼(Staff),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사람(Servant), 디모데의 믿음의 아들(Son), 바울의 사역을 계승하는 계승자(Successor)로 발전하였습니다.
어떻게 디모데와 같은 사람을 징모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지난 번 Park-135번째의 디모데에 관하여 참고하기를 바랍니다. 다시 새롭게 묵상할 수 있는 말씀은 딤후2:1-6까지의 말씀입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딤후2:1-6)
좋은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1)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딤후2:3)
-군사의 특징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초점은 언제나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데 두어야 합니다. 제자도의 원리에 있어서는 철저한 주님 중심의 주재권 가운데 자신을 헌신하며 살아가는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삼고 재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동역자로 계발시켜 나가야 합니다.
(2) 경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딤후2:5)
-경기하는 자의 특징은 법대로 경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의 삶에 있어서 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37:31)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온전히 순종하며 그 말씀의 원리에 따라 철저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되도록 훈련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도자의 권위를 무시하며 팀을 떠나게 됩니다.
(3) 농부가 되어야 합니다.(딤후2:6)
-농부의 특징은 수고라고 하였습니다. 수고하는 농부는 부지런한 사람을 말합니다. 수고하지 않는 농부는 결코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제자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방해는 게으른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지런하지 않고는 결코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모든 면에서 부지런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만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생산할 수 있는 동역자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자질들이 구비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철저한 주님 중심의 주재권과 말씀의 원리에 순종하는 삶과 삶의 여러 영역에서 부지런하며 수고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가야 합니다. 또한 사역의 경험을 통하여 많은 필요한 영역들이 있을 것입니다. 각 자가 좋은 원리들을 생각하여 사역가운데 적용함으로 동역자를 세우며 훈련시켜 나가는 일에 큰 진보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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