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은.
>1907년 평북 삭주군 구곡면 안풍동 구령포 청계령산 아래
>청계곡에서 독립운동가 단해(檀海) 이관집(李觀 ) 선생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이암의 후손.
>자는 채영(采英) 또는 중정(中正) 호는 한암당(寒闇堂) 또는 정산초인(靜山樵人).
>
>세 살부터 어머니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 6세에《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다가「한무제토멸지(漢武帝討滅之)하시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위만조선이 우리 나라면서 우리나라를 토멸한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 원수인데,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은 나는 싫다"하여
>끝내《동몽선습》을 읽지 않았다.
>
>13세 때인
>1919년 4월 7일 신안동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
>그해 10월에
>아버지를 따라 단학회(檀學會)가 주관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계연수(桂延壽), 최시흥(崔時興), 오동진 등의 강연을 듣는 한편
>조선독립소년단 조직 활동에 참가, 단장이 되었다.
>
>의민사(義民社) 천마산대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전봉천과 함께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
>24세인 1930년
>
>「삼육전재 국권회복(三育全材 國權 復)」이라는 해학 이기(李沂)선생의 신교육의 뜻을 발휘하기 위하여 삼육사(三育社)를 조직.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
>회람잡지《三育》을 발행하기도 하였는데.
>
>《三育》7월호에「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등의 기사로 인하여 삼육사는 1931년 7월 31일 강제 해산되었다.
>
>33세인 1939년
>이상유의 5만원 희사에 선대로부터 경영해 오던 구성재(求誠齋) 재산을 합하여
>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하고 학감 겸 교사로 종사하였으나,
>
>1942년
>'학생들의 신사참배 기피', '조선교육', '창씨개명불응', '무궁화 심기' 등
>12항을 이유로 강제 폐쇄 당했다.
>
>39세인 1945년
>「단학회(檀學會)」기관지《태극(太極)》의 주간으로 취임하였다가
>1946년 1월 1일 발행 신년호에「신탁통치반대론」기사 필화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구금되고 잡지는 폐간되었다.
>
>57세때인 1963년
>단학회의 3대강령인 '제천보본(祭天報本)', '경조홍방(敬祖興邦)'. '홍도익중(弘道益衆)'을
>완전 계승하여 단단학회(檀檀學會)로 조직 확대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
>63세인 1969년
>이석영씨의 재정 후원으로 강화도 마리산 단학동에 커발한 개천각을 세워
>신시개천의 창시자 한웅천왕을 비롯하여 치우천왕. 단군왕검을 봉안하고
>
>매년
>- 대영절(大迎節. 음 3월 18일).
>- 개천절(음 10월 3일) 두 차례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
>
>69세인 1975년 5월 8일
>《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東源論)》을 미국의 하버드. 워싱턴. 콜롬비아.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 5개 대학교에서 주문해 갔다.
>
>70세인 1976년
>박창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제씨와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하고
>잡지《자유》에 옥고를 기고하기 시작하였으며,
>
>78세인 1985년
>배달문화원 대상을 수상하신 이듬해
>
>1986년 4월 19일 새벽 1시 자택에서 운명하셨다.
>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것이 1986년이니 이제 15년을 지나고 있다.
>다행히 생존해 계실 때 교류하던 인사들이 상당수 있어
>그분들로부터 한암당 선생에 대하여 직접 들을 수 있었다.
>
>
>(다음은 박정학 한배달 치우학회장이 전하는 내용이다)
>
>
>박정학씨는 한암당 선생을 만난 기억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일로 3가지를 꼽는다.
>
>
>그 첫째는 빼어난 기억력이다.
>
>한암당 선생과 교류하던 당시
>"10여세 때 들었던 내용을 확인하고 싶으니 이러저러한 책들을 구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필요한가를 되물었더니
>"옛날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들은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
>40여종의 도서 80여 곳에 대한 복사를 요청받고 국립도서관을 방문.
>상당수 책이 귀중본. 희귀본이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것임을 알게 되고
>담당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더니 도서를 찾던 담당자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
> "도대체 이런 책을 누가 보느냐?"
>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지하실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이런 책이 수북히 쌓여있다" 며
>요청한 자료를 준비해 주었다.
>
>이렇게 하여 원하는 책의 복사부분을 상자에 담아 전해드렸다
>(그러나 이 상자를 뜯어보지도 못하고 선생님은 세상을 뜨셨다).
>
>아마 한번 들었던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대한독립소년단 시절 전령으로 활약할 때는 편지대신 외워서 전달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
>
>두 번째는 속독에 의한 뛰어난 독서력이다.
>
>한 번은 조선왕조실록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마찬가지로 과거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 책을 구해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
>그래서 한배달 창립 멤버인 모 회사 사장에게 부탁하여 사장이 직접 책을 전해드렸다.
>
>책을 받아 본 선생님은 매우 기분 좋아하시며 책을 펼쳐 보시더니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겨 읽으면서도
>필요한 부분을 정확하게 찾아내 쪽지를 끼워 표시해 놓고 원고를 완성하는데 사용하셨다.
>순 한문으로 된 책을 그렇게 빠르게 읽는 것은 처음 보았으며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
>셋째는 빼어난 건강이다.
>
>79세의 노인이 젊은 제자들과 함께 산을 오르는데
>젊은 제자들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산을 오르셨다.
>몸이 아주 가벼워 보였다.
>
>
>< 운초 계연수 선생과의 만남 >
>
>계연수 선생은 호를 운초라고도 하고 일시당(一始堂)이라고도 하는데.
>한암당 선생 아버지와는 광복운동을 함께한 관계로 어릴 때부터 가까이서 자주 접해온 사이였다.
>
>그러던 1943년 어느날.
>계연수 선생이 집으로 찾아와서 어린 이유립을 부르더니
>"너는 머리가 좋고 하니 네가 우리 역사를 공부해라"고 부탁 겸 타이르셨다.
>
>그러나 독립운동과 정치에 더 관심이 있던 이유립은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3일 후 목이 잘린 계연수 선생의 시신이 대동강변에서 발견되었다.
>불과 몇일전에 자신에게 일렀던 말들이 선생의 유언처럼 들리고.
>마침내 운명처럼 '우리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
>이전에 틈틈이 계연수 선생에게 들었던 이야기에다
>신채호. 이덕수 선생들과 교류하면서 전해 듣는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하였다.
>
>
>
>
>< 한암당 선생의 민족사 체계 >
>
>"서로의 원수를 잊고
>세나라(고구려. 백제. 신라)가 힘을 함쳐 당나라를 쳐 없애자는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장군의 제의는 무시되고.
>한, 단, 조선, 북부여, 고구려, 대진, 고려로 이어지는 국통, 국학, 사관이 올바로 풀리지 못하고..."
>
>이 말은 한암당 선생의 사관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
>한암당 선생의 민족사에 대한 체계는,
>물론 한암당 선생의 수많은 논저를 읽고 난 후에야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다음의 몇 가지 주장에서 그 맥락을 읽을 수가 있다.
>
>(1)
>우리 민족의 정통성은
>한국에서 이주해온 한웅천왕의 배달 건국으로부터 비롯하여
>단군조선-북부여(원시고구려)-고구려(본고구려)-대진(大震-중고구려)-고려(후고구려)-조선-임시정부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
>(2)
>세계문명은 서(西)에서 동(東)으로 온 것이 아니라
>동(東)에서 서(西)로 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
>(3) 민족사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5898년 전에 있었던 한웅천왕의 태백산 천강과 함께 이룩된
>신시개천에서 찾아야 한다.
>
>(4) 단군조선은 엄연히 실존했던 역사이며,
>아사달시대(1048년),
>백악산 아사달시대(860년),
>장당경시대(188년)를 통해 2096년의 역년을 셈할 수 있고,
>
>통치방법으로 신한(진한), 말한(마한), 불한(변한)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본 뜬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적용되었다.
>
>(5) 고구려 건국 연도는 북부여 원년(신시개천 3659년)으로부터 기산되며
>보장제(帝)의 27년까지는 907년이 되지만(신시개천 4565년)
>해모수 8년(신시개천 3666년)의 부여 고향 수복으로부터는 정확히 900년이 된다.
>
>(6) 기자조선은 환작(幻作)된 것으로서 민족의 정통 역사로 볼 수 없다.
>
>(7)
>위만은 요예(遼濊)의 변경을 침략하여 지금의 창려(昌黎-하북성)를 점거해
>조선이라고 잠칭하고 있던 떼도적의 두목에 불과하며,
>의문 투성이의 '한사군'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
>(8)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성제의 위업으로 이룩된 영락대통일은
>따무르자주의(漢寇擊退完我舊彊)를 완전히 성취한 것인 동시에 민족사의 영원한 이상을 제시해 준다.
>
>☞ 한구격퇴완아구강(漢寇擊退完我舊彊) : 한나라 도적들을 퇴거하고 온전한 우리의 옛 강토를 되찾자
>
>(9)
>신라 '삼국통일'이란 허구에 찬것이며,
>'발해삼인당일호(발해 사람 셋이 모이면 한 마리 호랑이를 당해낸다)'에서도 나타나는
>대진의 웅혼한 기상에서 보람을 찾아야 한다.
>
>(10)
>한양 조선은 신시개천 5816년(1919년)에 종식된 것으로 보며
>동년 4월부터 옛 고구려 송강현(지금의 상해)에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법통을 잇는다.
>
>물론 이러한 주장외에도 광범위한 사론(史論)이 펼쳐져 있지만
>더 요약한다면
>
> '고구려 중심론'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
>- 천부경,
>- 삼일신고,
>- 참전계경,
>- 신시개천경(단군고기),
>- 광개토지경(비문),
>- 훈민정음경(반포문)을
>
>우리정신. 역사를 찾은 근본서적으로 중요시 하였다.
>
>
>한암당 선생과【한단고기】
>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일생을 통털어 최대의 민족사적인 사건은
>【한단고기(桓檀古記)】와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
>우리 민족사를 논할 때 불가분『한단고기』와의 관련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럴 때마다 한암당선생은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되고 만다.
>
>『한단고기』의 탄생은 운초 계연수 선생이
>
>- '삼성기전 상편'. '삼성기전 하편'.
>- '단군세기'.
>- '북부여기' 상. 하.
>- '태백일사'를 한데 묶어
>『한단고기』라는 제목으로 30부를 발간한 데서 비롯된다.
>
>그 가운데 1부가 한암당 선생에게 전해져 칠십년 대 초반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당시 한암당 선생은 의정부에서 셋방을 얻어 있다가
>너무나 어려워 군산으로 잠깐 내려가 있었다.
>
>그 사이 주인은.
>방세도 못내는 노인이 어디 갔는지 나타나지도 않자 책을 내다 팔아 버렸다.
>이때 그『한단고기』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한암당 선생은【한단고기】1권 정도는 이병도씨 집에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음)
>
>급기야 기억을 되살려【한단고기】를 다시 써야 했다.
>워낙 공부를 많이 하고 어려서 전령으로 활동할 때 문건보다는 외워 전달했던 것이나
>속독으로 훈련된 탓에 새로이 한단고기 내용을 기억하여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후 잘못된 부분이 몇 군데 제자들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 '거의 맞을 거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선생의 인품을 의심하는 사람은(식민사학자들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
>
>이렇게 해서 정리된 문건은
>1970년대 후반〈한단고기 정해〉라는 제목으로
>서문까지 완성된 상태에서 출판사 선정을 위한 협의 도중
>당시 월간《자유》의 발행인인 박창암으로부터
> '출판에 도움이 될 재일교포가 있으니 원고를 달라'는 요청을 받고 건네졌으며.
>불과 3일이 지나지 않아 박창암으로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원고를 돌려 받았다.
>
>그리고 얼마 후 일본에서『한단고기』초판이 나왔는데,
>일부 내용의 해설이 임의로 바꾸어져 있었다.
>
>그리고 이 초판은 우리나라에 전해져 제일 먼저 김은수 선생의 번역판이 나왔고.
>이유립 선생의 '한단고기정해'가 대배달 민족사에 실리게 되었으며
>이어서 임승국선생의 한단고기.
>강수원 선생의 한단고기.
>85년 배달문화원에서 발행한 한단고기,
>오정윤 선생의 한단고기(도서출판 창해 刊) 등이 연이어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
>☞ 이 외에도
>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83년에 발행한 '한단고기' 필사본.
>- 1979년 조병윤씨가 오형기씨에게 부탁하여 필사한 '한단고기'
>(광오이해사 발행. 100부 한정판. 이 내용이 일본인 '녹도 승'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음).
>- 일본인 '녹도 승'이 쓴 '한반도의 우가야왕조사-한단고기'등이
>한배달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
>
>< 한암당 이유립과 (사)한배달 >
>
>
>(역시 이유립 선생을 직접 만났고 (사)한배달의 설립에 결정적인 산파역할을 맡았던 박정학(치우학회장)씨의 증언이다)
>
>1982년에 한미 연합 사령부 교양강좌 때 만났던, 한암당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1985년이다.
>
>8월 9일자 신문에「백운대 쇠말뚝 제거!」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는 순간,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말로 우리 겨레의 얼을 찾는 일을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다.
>
>다음날인 10일,
>이전부터 알고있던 한암당 선생의 제자 전형배군(당시 고려대 대학원 재학중)을 찾아서
>함께 김포읍 산자락에 거처하시는 선생을 찾아갔다.
>
>새로 지은 집이었는데 조그만 별채로 방 하나, 부엌 하나였으며,
>혼자서 연탄도 반찬도 없이, 그야말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하는 처지였다.
>
>그나마 몇몇 제자들이 가져다주는 라면을 한꺼번에 3개를 삶아 놓고
>소금이나 간장을 반찬 삼아 아침, 점심으로 조금씩 끼니를 들고 있던 때였다.
>
>제자의 안내로 선생을 뵙자마자
>"이제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나는 이제 안합니다. 끝났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왜 그렇습니까?"라고 재차 물으니,
>"상황이 쉽지 않습니다. 국사찾기는 이제는 안합니다.
>책도 팔아버리고…왕조실록하나 구하려고 해도 돈이 없어 못구하고…나는 안 합니다"라며 완강히 거부하셨다.
>
>나는 '이제는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선생님은 "이제 끝났다"고 말씀하시니 난감하였다.
>
>그리고 며칠 후 어렵사리『조선왕조실록』을 구해 드렸다.
>그리고 다시 댁을 찾아가 보니 책은 펼쳐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였다.
>
>3번째 방문할 때는 '두 아들'을 데리고 갔다.
>절을 올리면서 "우리 이 아이들을 만주를 찾는 선봉장을 만들겠습니다."라는
>아내 전유선(한암당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서 현재 '한암당 이유립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의 말을 듣고는 마침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
>우선 거처를 정하여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 살도록 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
>당시 한암당 선생은 김포에, 부인은 군산에, 시집 안간 막내 딸은 대전에 각각 흩어진 이산가족이 되어있었다.
>이런 선생께 1200만원을 마련하여 화곡동에 전셋집을 마련해드리고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살도록 터전을 구해 드렸다.
>
>이후 선생님은 집필에만 전념하여
>도서출판 고려원에서【대배달민족사(전 5권)】을 발간하기에 이르렀고.
>
>집을 마련하는데 재정을 지원했던 사람들이 모여
>한암당 선생의 제자(현재 부부인 전형배 고성미)를 초청.
>우리 역사에 대하여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
>마침내 4월 17일 저녁 7시 인사동 소재 당시 도서출판 고려원 사장(김낙천) 사무실에서
>직접 한암당 선생을 모시고 질의응답 형식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9시 20분이 될 즈음)
>"이것은 정말 당신들이 해야 될 일이요"라고 말씀을 하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셨다.
>
>재빨리 선생을 의자에 앉혀드리고 청심환을 드렸는데,
>15분이 지나서도 깨지 않아 인근 혜정병원으로 옮겼다.
>
>뇌출혈이었다.
>
>중구 필동의 성심병원 응급실로 급히 옮겨 하루를 지낸 다음날
>아침 잠깐 의식이 돌아오는 듯 했으나 낮 12시쯤 재차 진행된 뇌출혈로 의식불명에 빠졌다.
>그 상태로 자정을 넘기고 다음날 새벽 1시에 운명하셨다.
>
>선생의 장례를 단단학회장으로,
>강좌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재정을 부담하여 정성껏 치렀다.
>
>장례를 마친 후
>"이것은 정말 당신들이 해야될 일이요"라는 마지막 말씀을 유언으로 해석하여
>'역사 찾기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재정지원에 참가하였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단체 설립을 준비하여
>7월 1일 종로 인사동에서 사무실을 열었다.
>
>그리고 그해 말 마침내 "사단법인 한배달"이란 이름으로 서울시 교육청에 등록되었다.
>
>오늘날 15년의 역사를 가진 사단법인 한배달의 창립은
>바로 민족사학자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뿌린 씨앗이 싹튼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
>한 시대의 위대한 역사가 이유립은
>그의 호 '한암당(寒闇堂)'이 풍기는
> '춥고 어두운' 분위기 만큼이나(대부분의 광복군과 그의 후예들이 그렇듯이)
>어려운 삶을 살았다.
>
>자생 신앙결사인 '태백교'의 부활을 꿈꾸기도 하였고.
>또 한 때는 정치에 뜻을 두기도 하였으나 이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
>다만 그의 사론만이 후세에 남아 '국사바로잡기'의 험한 길 위에 비치는 찬연한 등불이 되고 있다
>
>
>< 참고 자료 >
>
>한암당 선생이 남긴 논저들은『대배달 민족사』에 실려있습니다.
>필요한 분은 한배달로 연락하시면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대배달 민족사(전5권)』(고려원 刊)
>- 구입문의 : 월간 한배달사 편집부 (02) 747-8984
>
>
>
>
>------------------------------------------------------------------------
>
>< 민족사학자들의 행보 >
>
>
>우리 배달Baedal 민족의 장대한 역사를 태풍의 격렬한 움직임이라고 한다면,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그 태풍의 중심이 되고있는 태풍의 눈은
>배달Baedal의 정신입니다.
>
>그 배달의 정신은
>- 천부경,
>- 삼일신고,
>- 366사(참전계경),
>- 단군팔조 등
>
>십수권의 배달Baedal 민족 고유의 경전에서 설명되는
>인류의 보편적 진리가 설명합니다.
>
>
><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의 전래 >
>
>
>교과서에 없는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등이 어떻게 지금까지 전래되었는가 ?
>라는 의문을 제기해주신 분들의 요청에 의해 그 자료의 전래내용을 첨부합니다.
>
>
>< 1. 한단고기 >
>
>한단고기는
>천부경, 삼일신고의 원문과 366사(참전계경)에 대한 자료등이 실려있는 책으로서
>이 책이 전래되는 과정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은 곧 이 경전들의 전래와 직접관계가 있다.
>
>고려말 좌의정을 지낸 행촌杏村 이암선생은
>
>1313년(충선왕5) 문과에 급제하고
>충선왕이 그를 아껴 부인符印을 맡겨 비성교감秘省敎勘에 임명했다.
>그 후 좌정승을 마지막으로 관직에 물러난 인물로 단군세기의 저자이다.
>
>태백일사를 찬한 이맥李陌선생은
>
>행촌선생의 고손高孫으로
>1474년(연산군4)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성품이 강직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다.
>중종반정때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성균관사예와 사헌부장령을 겸하고 동지돈영부사에 이르른 인물이다.
>
>행촌선생과 이맥선생은 모두 고성固城이 본관이다.
>
>여기에서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의 전래와 직접 연관이 있는 또 다른 고성 이씨인 구한말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이기李沂선생을 소개할 차례이다.
>
>이기李沂선생을 소개함에는 실로 많은 지면이 필요하나 중요한 내용만 간단히 요약하면
>
>을사5조약이 체결된 후 후일 대종교를 창건하였을 뿐 아니라
>혁혁한 독립운동가인 나인영(나철)선생과 오기호, 윤주찬, 김인식 등과 함께 을사오적을 주살할 것을 결의하고
>
>자신회自新會을 조직하여 권중현權重顯을 총살하였으나 실패하고,
>박제순朴齊純등에 대해서도 살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던 혁혁한 애국독립투사이며 자주를 주장한 유명한 학자이다.
>
>합방을 예견하고 비분을 참지못하고 단식끝에 운명을 맞았다한다.
>이기선생은 단학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을 지냈다.
>
>한단고기를 전한 계연수桂延壽선생은
>
>이기李沂선생이 한단고기를 직접 감수監修했다고 밝히고 있음으로
>스스로 고려말부터 구한말에 이르는 배달Baedal 사상을 잇는
>중요한 갈래의 한부분을 담당했음을 한단고기에서 밝히고 있다.
>
>계연수桂延壽 선생이 묘향산 단군암에서 한단고기를 쓰는 비용을 역시
>혁혁한 독립운동가인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선생이 대어주었음을
>한단고기는 밝히고 있다.
>
>계연수선생은
>
>이기선생의 단학회를 이어받아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인 천마대, 서로군정서, 의민사, 벽파대, 기원독립단 등의 무장독립운동에 대하여 정신적, 사상적 계몽협조를 했다.
>
>1920년 계연수 선생은 일본인 스파이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
>그 다음 단학회의 한단고기의 전래는
>천마대天摩隊대장 최시흥崔始興선생에게 이어졌고
>다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이덕수李德秀 선생에 이어졌으나
>이덕수 선생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침체되었다.
>
>해방후 일제에 의해 수감되었던 이용담선생이 출옥하면서 평양에서 그 맥을 이었으나
>기관지 태극에서 신탁통치반대론을 주장함으로서
>태극의 주간 이유립선생이 구속되면서 단학회의 활동은 다시 중단된다.
>
>그 후 이유립선생이 월남에 성공함으로서
>단단학회를 세워 계연수 선생의 한단고기는 다시 세상에 전해질 계기가 생겨났다.
>작고하신 이유립선생은 1979년 한단고기를 세상에 펴낸다.
>
>그러나 1982년 이 이유립선생의 한단고기가 한글로 번역이 되기도 전에
>천만뜻밖에도 일본의 가지마가 일본어로 번역하여 발행을 해서 세상에 펴내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
>구한말과 일제시대라는 배달Baedal 민족 최대의 암흑기에도
>위대한 인물들이 마치 릴레이를 하듯 서로 이어받고
>그 가난했던 시기에도 자금을 대고해서 전해진 한단고기가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소위 단군이래 가장 잘 살게되었다는 1980년대초에 어이없게도 일어로 먼저 번역된 것이다.
>
>자손만대를 위한 소중한 민족적 지적재산이 국내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일본에서 먼저 출판되는 수모를 우리 모두는 당한 것이다.
>
>그 시대의 우리는 진정 중요한 일을 하는 인물들이 단돈 몇푼의 출판자금이 없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
>1970년대와 1980년대초를 살았던 한국인중 한사람으로
>당시에 한단고기의 존재를 몰랐다해도 한없는 부끄러움을 가지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이 한단고기에는 천부경, 삼일신고가 원문 그대로 전해지며
>또한 366사는 참전계경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이유립선생에 의해 전해진다.
>
>한편
>이 한단고기는 제대로된 증거조차 제시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위서로 매도되기도 한다.
>
>그러나 이 책이 위서라는 보편타당성을 갖춘 주장을 아직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
>그리고 만일 제 2의 일본인 가지마가 출현하여
>한단고기등에서 전하는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참전계경)을 세계의 문화시장에 내놓고
>이를 일본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과거나 지금이나 일본인은 남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지식정보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정작 우리의 소중한 지적재산이 무언지도 모르는
>이 기막힌 현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 시대에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진다.
>
>
>< 2. 묘향산석벽본(妙香山石壁本) >
>
>천부경 81자에 대한 자료로 잘 알려진 묘향산석벽본은
>1917년(丁巳年 正月 初十日) 계연수선생이 묘향산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탑본하여
>당시 서울의 단군교 앞으로 서신을 보낸것으로 알려져있다.
>단군교부흥경략(1937년)에는 이 서신과 함께 천부경 81자가 전해지며 또한 삼일신고의 원문도 전한다.
>
>
>< 3. 최문창후 전집 >
>
>성균관대학교 소장의 최문창후전집의 고운선생사적孤雲先生事跡에는
>천부경 81자의 원문이 기록되어있다.
>다만 이 기록에는 한단고기 태백일사와 묘향산 석벽본의 천부경 81자와는 약간 다른 글자가 보인다.
>析을 碩, 衍을 演, 動을 同, 昻을 仰, 地를 中으로 하는 등의 것이다.
>
>이 두가지 출처의 내용은 음은 같지만 표기가 틀린것이 대부분이다.
>
>
>< 4. 삼일신고 >
>
>
>삼일신고는 발해의 석실본과 천보산 태소암본, 고경각의 신사기본의 세가지 이본異本이 전해진다.
>
>
>< 5. 366사(참전계경) >
>
>366사(참전계경)은 단군교팔리, 성경팔리상하, 단군예절교훈, 참전계경등이 전해진다.
>
>
>< 참고문헌 >
>
>-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 한국정신문화원
>- 한단고기 : 계연수저 임승국번역, 주해 1986년 정신세계사
>- 단군교부흥경략 : 정진홍 1937년 계신당
>- 삼일철학역해종경합편 : 대종교 출판사 1992년
>- 한민족뿌리사상 : 송호수저 1991년 기린원
>- 커발한문화사상사 : 이유립著 1976년 커발한 개천각
>
>-----------------------------------------------------------------------
>
>< 단군팔조교 >
>
>
>단군팔조교는 단군Tangun의 위대함을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 경전에서 전하려는 메세지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그것은『너희들도 단군이 되거라 !』는 말입니다.
>
>이 경전은 누구나 단군Tangun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간단한 문장에 압축하여 제시한 경전입니다.
>
>스스로가 자아를 말살하고 마치 어린아이나 원시인처럼 원하는 것을 갖게 해달라고 비는 일은 진정한 문명인이 취할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
>그러나 첨단적인 물질문명에서 이같이 유치하고 원시적인 정신상태의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
>단군팔조교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평등한 수평적 관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단군팔조교 뿐 아니라 모든 배달민족의 고유한 경전은 신과 인간의 관계가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
>이 개념이 곧 천손사상天孫思想입니다.
>우리민족 모두는 하나님의 자손이며 인류 모두가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
>배달경전에서 전하고져 하는 지식정보는
>『너희가 곧 단군이고 너희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위한 방법론이 십수권의 한민족 고유의 경전에 압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
>자아를 말살하는 대신 보호를 요청한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사소한 것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건 보호가 아니라 억압인 것입니다.
>억압받음으로서 외롭지 않다면 이미 문제가 없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자아없이 억압받는 사람들은 아무리 권력이 크든,
>아무리 재물이 많든 항상 권력과 재물등에 굶주려 있습니다.
>따라서 정작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줄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
>오히려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경멸함으로서 자신의 불행을 감추고 싶어합니다.
>기회가 닿으면 인정사정없이 불행한 사람을 짓밟음으로서
>자신이 불행하지 않음을 증명하려 하는 것은 주위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입니다.
>
>배달민족의 경전들은 자아의 중심이 하나님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신이나 구세주에게 어린아이나 원시인처럼 매달리는 상태를 극도로 경계합니다.
>
>대신 피와 땀과 눈물로 열심히 일을 하여 재세이화하고,
>그래서 쌓인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홍익인간을 함으로서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가 되라고 합니다.
>
>단군팔조교는
>단군왕검께서 단군조선을 세우시면서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의 진리를 압축하여 전하신 경전입니다.
>
>이 경전의 8개 조목중에서 3개의 조목이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경전이 우리민족과 완전한 한 덩어리임을 웅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
>이 경전은 우리민족이 단군조선이 출발할때의 정신세계가
>지금에 와서도 별반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 경전 한권만으로도 유불선을 비롯한 만교가 이미 우리의 정신세계에 포함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
>이 경전을 거듭해서 읽으면
>우리 민족의 모두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힘들때면 항상 잔잔하게 들려오던
>다정스러운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이며,
>무엇을 말해 오던 것인가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
>< 단군팔조교(檀君八條敎) >
>
>
>제 1 조
>
>하늘의 법法은 오직 하나요,
>그 문門이 둘이 아니다.
>너희는 오로지 순수한 정성이 하나 같아야 하며,
>이로써 너희 안(마음)에서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
>
>천범유일 불이궐문 이유순성일 이심내조천
>天範惟一 弗二厥門 爾惟純誠一 爾心乃朝天
>
>
>제 2 조
>
>하늘의 법은 언제나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스스로를 살펴서 마음을 바로하면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미치게 되는 것이다.
>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하늘의 법에 부합되게 할 수 있다면
>나아가 만방에 베풀어질 수 있는 것이다.
>
>천범항일 인심유동 추기병심 이급인심 인심유화 즉합천범 내용어우만방
>天範恒一 人心惟同 推己秉心 以及人心 人心惟和 亦合天範 乃用御于萬邦
>
>
>제 3 조
>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님으로부터 연유하였으며,
>부모님은 하늘에서 강림하셨도다.
>오로지 부모님을 바르게 모시는 것이 하느님을 바르게 모시는 것이며,
>이것이 나라에까지 미치니 충성과 효도이다.
>
>이 도道로써 부지런히 힘써 정도正道를 이룬다면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반드시 먼저 벗어 나리라.
>
>이생유친친강자천 유경이친내극경천 이급우방국시내충효
>爾生惟親親降自天 惟敬爾親乃克敬天 以及于邦國是乃忠孝
>
>이극체시도 천유붕 필선탈면
>爾剋體是道 天有崩 必先脫免
>
>
>제 4 조
>
>하늘을 나는 새와 땅을 다니는 짐승도 짝이 있고,
>다 떨어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들 사내와 계집은 서로 화합하여 원한하는 일이 없게 하고,
>질투함이 없게 하고, 음탕함도 없게 하라.
>
>금수유쌍 폐리유대 이남녀 이화 무원무투무음
>禽獸有雙 弊履有對 爾男女 以和 無怨無妬無淫
>
>
>제 5 조
>
>너희들은 열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손가락이 크던 작던 똑같이 아프지 아니한가 ?
>서로 사랑하되 헐뜯음이 없고, 서로 도와주되 서로 다툼이 없다면
>가정도 나라도 모두 부흥하리라.
>
>이작십지 통무대소 이상애 무서참 호우 무상잔 가국이흥
>爾嚼十指 痛無大小 爾相愛 無胥讒 互佑 無相殘 家國以興
>
>
>제 6 조
>
>너희는 소와 말을 보아라.
>그들도 서로 먹이를 나누어 먹지 아니한가 ?
>너희는 서로 양보하고, 서로 빼앗는 일 없이 함께 일하며,
>서로 훔치는 일이 없어야 가정과 나라가 충실하여 번성하게 되리라.
>
>이관우마 유분궐추 이호양 무서분 공작 무상도 국가이은
>爾觀牛馬 猶分厥芻 爾互讓 無胥奪 共作 無相盜 國家以殷
>
>
>제 7 조
>
>너희는 호랑이를 보아라.
>힘세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스스로 천박하게 되었도다.
>너희는 사납게 날뛰지 말 것이며, 사람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항상 하늘의 법에 따라 만물을 사랑하거라.
>
>너희는 남이 기울어질때 붇들어주되 모욕을 줌이 없도록 하여라.
>너희가 만일 이를 어긴다면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여
>네몸과 가정이 함께 망하게 되리라.
>
>이관우호 강포불령 내작얼 이무걸목이장성 무상인 항준천범극애물
>爾觀于虎 彊暴不靈 乃作孼 爾無桀鶩以 性 無傷人 恒遵天範克愛物
>
>이부경 무능약 제휼 무모비 이유월궐즉 영부득신우 신가이운
>爾扶傾 無陵弱 濟恤 無侮卑 爾有越厥則 永不得神佑 身家以殞
>
>
>제 8 조
>
>너희가 만일 논의 벼에 불을 질러 벼들의 씨가 멸하면
>신神과 인간이 함께 노여워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이를 숨기고져 아무리 두껍게 싼다해도 그 향기는 반드시 새어나올 것이다.
>
>너희는 항상 성품을 공경스럽게 지니되 간사함을 감추거나, 악함을 숨김이 없어야 하며,
>화를 일으킬 마음도 두지 말아서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들과 친근하게 지내면 너희는 이로서 복록이 무궁하리라.
>너희 오가五加와 64민은 이 뜻을 받들어 공경할지어다.
>
>이여유충화우화전 화가장진멸 신인이노 이수후포 궐향필누
>爾如有衝火于禾田 禾稼將殄滅 神人以怒 爾雖厚包 厥香必漏
>
>이경지이성 무회특 무은악 무장화심 극경우천 친우민
>爾敬持彛性 無懷慝 無隱惡 無藏禍心 克敬于天 親于民
>
>이내복록무궁 이오가중기흠재
>爾乃福祿無窮 爾五加衆其欽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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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이트 : http://www.tangun.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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