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 동백 숲, 다산초당
천년고찰 백련사는 천연기념물 151호인 동백숲으로 유명합니다.
신라 말에 창건되어 고려후기에 여덟 명의 국사를 배출한 백련사.
예쁜 대웅보전과 만경루의 자연에 순하는 건축미가 돋보입니다.
만덕산 아래 경내에서 보면 탐진강에서 흘러드는 바다(도암만)가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명부전에 사천왕상이 보이고 그 옆으로 지장전
백련사 부도 밭 주변의 동백 숲이 장관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되어있을 만큼 명성이 자자한 동백은 수령이 백년이 넘었다고 하네요.
절 왼쪽이 동백림 탐승지.
동백 숲 바다가 보이는 곳 스님 한 분이 내려간다
만경루 아래 白蓮茶園을 나와 왼쪽으로 나아가면 돌계단 아래 다산초당 가는 길의 이정표로 연결됩니다.
동백꽃이 선명한 돌담 아래서 범종각을 바라본다
그 이정표를 따라 조그만 둔덕을 올라가면 아름드리 노거수들이 숲 터널을 이룬 군락지로 만납니다. 바로 왼쪽은 절에서 돌보고 있는 차밭이 펼쳐집니다.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숲으로 백련사 아래는 온통 동백으로 푸른빛과 붉은 꽃으로 황홀합니다.
세월을 말하는 노거수
다산초당 가는 길은 동백림과 차밭 사이 오솔길로 열려있습니다. 다산초당까지 800m 거리. 지금은 통나무로 산길을 정비해 놓았습니다.
야생 차밭(茶田)과 동백숲
이 오솔길이 그 유명한 茶山의 思索코스입니다. 백련사 300m 지점, 깃대봉(408.6m) 등산로 팻말(만덕산 오름 길 이정표)을 지나고 내려서면 먼저 만나는 것이 천일각.
천알각
그 아래 동암. 정약용의 친필 '다산동암(茶山東菴)', 추사 선생의 글씨를 모각한 '보정산방(寶丁山房)' 현판이 걸려 있는 동암을 지나면 연못 주위로 동백이 피었습니다.
산방 동암
동암을 지나면 연못을 운치있게 꾸민 정원이 나온다.
다산이 바위에 새긴 글씨 丁石이란 글씨를 보며 草堂에 이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16년 유배생활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곳이 다산초당입니다.
다산초당 아래 삼거리에서 유물전시관 가는 길이 있다
선생의 체취를 느끼며 내려서면 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다산유물전시관으로 향합니다.
다산유물전시관
전시관은 초당에서 내려와 만나는 아스팔트길 삼거리에서 오른쪽 언덕 너머로 이어진다. 초당에서 700m 거리.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세월을 뛰어넘어 민족의 자랑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초당에서 전시관까지 10분소요. 전시관 앞에는 대형주차장이 마련되어있고 근처에는 슈퍼도 있고(막걸리) 전통찻집 들꽃이야기, 청임공방(432-9080)에서는 주인 청암 김성(45세)의 서각 작품과 직접 재배한 녹차(5천원)를 대접받는다.
다산유물전시관(061-430-3223)은 1999년에 개관하여 다산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입장료 무료.
만덕슈퍼(061-432-1816), 만덕상회(432-0459), 다산슈퍼(432-0098)민박. 다산초당 입구 다신계문화원과 다산촌먹거리에서도 민박이 가능하며 5,000원 가격대의 녹차수제비, 녹차냉면, 녹차콩국수 등의 저렴한 별미가 있다.
다산 정약용
1762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에서 이 땅에 천재 한 사람이 태어난다, (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 영조38년)
그의 아버지는 정재원(丁載遠),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
정약용(丁若鏞) 자는 송보, 호는 다산(茶山).
다산은 헐벗고 굶주린 이 땅의 백성들과 나라를 사랑했던 사람.
실학의 완성이라고 말하지만 다산은 철학, 지리, 역사, 법률, 정치, 문학, 군사 등 광범한 영역에 걸쳐 5백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을 썼는데 그의 재능과 노력은 참으로 놀랍다.
14세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15세에 승지를 지낸 홍화보(洪和輔)의 딸과 결혼하였다.
22살 때 과거에 합격하여 규장각에 들어가 학문을 넓히고 과학적으로도 영재였던 그는 한강에 배다리(주교)를 가설한 사람이다. 임금 정조는 그를 무척이나 신임하여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1794년에는 경기도 암행어사를 제수하기도 했다.
화성축조공사를 시행하면서 거중기와 녹로를 발명하여 어려운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다음 해 동부승지까지 벼슬이 올랐지만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 사건이 발생하자 공서파의 모함을 받게 되고, 정6품의 외직 문관 벼슬로 좌천당하기도 했다.
다시 임금의 사랑으로 승지참의(承旨參議), 충청도 홍주의 금정찰방(金井察訪), 곡산(谷山) 부사로 제직하였다. 39세에 그는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었으나 1801년 신유사옥(辛酉史獄)(신유교란)으로 귀양살이를 가게 된다.
그때 정약용은 한 천주교도가 형인 정약종에게 보낸 편지에 '자네의 아우가 알지 못하게' 라는 문구로 인해 죽음을 모면하게 되지만 결국 유배 길에 오른다.
유배기간 동안 草堂으로 移住 후 귀양이 풀릴 때까지 修己의 학문으로서 六經과 四書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완성하고 유학을 철저히 고증하였다. 治人의 목적으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저술하였다.
1818년 이태순의 간곡한 진정으로 유배가 풀리게 된 다산 정약용은 고향인 마재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학문적 수양과 저술에 전념하며 세계정세와 서구 과학에 관한 서적들을 구해 연구하였고 저술을 남겼다. 다산은 1836(현종2) 2월22일 75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감한다.
1910년 정부는 정약용에게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을 증직하고 시호를 내렸다.
정약용은 "통치자는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다"라고 민권을 주장하였고, 토지의 불균등한 소유, 대지주들에게 토지 집중되는 현상을 비판하여 토지의 공동소유, 공동경작, 균등 분배를 통한 경제적 평등 유교적 이상국가론 실현 주장하기도 한다.
다산은 5백여 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기는데,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일명丁茶山全書) 속에
2천여 편의 시가(詩歌)가 들어있고, 정치 경제에 대한 개혁 구상을 담은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를 비롯하여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목민심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밝히고 있다. (백성을 잘 다스리는 자는 자애롭고 절약해야 한다. 절약함을 목민관의 가장 큰 의무라 함.)
<경세유표>는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담은 책이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쓴 편지에는 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기를 당부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정약용의 가계(家系)
아버지는 남인 당파로 일찍이 출사하여 지방 수령을 역임하였다. 어머니는 해남 윤씨(尹氏) 명문대가이며, 명사인 윤선도(尹善道)의 손녀. 그의 학문도 외가(外家)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아버지 정재원(丁載遠)-해남윤씨
첫째 아들 정약현 : 첫째 부인 의령 남씨 소생
정약현의 처남인 이박은 천주교의 전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청나라에
군사개입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려 함(황사영 백서 사건)
둘째 아들 정약전 : 둘째 부인 해남 윤씨 소생, 신유사옥으로 귀양 간 후 흑산도에서 사망
셋째 아들 정약종 : 신유사옥 때 아들 정철상과 함께 순교
정약종의 둘째 아들인 정하상은 '기해박해' 때 순교, <김대건>을 마카오로 유학 보냄
딸 - 이승훈에게 시집감. 정약용의 매부인 이승훈은 조선 최초의 영세자로,
일가인 이가환은 성호사설을 쓴 <이익>이 증조부다.
넷째 아들 정약용
나주 정씨는 본래 전라도 나주에 소속된 신안 압해도에 살았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빼앗겼던 비운의 섬으로 지금은 행정구역이 신안군 압해면이다.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玉堂 홍문관)에 들었으나 당쟁의 소용돌이에 남인이므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아버지 정재원이 정조(正祖)의 즉위로 남인계에 벼슬길이 트여 진주목사까지 역임했다.
어머니 해남 윤씨는 윤덕렬의 딸로 우리 국문학상 대표적 시조시인으로 일컬어지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6세 손녀이자 詩, 書에 두루 능했던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이다.
다산의 어머니는 불행하게도 다산의 나이 9살 때인 1770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했다.
윤선도의 고조 윤효정은 강진군 도암면 덕정리 출신.
다산의 외사촌형인 윤지충(尹持忠 어머니의 조카)은 당시 전라도 진산군(현재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 權氏가 죽자 천주교 교리에 따라 神主를 불사르고 천주교식 제례를 지냈다가 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으로 처형당한다. 이것이 '진산사건' 혹은 '신해사옥'이다.
외가의 도움 중에서 무엇보다 큰 것은 천여 권의 장서와 함께 다산초당을 내어주며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