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의 촛불/ 박목월
오늘 밤 지구를 에워 싸고/박목월
작은 베들레헴에 불이 켜진다/ 박목월
흰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박화목
서울 크리스마스/ 김광섭
성탄제(聖誕祭)/ 김종길
성탄제(聖誕祭) 1955/ 김종길
성탄제/ 김동현
아침의 예언(豫言)/ 오탁번
어린 천사들/ 송용구
겨울 그리스도 / 김남조
세상에 임하신 하늘의 떡/ 송광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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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의 촛불
박목월
촛불을 켠다.
눈을 실어나르는 구름
위에서는 별자리가
서서히 옮아가는
오늘 밤
크리스마스 이브에
눈이 내리는 지상에서는
구석마다 촛불이 켜진다.
믿음으로써만
화목할 수 있는 지상에서
오늘 밤 켜지는 촛불
어느 곳에서 켜들
오든 불빛은
그곳으로 향하는
오늘 밤
작은 베들레헴에서
지구 반바퀴의 이편 거리
한국에는 한국의 눈이 내리는 오늘 밤
촛불로 밝혀지는
환한 장지문
촛불을 켠다.
오늘 밤 지구를 에워 싸고
박목월
촛불이 켜진다.
오늘 밤 둥근
지구를 에워싸고
켜지는
촛불의 숲.
당신을
만난다. 만나려는
인류의 영원이
촛불로 밝혀진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손의 증거.
주의 부활로
죄 사함을 받은,
속죄의 길이 열린
하늘의 은총.
어느 곳에는
눈이 온다.
어느 곳에서는
바람이 분다.
눈이 오건 바람이 불건
한 덩이의
지구를 에워싸고
촛불이 켜진다.
경건한
손으로 밝히는
불꽃에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눈동자가
당신의 구원의 손이
흰 이마가
지금
우리를 지켜본다.
아멘.
하늘의 영광, 지상의 평화.
작은 베들레헴에 불이 켜진다
박목월
높은 곳에서
눈은 내리고 있다.
가늘고 순결한 것으로
세상은 충만하다.
이 은혜로운 눈발 속에서
촛불이 켜진다.
지구의 구석 구석마다
전나무가지에
인류의 심령 속에
불빛은
할렐루야를 외친다.
참으로 오늘 밤
가난한 자는 가난한대로
작은 촛불을 밝히고
족한 자는 족한대로
굵은 촛대에 불을 물리치고
할렐루야를 부른다.
당신이 대속해 주심으로
하늘나라의 문은 열리고
우리들은
마지막을 부를 수 있는
이름을 가졌다.
주여
주여
주여
눈발 속에서
천사의 합창이 울리고
따끝까지
평화가 깃든다.
누구나
가난한 마음으로
누구나
조용한 마음으로
누구나
평화로운 마음으로
저마다의 심령에 불을 밝힌다.
높은 곳에서
눈은 내리고
가늘고 순결한 것으로
세상은 충만하다.
지구의 구석구석마다
촛불이 켜지고
따끝까지
평화가 깃드는
천상의 영광, 지상의 평화
구름 위에서는
별이 빛나고
작은 베들레헴에
불이 켜진다.
흰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박화목
흰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내가 어렸을 그 옛날같이.
초롱불 밝히며 눈길을 걷던
그 발자욱 소리, 지금 들려온다.
오, 그립고나, 그 옛날에 즐거웠던,
흰 눈을 맞아가면서
목소리를 돋우어 부르던 캐롤
고운 털실 장갑을 통하여, 서로
나누던 따사한 체온.
옛날의
흰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그대 내 마음의 창가에 서서, 보문출판사, 1960>
서울 크리스마스
김광섭
무엇인가 다가오고 있다
고요가 흔들리며
바람이 불어
풍조(風潮)가 인다
먹구름이 초생달 빛에 찢기며
한 조각 푸른 하늘이
면류관을 쓴
예수의 얼굴로 번진다
서울 길
인파(人波)에 밀려
예수는 전신주 꼭대기에 섰고
성탄의 환락에 취한 무리들
붐비고 안고 돈다
번화가의 전등은 장사치들의
속임과 탐욕이 내놓이지 않도록
경축의 광선을
조심스레 상품 거죽에 던진다
모든 나무들은 벌거벗었는데
성탄수만은 솜으로
눈 오는 밤을 가장했다
예수는 군중 속에서 발등을 밟히다 못해
그만 어둠을 남겨 두고
새벽 창조의 시간을 향해
서울을 떠났다
가로수들만이 예수를 따라갔다
어디선가 맨발로 뛰라는 소리가 났다
그날 밤 서울서는
한 방화범(放火犯)이 탈주했다
성탄야의 종소리가 잉잉 울었다
서울은
테두리만 퍼져 나가는
속이 텡 빈 종소리였다
산등성이에서 빈대처럼 기는
오막살이 지붕들만이 모여서
이마를 맞대고 예배를 올렸다
이튿날 아침 서울 거리에는
예수의 헌 짚세기
한 켤레가 굴러다니는 것을
맨발로 가던 거지가 끄을고
세계의 새 아침으로 갔다
<성북동 비둘기, 범우사, 1969>
성탄제(聖誕祭)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都市)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성탄제, 삼애사, 1969>
성탄제(聖誕祭) 1955
김종길
가슴에 눈물이 말랐듯이
눈도 오지 않는 하늘
저무는 거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동(東)녘 하늘에 그 별을 찾아본다.
베드레헴은 먼 고장
이미 숱한 이날이 거듭했건만
이제 나직이 귓가에 들리는 것은
지친 낙타(駱駝)의 울음 소린가?
황금(黃金)과 유향(乳香)과 몰약(沒藥)이
빈 손가방 속에 들었을 리 없어도
어디메 또 다시 그런 탄생(誕生)이 있어
추운 먼 길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
나의 마리아는
때묻은 무명옷을 걸치고 있어도 좋다.
<성탄제, 삼애사, 1969>
성탄제*
김동현
동방박사는 옛 얘기
서녘의 별도 옛 얘기
우리는 헤롯도 아니건만
서녘의 별은 찾아도 없다
어두운 하늘 아래
얼어버린 마음뿐
너는 홀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가난한 순수를 찾아 나섰니?
눈으로도 덮을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외로운 눈물 뿌리며
때묻은 무명옷의 마리아를
찾아 나섰니?
―잠처럼 슬픔을 덮어 줄
눈도 내리지 않거니
오늘 밤
너를 떠나보낸 나의 빈 마음엔
작은 꽃송이가
등불을 밝혀 들고
때묻은 무명옷의 마리아를 찾아
헤매이누나
* 한 소녀가 성탄절이 가까와질 무렵 시골에 있는 자기 아버지 묘소로 성묘가서 나에게 시인 김종길의 <성탄제>를 써 보내다. 이에 화답하다.
<새, 청하, 1984>
아침의 예언(豫言)
오탁번
추운 겨울 산(山)과 들 사이로
따듯한 강(江)이 숨어 흐르듯
추울수록 강(江)은 따듯해지고
모든 가까이 있는
사물(事物)이 눈물겹고 고맙듯
서러운 몸에서
뜨거운 사랑이 태어나고
온 오물(汚物)속에서 이름모를
풀씨는 싹튼다.
말구유에서 나신 그대는
별이 내리고
뜻있는 자(者)가 경배할 때
아침과 저녁, 암흑과 광명을
분별할 시간도 장소도
없는 전지(全知)의 하늘.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힘든 대낮에
그대여, 우리도 2천년전 아침처럼
그 빛깔의 하늘 아래 있게 하라.
서러운 몸과 마음을
분별할 시간도 장소도
없는 하늘과 땅에서,
이름모를 풀씨는 싹튼다.
어두워도 한 닷새 어두우면 좋지
열두달 어둡지는 말아야 되는 법,
언덕에 부는 제천(堤川)의 바람이여
숲은 잎을 떨구었지만
그 안에 바람의 속도를 잠재운다.
열매의 양분을 아낀다.
바람은 중앙선에서 고속도로에서
시속을 자랑하며 살아가지만
글 아는 사람들은
스토브 위에 무위를 끓인다.
한 두컵 마시며
목이 떨어지는 전봉준(全琫準)의 사랑을
노래하며 춤추며 부끄럽다.
일주일 전에 땅에 오신 그대는
산(山)과 들 사이로
따듯한 강(江)을 주시고
강물을 뿌리며 죄를 씻으셨지만
별을 따라 주인을 찾아 가는
현자(賢者)의 야행(夜行)처럼
부활의 시대는 어둡고 길다
어둡고 길다.
손바닥에 박히는 형벌의 아픔이
진실로 구원의 기쁨이기를
땅의 평화이기를.
제천(堤川)의 바람이여
서러운 몸과 마음이여
추운 들 사이로 흐르는
따듯한 예언(豫言)을
이 새 아침에 이해하리라.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
어린 천사들
송용구
햇빛보다 더 밝은
우리들의 얼굴은
아기 예수 태어나던
12월의 하얀 밤을 닮았어요
말구유를 굽어보며
가만가만 속삭이는 별님도
우리들의 입술보다
더 맑을 수는 없었지요
우리들의 옷이 작아져서
입을 수 없는 날이 온다 해도,
작은 어깨에서
천사의 날개
새록새록 돋아 나와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영혼을
옷처럼 감싸 줄 거예요
우리들의 예쁜 웃음은
아기 예수의
까만 머리카락을 적셔주는
12월의 눈꽃이 되었어요
우리들의 맑은 노래는
엄마 아빠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하늘의 별빛이 되었어요
겨울 그리스도
김남조
오늘은
눈 덮인 산야(山野)를 거닐으시네
눈같이 흰 옷 입으시고
눈보다 더욱 흰
맨발이시네
그 옛날
물 위를 걸으시던
강줄기도 얼어
광막한
수정의 빙판
바늘 꽂히는
한기(寒氣)의
그 위를 거닐으시네
희디 흰
맨발이시네
울고 싶어라
머리칼도 곤두서는
율연한 추위에
뭍과 바다의
모든 깊은 곳으로부터
보혈(寶血)을 섞어 빚은
새봄의 혈액을
한없이 한없이
자아 올리시는
설일(雪日)의 주님
<빛과 고요, 서문당, 1982>
세상에 임하신 하늘의 떡
송광택
은하계 한편
태양계가 있고
그중 하나가 푸른 행성 지구
가없는 우주라지만
님의 마음이 머무는 작은 땅
약속의 땅에 임하는
거룩한 은총
오직 한 가정
성가(聖家)를 이룬 요셉과 마리아의 울타리
그 품에 아기 예수를 맡기시니
신비하여라
성령의 바람
그 입김으로 일어난 일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나았네
이름도 아름다워라
임마누엘
알 수 없도다
그 큰 비밀
어찌 천지의 주재께서
이 땅에 찾아오시어
피와 살
눈물과 땀
슬픔과 고민
무거운 짐 진자들의
행로에 동참하시는가
이 어찌 크고 큰 비밀이 아닌가
모두 다 나와
맞이하세
만왕의 왕이 베들레헴에 나셨다네
세상에 임하신 하늘의 떡
우리 가운데 임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