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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밀한 삶"을 강의하면서 유겐텔러의 "보그" 잡지 사진을 소개한 적이 있다. 물론 일부 패션잡지에서 헤로인 치크 같은 모델을 세우고 있지만, 패션은 시대정신이다는 패션 예술사진을 소개하면서 리챠드 아베돈 을 말하지 않고는 지날 수 없다. 그의 치열한 경쟁자 어빙펜 도 마찬가지다. 아래의 긴 글 아베돈을 소개하는 글이다.
1995년 12월 13일 네바다 토노파. 아베돈은 시계를 본다. 4시간은 족히 달렸을 시간이다. 그러나 여전히 보이는 건 사막. 르노에서 라스 베이가스까지는 600km. 시에라 산맥 너머로 해가 떨어진지 오래건만 여전히 사막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경비행기를 권한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고, 라스 베이가스가 그리 먼길이 아니고 겨울이기 때문에 데스 밸리를 관통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고집 부린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왜 왔을까? 하릴없이 왜 라스 베이가스를 생각했을까?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이 길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 바로 이 길에서 자신의 대표작 [미국의 서부In The West]가 처음 결행되었고, 또한 1945년 바로 이 길 끝에 있는 라스 베이가스 MGM 그랜드에서 50년 사진 인생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
토노파를 쉬지 않고 지나갔다. 95번 국도는 르노에서 라스 베이가스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마침내 바그다드 카페가 있는 아마고사 밸리에 이르자 더 이상 운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이 피곤했다. 아마고사. 1980년 12월 13일 이곳에 머물렀지. 라스 베이가스까지는 90km. 그날 무리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이곳 아마고사에서 머물렀던 생각이 났다. 밤새 사막의 초롱초롱한 겨울별을 보면서 추위에 떨었던 기억도 났다. 다음날 라스 베이가스로 들어가 카지노에서 일하는 레오나르드 레이를 찍었지. 5km를 더 올라가 클로라이드 93번 국도에서 떠돌이 앨런 실비를 찍었고, 15일에는 모파 읍내를 잠깐 거치면서 쇼핑몰 주차장에서 가정부부 엘마 리를 찍고 그리고는 곧장 유타주로 건너갔던 기억이 났다. 아마고사의 밤은 그때나 지금이나 추웠다. 난방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밤.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독한 위스키 4잔을 들이키며 사막의 밤을 보내야 하는 심정. 춥고 깊은 어둠 속에서 그날 서부 사람을 처음 찍겠다는 마음을 굳히던 때를 생각했다.
사막의 찬 공기를 들이키며 373번 지방도로를 탔다. 새벽 5시. 데스 밸리를 관통하기 위해서는 373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아마고사 모래언덕에서 160번 지방도로를 바꿔 타야 했다. 데스 밸리 초입에 동이 텄다. 흰모래 언덕이 붉은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데스 벨리(Death Valley). 앤셀 애덤스, 에드워드 웨스톤, 서부 연안의 시에라 클럽 사진가들의 사진 무대. 여전히 신비스러웠다. 이 길을 통하여 그 옛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엘도라도를 향하다가 이 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었는가! 아베돈은 볼륨을 높였다. 그리고 내달렸다. 멀리 블루 다이아몬드 읍내가 좌측으로 보였다. 1849년 엘로라도를 향하다가 데스 벨리에 사람을 묻고 돌아온 사람들이 눈물을 뿌렸던 곳, 가족들이 이제나저제나 눈물로 기다렸던 슬픔의 고장이 블루 다이아몬드이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다가 16살 케이시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오전 10시. 라스 베이가스에 들어서자 맥카란 국제공항을 우측으로 MGM 그랜드가 나타났다. MGM 그랜드. 여기에 온 건 순전히 MGM 그랜드와 그리운 세월 때문이다. 장례식에 왔다가 이렇게 먼길을 달려온 이유이다. 50년 전. 그러니까 1945년 이곳에 [Harper's Bazaar]의 아트 디랙터 알렉세이 브로도비치와 왔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뉴욕이지만 그의 눈에 든 건 이곳이다. 그의 덕분으로 사진가로서 평생 순탄한 삶, 화려한 생활을 했었고, 그의 후원으로 최고의 사진가로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인생 50년에 대한 후회는 어디서,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일까. MGM 그랜드 앞에서 그 옛날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우리 시대 최고의 패션사진가, 세계적인 광고사진가 리차드 아베돈이 네바다 르노의 한 친구의 장례식에 왔다가 데스 벨리를 관통, 라스 베이가스 MGM 그랜드에 도착한 과정을 극화한 것이다. 리차드 아베돈(Richard Avedon, 1923). 그에 대해서는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전후 세계 패션사진계와 광고사진계를 평정한 사람이다. 그가 있기에 [하퍼즈 바자]가 있었고, [보그]가 있었다고 할만큼 패션 및 광고사진계의 전설이자 신화 그 자체이다. 평생 어빙 펜과 경쟁하면서 그와 더불어 패션과 광고를 예술의 영역까지 이끌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그림자가 깊다고 했던가. 아베돈의 성공신화에는 언제나 차가운 시선이 따라다녔다. 정상에 있을 때는 차가운 시선과 질시를 화려함으로 잠재울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고 정상에서 밀려날수록 화려함만큼이나 깊은 후회와 아쉬움이 그를 번민으로 빠트렸다.
아베돈. 1923년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난 영원한 뉴요커이다. 다이안 아버스처럼 유태계 가문이었고, 뉴욕 5번가에 백화점을 가진 부호의 아들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귀공자 타입의 잘생긴 외모, 세련된 매너, 특히 여성의 마음을 꿰뚫는 감식안과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행동으로 일찍부터 여성취향적이고 여성들로부터 호감을 사는 청년이었다. 1943년 처음으로 여동생 루이지를 모델로 당대 최고의 패션사진가들의 특징들을 실험할 정도로 패션사진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운명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아베돈은 당대 최고의 잡지 [하퍼즈 바자]의 아트 디랙터 알렉세이 브로도비치가 강의하는 뉴욕 스쿨에 입학, 거기서 그에게 눈도장을 찍는 행운을 잡는다. 취재 차 라스 베이가스 MGM 그랜드에 가는 알렉스 옆에 조수로서 앉게 됨으로써 이미 운명은 결정되었다. MGM 그랜드에서 아베돈은 알렉스에게 처음으로 1943년 7월에 찍은 <버몬트 벤슨과 나탄 애버릭>의 포트레이트를 보여주었고, 그날 당장 [주니어 바자Junior Bazaar]를 위한 사진 제작을 요청받는다.
아베돈의 잡지사진 50년. 아베돈은 평생 잡지를 떠나 살 수 없는 운명을 가졌다. 1945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히 반세기를 잡지사진에 매진한 사진가이다. 그에게는 알렉세이 브로도비치와,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아트 디랙터 [보그]의 마빈 이스라엘이 있었다. 알렉스와 마빈은 아베돈을 우리 시대 최고의 패션 및 광고사진가로 만들었다. 두 사람이 아베돈에게 베풀었던 지원과 후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잡지사진가로서 아베돈의 출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저널리즘의 시기였던 만큼 늘 두 가지 모습에 익숙해지거나 충돌해야 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여물지 못했던 터라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다큐맨터리 사진과 휴먼 포트레이트가 요구된 시대였다. 1949년 [LIFE]가 아베돈에게 첫 사진 취재를 제의해 왔던 것도 그런 류였다. 25,000 달러라는 엄청난 취재비를 받아 6개월 동안 할렘, 샌트럴 파크를 찍었지만 결국 취재비를 돌려주고 사진을 되찾아와야 했던 것도 두 가지 모습에 대한 성격상의 부조화 때문이었다.
60년대까지는 포토저널리즘의 황금기, 매거진 전성시대였기 때문에 포토저널리즘적 시각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암살사건이 발생하자 그가 타임 스퀘어로 달려갔던 것도, 그리고 "대통령 총격으로 사망"이라는 신문을 들고 있는 사람을 찍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저널리즘보다 패션 및 광고사진쪽이 훨씬 적성에 맞고, 훨씬 더 잘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마침내 1966년 [보그]로 옮겨 패션사진에 전념할 꿈을 키운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정치적 이슈 때문에 1971-72년 전쟁중인 베트남을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반전데모에 합류,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벌어진 반전 데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짧은 옥살이를 한다. 이때의 충격과 정치에 대한 환멸이 평생 정치적 사건과 사회적 이슈와 담을 쌓는 계기가 된다.
70-80년대. 이 시기는 패션과 광고의 시대였다. 세계가 아베돈을 기다린 황금의 시기였다. 아베돈은 어빙 펜을 제치고, 패션 및 광고사진의 정상에 오른다. 그를 통하지 않는,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패션과 광고사진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잡지의 유행이 아베돈의 사진 스타일'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그 시대 잡지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이야기이다. 40-60년대는 패션과 휴먼 포트레이트의 전성기, 70-80년대는 패션 및 광고사진의 전성기, 90년대는 예술사진의 전성기였다고 했을 때 이 모든 것을 움켜지고 방향을 이끌었던 장본인이 아베돈이다.
거칠 것이 없었던 아베돈에게 유일하게 신경을 쓰게 한 사진가가 어빙 펜이다. 모든 면에서 어빙 펜을 능가했지만 오직 한 분야에서 그의 인기를, 그의 능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예술사진 분야였다. 예술사진이라면 그에게도 뒤지지 않는 경력이 있었다. 1962년 워싱톤 스미소니언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3년에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1974년에는 뉴욕근대미술관(MoMA)에서 개인전, 그리고 다음 해인 1975년에는 뉴욕 말보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부족하다는 자책감이 그에게 있었다. 1974년 MoMA 전시는 자신의 아버지 제이콥 이스라엘 아베돈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평가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예술사진. 그는 예술사진에서도 어빙 펜을 능가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사진인생의 마지막 승부는 예술사진으로 보았다. 그래서 카메라도 8X10 대형 디어도르프로 바꾸고, 바쁜 스케쥴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예술사진을 위한 포트레이트 준비를 시작했다.
1976년 6월 15일. 정유회사의 광고사진을 위해 텍사스를 갔다가 서부사람 지미 로페즈를 찍었다. 외부 주문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찍은 보통 사람의 포트레이트로서 첫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마침내 1980년 12월 라스 베이가스로 향하는 길에서 구체화된다. 서부를 찍자. 서부사람을 찍자. 서부는 아직도 동부 사람에게 꿈의 땅이 아니던가.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꺼지지 않는 서부 이미지, 서부사람들의 삶을 모습을 보여주자. 아베돈은 명료한 그림을 그린다. 촬영방법은 지금까지 실험해 온 8X10 디어도르프 카메라를 사용하고, 자연광 속에서 화이트배경막(백드롭) 앞에 인물을 세워 그 옛날 아우구스트 잔더의 스타일로 표현하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어떤 미술관이 스폰서가 되고, 자신의 사진을 전시해 줄 것인가 일 뿐.
아베돈의 원대한 꿈을 키워줄 미술관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텍사스주 포트워스의 아몬 카터 미술관이 스폰서가 되겠다고 나타난다. 소외된 서부사람을 대상으로, 때묻지 않은 서부를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스폰서가 되어 향후 5년 동안 조수들의 경비를 포함, 일체의 제작비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미술관이 원하는 것은 전시된 사진 124점. 너무도 좋은 조건에 아베돈은 흔쾌히 승낙, 그로부터 5년동안 틈틈히 서부를 찾아 콜로라도, 와이오밍, 뉴멕시코, 텍사스, 몬타나, 유타, 켈리포니아, 아이다호 등 서부 전역을 대상으로 인물촬영에 들어간다. 5년에 걸쳐 찍은 서부 사람들. 원판 필름으로 총 17,000장이었다. 이 사진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 그중 124점이 1985년 9월 14일부터 11월 17일까지 아몬 카터 미술관에서 선을 보인다.
[미국의 서부In The West]. 전시는 엄청난 반응을 몰고 왔다. 아베돈의 명성에 힘입어 미술관 사상 5만 여명의 관중이 전시장을 다녀간다. 실물 크기의 사진. 거기에서 품어 나오는 8X10 대형 카메라의 디테일. 사람들의 시선을 압도하기 충분했다. 전시는 아베돈의 치밀한 능력과, 그의 명성에 호응하는 저널의 도움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전시가 끝나자 다음 전시장인 보스톤 현대미술관(ICA)으로 향한다. 보스톤에서의 전시 역시 성공이었다. 필레느 백화점이 스폰서로 참여하여 광고홍보비용으로 10만 달러를 썼다. "서부를 느껴라"를 광고카피로 삼아 대내적인 이벤트가 개최되었으며, 보스톤 현대미술관을 위한 기금마련 행사로서 입장료 40-350 달러를 내는 캑투스 볼이 열리기도 했다.
보스톤 전시는 그러나 상당한 비평에 직면한다. '착취인가? 예술인가?, 휴먼 다큐멘터리인가? 패션 다큐멘터리인가?, 서부사람이 동부사람의 예술을 위한 보조도구인가?, 서부사람이 지배계급의 예술적 전유물인가?, 귀족 사진가가 가난한 모델들의 초상권을 착취해도 좋은가? 등등 혹독한 비평에 직면했다. [미국의 서부]는 사진 인생에서 최고와 최악의 선물을 선사했다. 그는 최고의 패션사진가라는 화려함이 어떤 인물을 찍더라도, 그것이 다큐멘터리 사진일지라도 아베돈의 패션 스타일의 인물, 패션같은 다큐멘터리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가 소외된 인간에게 인간적으로 다가서고, 인간적인 태도를 보여도 사람들은 그를 화려한 상류사회,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는 부유충이 보여주는 값싼 동정심 내지 그들을 이용한 또 하나의 명예욕으로 본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부를 찍으려는 동기는 순수했으나 결과는 그랬다. 문제는 그가 여전히 똑같은 촬영방법을 고수했다는 데 있다. 20년 넘게 추구한 화이트 백드롭을 서부 사람에게도 일률적으로 적용시킨 점, 아우구스트 잔더의 유형학적 스타일을 전략적으로 차용한 점, 그리하여 하나같이 무표정한 표정, 스트레이트한 정면성, 의도적인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운 자세가 고정화되었다. 여기에 완벽한 패션 조명, 패션적인 프레임 워크를 구사함으로써 서부사람들을 패션 포트레이트화시켰다는 비판이 따랐다. 아베돈이 흰색 배경을 썼던 것은 사실 인물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늘 "포착할 수 있는 것은 표면이다. 표면을 통해서 표면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인물의 표면에서 의미를 일깨우고자 했던 의도는 늘 수행해 왔던 패션 포트레이트와 크게 다르지 않음으로써 비판을 자초한 것이다.
아베돈의 절치부심은 10년을 갔다. 1994년. 그는 모든 것을 털어버리려는 듯 사진인생 50년에 대한 회고의 책을 내놓는다. 랜덤하우스와 이스트먼 코닥이 후원한 [Evidence: 1944-1994 Richard Avedon]. 사진인생을 총 정리한 책이자, 한 시대의 뒷편으로 살아져 가는 회고의 책이기도 하다. 남보다 좋은 환경에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살았던 아베돈, 늘 최고의 자리, 최상의 시간과 공간에서 최고의 사람들과 어울렸던 아베돈, 그에게 마지막 사진집이었다. 이 책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화려한 사진인생을 총정리한다. 그러나 책의 어디에도 그가 세상의 가장 낮은 데를 향했던 모습, 소외된 삶을 위해 카메라를 들이댄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1995년 12월 13일. 그가 라스 베이가스로 향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는 상상은 과연 무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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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 편의 영화같은 이야기네요. 미국의 거대자본이 예술가를 마케팅하는 규모와 시야에 감탄합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하지만 못지않게, 서부사람들 사진에 대한 비평의 혹독함도 드라마틱합니다. 그의 사진을 구글에서 섭렵해봤는데 실물크기의 마릴린 몬로 사진을 상상해보고 그녀의 표정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초상화라는 것이 이런 미학도 있구나~하는 감동을 받습니다. 그것도 아마 몇백장 찍은 것 중의 하나겠지요.... 하여간 대단한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