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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半島)의 정통(正統)성은 신라(新羅)라고>??????
※ 아래 글은 이미 한번이상 발표했던 글 내용이나, 일부를 보충한 내용이다. 반도(半島) 경상도(慶尙道)! 그곳에서 살고 있거나, 그곳을 고향으로 하는 반도(半島) 국민들 중에서 일부 소수인이 반도(半島)의 정체성을 신라(新羅)를 적통(嫡統)으로 하는 주장(主張)이 간혹 나오고 있어, 이러한 분들을 위해 쓴 글이다. 반도(半島) 신라(新羅)란 존재(存在)할 수 없다. 다만 신라(新羅)의 문무왕(文武王)이후 흥성할 시기, 반도(半島) 역시 그 영향권 안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신라(新羅)가 망하고 난 후엔, 고려(高麗)가 다시 삼한통일【三韓統一 : 대륙에서 삼한통일 했던, 반도(半島)에서 삼한통일 했던 관계없다.】 을 이루고 <4백 여 년>이란 긴 세월을 통치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이미 신라(新羅)와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驪)의 백성들은 영역을 논하고, 혈통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으며, 고려(高麗)가 몽고(蒙古)계 여진(女眞)족으로 고려(高麗)조정에 귀화(歸化)한 몽고(蒙古)총독(總督) 가문(家門)의 “이성계(李成桂)”에게 역성(易姓)혁명(革命)으로 무너지고 난 후, 이씨(李 氏)들의 王朝는 5백년이 넘는 긴 세월을 통치하는 동안 반도(半島)의 혈통은 이미 신라(新羅)라는 나라의 혈통(血統)과는 무관하게 흘러갔다.
이러한 역사전개과정을 모르지 않는 자들이 반도(半島)의 정통성이나 정체성을 신라(新羅)에서 찾으려하는 것은 지역감정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아마도 그곳 경상도(慶尙道)지방에서 이승만 이후 박정희 장군(將軍)의 혁명(革命)이후에 엘리트들이 대거 부상(浮上)하였고, 그 덕택으로 그 후대(後代)의 엘리트들이 대거 요직(要職)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대륙의 역사서나 조선(朝鮮)의 역사서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그것이 왜곡(歪曲)된 것이든, 왜곡(歪曲)되지 않는 원전(原典)이든, 왜(倭)의 위치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이 반도(半島)라는 땅에 누가 살기에 적합했었는지를 찾아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반도(半島)같은 조그만 땅 안에서 지역감정을 부채질하거나, 한 세기도 되지 않은 기간에 그까짓 엘리트라 해야 모래알보다도 더 작은 별 볼 일없는 짓이란 얘기다. 우월감! 그것은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못 쓸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엘리트 아니라 신(神)이라 해도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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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漢 書 卷 一 上 / 高 帝 紀 第 一 上 / 서두를 보면 아래와 같다.
〔高 祖, 沛 豐 邑 中 陽 里 人 也, 姓 劉 氏. ● 母 媼〔四〕嘗 息 大 澤 之 陂, 夢 與 神 遇. 是 時 雷 電 晦 冥, 父 太 公 往 視, 則 見 交 龍 於 上. 已 而 有 娠, 遂 產 高 祖.〕
○ 위 본문(本文)중에서 〔 고조(高祖)는 “폐 풍 읍. 중 양리 사람이다.” 성(姓)은 유(劉)씨이며, 어머니(母)는 “온”【 媼 : 할미 온 : 어머니. 노모. 토지의 신(神)을 일컫는다.】인데, 큰 호수의 언덕에서 꿈속에 신(神)을 우연히 만났다. 이때 천둥과 번개가 치고, 그믐처럼 어두워지니 그의 아버지 “태공(太公)”이 와 자세하게 살피니, 하늘에서 교룡(交龍)을 보았는데, 그 후 잉태하여, 고조(高祖)가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 표 한곳을 보면 한고조(漢高祖), 그를 낳아 준 『어머니는 “온(媼)”이다.』라고 하는데, 정확한 이름은 아니다. 이 “온(媼)”이란 노구(老 嫗 : 나이 많은 할머니)를 칭하는 것이다. 문제는 ;
○ 아래 문 영(文 潁)의 주석(註釋)을 보면 ;〔四〕文 穎 曰 :「幽 州 及 漢 中 皆 謂 老 嫗 為 媼 。」 孟 康 曰 : 「媼 , 母 別 名 , 音 烏 老 反 」 師 古 曰 :「媼 , 女 老 稱 也 , 孟 音 是 矣 。 史 家 不 詳 著 高 祖 母 之 姓 氏 , 無 得 記 之 , 故 取 當 時 相 呼 稱 號 而 言 也 。 其 下 王 媼 之 屬 , 意 義 皆 同 。 至 如 皇 甫 謐 等 妄 引 讖 記 , 好 奇 騁 博, 強 為 高 祖 父 母 名 字 , 皆 非 正 史 所 說 , 蓋 無 取 焉 。 寧 有 劉 媼 本 姓 實 存 , 史 遷 肯 不 詳 載 ? 即 理 而 言 , 斷 可 知 矣 。他 皆 類 此 。」
○〔4〕문 영(文 潁)이 이르기를 ; 유주(幽州)와 한중(漢中)에서 모두 소위 “나이 많은 노구(老嫗)를 온(媼)이라 한다.” 맹 강(孟 康)이 이르기를, 『온(媼)은 어머니(母)의 특별한 이름이다.』고 하였다. 사고(師 古)가 이르기를, 『온(媼)은 나이 많은 할머니를 칭한다.』고 하였다. 사가(史家)들이 고조(高祖)의 어머니의 성씨(姓氏) 대해 상세하게 적지 않아, 기록을 얻을 수 없었다. (中略).
○ 그러나 이것은 핑계일 뿐이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누군가! 천하(天下)의 한고조(漢高祖)가 아닌가! 이러한 인물의 어머니 성씨(姓氏)와 이름을 모른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아니면 조상도 모르는 무식한 자였던가? 위 “문 영(文 潁)”의 주(注)를 보면, 유주(幽州)와 한중(漢中)에서 나이 많은 노구(老 嫗)를 “온(媼)”이라 칭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통설적인 역사해설에서 『한중(漢中)과 유주(幽州)』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일단 언어(言語)가 달라 통할 수 없었다. 대륙(大陸)의 그 넓은 곳에서 유독 한중(漢中)과 유주(幽州)만이 언어가 같을 수가 있을까? 이는 한중(漢中)과 유주(幽州)가 이웃하고 있다거나 또는 한중(漢中)이 유주(幽州)속에 포함될 때는 가능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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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漢中)지방은 어디를 말하는가? 한중(漢中)은 한중 군(漢中 郡) 또는 한중 부(漢中 府) 또는 한중도 (漢中 道)지역으로써 현『섬서(陝 西)성 남부지역의 ‘남정 현’에서 다스렸으며, 호 북(湖北) 일부 및 사천(四川)일부까지 포함되는 섬서(陝西)성 남부지역과 서남부 지역을 말한다. 』물론 이것은 현재의 역사해설에서 말하는 것이다.
● 유주(幽州)지방은 신주(神州=황성=황도=경조)의 북방지역과 서북지방을 말하기 때문에 한중(漢中)과 유주(幽州)지방 사이에 경조(京兆) 즉 신주(神州 : 황성=황도)가 있게 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경조(京兆) 및 경조(京兆)지방>을 찾아보면 『경조(京兆)』지방 속에 “유주(幽州)”지방이 포함되고 있다. 『경조(京兆)는 황성(皇城)이 있는 황도(皇都) 주위를 말함이고』, 경조지방(京兆地方)은 황도(皇都)를 에워싸고 있는 “사방 500 리”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옛 부터 이르기를, 관내도(關內 道) 또는 경기도(京畿道)라 하였다.
당시에 하 북 성과 그 동쪽지방을 일컫는 『유주(幽州)지방』과 섬서(陝西)남부지방에 있는 『한중(漢中)지방』에서 사용되는 문자가 같을 수는 없다. 만약 같다면 대륙(大陸)의 대부분 지역이 같았을 때 가능한 말이다. 이 기록으로 볼 때 말 그대로 중원(中原)은 중조(中朝)지방이요, 중조(中朝)지방은 중국(中國)이며, 중국(中國)지방은 한중(漢中) 및 경조(京兆) 및 유주(幽州)지방을 총칭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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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漢 書 卷 六 . 武 帝 紀 第 六
〔秋 八 月, 行 幸 安 定 。遣 貳 師 將 軍 李 廣 利 〔一〕發 天 下 謫 民 西 征 大 宛. 〔二〕➡ 蝗 從 東 方 飛 至 敦 煌.: 가을 8월, 황제가 안정(安定)에 행차하였다. 파견사 이사 장군 “이광리”는 천하의 유배된 사람들을 모아 서쪽의 대왕을 정벌하려 발하였다. 누리들이 동방으로 날아 돈 황(燉煌)에 이르렀다.❳
➡『蝗 從 東 方 飛 至 敦 煌』 :『 누리 (蝗 : 누리 황. 메뚜기의 일종으로 사막(沙漠)에서 사는 누리를 말한다) 들이 떼를 지어 동방으로 날아 <돈 황>에 이르렀다. 』는 말인데, 이 글을 쓴 학자가 있는 곳이 어디였을까? 동방(東方)으로 날아들어 돈 황(燉煌)에 이르렀다는 말은 곧 이 글을 쓴 분은 그 서쪽 또는 돈 황 (燉煌)주위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 그렇다면 이 누리【蝗 : 황 충(蝗蟲)】들은 돈 황(燉煌)의 서쪽 “타클라마칸”사막(沙漠)지대에서 발생(發生)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누리로 인(因)한 재앙(災殃)』을 『蝗災(황재)』라고 표현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누리가 돈 황(燉煌)을 넘어 중원(中原)으로 진출, 요동(遼東)반도를 건너 반도(半島)까지 날아왔다는 말은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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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漢 書 卷 一 百 上 / 敘 傳 第 七 十 上
〔是 故 劉 氏 承 堯 之 祚 ,氏 族 之 世 ,著 乎 春 秋. : 『옛 “유(劉)”씨는 제요(帝堯)를 계승한 하늘이 내린 천자의 자리이며(祚 : 복 조. 하늘이 내린 행복. 천자의 자리), 대대로 이어온 씨족으로, 춘추(春秋)에 분명하게 기록하여 놓았구나! 』❳
위의 글을 보니 한(漢)나라 역사【서한(西漢)과 동한(東漢) B. C 206 - A. D 220년】400년! 이는 곧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유(劉)씨”는 “제요(帝堯)”의 계승자란 말은 혈통(血統)이 같다는 것일까? 아니면 “제요(帝堯)”의 이상과 사상을 계승하여 이어온 씨족(氏族) 가문(家門)이란 말일까? 그러나 이 말은 어찌 보면 “역사서”란 승자(勝者)의 기록임을 감안하면 시골 “패향”의 농민이었던 “유방(劉邦)”을 과대평가(過大評價)해 기록(記錄)한 것이라는 점도 유의해야 할 것 같다.
○ 만약 “유(劉)씨”가 『제요(帝堯)』를 계승한 혈통(血統)이라면 이는 “제요(帝堯)”가 제곡고신(帝 嚳 高 辛)씨의 아들(3자)이므로, 고구려(高句麗)와 똑같은 혈통이다.
○『제곡(帝嚳)』은 희(姬)성이며, 이름은 <“제고” 또는 준(俊)>이라고도 하며, 호는 <고신 씨(高 辛 氏)>이다. 전하는 바로는 70년간 재위하였다고 하며, “염제와 황제의 혈통”으로 <황제(黃帝)의 장남 현효(玄 嚣)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소호(小 昊)이며, 아버지는 교극이며 전 욱(顓頊) 과는 4-8촌간이다.
첫째 비(妃)인 강원 씨는 주(周)를 건국시킨 주(周)시조가 된 기【棄: 즉 후 직(后稷)】를 낳았고,
둘째 비(妃)인 간(簡)은 상(商)의 시조가 된 설(契)을 낳았으며,
셋째 비(妃)인 경도(慶 都)는 요(堯)를 낳고,
넷째 비(妃)인 상의(常 儀)는 지(摯)를 낳았다. ‘제곡 고 신 씨’가 병으로 죽자 아들 ‘지(摯)’가 왕위(王位)를 이어받았으나 제대로 통치(統治)를 하지 못한 무능(無能)으로 쫓겨나고 동생이었던 <방훈 즉 요(堯)>가 뒤를 이어 받았는데, 이 분이 <제요(帝 堯)>이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최초의 “단군(檀君)”이시다.
● 이러한 혈통(血統)으로 가계(家系)를 올라가보면 『한(漢)과 고구려(高句麗)는 동일의 혈통(血統)으로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고구려(高句驪)와 한(漢)은 같은 조상을 가진 나라들이다. 이러한 혈통(血統)관계는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 및 <회남자(淮南子) 전> 및 <대 내 례> 등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진(秦)나라의 시조는 “전 욱 고 양(顓頊高陽)씨”라고 하며, “시황제(始皇帝)” 역시 “전 욱(顓頊)”의 후손이며, 신라(新羅)의 직계 선조는 “소호금천(少昊金天)”씨라고 하는데, “소호금천(少昊金天)”씨는 고구려(高句驪)의 시조(始祖)라는 “제곡고신(帝嚳高辛)”씨의 친 할아버지이다. 또한 고구려(高句驪)의 시조인 제곡고신(帝嚳高辛)씨와 진(秦)나라의 시조(始祖)라고 하는 “전 욱(顓頊)”씨 와는 친 4-8촌간이다.
○ 제곡고신(帝嚳高辛)씨의 본래 성(姓)이 “희(姬)”이다. 은(殷)나라 성씨(姓氏) 역시 희(姬)성이다. 주(周)나라 성씨(姓氏) 역시 “희(姬)”성이며, 조(趙)나라, 한(韓)나라, 진(晉)나라 모두 “희(姬)”성이다. 또한 기자조선의 “기자(箕子)” 역시 은(殷)의 왕족(王族)이었으니, 본시 성은 “희(姬)”성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이 모두는 『제곡고신(帝嚳高辛)씨』의 후손(後孫)들이다. 이러한 나라들은 모두 조선(朝鮮)에 속한 나라이며, 이러한『조선(朝鮮)』이 반도(半島) 땅에서 시원(始原)하고, 발흥(發興)했다는 역사해설은 희대미문(稀代未聞)의 사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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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한서(前漢書)에, 『한고조(漢高祖)가 일어나게 된 것에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 蓋 在 高 祖, 其 興 也 有 五 : 一 曰 帝 堯 之 苗 裔, 二 曰 體 貌 多 奇 異, 三 曰 神 武 有 徵 應, 四 曰 寬 明 而 仁 恕, 五 曰 知 人 善 任 使. 첫 번째는 제요(帝堯)의 묘예【苗裔 : 여러 대를 거친 후손】이고, 두 번째는 체모【體貌 :신체의 모양】이 기이(奇異)하였고, 세 번째는 사람을 불러들여 응하게 하는 뛰어난 무용이 있었으며, 네 번째는 인(仁)으로 용서하는 밝은 너그러움이 있었고, 다섯째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위 다섯 가지 중에서 네 가지는 나라를 창건(創建)한 인물(人物), 또는 영웅(英雄)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修飾語)이다. 그러나 첫 번째에 거론된 “帝 堯 之 苗 裔”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선대 혈통(血統)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수식어(修飾語)로 볼 수 없는 것이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제요(帝堯)”의 후손(後孫)이라면, 고구려(高句驪)의 선조(先祖)는 제요(帝堯)의 아버지인 제곡(帝嚳)고신(高辛)씨이다. 이런 혈통으로 보면, 고구려(高句驪)는 한(漢)나라보다 한 항렬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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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중 해당 기록>
➊ 黃 帝 居 軒 轅 之 丘 ,而 娶 於 西 陵 之 女 ,是 為 嫘 祖 。 嫘 祖 為 黃 帝 正 妃 , 生 二 子 ,其 後 皆 有 天 下 : 其 一 曰 玄 囂 , 是 為 青 陽 ,〔五〕青 陽 降 居 江 水 ;二 曰 昌 意 ,降 居 若 水. 昌 意 娶 蜀 山 氏 女 ,曰 昌 僕 ,生 高 陽 , 高 陽 有 聖 德 焉 。黃 帝 崩 ,葬 橋 山 。其 孫 昌 意 之 子 高 陽 立 ,是 為 帝 顓 頊 也 。
〔五〕索 隱 玄 囂, 帝 嚳 之 祖 。 案 :皇 甫 謐 及 宋 衷 皆 云 玄 囂 青 陽 即 少 昊 也 。 今 此 紀 下 云 「 玄 囂 不 得 在 帝 位 」 , 則 太 史 公 意 青 陽 非 少 昊 明 矣 。 而 此 又 云 「 玄 囂 是 為 青 陽 」 , 當 是 誤 也 。 謂 二 人 皆 黃 帝 子 , 並 列 其 名 , 所 以 前 史 因 誤 以 玄 囂 青 陽 為 一 人 耳 。 宋 衷 又 云: 「 玄 囂 青 陽 是 為 少 昊 , 繼 黃 帝 立 者 , 而 史 不 敘 , 蓋 少 昊 金 德 王 , 非 五 運 之 次 , 故 敘 五 帝 不 數 之 也 。 」
➋ 帝 顓 頊 生 子 曰 窮 蟬 。顓 頊 崩 ,而 玄 囂 之 孫 高 辛 立 ,是 為 帝 嚳 。帝 嚳 高 辛 者 ,〔一〕黃 帝 之 曾 孫 也 。高 辛 父 曰 蟜 極 ,蟜 極 父 曰 玄 囂 ,玄 囂 父 曰 黃 帝 。 自 玄 囂 與 蟜 極 皆 不 得 在 位 , 至 高 辛 即 帝 位 。高 辛 於 顓 頊 為 族 子 。
〔一〕集 解 張 晏 曰 : 「 少 昊 以 前 ,天 下 之 號 象 其 德 。 顓 頊 以 來 , 天 下 之 號 因 其 名 。 高 陽 、高 辛 皆 所 興 之 地 名 ; 顓 頊 與 嚳 皆 以 字 為 號 : 上 古 質 故 也。 」 索 隱 宋 衷 曰 : 「 高 辛 地 名 , 因 以 為 號 。 嚳 , 名 也。 」 皇 甫 謐 云 : 「 帝 嚳 名 也 。 」 正 義 帝 王 紀 云 : 「 母 無 聞 焉 。 」
➌ 帝 嚳 娶 陳 鋒 氏 女, 〔一〕生 放 勳 。娶 娵 訾 氏 女 ,生 摯 . 帝 嚳 崩 ,而 摯 代 立 。帝 摯 立, 不 善(崩),而 弟 放 勳 立 ,是 為 帝 堯 。
〔一〕索 隱 鋒 音 峰 。 案 : 系 本 作 「陳 酆 氏 」 。 皇 甫 謐 云 「 陳 鋒 氏 女 曰 慶 都 」 。 慶 都 , 名 也。 正 義 鋒 音 峰 。 又 作 「 豐 」 。 帝 王 紀 云 「 帝 有 四 妃, 卜 其 子 皆 有 天 下 。 元 妃 有 邰 氏 女 ,曰 姜 嫄 ,生 后 稷 。次 妃 有 娀 氏 女 ,曰 簡 狄 ,生 簡 狄, 次 妃 陳 豐 氏 女 ,曰 慶 都, 生 放 勛 。次 妃 娵 訾 氏 女 ,曰 常 儀 ,生 帝 摯 」 也 。
➍ 帝 堯 者 〔一〕 放 勳 。其 仁 如 天 ,其 知 如 神 。就 之 如 日 ,望 之 如 雲 。富 而 不 驕 , 貴 而 不 舒 。 黃 收 純 衣 ,彤 車 乘 白 馬 。 能 明 馴 德 ,以 親 九 族 。九 族 既 睦 ,便 章 百 姓 。百 姓 昭 明 ,合 和 萬 國 。
〔一〕集 解 謚 法 曰 : 「 翼 善 傳 聖 曰 堯 。 」 索 隱 堯 , 謚 也 。 放 勳 , 名 。 帝 嚳 之 子 , 姓 伊 祁 氏 。 案 : 皇 甫 謐 云 「 堯 初 生 時 , 其 母 在 三 阿 之 南 , 寄 於 伊 長 孺 之 家 , 故 從 母 所 居 為 姓 也 」 。 正 義 徐 廣 云 : 「號 陶 唐 。 」 帝 王 紀 云 : 「 堯 都 平 陽 , 於 詩 為 唐 國 。 」 徐 才 宗 國 都 城 記 云 : 「 唐 國 , 帝 堯 之 裔 子 所 封 。 其 北 , 帝 夏 禹 都 , 漢 曰 太 原 郡 , 在 古 冀 州 太 行 恆 山 之 西 。 其 南 有 晉 水 。 」 括 地 志 云 : 「 今 晉 州 所 理 平 陽 故 城 是 也 。 平 陽 河 水 一 名 晉 水 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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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半島)는 신라(新羅)의 후손(後孫)들이며, 신라(新羅)가 적통(嫡統)이라고 주장하는 웃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마디로 무식(無識)의 극단(極端)이라 할 수 있다.
○ <淮 南 子 傳> 의 “五星”에 대한 기록을 보면(何 謂 五 星) ;
❶ 東方木也,其帝太皥,其佐句芒,執規而治春,其神爲歲星,其獸蒼龍,其音角,其日甲乙 : 동방은 목(木)이다. 제(帝)는 태 호 (太 皥)이며, 구 망(句芒)이 그를(帝) 돕는다. 법을 집행하며, 봄을 다스린다. 그 신(神)은 세성(歲星)이며, 그 짐승은 창 룡(蒼龍)이며, 그 음악은 각(角)이고, 그 날(日)은 갑을(甲乙)이다. 【복 희와 여와 복 희 (伏 羲 / 伏 犧) 또는 포 희(庖 犧)라고도 하는데, 삼황(三皇) 중 하나이다. 복 희는 태 호(太 昊 / 太 皞)로도 불린다. '복 희'는 희생(제사에 쓰이는 짐승)을 길러 붙여진 이름이다. 성씨는 풍(風)이다. 그는 수인씨(燧 人 氏)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뱀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이족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팔괘(八卦)를 창제하고, 이로부터 신의 계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는 《주역》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도교에서는 그를 동방(東方)의 천제(天帝)라 일컫는다. 또한 글자를 만들었다고 믿어졌다. 역경에는 팔괘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 나오며, 백성에게 수렵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❷ 南方火也,其帝炎帝,其佐朱明,執衡而治夏,其神爲熒惑,其獸朱鳥,其音徵,其日丙丁 : 남방은 화(火)이다. 제(帝)는 염 제 (炎 帝)이며, 주 명(朱明)이 그를(帝) 돕는다. 형(衡)을 집행하며, 여름을 다스린다. 그 신(神)은 형 혹(熒惑)이며, 짐승은 주오(朱 鳥)이고, 그 음악은 징(徵)이며, 날(日)은 병정(丙丁)이다. 【삼황(三皇)중 2번째 황제. 이름은 염제(炎 帝). BC 28세기에 인신우두(人身牛頭)의 형상을 하고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마차와 쟁기를 만들었으며 소를 길들이고 말에게 멍에를 씌웠다. 또한 백성들에게 불로써 토지를 깨끗하게 하는 법을 가르쳤다. 신 농은 중국을 확고한 농경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작성한 365종의 약초에 관한 목록은 후대 식물의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말을 시작했으며, 1주일이 되기 전에 걸어 다녔고, 3세가 되자 들에 나가 쟁기질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❸ 中央土也,其帝黃帝,其佐后土,執繩而制四方,其神爲鎭星,其獸黃龍,其音宮,其日戊己 : 중앙은 토(土)이다. 제(帝)는 황 제 (黃 帝)이며, 후 토(后土)가 그를(帝) 돕는다. 사방(四方)의 제도를 바로 잡으며, 그 신(神)은 진성(鎭 星)이며, 그 짐승은 황룡이다. 그 음악은 궁(宮)이고, 그 날(日)은 무기(戊己)이다. 【황제(黃帝)는 중국 전국 시대 이후로 문헌에 등장하는 오제(五帝) 중 첫 번째 제왕(帝王)으로, 삼황(三皇)에 이어 대륙(大陸)을 다스렸다고 설명된다.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 원(軒 轅)이다. 황제 헌 원 씨(黃帝 軒 轅 氏)라고도 부른다. ‘황제(黃帝)’의 명칭은, 제위 시 황룡이 나타나 토 덕(土 德)의 상서로운 징조(徵兆)가 있다고 하여 붙여졌으며, 도교(道敎)의 시조(始祖)로도 추앙받고 있으며, 죽어서 신(神)이 되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왕후(王后)는 서릉 씨(西 陵 氏)라고 전해진다. 역시 동이(東夷)족이라고 전해진다.】
❹ 西方金也,其帝少昊,其佐蓐收,執矩而治秋,其神爲太白,其獸白虎,其音商,其日庚辛 : 서방은 금(金)이다. 제(帝)는 소 호 (少 昊)이다, 욕 수(蓐 收)가 그를(帝) 돕는다. 가을을 다스리며, 구(矩)를 집행한다. 그 신(神)은 태백(太白)이고, 그 짐승은 백호(白虎)이다. 음악은 상(商)이며, 그 날(日)은 경신(庚 辛)이다. 【위키-백과 : 소호(少昊)는 중국 고대의 오제의 한 명이다. 청양 씨(青 陽 氏), 금천 씨(金天 氏), 궁상 씨(窮 桑 氏), 운양 씨(雲 陽 氏), 주선(朱 宣)으로도 불린다. 전설에서 성은 기(己), 이름은 철(摰) 또는 질(質)이었으며 황제(黃帝)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본인 주(注) : 동이(東夷)의 천제(天帝)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新羅)의 시조(始祖)이다.】
❺ 北方水也,其帝顓頊,其佐玄冥,執權而治冬,其神爲辰星,其獸玄武,其音羽,其日壬癸. : 북방은 수(水)이다. 제(帝)는 전 욱 (顓 頊)이다. 현 명(玄 冥)이 그를(帝) 돕는다. 겨울을 다스리며, 잘잘못을 집행하며, 그 신(神)은 진성(辰星)이고, 그 짐승은 현무(玄武)이다. 그 음은 날개(깃털)이며, 그 날(日)은 임계(壬癸)이다. 【전 욱(顓頊)은 대륙(大陸) 고대(古代)의 천자(天子)이다. 전 욱(颛顼)은 고대 천자(天子)이다. 이름은 고양(高 陽)이었고 고양 씨(高陽 氏)로도 부른다. 오제(五帝)의 한 명으로 소호(少昊)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재위는 78년이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창의(昌 意), 어머니는 촉산 씨(蜀 山 氏)의 딸인 창 박(昌 僕)이다. 창의는 황제(黃帝)의 아들이고 전 욱(顓頊)은 황제의 손자(孫子)가 된다. 자식으로는 궁선(窮 蝉)이 있다. 진(秦)의 시조(始祖)라 하며, 영(嬴)씨의 시조인 셈이다.】
● 삼황(三皇)오제(五帝)는 동이(東夷)라고 하며,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동이(東夷)였다는 원문(原文)사료가 존재하며, 대륙에서조차 황제(黃帝)가 동이(東夷)라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新羅)인과 가야(伽倻)인은 그 조상(祖上)을 “소호금천(少 昊 金 天)씨”라고 했고, 고구려(高句驪 : 백제포함)인은 그 조상(祖上)을 “제곡고신(帝 嚳 高 辛)씨” 또는 “전 욱 고 양(顓 頊 高 陽)씨”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륙 사에서는 “전 욱 고 양 씨”는 진시황제의 시조(始祖)라고 한다.
○ 이러한 역사(歷史)의 흐름을 안다면 위와 같은 어리석은 주장이나 믿음은 갖지 않았을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자신이 있는 손바닥만 한 우물 안의 사정밖에 알 수 없다. 우리가 이런 개구리 같은 처지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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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과 연계해 보면 ;
『서방(西方)은 “금(金)” 이요, 그 제(帝 : 임금 또는 天子)는 “소호(少 昊 : 소호 금천 씨를 말함)”라고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및 여타 옛 기록에 의하면 “신라(新羅)는 소호 금천 씨의 후예(後裔)라 하여 姓(성)을 金(금)으로 했다.”고 한다. 이러한 “신라(新羅)”는 결국 대륙(大陸)의 서쪽에서 시원(始原)했으며, 이들이 이동(移動)한 것은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진(秦)”나라 때이다. 진(秦)의 난리 때문에 많은 무리들이 여기저기로 난(亂)을 피해 유랑(流浪)의 길을 떠났으며, 이들은 진(秦)의 백성들이다. 진한(辰韓)은 곧 진한(秦韓)이다. 즉 신라(新羅)의 선조(先祖) 나라였던 진한(秦韓)은 곧 진한(辰韓)이다. 대륙側 기록에 따르면 “진한(辰韓)”은 “진(秦)나라”의 유민(流民)들이 건설했다고 했으며, “秦(진)은 秦 韓(진한)이며, 辰韓(진한)”이라 했다. 』
진한(辰韓)은 진한(秦韓)과 같으며, 진한(秦韓)은 진(秦)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진(秦)을 떠난 백성들이지만 진(秦)의 혈통(血統)과 풍속(風俗)과 관습(慣習)을 가지고 있었으니 당연한 얘기다.
진(秦)나라 백성들이 난리를 피해 이주하여 세운 나라가 “진한(秦韓)”이며, 또 다른 이름으로 “진한(辰韓)”이라고 한다. 이때 “진(秦)”나라 유민들을 받아주는 곳이 없어 계속 유랑생활을 하다가 마한(馬韓)의 왕이 이들을 딱하게 여겨 자신의 땅(馬韓) 동쪽지방 일부에 이들을 살게 하였다. 이들은 점차적으로 진(秦)의 난리를 피해 이주하는 유랑민들이 모여들어 후에는 이들이 자립(自立)하여 “진한(辰韓)”이라 호칭하게 되는데 또 다른 이름으로 진(秦)의 백성들이 세운 나라이니 “진한(秦韓)”이라 호칭하게 되며, 이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또 마한(馬韓)에서 그들에게 동(東)쪽의 땅을 내어 주었다면 그 동쪽의 땅이 어딘가? 그곳이 반도(半島) 동남쪽 모퉁이 “신라(新羅)”라는 곳인가? 이곳이 마한(馬韓)의 동쪽 땅이라면 마한(馬韓)에서 출발(出發)했다는 고구려(高句驪)는 어디에서 찾을 것이며, 마한(馬韓)에서 출발(出發)하여 그 남쪽으로 내려가 도읍(都邑)했다는 “백제(百濟)”는 전라도(全羅道) 남쪽 남해안 수 백리 용궁(龍宮) 속에 왕조(王朝)를 세웠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에 기록된 ; 『有 三 種 韓, 馬 韓 之 東 弁 辰 與 辰 韓 與 倭 接 界』 이 내용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즉 변진한(弁辰韓)과 진한(辰韓)은 왜(倭)와 접계(接界)하였다 하였으니 말이다. 『접계(接界)란 이어져 경계를 이루고 있다.』라는 말인데, 곧 『땅이 이어져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말이다. 이 기록을 반도(半島)에 대입해보면 ;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들의 주장대로라면, 『경상도 일부 땅과 전라도 일부 땅은 왜(倭) 즉 왜노(倭奴)의 땅으로 이들과 신라와 백제 땅이 접해 있었다.』는 결론이다.
현대의 개념인 바다(海)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를 “접경(接境)”한다고 표현하고 문자를 써 기록했다면 옛 한자(漢字)의 의미는 몽땅 다른 뜻과 의미(意味)로 뒤바뀌었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금도 수천 년 전의, 일천 년 전의 한자(漢字)의 의미(意味)와 뜻은 21세기 현재(現在)의 것과 별반 다름이 없다. 결국 식민사관의 주장대로라면 『반도(半島) 남쪽 땅은 왜(倭)의 땅이었다.』는 『임나일본부설』과 맥(脈)을 함께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논리(論理)는 『반도(半島)는 본시 옛 왜(倭)의 땅이었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반도(半島)사관이란 식민(植民)사관과 같은 맥락이다. 영역(領域)으로 볼 때 큰 차이가 없다. 진한(辰韓=진한秦韓)은 어느 날 갑자기 천상(天上)에서 뚝, 떨어진 존재였을까?
진한(辰韓=秦韓)인!!!!!!!!!!!!!!!!!!
그들 역시 평범한 인간(人間)이었으며, 두 끼, 세끼 밥을 먹고, 남자(男子). 여자(女子)가 혼인(婚姻)이란 율법(律法)으로 맺어져 부부생활(夫婦生活)이 가능해야 후손(後孫)을 이을 수 있었던 똑같은 인간이었다. 이런 진한(辰韓=秦韓)인들을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조상(祖上)없는, 부모(父母)없는 존재로 만들었는가! 』
이것은 바로 후대(후손)들의 무지(無知)에서 온 것이며, 무식(無識)과 정체성이 결여된 후손(後孫)들이 왜(倭)의 앞잡이 노릇을 한 덕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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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半島) 한국(韓國)인은 신라(新羅) 직계(直系)자손(子孫)이다.』라고 하는 것은 특히 경상도(慶尙道)지방에서 나오는 주장이다. 또한 인터넷의 <블-로그> 또는 <카페> 등지에서 이런 주장들이 근거 없이 나돌아 다닌다. 이러한 유언비어(流言蜚語)는 결국 백성(百姓)들을 분열(分裂)시키는 촉매제로 작용(作用)하고 떼거리 문화(文化)를 만드는 원동력(原動力)이 된다는 것쯤은 알 만한 사람들은 안다. 왜 이런 주장들이 나오는 것일까. 그곳 사람들 스스로 우월감에 젖어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임나일본부”설을 더욱 발전시켜 속지(屬地)로 만들려는 원대한 계획(計劃)의 일환인가?
통설적인 역사 해설에서 신라(新羅)라는 나라의 역사(歷史)를 보면 고구려(高句驪)나 백제(百濟)에 비해 상대적으로 질 낮은 조그마한 소국(小國)이었다. 파견사를 보낼 형편도 되지 않아 백제(百濟)의 사신(使臣) 일행에 끼어 다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때를 잘 만나 남의 나라 군대(軍隊)를 동원(動員)하여 주위 나라를 토벌(討伐) 또는 멸(滅)한 후에야 발전(發展)하게 된 국가라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이러한 신라(新羅)를 반도(半島)인의 정통(正統)으로 주장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은 『예를 들면 현대의 역사 해설에서(역사란 되돌릴 수 없으나 가정해 본다면) 고구려(高句驪)가 신라(新羅)와 백제(百濟)를 멸하고 통일(統一)을 이루었다면 아마도 반도(半島)의 역사 강역(疆域)은 신라(新羅)가 통일(統一)을 이루었다는 강역(疆域)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광대(廣大)하고 광활(廣闊)한 영토(領土)였을 것이다. 우월감(優越感)에 젖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음에 표본이 될 뿐이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말이다.
신라(新羅)는 반도(半島) 땅에 발을 내 민 적이 없는 “대륙(大陸)의 왕조(王朝)다” 이것은 현존하는 조선(朝鮮)사와 대륙(大陸)사가 증명(證明)한다. 일제(日帝)에 의해 책상위에서 설계도처럼 만들어진 “조선사”는 이제 버릴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그것을 신주단지처럼 숭배(崇拜)하고 찬양(讚揚)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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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은 대륙의 왕조(王朝)이며, 대륙(大陸)의 주인(主人)이었다.』 비록 한 시대를 잘못 운영(運營), 광대(廣大)한 영토(領土)와 그 역사(歷史)는 비록 해체(解體)되었으나 진실(眞實)은 변하지 않는다. 언젠가 예전의 “조선(朝鮮)의 영광(榮光)”은 분명히 재현(再現)될 것이다. 육신(肉身)은 자연(自然)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조선(朝鮮)의 영광(榮光)과 조선(朝鮮)의 혼(魂)과 얼”은 반드시 재현(再現)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0년 11월 21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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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믿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진시황제의 진나라가 신라의 선조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의 선조이기도 한다면 3국은 한 핏줄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