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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제 12 구간(냉전고개~나전고개)
1. 산행일시 및 출발 장소
[1] 출발일시 : 2011년 11월 13일(일)
[2] 출발장소 :
2. 산 행 지 : 황새봉 --- 경남 김해
3. 날 씨 : 맑음
4. 참 가 자 :
○ 김수희, 노승애,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이용준(6명)
5. 회 비 :
6. 준 비 물 :
[1] 전 체 - 안전장구, 구급약, 사진기, 지도
[2] 개 인 - 비상식, 등산화, 배낭, 윈드쟈켓 및 우의, 예비옷(보온)과 양말, 모자, 장갑, 후레쉬, 식수, 세면도구, 신분증, 다용도칼, 휴지, 비닐봉투, 간식 등 개인용품
7. 산행정보 및 일정
[1] 총 산행 거리 및 시간
○ 총 산행 약 14.8km, 7시간 정도 소요
[2] 산행 길잡이
냉정고개를 지나면서 많은 송전탑이 나타난다. 평지 같은 야트막한 산 너머 25분이면 남해고속국도가 지나는 장고개에 이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700m 가면 고속국도 아래를 지나는 굴다리가 있다. 굴다리 지나 왼쪽 '국악연수원' 안내판을 따라 들어서다가 연수원 입구에서 왼쪽 밭으로 들어서야 한다. 밭 끝에 무덤이 나오고, 그 뒤로 길이 이어지다가 곧 단고개에 이른다. 몇 개의 송전탑 지나 옻나무가 여기저기 나타나는 오르막을 오르면 275봉이다. 길이 왼쪽으로 꺾인다. 부근에 무덤이 많이 나타난다.
'성도 김정애, 조외갑 묘' 지나 15분 오르면 잘 갖춰진 운동시설이 마련된 338봉이다. 봉우리 가운데 밋밋한 무덤 1기가 있다. 338봉 주변으로 불티재 이르기까지 산딸기넝쿨이 많이 자라 길이 사납다. 불티재는 왼쪽 담안 쪽으로 좁은 산길이 나있다. 여기서 396봉 지나 나무의자와 이정표가 있는 솔숲 속 삼거리까지는 20여분 걸린다.
오래된 삼각점이 있는 황새봉은 잡목이 심하다. 40m 앞에 낡고 부셔져 방치된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초소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덕암공동묘지로 내려서는 길엔 산딸기넝쿨이 아주 많다.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가 연결된 덕암공동묘지엔 양지쪽 사면을 따라 6000기가 넘는 묘가 들어서 있다. 무덤 중간 즈음에 화장 및 납골당 시설을 갖춘 '김해시 추모의 공원'이 있다. 광활한 공동묘지 끝에서 왼쪽 능선으로 정맥길이 이어진다. 354봉 지나 금음산 이르기까지 등산로 주변으로 산딸기넝쿨이 많아 걸음을 더디게 한다. 금음산 내려서는 길엔 굵은 칡넝쿨이 많이 보인다.
금음산에서 내림길로 30분이면 낙원공원묘지가 나온다. 20000기 이상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낙원공동묘지는 왼쪽 김해시 한림면으로 길이 이어져 있다. 공원묘지 건너로 황새봉 지능선에 조성중인 골프장과 멀리 불모산이 같은 선상에 펼쳐진다. 묘지 중간 길에서 약 80m 오른 후 왼쪽 산으로 정맥이 들어선다. 20여분 오르면 송전탑이 선 봉우리가 나오고, 곧 '처사허공지묘'에 이른다. 5분만 더 가면 낡은 철조망이 둘러쳐진 밤나무농장을 만나는데, 농장 가장자리를 따라 길이 이어진다. 농장 끝에서 길이 나뉘는데, 오른쪽이나 직진하는 길을 모두 무시하고 왼쪽으로 가야한다. 농장 경계를 따르다 곧 도로로 내려서는데, 내려서기 전에도 밤나무 농장 울타리로 쓰인 낡은 철조망이 발목 부분에 걸려 있어 주의해야 한다.
원래 정맥 마루금은 이 길에서 건너 건설폐기물 처리공장인 '성원ENT'를 가로질러 237봉으로 이어지지만 237봉 주변으로 다닥다닥 붙어 들어선 공장들로 인해 접근이 쉽지 않다. 현재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왼쪽 내리막길로 삼거리까지 간 후 14번 국도 따라 망천고개로 가는 것이다. 14번 국도를 다르다가 '서진산업' 앞에서 꼭 횡단보로를 건너야 한다. 망천고개에서는 길이 꺾이고, 교통량도 많아 무단횡단은 위험하다.
망천고개에서 왼쪽 능선을 따라 5분 가면 봉우리를 우회하는 콘크리트 포장도를 만나고, 포장도 건너 능선으로 길이 이어진다. 곧 송전철탑을 만나고, 여기서 다시 콘크리트 포장된 길이 정맥과 겹치며 지난다. 여기서 20분 정도면 1차선 아스팔트 포장도가 지나는 상리고개다. 고개를 내려서거나 건너편으로 오르는 길은 급경사라 줄이 매어져 있다. 5분 오르면 만나는 임도까지는 쓰러진 나무들과 무덤이 많이 나타난다. 여기서 10여분이면 신어산이 잘 보이는 능선에 올라선다. 이곳부터 나밭고개 내려서기까지는 길이 아주 완만해 걷기 좋다.
347.4봉 전 안부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나밭고개로 내려서다보면 갑자기 길이 뚝 끊어지고 거대한 절개지가 나타난다. 10여년 전부터 계속된 채석작업으로 바로 앞에 있어야 할 288.7봉이 아예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여기서 곧장 내려서서 정맥 마루금을 잇는 방법이 현재로선 없다. 절개지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내려서야 하는데, 어디든지 개울을 건너게 된다. 오른쪽 김해수련원 방향이 거리도 짧고, 안전하다. 수련원 앞 58번 지방도엔 대형 트럭이 많이 지나기에 건널 때 조심해야 한다. 지방도에서 오른쪽 옛 길을 따라 5분 오르면 나밭고개다. 정맥길 입구에 '生林洞天' 이라 음각된 큰 비석이 있다.
[3] 구간 거리
냉정고개(1042번도로,101m)--3.3km--396m봉--1.8km--황새봉(393.1m)--2.7km--덕운봉--3.5km--낙원고개--3.5km--나밭고개(58번도로, 158m)
[4] 산행일정(산악대장 제공 자료)
(1) 산행지 이동
기상(04:50) ∼ 식당(05:20/아침식사/06:00) ∼ 냉정고개(06:20)
(2) 산행코스 및 시간
냉정고개(06:30) → 남해고속도로 지하통로(06:55) → 임도 안부(07:25/07:35) → 체육공원(07:50) → 불티재(07:55) → 황새봉(08:35/08:45) → 덕암공원묘지(09:20) → 금음산(09:50/10:00) → 낙원공원(매점, 10:25) → 성원ENT도로(10:55/11:05) → 237m봉(11:25) → 망천고개(14번국도, 11:35) → 임도(11:50) → 상리고개(12:10/12:20) → 347.4m봉(12:50) → 나밭고개(13:25)
(3) 산행 후
나밭고개(13:40) ∼ 김해버스터미널(14:00/점심/15:50) ∼ 시외버스 ∼ 수원(20:30)
8. 탈출로 및 편의사항
김해버스터미널(055-327-7898)
중앙콜택시(055-335-3535)
원조콩나물해장국(055-311-3633)
산청식당(055-322-9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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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산 행 기
[1] 냉정고개
〇 부곡에서 주촌면 양동리 냉정으로 넘어가는 고개
〇 김해시 장유면과 진례면의 경계가 되는 고개
※ 냉정마을(冷井, 찬물동)
〇 가마실(부곡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
〇 김해시 장유면 부곡리(釜谷里)
조선 예종 때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부량곡리(釜良谷里)’이며 그 뒤 ‘부곡리’로 고쳤고 1914년 냉정리를 병합하였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부곡 4리(釜谷, 竹谷, 新田, 冷井, 射터) 가운데 넓은 도로 아래에 엎어놓은 가마솥 모양(복부형 : 伏釜形)의 명당이 있어 효자, 열녀와 거부(巨富)가 나올 자리라 하였고, 금가마를 거꾸로 걸어놓은 모양(金釜倒懸形 : 금부도현형)의 명당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모신(地母神 : 천신이 지상으로 내려와 대지와 결합하여 세계의 질서가 내재되어 있는 대지)이 깃들어 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중심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생긴 지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 장유면(長遊面)
장유는 오랜 역사의 향기가 깃들어 있는 고장이다. 오래전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의 처남 허보욱이 허황후를 따라 이 나라에 와서 이곳 장유에 절을 세우고 오랫동안 머물러 돌아가지 않다가 입적(장유불반 : 長遊不返)하여 후세에 장유화상(長遊和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장유산(지금의 태정산) 부근에 마을이 형성되자 ‘장유촌(長遊村)‘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이곳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장유사(長遊寺)‘라 하였다.’
유하촌(柳下村)‘은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유지앵소(柳技鶯巢 : 버드나무 가지에 있는 꾀꼬리 집)의 명당자리가 있다하여 불렀다고 전하는 반면에, 지명을 연구하는 학자는 김해부의 서쪽에 있는 들 부근에 형성된 마을에서’유등야(柳等也)‘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지금의 삼문리 능동 마을은 가락국시대 임금의 능(陵)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며 젤미마을 아파트 지역 일부는 신라말기부터 향, 소, 부곡이라는 특수 부락의 하나인’제을미(齊乙彌, 젤미) 鄕‘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제을미향’, ‘장유촌’, ‘유하촌’의 세 마을로 형성되었고, 조선시대 광해군 8년부터 효종 7년까지 41년 동안(1616~1656)에는 지금의 신문리 용산(옛날 이름은 진골 : 鎭谷) 마을에 ‘신문진(新門鎭)’이 설치되어 경상도의 국방요지가 되었다. 조선중기 여지도서(與地圖書 : 1757~1765)의 김해진김해도호부(金海鎭金海都護府)에서는 ‘유등야면(柳等也面)’이, 호구총수(戶口總數 : 1789)에서는 유등야면에 말단 행정구역으로 18개 리(里)가 속한다고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다.
[유적지, 기념물] 孝子 通政大父 金正敎碑, 尹殷臣 3代 施惠碑, 射터, 密城 朴氏烈女碑
※ 참고자료 : 증보 김해지리지(이병태 저. 1996년 김해문화원 발행), 김해의 지명(민긍기 저. 2005년 김해문화원 발행), 김해의 지명전설(이홍숙 저. 2008년 김해문화원 발행)
[2] 장고개
〇 김해시 한림면 신천에서 명동리고 넘어가는 고개
〇 남해고속도로상의 장고개
※ 남해고속도로 [南海高速道路]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에서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2동에 이르는 고속국도 길이 169.3km이고, 왕복4차선이다. 고속국도 제10호선으로 전라남도 31.7㎞, 경상남도 131㎞, 부산광역시 7.2㎞이다. 남해와 서해 및 내륙의 물동량 수송과 지역개발, 관광도로의 역할을 한다. 1971년 12월 8일 노선이 지정되었으며, 1972년 1월 10일에 기공하여 1973년 11월 14일 개통되었다.
<출처> 남해고속도로 [南海高速道路 ] | 네이버 백과사전
[3] 金海 국악연수원
신명나는 소리와 농악이 양동리 내림산 계곡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내림산 759번지 김해국악연수원(원장 최덕수)은 대지 500여 평에 건평 127평으로 연수시설, 연습장, 실습장, 부대복리시설, 심신장이 구성돼 있다. 92년 11월 30일 개원한 연수원은 소리, 농악 부문의 교육 및 연수프로그램으로 운영되고 있다. 김해 전통민속놀이 ‘걸궁건립치기’보존회는 81년 재 창립한 최덕수 원장이 보존회장을 맡아 이곳에서 함께 운영하고 있다.(사)한국국악협회 정-17호 성주굿고사풀이 기능보유자인증을 받은 최 원장은 상여소리전문기능자 및 교육자로, 무속의 길잡이 전수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명식, 정용근, 강재수씨 등 1000여명의 교육생을 배출한 바 있다.12세때부터 소리를 배워 천부적 소질을 타고 났다는 선생의 평을 듣고 17세때 농악을 김병섭 선생에게 사사 받았다. 경남 민속경연대회에서 3번 장려상을 수상했으며 전국으로 공연에 참가하고 있으며 금년 2월에 창단된 울산여명예술단 이사로 참여하는 등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다.“지역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국악연수원이 뿌리를 내려 지역에서 인재를 키워주는 풍토가 마련되길 기대하고 우선 지역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출처> 울산여성신문
http://uwnews.co.kr/sub_read.html?section=section9&uid=4178
※ 양동리(良洞里)
양동리는 우리지역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다. 양동(良洞), 신전(新田), 가곡(歌谷)마을로 구성되며, 502전경부대가 위치한 냉정마을도 양동리에 속했는데 몇년전 행정구역개편으로 장유면으로 편입되었다.
양동리에는 양동산성, 양동리 고분군을 비롯한 역사, 문화유산들이 많으며 특히 양동리 고분출토 유물들은 고대 김해지역에 자리 잡았던 가야사회의 "국가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며, 대성동 고분 출토 유물들과 함께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004년 7월 23일부로 양동리 고분군은 국가사적 제454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앞으로 가야문화권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양동리 고분 정비사업이 완료되면 대성동 고분유적지와 함께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고분유적지로 거듭날 것이다. 양동리는 원래 사양곡 또는 노래실이라고 하여 가곡리였는데 조선후기 철종 때 양동(어진마을)으로 고쳤다고 한다.
[4] 매봉산(84m)
〇 구량리와 미음리 경계에 있는 산 , 매처럼 생겼다 함
※ 양동리 [良洞里]
북동쪽에 매봉산이 있다. 마을 앞에는 양동저수지가 있으며, 호만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류가 마을 앞을 지난다. 자연마을로는 양동, 신전, 가곡(노래실, 새앙골), 신전 등이 있다. 양동은 원래 사양곡 또는 노래실이라고 했는데, 조선 후기 철종 때 양동(어진마을)으로 고쳤다고 한다. 양동산성(경남기념물 91), 김해 양동리 고분군(사적 454) 등의 많은 유적이 있다
[출처] 양동리 [良洞里, Yangdong-ri ] | 네이버 백과사전
※ 양동산성(良洞山城) ①
►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에 있는 가야시대의 산성.
► 지정종목 : 시도기념물
► 지정번호 : 경남기념물 제91호
► 지 정 일 :1988년 12월 23일
► 소 재 지 :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 산 39-1, 39-2
1988년 12월 23일 경상남도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되었으며 김해시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테뫼식 석축성으로 석축 둘레 약 800m, 높이 약 2.5m, 폭 2.5m이다. 김해평야와 낙동강 하구가 내려다보이는 양동리와 내삼리의 경계, 해발 332m의 산정에 있다. 옛 문헌에는 가곡산성(歌谷山城)으로 표기되어 있고 내삼리와의 경계에 있어서 내삼산성이라고도 한다.
가야시대에 쌓은 것으로 계속 수리되어 사용된 듯하며 일부는 흙, 일부는 깬돌[割石]로 이루어져 있다. 남북의 성문터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우물터의 흔적도 있다. 성의 안팎에는 가야시대의 토기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주변에는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곡리의 천곡성(泉谷城)과 봉림리의 마현산성(馬峴山城) 등이 있다.
[출처] 양동산성 [良洞山城 ] | 네이버 백과사전
※ 양동산성(良洞山城) ②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에 있는 가야시대의 성입니다.
양동산성은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에 있는 가야시대의 성으로 석축의 높이 약 2.5m, 너비 2.5m, 둘레 약 800m입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91호이며 해발 332m의 산정에 위치한 석축성으로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쌓은 형식)입니다.
이 성은 김해평야와 낙동강 하구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며 주변의 양동리고분·유하리고분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남북의 두 성문에는 아직 초석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우물자리가 있습니다. 성 안팎에는 가야시대의 토기조각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 산성은 원래 문헌상에는 가곡산성(歌谷山城)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내삼리와 양동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정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내삼산성(內三山城)이라고도 불리며, 지금은 위치한 곳의 이름을 따서 양동산성이라고 합니다. ≪문헌비고 文獻備考≫ 여지고 輿地考15 관방3(關防)에 의하면 “가곡산성은 서쪽 20리에 있는 석축으로 둘레가 600척인데 지금은 폐하였다.” 라고 하였고, ≪대동지지 大東地誌≫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성으로는 이 산성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추측되는 천곡리의 천곡성(泉谷城)과 봉림리의 마현산성(馬峴山城) 등이 있으며, 죽림리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축성하였다는 김해죽도성(金海竹島城)을 중심으로 마사리의 마사왜성(馬沙倭城), 망덕리의 신답왜성(新畓倭城)이 있습니다.
양동산성의 남쪽 기슭에는 양동리유적이 있는데 동의대학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삼한시대에서 가야시대에 걸친 고분이 주류를 차지하는데 대체로 기원 후 1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형성된 유적으로 보입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양동산성의 축조연대가 보다 빠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출처>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85347&v=42
http://ask.nate.com/qna/view.html?n=8823980
[5] 불티재
진례면과 주촌면의 경계인 고개인데, 행인이 끊임없이 많이 다니므로 「불티재」라 칭함
- 국토포털 -
[6] 황새봉(=관봉산, 392m)
〇 주촌면 덕암리와 진례면 고모리 담암리 경계에 있는 산
〇 진례면 상우뒷산으로 높이는 313m이다. 옛날 진례 천지가 온통 물에 잠겼을 때 황새 한 마리가 앉을 곳을 찾아 헤매다가 앉은 곳이 황새봉 정상으로 그 후로 산 이름이 황새봉으로 불리운다.
<출처> 김해시 진례면 홈
http://gimhae.go.kr/servlet/dongInfoUser?cmd=user_outline&dong_code=5350050
[7] 덕암삼거리(덕암리 / 德岩里)
덕암리는 선지리와 원지리 북서쪽에 위치한덕암(德岩), 용곡(龍谷), 옥천(玉泉) 3개 마을과 옥천마을에 속하는 점골을 말하며 최근 덕암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많은 기업체가 들어서 있다.
덕암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때 흥해 최씨 형제가 피난와 살면서 후진을 가르쳤다고 하며 뒷산의 바위를 형제바위(덕바위) 동네를 덕암촌으로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용곡마을은 두 청룡봉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서 용곡이다. 절골이라 불리는 마을 뒷산에 덕운사가 있다.
옥천은 마을 뒷산 계곡 이름이 옥계인데, 옥계 맑은 물이 흐른다고 옥수골, 즉 옥천이다.
<출처> 김해시 주촌면
http://gimhae.go.kr/servlet/dongInfoUser?cmd=user_outline&dong_code=5350078
[8] 고령마을 0.4km 지점
※ 고모리(古募里) / 고령마을
동쪽으로 황새봉의 산자락이 펼쳐져 있다. 상우천이 흘러 화포천으로 유입되며, 상우저수지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고령(높은재), 고모리(고무실), 상우(上右) 등이 있다. 고령은 고모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외부에서 마을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높은 재 너머에 위치한 조그마한 분지에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모 입구에는 돌로 쌓은 두 개의 돌탑이 있다. 한 사내아이가 산모의 배를 뚫고 출생해 산모가 비참하게 죽어, 아이가 역적이 될까 우려한 마을에서 돌탑을 세워 이를 방지하였다고 한다.
<출처> 고모리 [古募里, Gomo-ri ] | 네이버 백과사전
※ 진례면(進禮面)
면적 44.83㎢, 인구 8,780명(2005)이다. 10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은 진영읍·한림면(翰林面), 동쪽은 주촌면(酒村面), 남쪽은 장유면(長有面), 서쪽은 창원시와 접한다.
북쪽으로만 약간 개방되고 사면이 무능산(武陵山)·비음산(飛音山)·용지봉(龍池峰 또는 용제봉 龍蹄峯) 등 해발고도 300∼600m의 산지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룬다. 용지봉에서 발원한 진례천(進禮川)은 용전, 신월을 지나 강변과 하평 옆을 흐르고 화포천은 안골, 무송, 초전을 지나 면계에서 진례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분지 내의 경지를 이용하여 쌀을 주로 경작하고 80여 개의 도예공방에서 분청도자기를 생산히먀 매년 10월말 경에 진례 도자기축제가 개최된다. 남부에 남해고속도로, 북부에 부산∼마산 국도가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재로는 김해 안봉환소장고문서(金海安鳳煥所藏古文書:경남문화재자료 279), 낙오정(樂吾亭), 팔성암지(八聖菴址), 삼충대비(三忠臺碑) 및 첨모재(瞻慕齋) 등이 있다.
<출처> 진례면 [進禮面, Jillye-myeon ] | 네이버 백과사전
[9] 덕암공원묘지(김해추모의공원)
김해시 주촌면 덕암리 산 137-3번지
[10] 쇠금산(=금음산=덕운봉, 350.8m)
※ 명동리 [明洞里, Myeongdong-ri]
〇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에 있는 리(里)이다.
〇 대부분의 지형이 평탄한 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마을이다. 마을 북쪽으로 낙동강의 작은 지류가 흘러들어오고 있다. 남쪽에는 비교적 고도가 낮은 산줄기가 뻗어 있다. 자연마을로는 강정자, 낙산, 금음 마을 등이 있다. 강정자 마을은 정자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낙산 마을은 마을 뒤에 산이 자리한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금음 마을은 금음산 아래 위치한다 하여 불리워진 이름이다
<출처> 명동리 [明洞里, Myeongdong-ri ] | 네이버 백과사전
※ 한림면(翰林面)
〇 경상남도 김해시 북쪽에 있는 면.
〇 면적 59.49㎢, 인구 1만 1166명(2005)이다. 12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은 생림면(生林面), 서쪽은 창원시대산면(大山面)과 진영읍·진례면(進禮面), 북쪽은 밀양시상남면(上南面)·하남읍, 남쪽은 북부동(北部洞)과 주촌면(酒村面)에 접한다.
1987년 1월 지역 변동 없이 이북면(二北面)에서 한림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서쪽 면계에 봉화산(烽火山)이 동서로 뻗어 있을 뿐 면의 대부분이 낙동강의 하안평야이다. 북쪽에 낙동강이 동류하고, 동쪽에는 화포강(花浦江)이 생림면과 면계를 이루며 북류한다. 경지가 많기 때문에 쌀·보리를 많이 생산할 뿐만 아니라 부산과 가까워 무·배추·참외·수박 등의 근교농업이 발달하였고 생산량도 많다. 그 밖에 연근과 감도 많이 생산하며, 양돈·양계업도 성하다. 면의 동부를 경전선(慶全線) 철도, 남부를 마산∼김해 간 국도가 통과하여 교통은 편리하며, 낙동강 하안에 명례나루가 있다.
문화재로는 김해 신천리(新泉里)의 이팝나무(천연기념물 185), 안곡리(安谷里) 삼층석탑(경남유형문화재 24), 김해 신천 망월석탑(望月石塔:경남문화재자료 262), 권형효자비(權衡孝子碑), 낙산재(洛山齋), 김득기묘(金得器墓) 등이 있다.〈안곡리 삼층석탑〉 안곡리 폐사지에 있는 석탑으로 기단부는 매몰되고 탑신은 많이 파괴되어 옥개석(屋蓋石) 3장과 탑신 l장으로 후대에 탑재(塔材)만을 세운 것이다. 3층탑으로 추정되며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현재 높이 2.12m이다.
<출처> 한림면 [翰林面, Hallim-myeon ] | 네이버 백과사전
[11] 낙원묘지0.9km / 신천마을0.6km 지점 갈림길
※ 신천리 [新川里, Sincheon-ri]
〇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에 있는 리(里)이다.
〇 대부분의 지형이 평탄한 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마을이다. 마을 북서쪽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으며, 북쪽에 고도가 낮은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신천, 점마, 탑골 마을 등이 있다. 신천 마을은 마을 앞으로 내가 흐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점마 마을은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탑골 마을은 옛날 암자가 있던 자리라 하여 불리워진 이름이다. <출처> 신천리 [新川里, Sincheon-ri ] | 네이버 백과사전
[12] 성원ENT(주)
◯ 회 사 명 : 성원이엔티(주) / SUNGWON ENT inc
◯ 사 업 장 : 경남 김해시 한림면 신천리 434-9
◯ 설 립 일 : 1995년 5월 8일
◯ 주요사업 : 비계구조물 해체업(철거면허) / 경비관련시설 및 신변보호 용역업 / 건설 폐기물 수집, 운반업, 건설 페기물 중간 처리업 / 사업장 배출 시설 계폐기물 수집, 사업장 폐기물 중간 처리업 / 재활용 폐기물 중간 처리업
◯ 상세소개 : 성원 ENT는 건설 폐기물을 이용한 다목적 재활용 산업으로 내실 있는 성장을 거듭해온 환경사업 분야의 전문기업이다. 김해시 한림면 소재 약 15,000평의 부지에 폭기수조 및 콘크랴샤를 이용한 건설 폐기물 재생산 시설을 설립하여 건설 폐기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시설을 갖춤은 물론 철거에서부터 수집, 운반, 중간처리까지 합리적인 종합적인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출처> 성원ENT 홈
http://www.sungwonent.com/
[13] 망천(낙원)고개
〇 망천고개(14번 국도 부산~마산) : 왕복 4차선 도로로 김해와 진영,창원을 연결하는 고개
〇 망천(望川) : 신천 동남쪽에 있는 마을(한국지명총람 권8, P 268)
〇 망자가 저승으로 가는 고개라고 소개(사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
〇 동리 앞에 내(川)가 있는데 그 내를 바라본다하여 망천마을이라고 한다.(국립지리원 지명유래)
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shingho&folder=39&list_id=11533504
※※※ 현재의 낙원고개는 진영방면으로 20m쯤 이동한 상태임
<출처> 국제신문
http://kboard.kookje.co.kr/?document_srl=27413&mid=mountain_iyagi
▣ 도깨비 ▣
〇 한국 전래 신격(神格)의 하나.
옛날에는 '독갑이' 또는 '귓것'으로도 불렸으며 한자로는 독각귀(獨脚鬼) 등으로 표현되었다. 독가비의 가비는 갑과 동의음이고 갑과 귀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어로 '독가비'라는 말은 1458년 〈월인석보 月印釋譜〉의 '돗가비니'에서 온 말이다. 현재 도깨비에 관한 다른 이름은 매우 많다. 전라도에서는 도채비·도체비·도치기, 다른 지역에서는 도까비·토재비·토째비·톡깨비·홀개비·홀깨비·도깨기·도째비·터깨비 등으로 부른다.
한자의 귀(鬼)를 도깨비로 알지만 도깨비와 귀신은 다르다. 귀신으로 취급하는 것은 주로 일본의 도깨비들이다. 도깨비는 나타나는 장소나 사는 곳에 따라 산도깨비·물도깨비·바다도깨비·수풀도깨비 등으로 분류한다. 환시·환각·환청과 같이 경험자의 심리적인 태도를 기준으로 분류하는 방법도 있는데 소리로 들리는 것은 환청(幻聽), 형체로 나타나는 것은 환시(幻視), 또는 환각(幻覺)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불완전하다. 불도깨비와 같이 이동이 심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격이 음흉하기에 동굴이나 오래된 폐가, 옛 성, 큰 고목 등에 살고 밤에 나와 활동한다고 한다. 어느 도깨비나 모두 초인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서 도깨비 방망이로 돈과 보물을 내놓기도 하고 황소를 지붕에 올리기도 한다. 2중적인 성격을 지니며, 심술궂기도 괴팍하기도 하여 사람이 하는 일을 해코지하거나 혼내주기도 한다. 그런데도 괴이한 신통력으로 못된 놈은 골탕먹이고 착한 사람은 도와주는 친근성도 보여준다. 이는 여느 귀신의 역할과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인간 앞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눈에 보이는 도깨비는 인간의 모습과 불덩어리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지라도 그 정체가 빗자루·절굿공이·도리깨 등으로 나타난다. 도깨비불은 혼불로도 불리는데, 이런 불은 민간신앙 중에서도 속신성이 강하다. 도깨비불이 동쪽으로 가면 풍년이 들고 서쪽으로 가면 흉년이 든다는 믿음이 정월 보름날 유풍으로 전해진다. 속설에 도깨비불은 사람이 죽으면 뼈에서 인이 나와 밤하늘에 떠도는 빛이라고도 한다. 씨름을 걸어오는 도깨비도 대개 분위기와 환경이 전형적이다.
이들은 대개 방망이를 가지고 다니거나 빗자루 등으로 변신하여 사람을 짐짓 속이고 골탕 먹인다. 술을 먹고 비틀거리며 오는 사람, 다리목, 사람의 통행이 드문 으슥한 곳, 오밤중 등이 도깨비가 출몰하는 조건들이다. 이들은 예로부터 그림이나 민담에 다양한 소재거리를 제공해왔다. 이와 같이 도깨비가 친근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장난꾸러기 같은 나쁜 모습 속에서도 왠지 멍청하고 잘 속아넘어가는 우둔함 등이 사람들에게는 재미있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쁜 이를 벌주고 가난하고 착한 이를 도와주는 착한점, 사람을 속이나 결국에는 그 자신이 속고 만다는 우둔함 등은 도깨비가 주는 친근감의 하나이다. 이 점은 도깨비가 여느 귀신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출처>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5d0135a
〇 김해 도깨비 해칭이(허깨비)귀신 전설
1) 큰벌다리 도깨비 이 다리에는 수직 도깨비가 있어, 화광을 낸다하여 큰불다리라고도 한다. 전국 도깨비 대회를 한다고 4백여년전의 송장 가로지기타령이 있다. 길이 18척, 너비 6자, 삼간석교로써 김해평야 전산과 쇠내사이에 있었다. 50년전 수리 조합 배수구 설치 때 제거되었다. 2) 왕릉 소 도깨비 아래 왕릉을 수직(守直)하는 도깨비로서 겨울 달 밝은 밤이면 늘 ‘엄무 엄무’하면서 사람에게 겁을 준다고 한다. 3) 후릉 어깨바람 도깨비 후릉에는 목 없는 어깨바람 수직 도깨비가 있어 겨울 어두운 밤이면 ‘엇쭈 엇쭈’하면서 사람에게 겁을 준다고 한다 4) 남산 목 맨 해칭이 남산에는 가을 달 밝은 밤이면 젊은 소복 단장한 여인이 소나무에 목을 매어 대롱대롱하여 대성통곡하며 사람들을 해롭게 한다고 한다 5) 봉황대 여우귀신 정월보름 밤이면 흰 여우가 나타나 남에서 북으로 가면, 동네 흉사가 있고, 북에서 남으로 가면 동네 길사가 있다고 하여, 흉사는 사람이 죽거나 화재를 말한다 6) 하반내 잉어 해칭이 여름 달 밝은 밤이면, 큰 잉어가 물을 따라 가는 것을 잡으러 가면 해를 당한다고 한다. 7) 가락궁터 수직 도깨비 땅귀신 ① 대정궁터 귀신 : 겨울 달 밝은 밤이면 소복한 할머니가 나와 ‘나와 살자’하면서 사람을 놀라게 한다고 한다
② 조리궁 땅귀신 : 섣달 그믐밤이면 우물 물도랑에서 형태는 보이지 않고 ‘너 잡아먹자’는 소리만 들려 사람을 겁나게 한다. 또, 이곳에 집을 지으면 패가망신한다고 한다 ③ 대안궁터 턱 떨어진 도깨비 : 음 2월 1일 밤이면 궁안천에서 나와 ‘물 조금 주소’한다. 물을 주면 턱이 없어 물을 흘러 보낸다. 이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④ 회현패총 강아지 귀신 : 달 밝은 밤이면 흰 강아지 귀신이 지키고 있어, 올라가면 사람을 해롭게 한다고 한다.
<출처> 김해문화원 / 김해의 설화
http://www.khcc.or.kr/bbs/bbsView.php?code=bbs_004&id=51
[14] 상리고개
김해시 한림면 상리와 낙원고개 및 삼계동으로 연결되는 2차선 고개.<출처>
http://kboard.kookje.co.kr/?document_srl=27413&mid=mountain_iyagi
※ 안곡리(安谷里) ①
〇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에 있는 리(里)이다.
대부분의 지형이 완만한 구릉성 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마을이다. 마을 동쪽에 산지가 분포하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는 지형이다. 자연마을로는 안골, 절골, 중리 마을 등이 있다. 안골 마을은 골짜기 안쪽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절골 마을은 절이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중리 마을은 안곡리에서 중심 되는 마을이라 하여 불리워진 이름이다.
<출처> 안곡리 [安谷里, Angok-ri ] | 네이버 백과사전
※ 안곡리(安谷里=안곡=안골) ②
본래 김해군 하북면의 지역으로서 안골 또는 안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리, 중리, 안덕을 병합하여 「안곡리」라 해서 이북면에 편입됨
<출처> 한국지명총랍 권 8, p 268
※ 삼계동(三溪洞)
〇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동
김해군 우부면(右部面)에 속한 지역으로, 삼거리 또는 삼계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두곡리(斗谷里)와 합하여 삼계리가 되었다. 1918년 김해면에 편입되었으며, 1931년 김해면이 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김해읍 삼계리가 되었다. 1947년 리가 동으로 바뀌어 김해읍 삼계동이 되었으며, 1981년 7월 김해읍이 시로 승격함에 따라 김해시 삼계동이 되었다. 삼계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북부동(北部洞) 관할하에 있다.
1996~2000년에 구산동을 포함하여 택지가 조성되었으며, 감분(甘粉)·상감분·골안·신명(新明)·화정(花亭)·소감분·두곡 등의 옛 마을, 나발고개·바래고개·안곡고개 등의 고개, 삼마골·점골 등의 골짜기, 두곡저수지·점골저수지 등의 저수지, 우복산 등이 있다. 우복산은 소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김해공원묘원납골당, 김해공원묘원, 1983년 8월에 준공된 삼계정수장, 김해수련장, 북부동사무소, 화정유적공원, 삼계시민체육공원, 삼계초등학교, 화정초등학교, 분성초등학교, 삼계중학교, 가야댜학교 등이 있다. 유적으로는 화정고분군, 두곡유적, 신명고인돌 등이 있는데, 고인돌에서는 간돌도끼가 출토되었다.
<출처> 삼계동 [三溪洞, Samgye-dong ] | 네이버 백과사전
[15] 나밭고개
〇 나밭고개 : 감분에서 생림면 나전리로 넘어가는 고개, 생림면의 입구가 됨,
〇 입구에「生林洞天」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동천(洞天)이란 산과 내가 둘려 있어 경치가 좋은 곳을 뜻하는데, 표지석 하단부에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생림 1993년 9월 25일」으로 표기되어 있다.
http://kboard.kookje.co.kr/?document_srl=27413&mid=mountain_iyagi
※ 감분 : 삼거리(삼계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
※ 나전리(羅田里)
〇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에 있는 리(里)이다.
〇 마을은 석룡산과 신어산의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다. 김해나전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자연마을로는 나발(나전, 남실), 송정, 안금(安琴), 상나전(上羅全), 하나전(下羅全) 등이 있다.
나전리는 나화낙지형(羅化落地形) 또는 선녀나대하강전형(仙女羅帶下降田形)의 명당이 있기 때문에 나밭, 남실 또는 나전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송정은 소나무 정자가 있어 생긴 이름이며 안금은 나전리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거문고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나전은 마을 뒤에 옥녀직금형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나전리 [羅田里, Najeon-ri ] | 네이버 백과사전
<출처> 김해시 생림면 홈
http://gimhae.go.kr/servlet/dongInfoUser?cmd=user_outline&dong_code=5350052
▣ 가락의 설화 ▣
김해를 터전으로 우리 고대사에 등장하는, 가락국은 고대 삼국(三國)과 마찬가지로 시조 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또 수로왕의 비(妃)인 허후(許后)의 신비한 고대 설화도 전하고 있다. 이 두 설화는 너무나 잘 알려진 유명한 설화로서 가락국과 관련된 설화를 대표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이 두 설화의 기사(記事)를 출전에 따라 다시 옮기는 것에 그친다면 아무런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하는 진부한 글에 머물고 말 것이다. 일국(一國)의 신화와 설화는 단순히 신비로운 이야기만을 전해 주는 것은 아니다. 신화와 설화에는 그것을 만들고 신봉하며 전승시킨 당시대인의 생활 감정, 세계관, 주변지역과의 힘의 역학관계, 풍속 등이 이제는 알아볼 수 없는 비문처럼 흐릿하고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로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그러나 신화와 설화는 기사를 쓴 사람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왜곡․축소․변형될 수도 있고, 자신도 모르는 체, 기사 작성자의 시대가 반영되므로 신화의 진실을 해독하는 것은 범인으로서는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이 글을 우리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람을 영위하며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였던, 고대 가락국의 강성함을 엿보게 하는 몇 개의 설화를 묶어 보고자 한다. 가락국의 실체에 대한 연구는 타(他)고대국가에 비해 너무나 미비하고 가야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또한 가야를 신화세계의 비현실적인 가야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또한 가야를 신화세계의 비현실적인 나라로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가락국의 강성함을 엿보게 하는 기록은 흥미롭다. 먼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하는 너무나 유명한 왕과 왕후의 설화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김해의 구간(九干)이 구지봉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몰려들자 하늘에서 흙을 파고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면 대왕(大王)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하늘의 소리에 따라 행하자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金盒)이 내려왔다. 금 합속에 황금알 6개가 있었으며, 12시간이 지난 이튿날 아침에 알이 모두 화(化)하여 어린아이가 되었다. 10여일이 지나서 장성하고 왕위(王位)에 오르게 되었으며,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 했다. 수로왕이 다스린 나라는 대 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국(伽倻國)이라고 했으며 곧 여섯 가야국 중의 하나이며, 다른 다섯 알에서 난 사람들은 각각 오(五)가야 왕이 되었다는 시조신화이다. 또 수로왕의 비(妃)인 허 후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 이름을 황옥이라고 했으며, 하늘의 뜻에 따라 가락국으로 와서 수로왕 비가 된다. 수로왕의 탄강설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술인 구지가가 포함되어 있으며 허 황후의 도래(到來)는 더 흥미롭다. 인도인 허 황후의 도래와 함께 우리나라에 불교가 고대 삼국보다 선행(先行)하여 김해지역에 전래되었으며, 그 사실은 여러 가지 유적과 유물(문양, 돌)에 의해 강력히 지지되고 있다. 다음은 수로왕의 현명함과 가락국의 강성함을 엿보게 하는 기록들로서 이를 통해 가락국이 신화가 아닌 역사 속의 실체 였음을 느낄 수 있다. 가락국기에 전하기를, 수로왕 3년 완하국, 함달왕의 아들 탈해가 가락국의 왕위를 뺏으려 가락에 오니 수로왕이 거절하고, 탈해와 도술(道術)로써 시합을 하는데, 그가 매면 왕은 독수리가 되고 그가 참새가 되면 왕은 새매로 화신(化身)하므로 탈해가 항복하고 수로(水露)를 따라 달아나니, 왕이 수군 500척을 내서 신라경계까지 내 쫓았다 한다. 삼국사기에는 탈해가 금관국 해변에 표착했으나 금관인들이 모두 괴상하다고 취하지 않으므로, 진한(辰韓) 아진포(阿珍浦)로 떠내려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는 삼국사기에 전하는 판관이 된 수로왕의 이야기이다. 신라의 파사(婆沙) 니사금(尼師今)은 영토내의 음즙벌국(音汁伐國) 안강(安康)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땅의 경계문제로 다투게 되자, 금관국 수로왕을 초빙하여 시비를 가리게 했다. 파사 니사금은 수로왕의 문제를 해결해 준데 대한 답례로 육부(六部)에 명하여 수로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게 했다. 그런데 육부중 한기부(韓祇部)만이 벼슬이 낮은 자로 접대한다. 이에 수로왕은 크게 노하여 탐하리(眈下里)에 명을 내려 한기부 인 주(主) 보제(保濟)를 죽이게 하고 홀로 돌아왔다. 이 때 노(奴) 탐하리는 도망을 하여 음주벌국주 타추간(陀鄒干)의 집에 의지하고 있었다. 신라왕은 사자를 보내어, 그 탐하리를 수색하였다. 타추가 보내주지 않으므로 신라왕은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음즙벌국을 정벌하니 그 주(主)는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셋째는 수로왕은 아들 열 분을 두었는데, 한 사람은 다음대의 임금이 되고 두 사람은 사성 허씨로 하였고, 일곱 사람은 보옥 선사와 함께 가야산에 들어가 도를 배우다가 방장산으로 옮겼다. 결운(結雲), 상원(上院)에 앉아 수년간 선(禪) 공부를 하였다. 보옥선사가 그들의 공부가 숙련함을 보고 팔월(八月) 가윗날 밤에 그들 칠인(七人)을 거느리고 달구경을 했다. 한 사람이 푸른 하늘 삼경밤 달은 밝고 밝아 사람의 마음에 비추어, 한 사람이 달은 중추에 가득 찼는데 바람 따라 팔월이 서늘해, 한 사람이 한 원(圓)을 그렸다가 지워 버리니 네 사람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보옥선사가 지팡이로써 일곱 아들을 쳐 흩어 버리고 갑자기 깔깔 웃어댔다. 이것이, 가락국시조 62년(A.D 105년)의 일이다. 칠불암(七佛庵)에 왕의 일곱 아들이 모두 도통했다는 말을 듣는 왕이 친히 행차하시어 보니 모두가 옛 모양과 같았다. 왕이 의심하니 일곱 아들이 모두 못가운데서 일곱 개의 황금색 몸 둥아리가 되어 나타났다. 왕이 신기하게 생각하여 수레를 멈추고 산 아래에 두 궁을 창건했다고 한다. 그리고, 수로왕의 왕자 7명이 이곳에서 좌선(坐禪), 득도(得道) 하였으므로 칠불사라고 했다고 전한다. (하동군 칠불사) 끝으로, 멸망한 가락국의 정신과 문화의 잔영(殘影)이 후대에 끊이지 않고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져 옴을 암시하는 수로왕에 얽힌 이적(異蹟)을 들고자 한다. 신라말기 충지잡간이라는 자(者)가 금관성(김해)을 쳐서 뺏어 성주장군이 되었다. 그의 부하 영규아간(英規阿干)이란 자가 외람되이 수로왕의 제향(祭享)을 빼앗아서 제사를 분수에 넘치게 함부로 행하였다가 제사 중 사당의 대들보가 까닭없이 부러져서 치어죽고 말았다. 이에 충지잡간은 진영(眞影, 화상)을 그려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서 경건히 받들었으나, 화상의 두 눈은 피눈물을 흘려 땅위에 고였으며, 그것이 거의 한말 가량 되었다. 이에 충지장군은 수로왕의 직계손 규림(圭林)을 불러서 그전대로 제사를 받들게 했다. 규림이 죽자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아버지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는데, 영규의 아들 준필이 또 미친 증세가 일어나 간원이 차려둔 제물을 치우고, 자기의 제물을 차려서 제사를 지내던 중 갑작스러운 병을 얻어 죽었다. 어느 날 수로왕을 모신 사당안에 도적들이 훔치려 들어갔다. 그러자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으며, 활에 살을 먹인 용사 한 사람이 사당 안으로부터 나와 7 ․ 8명을 쏘아 죽였다. 건안(建安) 4년 기묘(서기 199년)에 처음으로 사당을 세우고, 그때로부터 고려 문종의 즉위 31년인 대강(大康) 2년 병진(1076)에 이르기까지 대개 878년이나 되었는데, 재단을 쌓은 깨끗한 흙이 허물어지지 않았고, 심었던 좋은 나무도 시들어 죽지 않았다고 한다.
▣ 가락국(駕洛國) 시황후(始皇后) 허 황옥(許 黃玉) ▣
가락국(駕洛國) 시황후(始皇后) 허 황옥(許 黃玉) 시조대왕께서 나라를 세우신지 7년째 되는 가락기원 7년(서기48년)7월27일 9간들이 대왕께 조알(朝謁)을 하고 아뢰기를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 아직 좋은 배필을 구하시지 못하였으니 신들의 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처녀를 간택하여 왕비로 삼으소서 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왕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짐이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 이거니와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 인즉 경들은 염려마시오"하시었다. 그러한 어느날 대왕께서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작은 배와 말을 끌고 망산도에 가서 망을 보게 하시고 신귀간에게는 승점(승岾)으로 나아가 기다리도록 이르셨다. 때마침 가락국 앞 서남쪽 바다 위에 붉은 빛깔의 돚을 달고 검붉은 빛의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는 배 한척이 있었다.산도의 유천간이 곧 횃불로 신호를 올리자 그배는 미끄러지듯 내달아와 지금의 경남 창원군 웅동면 용원리에있는 부인당 으로 들어와 정박하였다. 일행중에는 공주 (公主) 한 분과 시종 20인이타고 있었다. 신귀간이 승점에서 이 광경을 보고 곧바로 대궐로 달려가 대왕께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매우 흡족히 여기시고 급히 9간들이 일행을 모시고 대궐로 모셔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9간들이 일행을 모시고 대궐로 들려 하였으나 공주께서는 엄숙히 말씀히시기를 "나와 그대들은 초면인데 어찌 경 솔히 따라가리오" 라고 하시었다. 천간이 돌아와 공주의 말씀을 아뢰이니 대왕께서도 옳게 여기시고 유사를 데리고 대궐에서 서남쪽으로 6십리쯤되는 산기슭에 만전(萬殿 * 장막으로친 임금의 임시거처)을 치고 몸소 영접을 하시게 되었다.공주께서는 별포나루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山神)에게 예물로 바쳤다. 공주를 시종해 온 신하와 노비는 20여명이 되었고 또한 공주께서 가져온 화려한 비단과 의상 그리고 금은주옥 패물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공주께서 점차 대왕이 계신곳으로 닥아가자 대왕께서는 친히 나아가 정중히 맞아서 함께 장막궁전으로 드시었다. 시종해온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대왕을 뵙고 곧 물러갔다.대왕게서는 유사에게 명하여 시종내외 에게는 방 하나씩 주게하고 그 이하 노비 들에게는 한 방에 5, 6명씩 들게하고는 난초로 만든 마실것과 혜초로 만든 술을주고 무늬와 채색이 감도는 자리에서 자게 하였다. 그 뿐 아니라 비단과 보화까지 주고는 군졸들로 하여금 보호하게 하였다.그리고 그제서야 대왕과 공주께서는 침전에 드시니 비로서 공주께서는 조용히 말문을 여신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皇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 의 일입니다.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황천상제(皇天上帝)를 뵈었는데 제의 말씀이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어 왕위에 오르게한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이제 나라를 다스림에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을 짓도록 하라 하시고는 도로 하늘로 올라 가셨단다. 꿈에서 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아직까지 귀에 생생하니 너는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거라} 라고 하셨답니다. 이리하여 저는 배를 터고 증조(蒸棗*신선이사는곳에 있는 좋은 과일)를 갖고 하늘로가서 반도(蟠桃*이 복숭아는 3천년만에 한번씩열린다고 전함)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이렇게 감히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대왕 또한 조용히 응답한다.나는 나면서부텨 자못 성스러워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알고 있엇다오.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산 공주가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은 매우 행복하오] 드디어 대왕과 공주는 혼인을 맺고함께 두밤을 지낸후 또 하루낮을 지냈다.그리고는 왕후가 타고온 배를 짐에게 짝을지어 왕후를.君王)이 된 수로왕(首露돌려보내며 15명의 뱃사공에게 각각 쌀 10석과 비단30필을주어 그노고를치하했다.8월1일 아침의 일이었다.대왕과 왕후는 그제서야 신하를좌우에거느리시고 수레를 타고 본궁으로 돌아와 두분이 힘을 합하여 정사(政事)를 펴게 됐다. 비(王妃)로 맞아 10명의 왕자(王子)와 2명의 공주(公主)를 두었다. 김공주 자매를 두고 189년 3월 1일에 이승을 떠난다. 백성은 땅이 꺼진 듯한 크나큰 슬픔 속에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 지내고 그녀가 백성을 사랑했던 은혜를 저 버리지 않고자 처음 배에서 내린 도두촌을 주포촌으로, 비단바지를 벗었던 높은 언덕을 비단고개로, 그리고 검붉은 깃발을 휘날렸던 바닷가를 기출변으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홀로된 왕은 밤마다 베개에 몸을 기대고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가 10년이 지난 199년 3월 23일에 승하했다. 백성들은 어버이를 여윗듯 울부짖어 슬픔은 왕후가 돌아갔을 때의 유가 아니었다. 마침내 궁궐 동북평지에 능을 마련하니 봉분의 높이는 1장이오 둘레는 3백보에 이르렀다. 후에 이곳에 수로묘 또는 수릉묘를 세우고 그 아들 거등왕으로부터 10대손이 구형왕까지 신위를 여기서 모시고 해마다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 15일에 성대하고도 정갈한 제전을 바치고 그 다음에도 끊이는 법이 없었다.공주 자매를 두고 189년 3월 1일에 이승을 떠난다. 백성은 땅이 꺼진 듯한 크나큰 슬픔 속에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 지내고 그녀가 백성을 사랑했던 은혜를 저 버리지 않고자 처음 배에서 내린 도두촌을 주포촌으로, 비단바지를 벗었던 높은 언덕을 비단고개로, 그리고 검붉은 깃발을 휘날렸던 바닷가를 기출변으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홀로된 왕은 밤마다 베개에 몸을 기대고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가 10년이 지난 199년 3월 23일에 승하했다. 백성들은 어버이를 여윗듯 울부짖어 슬픔은 왕후가 돌아갔을 때의 유가 아니었다. 마침내 궁궐 동북평지에 능을 마련하니 봉분의 높이는 1장이오 둘레는 3백보에 이르렀다. 후에 이곳에 수로묘 또는 수릉묘를 세우고 그 아들 거등왕으로부터 10대손이 구형왕까지 신위를 여기서 모시고 해마다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 15일에 성대하고도 정갈한 제전을 바치고 그 다음에도 끊이는 법이 없었다. 그후 10대(代) 구형왕(仇衡王)이 532년(법흥왕19) 신라에 항복하고 상등(上等)의 작위(爵位)와 가락(駕洛)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으며, 그의 아들 무력(武力)이 각간(角干)을 역임했다.
2011.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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