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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山海關)과 연경(燕京)의 비사(秘史)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자라면서 배우고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그러하지만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는가 ?
인간(人間)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 진실(眞實)로 바른 학문(學文)의 길을 가고, 이를 올바로 체득(體得)하여 깨우침을 얻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리라.
산해관(山海關)은 연경(燕京)으로 들어가는 요해(要害處)처이다. 조선(朝鮮)의 사신(使臣)들이 연행(燕行)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關問)이며 연경(燕京)을 지키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관성(關城)이다.
연경(燕京)과 산해관(山海關)에 대해서는, 수도 없이 거론(擧論)된 것이기에 사서(史書)의 많은 기록(記錄)은 생략(省略)하고 중요한 기록(記錄) 몇 개만 인용(引用)하고, 연경(燕京)과 산해관(山海關)의 숨은 비사(秘史)에 대하여 논(論)하기로 한다.
현재 산해관(山海關)은 발해(渤海)의 북쪽 바다에 임해 있으며, 북경(北京)은 서쪽에 위치(位置)하고 있다.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을 따라 그 위치(位置)하고 있는 지역(地域)의 거리를 보면 현재의 압록강(鴨綠江)에서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북경(北京)까지의 거리가 조금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게 들어 맞는다.
지금 북경(北京)이 명(明),청(淸)의 도읍지(都邑地)이며, 유도(幽都)요, 유주(幽州)라고 한다. 그리고 고(古) 지도(地圖)에도 어김없이 그렇게 표시되어 있다.
조선사(朝鮮史)를 바로 세우는데 있어서 명심(銘心)해야 할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이 가리키는 현지(現地)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상세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서(歷史書)나 지도(地圖)는 조작(造作) 할수 있어도 산천과 물길등 그 지형(地形) 지세(地勢)는 인간(人間)의 힘으로 조작(造作) 할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古代)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이 가리키는 곳은, 지금의 북경(北京)이 절대 유주(幽州) 지역(地域)이 될수 없는 것이다.
유주(幽州) 지역(地域)이 아니면 명(明), 청(淸)의 북경(北京)이 절대 될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연경(燕京)이 라고 불릴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의 북경(北京)은 사막(沙漠) 지역(地域)이 아니고, 대막(大漠)이라고 불릴 만한 큰 사막(사막)은, 더더욱 없는 지역(지역)이다.
더구나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서북(西北)으로 1000 리에 이른다고 하는데, 현재 북경유역(北京有域)을 보면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그리고 화(華)와 이(夷)의 경계(境界)를 나눈다고 하는데, 지금 북경유역(北京有域)이 어떻게 화(華)와 이(夷)의 경계(境界)를 나눌 수 있는 지역(地域)인가 ?
청(淸)나라의 유명한 문인(文人), 장문도(張問陶)의 노구(蘆溝)라는 시는 청(淸)의 북경(北京)을 적절하게 표현(表現)하고 있는 걸작이다.
이시(詩)는 조선(朝鮮)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의 연행록(燕行錄)과도 일치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산해관(山海關) 인근(隣近) 지역에는, 유주(幽州), 유도(幽都), 우북평(右北平), 노룡새 (盧龍塞),어양(漁陽),계주(계주), 상곡(上谷), 등 , 수 천년 역사서(歷史書)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지명(地名)들이 모두 존재(存在)하고 있다.
뜻있는 분들이 연경(燕京)을 찾기 위하여 심혈(心血)을 기울여 노력하고 있음도 알고 있다.
역사서(歷史書)와 연행록(燕行錄)을 통하여, 지형지세(地形地勢) 풍물(風物) 등 많은 설명이 기록(記錄) 되어 있는데도, 그 지역(地域)을 찾지 못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기 있는 것이다.
이제 그 내막(內幕)을 알아 보기로 한다.
연행록(燕行錄)
김정중(金正中)
河西南入太子河。北流入遼水。又北入於瀋陽九州所。孝廟在瀋陽時。作亭于此。日未西。抵瀋陽古奉天府。按其誌云。白頭山。一名不咸山。山上有大澤。號塔門湖。一日。仙女三人。自天而下。逍遙澤畔。忽靈鵲含一物如栗棗者。置小女懷中而去。女呑之有娠。生男子。甚奇偉。兒生五六年。其母忽升天。兒無所依泊。乘槎自澤中而下。至黑龍江北。是時。四姓部落。頻年相爭。一部落得此兒。以爲神。仍爲酋長。並呑三部落。遂霸滿州。滿州。卽寧古塔也。其後世得建州衛。又得瀋陽。名建州曰興京。名瀋陽曰盛京。謂興於此。盛於斯也。 (중략)
혼하는 서남으로 태자하(太子河)에 들어가고 태자하는 북으로 흘러서 요수(遼水)로 들어가고 더 북으로 흘러서 심양의 구주소(九州所)로 들어간다. 효종께서 심양에 계실 때에 누각을 지었던 곳이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심양에 닿으니 곧 옛 봉천부(奉天府)다. 그 지(誌)를 상고하니 이르기를,
“백두산(白頭山)은 일명 불함산(不咸山)이며, 산 위에 탑문호(塔門湖)라는 큰 못이 있다. 하루는 선녀 세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와 못 가에서 노는데, 신명스러운 까치가 밤ㆍ대추 같은 물건 하나를 물고 와서 소녀의 품안에 버리고 갔다. 소녀가 이것을 먹고 임신하여 매우 잘 생긴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가 난 지 5, 6년에 그 어머니가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니, 아이가 의지해 살 곳이 없으므로 떼[槎]를 타고 못에서부터 내려와 흑룡강(黑龍江) 북쪽에 이르렀다.
그때 네 성(姓)의 부락이 해마다 자주 서로 다투었는데, 한 부락이 이 아이를 얻자 신(神)으로 여겨서 추장을 삼았더니, 세 부락을 아울러 통치하고 드디어 만주를 제패하였다. 만주는 곧 영고탑(寧古塔)이다. 그 후세에 건주위(建州衛)를 얻고 또 심양을 얻어서, 건주를 흥경(興京)이라 하고 심양을 성경(盛京)이라 하니, 여기에서 흥하고 여기에서 성하였다는 뜻이다.” (중략)
저자(著者)가 산해관(山海關)으로 가는 도중, 심양(瀋陽)에 관한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효종(孝宗)의 지난 고사(古事)를 말하고 있다. 심양(瀋陽)이 옛 봉천부(奉天府)라고 한다.
그리고 봉천부지(奉天府誌)를 인용(引用)하여 백두산(白頭山)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선녀와 나뭇꾼과 비슷한 설화(說話)가 봉천부지(奉天府誌)에 실려 있다.
영고탑(寧古塔)은 다른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에도 그 위치(位置)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만주(滿洲)가 영고탑(寧古塔)이라고 한다.
영고탑(寧古塔)은 엣 숙신지지(肅愼地止)요, 청(淸)나라에서는 이곳을 만주(滿洲)라 하고 영고탑(寧古塔)이라고 기록(기록) 하고 있는 것이다. 혼동강(혼동강)이 흑룡강(흑룡강)이며, 동쪽으로는 두만강(豆滿江), 혼동강(混同江) 서쪽이 요수(遼水)라고 하는 기록(記錄)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건주(建州)가 흥경(興京)이고, 심양(瀋陽)이 성경(盛京)이다.
청사(淸史)를 역사서(歷史書)로 인정(認定)하지 않는다는 자(者)들이 있는데, 이것은, 침략의 무리들이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이 드러나기 때문에, 해괴한 논리(論理)를 펴는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고지도(古地圖)와 사서(史書)는 역사서(歷史書)로 인정하고, 진실을 담고 있는 역사서(歷史書)와 문집(文集)등은 인정(認定)하지 않는 다는 황당 무계한 논리(論理)가 역사학자(歷史學者)로 서의 도리(道理)이며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 것인가 ?
소위 대청광여도(大淸廣與圖)는 대표적인 왜곡(歪曲) 조작(造作)의 지도(地圖)이다.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증거(證據)를 대라면 수도 없이 그 증거(證據)를 공개 할수 있다.
글을 올리기 전에 문무(文武) 선생님의 올리신 글을 보다가 한국(韓國)의 현실(現實)을 바라보며 탄식(嘆息)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무 선생님께서 올리신 글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실적인 주옥 같은 글이기 때문이다.
백제(百濟)가 마지막으로 왕조(王朝)의 운명(運命)을 다한 곳이 부여(扶餘)의 사비성(泗沘城)이라고 하는데, 그 사비성(泗沘城)은 지금 중국 호남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가 있는 악양시(岳陽市)이다.
이곳에는 백강(白江)이라는 지명(地名)이 그대로 존재(存在)하고 있으며, 지방정부에서 거대한 성곽(城郭) 일부를 복원(復原)하여 그 위용(威容)을 자랑하고 있다.
악양시(岳陽市)내에는 고대(古代)의 릉(陵)이 자리잡고 있으며, 쓸쓸히 세월을 탄식하고 있다.
백강(白江)을 통하여 악양시(岳陽市) 내의 남쪽 호수 공원으로 들어가면, 중국과 일본의 친선(親善) 우호비(友好碑)가 공원내에 서 있다.
이러한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가 ?
다음 기회에 백제(百濟)의 부여(扶餘) 사비성(泗沘城)에 대하여 자세히 논하기로 하고 심양(瀋陽)으로 가기로 한다.
심양(瀋陽)에서 요택(遼澤)을 지나 광령(廣寧)으로 간다. 이 길은 조선(朝鮮)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공통적으로 지나는 길이다. 또 이 길을 지나면서 북쪽으로 멀리 눈 덮인 백두산(白頭山)이 보인다는 기록(記錄)도 있고, 백두산(白頭山)은 돌이 눈같이 희여서 백두산(白頭山)이라고 했다는 기록(記錄)도 있는데, 이는 모두 사실적인 기록이다.
실제로 이곳에는 북쪽으로 고산준령(高山峻嶺)을 두고 남쪽으로 흰 바위가 많은 산이 대단히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데, 위의 연행록(燕行錄) 기록(記錄)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心田稿[一]
自一板門以後。遙見點點山勢。出沒隱映於野色迷茫之際。毉巫閭支派也。遂橫亘千餘里。爲北方之鎭。一出遼野。風沙撲人。眯目噤口。殆不可堪。而此地尤甚。唐太宗征遼時。馬尾曳柴。攀援以過云。(중략)
일판문(一板門) 이후부터는 멀리 여기저기 산줄기들이 들빛이 아득한 어름에 아른거리는 것이 보이니 의무려(醫巫閭)의 지맥이다. 드디어, 1000여 리에 가로걸쳐 북쪽의 진(鎭)이 되어 있다. 한번 요동벌로 나오니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사람을 갈기어 눈은 어둡고 입은 벌리지를 못하여 거의 견딜수가 없는데, 이곳이 더욱 심하다. 당 태종이 요동을 정벌할 때 말꼬리에 섶을 끌리어 그것을 붙잡고 의지하여 지나갔다고 한다. (중략)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이런 곳에 있는 산이다. 지도(地圖)를 놓고, 한번 생각을 해보라. 지금 북경(北京)이 이러한 지형(地形) 지세(地勢)인가를 ?
잃어버린 역사(歷史)를 찾고자 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자기만 옳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고,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허실(虛實)을 가려내지 못하는 예를, 오늘 이 시간에도 수없이 보고 있으며, 추정(推定)과 가설(假說)이 진실(眞實)인 것처럼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다.
허(虛)와 실(實)을 가리지 못하면 역사(歷史)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燕途紀行[中]
午發。城北十里。堤缺成海。又從水中行二里。堤上行五里。始逢平陸。踰廣寧前峴。峴底有石碑。迺鴻臚少卿杜公神道。由廣寧宣化門。入宿于羅城內千摠家。門是羅城東門。城之周遭。亞於遼陽。人民盛居。內城則荒蕪。只雙塔兀然獨立于東門之外。又有黃大石獅一雙。雕刻精巧。制度奇雄。酷似晉朝銅駞。埋沒於草莽中。醫巫閭乃廣寧鎭岳。雄峙城北。以禦大漠。。 (중략)
오시에 떠났는데, 성 북쪽 10리나 둑이 무너져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또 물속으로 2리를 가고 둑 위로 5리를 가서 비로소 육지를 만났다. 광녕(廣寧) 앞 고개를 넘노라니 고개 밑에 비석이 있으니 이것은 곧 홍려 소경(鴻臚少卿) 두공(杜公)의 신도비(神道碑)였다. 광녕 선화문(宣化門)을 거쳐서 들어가 나성(羅城) 안의 천총의 집에서 잤다. 선화문은 곧 나성 동쪽 문이다.
성의 둘레는 요양성에 다음가는 것으로서, 인민이 많이 살았다. 그러나 내성(內城)은 황폐하고, 오직 쌍탑이 우뚝하게 동문(東門)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또 누르고 큰 석사자(石獅子) 한 쌍이 있는데, 조각이 정교(精巧)하며 제도가 기이하고 웅장해서 마치 진(晉) 나라 때의 동타(銅駝)와 같은데, 풀숲 속에 묻혀 있었다.
의무려(醫巫閭)는 곧 광녕(廣寧)인데, 진악(鎭岳)이 웅장하게 성 북쪽에 서 있어 이것으로 큰 사막을 막고 있었다. (중략)
의무려산(醫巫閭山) 인근에는 광령(廣寧)이 있다.우가장(우가장)에서 광령(廣寧)까지 200 여리가 그 유명한 요택(遼澤)이다. 이 요택(遼澤)은, 비가 조금만 와도 진흙 수렁이 되며, 저자(著者)도 허리까지 물에 빠지며 이 길을 지나간다고 그 괴로운 심경을 자세하게 기술 하고 있다.
이곳의 지세를 보면 실지로 요택(遼澤)을 통하지 않고는 다른 길로 빠져 나갈 길이 없다.
당(唐)나라의 이세민(李世民)이 수만은 병사를 얼려 죽이면서 도망을 갈만한 지역임에 틀림이 없다.
지금 북경(北京)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광령(廣寧) 지역(地域)을 보면, 이러한 기록(記錄)은 어림도 없는 말이다. 요택(遼澤) 200 리라고 할만한 지역(地域)이 없는 것은 물론,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서쪽으로 1000 리에 이르고, 북쪽으로 큰 사막(沙漠) 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지역(地域)이다.
광령(廣寧)에서 영원(寧遠)으로, 영원(寧遠)에서 산해관(山海關)으로 조선(朝鮮)의 사신(使臣)들은 발길을 옮긴다. 영원(寧遠)에서 산해관(山海關) 사이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을 북쪽에 두고, 광활한 벌판이며 큰 대야(大野)로 연결되는 지역(地域)이다.
연행록(燕行錄)에서 산해관(山海關)을 말하는 것을 보면, 지금 북경(北京)의 산해관(山海關)과 아주 유사하다. 동남으로는 명해(溟海)가 뒤흔들리고,……………………….
남쪽으로 푸른 바다가 있고,……………………….
성첩(城堞)이 바다어귀로 들어가 있고,…………………
명(明)나라때 조공(朝貢)을 가던 뱃길 등,………………….
그런데 과연 그러한 것인가 ?
燕行錄[金正中]
向山海關而來。溟海橫蕩東南。角山崛起西北。眞天府金湯之地也。關在山河間。綰轂其口。故人行無憑照公文。則不許其出入云。 (중략)
산해관을 향하여 왔는데, 동남에는 명해(溟海)가 가로질러 뒤흔들리고 서북에는 각산(角山)이 우뚝 솟았으니, 참으로 천부(天府), 금탕(金湯)의 땅이다. 관(關)은 산과 하(河)사이에 있어 그 어귀를 모두 얽어매었으므로, 사람의 통행에 빙조공문(憑照公文)이 없으면 그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중략)
이 귀절(句節)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지금도 이 지형지세(地形地勢)는,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산해관(山海關)은 호로 항구라고 한 말도 적절한 표현이다.
누구나 실제로 이곳에서 사방을 두루 돌아보면, 천부(天府) 금탕(金湯)의 땅이란 표현이 절로 나올 것이다.
영원위(寧遠衛)와 산해관(山海關)의 지형(地形) 지세(地勢)를 보면 천하(天下)의 요충지(要衝地)임에는 틀림이 없는 지역이다
산해관(山海關)을 중앙에 두고 동남으로 연결된 호수(湖水)는 말이 호수이지 그야말로 바다 그 자체이다.
동남을 향하여 남북으로 두개의 큰 호수(湖水)가 있고, 양쪽으로 200 여리에 걸쳐서 산맥(山脈)이 내리 뻗었고, 그 중앙으로 하(河)가 두개의 호수로 연결(連結)되어 흐르고 있다. 산해관(山海關)은 그 두개의 호수(湖水)를 가로막고,하(河)를 중앙(中央)에 두고, 양쪽의 거대한 산과 어귀를 모두 성곽(城郭)으로 차단하고 있었으니,어찌 장엄(莊嚴)하지 않겠는가 ?
거기에 10만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그 위용(威容)은 하늘을 찌르고, 천하(天下)를 덮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산해관(山海關) 이었다.
燕途紀行[中]
怪哉遼燕。俱是北地。而寒暖如是不同。天設一帶長城。以界華夷。風俗縱云各異。時候何其懸殊也。以海東比之。其暖猶倍可訝。山關子城。雖不頹廢。內外羅城。左右長城。幾盡圮毀。若過數年。必無其址 可惜
요(遼)와 연(燕)이 모두 북쪽 땅인데도, 춥고 따뜻한 것이 이와 같이 달랐다. 하늘이 한 줄기 장성을 만들어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경계를 갈랐으니, 풍속은 비록 각각 다르다지만, 기후조차도 어찌 이다지 현저하게 다른가?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그 따뜻함이 오히려 배나 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산관(山關)의 자성(子城)은 비록 허물어지지 않았으나, 안팎의 나성(羅城)과 좌우 장성(長城)은 거의 다 무너져서 만일 이대로 수년만 지난다면 반드시 그 터마저 없어지겠으니 아까운 일이다
(중략)
현재 산해관(山海關)의 장성(長城)은 그 터만 일부 남아 있다. 산해관(山海關) 자리도 성터가 일부 남아 있어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은 중국과 카자흐스탄과의 국경(國境)이 겹치고 있어서, 산해관(山海關) 자리를 쉽게 오고 갈 수가 없다.
이곳에 나타나는 기후(氣候)는, 전형적인 사막지대(沙漠地代)와 고산(高山)의 기후가 동시에 교차(較差)하는 지역(地域)이다
들에는 풀이 푸른데, 멀리 보이는 높은 산에는 눈이 하얗게 쌓인다.
요(遼)와 연(燕)은 조선(朝鮮)에서 볼 때 저자(著者)의 표현처럼 북쪽 땅이 아니 겠는가 ?
산해관(山海關)에서 조선(朝鮮)의 사신(使臣)들은 무령(撫寧)으로 향한다. 무령(撫寧)의 서남쪽에는 만길 높이의 문필봉(문필봉)이 보인다고 한다.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은 모두, 대동 소이하다.
연행록(燕行錄)에 나오는 문필봉(文筆峯)은 3000 미터에 이르는 산이다. 만길 높이라고 표현(表現)해도 손색이 없는 산이다.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무령(撫寧)에서 영평부(永平府)로 향한다.영평부(永平府)에서 동쪽으로는, 거대하고 웅장(雄壯)한 고성(古城)이 하나 있다.성(城)은 흙과 벽돌로 쌓은 성(城)인데, 현재도 성벽이 원형(原形)을 알아 볼수 있게 보존(保存) 되어 있다.
성곽(城郭)의 이름은 만주어(滿洲語)와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는데, 영우성(永右城)이라고 한다.
영평부(永平府)와 우북평(右北平)을 합친 말인가 ?
燕途紀行[中]
遵兔耳山底。歷蘆峰口。巳到背陰鋪攤飯。撫寧素稱山水鄕。山明水麗。蕭灑絶勝。午發過雙望堡。城已毀。堡東港口有石碑。刻盧龍界。(중략)
토이산(兎耳山) 밑을 따라 노봉구(蘆峰口)를 지나 사시에 배음포(背陰鋪)에 도착하여 먹고 낮잠을 잤다. 무령(撫寧)은 본래부터 산수(山水)가 좋은 고을이라고 이름이 났지만, 산명 수려(山明水麗)하여 깨끗하기가 특별히 뛰어났다.
오시에 떠나 쌍망보(雙望堡)를 지나노라니 성은 이미 무너졌다. 보(堡) 동쪽 항구(港口)에 비석이 있는데 ‘노룡계(盧龍界)’라 새겨져 있었다. (중략)
영평부(永平府)를 가기 전에 반드시 노봉구(蘆峰口)를 지난다. 이 노봉구(蘆峰口)는 현재 원으로 된 석축을 만들고, 바닥은 돌을 깔고, 주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고대(古代)의 유적지(遺跡地)임을 자랑하고 있다.
다만 노(蘆)자를 늙을 노(老)자로 바꾸어 표기(表記)하고 있을 뿐이다.
연행록(연행록)의 여정에 있어서 산해관(산해관)까지는 사막(사막)을 제외하면, 지금의 북경(北京)가는 길에 있는 산해관(山海關)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지명(地名)의 이동 조작(造作)으로 압록강(鴨綠江)을 넘어서면 구련성(九連城)도 있고, 봉황성(鳳凰城)도 있고 금주(錦州), 광령(廣寧)등, 지명(地名)을 치밀(緻密)하게 심어 놓지 않았는가 ?
연경(燕京)으로 가는 방향(方向)도 비슷하게 지형(地形)이 형성(形成)되어 있기는 하다. 지금의 북경(北京)이 명(明)나라 청(淸)나라 연경(燕京)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또, 진실된 조선사(朝鮮史)를 찾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입에 담을 수 없는 험담을 하며 비방하는 자(者)들이 있는데, 미몽(迷夢)의 꿈에서 깨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연행록(燕行錄)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노봉구(蘆峰口)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
영평부 (永平府), 금주(錦州), 무령(撫寧), 십삼산(十三山), 광령 (廣寧) 심양(瀋陽)우장(牛莊) 등은, 모두 연경(燕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영평부(永平府) 인근(隣近)지역은, 우북평(右北平), 노룡새(盧龍塞), 고죽성(孤竹城), 이제묘(夷薺廟) 수양산 (首陽山) 등, 수 천년 역사서(歷史書)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지명(地名)이 모두 위치하고 있다.
燕途紀行[中]
路傍有射虎石。此迺假稱。其眞則在城南八里灤河邊。李廣射虎碑並存。未及城數里。路左有石碑。刻以小學田。未詳其意。從永平東門入南門出。館于西關里客店。關里路傍。曾有吳三桂大殲北虜碑。今無矣。永平。是漢之右北平。唐之盧龍塞。人民繁盛。市廛雄富。北據長城。東連山關。西帶灤河。南有灤州。可謂畿東重藩也。(중략)
길가에 사호석(射虎石)이 있는데, 이것은 가칭(假稱)이고, 그 진짜는 성 남쪽 8리가 되는 난하(灤河) 가에 이광(李廣)의 사호비(射虎碑)와 함께 있다. 성까지 가기 전 수 리쯤 되는 곳 길 왼편에 비석이 있는데, ‘소학전(小學田)’이라고 새겼다. 그 뜻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영평동문(永平東門)으로 해서 들어갔다가 남문(南門)으로 나와서 서쪽 관리(關里) 객점에 유숙했다. 관리 길가에 일찍이 오삼계(吳三桂)의 ‘대섬북로비(大殲北虜碑)’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영평(永平)은 곧 한(漢)의 우북평(右北平)이요 당(唐)의 노룡새(盧龍塞)로서, 인민이 번성하고 시가가 웅장하다. 북쪽으로 장성(長城)을 의지했고, 동쪽으로 산관(山關)에 연했으며, 서쪽으로는 난하(灤河)를 끼고, 남쪽에는 난주(灤州)가 있으니, 참으로 경기(京畿) 동쪽의 중번(重藩)이라 하겠다. (중략)
현지 조사(調査)를 하면서 강한 의문(疑問)이 들었던 것은 , 연경(燕京)을 빨리 갈수 있는 지름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朝鮮)의 사신(使臣)들은 북쪽으로 먼 길을 돌아서 연경(燕京)으로 가는 것이었다.
조선(朝鮮)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무엇 때문에 빠른 지름길을 제쳐두고, 멀고 먼 길을 우회(迂廻)하여 연경(燕京)을 가야만 했는가 ?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봉황성(鳳凰城)을 지나고 요양(遼陽), 심양(瀋陽), 우장(牛莊), 광령(廣寧), 영원(寧遠), 금주(錦州), 산해관(山海關), 무령(撫寧), 영평부(영평부), 풍윤(豐潤), 옥전현(玉田縣), 별산점(鱉山店), 어양(漁陽) 석교를 건너 통주(通州)를 거쳐 연경(燕京)의 황성(皇城)에 들어가는 것이 연행록(燕行錄)의 여정이다.
지금 북경(北京)의 산해관(山海關)이 가짜임이 들어나는 것은,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의 여정을 보면 그대로 들어나게 된다.
산해관(山海關)에서 무령(撫寧)을 거쳐 노봉구(蘆峰口)를 지나 영평부(永平府)로 가게 되는데, 무령(撫寧), 노봉구(蘆峰口), 영평부(永平府)가 연경(燕京)의 북쪽, 북서, 북동쪽에 위치하게 된다.
연행록(燕行錄)의 여정(旅程)을 보면 모두 연경(燕京)의 북쪽을 돌아서, 산해관(山海關)까지 와서 산해관에(山海關)서 다시, 동쪽으로 무령(撫寧), 영평부(永平府)를 지나 풍윤현(豐潤縣)에 와서야, 서쪽으로 방향(方向)을 잡고 연경(燕京)으로 들어가게 된다.
본인도 현지 실사(實査)를 하지 못했으면, 도저히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연행록(燕行錄)에서 왜 이에 대한 설명(說明)이 없는지는 알수 없으나, 지금 같은 현실에서 이를 알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할 것이다.
연경(燕京)이 이러한 곳에 위치(位置)하고 있으니, 지명(地名)과 지도(地圖)가 모조리 뒤 바뀐 상태에서
연경(燕京)을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
반도에 조선(朝鮮)이 있었다면, 서북쪽으로, 서쪽으로, 서남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지금 북경(北京)이 연경(燕京)이라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모래 사막(沙漠)이 있어야 하고, 도중에 백두산(白頭山) 봉우리가 흰눈을 이고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의 시야에 들어와야 하며, 북경(北京) 남쪽에 대막(大漠) 같은 큰 사막(沙漠)이 있어야 한다.
산해관(山海關)은 양쪽에는 산이요, 동남으로 위와 아래는 거대한 호수(湖水)이며, 200 여리 사이를 하(河)로 연결(連結)되어 있다. 연행록(燕行錄)에서 산과 하의 어귀를 얽어 매었다고 한 기록(記錄)은 사실적으로 적절한 말이다. 지금 산해관(山海關)이 진짜 산해관(山海關)이라면, 양쪽에 산이 있어야 하고, 하(河)가 그사이로 흘러야 하는데, 천지(天地)가 개벽(開闢)을 한다 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연행록(燕行錄)의 거리와 방향(方向)이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보이니 지금 산해관(山海關)과 북경(北京)이 명(明)과 청(淸)의 북경(北京)과 연경(燕京)이라고 주장 한다면, 좋아 할 자는 누구이겠는가 ?
바로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여 이리 만든 자(者)들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로서 이땅 위에서 살고 있고, 또 후세(後世)들이 이땅 위에서 대대로 살아갈 나라가 아닌가 ?
무슨 무슨 대학(大學)을 내세우며 소장본(所藏本)이니 뭐니 하는데, 한마디로 가소로운 일이다.
학문(學文)이라는 것은 정의(正義)와 진실(眞實)을 담고 있을 때, 그 빛이 나는 것이며 소중하고 고귀(高貴)한 것이다.
도적 만도 못한 침략자들이,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자료를 들고 나와 대학(大學)을 들먹이며 과시하려 한다면, 과연 그 후에 무엇을 기대 할 것인가 ?
정의(正義)로운 진실(眞實) 앞에는, 가식과 거짓된 왜곡(歪曲)으로 꾸며진 천 만권의 책이 있다 하더라도, 한낱 휴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역사(歷史)를 통하여 깨달아야 할 것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지름길을 택하지 못하고, 먼 길을 우회(迂廻)하여 연행(燕行)길을 가야만 했던 것은, 다음 기록(記錄)을 보면 이해 할수 있을 것이다.
燕行紀卷一
六月
二十四日癸酉
明史劉大夏傳云。朝鮮貢道。故由鴉鶻關。至是請改由鴨綠江。大夏曰。鴨綠道徑。祖宗朝豈不知。顧紆廻數大鎭。此殆有微意。不可許。(중략)
《명사(明史)》 유대하전(劉大夏傳)에 이르기를,
조선의 공사가 다니는 길이 예전에는 아골관(鴉鶻關)을 경유(經由)하였는데, 이때에 고쳐 압록강을 경유하기를 청하자 대하(大夏)가 말하기를, ‘압록강을 경유하는 것이 빠른 것을 조종조에서 어찌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여러 대진(大鎭)을 우회(紆廻)하게 한것은 반드시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허가해서는 안 됩니다.”(중략)
按成化庚子奏請使韓明澮。以女眞邀劫。乞改貢道。事下兵部。將從之。職方郞中劉大夏曰。朝鮮貢道。自鴉鶻關。經遼陽,廣寧前屯。入山海。紆廻三四大鎭。若自鴨綠。直達前屯山海。取路太徑。恐貽他日憂。 (중략)
상고하여 보건데 경자에, 주청사 한명회가 여진이 길에서 기다리다 겁탈(劫奪)한다 하여 진공(進貢)하는 길을 고쳐 줄 것을 주청 하였다. 일이 병부(兵部)에 내려 장차 그 말대로 하려고 하는데, 직방 낭중(職方郞中) 유대하가 말하기를,
“조선의 공도(貢道)가 아골관에서 요양(遼陽), 광녕(廣寧), 전둔(前屯)을 경유하여 산해에
(山海)에 들어와, 3, 4대진(大鎭)을 우회하게 됩니다. 만약 압록(鴨綠)으로부터 바로 전둔, 산해에 도달하게 한다면 길이 너무 가까워서 훗날 근심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중략)
명(明)과 청(淸) 두 나라는 위의 기록(記錄)을 보면, 내심 속으로 조선(朝鮮)을 두려워 했던 것이 분명하다.
조선(朝鮮)이 반도에 있던 조그만 나라라면 경계(警戒)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반도 전체를 합쳐봐야 중국의 한 주만도 못하지 않는가 ?
거기에다 유주(幽州)를 차지하고 천하(天下)의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천하(天下)에 그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었겠는가 ?
연경(燕京) 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그리고 조선사(朝鮮史)를 바로 세우는데 있어서,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과 허실(虛失)을 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 것을 판단 하고, 진위(眞僞)를 가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와 중정(中正)의 도(道)가 반드시 필요 하리라.
진실(眞實)로 강하고 용감한 것은, 중정(中正)의 자세를 지니고, 세상에 천년(千年) 대계(大計)의 인간(人間)의 바른 길을 닦는 것이다.
성현(聖賢)의 도(道)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러한 길을 마음속 깊이 굳게 잡고 나가야 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時代)를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必要)한 것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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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 두 번이나 글을 보고 있는데, 보면 볼수록 가슴이 떨립니다. 십여년 전이 되었나? 그때 반도조선의 허구을 알리며, 대륙조선을 주장할 때, 별의별 욕설과 개인적 비난, 비하등등 밟히는 자존심을 지키려 무던히도 노력했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대륙조선의 증거와 고증을 찾기 위해 온 갖 원전을 뒤져가며 밤을 새우고, 새벽에 출근하던 그 때는 그래도 즐거웠지요. 지금 대륙조선을 이야기하면 웬만한 분들은 '한 번은 들어본 이야기' 정도로, 과거와 같은 욕설이나 비하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만주지방, 도요장군과 요하, 부여의 거연지방, 고구려의 서역지방지배, 백제의 장강유역, 신라의 秦韓(진한)설, 북해와 한해등등
많은 획기적 주장을 원전을 통해 밝혔는데, 이러한 것은 그동안 누구도 고증을 찾지 못했던 것들이었습니다. 많은 원전속에 있는 조선과 관계되는 몇 글자를 찾기 위해 노력한 시간을 보면, 아마도 그 시간을 다른 곳에 할애했다면 삶의 경제적 능력은 지금보다 휠 씬 나아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운명처럼 조선사에 얽혀들었지요.
"님"의 글을 보고 있노라니 조선사의 실체가 서서히 밝혀지는 것 같아, 정말 기쁨니다. 누구도 환영치 않는 조선사의 실체는 머지 않아 그 진실의 문을 활짝 열고 그 안의 보배로운 서기가 온 땅을 비칠 것만 같습니다. 힘들고, 외롭고, 고독한 세월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좋은 결실을 기대합니다.
님의 글을 너무나 잘 보았읍니다.
위의 글만으로, 산해관의 정확한 위치를 추정하기가 어렵습니다. 현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국경지대가 상당히 넓은 지역이고 호수들도 많이 있어서 정확히 어느곳인지 알기가 어렵군요. 혹시 한장의 지도나 구글 좌표로 찍어 주실 수는 없는지요...
그리고 연행사들이 갔던 루트도 궁금합니다. 의주는 어디이고, 심양은 어디이며, 조선의 한양은 어디인지 궁금하군요. 너무 성급한 질문인가요..?
한장의 지도로 표시되면 이해하기가 무척 쉬울 듯 합니다만....
'성(城)은 흙과 벽돌로 쌓은 성(城)인데, 현재도 성벽이 원형(原形)을 알아 볼수 있게 보존(保存) 되어 있다.' 라고 영우성(永右城)을 표현 하셨는데, 그 벽돌이 그냥 흙벽돌인지, 아니면 흙을 불에 구워서 많든 벽돌인지도 알고싶습니다. 연행록에 북경의 벽돌은 모두 불로 구은 벽돌로 그 제조방법까지 나와 있읍니다.
맑은 영혼님 朝鮮史에 뜻을 두고 계심을 감사 드립니다. 이번 글을 올림은, 연경을 밝히기에 앞서서, 한번 더 燕京에 대하여 이해를 돕고자 하는 취지에서 올린 것입니다. 다음편에서는 연경을 지도와 함께 밝힐 예정 입니다. 항상 관심을 주심에 감사 드리며, 두루 평안 하시고 건강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永右城은 淸대에 축조한 성이 아닙니다. 그 지역 사람들의 말과 성곽 형태, 성의 방향을 보면 고구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 가야 할 것입니다. 永右城 이란 글은, 城郭 앞에 돌로 비석을 세우고, 만주어와 한자로 돌에 새겨 놓은 것입니다. 그 들이 본래 성의 이름을 그대로 기록 할리가 만무 하지요. 이 성의 사방 2000 여리 인근 지역에는, 고성 유지가 수십개 이상 존재 합니다. 城은 구운 벽돌은 아니고, 흙벽돌과 토축을 다져서 축조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