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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31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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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백제 제31대 마지막 왕으로 641년부터 660년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무왕의 맏아들로서 태자 때부터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형제와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 (海東曾子)’로까지 칭송되었고, 또 아들의 이름을 효(孝: 뒤에 태자가 됨)로 지을 정도로 효도의 덕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유교사상은 당나라의 국학에 자제를 보내어 입학시키는 등 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부왕인 무왕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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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권의 강화 | |||
▶ 외교정책의 전환과 그 결과 | |||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고구려와 중국에 대하여 취해온 양면적인 외교노선을 수정하여 친고구려정책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정책변경에는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집권과 연개소문의 대중국 강경노선정책 및 신라와 당나라의 밀착관계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고구려와 연계성을 확립한 뒤 의자왕은 신라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압력을 가하였는데, 642년에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또 장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게 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성주 품석(品釋: 金春秋의 사위)과 그 처자를 죽이는 등 신라를 큰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을 공격하여 당나라와의 교통로를 차단하려고도 하였으며, 645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군을 동원한 틈을 타서 신라의 서쪽방면의 7성을 공취(攻取)하기도 하였다. 또,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는 당나라의 위협적인 권고에도 불구하고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쪽 경계의 30여 성을 공파(攻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욕적인 활동도 만년에 이르러 사치와 방종, 귀족들의 내부 분열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하였고, 더구나 궁중 안에서는 군대부인(郡大夫人)이 권세를 장악하고 어진 사람을 마구 죽이는 바람에 국가의 통치질서는 붕괴되고 말았다. 여기에 더하여 빈번한 신라와의 전쟁은, 거둔 승리 못지않게 국력을 피폐시키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고립된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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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의자왕과 삼천궁녀 이야기는 그 사실성에 대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래. 삼국사기가 신라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서이기에 백제 정복에 대한 정당성을 위해 의자왕을 극도로 비하시킨 점도 있을 것 같애. 그 진실은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