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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회 교수님의 "이사야서의 시온사랑"이란 서적을 읽었던 것에
대한 서평 자료를 올려봅니다.
<이사야서의 시온사상>
이사야서는 구약성경의 신학적 쟁점을 토의함에 있어 제외하기 힘든 것으로 18c말 J.C. Doederlein의 이사야서의 통일성과 저작권 문제에 대한 비평학적 접근을 계기로 이 책이 비평적 논쟁의 중심에 섰다고 하는 소극적 면과 이사야서가 지닌 폭 넓고 다양한 신학적 소재들에 의한 것이라는 적극적 면이 있는데, 실제, 많은 구약 신학자들은 신학적 입장과
경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사야가 뛰어난 신학자요 예언자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E.J. Young은 그가 전능하신 분에게서 나오는 말로 예언하고 도입문구를 반복해 그 예언이 분명 성취될 것임을 제시한 점을 통해 그를 "예언자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했고 또한 이사야는 사상과 교리에서도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으뜸의 구약 예언자로 평가되는데, W.Kaiser는 이사야서의 후반부를 "구약의 로마서","구약의 신약"으로 지칭하며 "그 자체로 하나의 진정한 구약학"임을 강조했다. 허바드는 이사야서의 중요한 자락마다 성경의 주요 주제들이 부각되므로 이사야서를 미국 유명 대통령이 조각된 '러시모어 산'에 비유했고 이사 야서의 주제로 하나님, 예언자 자신, 웃시야에서 스룹바벨에 이르는 다윗의 후손들과 고레스를 꼽았다. 더 적극적으로 이사야를 '예언자들의 왕'으로 지칭하는 Lean Wood는 이사야가 어느 예언자에도 비할 수 없는 영적, 지적능력을 갖췄고 메시아적 예언을 가장 많이 했다는 점을 든다. Hill-Walton은 이사야서가 히브리 문학의 가장 풍부함을 포함하며 하나님의 신뢰성과 주권적 능력을 대담하고 직설적으로 묘사했음을 지적했다. Th. C. Vriezen은 이사야를 종말론적 기대를 선포한 첫 설교자로 보며 그의 종말론적 사상은 남은자 사상과 임마누엘 예언에 나타난 메시야 사상으로 대표되며 특히 남은자 사상은 시온 주제와 밀접히 관련돼, 미래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을 예고하는 동기가 됨을 지적했고 그 주제로 '옛 출애굽과
새 출애굽', '이전 일과 새 일', '야훼의 종', '새 하늘과 새 땅' 등이 있다.
이사야서의 목적이 Dumbrell은 예루살렘에 대한 야훼의 관심과 애착을 보여 주는 것으로 바로 이것이 이사야서를 하나로 묶는 총괄적 주제이며 이사야서는 시온 주제로 시작과 끝을 맺는다고 했다. 전반부(1-39장)는 예루살렘 심판의 예견으로 시작해 그 도래의 확언으로 맺는다. 즉, 1장은 희생제사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기도마저 외면 당하는 몰락한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39장은 히스기야 왕과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포로의 위협을 선포하는 것으로 맺고 후반부(40-66장)는 포로 귀환의 예견에서 시작해 새 창조의 핵심이 될 새 예루살렘의 출현으로 맺는다. 즉 예루살렘은 이사야서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중심주제인 것이다. 또한 이사야서에는 시온이라는 어휘가 구약전체에서 볼 때 약1/3이 이사야서에 집중돼 있는데, 이는, 이사야서가 시온-예루살렘을 해석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적용해 시온주제의 신학적 의미를 그 만큼 확장하고 발전 시켰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이 그의 출생지이며 성장지로 여기서 일생 예언 사역을 해 왔다는 사실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곧, 그는 시온-예루살렘이란, 자신의 특수한 삶의자리에 충실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그의 관심주제들을 신학화하고 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그의 신학적 구도에 따라 이 연구의 목적은 시온 주제가 이사야 신학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해석되는지 밝히는 일로써 이사야 신학의 성격과 방향이 새 지평에서 조명될 수 있을것이고 시온주
제가 그의 타 주요 사상들과 어떻게 유기적 관련을 맺는지를 해명하는 일로써 시온주제가 단순히 이사야서에 다뤄지는 여러 소주제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사야 신학 전체를 엮어주는 골격의 역할을 함을 논증하려는 목적이 있으며 이 연구의 부수적 결과로 시온 주제가 이사야의 문학적, 신학적 통일성을 입증할 중요한 요소임이 밝혀질 것이다.
시온 신학의 연구는 폰 라드와 노트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도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폰라드는 소논문(1949)에서 사2:2-4, 60:1-22, 학2:6-9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위상에 관한 논의에서 이사야의 전체 사역이 거룩한 성읍인 시온, 즉 야훼의 택한 도성에 집중돼 있음을 강조하며 시온-이스라엘을 위한 종교적 정당성의 유일한 근거는 야훼께서 그것을 세우시고 다윗의 보좌를 위해 놀라운 언약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에 있음을 밝혔다. 이어 노트는 예루살렘과 초기 이스라엘 전승들과의 관계를 토의함으로써 예루살렘이 구약 신학의 중요 주제임을 부각시켰고 다윗이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한후 법궤를 옮긴 사건이 제의(祭儀)중심지 로서의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고조시킨 계기가 됐음을 강조한다. 폰 라드의 제자 롤랜드는 이 초기 연구를 보다 확장하고 발전시켜 구약의 전승들 중에서 '시온전승'을 특별히 구별해 내고 그것이 시온은 가나안 신화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진 차폰의 정상과 일치한다(시48:3-4), 낙원의 강이 그곳에서 발원하고 기혼 샘이 이것과 관련된다(시46:5, cf 창2:13, 왕상1: 45),
야훼가 거기서 혼돈의 물과 싸워 승리 하셨다(시46:3), 야훼가 거기서 이방의 왕들과 그들의
백성을 물리치고 승리하셨다(시46:7, 76:4, 6-7)의 4주제로 구성돼 있음을 밝혔으며 이것으로
이 연구에 대한 학자들을 자극해 많은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관점에서 다뤄지게 됐다. 최근
에는 대체로 '시온'을 비롯해 '예루살렘', '도성'과 같은 유사한 명칭과 표제 아래 연구가 이
뤄져 온 것이 특징으로 프릭은 '구약성서의 성읍'이란 논문(1970)에서 동의어들의 용례분석
을 통해 '성읍'의 특성을 파악코자 하여 아하로니의 이론을 바탕으로 고대 팔레스틴에서 예
루살렘을 포함한 도시의 형성에 중요하게 작용된 도시 방어를 포함한 전략적 고려, 적절한
용수 공급, 도시들을 잇는 주요간선 도로상에 위치할 것, 농산물 생산지에 인접할 것 등의
요소들을 열거했지만 시대들을 불문하고 도시 건설에 가장 으뜸으로 고려된 사항은 외부 칩
입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어여건 이었으므로 프릭은 구약에서 도시를 지칭하는 술
어들은 한결같이 요새화된 피난처의 성격을 강조함을 밝혔고 이런 사실은 예루살렘을 비롯
한 고대 도시들의 발굴을 통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Robert Wilson은
바벨탑 기사에서부터 포로 시기까지의 도성 개념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으로 검토해 예루
살렘과 시온의 의미를 해명코자 했다. 아울러 그는 이런 연구를 기초로 종말론적 성읍으로
서의 시온의 신학적 중요성을 논의한다. 위의 이런 연구들이 기본적으로 구약에 나타난 도
시용어의 어원적 연구와 도시의 발전사를 토대로 시온의 성읍 개념을 논구한 것이라면 한편
시온-예루살렘을 선택의 관점에서 파악하여 그것이 지닌 신학적 의미를 규명하고자 한 연
구들도 있다. J.J.M. Roberts는 통일 왕정기의 시온 신학의 성립을 집중적으로 논의하는데,
시온 전승의 기본적 내용은 야훼는 위대한 왕이시며, 그가 예루살렘을 자신의 거처로 택하
셨다는 것으로 요약하고 이 교리가 생겨난 시점을 다윗의 예루살렘으로의 법궤 이전과 성전
립 결정 이후로 미룰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는 여부스의 신화적 전승들이 다윗 때 있었던
영토확장 전쟁의 역사적 경험과 일부 접촉점이 있다고 보며, 시온전승이 지닌 세부적 양식
신화와 역사에 의한 상호 영향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그
B.C 701년 산헤립의 퇴각으로 예루살렘이 구원받은 사건이 시온신학을 보다 강화 했을 것
로 믿는다. Moshe Wenfeld는 예루살렘이 중앙 성전 도시로 선택돼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
조가 수립되고 고정된 종교질서가 확립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주장하고 이스라엘이 부족
지도자의 지배에서 벗어나 왕의 통치를 받게되고, 더 이상 이동 성소가 아닌 고정된 성소를
갖게 됨으로 왕궁과 성전 도시 예루살렘의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 음을 밝힌다. Eiler는 신
학적 상징으로의 시온의 의미에 주목하고 이를 거룩한 전쟁과 신현 현 주제의 발전으로 해
석코자 했다. 그는 이 같은 주제들이 다윗에 의해 법궤와 함께 시온 으로 이전되고 야훼 제
의의 신학적 기초가 된 것으로 이해하고 야훼의 거룩한 산이자 법궤 의 안치소인 시온이 야
훼의 우주적 왕권을 지상에 구현하는 중심지가 됐음을 지적한다. 한편 Ollenburger는 시온
전승이 지닌 신학적 특징의 핵심 요소를 고찰했다. 특히 시온상징 주의와 야훼 왕권이 중요
성에 관심을 두어 그는 예루살렘 제의 전승의 시온 상징주의가 근본적으로 시온에 등극한
왕 야훼와 관련돼 있음을 밝혔다. 그는 이런 고찰을 통해 야훼의 왕권사상에는 창조자 및
방어자의 야훼 개념이 함축돼 있음을 규명해 시온이 궁극적으로 안전과 피난처를 상징하게
된다고 결론지었다.
근래에 신학일반에 대한 여성학적 측면에서의 관심과 접근이 활발히 이뤄져, 시온이 지닌
여성적 표상에 주목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Fitgerald는 구약에서 성읍과 공동체에 대한
은유로 자주 사용되는 '처녀'와 '딸'의 용례를 중심적으로 검토하여 가나안 지역에서 수도는
그 도시의 수호신과 결혼한 여신으로 간주됐음을 밝히고, 이 때문에 수도에는 '딸', '처녀' 라
는 칭호가 붙게 됐다고 본다. 이 칭호는 또한 예루살렘에 관해 사용되면서, 시온에도 적용됐
음을 지적한다. 여류 신학자 Galambush는 에스겔서에 사용된 예루살렘에 대한 비유적 표현
인 야훼의 아내 표상이 특히 아내의 성적 부정에 주목하여 묘사됨을 밝히고, 이것이 예루살
렘 성전의 부패에 관한 에스겔의 특별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Turner는 그의
논문(1992)에서 구약의 예언서와 애가서에 나타난 예루살렘 또는 이스라엘을 의인화 하기
위해 사용된 처녀, 딸, 처녀 딸과 같은 용어들의 용례를 고찰하여 이를 통해 시온의 여성적
상징이 대체로 비탄과 고난의 주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밝힌다.
또한 최근 시온의 신학적인 의미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
대표적 학자 Gowan은 시온을 중심 주제로 삼고 이스라엘이 종말론적 전승신학을 검토해
나간다. 특히 8c의 예언자들이 미래의 시온을 그들 예언의 중심 주제로 삼은 사실을 중시한
다. Gaines는 B.C 6c에서 A.D 1c사이의 구약 정경과 외경 외에 각종 문헌에 나타난 예루살
렘에 관한 구절들을 분석하고 예루살렘의 종말론적 성격을 밝힘에 있어서 종말론적 예루살
렘의 표상이 현실적 예루살렘 도성의 상실에 대한 반응, 유대인들의 그릇된 제의 관행에 대
한 비판, 기독교 복음 전파를 위한 변증의 도구, 신자들의 의로운 행위를 유발시키는 수단
의 4가지 기능을 가진다고 보았다.
위에서 언급한 이런 연구들은 시온이 지닌 신학적인 의미를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하고 해
명하여 시온 주제의 신학적 중요성을 심화시키고 나아가 시온에 대한 해석의 지평을 확장
시켰다는 데서 그 의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서를 연구 대상으로 할 때 중요한 것은 이사야서의 저작권과 통일성에 대한 연구자
의 관점일 것이다. 이런 이사야서의 통일성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A.D 1160년
Ibn Ezra가 이사야 40-66장의 이사야 저작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A.D 2c경의 유대인 주석가 이븐 게카틸라가 이미 이사야 후반부의 장들이 제2
성전 시대에 기록됐다고 주장한 뒤 되덜라인이 1775년에 펴낸 주석서에서 이사야서의 복수
저작설을 보다 체계적으로 드러내 이 문제가 비평적 학자들 사이에 폭 넓게 쟁점화 되기 시
작했고 이어 1892년 Duhm은 이사야서가 시대를 달리하는 3사람의 저자(제1,2,3이사야)에 의
해 기록된 것을 하나로 묶은 복합적 작품이라고 결론졌다. 현재 그의 이론은 대다수 비평가
들에게 지배적 학설로 수용되고 있지만 이런 주장은 많은 점들이 이사야 자체 증거와 상치
돼 여전히 가설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근래에 비평적 학자들 간에 이사야의 통일
성에 대한 종래 입장을 교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이는 즉, 이사야의 통일성 부인을 전제
로 한 지금까지의 분석적이고 통시적 연구 방법이 노출한 문제점과 모순을 극복을 위해 종
합적이고 공시적인 방법에 근거해 이사야서를 하나의 통일된 경전으로 수용하려는 시도이
다. 이사야서의 단일 저작권과 통일성에 대한 복음주의 학자들의 입장은 확고하다. Young
은 이사야가 이 책 전체의 저자로, 자신이 메시지를 수집하고 현재의 형태로 배열했음을 강
조하고 Archer역시 비평적 학설의 문제점과 모순을 체계적으로 나열하고 반박해 이사야의
저작권을 입증하며 볼프는 사1-39장, 40-66장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들이 존재함을 인정 하
면서도 제2,3이사야의 존재를 부정한다. 오히려 이것을 '디모데 전,후서' 처럼 '이사야 전, 후
서'라고 부른다면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두 본문들이 동일한 예언자의 저작임을 확
신한다. Lasol 또한 이사야가 이 책 전체를 예언한 중심인물 이라는데 견해를 같이하고 이
를 배격할 근거는 충분치 않으므로 이사야의 단일 저작권을 확신했다. 이런 이사야서의 통
일성에 대한 관심은 이 책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일관된 주제와 동기를 찾으려는 연구자
들에 의해 계속되어지며 Turner는 이사야서에 일관되는 야훼의 왕권, 거룩함, 다윗의 계보,
시온에 대한 언급등이 이 책 전체의 공통된 신학적 방향을 결정짓는 구성요소임을 강조한다
비교적 최근의 연구로는 Hill이 1993년 논문에서 이사야서의 통일성을 변증하는 시도로서
이 책에 사용된 중요한 신학적 주제인 출애굽 동기를 검토한 후, 이것이 이사야서의 최종적
인 정경 형성과정에서 통일성을 부여하는 중요요소로 작용했음을 밝혀냈다.
우선 예루살렘은 시대상황에 따라 그 역할이 조금씩 바뀌기는 했지만 독특한 지위와 의미
를 변함없이 지켜오고 있는 예루살렘은 지정학적 측면에서의 중요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
요한 것은 종교적 측면으로 이 종교적 측면의 중요성은 예루살렘이 구약성경에서 중심주제
로 다뤄지고 있음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또한 '시온'이라는 주제가 구약 신학의 핵심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새롭게 확인되면서
많은 연구 결과들이 기본적으로 학문적 논구의 연장선상에서 시온 해석의 지평을 확대하는
일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도되었는데, 우선 이 연구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지명의
기원과 의미를 밝히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시온이란 어원은 히브리어, 아랍어, 아람어 같은
셈족어와 엘람어, 후리어 같은 비셈족어로부터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히브리어 어근으
로는 '메마른 땅, 황무지'의 뜻과 이에 상응하는 시리아어 동사인 shy(건조하다, 갈증나다)로
여기서 시온을 나타내는 시리아어 sehyon이 나왔다고 본다. 반면 시온이란 어휘가 구약성
경에서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는 전혀 확증되지 않으며 그 밖에 가장 큰 전통적 이론
은 시온을 아랍어 어근 syn(보호하다)과 관련시켜 '요새, 성채'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이것은 구약의 많은 구절들, 특히 '시온산성'(삼하 5:7=대상11:5)에 나타난 시온의 용례와 부합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구약성경은 이 단어의 유래를 암시하는 어떤 기원론적 이야
기도 전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밖의 자료들도 시온의 유래를 규명할 단서를 제공치
않아 시온은 그 단어의 본의미가 무엇이건 이스라엘 종교에서 처음부터 하나의 지명으로서
상징적 지위를 확보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예루살렘'이란 명칭은 매우 고대로부터
알려져 있었음이 밝혀져 B.C 19-18c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집트의 '저주문서'(Execration Te
xt)에는 예루살렘이 가나안의 도시국가 명단 가운데 우루살림마, 루살리뭄으로 표기돼 나타
나며 이 이름은 B.C 14c경의 아마르나 문서에서 우루살림으로 나타난다. 이 문서에는 당시
예루살렘의 통치자겸 이집트의 봉신이었던 압디히바가 이집트의 적들의 격퇴를 위한 도움
요청의 편지와 세펠라에 위치한 한 성읍의 통치자인 슈와르다타가 쓴 편지인데, 여기에는
하비루의 칩입으로 인한 위급한 상황에서 그와 압디히바 만이 항쟁하고 있음을 이집트 군주
에게 보내는 것으로 이를 보면 B.C 14c의 예루살렘이 얼마나 중요 요충지였는가를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은 종전까지 셈족어 'Uru'(도성)와 'Salim'(아모리인들의신명)의 합성어인
'urusalim'에서 나온 말로써 '살림의 성읍'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됐지만 히브리어로 '예루살
라임'(yerushalayim)으로 표기하고, 아람어로는 '예루살렘'(yerushalem)으로 표기되는 이 명
칭이 'yru'(세우다)와 'slm'(신의이름)의 합성어로 '살렘 신의 기초'를 뜻한다는 것이 보다 설
득력을 갖게 되었다. '살렘'이 신의 이름이었다는 것은 가나안과 북부 셈족어 계통의 여타
자료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고 Ugarit 문서에는 최고신 '엘'에게 쌍둥이 아들 '사하르'(shr)와
'살렘'(slm)이 있었는데, 새벽의 샛별을 '사하르'라 칭하고 저녁의 샛별은 '살렘'으로 칭한 것
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이전시대 에 우가릿 지역에서 숭배된 천체 신들이었
기에 예루살렘이란 지명은 어원학적으로 볼 때 이곳이 본래 가나안신 살렘의 숭배지였고 최
소한 다윗의 정복 때 까지도 예루살렘에 살렘 제의가 존손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살렘을 신의 호칭으로 사용하거나 간주한 사례는 전혀 발견되지 않으므로 이
들 명칭은 이스라엘이 고대 가나안인들에게서 물려받은 명칭들로서 예루살렘은 지명 이상의
의미는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시온과 예루살렘은 성경에서 자주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엄격히 말하면 서로간의 차이
가 있다. 우선 지리적인 면에서 보면 시온과 예루살렘은 본래 구별된 지명으로 시온은 보다
협의의 용어로 남쪽 언덕의 요새화된 성읍을 가리키며 후에는 '다윗성'과 동일시 된 반면 예
루살렘은 시온 산성을 포함해 그 인근 지역 전체를 포괄하는 광의의 지명이었다. 기능적인
면에서 보면 시온은 보다 신성한 지역, 성전과 제의의 관련된 성스러운 지역이나 새 시대에
도래할 종말론적 하나님의 도성을 지시하는 종교적 측면에 사용하는 반면, 예루살렘은 기본
적으로 행정 및 정치와 관련된 수도로서의 측면을 지시할 때 주로 사용된다.
다음으로 시온 주제의 기원을 보면, 아직 이에 대한 학자들간의 합의점은 없지만 지금껏
제안된 잠정적 결론으로 첫째, 여부스 기원설은 시온 주제가 예루살렘을 정복시 이미 여부
스인 사회에 유포됐던 전승을 물려받은 것이라는 입장으로, 성경적 증거보다는 가설적 전제
에 의존해 입증 불가능한 주장이라 비판받으며 이스라엘 신학의 고유성과 독창성을 간과하
고 여부스의 신앙 전통을 과대 평가한다는 논리적 결함을 지적받으며 이 가설이 출발부터
이교적 이스라엘 신학의 고유성과 독창성을 배제하거나 과소 평가했다는 점으로 이 이론이
시온 주제의 기원을 설명하려면 선택과 계약이라는 야훼 신앙의 독특한 배경을 중시할 필요
가 있다.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중 헤이즈는 야훼의 특별한 선택에 관한 다윗 전승은 여부스
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전승들을 흡수했다고 주장하며 법궤와 성전에 의해 상징화된 야훼의
시온 임재에 기초한 시온의 선택에 대한 전승도 시온의 신적 보호를 받는 거룩한 곳으로 생
각한 이스라엘 이전의 전통적 사고와 결합됐다고 보는데, 시46:4의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
막의 성소"라는 표현은 예루살렘이 원래 이스라엘 이전에 이곳에서 숭배된 신 '엘리욘'의
성읍이었다는 사실에 유래했다고 보고, 시48:2에서 시온을 가리켜"북방에 있는 산"으로 묘사
하는 것 역시 '차폰'이 Ugarit 문헌에서 '차폰'은 '바알의 산'으로도 지칭되며 '차폰' 산이 위
치상 해안 근처에 자리 잡은것도 시48:7에서 다시스의 배의 파선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이
유를 설명해 줌으로 그는 이렇게 시온 시편에는 이스라엘 이전의 자료가 시온에 대한 야훼
신앙과 혼합되어 나타나므로 야훼께서 예루살렘을 자신의 처소로 택하셨다는 시온 전승이
이스라엘 이전의 여부스 전승들에 그 뿌리를 두고 확장된 것으로 믿는다. Eiler역시 같은 맥
락에서 창14:17-24에 나타난 가나안의 '엘 엘리욘' 전승이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여부스인들
의 제의를 통해 이스라엘 전승에 영향을 준 것으로 믿는다. 또 예루살렘이 여부스족 주민
들과 다윗 통치하에서 예루살렘에 정착한 이스라엘인들 및 유대 지배층이 점진적으로 동화
되어 갔을 것으로 보는데, 이는 다윗이 여부스 주민들에 대해 헤렘을 시행 하거나 다윗의
점령이후 여부스 주민들이 그에게 항거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다윗 이전의
여부스 최고신 엘, 엘리욘 칭호와 그 신과 결합된 신화적 표상들이 야훼의 우주적 권능을
묘사하는데 사용됐을 것으로 파악한다. 둘째, 다윗-솔로몬설은 타 기원론들 중 가장 성경적
증거가 탄탄하고 시온 주제의 유래를 다윗-솔로몬 시대의 역사적 신학적 정황과 설득력 있
게 조화 시킨다는 점에서 폭 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는 시온 주제가 다윗-솔로몬 왕실
에서 유래됐다는 설로 대표적 학자인 로버츠는 여부스 기원설이 입증되지 않았고 입증될 수
도 없는 전제들에 근거한 것이라는 비판에서 출발해 롤랜드가 제시한 시온 주제의 4가지 요
소들을 분석하면서 그것들이 모두 여부스 전통과 무관한 것임을 밝힌다. 우선 시온을 높은
산으로 묘사한 것이 엘의 거처에 대한 가나안의 신화론적 표현을 차용했다는 주장에 대해,
이것이 엘의 산과 예루살렘 언덕이 여부스 성읍은 그 지역에서 가장 낮은 언덕에 세워 졌다
는 것과 예루살렘에는 강이없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무관한 것임을 지적했고 일단 여부스
인들이 엘 제의를 예루살렘으로 이식했을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여기에
중대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즉, 여부스인들은 예루살렘이 위치한 언덕을 시온 산으로
불렀다는 것으로, 시온은 처음부터 신화론적인 명칭이 아니고 예루살렘 언덕을 가리키는 실
명인 것이다. 게다가 시48:2-3은 시온 산을 엘의 산과 동일시 하지 않고 바알의 산인 차폰
과 동일시한다. 가나안 문헌들에도 엘과 차폰을 관련시킨 직접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데,
여기서 그는 성경 본문을 가나안 자료를 입증하는 증거로 마구 인용하거나 가나안 문헌자체
의 신빙성을 과신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또 삼하5:6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불가침 성에 관한
여부스인들의 신념이 제의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외부로 부터 접근과 공격이 어려
운 시온 산 특유의 지형적 요인에 근거한 여부스인들의 자신감의 피력으로 이해해 시온전승
이 야훼를 엘과 엘리욘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다윗의 정복자들에 의해 자극받았을 것으로
본다. 당시 그 지역 최강국이던 다윗 제국의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모종의 신학적인 정당화
가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은 봉신국들로 하여금 야훼께서 최고의 경의를
바치게 하기 위해 이방국들에게 익숙한 엘과 바알의 신화적 특성과 기능을 야훼께서 적용
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과 다윗-솔로몬 시대야말로 시온 전승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 예루살
렘을 야훼의 거처로 미화하기에 가장 합리적 배경을 제공한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치·
종교적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법궤를 이전할 때 이를 위한 어떤 정당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예루살렘이 다윗 치하에서 새 종교적 중요성을 정당화 할 만한 전통이 없었
다는 점인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어진 것이 야훼께서 다윗을 그의 왕으로 택하신 것
같이 시온 산을 그의 거처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승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 었으
며, 이렇게 해서 시온 선택의 전승은 늦어도 솔로몬때는 고정된 틀을 갖추게 됐다는 것이
다. 이에 덧붙여 예루살렘에 대해 모반을 계획하는 적 왕들의 행동과 그들의 사악한 음모
에 대응하는 야훼의 모습은 이 주제의 기원을 다윗-솔로몬 때로 잡을때 가장 잘 이해 될수
있다고 했다. 셋째, 이사야 기원설은 시온 주제가 이사야에게서 유래한다는 설로 시온주제
가 이사야의 신학 에서 새롭게 강조되고 부각된 역사적 동기와 배경을 잘 설명해 준다는 점
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시온 주제와 이사야의 관련을 지나치게 강조해 이사야 이전 시
대와의 역사적 관련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점은 논리적 독단이라 할 수 있어 성경의 자료를
그릇되게 적용하고 시온 주제의 신학전통을 부정하여 이사야 이전과 역사적 단절을 초래 했
다는 비판을 받는다. 클레멘츠가 이 견해에 대표적 위치에 서 있는데, 그 역시 가나안-여부
스 기원설을 반대하는 로버츠와 의견을 같이해 예루살렘 주민들이 하나님이 전쟁때 그들을
보호해 주시고 평화와 번영으로 그들을 축복해 주시리라 믿는 것은 고대 근동의 제의 전승
들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기본적 요소임을 지적하는 데, 예루살렘 역시 예외는 아니었
다. 그러므로 그것이 반역의 세력 및 원시적 인물의 혼돈과 연계된 것이 그렇게 특이한 일
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온 주제의 발생에 대해 견해를 달리해 시온전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불가침의 교리를 701년의 사건 해석을 위해 특별히 채용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예루살렘과 관련된 불가침의 교리는 701년 일어난 산헤립의
퇴각사건에서 비롯됐으므로 예루살렘의 불가침의 교리는 이스라엘이 경험한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해석하기 위해 생겨났고 이것은 히스기야와 산헤립의 대결에 가장 직접적으로 적
용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사야서의 시온 언급과 왕하 18:17-19:37에 기록된 담론의
기자들이 히스기야와 산헤립의 대치 사건에 대한 그들 자신의 관점에서 이 전승을 끌어낸
것으로 단정한다. 이에 따라 클레멘츠는 이 교리가 이사야 이전에 존재했다는 주장을 거부
하고 시온의 불가침성에 대한 신념이 산헤립의 파괴로부터 예루살렘이 구출받은 사실에 나
타난 신적 섭리를 일반화한 것이라는 신념을 확고히 하므로 '시온전승'은 이사야의 사역의
산물이라 결론 짓는다.
시온 신학이 구약성경의 주요 주제라는 사실은 이것이 특히 시편과 예언서에 중히 다뤄지
고 있다는 데서 드러난다. 시편에서 특히 46,48,76편이 다윗과 그의 집의 선택과 같은 여타
예루살렘 주제와 관련없이 순수히 시온 주제의 핵심교리를 보여준다는 것 때문에 관심을
끌고 시온의 불가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시온은 하나님의 성읍이며 그의 거
처이기 때문에 안전을 보장받고(시46:6-8)이방원수들의 공격도 막아주시며 우주와 세상의 혼
돈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야훼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시9:12, 53:6, 48:3, 125:1)으로 적극적
면에서 시온은 하나님의 도성인 반면, 소극적 면에서 시온은 영원한 보호가 보장된 곳은 아
니다. 이곳은 대적들에 의해 침략과 노략이 자행되고 야훼의 이름마저 조롱 당하여 시편 기
자들은 황폐화된 시온을 재건하고 복 주실 것을 야훼께 애타게 호소한다. 시온 주제는 또한
8c이래 예언자들의 중요한 신학적 소재로 사용돼 왔다. 예언자들은 시온이 야훼의 처소로서
거룩한 장소이며, 미래의 시온을 중심 주제로 삼는데, 이는 미가와 이사야에서 보다 두드러
지는 현상이다. 다만 북부 예언자들인 아모스서와 호세아서가 다윗(호3:5,암9:11 -12)과 유다
(호1:7,11)에 관한 약속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 시온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
급을 않지만, 7c후반과 6c초의 예언자인 스바냐, 예레미야, 에스겔에서 포로기와 포로후기
예언자들은 시온이 종말론적인 회복과 구원이 약속되는 장소이고 이곳은 세계의 중심이자
창조가 시작되는 곳이며 미래의 희망, 구원, 구속이 약속되는 곳임을 언급했다. 그러나 예레
미야와 에스겔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영원히 거하신다는 일반 대중의 통속적 신앙을 반박
하고 예루살렘의 불가침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비판했다.
왕정수립 이전부터 포로 귀환까지 이스라엘 삶의 정황이 변함에따라 시온-예루살렘 또한
신학적으로 재해석되고 새로운 표현으로 진술되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정복 이전부터
예루살렘은 그 곳 주민들에 의해 신성한 성읍으로 구별되어 왔다. 예컨데, 예루살렘에 관한
언급에서 '살렘'(창14:18)이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을 사로 잡아간 가
나안 다섯 왕들을 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 으로부터 환대와 축복을 받는
광경이 기술된다. 이 때 살렘은 가나안 성읍으로 성경은 살렘의 통치자 멜기세덱을 동시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지칭하며 그는 살렘의 왕이자 당시 가나안의 최고신
'엘'의 제사장 이라 언급하여,-이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나의 왕은 체덱이다"라는 말로 '나
의 신은 구원 이시다'라는 말로 이해되기도한다.-멜기세덱은 '엘 엘리욘'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고 그 답례로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바쳐 감사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의 '엘'신이 곧 자기가 섬기는 야훼 하나님과 동일한 신이라고
백한 것으로 예루살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야훼 신앙을 고백하고 종교적인 의무를
이행한 곳으로 야훼 제의와 관련하여 옛적부터 성별된 영원히 거룩한 성읍임을 보여 준다.
예루살렘이 명시적으로 구약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곳은 가나안 정복을 언급하는 수10:1-4
이다. 토착 여부스인들의 통치하에 있던 예루살렘은 주변국 왕들과 동맹을 결성해 기브온을
공격했던 이곳의 왕 아도니세덱은 당시 히위 성읍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할 목적으로 예루살
렘 북서쪽을 방문했었는데, 이 지역의 최변경에 기브온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호수아는 이들
동맹군의 세력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기브온을 도와 아도니세덱을 물리쳤으나 예루살렘을 차
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됐지만 여전히 미 정복지로 남을수
있었다. 이와 함께 삿1:8은 유다 지파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불태운 것으로 보도 하는데,
이 두 기사는 각각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정복시, 예루살렘을 2차례 공격한 사실을 반영한
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 공격시에는 유다 지파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불태웠던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않아 예루살렘은 사사시대
는 물론 왕정수립 초기까지도 자치권을 보장받을수 있었다.
이후 통일 왕정시대에 이르러 왕정체계가 수립된후 초대왕으로 즉위한 사울은 그의 활동
중심지이자 행정 수도를 기브아로 정하였다.(삼상 22:6, 23:19) 따라서 사울 통치 기간에는 아
무런 중요성을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여부스인들의 성읍인 예루살렘은 정복 과정에서 이스
라엘과 자주 관련을 맺으며 결국 다윗에 의해 이스라엘의 영토로 복속당하고 이때부터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새로운 수도가 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면서 정치,경
제, 사회, 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중심지가 되며 시온 신학도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대두되
고 꽃피우기 시작한다. 특히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이전한 일은 예루살렘의 종교적
중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강화시켰으며 시온 신학의 형성에 있어서도 결정적 계기가 됐고
하나님의 현존 장소로서의 거룩성과 존엄성을 시온-예루살렘에 부여했으며, 이것이 궁극적
으로는 시온 주제의 신학적 토대가 된 것이다. 예루살렘의 종교적 신학적 중요성은 솔로몬
이 건립한 성전에 의해 한층 제고됐다. 시온주제는 나아가 다윗 왕조의 정통성과 신성을 합
법화하는 왕정 이데올로기와도 관련을 맺는다.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기사(삼하5:6 -9과 대상
11:4-8)에 구약성경의 '시온'이란 명칭이 처음 드러난다. 그러나 본문 손상으로 다윗이 이 도
성을 어떻게 점령했는지 분명히 제시하지 않고 역대기의 평행 구절도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특히 본문에 나타난 모호한 단어로 다른 곳에서는 시42:7에 단 한번 나타난다.
다윗이 예루살렘 점령시 군대는 유다 지파나 북쪽 지파에서 선발한 군대가 아니라 자신이
고용한 부하들을 동원하여 예루살렘을 남과 북 어느쪽에도 합병치 않고 그의 개인적 소유지
로 삼을수 있었다. 나아가 예루살렘 성벽을 강화하고 페니키아 건축공들의 힘을 빌어 궁전
을 세웠으며 그 장소를 '다윗의 성읍'이라 하여 그 후손들에 의해 오랜 세습 왕조의 기틀를
마련하는데 토대가 되었다. 그 명칭도 "다윗성"(삼하 5:7)이라 했는데, 성경은 그의 예루살렘
으로 천도한 이후 벌인 몇 가지 건축 사업에 대해 보도한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활동은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은 것(삼상5:9, 대상11:8)으로 이것은 다윗의 예루살렘 정
주 초기로 보이며, 그 이후에 두로 왕 히람이 보낸 기능공들의 힘을 빌어 자신의 거처인 백
향목 궁을 건축한 것으로 본다.(삼하5:11). 다윗은 예루살렘을 새로운 수도로 만든 후 북쪽의
성전 산 방면으로 요새화된 성을 확장해 나갔다.
다윗 제국의 확장과 국민적 합의는 솔로몬 통치 시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개혁가이자
강력한 행정가인 솔로몬은 예루살렘을 당시의 국제적인 중심도시로 부상시키는데 크게 기여
했다. 이집트와 바벨론을 왕래하는 상인들은 물론, 엘랏, 홍해, 오빌 등을 대상으로 한 페니
키아 무역은 솔로몬의 수도를 통과했고 솔로몬 자신의 해상 선단은 스페인 서부 해안의 한
섬에 위치한 다시스까지 항해하며 외국 상품들을 수입하는등 이스라엘 국가적 위상도 크게
높였다. 특히 솔로몬은 건축가로 높은 명성을 지녔는데, 야훼의 이름을 위해서, 다윗에게 주
신 야훼의 약속, 즉 야훼의 뜻을 이루기 위해 면밀한 사전 준비와 7년간의 공사 끝에 그의
아버지 다윗에 이어 성전 건축을 완성한다.
남북 왕조의 분열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과 포로로 이어지는 숨가쁜 역사의 격변기를
거치며 시온의 신학적인 의미는 보다 심화된다. 특히 예루살렘이 앗수르에 의한 몇 차례의
공격에도 무사히 살아남은 경험은 시온 불가침성의 신학을 강화시키는 역사적 기반이 된 것
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국가의 멸망과 포로 사건을 기점으로 시온-예루살렘은 정치 종교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대신 미래의 회복과 구원을 가져다줄 종말론적 도성으로 이스
라엘인들의 기대속에 내재화 한다. 분열왕정 초기와 중기를 보면, 남 유다에서 분리해 나가
독립 왕국을 수립한 북 이스라엘의 첫 왕 여로보암은 세겜을 그의 첫 수도로 정하고(왕상12:
25)그 후 수도를 디르사로 옮겼다. 하지만 남 유다는 여전히 예루살렘을 그들의 수도로 유지
했다. 남 왕국 유다의 첫 왕 르호보암 재위시에 이집트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성전
과 궁전을 모두 약탈했다. 그의 손자이자 아들인 아사는 그동안의 이교파 경향을 차단하기
위해 아세라 우상을 만들고 그의 모친 마아가를 대비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개혁을 단행해
성전에 새로운 비품들을 더 설치하고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 세웠고 우상들을 기드론 냇가에
불태웠다(15:13). 요아스는 그의 치세 기간 동안 성전을 개수하고 정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왕(왕하12장)으로 아달랴가 왕권 찬탈을 목적으로 정변을 일으켰을 때 성전에 피신함
으로써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그 사이에 즉위식을 치루려는 도중에 요아스의 호위병에게
체포되어 죽는다. 아달랴가 죽은후 바알 신전은 파괴되고 그 제사장들도 처형됐다. 요아스의
치세 시 시리아 왕 하사엘이 유다 전역을 공격하고 예루살렘까지 파괴하려고 위협했다. 요
아스는 성전과 왕궁을 모두 그에게 바치고 구사일생으로 예루살렘을 구할 수 있었다(왕하12:
17-18). 그러나 이 기사와는 달리 역대기에 따르면 시리아 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했고 이때
요아스는 부상을 당한 것으로 보도한다(대하24:17-24). 그의 뒤를 이어 남 왕국 유다의 왕위
를 계승한 아마샤는 이스라엘의 여호아스에게 패하여 벧세메스에서 포로가 되었고 여호아
스는 계속해서 예루살렘까지 쳐들어와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
까지 400규빗을 헐었다(왕하14:8-13). 그 후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한 아사랴는 예루살렘
의 방비를 강화하고 그 밖의 몇몇 지역을 요새화 했고 군대를 효율적으로 재조직 했으며 장
비도 개선하였다. 하지만 그는 통치 후반에 질병으로 그의 아들요담을 왕위에 앉히고 12년
간 공동통치에 들어간다. 요담은 예루살렘 성전 문을 세우고 '오벨성'을 증축하는등 많은 건
축사업을 했다. 말년에는 이스라엘 왕 베가와 다메섹왕 르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유다가
반앗수르 연합세력에 가담하다록 압력을 가했으나(왕하15:37) 독자 노선을 고수하여 다메섹
-이스라엘 연합군과 유다 간의 긴장 끝에 죽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위를 계승한다. 아하
스가 즉위하자 곧 다메섹-이스라엘 연합군이 유다를 침공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왕하16:5).
국가적 위난에 닥친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그랏빌레셀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는 넘겼다.
이사야는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의 선택이 신적 도움을 보장하는 것임을 설파했고 그는 이
같은 신념에 기초해 원수들이 시온을 공격하지만 그때마다 참패당할 것임을 거듭 역설한다
(사8:9-10, 10:27-34, 14:24-32, 17:12-14, 29:1-8, 3:27-33).야훼께서 친히 택하신 거룩한 시온 산은
모든 원수들의 공격을 막고 야훼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에게 있어서 시
온은 야훼를 전적으로 의뢰하는 민족의 안전과 존립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야훼에 대한
이 같은 의뢰를 떠난 민족은 어떤 안전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이사야의 시종일관 메시
지였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 경고를 무시하고 친 앗수르 정책을 펴 유다는 결국 앗수르의
사실상의 봉신국이 되었고 종교적으로도 앗수르의 영향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히스기야는 이교 관습에 깊이 오염된 이스라엘의 제의를 바로잡기 위해 철저하고도 전면
적인 개혁을 단행해 산당을 철폐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 정책을 시행해(왕
하18:22)제의의 중앙화를 통해 예루살렘의 지위를 격상시켜 모든 국력을 예루살렘에 집중코
자 했다. 한편 정치적인 면에서 그는 산헤립이 앗수르의 왕으로 즉위하자 앗수르에 대한 조
공을 거부하고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되찾으려 했다(왕하18:7). 그러나 이 같은 조치는 앗수
르를 크게 자극해 대대적인 공세를 초래했고 히스기야 재위 14년에 산헤립이 침공해 유다
의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점령했다(왕하18: 13). 히스기야는 이 난국 극복을 위해 성전과 왕
궁을 모조리 앗수르에게 조공으로 바쳤지만 예루살렘은 끊임없이 위협 당해 자구책을 마련
하는데, "못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으로 인도해 들였다"(왕하 20:20)하고 "기혼의 윗 샘물
을 막아 그 아래로 좇아 다윗성 서편을 곧게 인도했다."(대하 32:30)한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무용지물이 되고 앗수르의 돌발적인 내부 사정으로 산헤립이 본국으로 급히 철수해 예루살
렘은 파멸을 면할 수 있었지만 앗수르의 영향권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이사
야는 야훼께서 예루살렘을 도우시리라는 것을 재확신 하고(14:24-25)야훼를 모독한 앗수르가
결코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없을 것임을 예언했다(사37:33-35). Eiler에 따르면 이사야의 시온
해석은 아하스 재위시 다메섹-이스라엘 동맹 군이 침공했을 때와 히스기야 재위 시 앗수르
군의 공격 때 이사야가 제공한 조언의 기초인 시온이 인간적인 모든 안전을 포기하고 야훼
만 전적으로 의뢰할 때 얻어지는 안전을 상징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간의 날카
로운 긴장을 특징적으로 보고 시온은 구원과 구출을 통해 이스라엘과 세상에 대한 자신의
우주적인 통치권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야훼의 원대한 목적을 나타낸다. 따라서 시온은 인간
적인 어떤 세력도 전복하거나 파괴할 수 없는 야훼의 백성을 위한 확고한 신적 상징이다.
하지만 시온은 불 가침성에 대한 신적 보증을 절대적으로 담보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오직 야훼를 신뢰할 때만 안전을 보장받는 도피처로 이사야는 바로 여기서 시온 불가침성
에 대한 맹목적 신념에 제동을 가한다 할 수 있다. 헤이즈에 따르면 이사야는 백성들을 격
려하고 야훼의 메시지를 선포키 위해 시온 불가침성의 전승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야훼에 대
한 신앙을 구원과 보호의 조건으로 제시했다는 점과 적들의 살육과 공격이 하나님의 활동영
역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실을 보여 옛 시온 전승을 급전시켰다는 점을 지적한다. 유다
왕국의 쇠퇴기를 보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앗수르에 처음부
터 봉신이 되기를 자청해 그의 통치 기간을 앗수 르의 충성스런 봉신으로 보냈다. 이것은
히스기야의 정책 노선에서 완전히 벗어나 아하스 의 정책을 따른 것을 의미하는데, 이에 따
라 종교적인 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초래된다. 온갖 이방 제의의 관습들이 예루살렘에서 성
행되어 성전 안에서 조차 우상숭배와 제의적인 매음 의식이 자행되었다(왕하21:7 cf. 23:4-7).
한편 역대기는 므낫세가 후에 회개하고, 이교의 모든 제단과 우상을 제거후 "여호와의 단을
중수했다"고 기술(대하33:15-16)하는 반면 열왕기는 그의 회개와 그 이후 행적에 대해 침묵
하는데, 딜라드에 따르면 이런 생략은 죄와 징벌의 문제에 있어서 열왕기 기자는 죄과가 시
간에 따라 누적 된다고 이해하는 반면 역대기 기자 는 각 세대는 당대에 그들의 행위에 따
라 형통이나 재앙을 대가로 받는다고 이해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그 후 특기 할 업적이
없었던 아몬을 거쳐 아몬의 아들 요시아는 선왕이 세운 이교의 신당과 우상들을 파괴하고(
대하34:2)성전을 수축하는 과정에서 율법책을 발견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단호한 개혁
을 단행하여(왕하22:3-20, 23:1-25)성전과 예루살렘 성읍에서 철거한 수많은 우상 숭배의 대상
들을 '기드론 시내'에 불태우고 철저히 파괴했고 우상들을 섬긴 제사장들도 축출했다. 요시
아의 이 같은 개혁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예루살렘 이야말로 유일한 합법적 성소라는 인식
을 확고 히 안겨준 동시에 야훼만이 유다 백성을 다스리신다는 국민적 신앙고백을 도출해
냈다. 이런 개혁에도 불과하고 요시아을 계승한 여호아하스는 이집트와 느고의 압력으로 왕
위를 박탈당하고 유다가 이집트의 봉신국이 되는 가 하면 그의 형제인 여호야김은 왕궁건설
에 사치하고 백성에게 강제노역을 시키며 바벨론 의 침공을 받아 암살당하고 그 뒤를 이어
여호야긴은 포로로 끌려간다. 이 비극적 시대의 예언자는 예레미야로 드물기는 하지만 시온
에 대해 언급하는데, 미가와 같이 그도 시온주제 에 대해 다소 비관적인 성향을 띤다. 예컨
데, 예루살렘에 대한 호칭을"하나님의 성"(시46:4) 에서 "이 성"으로 바꾼 것(렘19: 11-15, 21:
4-10)과 시온을 위한 희망을 거의 강조치 않고 오히려 시온의 처참한 파멸을 선포 한다는점
이 그것이다.
포로기와 귀환시대의 시온-예루살렘을 보면 포로기 동안 예루살렘은 거의 폐허가 되고 바
벨론은 유다를 자신들의 일개의 속주로 편입시키고 유다 귀족 출신이 그다랴를 총독으로 임
명했다.(렘40:5-6) 그다랴는 전쟁의 참화로 행정 수도의 기능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예루살렘을 버리고 미스바를 수도로 정했다. 예루살렘은 주로 가난한 하층민들이 남아 농사
로 하루하루 힘겹게 연명해 갔고 성벽들은 계속 허물어져 갔으며, 독립국가 유다의 성스러
운 상징이던 성전마저 파괴돼 다윗 계약의 존속과 예루살렘의 불멸성을 확신하고 있던 유다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종교와
신앙에 새로운 반성과 성찰을 가져다준 전기가 된다. 유다사람들 다수는 국가의 파멸이 하
나님의 몰락이라고까지 생각했지만 예언자들의 신학적 반성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에
대한 징벌로 주어졌다는 것이었다.(애1:18) 한편 성전의 파괴에도 포로기 동안 예루살렘 에서
예배의식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렘41:4-5은 세겜, 실로, 사마리아 등지에서 그다
랴의 죽음을 조문하려는 사람들이 제물을 가지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것을 보여
준다. 이는 추방을 면한 하위직 제사장들이 관장하는 동물 희생제사 였다. 또한 당시 예루살
렘에 제물을 봉헌할 제단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예레미야 애가는 예배를 위한 집회가 있었음
을 보여준다. 귀환 시대에는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유대인 포로들에게 예루
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다시 세우라는 포고문을 공표했고 일단의 포로들을 예루살렘으로
인솔해 느브갓네살이 약탈해 온 성전의 기물들을 반환할 책임자로 세스바살을 임명했다. 얼
마 뒤에는 포로들중 다른 무리들이 스룹바벨의 인솔하에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지만 스룹바
벨과 대제사장 예수아가 주도한 성전재건 공사는 사마리아인들이 주동한 주변 적대세력들
의 방해로 B.C 520년까지 중단됐다(4:1-5, 24)가 학개와 스가랴의 독려에 힘입어 공사가 재개
되어 마침내 완공됨(5-6장, 학1-2장, 슥1-8장)으로써 유대인 귀환 공동체의 신앙적인 구심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야훼께서 시온과 다윗 왕조를 택하셨다는 국가의 공식 신학에 근거
한 희망들이 성취될 것임을 유대인들을 향해 끈질기게 설파했던 학개와 스가랴 두 지도자의
노력에 힘입은바 컸고 특히 스가랴는 하나님의 도성 시온에 대한 야훼의 임재를 강조했으며
(학2:10,11),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자기 백성을 축복하고 보호하며 지키실 것임을 확언했다.
반면 이들은 성전재건에 주력했을뿐 성벽재건은 느헤미야와 에스라에 의해 주도되었다. 느
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야말로 유대인 공동체의 현실적인 안전을 보장하는 길이라
여겼고 에스라는 느헤미야가 구축한 정치적 안정의 기반위에 율법을 중심으로 유대인 공동
체를 재조직하고 공동체의 내적인 삶을 쇄신 시키는 데 공헌했다.
포로 귀환 후의 예루살렘과 성전 재건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이 선포한 희망은 실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시온-예루살렘에 대한 희망은 점차 지상이 아닌 하늘의 예루살렘을 대망하
는 종말론적 묵시사상으로 변모하고 그 중심에 메시야 사상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이처럼
시온-예루살렘은 다윗 왕조가 존속할 동안에는 현실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서, 국가 멸망
후에는 백성들의 기억의 성소로, 나아가 백성들의 종말론적 영적 희망의 성소로 그 자리를
지켜 나갔다.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이해에 대한 변천 과정에 있어서 가장 특기
할 것은 예루살렘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가 움트기 시작한 것으로 첫째, 예루살렘 및 성전의
회복과 영광으로 포로기 대표적 예언자인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파괴를 말하면서도, 한편 고
국에로의 귀환을 예고하여 포로된 백성들을 위로한(겔20:42, 34:13, 36:34-35, 37:12, 14,21) 동시
에 40-48장의 종말론적 프로그램은 새 성전을 중심으로 한 회복된 공동체를 묘사한다. 야훼
의 영광이 새로운 성전에 다시 임하고, 이로써 예루살렘은 야훼의 도성으로서의 지위를 되
찾을 것이다.(겔48:15). 포로 후기의 예언자들인 학개와 스가랴 역시 예루살렘과 성전의 장엄
한 회복을 보는데, 그 도성은 하나님이 거처가 될 것이며, 성읍 전체가 야훼의 산이 될 것
이다(슥8:3).야훼께서 이 성읍의 보호자가 되실 것이므로 방호벽이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임
을 말하는 진술 속에서 회복된 도성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슥2:5, c.f 38:11).이들은 또한
종말론적 축복이 임할 때 새롭게 세워질 성전이 최고의 지위를 차지할 것임을 말한다. 나아
가 성전의 재건은 야훼의 오심을 위한 선결요건으로 이해 되었다(학1:8). 둘째, 회복된 예루
살렘과 이방 나라들에 대한 기대는 회복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뿐 아니라 이방 나라
들에게까지 총체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 이라는 것으로 여기에는 우주적이고 세계적인 중심
지로서의 새 예루살렘의 종말론적 특징이 나타나는 동시에 종말론적 예루살렘이 이방 나라
들의 구원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묘사하는 구절들도 많다. 즉 포로 후기의 본문들 중
많은 구절들이 야훼께 경배드리기 위한 우주적인 순례에 관해 언급한다. 학2:7은 야훼의 우
주적인 권능에 압도당한 이방 나라들의 각종 헌물을 지참하고 그의 전으로 나아올 것임을
말한다. 셋째, 회복된 예루살렘과 새 성전과 메시야에 대한 기대 가운데 메시아적 묘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학개와 스가랴는 특히 메시야와 도성과 제의 간에 긴밀한 관계
가 있음을 간파했다. 학개는 야훼께서 스룹바벨을 통해 우주적인 대격변을 일으키시고 이방
나라들을 전복하시는 것으로 묘사한다.(학2:20-21) 스룹바벨을 하나님이 대리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스가랴 역시 스룹바벨이 야훼의 영을 통해 땅을 격동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
유한 것으로 설명하고(슥4:6-7)스룹바벨이 제2성전의 기초를 놓고 완공시까지 감독했음을 말
한다.(슥4:9 c.f 6:11-14) 즉 학개가 성전과 관련된 문맥에서 스룹바벨의 메시아적 면모를 주로
강조하는데 비해(학1:14-15,2:2-9), 스가랴는 스룹바벨을 성전의 제의적인 측면과 밀접히 관련
시키고 있는 것이다. 겔40:48에서 에스겔은 미래의 다윗의 통치자, 곧 메시아와 회복된 제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예견한다. 여기서 이 메시야의 중요한 임무는 이스라엘을 속죄하기
위한 제사와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을 위한 제사를 드리는 일로 묘사된다(45:17 c.f 46:6-15).
메시아는 자기 자신은 물론 백성들을 위해 유월절 절기동안 특별한 제사를 드린다(45:21-25).
이렇게 에스겔은 메시야가 공동체의 제의적 삶을 이끌어 가는 주역으로 특별한 위치를 차지
하게 될 것임을 강조한다(44:3, 46:2).
이사야서는 이런 시온주제로 시작과 끝을 맺을 만큼 시온본문들의 보고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시온 주제들을 정리해보면 첫째, 사2:2-4에서 시온은 세계의 중심인 우주적 산
으로 해석된다. 이 시온산은 '하나님의 전의 산으로 지칭되는 야훼의 전으로 이곳에 하나님
이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에 중요하다. 이 산은 하나니의 지배와 통치권이 우주적으로 인정
받고 수립되는 세계질서의 중심지가 된다. 따라서 이 산은 지상의 모든 산들의 으뜸으로 하
늘과 땅이 만나는 접촉적인 우주적 산으로 높임을 받을 것이다. 이 점에서 시온 산의 지형
적 실제는 이 산이 지닌 종말론적 의미에 압도당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종말론적으로 신학
화 되면서 지상의 산들 중 최고의 산으로, 나아가 세계의 중심이자 우주적 산으로 높여지
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이 시온을 우주적 산으로 묘사할 때 고대 세계의 보편적인 전통
을 흡수해 야훼 종교 사상과 일치되게 변형시켰다는 것이다. 이같은 이스라엘의 신학화 작
업은 그들의 메시지를 당시의 청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수용하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했을 것
이다. 둘째, 사11:6-9에서 시온은 이상적인 완전한 평화가 실현되는 낙원으로 해석된다. 여
기는 어린 목동, 어머니에 품에 안긴 젖먹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등의 표상을 통
해 위협과 해가 없는 목가적인 상황을 그렸는데, 이 모든 장면들은 회복된 낙원, 즉 종말론
적 시온에서 실현될 완전한 평화를 예시한다. 여기서 '나의 거룩한 산'은 시온 산을 지칭하
는 고정된 어구로 나아가 하나님이 구속하고 재창조 하신 세상 전체를 암시하는 표현이 된
다. 따라서 이 본문은 종말의 때에 실현된 완전한 평화가 야훼의 거룩한 산 시온을 진원지
로 하여 온 세계로 확산될 것임을 강조하며 이는 이사야의 세계관의 중심에 시온이 자리잡
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셋째, 사4:2-6, 31:4-9에서 시온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
는 대상으로 해석된다. 전자는 가혹한 정화의 과정을 거친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이 하나님
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될 것을 말한다. 특히 이 본문은 출애굽 표상을 이용해 광야의 이스
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신 것같이 거룩하게 재창조된 시온의 신실한 백성들이 야훼의 절대
적인 보호를 받게될 것을 묘사한다. 후자는 시온은 야훼가 택하신 곳으로 야훼는 결코 시온
을 앗수르와 같은 이방 나라에 뺏기지 않고 보호하실 것을 묘사한다. 여기서 야훼를 끝까지
자기 전리품을 지키는 사자와 둥지위를 날아다니며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에 비유하여 시온
을 보호하고 지키시는 야훼의 의지와 능력을 강조한다. 넷째, 사24:21-23에서 시온은 야훼가
마지막 승리를 거두시고 통치권을 행사 하시는 장소로 해석된다. 야훼는 '그날에', 즉 모
든 역사가 한 점으로 수렴되는 그 때에 자신의 영광을 완전히 드러내실 것이며, 가장 밝은
빛을 발하는 천체들도 야훼의 그 영광의 광채 앞에선 무색해질 수 밖에 없고 야훼는 시온
산에서 대권을 행사하시고 우주적인 통치를 시작하신다. 이로써 시온은 시내 산에서 체결
된 계약이 지시한 모든 것이 성취되는 최종점이 될 것이다. 다섯째, 사29:1-8에서 시온은 심
판이 집행되고 구원이 베풀어지는 도성으로 해석된다. 시온은 비록 야훼가 택하신 거룩한
성읍이지만 그것이 범죄할 때에는 엄한 심판을 면치못하는 곳으로 그 심판은 오히려 시온
에 새로운 구원이 시작될 것임을 지시하는 표시가 된다. 예루살렘을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됐던 이방의 군대들은 목적이 달성된 후 야훼의 징벌을 받고 축출 될 것이다. 이처럼
시온은 외적의 공격 을 당하더라도 야훼께서 보호하시므로 결코 탈취 당하지 않는다. 이는
이사야의 시온 신학의 핵심요소 이다. 여섯째, 사40:1-11, 52:7-10에서 시온은 구원과 회복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으로 해석된다. 전자는 야훼 하나님이 시온에 돌아오셔서 그 백성
을 포로의 굴레에서 해방시키시고 강한 용사와 온유한 목자로 보호하실 것을 말하며 후자
역시 기쁜소식을 전하는 시온의 사명을 노래하는 것으로 특히 종말론적 기대를 강조한다.
여기서 시온의 역할은 전자보다 수동적으로 묘사되지만 시온이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중심지로 제시됨은 변함없다. 이 본문의 특징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민족
주의를 넘어 '땅끝까지'라는 세계 주의를 표방하여 시온의 선교적 사명을 명확히 부각 시키
는데 있다. 일곱째, 사49:14 -26, 62:1-5에서 시온은 종말론적 회복과 구원의 대상으로 해
석된다. 전자는 시온에 대한 야훼의 사랑을 지극한 모성애적 사랑에 비유한다. 야훼가 폐허
화한 예루살렘 위에서 성벽의 재건을 위한 설계도를 작성하시는 모습을 묘사하여 야훼의 구
원이 구체적으로 실현됨을 표명한다. 후자는 결혼이란 계약 용어를 사용해 시온의 회복과
갱신을 묘사하고 야훼가 시온을 배우자로 맞아 그를 기뻐하심으로 양자간 의 사랑관계가 회
복된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거룩한 백성', '야훼의 구속하신자' '찾은 바 된자',
'버리지 아니한 성읍' 등으로 지칭됨으로써 예루살렘이 지닌 특별한 지위를 강조한다. 여덟
째, 사60:1-22에서 시온은 열방들이 찾아드는 순례의 장소로 해석된다. 이 본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온에 구원이 임박했음을 말한다. 이제까지 암흑속에 있던 세상은 하나님의 도성
시온을 통해 새 시대의 여명이 밝아옴을 목격하고 뭇민족과 왕들은 빛을 찾아 시온을 향해
나아온다. 그동안 시온을 멸시하고 억압하던 민족들이 시온을 향해 나와 그 발앞에 엎드린
후 '야훼의 성읍',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이라 부르는 장면에서 시온의 영광은 절정
에 이른다. 이로써 시온은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세계의 중심지로 영화롭게 부
상하는 것이다.
시온 주제는 이사야의 다른 주요 사상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이들 사상과의 유기적 관
계를 파악할 때 시온 신학도 온전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 첫째는, 시온 주제와 출애굽사상
과의 관계로, 이사야가 출애굽 표상을 사용할 때 그것은 시온을 향한 새 출애굽의 구원행진
을 묘사하기 위함으로써 옛 출애굽의 구원사건은 시온의 회복, 즉 이스라엘이 종말론적 구
원을 묘사하기 위한 모형이 되는 것이며 둘째는, 시온 주제와 창조사상과의 관계로, 이사야
는 시온과 성전의 재건 및 왕의 임명은 모두 야훼의 창조 행위와 관련된 것으로 말하는데
그에게 있어서 바벨론의 멸망과 성전의 재건과 포로된 백성들의 귀환은 하나님의 창조사역
의 중요한 단면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시온 주제와 남은자 사상과의 관계로,
이사야는 정화의 불 심판을 통과한 시온 공동체가 의롭고 신실한 남은자로 이뤄진 공동체가
될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시온과 남은자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사야가 '거룩하
다'는 칭호를 남은 자에게 제한적으로 사용하면서 이를 시온과 구별하기 때문이다(사4:3). 이
경우 이사야는 남은자 사상을 통해 시온 절대성을 강조하는 맹목적인 시온 신학에 일정한
한계를 긋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시온을 '곤고한 자들의 피난처'(사14:32)로 말함
으로써 결국 전통적인 시온 사상으로 회귀한다. 따라서 '고난받는 남은자의 안전한 피난처'
라는 개념을 매개로 시온 주제는 남은자 사상과 함께 만나고 결합한다.
그 밖에 시온 주제와 야훼의 종 사상과의 관계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월셔, 소여 같은 학
자는 야훼의 종이 시온-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 제안은 가설의 단
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시온 주제와 관련해 이런 논의들이 시사하는 의미는
특별하다. 그것은 시온 주제가 이사야의 다른 중요한 신학 사상들과 광범위하게 관련되거나
합성되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시온 주제가 이사야 신학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해명하는 소재로 활용될 수 있음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시온 주제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것이 이사야뿐 아니라 구약의 다른
예언자들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고 해석되는지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것
이 신약성경에 어떻게 전승되고 해석되는지도 밝혀야 할 것이다. 이런 후속과제들이 적절히
연구되고 토의될 때 궁극적으로 '성경 신학의 중심'에 대한 오랜 논의에 시온 주제가 유용한
역할을 할 것이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를 더 자세히 알 수 있었고 지금까지 우리 기
독교인들을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여러가지
위기속에서도 끝까지 그들이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고 예루살렘의 위상을 세우며 오히려
그것으로 하여금 시온 신학을 더욱 발전 시키게 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읽
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감으로 그들이 확신하고
있었던 구원과 구속의 희망을 잃게 되었다고 느꼈을때는 아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
이었겠지만 그것이 시온 신학의 방향에 일대 전기를 맞으며 그 희망과 구원의 약속을 되찾
게 된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와 사랑을 지나가는 말로라도 이용하거나 하찮
게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간혹 자신이 잘못을 해놓고 그것을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회개
하면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용서해 주실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지나가는 말로서 하곤 하
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이시자 심판의 하
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책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혹평으로서의 비평보다는 호평으로서의 비평이 비중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구성면에 있어서 짜임새 있고 체계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각 제목의 본문 서술후 그 본문에 대한 요약부분을 삽입한 것이 그 본문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각 장별로는 종합 및 평가가 있어서 좀더 포괄적인 내용과
필자의 견해 등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아쉽다 하는점은 이 『이사야의 시온 사상』이란 책이 이사야에 초점을 두고 서술 되
어진 것을 고려할 때 지적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이사야 밖에서의 시온 주제에 관해서 서술
된 내용을 좀더 보여 주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고 좀더 다양한 관점에서의 시온 주제에
대한 서술이 이뤄졌었으면 어떠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