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최애 작품 -요괴인간>
1. 어린 시절의 경험은 다양하고 도전적이며 때론 자극적이어도 좋다. ‘경험’이 고통스런 ‘트라우마’로 남지 않고 극복할 수 있었던 기억과 동반할 수 있다면 힘들었던 경험은 생존을 위한 강력하고 유연한 힘을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나 환경 속에서 만나는 직접적인 경험 못지않게 책이나 영화 그리고 만화 등에서 만나는 간접 경험도 어린 시절에는 큰 영향을 끼친다. 오히려 제한적이고 상투적인 일상의 경험보다도 더 큰 이상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 ‘간접 경험’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무한한 확장을 제공해준다. 이렇듯 무언가를 꿈꾸게 하는 작품을 만나는 일은 행운이다. 나에게도 분명 이러한 ‘꿈’을 자극시켰던 많은 작품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하게 기억하는 것들은 없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 해체되고 융합되어 내면으로 흘러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유독 기억나는, 아니 기억하고 싶은 어린 시절의 작품이 있다. 그것은 꿈꾸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흥미로운 기억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나의 최애 만화 작품인 <요괴인간>이다.
2. 1960-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TV'는 꿈의 공간이었다. 작고 옹색한 흑백 TV였을지라도 화면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즐겁고, 슬프고, 고통스럽고, 행복한 모습들은 평범한 대중들의 마음을 대변했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현재를 위무했었다. TV는 소수의 사람들만 소유한 특별한 자산이었기에 TV가 있는 집과 방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었으며 특히나 아이들에게는 현재의 불안을 이겨내게 하는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장소였다. 그 중에서도 만화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만화가 상영되는 화면 앞에 같이 앉았던 아이들은 공동의 기억을 소유하며 자라났다. 그것은 ’세대기억‘이며 ’세대의 정서‘를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비슷한 경험 속에서도 각자의 ’최애‘는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지금 나는 그때 보았던 만화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유독 한 작품만 빼고는, 그러한 기억은 결국 허름한 가게를 전전하면서 비디오 세트를 구입하게 하였다. 지금 내 책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요괴인간>이다.
3. 지금도 <요괴인간>을 보면서 ‘왜 이 작품의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생각해 본다. 이 만화는 여전히 충분한 흥미와 긴장을 부여한다. 좋은 작품은 볼수록 더 큰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요괴인간>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성과 낭만성의 조화였을지 모른다. <요괴인간>의 배경은 아이들이 좋아했던 공상과학 만화 속 우주와 같은 광활한 세계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과 도시다. 그럼에도 마을과 도시는 묘하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주는 장소들이다. 시대적 배경도, 사람들의 인종적 정보도 모호하다.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면서도 오랜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신비의 인물처럼 느껴진다. <요괴인간>의 이중성은 바로 이러한 모호함 속에서 기묘한 매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현재이면서도 현재에서 벗어난 이국적인 ‘낭만적인 세계’로 이끈다.
4. <요괴인간>은 기본적으로 선악의 구도이다. 악이 등장하고 정의의 상징인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가 악을 응징하며 평화를 회복한다. 만화 속 ‘악’의 악마적 특징이 이 작품의 흡인력이다. 단순하지 않은 사연을 지니고 있는 연민의 대상이면서도 억울함에 대한 복수로 상징되는 다양한 악은 인간의 내면속에 잠재된 부정적 감정의 총체적인 모습이다. 마을 사람들의 멸시로 죽어간 여인, 역사 속 혁명의 광기 속에 처형된 왕비, 작품에 대한 비난에 미쳐버린 에술가 등 이들은 충분히 개인적인 아픔과 고통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을 겪었음에도 그것에 대한 복수는 너무도 과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악은 ‘절대적 악’이라기 보다는 ‘왜곡된 악’에 가깝다. 희생되었지만 희생에 대한 분노로 희생의 아픔까지 인정받지 못하는 과도함이 여기에 등장하는 ‘악’의 특징이다. 개인의 아픔이 아무리 절실하더라도 다른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가져와서는 안된다는 메시지이다.
5. 악의 과도함은 그것을 해결하는 요괴인간들의 입장에서 분명해진다.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을 피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요괴인간들이지만 이들은 결코 자신의 처치를 비관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악을 제거함으로써 인간 세게의 선을 유지하는 역할을 기꺼이 수행한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결국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낙관을 가지면서 현재의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다. <요괴인간>에 나타나는 선악의 구조는 객관적 상황이면서도 객관적 상황에 대한 주관적 수용의 결과이기도 하다. 고통에 직면해서 누군가는 그 고통에 복수하려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고통을 극복하려는 차이가 대비되고 있다. 이것은 ‘선악’에 대한 단순한 정의가 아닌 ‘선악’을 야기하는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6. <요괴인간> 속에 등장하는 악한 자들은 슬픈 과거를 지닌 자들이다. 그들에 대한 사연은 동서양의 온갖 이야기 속에서 수집한 모습들이기에 그것은 신화적 세계의 신비감과 동시에 역사적 사연에 대한 흥미를 자극시킨다. <요괴인간> 속 세계는 악인을 통해 폭넓은 스펙트럼을 동반한 신비로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런 ‘신비함’에 대한 수요가 높았다. 세기말 멸망에 대한 ‘노스트라무스의 예언’이 유행하였고 우리가 알 수 없고 가보지 못했던 이국적인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시기였다. 누구도 쉽게 외국으로 갈 수 없던 시대에 <요괴인간>이 제공하는 세계는 ‘악’과 동반하여 스릴감과 신비감 그리고 동경심을 끝없이 펼쳐보여 주었다. SF만화들이 제공한 상상보다도 더 큰 현실적인 상상을 꿈꾸게 하였던 것이다.
7. 오늘 오래된 <요괴인간> 비디오를 재생한다. 여전한 긴장감과 이국적인 흥미를 자극한다. <요괴인간> 속 세계는 아직도 탐구하지 못한 정신적 세계의 신비를 알려주며 또한 우리를 지배하는 사악하고 이기적인 감성의 어둠을 경계하게 한다. 만화 속 위기의 순간 때마다 침착하게 ‘악’의 숨통을 무너뜨리는 무표정한 ‘벰’의 담대함은 여전히 닮고 싶은 작품 속 모습이다. ‘벰’은 그의 희망대로 ‘인간’이 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악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이 넘쳐나는데 ‘인간’이 최선의 목표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악을 제거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선’의 존재로서 요괴인간들은 그 의미를 다할 수 있다. 구태여 특정한 종으로서 제한하지 않는 다만 ‘선과 정의의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중요한 삶의 한 형태가 아니지 않은가?
첫댓글 * SF는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