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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상의 오봉산
초당골의 본명은 당골이란다.
그런데 '초'자를 앞세우게 된 내력은 모두 모르쇠다.
아뭏든 주위에 음식점이 늘어난 것 외엔 예전 그대로인데다
구면이어선지 재차 밟는 호남정맥 초당골은 친근했다.
2007년 4월 6일 한식날 아침의 느낌은 이랬다.
전주와 이 곳 막은댐 간의 버스 운행회수가 1일 3회이던 예전에
비해 엄청 늘어나(20 ~ 40분 간격)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초당골, 운암삼거리에서 임도같던 비포장 길도 749번 지방도의
연장구간으로 변하였다.
완주군 구이면 마암리와 임실군 신평면 쌍암리를 이을뿐 아니라
가는정이에서 시작하는 옥정호 멋장이 호반도로의 연장이기도.
잠시 따르던 도로를 벗어난 정맥은 곧 지루한 가시덤불을 헤치며
나아가야 하는데 이번에는 봄이라 한결 편했다.
호남정맥에서 처음으로 도강김씨 묘를 만났다.
크게 번성하진 않은 성(姓)이지만 전라도가 집성 기반임을 뜻하는
것이리라.
초당골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 원조어부집
호반마을 양지흰바위 뒤에서는 88올림픽고속도처럼 도로를 거듭
건너서 오르게 되어 있다.
폭좁은 임도를 확장하면서 직선화 했기 때문에 자투리 정맥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513.2m 오봉산(五峰)이 30여분 거리다.
저번에 편승한, 오봉산을 다녀온다던 어느 가족의 들-날머리가
바로 이 지점이었던 것.
이름대로 다섯 봉우리로 되어 있어서 매일상호저축은행이 세운
이정표가 없으면 정상을 가늠하기가 애매한 산이다.
그래도 호남정맥 말고도 좌우의 닦여진 등산로로 보아 이 일대의
여러 분이 자주 찾는 산인 건 분명하다.
동에서 시계방향으로 눈을 주면 국사봉과 길게 꿈틀대는 짙푸른
옥정호에 이어 묵방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서북으로 계속 돌리면 좀 더 높은 국사봉과 전주의 산 모악산이,
더 돌아서면 북북동에 앞으로 만날 경각산까지 두루 확인되어
지루한 줄을 모르게 하는 좋은 인상의 산이다.
오봉산 정상
건강하게 살아남는 것만이 선이다
전번(2003년 6월)과 이번 모두 그런 걸로 보아 이 오봉산과의
인연은 소중하게 가꾸고 싶다.
그러나 이후에는 잡목에 가려 답답하고 왕사가 깔려 있는 급경사
바위지대를 올라야 하며 염암재 심한 절개지로 내려서야 한다.
27번 국도에서 분기한 49번, 55번 도로가 염암마을을 지나 꼬불
꼬불 돌아 316m 재를 넘어서면 임실군 신덕면이다.
저지대인 구이면과 달리 평평한 고원지대다.
소금산, 속음산 또는 속금산이라고 불린 마을 앞산의 큰 바위를
소금바우라 했고 이를 한자로 염암(鹽岩)이라 바꿔 쓰게 되었고
마을 뒤 재이름 또한 염암재가 된 것이 아닐까.
이즈음이라면 여기 또한 심한 절개 대신 터널을 뚫었을 것이다.
동물통로용 인공터널이라도 시급한 곳이다.
절벽에 다름 아닌 절개지를 간신히 오르면 비슷한 암릉지대가
잠시 괴롭히지만 곧 멋진 전망대 바위다.
그런데 이 전망대는 남쪽만 열어놓은 반쪽짜리인 것이 아쉽다.
상 / 염암재
중 / 하얀 줄이 염암재 오르는 꼬불길
하 / 작은불재
대부분의 정맥 특징이 짧은 능선이기 때문에 오르내림이 잦다.
작은불재에 내려섰으니 당연히 올라야 하는데 경사가 심하다.
헬기장 뒤 600m 봉에서는 등산로가 치마산 길이 더 양호하고 그
쪽에도 표지기들이 나부껴 자칫 잘못 들 수 있다.
Compass로 방향만 확인하면 탈은 없겠지만.
잡목들 사이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줄곧 아른아른하던 사방이 탁
트이는 민둥봉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다.
서쪽은 바로 아래의 구이저수지에서 눈을 들어 올리면 모악산과
마주치고 북의 전주시가 눈에 잡히고 동북으로는 경각산이 지호
지간처럼 가깝다.
상 / 멀리 모악산
아래 하얀 부분은 구이저수지
하 / 추모비
활공장 한 귀의 오석(烏石) 추모비문을 읽다가 무심코 올린 눈에
약간 북쪽 상공에서 유유하고 있는 패러글라이더들이 들어왔다.
하늘과 땅이 대조되었다.
"바람 내음 맡으며 하늘을 사랑하고 하늘과 더불어 살다 간 고
형석군의 넋을 기린다"는 전라북도 패러동우회 일동이 1999년
5월에 세운 추모비지만 주인공이 특정되어 있는 것인가.
산에서 무수한 추모비를 대할 때마다 마음 아프고 안타까웠는데
산에서 하늘의 사고까지 확인하다니.
오직 건강하게 살아남는 것만이 선(善)임을 거듭 다짐하며 내려
선 불재가 번잡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희한한 자유인
전번에 괴이쩍은 느낌이었던 재마루의 불재도예원으로 인해서
인 것으로 지레 짐작했으나 도예원 윗쪽에 참춫가마들이 들어
섬으로서 차량들의 내왕이 빈번해진 탓이다.
띄엄띄엄 세워진 몇채의 낮으막한 황토집이 도예원이다.
길가 황토벽에는 온갖 그림들로 가득하다.
실은 이 그림들이 바로 나의 호기심에 불을 붙인 것.
진달래는 물론 인가가 없는 진달래마을, 모일 사람도 없는데
진달래교회, 뫔 살리기 수련원 등 간판들도 같은 역할을 했다.
불재도예원 / 뒷산은 활공장 / 연기는 참숯가마에서 나온다
주인공은 출타중이라며 기꺼이 응대한 이 마을의 유일한 사람,
바룬티어(volunteer)라는 젊은 이의 설명에 어안이 벙벙했다.
교사, 환경운동가, 시인, 도예가, 기타 등등을 거쳐 마침내 자유
선언을 했다는 53세 이병창이 주인이란다.
젊은 이가 준 한 신문의 인터뷰 기사에는 목사로 소개되었다.
벽화는 벽이라는 공간이 있어 특별한 뜻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그냥 그린 것이고 전통차, 식사, 도예체험 등도 간판일 뿐이란다.
이로 인한 남의 실망, 부정적 이미지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 하곺은 대로 사는 자유인이라고.
짐작한 대로 뫔은 몸과 마음의 축약어란다.
모든 이의 몸과 마음을 살리려 어데서 무얼 수련한단 말인가.
참으로 어이 없는 별난 자유다.
이런 자유인을 그리도 궁금히 여겼단 말인가.
2007년의 첫 정맥종주 길은 전주가스상사 백성환과 산외면의 한
집에서 10대째 살고 있다는 한 중년남의 도움으로 8시간 반만에
불재에서 끝냈으나 전번에는 염암재에서 끊었었다.
염암재에서 편승한 트럭이 모악산 인기 들머리중 하나인 구이면
소재지까지 도와주어 최신시설의 찜질방에 들 수 있었다.
첫날 광양에서 시작한 찜질방 순례(?)는 극히 적은 횟수의 통비닐
잠을 제하면 정맥종주와 찜질방 답사중 어느 것이 본령(本領)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계속되었다.
그런데 막바지에 나를 기막히게 할 작정이었나.
호남정맥 마지막 찜질방이 될 전주 평화동의 건강나라는 제법 큰
빌딩 하나가 통째로 찜질방과 부속실이다.
(불재 부터는 대형 덤프트럭의 도움으로 염암재에서 다시 시작한
처음의 종주를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다.)
늙은 이를 위할 분들이 대기하고 있을 줄이야
2003년 6월 하순, 호남정맥은 막바지에 접근하고 있었다.
작년 대간 종주를 끝낸 날(2002년 6월 30일)에 맞춰 마감하려 한
당초의 희망을 이루려면 마지막 피치를 올려야 했다.
불재도예원에 대한 관심을 누르고 강행한 것도 그래서 였다.
경각산 직전의 참으로 멋진 전망대바위지만 발 한 번 올려놓고
눈 한 번 휘젓고는 정상의 헬기장까지 그대로 쏜살이었다.
효간치는 예전에 넘나들었을 북쪽 마을 이름이 광곡리 효관인데
왜 비슷하나 다른 이름이 되었을까.
아무리 바빠도, 살짝 비켜 있다 해도 옥녀봉에는 올라보아야지.
경각산 정상
쑥재 이후 잠시 남하하는 정맥은 갈미봉까지 주로 오름이다.
380m 재에서 540m 봉마루까지 짧은 거리니까 그럴 수 밖에.
정상의 헬기장에서 방향을 90도 틀어 동진하여 만난 산불감시
초소는 경각산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빈 집이다.
고동산 감시원 김학동으로부터 까닭을 들은 후로는 아예 기대를
하지 않는다.(백두대간 59번 글 참조)
장치는 호남정맥에서는 꽤 높은 재(425m)다.
그러나 이미 구실을 접은 듯 남으로 오궁제가 환해도 길이 없다.
왼 편의 17번 국도와 전라선 철길이 정맥과 거의 나란히 간다.
이따금 달리는 열차가 어이없게도 묘한 향수를 불러왔다.
집 떠난지 벌써 며칠이 지났기 때문일까.
진행 방향으로 전면 가까이의 슬치휴게소가 보였다.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곧 745번 지방도로에 내려섰다.
확장과 포장을 진행중인 듯 윗쪽이 다소 요란했다.
이후 슬치까지는 여러 개간으로 상당히 혼란스럽도록 범벅 되어
있고 도로와 겹친 부분도 많아 정맥이 무척 애매하지만 곧 17번
국도상의 슬치에 닿았다.
휴게소에서 산(買) 막걸리 한 병을 거의 단숨에 마시고 있는 내게
두 젊은 이가 다가 왔다.
산행후 휴게소 등나무 그늘에서 휴식중인 것 같았는데 오늘 호남
정맥 종주를 주화산에서 시작해 첫 구간을 여기에서 끊었다는
김근교(교육학박사, 예수간호대학 전산소장)와 또 한 사람.
그들은 내가 정맥종주자임을 바로 간파하고 도움을 주려 한 것.
슬치에 이 늙은 이를 위할 분들이 대기하고 있을 줄이야.
그들은 17번 국도를 달리다가 죽림온천장에서 함께 목욕케 한 후
전주역 인근에 내려줌으로서 나의 서울행을 편케 했다.
산이라는 공통분모의 공유에서 비롯되는 동질성이 아니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오! 산이여....
그런데 그들은 진안 모래재로 차를 가질러 간다고 했다.
먼저 그 날의 탈출점까지 각자 차를 몰고 도착하여 1대는 거기에
두고 다른 1대로 진입점으로 간다는 것.
산행후 다시 그 1대로 함께 아침의 진입점으로 되돌아가 여기서
각자 운전하여 귀가하는 방식으로 교통문제를 해결하겠단다.
나는 그들의 이 방식에 문제제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도로망 사정이 열악한 곳 또는 원거리에서도 용이할까.
비용이나 시간의 절약, 위험의 감소, 편리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부분적인 택시 이용이 더 나을텐데.
글쎄....<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