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서 계속
▲서산사는 사찰이었으나, 현재 유스호스텔로 사용하고 있는데, 예전 조선통신사 숙소였다는 이유때문인지 아름답고도 정갈하게 보존돼 있다. 고은희 기자 우리나라 읍 정도 규모인 이즈하라시내에는 우리나라와 관련된 유적지가 꽤 많고, 도보관광을 하는데 전혀 무리가 따르지 않을 정도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팔번궁 신사에서 나와 걸어서 서산사로 향했다.
‘학익산(鶴翼山) 서산선사(西山禪寺)’, 원래 사찰이었으나 현재 유스호스텔로 사용하고 있다. 대개 보존상태가 형편없는 대마도의 사찰 유적에 비해 조선통신사 숙소였다는 이유때문인지 아름답고도 정갈하게 보존돼 있다.
▲'학익산 서산선사' 표지석 뒤 돌담에는 정겹고도 소박한 아름다움이 묻어 있다. 고은희 기자대마도에 조선통신사를 위한 숙소 외에도 실무전담 관저로 이떼이안이란 이름의 별도 건물을 지었으나 화재로 소실된 후, 이떼이안을 서산사로 옮겨 우리나라와 외교창구 겸 숙소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이곳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일본풍의 건축 양식이다. 투구형 지붕과 돌과 모래를 이용해 꾸민 고산수식 정원과 종루(鐘樓)도 일본풍을 내는데 한 몫을 한다.
▲이즈하라의 주택에서는 예쁜 꽃들을 피우고 있는데, 봄이 완연해 걷는 길목마다 꽃의 향연을 벌이고 있다. 고은희 기자우리 일행은 걸어서 고종의 늦둥이 딸인 비운의 덕혜옹주 결혼비 앞에 섰다. ‘두 분의 힘들었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양국민의 진정한 화해와 영원한 평화를 희망한다…’라는 기념비의 한 구절이 가슴을 쓰리게 한다.
▲대마도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와 강제결혼한 덕혜옹주의 결혼 기념비 앞에서 우리는 비운의 덕혜옹주를 위한 묵념을 올렸다. 고은희 기자덕혜옹주의 삶이 평탄했더라면 이런 기분이 아닐 것이다. 덕혜는 열두 살 어린 나이로 일본국에 강제연행 되고 이후 대마도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하고, 결국 이혼으로 끝내면서 정신질환으로 오랜 세월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던 덕혜의 한이 기념비에 서려 있는 것만 같아 자꾸 눈길이 간다.
▲울산문협(회장 조돈만)의 국제문학교류 첫 시도인 '대마도 문학기행'은 울산문협사에 영원히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고은희 기자 대마도에도 봄이 무르익어 이팝나무에는 하얀 쌀 꽃이 먹음직스럽게 피어있다. 이곳 사람들은 집집마다 예쁜 꽃을 피우고 마을 구석구석 이팝꽃과 조팝꽃이 피었는데, 밥이 귀하던 시절 이 꽃들을 보며 침을 삼켰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꽃들은 햇살을 받아 유난히 아름답게 반짝인다.
또 이즈하라에서 우리나라와 관련된 유적인 조선통신사기념비를 향해 걸었다. 기념비 옆 나가사키 현립 자료관에서 조선통신사 행렬을 묘사한 16.58m 길이의 두루마리 그림이 눈에 띈다. 또 전시관에는 고려판 대장경ㆍ대반야경과 고려청자, 한반도에서 전래된 융기문ㆍ무문 토기, 팔찌, 조선 간행본 <훈몽자회> <첩해신어> 등 우리 유적들이 일본어와 한국어 설명과 함께 전시돼 있다.
이곳 안내 팸플릿에는 “대마도의 문화사는 한반도와의 교류사 없이는 생각할 수 없고 쓰시마가 멀리 죠몬시대부터 조선과 구주 양쪽 모두와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적혀있는데, 이처럼 대마도에는 우리나라의 발자취가 깊이 새겨져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원래 대마도주가 기거하던 '사지끼바라죠'의 제3문으로 세워진 것을 조선 통신사비 옆쪽으로 옮겨 복원한 '고려문'. 고은희 기자자료관을 나와 자료관 건물과 마주하고 있는 ‘고려문’에 들러 우리나라 유물을 꽤 보았다. 이 고려문은 원래 대마도주가 기거하던 ‘사지끼바라죠’의 제3문으로 세워진 것을 조선 통신사비 옆쪽으로 옮겨 복원한 것인데, 해조선통신사를 성대하게 대접하기 위해서 만든 것 이라고 한다. 다만 고려시대 출입문 형식을 따서 만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건축물 양식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고려문 방문을 끝으로 울산문협 조돈만 회장을 위시해 44명의 회원들은 조선통신사비 앞에서 국제문학교류 첫 시도인 ‘대마도문학기행’을 기념하는 추억의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