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아름다운 야경과 더불어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자 쉼터로 각광받고 있는 청계천은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에는 그냥 개천(開川) 이었다. 서울의 남산,북악산,인왕산 등에서 발원하여 종로구,중구,동대문구,성동구를 거치며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곳이 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빠진다.
서울은 옛날부터 물고장이라고 했다. 한성,한양하는 한나라 한(漢)자부터가 삼수 변에 쓰는 것만을 봐도 알수있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청계천으로 불리다 오늘날의 이름이 되었다.
조선왕조의 한양 정도 당시 내(川)는 자연 하천 그대로 여서 봄, 가을은 건천 이었고,여름에는 홍수로 범람 하여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상시에는 오수가 괴어 불편 하였는데 제3대 태종이(1406~1407 ) 하천의 바닥을 파서 넓혔다.1411년에는 개천도감을 설치 하였고 처음으로 치수 사업을 시작 하였다.
세종때 도심의 하천으로 규정 하였고 이후 영조 즉위시까지 350년간 큰 변화가 없었으나 효종 8년(1567)약 8만 남짓했던 인구가 10년후인 (현종10년) 에는 19만명으로 늘어났다 영조가 즉위한 1725년 토사가 많이 쌓여 평지와 와 같은 높이가 되어 준천이 불가피 하였으므로 영조는 백성,조정관리와 상의하여 "준천사"를 설치하고 준설,양안석축,유로변경등 본격적인 개천사업을 시작 하였다.
1760년(영조36) 2월18일 대역사를 시작하였는데 송기교(현재 광화문 네거리 신문로 접경지점)에서 영도교(현재 영미교길 까지) 8개구간으로 나뉘어 진행 되었다.
개천에 쌍여있던 토사를 걷어내고 개천의 깊이와 폭을 예전처럼 회복하고 무너진 다리보수,상류 지류는 물론 경복궁,경희중궁,창덕궁,창경궁등 궁궐에 물길도 준설 하였고 4월15일 까지 57일간 시행 하였으며 동원된 인원은 한성부민 15만명과 고용인력 5만명 ,전 35.000,쌀 2300여석 을 투입하였으며 수 차례 공사현장을 방문하여 작업을 독려 하였고 일꾼들을 위로 하였다. 준천의 시말과 장래에 해야 할일을 기록한 "준천사실"을 편찬하였고 이후 개천 준설의 지침으로 삼도록 하였다.
1773년(영조49) 다시한번 개천 정비를 위한 종역을 실시하여 개천 양안을 석축 하였다. 양쪽 제방에 돌을 쌓아 튼튼하게 하고 구불구불한 수로를 곧게 바로 잡았다. 또한 양안에 버드나무를 심어 큰비가 올때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방비하여 2개월 후인 8월 초 완성하였다.
준천의 역사가 끝나자 왕세손(후 정조)과 광통교에 나가 완성된 석축을 둘러보고 역부들의 공로를 치하하고 "준천명"과 "소서" 를 지었다. 영조의 개천 준설은 빈민구제를 위한 목적도 있었다. (오늘날의 공공근로로 1930년 말 대 공항시 루즈벨트 대통령의 New deal)정책과 같은 것이다 한일 합방후 일제 초기(이때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에는 근대적 도시계획의 성격을 띤 대대적인 준설공사가 행하여졌다.
해방 후 에도 청계천 유지관리에 거액을 투입 해 왔고 1958년 6월 부터는 복개공사에 착수하여 60년 4월에 1단계로 광교 주교간 2359m을 완공하여 너비 50m 의 간선도로를 만들었다. 또한 그 위에 고가도로가 건설되어 사용 하다가 당시 서울 시장이던 이명박 시장이 2003년 7월1일~ 2005년 9월30일 52800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광화문 입구 동아일보사에서 시작하여 성동구 신답 철교까지 5.81km 까지 복원 되어 산책로와 녹지가 설치 되었다.
청계천을 흐르는 물은 본래 지류가 아닌 잠실대교 부근의 자양 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과 도심지하철역 부근의 지하수를 정수 소독 처리하여 흐르게 한다.
청계천에는 22개의 다리가 놓여 있는데 첫번째 다리는 무교동 길에 위치한 모전교 (과일가게를 이르던 옛말)로 1412년 태종12년 석교로 개축하여 신화방동구교로 부르다 영조 연간 기록에 모전교라 전해진다. 청계천이 시적되는 곳이 지금의 서린동 근처인데 서린동 148번지 남쪽에 있는 다리를 모전다리라 했다.
옛날에 모전교는 서린방에 속해 있었지만 바로 광통방 옆에는 무교동이 있었다. 무교동에는 옛날 이 부근에 무기의 제조 관리를 하던 관청인 군기시가 있었던 데서 모교 대신에 호반 무(武)자를 써서 무교라고 하게 된것이다.이 무기의 제조와 관리를 맡아서 하는 군기시는 처음 조선초에는 군기감 이었다가 태종 때에 군기시로 승역이 돼서 "동국여지비고"가편찬되던 고종 때 까지 계속해서 이곳에 있었다.
군기시의 발전에 있어서는 조선조 초기에 부정(副正)으로 있던 최혜산의 공로를 빠트릴수 없다. 최해산은 고려말 유명했던 최무선의 아들로 그는 부친을 따라 일찍부터 화포류의 개량과 발명무기와 화약에 풍부한 지식과 기술을 가졌으며 태조가 조선을 개국한 후에는 군기감에 머물면서 군기시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이다.
최해산이 처음 군기시에 출사 할 때에는 화약이 여섯 근 넉 냥,각궁이 2백 장이며 대소화통이 2백장 안되던 것이 화약이 6천9밷80근,각궁이 1천4백2십장,화통이 1만3천 자루나 됐으니 자그만치 백배에 가까운 친화력을 늘린 사람이다.무교동 어딘가에 그의 비석이 하나쯤 있음직 하다.
장찻골은 장통교 북쪽에 있는 마을 이름인데 마을의 골목이 장차게 길다고 해서 장찻골로 부르고 부근에 있는 다리를 장찻골다리,한자로는 장교동,장통교가 되었다
광통교,광교,장통교,삼일교,수표교,관수교,세운교,배오개다리,새벽다리,마전교,나래교,버들다리,오간수교,맑은내다리,다산교,영도교,황학교,비우당교,무학교,두물다리,고산자교가 있다.
전통 사회에서 다리는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수단뿐만 아니라, 마땅한 공공장소가 없었던 시절 다리는 약속과 모임의 장소였고, 길가던 사람들이 쉬어 가던 쉼터로, 생활문화속에 깊숙히 자리매김 하고 있다. 다리가 있음으로 동네 이름이,반대로 부근 동네 이름을 따서 다리 이름이 정해졌다. 소경교 또는 영동교라 불리던 다리는 부근에 소경이 많이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가산(인공산)터는 오간수문 안쪽으로 개천 북쪽과, 남쪽 바닥에 파놓은 흙이 인공산과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 이기도 했다.
다산교와 영도교 사이에 복원된 청계천 빨래터는 옛적 ,아낙들이 이곳에서 빨래를 했다고 한다.
땅에 묻힌 다리로는 외조거리ㅡ운종가ㅡ숭례문 도성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여 대광통교라 불리던 "광통교" 는 계천 복개와 함께 땅에 묻혔고,"수표교"는 1441년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기둥을 세웠던 다리로 현재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수위를 관찰 한다는 "관수교" 배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길과 연결 되었던 "배오개 다리" "삼일교"는 독립선언을 한 탑골공원과 인접한 거리를 기념함과 삼일로를 연결 하여 붙인 이름이며 우마를 팔던 마전이 가까이 있었기에 붙여진 옛 방산 시장길에 "마전교" , 평화시장 앞에 위치한 "나래교"는 동대문 의류상권이 나비의 힘찬 날개짓 처럼 번성 하라는 뜻이며 "버들다리는 평화시장,동화시장,덕운시장등의 재래시장길에 왕버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황학교'는 청개천 8가 난계로에 위치해 있던 도깨비 시장 근처로 옛날 이곳 논 밭에 학이 많이 날아와서 생긴 이름이고,"오간수교"는 흥인지문(동대문)에 위치해 있는데 청계천의 물이 성밖으로 빠져 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성벽 아래 설치한 수문 다섯개가 있었으므로 붙은 이름 이다.
"바우당교'는 세종때의 청백리 하정 유관선생이 이근처 살았는데 비오는날 방에 우산을 받쳐들고 비를 피했다 해서,"다산교'는 정약용의 호를 따서, "무학교'는 한양의 도읍을 정할때 결정적 역활은 한 무학대사의 이름을 따서 "영도교"는 조선 성종때 승려가 놓은 다리로 1458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 갈때 순원왕후와 이곳에서 이별을 하게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고산자교"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선생을 기려서이다.
"두물다리"는 한양대 아래쪽의 다리로 중량천과 청계천의 두 지류가 만나 한강으로 유입 되는곳이다.
현재는 스웨덴 출신의 미국계 팝 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비그가 설치한 "스프링" 과 "장통교"벽면은 172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베픈 "빈차도:가 타일로 설치되어 있다.
조선의 풍수학상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외수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것에 대응하여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내수 청계천이 한강과 반대로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 고려 되었다.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성 한 가운데 위치하여 당시 하수시설이 없어 온갖 쓰레기와 오물인 더러운 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산은 사람들의 심성을 깊게 해주고 물은 사람들의 심성을 넓혀 준다고 한다. 청계천 물줄기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과 인간의 솜씨로 만들어 놓은 다양성에 즐거움을 더하게 된다 부분 부분 이어지는 분수와 흐르는 물에 들어가 물놀이 하는 어린이들, 그정경 자체로도 기쁨을 느낄수 있는곳, 이름 그대로 푸른 청계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