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떨리운 날이다. 드디어 북한을 위한 순례의 길에 오른다. 사실 지금까지 이일을 계획하면서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도 모른채 우연히 같은 교회 전도사님의 소개로 이 순례의 길에 동참하게 되었다.
행여 나로 인해 나와 함께 길을 떠나는 두분의 전도사님이 실망을 하고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마음에 자리잡은 것은 사실이다.
얼굴도 한번 본적 없는 사람끼리의 만남, 그리고 그들과 동행을 하면서 중국을 통하여 북한의 국경선까지 순례를 한다는 것이 약간의 불안감이 작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첫 번째 만남을 가지면서 이러한 불안감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올라온 하나님을 사랑하고 중국동포와 북한동포를 사랑하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얼굴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이번 여행에 대해서 불안감이 설레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다양한 교파와 다양한 학교 다양한 지역에서 왔지만 역시 ‘그리스도’라는 매개체안에서 흑백의 논리는 작용할 수가 없었다.
첫 번째 만남을 그렇게 끝내고 드디어 오늘 12시 김포공항에서 다시 모여서 순례의 첫걸음을 하기로 했다.
약속시간 12시인지라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두분 전도사님과 함께 일찍부터 길을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착한시간은 10분 남짓 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숫자는 대략 9,10명 아직까지 더 와야 할분들이 14명정도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청사에 쫙 갈려있었다. 아마도 무슨일이 있나 보다 하고 그들에게 가까이 가니 경찰뿐만 아니라 취재진까지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래서 옆사람에게 도대체 무슨일이냐고 물어보니까 우리와 준결승전에서 맞붙을 독일 축국대표팀이 제주에서 잠시후 공항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레는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12시 30분쯤에 선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tv에서 보던 선수들을 직접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행운을 잡게 된 것이다. 독일선수가운데 클로제, 발락, 그리고 골키퍼 칸과 같은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들의 키는 내가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컸다.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한국 선수들이 질 수밖에 없었던 원인중에서 신체적인 조건도 빼놓을수 없는 것 같다.
그들이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뒤늦게 도착한 우리의 멤버들이 웅성거리며 있었다. 그리고 24명의 순례자들이 다 모였을 때 우리는 드디어 첫 번째 장소인 통일전망대로 발길을 돌렸다.
통일전망대로 가는 차안에서 우리의 인도자인 최사장님(중국에서는 목사님을 주로 사장님이라고 부름)이 ‘복음통일가’라는 복음송을 가리켜주었다.
그 가사의 내용은 탈북한 사람들과 최사장님 함께 가사를 만든곡이라 했다. 구구절절이 통일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고, 그 옛날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드렀던 평양땅이 다시 회복되어 남북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기원의 곡이었다.
우리 일행은 같이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 순례의 목적을 자연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1시 40분이 다 되었을때에 우리 일행은 첫 번째 장소인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오두산통일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북한을 향한 우리의 첫 번째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다. 설교는 오래전부터 중국선교와 탈북자를 위해 수고하시는 은광교회 담임목사님이 해주셨다.
예배를 마친후 나는 망원경을 통하여 북한땅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적막하기 그지 없고 어쩌다가 갱이를 어깨에 메고 논으로 길을 향하는 주민들이 간혹보일뿐이었다.
찹찹한 심정을 안고서 우리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그곳에서 밥을 먹고서 여리고성을 돌았던 모습으로 인천국제 여객터미널로 이동했다.
여객터밀널에 도착한 우리는 6시까지 출국수속을 밟고서 드디어 육지에서 몸을 밀어서 바다에 띄우게 된다. 어릴적에 돗단배와같은 작은 배는 타보았지만 이처럼 큰배는 타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약간의 설레임이 파도처럼 내 가슴에 울렁이고 있었다.
날씨는 약간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아 바다위에 물길을 만들며 배는 인천항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선실에서 우리는 다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이땅의 황무함을 보소서’라는 찬양을 통하여 북한을 위한 기도시간을 가지게 된다.
비록 북한선교를 비전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예배를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자연히 북한선교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예배를 마친뒤 나는 갑판대로 올라가서 바다를 보았다. 간간히 보이는 섬, 그리고 낮동안 자신의 온갖 뜨거움을 불살랐던 태양이 제 풀에 죽은 듯 서서히 지평선위로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어떤 삶을 살다가 생을 마쳐야 하는가에 대한 묵상을 하였다.
온통 푸른색을 띄던 바다도 어둠앞에서는 자신의 색을 잃어버린채 검은색으로 옷을 갈아입을때쯤, 배에 탔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자신의 옷을 갈아입으며 잠을 청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첫날의 큐티를 마치고 나에게 배정된 작은 침대에 몸을 드러누운채 잠을 청하였다. 잔잔한 감동을 안고서...
시간이 어느정도 흘렀을까? 몇 번을 몸을 뒤척이며 단잠을 자고 있을 때 내 볼에 타고 흐러는 아침햇살을 느껴지자 눈을 떴다. 그리고 창밖을 보니까 어제는 맥없이 자신의 삶을 마쳤던 태양이 언제 그랬냐는 듯 이글거리며 바다아래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서해에서의 일출, 얼른 갑판으로 나와 기지개를 펴며 그곳을 보고 있노라면 삶에 대한 희망이 용솟음 치고 내 삶도 저렇게 힘있게 살아야지!하는 다짐을 되새겼다.
그런데 이상한 광경이 바다위에 비쳐졌다. 쪽배처럼 보이는 작은 배들이 바다위에 반딧불처럼 이곳저곳에 보였다. 도대체 어떤 배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에 옆에 있던 최사장님이 저 배들은 북한배라고 했다. 북한에는 큰배가 별로 없기 때문에 저런 쪽배를 통하여 고기를 잡아서 먹고 살아 간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의 실상이 어떤지를 어느정도 가늠할수 있었다.
아침 9시가 되지 드디어 중국땅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내 생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를 하나 세우는 순간이었다. 내가 즐겨읽었던 ‘삼국지’를 보면서 중국땅을 그리워했는데 이렇게 내가 중국땅을 밝게 될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것은 압록강을 경계를 두고 있는 ‘단동’이라는 조선자치구역이었다. 단동에 내리자 난 처음에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70년대 우리 한국에 온줄 알았다.
글자(물론 일부는 한국말로 된 상점이 많이 보였지만)를 빼고는 모든 모습이 우리 한국의 70년대 상황과 유사했다.
그들의 언어는 북한말투와 비슷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한국말과 중국말을 동시에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한국말을 잃어버린채 중국말만 하는 사람이 있었다.
1시쯤에 우리는 조선족인 가이드의 안내로 중국에서 첫 번째 순례장소인 압록강 철교로 이동했다. 차에서 내리자말자 우리는 조선족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어섰다. 왠지 한국의 중국집에 온것처럼 원탁의자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약간의 거부감은 있었지만 아침을 굶었기 때문에 밥 한그릇을 금방 비웠다.
압록강 철교에 도착한 우리는 신의주가 마주보이는 철교위에서 기념촬영을 하고서 배를 타고 신의주 바로 앞까지 갔다.(중국과 북한의 경계선은 강을 사이에 두고 있지만 뭍에만 내리지 않으면 상관이 없다). 여기저기 긴 한숨을 쉬며 않아 있는 노인들, 자기 나라의 절망적인 상황도 잃은채 옷을 벗고서 압록강에서 목욕하는 어린아이들, 그리고 저 멀리 “21세기의 위대한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커다란 로고등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직도 어둠의 영들에 사로잡혀서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 오직 김정일을 메시야처럼 섬기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하루 속히 이땅에 복음의 빛줄기를 비춰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아직까지 천진난만한 저 아이들의 웃음이 그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또한 거기서 특이한 점은 신의주에 놀이동산이 보였다. 그런데 함께 갔던 가이드가 말하기를 저 놀이동산이 만들어진 이후 놀이기구가 돌아갔던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선전용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아픈가슴을 부여안은채 다음 장소인 호산 산성으로 이동했다. 이때부터는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던 최사장님 대신에 임사장님이 우리를 인도하게 되었다.
호산산성을 바라본 난 마치 레고로 지은 성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작은 만리장성을 보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섬세하게 잘 지은 성이었다. 과연 虎山이라는 말 그대로 호랑이가 살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기념촬영을 한뒤 두 번째 밤을 맞이할 우리의 숙소로 이동했다. 압록강을 맞대는 곳에 위치한 숙소는 생각했던거와 달리 외관은 아주 깨끗했다. 그래서 기분좋은 마음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예상치 못한 삼성텔레비전이 놓여 있었고, 침대도 깨끗하게 놓여 있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좋아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같이 갔던 전도사님이 화장실에 들어가자 말자 기겁을 하고 나왔다. 이유인즉 변을 보았는데 물이 안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화장실문을 열자 정말 토할 것 같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놀란 것은 벌떼처럼 날아드는 모기들이었다. 한국에만 모기가 있는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모기가 서식하고 있을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수 없이 압록강에서 길어온 물을 가지고 볼일을 본 자리를 깨끗이 씻어야 했고, 모기는 에프킬라를 한통 다 썰때까지 뿌려야 했다.
그곳에 우리의 여장을 풀고서 다시 우리는 해질녁에 추풍땜으로 이동했다. 중국과 북한이 같이 사용하는 땜이라는데 땜높이가 높아보였지만 시설은 아주 낙후된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그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는 압록강가에 앉아 기도회를 하였다. 눈을 들어 강건너편을 보면 북한이 그대로 보인다. 밭은 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아 밤이면 유령이 나올것만 같은 그곳을 보면서 우리는 눈물로 기도하였다. 그리고 ‘사망의 그늘에 앉아...’라는 복음송을 부르며 하나님은 언젠가는 우리 민족이 하나되게 하실것이라는 비전을 품고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온 저녁, 마침 그날은 한국과 독일과의 준결승이 열리는 날이라 우리 모두는 함께 모여 응원을 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0:1로 한국패, 그러나 4강까지 올라온 저력을 보여주었기에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그렇게 둘째날을 접게 된 것이다.
셋째날 아침 일찍 우리는 짐을 싸고서 다음 장소인 집안시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집안시까지는 4시간, 하지만 중국에서 4시간은 아주가까운 거리라고 했다. 마치 그 거리는 옆동네로 이동하는거와 같이 짧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만큰 방대한 대륙에 살고 있는 그들과 우리와는 시간적인, 공간적인 개념이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부터 다음 이동장소가 어딨냐고 물었다가 옆동네라고 하면 ‘아, 3-4시간 가는구나’라고 자연적으로 인식했다.
12시 30분에 도착한 우리는 삼자(자치,자립,자전을 하는교회로서 중국당국이 인정하는 교회)교회의 하나인 ‘단결교회’에 도착했다.
그 교회도 역시 조선족 교회였는데 그곳에서 점심다운 점심을 대접받았다. 물론 특별한 음식은 없었지만 계란구이,고추등과 같은 한국적인 음식이 나왔기 때문에 난 개걸스럽게 밥을 먹었다.
우리는 그날 저녁에 그곳에서 수요예배를 함께 드리기로 하고 집안시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와 장수왕릉을 돌아보았다.
한때 만주일대를 휩쓸며 중원을 지배했던 왕이라고하기엔 초라하기 그지 없는 무덤, 고작 자신의 몸만 들어갈수 있는 관을 보면서 인생무상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던 시간이다.
그리고 3미터가 넘는 거대한 비석에 줄줄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적어놓았지만 그것은 한낱 ‘과거지사’ 오늘날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니 그것도 남의 땅에 와서 우리나라 왕의 비석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리 모두는 찹찹한 마음을 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샤워한번 하지 못해서 온몸이 근질근질한 탓에 집안시에 목욕탕이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서 그곳을 향했다. 우리는 물에 몸을 푹 담그고 그동안 쌓인 여독을 풀 마음을 가지고 목욕탕에 들어갔는데, 그러한 기대가 한꺼번에 ‘와르르’무너져 내렸다.
어둠침침한것도 두말할 필요없고 바닥에는 검은 때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욕탕에는 물이라고는 찾아볼수 없었다. 한마디로 동네목욕탕보다 더한곳이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샤워만을 하고서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웃지 못할 한가지 해프닝이 발생했다.
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우리를 가이드하던 조선족이 나더러 다른 사람이 나올때까지 이 층 휴게실로 가라는 것이다. 난 멋도 모르고 목욕복만 겉치고 이층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갈림길이 나왔다. 난 왼쪽이겠지 하고 그곳의 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젊은 아가씨들이 활짝 웃으며 나를 반기는것이었다. 난 깜짝 놀라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이들에게 알리지 가이드는 나를 그쪽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는 누워서 쉴수 있는 간이침대가 있었다. 결국 내가 갔던 것은 휴게실이 아니라 안마시술소였던 것이다. 얼마나 그때는 황당했는지!
우리는 샤워는 했지만 찜찜한 마음을 가지고 다시 단결교회로 와서 저녁을 먹고 7,80명의 사람들과 함께 수요예배를 드렸다.
우리를 인도하던 임사장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중국에서는 외부에서 목회자가 오면 설교를 못하게 한다. 그러나 강의는 상관없기 때문에 주로 강의라는 명목으로 설교를 하는데 강대상에는 올라가지 못하고 밑에서 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님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목사님의 말이 끝나기기 무섭게 ‘아멘’‘아멘’하는데 난 처음에 어디 기도원에 온줄로 착각했다. 그만큼 그들의 믿음은 순수했고 뜨거웠다.
우리는 예배중간에 특송을 하고서 아쉬운 그들과의 만남을 추억속으로 밀어넣은채 우리는 또다시 차에 몸을 싣고서 통화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중국에서의 첫 번째 기차여행이라는 기대감을 안고서 기차가 떠날시간 맞추어 도착했다. 그런데 기차역으로 가는 도중에 몇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그곳에도 ‘패러디’ 있는지 우리 나라의 정통 패스트푸드점인 ‘롯데리아’의 이름을 살짝 바꾸어 ‘롯디리아’라는 간판이 우리 눈에 보이자 우리 일행은 모두다 웃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이한점은 우리를 태운 차가 통화에는 도착했지만 역을 찾지 못해서 그곳에 있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는데 그 사람은 돈을 주면 가르쳐주겠다는 것이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런데 그 것은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 지역전체가 그런 분위기란다.
어쨌든 우리는 다행히 역을 찾아서 기차에 몸을 실었는데 또다시 특이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삼층침대.
기차에 삼층침대가 있다는것도 신기했지만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과 뭔가 지저분해보이는 시트커버와 이불위에 몸을 얻도 있자니 영 기분이 찜찜했다.
그래도 80년대 내가 자랐던 고향집과 같은 분위기인지라 그때를 생각하며 감사함으로 잠을 청할려고 있는데 승무원처럼 보이는 여자분이 와서 우리더러 ‘한국축구가 엄청 잘한다’라고 칭찬을 했다(물론 말이 통한건 아니다. 그분이 손으로 공모양을 그린뒤 발로 차는 시늉 그리고 우리를 가리키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모습을 보고서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디랭귀지의 위력이다) 그래서 우리도 웃으며 그분에게 그분을 가리키며 엄지손가락을 세운뒤 중국축구도 최고라고 했다. 그러자 그분은 손을 흔들며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우리는 중국선수의 이름을 이야기하며 ‘최고’라고 했고 그렇게 말은 통하지 않지만 잠시동안의 즐거움을 간직했다. 그러면서 축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지 새삼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밤 11시에 기차를 타고서 다음날 아침 6시에 이도백화(장배)역에 도착했다. 바로 그곳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라고 할수 있는 백두산이 위치한곳이다.
우리는 이도백화역에서 내려 그곳에서 가까운 조선족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뒤 현지인이 운전하는 지프차를 타고 백두산 등정을 하였다.
그곳에서 백두산까지의 거리는 차를 타고서 1시간 40분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백두산 꼭때기인 천지연까지 차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참으로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데도 1시간 40분이 걸리는것도 그렇지만 어떻게 2000미터가 넘는 백두산 정상까지 차가 올라갈수 있는지...
이런 의문점을 지닌채 지프차 짐칸에 발을 쪼그리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치 카레이스처럼 인정사정없이 속도를 내며 한참을 달려갔는데 드디어 백두산의 입구가 보였다.(중국에서는 백두산을 백두산이라 부르지 않고 장백산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불렀다. 그래서 입구의 이름도 백두산 입구가 아니라 장백산 입구라고 적혀 있었다.)
그곳에서 잠시동안 사진촬영을 하고 다시 차를 타고 드디어 가파른 길을 오르기 시작하는데 산등성을 굽이굽이 돌아가는데 얼마나 아찔하던지...쪼금이라도 차가 미끄러지면 몇백미터 낭떠러지로 떨어져 우리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꺼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운전사는 아무런 느낌없이 되도록 빨리 일을 끝마치고 싶은 심정으로 달리고 있었다.
산을 오르면서 또 한가지 놀라운 것은 정말 백두산 꼭때기까지 포장이 되었는데 아스팔트포장이 아니라 보도블럭처럼 작은 돌로서 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만리장성을 쌓았던 중국인의 위력을 새삼 느낄수 있었다.
드디어 불안한 마음을 씻어버리듯 차가 천지연 바로 밑에 도착했다.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상식은 백두산 천지연의 맑고 깨끗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하늘이 맑아야 하는데 일년중에 하늘이 맑은 날을 365일중에 50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천지연을 보고 싶다고 해서 천지연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짱저민 주석도 천지연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 삼일동안을 이곳에서 묵었다고까지 할정도록 이곳의 날씨는변화무쌍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저멀리 구름떼가 보였지만 천지연 위에는 구름한점없는 청명한 날씨였다.
우리가 정상에 올라 천지연을 바라보는 순간 난 입이 쫙 벌어졌다.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았던 천지연의 광경은 정말 형언할수 없을 정도였다. 그곳은 연못이 아니라 한점 티가 없는 거울을 얹어 놓은것만 같을 정도로 수면위와 아래의 구별이 없었다. 수면을 바라만 보아도 수면위에 무엇이 있는지 금방 알수 있을 정도로 물은 맑고 깨끗했다.
왜 이름의 뜻이 ‘하늘의 연못’이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너나 할것없이 찬송가 40장인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눈물과 함께 감동을 머금고 불렀다. 그리고 함께 기도했는데 그 기도는 감사의 기도와 동시에 탄식의 기도였다. 왜냐하면 분명 백두산은 우리의 산인데 중국을 통하여 이곳을 올라와야 하는 현실이었다. 만약 남북이 통일이 되었다면 굳이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고서 우리가 섰는 ‘이곳’(중국땅)이 아니라 ‘저곳’(북한)에서 이곳을 바라볼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더욱 간절했고 다음 우리가 다시 백두산을 등정한다면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 이곳을 바라보게 해달라고 같이 기도했다.
천지연의 황홀함을 사진속에 담고서 우리는 이곳을 오르락 내리락 했던 수많의 사람들의 일부분으로 남겨두고서 아래로 내려왔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우리는 장백폭포를 볼수 있었는데 기대했던거와는 그렇게 큰 물줄기는 아니었다. 도리어 한국의 지리산이나 설악산의 폭포를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암온천에서 익힌 달걀을 먹으면서 우리는 두만강 하류쪽으로 이동하였다. 두만강이라고 하면 언뜻 한강과 같이 넓고 푸른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두만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냇가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폭이 상당히 좁다.(물론 간혹 넓은곳도 있지만)
우리는 숭선조선족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바로 앞이 두만강이 흐르고 건너편은 북한초소가 보였다. 우리는 밥을 먹기전에 냇가와 같은 두만강에 손을 담그고 있었는데 바로 맞은편에 북한경비병들이 보였다. 그들은 풀숲에 자신의 몸을 은폐하고 망원경을 통하여 우리와 같은 관광객을 감시한다고 한다. 그래서 사진촬영이나 비디오 촬영을 하면 중국 경비병에게 연락을 해서 그것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들은 반응도 없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총을 들고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그늘져 보였다. 마음같아서야 당장이라도 달려가부둥켜 안고 울고 싶지만 냇가와 같은 작은 강 하나가 ‘나와 너’의 사이를 너무마 멀리 가록막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그들의 그늘진 모습을 뒤로 한 채 이제 우리가 4일동안 묵을곳인 중평으로 이동을 하였다. 우리는 이동을 하면서 계속해서 두만강을 따라 올라갔는데 가다가 설수 없는 그런 입장이라 차안에서 찬양하며 기도하며 북한땅이 하루 속히 통일되기를 기도했다.
우리가 그렇게 두만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북한땅을 바라보면서 아주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모든 산이 정말 신기하게도 꼭대기 까지 밭으로 변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왜 저렇냐고 물었더니 임사장님이 98년인가 북한에서 농토개량혁명을 시도하면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밭을 개간하면 사유재산을 인정해주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이곳의 사람들이 서로 먼저 밭을 일구기 위해 산꼭대기까지 그렇게 밭을 만들었단다. 하지만 여름철에 장마가 져서 폭우가 쏟아져 산에 만들어 놓은 밭이 다 산사태로 깍여져 버리고 말았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이 산을 밭으로 만든다고 나무를 다 배워버렸으니 오죽했을까! 결국 나무도 잃어버리고 농사도 못지게 되다 보니 더욱더 북한 사람들이 굶주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목격하면서 계속찬양하고 기도하면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저녁시간이 다 되었을때에 우리는 연길에 도착했다. 연길시내에 도착한 우리는 연길에서 가장 맛있다고 소문난 진달래 식당에서 냉면을 시켰다. 그때에는 손님이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점심시간에는 냉면을 먹기 위하여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록 유명한 곳이란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맛일까?라는 설레는 맘을 가지고 냉면을 먹었는데 솔직히 내 입맛에는 그렇게 맞지 않았다. 난 차라리 한국의 냉면이 그리울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일행은 맛있다면서 즐고 있었다.
식사를 다 마치고 우리는 그곳에서 두시간 정도 떨어진 중평이라는 곳으로 이동했다.그곳에는 ‘나눔 기술학교’가 있는데 이 학교는 최사장님이 한국교회로부터 선교헌금을 받아서 조선족 가운데 부모님이 없는 학생들과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직업교육을 시켜서 그들로 자립하게 하는 학교였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풍경은 참으로 고즈넉한 모습이었다. 마치 방갈로를 연상하는듯한 목조로 되어 있고 안에는 흙으로 벽을 만들어 놓은 황토집이었다.
그러한 집이 여러군데 있어서 누구나 손님이 와도 잠잘곳을 마련해 줄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최선교사님이 원대한 비전을 품고 있음을 직감할수 있었다.
첫날밤은 피로한 몸을 풀기 위하여 그곳에서 씻고 일찍 잠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처음으로 그곳에 있는 조선족 학생들과 함께 새벽예배를 드렸다. 찬양리더를 하는 학생도 조선족이었는데 우리 한국의 찬양리더보다 더 은혜롭게 찬양을 이끌었다. 조선족 학생들과 우리의 첫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아침을 먹은뒤 그들과 친선축구대회를 하게 된다. 그들의 연령은 15세에서 20세였고 우리는 21세부터 42세까지 다양한 연령이 존재했다. 그래서 풀이 잔디처럼 울창한 곳에서 나무로 골대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우리는 함께 몸을 부대끼며 볼을 찼다. 결과는 1대 1. 비록 비기긴 했지만 그들의 스피드와 저력은 대단했다.내일 아침 다시 찰 것을 약속하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8시 30분 우리는 일부 일행과 떨어져 있었던 대구 달서교회 청년팀들을 만나게 된다. 멀리 이국땅에서 같은 경상도 사람을 만나게 되자 참으로 반가웠다. 물론 나보다 더 반가워했더 사람은 같이 대구에서 사역하던 백성직 전도사였다. 차안에서 사투리를 써가며 열나게 떠들며 좋아하던 모습을 보면 마치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내 옆에도 김지숙이라는 청년이 앉았었는데 그는 이곳에 올 때 부모님이 아직 교회를 다니지 않으시기 때문에 ‘문화탐방’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저번에 필린핀 선교여행때는 ‘어학연수’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녀왔단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마음이 우러나오는 자매였다.
우리는 새로운 팀과 함께 합류하여 훈춘으로 이동하였다. 훈춘으로 가는 도중에 용정이라는 곳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은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 시인이 나왔던 대성중학교가 있는곳이다. 대성중학교에 도착하자 윤동주 전시실이 따로 있어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전시실에 들어가자 조선족 처녀로 보이는 아가씨가 그곳의 출신인 윤동주 시인을 비롯한 문익환 목사등 우리나라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한 선각자들에 관하여 설명해주었다.
비록 민족정신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한 민족정신이 우리 나라에 스며있기에 그나마 오늘날과 같은 민족이 존재하고 있음을 강하게 느껴졌다.
대성중학교를 나와서 우리는 ‘선구자’라는 노래에 등장하는 ‘일송정’이라는곳을 방문했다. 일송정은 나느막한 산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일송정에서 앞으로 보면 용정시가 보이고 뒤로 보면 혜란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혜란강을 보면서 우리 역사의 굴절된 모습이 떨올랐다. 그러나 강은 휘어져 있지만 강물은 끊임없이 흘렀던것처럼 우리 민족또한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 나갈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곳에서 우리는 함께 모여 찬양하며 기도했다. 이곳에 있는 조선족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해서 이들이 북한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이 되게해달라는 기도를.(조선족 사람들은 북한에 자유롭게 들어갈수 있단다)
그곳을 내려와서 우리는 다시 두만강을 옆에 끼고 이동하면서 계속해서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북한의 남영시를 옆에 두고 우리의 기도는 더욱 뜨거워졌다. 사실 말이 시라고 하지만 북한의 시는 우리나라의 농촌마을에 불과할정도로 작고 보잘 것 없는 곳이다.
다시 우리는 중평으로 돌아와서 ‘양고기파티’를 벌이게 된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양고기. 비록 질기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맛은 있었다. 그렇게 맛있는 저녁을 먹고나서 숙소에서 잠시 몸을 푼뒤 그곳에 있는 조선족과 함께 하는 캠프파이어를 하였다.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기술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의 이름과 그들이 지금 배우고 있는 기술들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도 서로 각자가 다니고 있는 학교 이름을 나누며 장작처럼 우리의 관계를 뜨겁게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한 기도를 하고나서 다음날이 주일이라 숙소에 들어와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아침을 먹고 왕청현에 위치한 고아학교를 방문하였다. 그곳은 최선교사님과 임선교사님이 고아들을 모아놓고 교육시키는곳인데 7세부터 15세에 이르는 학생들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그들은 잠시 신기한 눈짓으로 보았지만 같이 어울리는 시간을 가진뒤에는 어느정도 친하게 되었다. 특별히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어린 아이들이 노래를 했는데 8살난 아이가 ‘푸르하늘 은하수’라는 동요를 부르자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함을 도리어 우리가 뭉개뜨리지 않을까하는 조심스러움이 생겨났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은뒤 우리 남자들은 그곳의 아이들과 축구를 하였는데 정말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 눈에는 초등학생, 중학교 학생밖에 보이지 않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축구실력은 정말 놀라웠다. 정확한 패스와 조직력 그리고 측면을 파고들어서 센터링하는 것은 정말 축구교과서를 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처음 경기를 갖기전에는 ‘이까지쯤이야’했지만 경기가 시작될수록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결국 3대 2로 우리가 지고 말았다. 참으로 대단한 아이들이다.
그들과의 짧고도 아쉬운 만남을 뒤로 한 채 다시 중평 나눔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후에는 학교별 교회별 배구대회 족구대회가 있었다. 날이 무척 더워서 배구대회는 난 참가하지 않았는데 족구는 참가하였다. 우리팀은 장신대에 다니는 전도사님과 고신대에 다니는 전도사님이 팀을 이루어 경기했는데 예상외로 우리팀이 상대팀을 누르고 결승까지 올랐다. 하지만 결승에서는 세트스코아 3대2로 지고 말았다. 하지만 승패와는 상관없이 서로 어울림의 시간이 있었음이 참 좋았다.
그렇게 오후 시간을 보내고 저녁 예배를 드리기전 우리 일행은 정말 의미있는 만남을 가졌다. 그것은 탈북자 부부와의 만남이다.
3년전에 9살과 7살된 아이를 북한에 남겨두고 두 부분만 중국으로 도망왔다고 한다. 지난 3월에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는데 9일중에서 3일동안만 자기 아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낮에는 숨어 지내고 밤이 되어야만 만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면서 눈시울을 적시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과 함께 대화를 하던 우리도 절로 나오는 눈물을 참을수는 없었다.
지금 북한의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것보다 더 끔찍하다고 한다. 어느정도냐 하면 최소 한집에 1,2명은 꿂어 죽어가는데 그들을 치울 힘도 없고 국가에서는 차도 없어 그들을 그냥 집에 묻어야 할 정도라고하니...그리고 어린아이들은 먹을것이 없어서 아무것이나 보이는대로 먹기 때문에 온갖 병에 걸려서 또 죽어간다고 한다.
언젠가 뉴스에서 우리나라에서 먹다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가 북한의 1년 주식보다 못하는 소릴 들었다. 얼마나 우리는 북한에 비해 호의호식하고 있는지...그런줄도 모르고 흥청망청 돈을 뿌리대는 일부 사람들을 보면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그들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시 우리들의 세계로 돌아왔다. 주일 저녁예배를 찬양과 기도가운데 은혜롭게 드린뒤에 한국이 터키에게 어이없이 패하는 모습을 보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중국에서 맞이하는 주일, 아마 앞으로 이곳에서 주일을 맞이할수 있는 날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안고서 아침을 먹은뒤 9시부터 아침예배를 드렸다.
비록 모양이 교회처럼 생긴 건물은 없지만(선교사가 교회를 짓는 것은 중국에서는 불법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임은 분명 교회였다. 예배의 형태는 거의 우리 한국예배와 동일했는데, 기술학교의 찬양대가 노란옷을 입고 찬양을 드리는 모습속에 하나님이 이곳 중국땅에도 함께 하심을 분명히 느낄수 있었다.
그들의 찬양이 있은뒤 우리 일행 가운데서도 찬양을 하였은데 역시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노래였다.
예배가 마친뒤 서로 교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각자가 나와서 자유롭게 자신의 느낌과 찬양을 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중에 가장 돋보였던 시간은 나와 함께 갔던 유승현 전도사님의 ‘앗 뜨거워’라는 율동이었다. 이전부터 노래는 어느정도 알고 있었지만 율동은 몰랐는데 그 커다란 몸으로 이쪽에서 저쪽까지 움직이며 율동을 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모든 정말 박장대소하며 즐겨운 시간을 가졌다. 전도사님의 말로는 그 율동이 ‘군대율동’이라나. 암튼 멋진 무대였다.
나도 결국 앞으로 나가서 소개를 하였는데 이번에 이곳에서 느낀점과 앞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목회자가 될것이라는 것, 그리고 장기간은 아니지만 단기간으로 선교사로서 생활을 해 보고 싶다는 점을 말씀드렸다. 그런뒤 김희준 전도사님과 함께 ‘비전’이라는 찬양을 불렀다.
중평에서의 마지막 아침을 먹고서 달서교회 청년부는 그곳에 남고 우리 일행은 첫 번째 방문장소인 도문으로 향했다. 도문은 중국식이름이고 우리 식으로 하면 두만강이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다리가 하나 놓여 있는데 건너편이 남영이라는 동네이다. 우리 한국의 작은 마을과 같이 플라타너스 나무아래에 노인들이 거니는 모습이 보였다. 가옥들은 우리나라 60년대를 연상시킬정도로 낚았으며 사람이 사는지조차 못느낄정도였다.
이렇게 가옥들만 살펴본다면 북한은 우리와 최소 3,40년정도 뒤쳐져 있고 중국은 2,30년정도 뒤처지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정적인데 비해 중국은 지금 산업혁명시대로 끊임없이 탈바꿈하기 때문에 중국과 우리와의 시대차이는 갈수록 좁혀질 전망이다.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다리로는 중국사람은 언제든지 들어갈수 있지만 북한 사람은 중국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야말로 폐쇄국가인셈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잠시 기도를 드린뒤 김일성의 얼굴이 그려진 북한지폐를 기념으로 구입하고서 다음장소인 나신선봉지구로 이동했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원시림과 같은 협곡을 지나기도 했으며 산마을과 같은 동네를 지나기도 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달린뒤 나진선봉지구가 보이는 국경에 도착했다. 그곳도 마찬가지로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만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날따라 맑은 날씨인지라 햇살이 강물에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 그리고 강변에는 하얀 모레가 깔려있는 모습을 보면서 김소월 시인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라는 동요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만큼 그곳의 두만강은 어떤 이념이나 갈등도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태고의 모습을 간직한거였다. 하지만 그곳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이쪽과 저쪽도 갈수는 있어도 올수는 없는 현실이라니 아쉬운 마음이 한이 없다.
우리가 바라본 나진 선봉지구는 우리나라 근로자가 그곳에서 원자력 전력시설을 건설하는곳이다. 아마 그들도 우리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반가워 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함께 기도했는 가졌는데 특별히 임선교사님이 다음에 통일이 되면 자기는 나진선봉지구에 가서 교회를 세울것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기도를 부탁해서 우리를 선교사님께 손을 얹고서 정말 선교사님의 소원대로 이루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곳에서 다음으로 우리는 훈춘시 금상각경구(방천경구)를 방문했다.그곳은 북한과 러시아 중국의 경계선이 맞닿아있다. 그곳에서 보면 좌로는 러시아 우로는 북한 그리고 우리가 섰는곳은 중국인셈이다.그곳에서 보면 두만강을 사이로 러시아와 북한을 잇고 있는 철도가 보이는데 그곳을 통하여 러시아와 북한이 무역을 행한다고 한다. 그나마 북한주민가운데 나름대로 잘 산다고 할 수 있는곳이 바로 저곳이라고 조선족 가이드가 설명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인상깊었던 점은 우리에게 그곳을 설명해 주던 여자 조선족 가이드였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자 그 여자분은 상세하게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었는데 설명을 마치고 나서 우리가 함께 사진을 찍자라고 하자 그분이 말하기를 “예수님 믿으면 사진을 찍어준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 사진을 안찍겠다고 하는줄 알았는데 다시 그렇게 대답을 하자 정말 우리는 감격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가 얼마나 놀라운지 이곳에서도 이런 믿음으로 다른 사람을 전도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믿음의 사람이 있을줄이야!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고 그분과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참으로 흐뭇한 만남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우리는 북한을 바라보고 중국에서의 마지막 기도회를 가졌다. 비록 우리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이러한 발걸음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또한 계속해서 기도를 통하여 하늘보좌를 움직인다면 분명 하나님은 우리에게 통일의 기쁜 소식을 가져주시리라는 믿음을 간직하고서.
우리는 그곳을 떠나 훈춘시로 돌아와 호텔에 묵었다. 말은 호텔이고 겉모양은 그럴듯해보엿지만 역시 방안은 침대가 네 개가 놓여있고 벽에는 물이 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이정도 시설에서 묵을수 있다는것만 해도 감사했다.
저녁을 그곳에서 먹고 각자 쇼핑시간을 가졌는데 난 개인적으로 차와 도기를 구입했다. 이것을 다 합해봐야 만원이 넘지 않았으니 중국과 한국의 물가가 어는정도인지는 알만했다.(참고로 만원짜리 한 장을 중국돈으로 바꾸면 60원을 줍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25개를 사면 20원만 주면 됩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우리는 조촐한 간식자리를 마련하고 우리 일행과 임사장님과의 마지막 송별회를 열었다. 그리고 각자가 이번 순례기도여행에서 느꼈던점을 비디로 담았다.
그렇게 중국에의 일정을 마친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짐을 정리하고 훈춘 세관으로 이동했다. 출국수속을 밟은 시간은 아침 9시 출국을 한 시간은 12시 35분, 정말! 지루하고 무료한 시간의 연속. 중국에서 한국으로 농산물을 수입하는 장사꾼들이 많아서 그것을 일일이 검색하는라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래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겸 그곳에 펼쳐져 있는 잡화상을 구경하면서 아내에게 줄 선물을 하나 마련했다. 그것은 목걸이. 비록 이쁘지도 않고 비싸지도 않지만 내 마음을 담아서 줄 수 있는거라 생각하고 하나구입했다. 사실 딸인 예영이에게도 선물을 주고 싶었지만 돈도 없었고, 인형같은 것은 이동하기가 불편해서 욕심을 달래고 아내것만 구입했다.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보낸뒤 12시 30분에 세관을 빠져나와 드디어 러시아 지역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자루비노 항으로 훈춘에서 그곳까지는 두시간정도 걸렸다. 그곳으로 이동하면서 러시아의 대평원을 바라보았는데 집한채 없는 푸른 초원을 보면서 아마 우리 한국 사람이었다면 분명 이곳에 골프장을 지었을거야라는 상상을 하였다.
자루비누항에 도착한 시간은 3시 또다시 수속을 밟는데 지루한 시간의 연속, 6시에 배가 떠나니까 3시간이 넘도록 그곳에서 죽치고 있어야 했다. 간혹 농담도 하면서 서로의 시간을 달래기도 했지만 기다리는것만큼 지루한 것이 또 있을까!
드디어 기다리던 6시 모든 출국수속을 마치고 속초로 향하는 배를 탔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올때는 중국배를 탔었는데 지금 한국배를 타고서 한국으로 가는 것이다. 시설면에서나 사람들의 친절면, 그리고 무엇보다 음식맛은 한국이 최고였다.
선실에서 마지막 기도회를 가지고 각자의 시간을 가졌는데 선상에서 바라본 동해는 정말 푸르고 푸른 바다였다. 서해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지만 역시 바다는 동해구나!
그렇게 먹고 싶었던 컵라면을 그날 저녁에 배에서 먹은뒤 순례여행중의 마지막 잠을 잤다. 내일이면 또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가는거야!
마지막 아침 생각보다 늦게 배가 속초에 도착했다. 도착한 시간 10시 30분. 그날아침은 날씨가 흐려서 동해의 일출은 볼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 멋진 고국의 땅을 다시 밟게 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떨렸다.
우리 일행은 즐거웠고 아쉬었고 또한 감동의 시간이었던 순간들은 마지막 뱃길과 함께 뒤로 한 채 한국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우리는 점심을 속초에서 맛있게 먹고 각자의 삶으로 흩어졌다. 나와 백성직,안용진 전도사님은 강릉에서 내리고 나머지 일행은 서울로 또 인천으로 그렇게 각자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난 강릉에서 다시 대전으로 대전에서 다시 진주로 그리고 부모님과 아내와 나의 사랑하는 딸이 있는 고향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나온 나의 시간, 그리고 살아갈 나의 시간속에서 10일이라는 시간은 짧은것에 불과하지만 그 시간속에서 얻었던 감동과 느낌, 그리고 여러 가지 생각들은 나의 과거와 미래를 더욱 의미있게 만들었기에 “잛았다”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어렴풋이 생각되던 북한과 중국, 이제 이들의 세계는 상상이나 막연한 세계가 아니라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과 동떨어진 않은 세계로 나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주신 하나님과 이일을 추진해준 최선교사님, 그리고 나와 함께 했던 모든 분들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