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채 별채 마루에서
대문
안채 대문 아래쪽에 휜나무는 여자들 출입때 치마가 걸리지 않도록 하기위함임
사랑채의 소변기
솟을 대문
■ 정여창 고택
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인 일두 정여창 고택은 조선조 5현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이 살았던 곳으로 1세기 후에 후손들에 의해 중건. 3천여평의 대지에 12동(당초 17동)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 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고택으로 문간채. 사랑채. 행랑채. 아래채. 안채. 사당. 고방채. 별당채 등을 갖춘 실용성과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전통공간 구성기법으로 꾸며져 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과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에 내루가 앞 쪽으로 달린 전출 구조로 간결하면서도 단아하고 소박한 난간과 추녀를 받치는 활주를 세우고 있어 가늘고 긴 석주를 초석으로 삼았다.
솟을대문에는 정려를 게시한 문패가 다섯 개가 걸려있고. 문헌세가. 충효절의. 백세청풍 등을 써붙인 사랑채는 전퇴가 있으며 높직한 댓돌 위에 세워져 있다.
사랑채는 옆의 일각문을 거처 안채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일각문을 들어서면 또 한번 중문을 통과해야 되고 안채 좌측은 아래채. 뒤편은 가묘와 별당. 그리고 안사랑채가 따로 있다.
남향한 一字형의 큼직한 안채는 경북지방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달리 개방적으로 분할돼 집이 밝고 화사하다.
정여창 고택의 옛 손길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세간들은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고 양반가의 기품이 가득하며. 정여창 고택의 유적 명칭은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을 따서 ‘정병호 가옥’이라 한다.
함양은 예로부터“좌안동 우함양”이라 할 만큼 휼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낙동강 왼족인 안동과 오른쪽인 함양을 일컷는 말이다.안동이 쾨계로 유명하다면 함양은 남계 서원에 모신 정여창으로 유명한 곳이다. 정여창은 남계서원에서 서북쪽으로 있는 지곡명 개평리에서 태어 났다. 개평리에 위치한 그의 생가“정병호가옥(정여창고택)은 중요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정여창은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道學의 지주였다. 지리산에 숨어 살 때 오경과 성리학을 연구해 자신의 식견을 정리한 저술을 남겼다고 전하나 戊午士禍(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부인이 화를 두려워하여 불어 태워 버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의 학문적 성과와 업적을 조명할 조명 할 자료가 적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의 인품과 행적은 강익 등이 경상도 관찰사 姜士尙을 통해 사액을 청한 狀告(장고)에 의하여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儒先(유선) 정여창은 아버지 鄭六乙이 義州 通判(통판)으로 있을 때, 중국 사신 張寧(장영)이 정여창을 보고 기특히여겨 지금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정여창은 성장하자 학문 염려에 힘쓰되 읽고 기억하는 학습은 비루하게 여기고 性理에 관한 학문을 지극히 좋아하여 침착하게 연구한 나머지 깊이 터득하였다.親喪을 당했서는장례와 제사를 꼭 예법대로 거행하였으며 하루도 喪服을 벗지 않고 삼년을 廬幕(여막)에서 나가지 않았다.그는 일찍이 은거 할 뜻을 품고 처자를 데리고 두류산(지금의 지리산의 다른 이름)밑에 가서 집을 짓고는,자연을 즐기며 생을 마칠 생각을 했다. 그후 성종께서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다가 과거에 급제하여 동궁 연산군을 가르치는 일을 맡아서나 동궁 연산군은 그를 꺼려 했다. 안흠 현감을 자청해 나가서 정사를 베푸는데 인서를 앞세웠고 교화시키기를 마치 신명처럼하였고 도 학문을 권장하고 풍속을 교화 시키는일을 힘써 봄 가을로 양로예를 행하고 재능에 따라 사람을 가르쳤으므로 성취된 인재가 많았다.
정여창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었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육을(六乙)이다.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理氣論)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物欲)과 공리(功利)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立志)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은 정몽주(鄭夢周)·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었다.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공격했다. 정여창 역시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소각되어 대부분이 없어지고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 文獻公實記〉에 일부가 전하며, 1920년 후손이 유문을 엮어 만든 〈일두유집〉이 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10)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나주 경현서원(景賢書院),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합천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첫댓글 빼꼼이 보이는 문사이의 바깥세상... 또 다른 미지의 시간이 있을법한---- 그래서 숙연해 집니다
. 오랜 세월을 보낸 빛 바랜 나무 기둥도..정말 정감이 갑니다
석가산 시험에 나왔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