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53) 조선의 3대 천재
최남선, 이광수,홍명희는 식민지 치하 조선의 3대 천재였다. 셋은 문인이자 언론인으로 이름을 널리 떨치지만 영욕이 교차하는 삶을 역사에 남긴 사람들이다. 최남선은 잡지 '소년'을 창간한 지 1년 후인 1909년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3개월 동안 머물다가 이듬해 2월 1일에 귀국했다. 이때 일본에서 홍명희의 소개로 이광수와 처음 만난다. 당시 최남선은 갓 스무 살이었고, 홍명희가 22살, 이광수가 18살이었다.
당시 이광수는 무명의 청년이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가. 최남선은 이광수를 만나는 순간 우리 문단에 첫손 꼽을 수 있는 '천재'라고 감탄했다. 홍명희와 이광수를 "장래 우리나라 문단을 건설하고 증광(增廣)도 할 뿐더러 다시 한 걸음 나아가 세계의 사조를 한번 번동(飜動)할 포부를 가지고 바야흐로 경인충천의 준비를 하는 두 잠룡(潛龍)"으로 평가했다. 최남선은 이들로부터 잡지 발행에 도움을 기대했다. 귀국 후 첫 번째로 낸 '소년'지에 실은 '편집실 통기'에 홍명희와 이광수가 앞으로 잡지 발행에 참여하게 되어 '소년'의 앞길은 광명이라고 말했다(소년, 1910년 3월호).
이광수는 최남선을 만난 후 고주(孤舟)라는 필명으로 1910년 2월부터 '소년'에 단편 '어린 희생'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이광수가 우리말로 처음 쓴 소설이라는 설도 있어서(김윤식, '한국 근대문학연구'·1983), 그의 문학 활동은 '소년'에서 시작되었던 셈이다. 이광수는 그후 최남선이 발행한 '청춘'에도 적극적으로 기고하여 신문장운동과 문학활동을 전개하였다.
홍명희는 1924년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가 경영난으로 판권을 넘긴 후 그 신문의 사장을 맡는다. 신간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한 그는 1928~1939년 '조선일보'에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연재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최남선은 '소년'을 기반으로 1910년 2월 27일 원각사에서 제1차 '소년강화회(少年講話會·공개 강좌)'를 개최하려 했지만 통감부의 금지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몰상식한 금지를 맛나 회중(會衆)까지 많이 모았다가 그만두게 되었다"고 분노를 터뜨렸다(소년, 1910년 3월호, '편집실 통기'). '학예증간권(學藝增刊卷)' 발행 계획도 세웠다. 이는 국민 교육용 교과서 발행 계획이었으나 소년 8월호가 발간 이틀 만에 정간 처분을 당해 이 사업도 결실을 보지 못했다.
한일병합 후 최남선은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립해 고문헌을 수집, 간행했다. '5천년 왕성선철(往聖先哲: 옛날의 성현과 철인)의 정신적 유산을 되살려 민족문화를 현창하며, 조선 고문명과 세계 학계에 이바지한다'는 취지였다. 이리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과 같은 방대한 고전들을 간행하게 된다. 최남선의 계몽과 언론활동은 '붉은 저고리', '아이들보이', '청춘'에 이어 1920년대 '동명', '시대일보'로 이어진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명예교수·언론정보학
조선일보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