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3. 고려시대의 불교
4) 무인시대의 불교 2
요세와 백련사
천태종의 백련결사(白蓮結社), 즉 백련사는 요세(了世, 1163~1245년)에 의해 시작되었다.
요세는 신번현(현재의 합천지역)의 호장 집안 출신으로
12세에 고향의 천태종 사찰에서 출가한 후
23세 되던 명종 4년(1174)에 승과에 합격하였다.
그 후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며 천태학을 수학하던 중
신종 원년(1198)에 개경의 고봉사(高峯寺)에서 개최된 법회에 참석했다가 실망하고서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신앙결사를 만들 생각을 하였다.
이 때 팔공산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였던 지눌이
요세에게 글을 보내어 참여를 권유하였으므로
동료들과 함께 정혜결사에 참여하여 참선수행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참선수행으로 만족하지 못했기에 지눌이 송광산으로 옮길 때에 동행하지 않았으며,
희종 4년(1208) 월출산에 머물 때에 문득 ‘천태의 묘해(妙解)에 의지하지 않으면
수행의 120병(病)을 어찌할 수 없다’라고 했던 영명 연수의 말을 생각하고서
천태의 법화신앙에 의한 수행을 결심하였다.
이후 만덕산(萬德山)으로 옮긴 그는 고종 3년(1216)에 백련결사를 결성하고
고종 19년(1232)에는 보현도량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천태신앙에 기초한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백련결사는 천태종의 법화신앙과 정토신앙에 기초한 신앙결사였다.
백련결사의 중심이 된 보현도량은 법화 삼매를 닦아
정토왕생을 희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구체적인 수행법은 천태 지자의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의 내용에 의거하였다.
요세 스스로 이에 의거하여 매일 선관(禪觀)을 닦는 여가에 법화경 전체를 독송하고,
준제(準提)다라니 천 번과 아미타불 만 번을 염송하며,
53체불(體佛)을 열두 번씩 돌며 전생의 업장을 참회하는 수행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실천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에 ‘서참회(徐懺悔)’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요세의 백련결사는 천태교학에 기초하면서 정토염불신앙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정토신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북송대 천태종의 신앙경향과 통하는 것이었다.
또한 요세는 지눌이 주재한 정혜결사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선에도 이해가 깊었지만 경전과 계율을 무시하고 참선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는 의천의 선종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통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요세는 자신의 사상적 계보를 이야기할 때에
의천 이래 고려 천태종의 흐름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요세 이후 백련사는 제자인 천인(天因)과 천책(天址) 등으로 계승되었다.
천인과 천책은 모두 성균관에서 공부한 유학자 출신이었는데,
고종 15년(1228)에 함께 요세의 문하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중앙관료와 유학자들도 백련사에 관심을 갖고 참여했는데,
그 배경에는 유학자였던 천인과 천책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천인과 천책 이후 백련사는 그 제자들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면서
수선사와 함께 무인집권기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수행결사로서 그 위상을 확립해 갔다.
재조(再雕)대장경
무인집권기인 고종 18년(1231)에 몽골의 군대가 고려에 침략해 들어왔다.
최씨 무인정권은 일단 몽골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강화조약을 맺은 뒤
다음 해에 곧바로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결사항전을 선언하였다.
이후 몽골은 고종 46년(1259) 고려 정부가 최종적으로 항복할 때까지
계속 군대를 보내서 전국을 유린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가 겪은 피해는 막심한 것이었는데,
불교계로서는 특히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판이 몽골군의 방화로 불타 없어짐으로써
현종대 이래 장기간에 걸쳐 행해졌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대장경이 의미하는 국가의 문화적 자존심을 고려할 때
이러한 사태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곧바로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불사가 시작되었다.
고종 24년(1237)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이규보가 국왕을 대신하여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는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고려인들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런 큰 보배가 없어졌는데
어찌 일이 힘들다고 하여 다시 만드는 것을 꺼리겠습니까?
이제 국왕과 관료들은 함께 큰 서원을 발하여
담당 관청을 두고 일을 시작하려 합니다.(중략)
원하옵건대 부처님과 여러 천신들은 이 간곡한 정성을 굽어 살펴주십시오.
신통한 힘을 빌려 주어 오랑캐들을 멀리 쫓아내어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해 주시고,
전쟁이 그치어 나라가 편안하며 국운이 만세토록 유지되게 해 주십시오.
대장경의 재조(再雕) 작업은 담당 관청인 대장도감(大藏都監)의 관리 아래 이루어졌다.
대장도감은 강화도의 본사(本司)와 함께 남해섬에 분사(分司)를 두었다.
본사에서는 대장경 제작을 위한 계획수립과 경비의 조달 등을 담당하였고,
대장경의 실제 판각작업은 주로 남해의 분사에서 이루어졌다.
남해섬은 대장경판의 재료가 되는 목재를 조달하기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계속되는 몽골의 침략으로부터도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대장경 제작비용의 대부분을 담당하였던
무인집정자 최우와 그의 처남 정안(鄭晏)의 경제적 기반이 있는 곳으로
필요한 경비의 조달에도 유리하였다.
최씨 정권은 최충헌 이래 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식읍(食邑)을 하사받아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고,
하동을 본관으로 하는 정안 역시 남해섬에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대장경의 재조작업은 고종 38년(1251)에 최종적으로 완료되었다.
이 재조 대장경에는 모두 1,496종 6,568권(639함)의 불경이 포함되었는데,
고려 전기의 대장경에 비하여 500여 권 이상 늘어난 것이었다.
완성된 대장경판은 총 81,137개이며 하나의 경판 양쪽에 경전을 새겼으므로
인쇄된 대장경의 분량은 총 16만 면을 넘는다.
대장경을 새로 제작할 때에는 단순히 종래의 대장경을 그대로 판각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 대장경에 포함될 경전의 목록을 작성하고,
여러 판본을 모아 가장 완전한 내용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목록 작성과 교감 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화엄종 승려인 수기(守其)였다.
승통이던 수기는 불타버린 대장경의 인쇄본을 저본으로 하고
거기에 송나라 및 거란의 대장경, 그리고 그 밖에 구할 수 있는 여러 판본들을 대조하여
최선본을 작성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판본의 교정 내용은
그가 편집한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완성된 대장경판 들은 추가로 판각된 것과 함께
강화도로 운반되어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에도
계속 강화도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판은
조선 개국 직후인 태조 7년(1498)에 해인사로 옮겨 봉안되었다.
해인사에는 본래 고려의 실록 등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있었는데,
조선 개창 이후 『고려사』의 편찬을 위해 고려왕조실록을 서울로 옮긴 후
비어 있는 사고에 대장경을 봉안한 것이다.
원래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던 강화도의 대장경 판전은
이후 조선 왕조의 사고로 사용되었다.
고려의 재조대장경은 근대 이전에 동아시아에서 제작한 대장경 중
유일하게 판본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대장경이며,
또한 다양한 판본을 대조한 꼼꼼한 교정으로
가장 완전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다른 곳에는 전해지지 않는 불경들도 여러 종 수록하고 있다.
고려 대장경은 당시 사회에서 불교의 위상과 역할을 조망할 수 있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고려 말 청주의 흥덕사에서 백운 경한이 『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이란 책을 금속활자본으로 간행하였는데
이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인쇄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백운은 역대 부처님과 조사들의 법어와 게송 등에서 선의 요체가 되는 것을 가려 뽑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금속활자를 통해 불서를 간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통일신라시대 목판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우리 선조들이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매우 노력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우리 선조들이 문화적으로 세계를 선도해 나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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