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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울 좋은 전체론 – 한의학과 빈 서판론
나는 소위 양의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학적 의학이며 한의학은 ‘학’자를 붙일 자격도 없는 돌팔이 의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편의상 양의학과 한의학이라고 부르겠다.
한의학 옹호론자에 따르면 양의학은 서양의 못된 환원론(reductionism)을 답습하고 있다. 즉 인체를 그 구성요소들로 나누어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나무를 보려 하다가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진다. 반면 한의학은 인체를 전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전체론(holism)이기 때문에 양의학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한의학에서도 인체를 여러 구성요소들로 나눈다. 한의학에 따르면 인체는 오장육부로 이루어져 있다. 오장은 간장, 심장, 비장, 폐장, 신장을 뜻하며 육부는 위, 대장, 소장, 쓸개, 방광, 삼초를 뜻한다. 양의학과 한의학이 다른 점이 있다면 양의학이 인체의 각 기관의 기능을 상당히 정확하고 상세하게 밝혀낸 반면 한의학은 각 기관의 기능에 대한 옛날 사람들의 상상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옛날 사람들도 해부를 통해 심장이 피를 펌프질 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알아냈을 수 있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간이 해독 작용을 한다는 사실, 허파가 산소를 피에 공급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리가 없다. 산소라는 것이 알려진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과거에는 한의학에서 말하는 간장이 실제로 배 속에 있는 간을 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배 속에 있는 그 간이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능을 행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현대 생리학의 발달로 그것이 엉터리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러자 한의사들이 “우리가 말하는 간장은 배 속에 있는 그 간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발뺌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한의학은 반증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전략을 택했다.
한의사들은 “몸의 균형이 깨졌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설명을 전체론적인 설명이랍시고 내 놓는 것이다. 이것은 줄타기를 할 때 균형을 잃으면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떨어져서 망하게 된다는 이미지에서 빌려온 듯이다. 하지만 막연한 이미지만 있을 뿐 도대체 “균형이 깨졌다”가 무엇을 뜻하는지가 너무나 애매하다. 애매하면 애매할수록 반증되기 힘들다. 한의학의 “간장”과 “균형” 등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개념들이다. 한의학에서 전체론이란 그냥 애매모호하게 둘러대는 것 이상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양의학은 어떤가? 양의학은 인체를 부품들로 나누고 부품들의 작동만 규명하는 것에만 골몰하고 있나? 현대 생리학이 심장, 간, 허파와 같은 인체의 각 기관들에 대해 규명하려고 무척 애쓴다는 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생리학에서는 각 기관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전체를 형성하는지에 대해서도 열심히 규명하려고 하며 이미 많은 것들이 알려졌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호흡계에 속하는 허파에서는 들여 마신 공기 중에서 산소를 추출해낸다. 그 추출해낸 산소는 피에 있는 헤모글로빈 속으로 들어간다. 피는 순환계에 속하는 심장에서 펌프질 한다. 피는 소화계에 속하는 소장에서 흡수한 영양분을 운반하기도 한다. 영양분과 산소가 결합되면 근육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생긴다.
양의학에서는 전체를 여러 부분들로 쪼개서 각 부분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밝힌다. 이 과정은 환원론이다. 그 후에 그 부분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상호 작용하는지를 밝힌다. 이 과정은 전체론이다. 나는 이것이 제대로 된 환원론과 전체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는 인체를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뾰족한 길이 없다.
반면 한의학에서도 나름대로 전체를 여러 부분들로 나누지만 엉터리이거나 너무 애매하다. 즉 이미 반증되었거나 반증이 불가능하다. 또한 부분들의 상호 작용이 아닌 그냥 “균형이 깨졌다”는 난데 없는 명제가 나온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너무 애매하다. 이런 것을 두고 한의학에서는 자신들이 전체론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 심리학은 양의학을 모방하려고 한다. 즉 정신을 여러 부품들로 쪼개서 고찰하려고 한다. 인체가 여러 기관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뇌 또는 정신도 여러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대량 모듈성(massive modularity) 테제의 의미다.
뇌의 회로들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심장이나 간처럼 해부를 해서 쉽게 관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부품들이 있는지 알아내는 것조차도 매우 힘들다. 생리학이 해부학에서 출발할 수 있었던 반면 심리학은
그런 식으로 출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최신 기술인 fMRI 같은 장비로도 뇌에 대해 매우 조잡한 수준에서밖에
관찰할 수 없다. 반면
현재 진화 심리학자들은 몇 가지 부품들과 그 기능들을 어느 정도 확인하는 수준에 만족하고 있다. 시각 메커니즘의 경우처럼 상당한 진전을 이룬 경우도 있지만 다른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초보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각 부품들이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하는지를 밝히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환원론적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진 다음에야 전체론적 과정이 가능한데 심리학의 경우 환원론적 과정도 아직 지지부진한 것이다.
빈 서판론자들은 진화 심리학자들의 이런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고 비웃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비웃고 있는 빈 서판론자들은 뭘 하고 있나? 그들은 전체론을 이야기하지만 한의사들이 그러듯이 애매한 명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문화, 학습, 사회화, 모방에 대해 떠들면서 마치 대단한 설명이라도 되는 듯이 광고한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니다. 엉터리 설명이거나 현상의 재기술(redescription)일 뿐이다.
예컨대 빈 서판론자는 질투가 사회화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질투하는 문화권에서 자라다 보니 질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대로 된 설명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왜 질투 메커니즘이 퇴화했는지 밝혀야 한다. 침팬지 수컷도 질투를 한다. 따라서 침팬지와 인간의 공동 조상의 수컷도 질투를 했을 것 같다. 성적 질투는 수컷의 이기적 유전자에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인간의 경우 질투 메커니즘이 퇴화했다고 본다면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빈 서판론자는 그 이유를 밝혀야 할 것이다.
둘째, 인간 질투의 적응 가설을 반박해야 한다. 남자의 성적 질투는 자신의 번식을 위해 설계된 것 같아 보인다. 아무 상황에서나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관계되었을 때 질투한다(남자는 아내의 자식에 많이 투자하는데 아내가 관계되었을 때 질투해야 남의 자식을 키울 위험이 적다). 키스했을 때보다 성교했을 때 더 질투한다(성교를 하면 임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질투는 기분 좋은 감정이 아니라 괴로운 감정이다(남의 자식을 키우면 번식에 손해를 보는데 동물은 보통 번식 손해를 볼 때 괴로워한다). 질투하면 공격적으로 변한다(연적이나 아내를 공격하면 둘 사이의 성교를 줄일 수 있다). 질투는 감시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감시하면 바람 피우는 것을 줄일 수 있다). 자신보다 아내의 번식 가치가 높을 때 더 질투를 많이 한다(이 때 아내가 바람 피울 가능성이 더 크다). 질투하면 자식에게 소홀해지는 경향이 있다(남의 자식일 가능성이 크다면 덜 돌보는 것이 유리하다). 적응론의 논리와 질투 현상이 이런 식으로 세세하게 부합하는 것은 모두 우연이란 말인가? 우연이 아니라면 적응론의 대안이 되는 다른 설명을 제시해야 한다.
셋째, 질투는 인류 보편적이다. 성적 질투가 전혀 없는 문화권이 있다는 Margaret Mead와 같은 문화 인류학자의 보고는 뻥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빈 서판론자는 이런 보편성이 왜 생기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넷째, 질투가 모방된다고 설명하려면 왜 인간이 어떤 것은 모방하면서 다른 것은 모방하지 않는지를 밝혀야 한다. 예컨대 가만히 한 자리에 서 있는 나무를 모방하며 수십 년 동안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 나무는 모방하지 않으면서 질투하는 다른 사람은 모방하나? 어떤 사람이 놀림감이 되는 짓을 하면 사람들은 보통 그런 짓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려고 하지 모방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흉내를 내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놀리기 위해 흉내 내는 것과 진지하게 모방하는 것은 다르다. 질투를 하면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왜 질투의 경우에는 모방하나?
다섯째, 모방과 학습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모방과 학습을 쉬운 일이 아니다. 인공 지능이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인간이 하는 만큼 학습하는 컴퓨터나 로봇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다.
빈 서판론자들은 이런 것들을 제대로 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인간에게는 학습 능력이 있으며 질투는 그 학습 능력이 발현된 결과라고 그냥 우길 뿐이다. 인간에게 학습 능력과 모방 능력이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나? “인간에게는 모방 능력이 있다”와 “인간 주변에는 질투하는 사람이 있다”가 결합된다고 해서 “질투는 모방 때문이다”라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모방 능력이 있다”와 “인간 주변에는 볼 줄 아는 사람이 있다”가 결합하여 “시각은 모방 때문이다”라는 결론이 나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눈부시게 발전한 양의학에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한의사들은 그 한계를 비웃을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한의학은 양의학보다 훨씬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 진화 생물학에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창조론자가 그 한계를 비웃을 자격은 없다. 왜냐하면 창조론자는 어떤 설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냥 ‘신’이라는 단어만 외치고 있을 뿐이다. ‘신이 그렇게 창조했다’는 설명이 아니다. 진화 심리학은 생리학보다 훨씬 못하다. 하지만 빈 서판론자들이 그 한계를 비웃을 자격은 없다. 창조론자가 ‘신’을 외친다면 빈 서판론자는 ‘학습’, ‘문화’, ‘사회화’, ‘모방’을 외칠 뿐이다.
빈 서판론의 심리학은 기독교의 영혼론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했다. “인간에게는 신이 주신 영혼이 있어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에서 ‘신’을 빼고 ‘학습’을 추가했을 뿐이다. 이런 식의 전체론은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다. 오직 부품들에 대한 해명, 메커니즘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진정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첫댓글 근데 아직도 빈 서판론이 대세인가요?? 한때 진중권이 청소년 왕따현상의 원인을 지적하면서 식민통치,군부독재,천민자본주의와 같은 거시적 환경적 이유를 거론하는 것을 보며 대단히 막연하다는 느낌을 받은적이 있는데.. 요즘은 그렇게 막연한 환경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물론 고전적(?) 골수 좌파들 쪽에서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순수한 빈 서판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대다수 지식인들은 빈 서판론 방향의 편향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한의학을 공격하실때, 약간은 허수아비 공격하기식이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세상에는 evidence 화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고 경험에 입각하여 설명하는 것은 그것을 보충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는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양의학계는 적극적으로 한의학 문제를 공격하고 있나요? 사실 우리 어머니가 한의학을 신뢰하십니다. 어머니의 경우를 보면 요즘 한의학은 무엇보다 서비스와 말빨로 사람을 현혹하는 것 같더군요; 아무리 한의학으로 가지 말라고 충고해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이제는, 한의학이나 종교에 대해 남은 건 "치밀하고 파괴적인 공격"뿐이라 생각합니다만...솔직히 자기 밥그릇과 상관없으면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 아닌가요? 물론 양의학계가 한의학에 밥그릇 빼앗기는 만큼은 저항하는 듯한데 그 이상은 나아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건 양의학계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의학에 놀랐던 이유가 커리큘럼 때문입니다. 제 친구가 한의학과 전공인데 어느 날 이상한 중국철학을 열심히 공부하더군요. 그 이유를 물어보니, 사람의 인체는 신비하고 오묘해서, 여러 심오한 중국 철학을 원서'로 공부해야 인간의 몸을 잘 파악할 수 있다는 식으로 대답을 하더군요. 정말 황당했습니다. 대다수의 한의학과에서 이런 식의 가르침을 받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양의학계에서는 한의학을 거의 공격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의학을 공격하는 알기 쉽고 재미 있고 통렬한 책은 거의 찾아 보기 힘듭니다. 제대로 공격하려면 초등학생용부터 고급 독자용에 이르기까지 여러 권이 나와야 합니다.
한의학 치료법의 효과를 검증하는 대규모 과학적 실험도 필요하지만 거의 안 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유명한 dowser(수맥찾는 사람들)들을 대규모로 모아 놓고 실험을 해서 dowsing에 효과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한의사들을 대규모로 모아 놓고 그들이 하는 치료나 보약의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양의학계에는 이런 일을 할 돈도 많습니다. 그리고 한의학을 무너뜨리면 금전적으로 얻는 것도 많습니다. 게다가 정의의 편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서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대다수 국민이 한의학을 지지하는 상황에서 후폭풍을 맞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중국 같은 독재 국가에서는 아마 국가 탄압의 두려움이 크게 존재할 것입니다. 중국 지배자들은 마오쩌뚱 시절부터 중의학을 밀고 있지요.
양의학이 한의학을 공격하기는 커녕 오히려 요즘은 퓨전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물론 대다수의 양의사들은 냉소적이긴 하지만요) 심지어 서양에서도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는 실정이지요. 이것은 분명 한의학을 통해 치료의 효과를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중요한 현실을 놓치고..과학의 심판대 위에서 검증되지 안으면 모두 사이비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꽉막힌 생각이 아닐까요. 물론 검증되지 안는다는 측면에선 여러 부작용도 있을수 있겠지만.. 시공간을 뛰어넘어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인정을 받는 것은 분명 거기엔 지금의 과학으론 검증되지 안지만 아직 우리가 확일할 수 없는 뚜렷한 논리와 지식이 숨어있다
고 유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현명한게 아닐까 합니다. 세상의 어떤 사이비도 이토록 과학이 번창한 시대에 진지하게 대접받고 이토록 오랬동안 살아남아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을 수는 없다고 봐요.
서양에서 동양의학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는 증거가 있나요? 예컨대 동양의학 치료를 받는 환자 수가 늘었다는 통계가 있나요? 아니면 동양의학을 행하는 의사(?)나 병원의 수가 늘었다는 통계가 있나요?
만약 서양에서 동양의학이 더 많이 행해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치료 효과를 보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서양 사람들도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지요. 서양 사람들도 지극히 미신적이라는 것은 온갖 통계가 보여줍니다.
미국은 아예 기독교 국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종교에 푹 빠져 있지요. 이런 현상이 창조론에 무슨 논리적, 실증적 장점이 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서양에서도 동종요법, 초능력 치료, 믿음 치료(한국으로 치면 기도원) 등을 비롯한 온갖 민간 요법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런 요법들이 가짜약(플라시보) 효과를 뛰어넘는 어떤 효능을 보인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대중들은 여전히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신을 믿는 정도가 작아졌다가 커졌다가 합니다. 예컨대 프랑스에서는 68년 대중투쟁을 겪은 세대가 덜 미신적이었다가 시대가 지나면서 미신이 더 퍼졌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한국도 87년 세대(소위 386 세대)가 책도 가장 많이 읽고 토론도 가장 많이 했던 세대인 것 같습니다. 아마 미신도 가장 덜 믿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혈액형 성격론이 지난 20년 동안 급속하게 퍼졌는데 이것이 혈액형 성격론에 어떤 설명력이 있다는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그냥 한국의 미신이 사주에서 혈액형 성격론으로 바뀌었음을 뜻할 뿐입니다.
비슷하게 일부 서양 사람들이 동종요법에서 동양의학으로 갈아타고 있는지도 모르죠.
기독교와 창조론이야말로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지요. 그래서 어쨌단 말입니까? 그것은 바보 같은 사람들이 항상 있어왔다는 것 이상을 뜻하지 않습니다.
역시나 저도 쓰면서 결국 그런 반론이 나올거라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그렇게도 생각되네요. 또 저 역시도 미신이 사라져야 된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과학이 우주전체를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듯이.. 뭔가 새로운 관점에서 우주나 인간의 몸을 설명하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도 나쁘진 안지 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튼 기독교와 한의학은 뭔가 다를거라는 느낌은 들지만 결국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할 길은 없네요. (한의학을 버리자니 아까워서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