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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사도들의 행적을 따라
노우호: 오늘 살펴볼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사도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이끌어 갔는지
사도들의 발자취를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한국적인 표현이고
'프학세이스아포스톨론'이라는 헬라어의 의미는
사도들의 행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도행전은 우리나라의 심청전, 춘향전에서 사용된 언어 습관 때문에
이렇게 번역한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 전체의 행적이 기록된 것이 아니고
1장부터 12장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예루살렘중심)로 기록되었고
9장부터 28장까지는 바울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이야기로 시작하면서 28장까지 기록 되었지만
28장으로 끝난 책이 아니고
28장까지 기록하다가 중단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복음의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오실 때 까지 계속 기록되어야 한다는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스스로 사도행전 29장을 기록하는 마음으로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배워서
그와 같은 사역이 계속 이어져야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아주 가치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기록하게 된 것은
바울이 누가라는 유명한 사람을 만나서 함께 사역하므로
이렇게 놀라운 기록이 우리에게 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속편에 해당하는 문학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사도행전 처음에 보면
데오빌로 각하여 하면서
먼저 쓴 글에는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한 것부터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시기까지를 기록했다고 하고
지금부터 쓴 것은(사도행전에서 쓰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예수님시대가 지나가고
이제 사도들을 통하여
성령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사도행적이라고 해도 되지만
성령행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성부하나님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고
복음서에는 성자하나님의 이야기로
사도행적이후에는 성령하나님의 시대로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잘 공부 한다는 것은
오고가는 세대에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향해 일을 해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모델이나 모범이 있으면
그것을 본 받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김성윤: 예
노우호: 그런 면에서
초대교회의 예루살렘교회는 어떠했으며
안디옥 교회는 어떠했으며
또한 사도 바울이 개척한 여러 교회들이
복음을 가지고 세상에서 어떻게 성도의 삶을 살았는지
사도행전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므로 귀한 내용이 많습니다
김성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인물들을 살펴보기에 아주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노우호: 예,
인물뿐만 아니라
인물들이 남긴 설교(스데반, 베드로, 바울)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어떻게 주를 증거 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됩니다
여러 인물들의 활동상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이런 자료가 소중하다고 생각하여 기록을 하게 되었는데
바울과 누가의 만남은
성경의 기록으로 보면
드로아에서 만났는데
그 이전에 만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 앞에 여행 중에 바울이 몸이 좋지 않아
누군가의 소개로 만났을 수도 있습니다만
바울과 누가의 만남으로 인하여 복음이 기록되고
누가복음은 아주 귀중한 자료이고
누가복음의 속편으로 기록된 사도행전은
디오빌로 각하에게 헌정하는 양식으로 기록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해 받으신(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시고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나라 일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와 함께 모여서
분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몇 날 못 되어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그러니까
요한이 물로 세례를 준 이후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50일 되어서부터 성령이 임하게 된 것이죠
'몇 날이 못 되어'라고 했는데
그 기간이 1주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날이 승천주일이고
1주일 지나서 성령강림주일이 됩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유월절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 하셨고
부활하고 난 뒤 40일 동안 계셨으므로
43일과 일주일 후에 오셨으니까
43일과 7일을 합하여 50일이 되어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시기 까지 3일
부활하신 후 이 땅에 계신 기간 40일
승천하신 후 7일
이렇게 50일을 오순절이라고 하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열흘 만에 성령이 임하였다고 하는데
열흘이 아니고 정확하게 말하면 1주일입니다
'몇 날이 못 되어!'라는 말은 정확하게 7일(1주일)입니다
한 주간동안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상고 하고
성천하신 예수님을 본 후에
그들이 여태까지(3년 동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웠으며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이런 것을 완전히 재검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만 보고는
그들은(제자들과 성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한번씩 유령처럼 제자들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짐으로
제자들이 이제는 마음잡고 일상생활로 돌아가야겠다고
베드로가 앞장서서 물고기 잡으러 갔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시 찾아다니면서
감람산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감람산(예루살렘성전 맞은편에 있는 산)에 500명 정도 모였습니다
감람산에 모였을 때
제자들의 생각은(바로 지금이구나!)
예수님께서
전에는 죽임을 당할 육체의 몸으로는 불가능 했고
지금은 부활하신 몸으로 이제야 비로소 거사를 행하여
로마를 정복하고 헤롯을 몰아내고 왕이 되는가 보다!
이런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을 보면
저희가 모였을 때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 입니까!
하면서 긴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면서
예수님이 발이 땅에서 들려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때까지만 해도
예루살렘 성전의 맞은편에 500명의 군중을 불러 모았으므로
이제야 거사가 일어나겠다고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이 들리게 되고
처음에는 천천히 올리어 가시다가
나중에는 빠른 속도로 올라가시면서
구름이 가리워 보이지 않게 곧 구름이 덮었습니다
제자들이 멍하게 하늘만 처다 보고 있었는데
그 때
흰옷 입은 천사가 곁에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다시는 자신의 직업을 쫒아(물고기 잡으러)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께서 올라간 것을 봤으므로 위에서 오신분이 확실하구나!
단지, 목수 요셉의 아들이나 여자의 아들 정도가 아니고
요한이 증거한대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
위에서 오신분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죠
그 이후로는 집에 가지 않고
일주일 동안 마가 다락방에 모여서
여태까지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상고하고
돌아보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기다려야 하고
앞으로 무엇을 준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1주간 지나는 동안
사도 중에 가롯유다가 없어진 것에 대한 '맛디아'를 충원시켰는데
그 추천 방법도
사람들이 결정하여 선택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2명을 추천하고
최종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제비를 뽑습니다
이것은 좋은 방법입니다
사람은 복수추천하고 하나님께서 최종결정 하도록 한다면
선거 후유증이 크게 작용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좋은데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결정했다고 한다면
사람의 편에서는 할 말이 없게 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사도가 12명이 채워지고 난 뒤
제자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 하고 있을 때
성령이 임하셔서
복음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전하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사도들의 행적을 쫒아보면
복음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온 유다로 사마리아로 로마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김성윤: 성경의 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16 오순절 성령 강림
노우호: 오늘은 오순절 이야기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게 되면서
비로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지요
천지를 창조하신 사건과
아들 성자 예수그리스도의 탄생하신 사건과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은
우리에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오순절에 임하였던 방언은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방언의 언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납니다
그때는 로마와 유럽 등 여러 나라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16개국에서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습니다
사도들이 설교를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6개국에서 모여든 모든 사람들이 현지 언어로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야!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언어로 듣게 됨이 어찌 된 일이냐!
정말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복음이 빠른 시일에 세계로 확산되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16개국의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복음이 전해 진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16개국이 사람을 한곳에 모으기도 어렵지만
그들이 복음을 듣고 온 세계로 흩어지면서
동시에 16개국에 복음이 확산 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짧은 시간에 16개국에 복음을 전하기는 어렵지만
성령이 하시므로 가능한 일이죠
성령이 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겁에 질려
마가다락방에서 안으로 문을 잠그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을 체험하고는
담대하게 거리로 뛰쳐나와
예수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물론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매를 맞거나 감옥에 갈지라도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이후에는 어떤 핍박과 환란이 닥친다 해도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고
위협이나 폭력이나 법이나 그 무엇으로도 막지 못하고
계속해서 복음이 확산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숨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거리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장에 보면
제9시의 기도시간에
이스라엘은 낮을 12시간으로 나눕니다
따라서 제9시라고 하면 오늘날 오후 3시가 됩니다
그 때쯤에 일어나면
기도하거나 일터로 나가는데
유대인들은 점심 먹고 나면 잠을 한 숨 자고
낮잠을 자고 나면 보통 3시쯤 됩니다
3시부터 기도를 하거나 일을 하는데
제9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 갑니다
예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하는 일이지만
당당히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법정에 불려가게 되는데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고 말도 말라고 협박을 받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겠는가? 너희의 말을 듣겠는지?
너희들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면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당당하게 선포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때려서 보내주지만
사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맞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전혀 두렵거나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5장에 가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나오는데
이런 사건은 어떤 면에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자주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한번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성령을 속이는 것으로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한번 보여준 이후에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한번만 일어난 사건으로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교훈으로 남는 기록들이 가끔 있습니다
6장에 넘어가면
집사를 뽑습니다
7집사를 뽑는데 모두 남자를 뽑았습니다
스데반과 빌립, 브로그르,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안디옥 사람 니골라
이렇게 7사람의 집사를 뽑았는데
이들은 굉장한 실력을 갖추고
어떤 면에서는 사도들에 못지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고
성경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빌립도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능력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이렇게 집사를 세워서 교회의 일들을 맡아 하는데
7장에 가면
곧,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바울이 함께 있었는데
스데반이 순교하는 것을 보면서
전설에 의하면
사도바울과 스데반이 가말리엘문하생으로 같이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데반을 일찍이 예수를 믿게 되고
바울은 끝까지 예수를 반대 하였던 사람인데
바울이 자신 신앙과 율법에 얼마나 확신을 가졌던지!
스데반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던질 정도로
바울은 율법에 열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죠
그러나 스데반이 죽을 때 그 모습을 보면서
돌에 맞아 죽으면서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고 원망도 않고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얼굴에 밝은 빛을 내면서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하여 복을 빌어주는
김성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노우호: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보고
바울이 크게 찔림을 받은 것 같습니다
과연 자신이 가진 신앙과 신학이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진 것인가!
하고 마음의 동요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억제하려고
더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때리고
다마스커스까지 가서
이웃나라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까지 씨를 말리겠다는 마음으로
바울이 교회를 잔멸할 작정으로 핍박하게 됩니다
8장 3절에서 표현하는 잔멸한다는 의미는
잔인하게 멸망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들어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저 무관심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을 가지고는 일을 할 수 없고
핍박을 해도 열정적으로 하고
열심이 특별한 사람을 변화시켜 놓으면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성윤: 뜨겁거나 냉철한 사람!
노우호: 예,
바울과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는 합당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 이후에
복음을 전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원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핍박을 많이 했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으므로
핍박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울이 변화되는 장면을 상세하게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다마스크스로 말을 타고 가는 길에
태양빛 보다 더 밝은 빛이 자신에게 비춰지면서
자신은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어 지는데
그가 엉겁결에 부르짖기를
주여! 뉘십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이렇게 들려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예수님을 경멸하는 표현으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느냐!
빈정대는 소리로 멸시하는 의미로
'나사렛 예수!'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멸시 천대하는 의미로
바울도 평소에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많이 사용 했었다 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잔멸하려 다니면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사용하고 다녔기에
예수님께서
그래,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죠
바울이 이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도 그가 두 번째
엉겁결에 했던 질문이 있는데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바울의 일생일대의 질문이 되겠는데
예수님이 누구신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2가지 질문에 대한 것을 알게 된다면
인생을 다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고
내가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면
인생을 다 배운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고 학문도 있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고
또,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모른 채
우왕좌왕하다가 인생을 모두 낭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울이 엉겁결에 물었던 질문으로
주여, 누구십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2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래서 그의 서신에 나타나는 그의 신학 전체의 흐름을 보면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밝히는데
남은 인생을 모두 쏟아 놓습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인하여
옛날에 가지고 있던 학문과 지식을 배설물과 해로 여긴다고 하면서
예수를 아는 지식 외에는 모두 버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니까
다른 모든 학문은 초등학문에 불과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봅니다
굉장한 율법이나 철학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런 것은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면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된 삶을 살게 되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목숨을 걸고 달리고 달려서
마침내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소아시아로
마케도니아, 아가야, 로마까지 증거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다음 시간에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김성윤: 성경의 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17 베드로의 행적
노우호: 오늘은 베드로의 사역을 살펴봐야 겠습니다
베드로는 12제자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데
하지만 베드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것 때문인지
자기스스로는 나약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겸손하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다른 모든 사도들이 베드로를 대표로 인정하지만
사도행전을 읽다가 보면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중심에 서있고
오히려 베드로는 외각으로 다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사마리아에 가서 살펴보는 일이라든지
욥바에 가서 사역하는 것이나
가이사랴에 가서 고넬료의 가정에 방문하는 것이나
나중에 안디옥을 한번 방문하는 것도 보이고
더 나아가서 베드로전후서를 기록할 때 보면
베드로는 이미 바벨론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루살렘교회를 생각할 때
아름다운 면만 보려고 하는 의식이 있습니다만
실제로 예루살렘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헬라파 유대인이 있는가 하면
히브리파 유대인이 있고
헬라파는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로
헬라문화를 수용하는 입장의 그리스도인이 있고
헬라문화를 끝까지 배격하려는 보수주의 적인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교회에서 갈등이 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구제의 대상에서 소외되면서
불평불만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불만이 사도들에게 돌아오니까
사도들이 일 하기가 어려워지게 되면서
이런 문제들은 집사들 선에서 해결하도록
집사들을 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할례파와 무 할례파가 있었습니다
할례당이 있은데
이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면서
할례당 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도들이 보내지도 않았는데
안디옥교회에 가서 훼방을 하는데
자신들처럼 할례 받지 않으면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다닙니다
예루살렘은 도시권의 교회이므로
삶의 수단이
장사를 하던지 기술직이나 공직이나 종교계에 종사하며 살아가는데
이런 직종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과 상종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조그만 예루살렘 도시에 살면서
예수 믿는다고 지목을 받게 되어 사람들이 상종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이런저런 어려움을 당하는데
급기야는
AD70년경 바울사도의 순교직전까지
어정쩡하게 할례당으로 예수를 믿던 사람들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 버리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가끔 하는데(초대교회가 교회모델인 것처럼)
그것은 좋은 표현이 아닙니다
초대 안디옥교회는 아주 아름다운 교회로
굉장히 은혜로운 교회이고
능력 있는 교회이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모범적인 교회지만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그다지 본받을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라고 하면
모두 좋은 교회인 것으로 여기는데(오늘날 교회명칭이 초대교회도 있음)
초대교회의 깊은 내면을 보면
은혜가 많은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모임이 많습니다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은 바람같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의 성실한 삶을 통해서
날마다 믿는 자를 더해가는
먼저 믿은 사람들의 변화된 거룩한 삶을 보면서
인격적으로 이끌리어 전도가 되고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데
교회 안에 할례당과 무 할례당
히브리파와 헬라파가 있다든지
이렇게 당이 갈리게 되면 교회가 평안하기 못합니다
바울을 기어이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은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할례당인데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가 아무리 말려도
이들은 집요하게 바울을 반대하여
바울이 그렇게 사모하는 예루살렘에 발붙이기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는 마침내 안 되고 맙니다
AD70년경부터는 교회가 안 됩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이후에는
사도들 외에는 대부분 흩어져 나가고
그 뒤에 믿은 사람들과 남아 있던 사람들은
늘 율법에만 열심 있던 사람들인데
예수님 동생 야고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바울이 세 번째 전도 여행을 마치고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거금의 연보를 하였습니다
그 거금의 연보를 가지고 온 바울인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는 것을 봅니다
할례당들은
야고보의 말을 듣지 않고 애를 먹이던 사람들인데
야고보가 아무리 지도를 하려고 해서 지도가 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할례당들은 골치 아픈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멋모르고 초대예루살렘교회의 좋은 면만 보려고 하지만
사실은 이런 좋지 않은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왜? 멸망되고 함락되느냐 하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예루살렘교회가 안 되므로
마침내 예수님동생 야고보도 순교하게 되고
이런 지도자가 없으니까
교회가 점차 힘을 잃고
교회가 안 되므로 그 나라의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되는데
멸망하기 직전에 사도들은 온 사방에 흩어져 나가게 됩니다
흩어져 나갈 지역을 결정하기 위해
사도들이 제비를 뽑았다고 합니다
제비가 뽑힌 곳으로 선교의 목적지로 삼고 가게 되는데
도마는 인도로 가게 되었고
다른 사도들도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되면서
어떤 사람들은 아르메니아쪽으로
어떤 사람은 에디오피아(구스)로 가기도 하고
빌립은 부르기아
다시 말하면 골로세, 라오디게아, 헤라폴리스가 있는 곳에서 사역을 했는데
빌립의 묘가 헤라폴리스(파모칼레) 언덕위에
빌립순교 기념교회 흔적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마지막으로 흩어지고 나서
곧바로 예루살렘은 로마장군인 타이터스(티투스)에 의해 함락되게 됩니다
이런 이후에
성전이 없어지고 난 뒤
예루살렘은 성전중심으로 모여 있던 도시인데
성전이 훼파되므로 예루살렘은 큰 의미가 없어졌어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전이 있을 때는
계속하여 제사장이 있고 제물이 있고
유대교의 뿌리가 있으므로
교회를 핍박했었는데
유대교의 뿌리가 되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의 상징적인 예루살렘 도시가 함락되고 나니까
그야말로
유대교는 흐지부지 되어 버렸고
그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AD135년까지
바알아키바, 바알보크바 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조금 남아서
유대교를 추스르게 되는데
성전이 없는 시대의 제사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하나님의 제단도 없고 성전도 없으면서 하나님께 어떻게 제사를 지낼 것인가!
이런 문제를 고민하게 되고
다시 성경을 연구하다가
유대교는 제사 중심에서 성경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AD90년 경에 구약성경 39권을 확정하는 얌니야 회의를 갖게 되고
그 때 바알 아키바와 바아보크바라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새로운 유대교의 제사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는 제사는
동물을 드리는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애(仁愛)라고 결정합니다
어질 인(仁)자와 사랑 애(愛)자
영어로는 Loving kindness 가 되겠죠
친절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참 사랑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참 제사라고 하면서
유대교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바리세인들이기 때문에
온 세상에 흩어져있으면서 예배당도 없지만
그들은 성경을 배우고 인애를 베풀고 동족을 사랑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그 전통의 하시딤들은 남아 있는 거죠
지금도 바리세인 전통을 가진 사람들은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
사도들이 그때를 전후해서
베드로나 사도바울은 순교하게 되고
신약성경도 요한문서 제외한 다른 문서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대개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요한복음,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 요한계시록
이 5권은 아마도 예루살렘 멸망 후에
10년~20년 가까이 지나서 기록된 문서들이죠
이처럼 신약성경의 형성은
마가복음과 데살로니가전서가 제일 일찍 기록된 문서들이고
가장 나중에 기록된 것이 요한계시록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이 살았던 시대는
요한사도로서 마지막이 되겠는데
요한사도는 AD96년경까지는 살았다고 봅니다
요한의 나이를 예수님보다 1~2살 아래라고 보는데
그렇다면 요한은 90세 이상을 살았고
천수를 누리고 하나님 나라에 가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의 일생을 모두 알면 좋겠는데
바울의 경우는 누가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기록함으로 바울의 행적을 알게 된 것이고
다른 사도의 행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이라고 본다면
사도행전을 보면서 우리도 그와 같은 사역을 감당하면 될 것입니다
김성윤: 성경의 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18 바울의 1차전도여행
노우호: 오늘은 사도행전 중에서 1차 전도여행으로
먼 길을 출발하겠습니다
13장으로 넘어가면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하는 결과를 맺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가 꽃을 피워야 되는데
꽃은 선교의 꽃이 되겠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교회가 교역자를 양성한다든지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성장된 교회의 결과가 되지요
교회가 성장하는데도
선교사파송이나 교회 개척이 없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모이는 성도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오늘날처럼 예배당 건축물은 없었겠고
모이는 숫자만 늘어나는 경우인데
그들이 금식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 성령께서는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금식하고 기도하여
이 2사람에게 안수하여
제일 처음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아직 교회건물은 없지만
선교부터 시작하는 것이 초대안대옥교회의 정신입니다
오늘날도 교회 건축물은 허술하여도
선교사를 아주 열심히 파송하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안디옥교회에서는 선교사를 파송하고는 기도하고 있었을 것인데
이들(바울과 바나바)은 먼저 구브로라는 섬으로 갔습니다
구브로는 생소한 말인데
현재 불러지는 지명은 키프로스(사이프러스)입니다
반은 터키영이고 나머지는 그리스 영으로 되어 있는
아주 유명한 섬입니다
키프로스 섬의 살라미스에 도착하여
다시 파포스(성경에는 바보)라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이 섬을 지나서 밤빌리아 쪽의 페르가(성경에는 버가)에 가게 되었고
페르가에서 안타까운 것은 함께 동행 했던 마가요한이
도중에서 이탈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탈한 이유는 뒤에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곧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갑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수리아 안디옥과 지명이 같지만
비시디아는 터키의 중부에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다시 루스드라, 더베, 이고니온
이쪽을 남 갈라디아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의 남부지방을 선교하였는데
이렇게 선교했던 지역을 다시 거처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1차 전도여행 이었습니다
1차전도 여행에서 바울의 영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소개 되다가
나중에는 선교사역에 큰 일꾼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 왔을 때
안디옥 교회는 이상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도 하지 않은 할례당 사람들이 안디옥에 온 것입니다
할례당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는 굉장히 먼 거리(창원서 북경까지의)인데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찾아 와서는
자기들이 예루살렘교회에서 왔다고 하면서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대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할례를 받고 난 뒤에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당은 예수를 믿고서 구원 받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예수 믿기 전에 먼저 할례를 받아서 유대인이 되는 절차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만 예수 믿을 자격이 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럴 필요가 없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고
아브라함처럼 할례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과 같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강조하지만
할례당들은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힘들게 합니다
김성윤: 도움이 안 되는 군요
노우호: 자기들처럼 할례를 먼저 받고 예수를 믿어야 된다고 우기는데
정말 괴롭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반대를 하였던지
바울과 바나바가 없는 사이에
안디옥교인들을 선동하여 안디옥 사람들이 할례를 받게 하고
바울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바울은 12제자에 속하지 않고 사도가 아니고 하면서
바울이 와서 보니까
안디옥교회의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니까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가지고 아무리 논쟁을 하여도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하고 넘어가자고 하면서
이 문제를 가지고 올라오는 것이
사도행전 15장의 사건인데
15장은 처음으로 총회가 열린 것입니다
이 총회를 세계교회 총회라는 말을 합니다
기독교의 처음 총회라고 말을 합니다
거기서 의장처럼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도 좀 매끄럽지 않은 것 같지요?
김성윤: 예
노우호: 예수님이 동생이라도 사도는 아니잖아요?
김성윤: 예
노우호: 그저 예수님의 동생이니까
권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것은 석연치 않는 일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 뒤에도 보면
베드로가 하는 일을 야고보가 자주 감시하는 일도 보이고요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한 것을 가지고
몇몇 사람들이 시비를 하려고 하는 장면도 보입니다
이런 것은 예루살렘교회의 편치 않은 것을 보여주는 사건들인데
할례당이 주장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방인들이 믿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들이 믿을 때 어떻게 성령이 임하시는지를
바울이 상세히 보고를 했고
베드로도 고넬료집에서 일어난 사건을 간증하면서
이런 것을 모두 듣고
종합적으로 분석한 후에
야고보가 결론을 내리기를
이방인들에게서 주께로 돌아온 사람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제물을 먹지 못하게 하고
음행을 금하고
피와 목 메여 죽인 것을 먹지 못하도록 하면 잘 될 것이다
이것만 결정하여 안디옥 교회에 통보하고
이제부터는 바울과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정식 교역자로
예루살렘교회가 인준한 공식적인 사역자로 파송한다고 결정합니다
이렇게 하여 말썽의 소지를 없애버립니다
이 결정된 것을 가지고 바울이 안디옥 교회로 갔더니
안디옥 교회에서 아주 반기면서
모든 문제가 수습되고 교회가 평안을 되찾게 됩니다
그 이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두 번째 전도 여행을 계획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다투게 됩니다
그 문제는 바나바의 생질이었던 마가요한을
바나바는 데리고 가려고 하지만
바울은 1차전도여행에서 이탈했던 이유로
강경하게 안 된다고 하니까
이것으로 인하여 심히 다투어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선교팀이 둘로 갈라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마가요한이 1차전도 여행에서 왜 이탈한 이유를
어떤 사람들은 마가요한은 부잣집 아들로 자라서
전도여행이 너무 고생스러워 도중에 참지 못하고 이탈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좀 더 타당성이 있는 견해는
골로새서 4장을 보면
마가요한은 할례당이었습니다
할례당은 바울을 가장 괴롭히던 사람들이므로
할례당이라고 하면 바울이 질색을 할 정도죠
골로세서 4장 10절을 보면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괄호를 해서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그를 영접하라
마가와 유스도라 하는 사람들이 예수이름으로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마가와 유스도가 할례당이라는 것입니다
이들만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처음에는 할례당에는 사람 같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마가요한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가요한은 예루살렘의 결정이 나기 전에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자신은 할례를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바울은 할례없이 세례를 주니까
마가는 도저히 이런 일에 동참할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탈이 된 것 같은데
이런 문제가 이후에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정을 났으므로
마가는 이것을 수용하고 이제 2차 전도여행에 함께 가려고 한다면
지난번에는 예루살렘에서 결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가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것을 이해하고
바울이 마가를 받아 주었으면 될 것인데
어떻던 이런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사람은
중간에 또 무엇으로 인하여 시비를 걸어올지 모르니까
절대 함께 갈 수 없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야말로 성격이 불 칼 같고
면도칼 같은 사람이고
반면에 바나바는 권하고 위로하고 상담하는 부드러운 사람이거든요
지난번에는 할례당의 문제가 결론이 안 된 상태에서 그랬던 것이고
이제는 결론이 났고 그 결론을 수용하니까
이제 마가를 데리고 갑시다고 했지만
바울은 안된다면 안 되는 것이요 형제여!
끝까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고
바나바는 마가와 헤어질 수 없으므로
마가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갈 테니까
바울형제는 다른 곳으로 가도록 하라고 권합니다
이렇게 갈라서게 된 것이 잘 된 것인지도 모르죠
선교팀이 2팀이 되었으므로
그 때 바나바는 자기 생질 마가와 함께
키프로스(구브로)로 가게 되었고
바울은 실루아노를 대동하여 자기 고향 길리기아 다소를 지나서
지난번에 개척했던 더베, 이고니온, 이고니온, 루스드라, 비시디아 안디옥
이쪽으로 지나간 것입니다
이런 곳을 지나서 지난번에 개척한 곳을 살펴본 다음에
점점 서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에베소가 아시아의 수도 였는데
바울의 계획은 아시아의 수도인 에베소에 가고 싶은 꿈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아시아로 가지 못하게 하셨고
그 아시아의 반대편이 비두니아인데 이곳으로 가려고 해도
성령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좌로도 우로도 가지 못하니까
곧 바로 가게 되면서 드로아로 가게 된 것입니다
드로아에서 꿈을 꾸게 되었고
꿈을 꾸면서 환상 가운데
마케도니아 사람이 손짓을 하면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 하는 이상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마침내 유럽 땅으로 건너가게 되고
이것이 2번째 전도여행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전도여행의 남은 부분은 다음시간에 정리 하겠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 이었습니다
119 유럽으로 건너간 복음
노우호: 전번시간에 이어서 2차 전도여행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일행이 아시아로 가고자 하지만
성려께서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함으로
비두니아로 갈려고 했는데
그곳도 허락이 안 되므로
무시아에서 곧 바로 드로아로 갔는데
밤에 마케노냐 사람 하나가 건너오라는 환상을 보고
배를 타고 유럽 땅으로 건너가는데
처음에 도착한 곳이
에게해에 있는 사모트리아라는 섬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16: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6: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6:11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6: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6: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이곳에서의 별다른 사역은 없고 그냥 자나간 곳입니다
유럽 땅에서 육지에 발길이 닿은 곳은
네압볼리라는 곳인데
네오 폴리스라는 말은
네오(새로운) 폴리스(도시)라는
새로운 도시라는 뜻으로
네오폴리스가 라틴어로 표현하면 '나포리'가 됩니다
우리말의 의미는 신촌(新村) 혹은 '새터'가 되겠지요
네오폴리스는 알렉산더 당시 동방진출을 할 때
알렉산더의 군인들이 주둔해 있던 곳입니다
이곳은 조용한 항구로
동쪽으로는 아시아가 있고
서쪽으로는 유럽 대륙이 있는데
아침에 해뜨는 곳이 잘 보이는 조용한 항구입니다
사도바울이 유럽 땅에 첫발을 내렸던 곳의 돌을 옮겨
네압볼리 교회의 머릿돌로 삼아서
항구의 부두 뒤에
갤럭시라는 3류호텔이 있고
호텔 뒤쪽으로 돌아가면
사도바울 기념교회가 네압볼리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는 네압볼리교회의 이야기는 없고
바로 빌립보교회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제로는 바울이 네압볼리에 처음도착해서
거기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 뒤에 바울이 간 곳이 빌립보입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이 기도처를 찾기 위해 나갔다가
자주장사 루디아를 마났습니다
루디아는 유대인으로 두아디라 사람인데
빌립보에서 장사를 할 정도면
상당히 활동적인 여성으로 생각 됩니다
두아디라는 터키 땅인데
거기서 바다를 건너가
유럽 땅에서 자주장사(염료업)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염료업은 상당히 높은 부가가치가 있는 직업인데
2000년 전에도 좋은 업이었습니다
루디아는
여자로서 견문이 넓고 활동력이 있는 사람으로
빌립보에서 예수를 믿고
빌립보교회의 중요한 일꾼이 된 것이죠
유명한 빌립보의 간수 이야기와
그 간수 때문에 유명한 성경구절인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도 빌립보에서 나온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그렇게 개척된 후에
그들이 나간 곳은 암비볼리아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데살로니가 도시는 젊은 도시로
알렉산더장군의 뒤를 이었던 카산더 황제가
자신의 아내 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입니다
수도를 빌립보에서 '델마이'라는 곳으로 옮기면서
'델마이'를
자신의 아내 이름을 넣은 데살로니가로 칭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 생긴 도시는
전도가 잘되는 편이죠(오늘날도 그렇지요 )
전통이 많은 오래된 도시보다는
새롭게 태어나 활기찬 도시는 터줏대감이 없고
고정된 문화가 없고 사탄문화가 형성이 되지 않은
새로운 도시인 데살로니가가 전도가 잘 되는 편입니다
바울이 거기서 불과 세 안식일(3주)정도 사역을 했는데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으로
빠르게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유대교 회당의 지도자들이 시기하여
시장잡배들을 선동하여서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 바울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베뢰아 쪽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베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보니까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있고
그곳에서 큰 열매가 맺히게 되는데
놀랍게도 데살로니가에 있던 악한 사람들이
베뢰아까지 따라와서 회방을 하게 됩니다
할 수 없이 바울은
실로아노와 디모데를 놓아두고 몰래 빠져나와서
아테네 쪽으로 가게 됩니다
아테네는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유명한 철학자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바울당시에도 에피큐리오스 학파나 스토익학파라든지
온갖 철학자이 많이 모여서 토론하던 곳인데
파르테논 신전 바로 밑에 '아레오바고' 언덕이 있는데
위로 쳐다보면 신전이 바로 보입니다
우리 순례여행객들이 그 언덕에도 앉아 보았습니다만
아테네 시내가 전부 보입니다
사도행전의 17장의 바울의 설교를
십자가를 이야기 하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합니다만
그 십자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말씀 듣는 아테네철학자들의 아주심한 교만으로
이 사람들에게 십자가 이야기를 아무리 강조해도
귀담아 들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나 지름이나
철학이나 어설픈 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그들의 배운 지식으로 교만하게 되는 모습이 보통이죠
그래서 결국은 아테네에서는 큰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고린도로 가게 됩니다
그 당시에 고린도와 아테네는 활발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만과 아테네의 겐그리아만이 마주보고
그 가운데는 육교처럼 두 지역이 연결되어 있는데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도
고린도는 항구도시로 그곳 사람들은 굉장히 거칠고
세계에서 뱃사람들과 무역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사기꾼과 도박꾼들이 흥청거리는 곳으로
바울이 이 분위기에 위축되어
한동안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이 동역하던 실루아노와 디모데도 오지 않은 상태이므로
바울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는데
그러데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과 만남도 일생일대의 만남인데
아굴라도 역시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도 유대인으로
폰투스(본도)에서 태어나고
(폰투스는-터기의 중북부에 있고 흑해 남단 해변에 위치함)
유럽에서 무역을 하고 있었던 견문이 넓고 활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클라이디우스 황제(네로 황제의 아버지) 때
온 세계가 흉년이 들었는데
그 원인이 유대인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모든 유대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로마에서 추방되면 가장 가까운 곳이 고린도이므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로 이주해 오자마자
바울도 같은 시기에 고린도에 가게 되어
이들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날 수 있는 적절한 시기를 조절하신 것 같고요
또 이들은 바울과 하는 일이 같은
장막 만드는 일을 하는데
그 당시 장막 만드는 기술은
싸구려 천막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고대사회에서 천막을 만드는 것은
왕족이나 귀족들의 이동별장을 만드는 것으로
아주 고급스러운 비단과 레이스와 보석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만드는
이 기술은 아주 고급스런 기술에 속하고
1년에 2개 정도만 주문이 들어와도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괜찮은 직업입니다
이렇게 돈을 벌어서 생활도 하고 선교도 하게 되는데
두 팀이 만나서 함께 일을 함으로 더욱 일을 잘 할 수 있었겠죠
그리고 누가도 협력하고 디모데와 시루아노가 협력하고
바울 주변에 선교팀이 점차 늘어나게 됩니다
바울과 누가, 디모데와 실루아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6명의 팀이 갖추어지면서
일이 활성화 되고
고린도에서 1년 반 정도 사역하게 됩니다
고린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기서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바울이 3주동안 사역을 하고 떠났기 때문에
늘 걱정이 되고 불안함으로
데살로니가에 편지를 쓰서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돕게 되죠
이처럼 데살로니가전서가
신약성경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그
런데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오해가 조금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전서를 가만히 읽어보면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기록하고 있는데
매장 끝마다 강림이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진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생각에는
곧 예수님께서 강림하시는가 보다 하면서
일도 하지 않고 직장도 가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전날에 한국에서도 그런 일(다미선교회)이 있었던 것처럼
사회적으로 아주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죠
이런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 바울은
이런 오해를 풀기 위해
데살로니가 후서를 쓰서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는 하지만
그렇게 빨리 오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오시기 전에 먼저 일어날 일이 있으므로
그런 날이 임하기 전에는 절대 예수님 오시지 않으므로
제발 경거망동하지 말고 열심히 일을 하여
어려운 사람을 도울 정도의 삶을 살아야지
일도 하지 않고 문제만 일으키는 성도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책망한 내용이 데살로니가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번째 전도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사역하는 기간에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하고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갈라디아서도 이때 기록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고린도 사역 1년6개월 사역은
바울의 전도여행과정에서 상당히 장기간 체류한 곳이죠
제일 오래 체류했던 곳이
3차 전도여행의 에베소에서의 사역이고
에베소를 제외하고는 고린도사역이 가장 장기간 사역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다음시간에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 및 갈라디아서
즉, 고린도에서 기록되었던 서신들을 좀도 세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 이었습니다
120 데살로니가전서
노우호: 오늘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기록했다는 데살로니가전서를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책이라고는 할 수 없고
정성드려 쓴 한편의 편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편지들을 모아졌으므로 신약성경으로 경전이 되고 책이 되는데
이런 것을 기록 할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한 장씩 넘기는 모양이 아니고
두루마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당시는 두루마리를 책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종이를 한 장씩 넘기므로
한 장씩 넘기는 것이 책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책이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짧은 글은 파피루스라는 한 장 종이에 쓰고
조금 분량이 많은 경우는
파피루스를 이어 붙혀서 둘둘 말게 되기도 하고요
양피지에 쓴 것은 고급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에게 쓴 편지도 긴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교회에 보낸 편지이므로 내용이 많이 긴 편입니다
편지로서는 많이 긴 내용입니다
바울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 교회
도 바울아 세 안식일 동안만 성경을 가르쳤던 어린 교회이기 때문에
너무 안타깝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애가타고
그동안 그들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디모데를 그곳에 보낸 뒤 소식을 들어보니까
세 안식일만 가르쳤는데도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회가 잘 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아주 감격하면서 격려와 칭찬의 편지를 쓰고 있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편지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가르치기(양육)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용을 보면
대체로 칭찬과 격려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고
애를 태우는지를 느낄 수 있고
그리고 바울이 거기서 3주 동안 머물면서 봉사한 것이
헛된 것이 아님을 감사합니다
3안식일 동안 복음을 전한 것이 헛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는데
디모데의 보고를 들어보니까
그들이 아주 열심을 가지고 모이기를 힘쓰고
환란 가운데 인내 하면서 참고 있다는 것입니다
2장에 보면
[데살로미가전서]
2: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2: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2: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2: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2: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2: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장 7절에 보면
유모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다!
젖을 먹이는 어머니는
아기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애가 타지요?
김성윤: 예
노우호: 자신이 못 갈 것 같으면
아이가 먹을 우유를 준비하여 보내는 것처럼
사도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데살로니가 어린 성도들이 먹어야 할 젖을
마치 우유병에 담아 보내는 마음으로 데살로니가전서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사역을 두고 말하기를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르는 것 같이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 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정말 사랑하다 보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 놓을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을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가 말씀을 전할 때
사람의 이야기로 듣지 않고 사람이 전하지만
이 말씀을 듣는 데살로니가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짧은 기간이지만
그 말씀이 너희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은총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데살로니가교회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7장을 보면
저희가(바울의 일행)
[사도행전]
17: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세 안식일에 다른 것 한 것이 아니고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여
도 뜻을 풀어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그 당시 유대인이나 일반사람들의 생각은
그리스도라고 하면 해를 받는 것이 아니고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다윗처럼
온 천하를 호령하고 평정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해를 받는 그리스도
고난 받는 그리스도
이런 그리스도에 관한 것은
구약성경을 자세히 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지요
가령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는 장면이 나오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가 해를 받는 내용은 많이 없거든요
그러므로 성경을 어떤 부분적으로 본다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성경의 내용 중에서
복주고 잘되고 도와주고 보호 하신다
이런 좋은 쪽만 보게 되면 오해의 소지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언제나 영광 받는 것 먼저
복 받는 것부터 챙기기 전에
우리에게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책망하는 말씀도 있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잘 보셔야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죠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메시지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속죄이고 부활은 재림으로 이어지는 메시지가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매우 큰 주제가 되고
그래서 우리의 죄가 속죄되었다
우리스스로의 선행이나 노력을 가지고는
우리의 죄를 도저히 속죄 할 수 없는데
오직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외아들인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람을 얻는다!
이것이 복음 중의 복음이죠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
그리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과
우리에게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는 사실을 증거 하게 되는 것이죠
바울은 세 안식일이 지나는 동안이므로
안식일만 강론 한 것이 아니고
3주동안의 짧은 기간을 복음을 전했지만
바울이 워낙 열심있게 복음을 전하므로
오늘날 우리처럼 주일 11시 예배를 시작하여
12시에 마치는 형식이 아니고
바울이 어떤 때는 아침부터 말씀을 시작해서
밤중까지 계속했다는 말을 하고 있거든요
지금도 회당예배를 하는 것을 보면
2~3시간 정도의 시간으로 예배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날 예배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에
성경을 알아가는데 어렵습니다
어떻던 3안식일을 복음을 전했고
이것이 큰 열매가 되어서 교회가 되었는데
이 교회는 지금까지 든든히 서 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긍지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자기교회로 오는 편지가 성경 안에 2권이나 됨으로
그리고 그 위대한 사도바울이 우리교회를 개척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나가에 쓴 바울의 첫 편지를 자세히 보면
문제가 일어날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내용이
데살로니가전서 매 장 끝에
예수그리스도의 재림 혹은 강림에 관한 내용이 반복해서 나오거든요
이것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오해가 있었는데
예수그리스도가 곧 강림하시는 것 같이
일은 안 하고 직장도 가지 않고
옛날 우리의 모습처럼(다미선교회) 그런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는 것이죠
처음 시작하는 교회가 그런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면
전도의 문이 막히게 됩니다
바울이 이 문제를 가지고 걱정을 하게 되고
앞으로는 편지를 쓰면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 한 것입니다
편지라는 것은 좋은 면도 있지만
당장 질문을 할 수 없으니까
그냥 기록된 것으로만 가지고 오해를 할 수 있으므로
전화인 경우에는 다시 질문을 할 수 있지만
편지는 그럴 수 없으므로 오해의 소지가 있지요
그래서 이 편지 이후에 후속 조치로 해서 쓴 것이 데살로니가후서인데
데살로니가후서는 다음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 이었습니다
121 데살로니가후서
김성윤: 오늘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두 번째로 쓴 편지 내용입니다
노우호: 예,
두 번째 편지를 쓸 때가 되었지만
먼저 쓴 편지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 후서를 기록했습니다
먼저 쓴 편지 중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것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보면
[데살로니가후서]
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5: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5: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여기서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은
밤에 도적같이 홀연히 멸망이 임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아니고
세상 잠에 취해 있는 사람들(세상 사람들)로
세상의 꿈만 계속 꾸는 사람들에게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지만
예수님을 믿고 깨어있는 자에게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지 못합니다
이것을 오해함으로
도적같이 올 것이라고 오해하여
밤에 잠도 자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며 오늘이나 내일이나 어제나 저제나 기다리면서
초조해 하고
세상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 오시는 일에만 관심을 집중하다 보니까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격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는데
2000년 전에 그 당시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주의 날을 기다리면서 일도 하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말썽을 피운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바울이 크게 놀라고 근심하면서
데살로니가 후서를 쓰면서
예수님이 그렇게 조급하고 다급하게 오시는 것이 아니므로
안정되게 열심히 일에 전념하라고 권면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도 보면
조금의 책망을 하기 위해서
많은 칭찬을 하는 면을 볼 수 있습니다
김성윤: 지혜로운 방법이군요?
노우호: 예,
어리고 미성숙한 교회일수록 칭찬을 많이 하고(좋은 점들을 찾아서)
칭찬을 9가지 정도 하고
1가지 정도 따끔하게 책망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를 자세히 보면
[데살로니가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편지의 앞부분은
고대 편지 형식에서 일반화 인사말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그리스형식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평강(살롬)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중요시하는 인사입니다
바울은 헬라 문화와 히브리식 생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체로 은혜와 평강의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에게 굉장하고 이상한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야만
은혜가 아니고
매일 매일 아무 근심 없이 저녁에 잠자리에 들 수 있다면
참으로 평강이고 은혜이고
감사할 일이지요?
김성윤: 예,
노우호: 이스라엘 사람들의 꿈에도 소원은
총소리가 들리지 않고 화약 냄새가 나지 않고 피비린내가 나지 않고
저녁시간에 온 가족이 식탁에 아무 걱정 없이 둘러앉은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은총으로 소망하면서
그들의 인사법도 샬롬(평강)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떤 신비스런 기적이 일어나야만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아니고
매일 아무런 사고 없이 가족들이 저녁식탁에 둘러앉는 것이
하나님의 큰 은총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1: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본문 말씀에서
교인들의 믿음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아기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는 기쁨이 있지요
어린 감람나무와 같이 자라는 모습은 한없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만약 어린 아이를 키우는데
몇 년이 지나도 전혀 자라지 않는 것을 본다면
부모의 마음은 정말 염려가 되고 답답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그들의 내면세계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에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다 각기 사랑함이 풍성한 것을 감사합니다
교회가 서로 사랑하지 않거나
교회가 아닌 가정이라고 할지라도
가족끼리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지옥이 되겠지요
믿음만 자라서는 안 되고
반드시 사람은 사랑으로 성장하고 사랑이 풍성해야 하고
교회나 가정이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핍박과 환란이 많지 않지만
초대교회는 핍박과 환란이 많았습니다
환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들립시스'라는 말인데
'들립시스'의 어원이 무거운 돌을 가슴에 눌려서 죽는 의미입니다
긴장과 억압과 두려움으로
매를 맞지 않아도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나는
그 어려움 속에서 끝까지 참는다는 것입니다
김성윤: 그런 환경에서 신앙을 지키셨군요?
노우호: 예,
그러면서 믿음이 자랐고
또 사랑이 풍성하게 있는 것으로 감사한다고 한 것입니다
인내한다는 것은
'히포모네'라는 성경에서 아주 일반화 된 언어인데
이것은 억지로 꾸역꾸역 겨우 참는 것이 아니고
기쁨으로 참는다는 의미입니다
기쁨으로 환란에 동참하고
즐거움으로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이것은 신앙의 기본이 된 것으로
바울은 정말 진심으로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장에 넘어가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생각 중에
잘못된 것을 고치려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2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속아서 혹한 상태가 되면 안 된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먼저 있어야 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는 것은 당연하지만
예수님 오시기 전에 먼저 되어져야 할 일이 있으므로
먼저 이런 일이 있기 전에는 예수님이 절대 오시지 않으므로
안정된 마음으로 자신의 일을 착실히 하여
오히려 어려운 사람을 도우고 여유 있는 삶을 살도록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김성윤: 예수님 오시기 전에 먼저 있어야 될 징조가 무엇입니까?
노우호: 먼저 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은 적그리스도의 대명사입니다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시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그런 시대 아닙니까?
어떤 면에서 인간이 자기들 마음대로 하니까 자신이 하나님이 되지만
그런 것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바울이 이야기하는 성전은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이 이르게 되면
실제로 적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자신이 하나님 노릇을 하려고 하는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요
흔히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여러 적그리스도(적그리스도들)가 있고
그 적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고유명사처럼 한 사람을 지칭하는 그 적그리스도는
결정적으로 예수님 오시기 직전에 나타나서
자기가 하나님 행세를 할 것인데
그런 사람(적그리스도)이 나타나기 전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방송을 듣는 모든 청취자들께서 잘 새겨 둘 것은
적그리스도가 언젠가는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 천하를 꼬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능력이 있고
거짓 기적과 표적을 가지고
할 수만 있다면 택한 백성도 빠져들게 하는
굉장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초인(슈퍼맨)으로 기억되는 굉장한 인물이 나타나서
앞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걷잡을 수 없는 큰 문제를 모두 해결하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마음과 관심이 그 사람에게로 집중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를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능력 있는 사람이든지
사람을 절대시 하거나
그 사람을 하나님처럼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서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될 것인데
2장 8절에 보면
[데살로니가후서]
2: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9절에 보면
[데살로니가후서]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2: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2: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2: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22 규모 없는 사람들
노우호: 데살로니가후서를 지나면서
데살로니가 마지막에 바울이 우리에게 남기는 경고 한마디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6절에서 12절까지 읽어주시죠
[데살로니가후서]
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3: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3:8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3: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3: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3: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자, 여기 보면
규모 없이 행한다는 말이 여러 번 되풀이 되는 것을 봅니다
옛 어른들은 많이 쓰던 말인데
오늘날 젊은 사람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규모 없다는 말은
아무런 계획성도 없고 생활의 원칙과 질서도 없고
수입과 소비의 계획도 없어서
삶 자체에 아무런 계획이 없다는 것입니다
김성윤: 게으르고 죄 된 삶을 산다는 의미인가요?
노우호: 크게 죄를 짓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고
남에게 누를 끼치고 신세를 지는 사람을
규모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씀씀이가 헤프고 아무런 계획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장래가 있어야 되고
소망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하고
그리고 땀 흘려 노력해서 자신의 삶을 영위 할 뿐 아니라
이웃에게 나눌 것도 있고
하나님께 드릴 것도 있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어야 되는데
규모 없는 사람은
자기 인생도 잘 꾸려가지 못하고
옆 사람에게 부담이 되고 짐이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일은 하지 않고
기도한다고 하면서 금식하고 철야한다고 하면서
생업을 등한시 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 철야 이런 것만 거룩한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들이 자칫 잘못 생각하면
농사짓는 것이나 빨래하는 것이나 상점에서 일하는 것 등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일은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모두 세상의 육신적인 일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행하는 일은 악한 일이 아니면
모두 거룩한 일입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고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거룩한 일입니다
저희들이 신학교에 다닐 때
존경하던 교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공부하다가 죽는 것도 순교하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공부하는 학생은 최선을 다하여
순교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라고 권면하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 또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을 일구고 가꾸는 것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줄 알지만
우리가 온 세상에 나가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아끼고 가꾸고 땀 흘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십니다.
그런 삶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규모 없이 행하고
양식을 값없이 아무데서나 먹고 다니는 것은 삼갈 일입니다
아무리 반가운 손님도 자주 오게 되면
부담이 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래서 바울은 철저하게
어디를 가든지 값없이 양식을 취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열심히 땀 흘리면서 일을 했는데
3장 9절에 보면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바울이라고 해서 육체노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는 것으로 먹을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고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이 되어 너희가 본받게 하려고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령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를 싫어하면 먹지도 말게 하라
못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김성윤: 죽지요
노우호: 이 말을 직설적으로 하면?
김성윤: 일하기 싫거든 차라리 죽어라!
노우호: 예, 그런 의미입니다
일 하기 싫으면 먹지 말아야 되고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오늘 밥 한 끼가 부끄럽지 않은가!
오늘 나는 최선을 다했는가!
이런 것을 살피는 것이 거룩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은 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고 하니
정말 보통일이 아니죠
아무 계획 없이 여러 사람에게 폐만 끼치고 다니는
규모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사람이면 어떤 일을 해서라도
최소한 자신의 양식은 해결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남자아이에게는 철저하게 기술을 가르칩니다
아무리 인문계를 전공하여 대 학자가 되든지 랍비가 되어도
여차하면 자신의 손을 움직여서 양식정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기술을 반드시 배우는 것입니다
유대인 속담에 보면
사내아이에게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도둑질 할 수밖에 없으므로
기술이 없으면 어려울 때 나쁜 마음을 먹을 수 있으므로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날도 중시되고 있는 것이
기술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기술을 익혀 두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언제나 종용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벌여서 양식을 사서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옛날에 험하게 살았던 것을 드러내고 간증하며 다니면서
억지로 물건을 떠맡겨 팔고 다는 것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어디서든지 소박하게 자신을 일을 하면서
노력하고 땀 흘려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내용이 데살로니가후서의 결론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늘만 쳐다보고 예수님 오는 날만 바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예수님은 정한 날에 오실 것입니다
그 정한 날은 앞당겨지지도 않고 늦춰지지도 않을 것이고
그 정한 때에 정한 방법으로 오실 것이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살펴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종용히 자신의 일을 열심히 땀 흘려 열심히 하여
자기 양식을 구하여 먹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구제할 것이 있도록 열심히 저축도하고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가장 잘 대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만약 어떤 일을 하다가
내일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할 때
허둥지둥하고 다른 일을 하고자 할 때는
지금까지 하고 있던 일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내일 오신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밭을 매고 있던 사람들은 여전히 밭을 매고 있었고
매를 갈던 사람도 여전히 매를 돌리고 있다가
한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말라!
세상에서 선한 일에 대하여
보상이 빨이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껏 선한 일을 하지만 말짱 헛되다
자신만 손해 본 것으로 생각하여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도들은 성경에 기록한 말씀대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반드시 심은대로 거두는 날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누가 이 편지에서 한 말을 순종치 않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고 합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그러면서 맨 끝에 보면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3: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3: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3: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16절 까지는 다른 사람이 쓰고
17절에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쓰는데
글씨가 크고(눈이 나빠서) 필체가 틀리지만
서신의 마지막에 바울이 직접 몇 자 적어서
바울 자신이 쓴 것을 인증하는 표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함께 있을 지어다
이렇게 해서 데살로니가후서가 마감이 되는데
이런 편지를 받아 본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안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신앙이 어려서 좀 문제가 되지만
질적으로 나쁜 사람들은 아니므로
이 교회가 안정이 되면서
바울에게 또 다른 소식이 들리는데
그것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려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에
남 갈라디아(비시다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쪽에
복음을 전한 곳이고
2차 전도여행 때에도
이곳들은 지나서 브루기아쪽으로 나갔던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
바울이 개척해 둔 이런 아름다운 교회에
율법주의자와 할례당이 들어와서
바울이 일궈놓은 교회에 잘못된 가라지를 뿌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순진한 갈라디아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되고
급기야 바울을 의심하게 되고
바울은 12사도도 아니므로 잘못될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할례당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이 전해 듣고
굉장히 염려를 하고 화를 내면서 쓴 편지가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도 일찍 기록된 문서에 속하지요?
김성윤: 예,
노우호: 이렇게 일찍 기록된 문서일수록
교회의 수준도 낮고 편지의 수준도 낮고 읽는 사람들의 수준도 낮고
바울은 이 편지가 성경이 될 것이라고 생각 못했을 것이고
편지의 내용이 처음부터 아주 격한 어조로 쓰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을 펼치면
얼마나 내용이 격한지
읽는 사람이 두려움이 있을 정도로
화난 격한 감정이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내용은 다음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23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
김성윤: 오늘은 바울의 초기 서신 중에서 갈라디아서 입니다
노우호: 예,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할례당들이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것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에 대하여 악하게 폄론하고 다니는데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출신도 아니고
12사도에도 속하지 않고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에게 지도를 받은 것도 아니고
제멋대로 믿어서 제멋대로 전도하는 사람이라고
악평을 한다는 소식이 바울에게 들린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시작부터 격한 어조로 화가 많이 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편지를 쓰기 시작부터 격한 감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을 보면
사람에게 배웠거나 지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당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11절에도 보면
[갈라디아서]
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자신은 사도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당당하게 말을 합니다
할례당들이 바울을 비방하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6절에 보면
[갈라디아서]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편지 첫머리부터 이렇게 격한 감정이 표현되지요
그러면서
[갈라디아서]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4: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이렇게 애타는 심정을 표현합니다
너희들이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를 위대한 사도들이고
권위를 인정하는 것 같은데
그 유명한 사람들이 나에게 유익을 준 것이 별로 없다고 하면서
바울 자신은 그들에게서 배울만한 것이 솔직히 없었고
오히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책망할 일이 있어서 책망한 일도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때
베드로를 감시하기 위해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안다옥교회에 도착하자마자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다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지 않은 것처럼
시침을 뚝 하고 외식을 했던 일이 있었고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저희가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으므로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의 잘못한 것을
격하게 책망한 일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2: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2: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2: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2: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2: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2: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2: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2: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사도가 아니고
예루살렘교회에서 배운 것이 없다는 말에
마음이 상한 바울은
사도들이라고 완전하고 위대한 사람들인가!
베드로라든지 야고보, 요한
이런 사람들도 사람으로 약점과 결점이 있는 사람일 뿐이라고 하면서
사실 갈라디아서의 배경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실력으로서는 12사도 중에 바울을 능가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사회와 교회 내에서는
바울은 12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평생 동안 끊임없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을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바울 자신은 사도라고 말하면서
사도된 증거는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인내와 사랑과
또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어서 예수를 믿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 문제가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사도라는 대우를 못 받을지라도
적어도 너희에게는 사도라고
이런 말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어떤 곳에는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자신이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노라고
말하는 것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주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도 정상적인 신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열심과 능력이 많이 있지만
봉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생각도 정체가 불분명함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가능하면 거처할 신학과정을 이수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마귀로부터 시험거리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와 사탄은 우리에게 조그만 틈이 있거나 흠이 있으면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고 어렵게 만들므로
하나님 일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공명정대하게 하고
이수해야 될 과정은 모두 통과하고
받아야 할 자격이 있다면
자격을 획득하여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하여 격한 감정으로 글을 쓰다가
결론은 열매 이야기를 합니다
율법으로 되는 것이냐?
아니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냐?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면서
육체의 열매는 현저하여 너무 분명하지 않느냐!
그것은 성령을 거스리는 것인데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성령의 열매도 현저한데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사역을 볼 때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사는 사람 같으면
성령으로 행하고 성령의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신령하다고 하면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하면
전혀 신령한 것이 아니고 육체의 열매가 되지요
이런 사람들과 피자 물고 물리면
함께 멸망의 길로 가게 될지도 모르므로
조심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이런 편지를 보내면서도
걱정이 됩니다
이 갈라디아교인들이 편지를 읽고
얼마나 회개할 것인지 염려가 되어
(고린도에 있으면서 고린도 전, 후서와 갈라디아서 쓰서 보내고)
고린도 교회를 사임하고 에베소 쪽으로 갑니다
에베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남겨두는데
(사실은 두 번째 전도여행 때에 바울이 아시아
즉, 에베소에 가서 전하려고 했지만
성령이 허락하지 않아서 가지 못했죠)
3번째 전도여행 때는 에베소에 거점을 두려고
미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먼저 심어 놓고
자기는 다시 안디옥교회로 갔다가
일단 제일 마음이 급한 곳이 갈라디아교회이므로
전에 안디옥교회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던 것처럼
갈라디아교회도 율법주의인 할례당에 의해 잘못 복음이 전파된 것 같아서
갈라디아지방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본 다음에는
다시 성경의 사도행전 18장으로 돌아가야 되거든요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사임하고 어디고 가는지
행선지를 알게 됩니다
18장 11절을 보면
바울이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바울이 어디를 가더라도 다른 일을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구주가 되시고
주와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 때 갈리오라는 사람이
아가야(헬라의 다른 말= 아테네와 고린도 지방) 총독 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갈리오는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의 친동생입니다
갈리오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답니다
갈리오에 대한 형 세네카의 평을 들어보면
고린도 사람들이 전부 힘을모아 갈리오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갈리오 혼자서 고린도를 사랑하는 것 보다 못할 것이라고 할 만큼
좋은 사람으로 평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와서 바울을 고소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의 말을 듣자마자
자기들의 종교문제임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갈리오가
나는 이런 일에 대하여 재판장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런 문제는 너희들끼리 해결하라고 쫒아내어 버립니다
이런 것을 본디오 빌라도가 배웠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김성윤: 예,
노우호: 그렇게 재판장에서 이들을 쫒아내어 버렸는데
그때부터 바울은 제3차 전도계획을 세우면서 고린도 사역을 마치고
에베소교회로 오게 되었는데
고린도에서 만났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분은
그 길로 영원히 바울과 함께 동역을 하게 됩니다
바울일행은 고린도에서 떠난 다음에 그들은 곧바로 아시아에 왔다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만 남기고
바울은 안디옥교회에 가서 전도 보고를 하고
3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3차 전도여행은 다음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24 에베소에 온 바울
노우호: 바울이 두 번째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서 보고를 합니다
보고를 마치고
다시 갈라디아지방을 다녀거쳐서
부루기아를 지나 에베소로 가게 되는데
그 경로는 사도행전 18장 18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더 여러 날 행하다가
형제들과 작별한 후 배를 타고 일단 수리아로 가는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고린도에서 떠나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머리를 깎았다는 내용을 읽을 때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죠?
김성윤: 예
노우호: 아마 바울이 나실인으로 헌신 했던 것 같습니다
나실인은 부정한 일을 행하면 머리를 깎고 결례를 행합니다
겐그리아는 아테네의 맞은편에 위치한 항구입니다
거기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19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18: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치 아니하고
18:21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18:22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18: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
갈라디아에 왜 가느냐 하면
갈라디아교회에 편지 보낸 것으로 끝내지 않고
편지를 받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바울은 반드시 확인합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설마 잘 되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바울의 생각은
만약 잘못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자세가 바울의 사역 가운데 많이 나타납니다
만일 그들이 잘못되면 보통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일이 잘못되면
돈이나 물질의 손해를 보면 되지만
교회의 일은 생명이 걸려있는 일입니다
육체의 생명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달린 문제이므로
설마 잘되겠지! 하는 생각은 안 되고
만일(만분의 일)에 잘못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를 거쳐서 부루기아(골로세, 헤라폴리스, 라오디게아)
이곳을 다니면서 제자들을 굳게 합니다
흔들리는 제자들을 잡아서 굳게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세상은 끊임없이 세상(사탄)의 바람이 불어 옵니다
그 바람이라는 말도 '영'이라는 단어입니다
바람=퓨뉴마(영)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모두 같습니다
히브리어는 '르하크'
헬라어는 '퓨뉴마'
모두 같은 바람(영)입니다
어떤 바람에 움직이던지 모두 바람에 움직입니다
사탄의 바람에 움직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령의 바람에 움직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차례로 다녀가면서
흔들리는 제자들을 굳게 세우는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굳게 서리 위해서는
변하는 것을 따라 다니면
반드시 우리도 변하고 흔들리게 됩니다
변치 않는 것을 바라보고 붙잡고 있으면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변치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 바람이 불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게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으면
(우리 하나님은 영원토록 있도다!)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부루기아 지방을 돌고 있을 때쯤 되었는데
에베소에 난데없이 아볼로라느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볼로는 유대인이면서 태어나기는 알렉산드리아(이집트에 있는)이고
이 사람은 학문이 높고 성경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18: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그러나 학문도 많고 일찍 도를 배워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지만
부족한 것이 있으므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니까
아볼로는 그런 놀라운 것을 어디서 배웠냐고 묻게 되고
그들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바울과 함께 있었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아볼로도 아가야(고린도)로 건너가겠다고 해서
가보라고 고린도에 현제 지도자가 없어서 고린도교회가 허전 할 것이라고
권하면서 아볼로가 고린도교회에 아볼로가 가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지도자들이 떠나고 난뒤
바울과 디모데 실루아노 브리스길라 아굴라
이런 사람이 떠나고 나니까 교회가 허전해 있었는데
이런 경우 새로운 교역자가 오므로
굉장히 반가웠겠지요
그리고 전설에 의하면 아볼로는 잘생기기도 하고 언변이 좋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바울은
기록에 의하면 외모가 출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키가 작고 머리는 대머리고 미간이 너 좁아서 눈썹이 거의 붙어 있고
코는 메부리코, 시력이 좋지 않았고
그리고 말이 따따부따 함으로
앉아서 담소하는 것은 괜찮은데 웅변이 부족합니다
이런 것으로 사람들이 멸시하기 쉽지요
외모가 출중하지 않고
사도가 아닌 것 같고
몸이 건강하지 않아 자주 아프고
이렇게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은 약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얼굴이 때로는 천사같고 때로는 사람이더라고
표현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의 수준이 낮을수록
사람의 외모를 보는 경우가 많지요
사람의 내면의 영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을 보지 않고
외모만 보게 되니까
바울과 아볼로가 비교가 됩니다
사람을 비교하지 않아야 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비교를 합니다
저번 목회자보다 이번 목회가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비교하게 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불과 1년 6개월 된 교회이므로
아볼로가 건너 갔을 때
2년 남짓되는 교회이므로 철이 없지요
그래서 바울이 떠나고 아볼로가 들어가면서
고린도교회에 아볼로파가 생긴 것입니다
옛날에 바울이 있을 때
병고침을 받았던지 은사를 받았던지 체험을 한 사람들은
바울파가 되고
중간에 있던 사람들은
바울파도 아볼로파도 아무것도 아니고
진짜는 게바(베드로)라고 하면서
베드로파가 생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모두 무슨 말이냐
우리는 그리스도파라고 하면서
크지도 않은 고린도 교회가 4개의 파가 생rusk서
교회가 아주 큰 어려움을 격게 됩니다
가장 힘들게 했던 파가 바울파인 것 같습니다
현제 교육자는 아볼로이지만
큰 신령한 은사를 체험했던 사람들이 볼 때
바울은 방언도 하고 병을 고치는 은사도 있고
하나님의 은사가 보이는데
바울은 강의를 잘하고 말을 잘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언사가 안 보이므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아볼로는 성령도 안 받은 사람 같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실 에베소에 와서 하는 말을 보면
세례요한의 세계밖에는 모른다고 하던 것을 봐도
(아볼로가 성령을 체험하고서 고린도에 갔는지는 몰라도)
고린도교인들 중에 신령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판단할 때는
아볼로는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예배시간에
아볼로가 설교하는 시간이 되면
방언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훼방을 하니까
결국 아볼로가 거기 있지 못하고 사임을 합니다
사임을 하고 바울이 있는 에베소로 건너 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 쓴 내용을 보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방언하는 사람들은 질서에 따라서
교역자의 지시에 따라 2-3사람이 할 일이고
통역 없이는 교회에서 방언을 하지 말라고 하는
복잡한 이야기가 왜 나왔느냐 하면
여자들의 거센 방해로 아볼로가 사역을 못하게 되니까
그 때에 고린도교회의 특수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바울이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
바울파라고 하는 여자들과 방언을 받은 사람들이
예배를 어지럽히게 함으로
하나님은 어지러운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볼로가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아볼로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한 사람이라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하다면서
고린도교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바울파라고 하면서
목회자의 목회를 어렵게 하는 사람들을 향해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지지한다면서 방언하며 예배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잠잠하라!
방언은 금할 것은 아니지만
방언하는 사람들은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하지 말고
하더라도 질서 있게 2-3사람이 하고
교회를 어지럽히게 하지 말라고 지도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교회는 이런 문제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격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다 될 줄 알고 있지만
성령이 임한 고린도교회도 이렇게 어려움을 격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바르게 쓸 수 있도록 지도하는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25 바울의 에베소 사역
[사도행전]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19: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19: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9: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노우호: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바울은 윗지방으로 다닌 뒤
에베소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의 교인들에게 묻기를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성령이라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너희가 아볼로에게 배워서 어떤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어보니까
요한의 세례(회개의 세례)만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을 준비를 한 것이죠
바울이 말하기를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백성에게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함으로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령이 임하시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영적이 체험이 일어 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12명쯤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3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강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가지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김성윤: 이런 무리들이 꼭 있네요?
노우호: 예,
어디를 가더라도 언제나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거부하고 마음이 굳어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이 굳어버리면
그 상태에서 고정되어 버리지요
김성윤: 강퍅한 마음이 된다는 말이죠?
노우호: 예,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외에는 수용하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들어야 될 내용이 많은데
조금만 듣고는 그 상태에서 굳어지게 되면
더 이상 진보가 없습니다
언제나 처음 믿을 때의 마음으로
마음을 닫지 말고
배워야 될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모두 수용할 때 까지
굳어지지 말고
온유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부드러운 마음으로
끝까지 말씀을 들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일부분만 듣고는
그것만 옳다고 굳어버리면
편협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일부분을 가지고 굳어져서
모세수준 이상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수준에서 굳어버리면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바울을 수용한다는 것은 힙듭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음이 굳어서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듣고 순종하는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바울은 그들을 떠났습니다
두란노서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두란노는 사람이름입니다
두란노라는 철학자가 자신의 철학을 강의하는 강당인데
바울은 이곳을 빌려서
그들이 쓰지 않는 시간에 사용하게 됩니다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일만 모여서 배우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긴 시간을 가르치므로
이와 같이 2년동안 함에
아시아에 있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하나님 말씀을 듣더라!
바울이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이죠
어쩌면 이것이 최초의 신학교로 생각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2년동안 매일 강의를 하고 배웠으니까
이때
매일 와서 공부를 했던 많은 사람들은
곳곳에 사역자로 나갔을 것입니다
2년동안 매일 모여서 가르치고 배우고 하니까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런 기적들이 일어나면서
에베소 전체에 큰 소동이 일어나는데
이에 돌아다니면서 마술하는 어떤 사람들이 시험적으로
악귀들린 사람에게
내가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한다고
장난스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그래,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면서
명령하는 이를 짓밟는 경우도 있었고
이처럼 에베소전체가 성령이야기와 바울의 이야기로 충만했습니다
17절에 보면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두려워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전파에 성공한 것이죠?
에베소가 어떤 곳이냐 하면
세계종교의 중심지로
아데미신전이 있는데
세계건축물의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입니다
인도로부터 에디오피아까지 127도로 나눠어져 있을 때
한 도의 왕이 기둥하나씩 바쳐서 아데미신전을 지었다고 합니다
온 세계가 함께 고대 중근동지방에서 경배하는 아데미신을
바울이 아데미 신전 앞에서 성경을 2년동안 가르쳤더니
아데미신전이 흔들흔들 합니다
그리고 믿을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기 죄를 자복하면서 행한 일을 고하고
또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도 마술책을 가져다가
바울 앞에서 책을 불살라 버리는 일도 있었는데
책 값을 계산해 보니까
은 5만이 되었다는데
현제 금액으로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거금으로 계산되는 책들이 바울 앞에서 불살라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결론으로
19장 20절을 보면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사도행전]
19: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9: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 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9: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9: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9: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사도행전 중에 가장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난 곳이
에베소였습니다
이런 역사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느냐 하면
바울이 2년 동안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하루에 1시간 혹은 한 주일에 2시간 정도로는 안 되고
말씀을 집중적으로 듣고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만족할 때까지
열심을 가지고 바울이 일을 했기 때문에
에베소에 큰 부흥이 일어 났습니다
그런데 이 때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고린도교회가 계속 말썽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큰 사역을 하고 있지만
아직은 서툰 아볼로가 고린도에 건너가서
파당문제를 아무리 해결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바울파는 여전히 방언과 예언으로
자기들만 신비스런 성령을 받았다는 생각으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아볼로파는 대체로 지식층이고 남자들인데
남자는 여자들보다 열심히 적으므로 쉬웠는지 모르지만
아볼로가 아무리 일을 해보려고 해도
여자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게바파는 중간에서 버티고 있고
그리스도파는 초연하게 대처하고 있으므로
아볼로가 아무리 이 문제를 수습해 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김성윤: 정치나 사역도 파당이 문제이군요
노우호: 예,
당파나 분파는 육체의 일입니다
사람을 따라갈 때 이런 파당이 생기는 것인데
교회에서 주의 할 것은
하나님을 따라가고 예수님을 따르고 성령을 따라가야지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사람에 속한 자는 육체에 속한자라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와 따로 생각할 수 없잖아요?
김성윤: 예,
노우호: 어머니와 늘 함께 다니고 어머니에 속한 사람으로
어머니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상태
바울은 이런 상태를
그리스도안에서 아린아이 된 자라고 합니다
육신에 속하여서 젖을 아직 떼지 않은 사람입니다
자신들은 굉장히 신령하다고 하는 바울파도
바울에게 속하여 바울의 젖이나 먹어야 되는
아직도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 된 사람입니다
사람이 시기와 분쟁과 다툼이 있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따라 당을 짓고 파를 나누는 것으로
편당은 언제나 사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알미니안주의는 알미니안을 따라가는 것이고
칼빈주의는 칼빈을 따라가는 것이고
훼슬레주의는 웨슬레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하고 장성하게 되면
칼빈주의라든지 무슨 주의라는 말은 쓰지 않으면 좋습니다
어떤 것이든 주의가 되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알미니아주의 웨슬레주의는
이런 것은 좋지 않고
어떤 교회는 이름을 왜, 루터교회로 짓습니까?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교회인데
어떤 사람을 절대화 하면 반드시 파당이 생기게 되고
또 그런 것은 성숙한 사람이 할 행동은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된 자
육신에 속한 자가 되지 말고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하는데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이렇게 책망을 하게 됩니다
이 문제는 고린도 전서 공부할 때 좀도 세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고린도교회가 얼마나 바울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지
적어도 고린도에 쓴 편지가 3-4개정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린도전후서 2권만 남아 있지만
고린도전서 앞에 또 다른 편지가
고린도에 전해졌던 것으로 추측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쓴 그 글에...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봐서
고린도전서 앞에 다른 편지를 하나 쓰서 전했고
고린도전서는 그 다음에 쓴 편지이고
또 고린도후서에 보면
고린도후서 앞에 또 다른 편지가 하나 더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이나 방문했었고
디모데를 한번 보내고
디도를 보냈고
바울은 에베소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마음은 늘 고린도에 있습니다
마음을 상하게 했던 고린도교회 때문에
나중에는 격한 말로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고 아끼고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쓴 것은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불행한 일이지만)
이 일로 인하여 바울의 편지가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유산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우리교회에 그런 모습이 있잖아요?
예수교장로회가 있고
기독교장로회가 있는데
외국사람들로부터
너희나라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왜 싸워서 나뉘었냐고
조롱을 듣습니다
우리나라도 얼마나 분파가 많습니까!
고린도교회를 흉볼 겨를이 없습니다
한국교회도 여러 파로 나눠진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자꾸 사람을 따라가게 되면
또다시 나눠지므로
사람을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예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양심을 따르고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
다시 하나가 될 줄로 믿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26 고린도에 보낸 편지
노우호: 오늘 우리는 에베소에서 기록하여 고린도에 보내진 편지들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린도 전후서가 기록 될 당시의 고린도는
아테네와 함께 아가야 지방의 큰 항구도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가보니까
고린도 항구가 많이 위축되어서
인구가 2만 정도 되는 작은 항구가 되어 있는데
아테네는 상대적으로 커졌고
현제의 고린도는 매우 미약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때는
말레아라는 발칸반도의 끝에 있는
말레아 곶은 해저가 아주 불안하여
말레아 곶을 돌아가기를 굉장히 꺼렸다고 합니다
말레아 곶을 돌아가는 항해선은 유서를 써놓고 가라고 할 만큼
많은 배들이 좌초되었습니다
따라서 말레아 곶으로 가는 것이 부담이 되므로
고린도 항구에 오면
육지와 연결되는 곳에서 무역이 이루어지므로
고린도가 많이 발달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에 바울이 도착하여
채류기간이 1년 6개월 있었는데
바울의 입장에서는 긴 기간이지만
오늘날 교회개척의 역사를 본다면
너무 짧은 기간이거든요
그러므로 그 짧은 기간에 교회가 성숙하지 못한 것이죠
그렇다 보니까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고
처음교역자였던 바울이 떠난 후
아볼로가 그쪽으로 건너갔는데
아볼로가 그쪽으로 건너가자마자
텅 비었던 교회에 새로운 교역자가 오게 됨으로
아볼로를 아주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생긴 것 같아요
그런가 하면
아볼로 보다는 바울의 실력이나 능(영)력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아볼로파와 바울파가 생기는 불행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가하면
2파에 가담하지 않고
진짜 사도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게바(베드로)라고 하며
게바파가 생기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베드로도 사람이고, 아볼로도 사람이고, 바울도 사람이므로
우리는 그리스도파라고 하면서
그리스도파까지 생겨서
역사가 깊지 않은 고린도교회에
4개의 파가 생겨나게 되므로
지금처럼 교회가 조직화되어 체계적으로 관리 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교역자가 지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원칙(교회론)도
전혀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린도교회로는 아직 미숙한 단계에 있었다고 봅니다
교회의 성도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정도는
바울을 통해서 알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섬겨 갈 것인가 하는 것은
아직 알지 못한 상태이므로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쉽게 수습 되지 않습니다
아볼로가 거기 일하는 동안(약1년)
도무지 수습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볼로는 고린도교회를 사임하게 되고
그 교회의 '글로에'라는 사람 편으로
고린도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지고
그리고 브드나도, 아가이고, 스데바나
3사람이 고린도 문제를 가지고 바울을 직접 찾아 온 것입니다
16: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이 사람들로부터 고린도의 소식을 들어보니까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졌는데
이 분파 문제뿐만 아니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슬프고 아픈 이야기를 듣고
이 문제를 수습해보려고 에베소에 있으면서 애를 쓰는데
노력 중에 하나가
고린도전서라는 편지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고리도전서 앞에 또 하나의 편지가 고린도에 전해 진 것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9절에 보면
5:9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라는 말이 나옵니다
간음하는 사람들 음행하는 사람들을 사귀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이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라는 말이
지금 쓰고 있는 고린도전서보다 앞선 편지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편지 안에 쓴 것 이라고 표현되어 있으므로
현재는 보존되어 있지 않지만
고린도전서 앞에 또 다른 편지가 있었던 것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편지를 '고린도전전서'라는 표현을 많이 합니다
고린도전서 7장 1절에 보면
7: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너희에 쓴 말에 대하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있는 에베소 쪽으로
편지를 보낸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묻는 편지 왔고요
그리고 고린도후서를 읽어보면
내가 3번째 너희에게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그렇다면 그 앞에 처음 개척했을 때가 아닌
중간에 한번 방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2번째 방문에서 바울이 어떤 일을 했는지
기록이 남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누가가 동행하지 않았던지?)
고린도교회는 심각한 문제에 휘말려
아무리 수습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시무했던 기간은 일년 반이고
고린도사역을 마치고 에베소로 건너가서
브리길라와 아굴라를 에베소에 남겨두고
바울자신은 수리아를 통하여 갈라디아지방과 부루기아를 한 바퀴 삥 돌아오는데
거의 1년이 걸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교회의 역사는 실제적으로는
2년 6개월 3년 6개월 정도 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한 기간이 3년쯤 되므로
에베소사역의 초기에 기록했으면
고린도교회는 2년 6개월 된 교회이고
에베소사역의 말기에 기록했다면
고린도교회의 역사는 5년쯤 된 교회라고 할 수 있겠죠
김성윤: 예
노우호: 이 기간동안에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문제 하나가 해결되기도 전에 또 다른 문제가 생기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발생하면서
나중에는 10가지 정도의 문제로 불어나는 것입니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려운 가운데 떠 어려운 일이 겹치게 되는 것입니다
10가지 문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1. 교회가 파벌이 생겨서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2. 패륜아가 있어서 자기 아버지가 범한 여자를
그의 아들이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패륜아인데
이런 사람을 교회에서 내쫒지 않고 그대로 놔두느냐고
아주 호되게 책망을 합니다
3. 세상 이권이 개입된 송사 문제가 있었는데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불신자가 재판하는 법정에 고발 해놓고 있는 것은
불행스런 일입니다
4. 결혼을 하는 것이 옳은지 결혼을 안 하는 것이 옳은지
이것은 큰 문제가 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 당시에 결혼을 했다가 곧 이혼이 되면
환란과 박해에 의해서 한쪽편이 죽으면 남은 쪽은 정말 불행하게 되므로
이런 임박한 환란을 위하여서
바울 자신처럼 그냥 지내는 것도 좋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익이 있다고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는데
이것을 교리처럼 받아들이게 되면 문제가 됩니다
사실은 결혼하는 것이 자연스런 것이고
홀로 사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인데
이런 문제도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5. 우상의 제물문제인데
우상 앞에 제사를 지내고 먹는 음식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지만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는데
그곳에 너무 많이 바쳐진 제물들을
그곳 이방신전에서 모두 소화하지 못하고
시장에 내다 파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없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당시에는 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6.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는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사도의 권위가 흔들리게 되면
바울이 전한 복음도 흔들리게 되므로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하여는 강하게 변론을 합니다
다른 교회에는 사도가 아니라도
고린도교회에는 자신이 사도의 자격이 있다고
자신의 사도권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7. 여인들이 예배시간에 수건을 쓰는 문제도 있었고
8. 주일날 예배후에 이루어지는 아카페라고 하는 애찬이 있는데
이것도 문제가 되었고
9. 가장 심각한 문제는
김성윤: 은사문제
노우호: 예
이것은 복잡하게 다루어지는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장이고
13장은 사랑자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12장 13장 14장 모두가 은사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은사가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은사는 무용지물이다
천사의 방언을 하고 사람의 좋은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은사만 받으면 최고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은사를 가지고 사랑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부활에 관한 문제가 나오는데
헬라철학에 물든 사람들은
육체가 부활한다는 것은 용납이 안 되는 문제였고
다음으로 연보에 관한 문제를 마지막으로 다루면서
적어도 10가지 문제로 인하여
작은 교회를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혹시 어떤 교회에 갔을 때
이런저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교회에 왜? 이런 문제가 있는가!
이렇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문제가 모두 해결된 곳이 아니고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는 곳이고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어디든지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가 이런저런 문제가 있을 때
그야말로 교회다
교회는 아직 천국이 아니거든요
교회에 이런 문제들이 있을 경우
낙심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27 고린도교회와 바울
김성윤: 지난시간에 고린도교회의 복잡한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노우호: 예,
그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서
바울이 염려하는 마음이 고린도전후서를 읽어보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결국에 고린도교회(사실은 두 번째 보낸 편지)에 편지를 쓰서
디모데가 가지고 가는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0절에 보면
16: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왜 이런 말이 했을까요?
고린도는 주위 환경이 바닷가의 사람들로
해양기질이 있어서
내륙에 사는 사람들보다 강한 면이 보이거든요
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사역을 할 때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
심히 두렵고 떨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마음이 심히 위축되어서 전도를 못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나타나서
두려워서 잠잠하지 말고
말을 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므로 아무도 너를 해치지를 못할 것이고
그리고 이성에 내백성이 많다는 말씀으로
특별히 나타나서 격려 하신 장면이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이 두려워 할 정도면
디모데는 어떤 면에서는 성격상으로 조금 더 약한 사람이므로
디모데에게 편지를 들려 보내면서 하는 말도
성경을 정말 인격적으로 알려고 할 때
사소한 말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16: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16: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디모데를 멸시 할 수 있는 소지도 있었던가 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때는 디모데는 굉장한 사람이지만
철이 없는 교회 일수록 사람을 멸시하기 쉽거든요
사람을 외모로 보고
바울까지(사도이다 사도가 아니다) 멸시하는 분위기에서
디모데가 갔을 경우
디모데를 아주 어린아이로 취급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16장 12절에 보면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다시 말하면
아볼로가 고린도에 가서 사역한 기간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그 기간동안에 혼이 났던 것입니다
김성윤: 예,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노우호: 바울이 한번 갔다 왔고
또 편지도 보냈으므로
이정도 하면 고린도교인들이 알아들을만 해서
이제 건너가서 고린도교회를 맡아 봉사하도록 권하는 모양인데
김성윤: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다고 하네요.
노우호: 예
이런 대목을 우리가 무관심하게 넘길 수 있지만
편지를 이해하려면 그 편지가 쓰여 졌던 당시 상황과 사연을 알고 있으면
편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편지를 자세히 보면
기록한 사람들의 감정과 정서와 분위기
이런 것이 보여야만
성경해석을 바르고 건전하게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도록 바라고
최종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16장 14절에 보면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이것이 결론입니다
언사, 지식, 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신학이고 바울의 윤리입니다
그리고 글을 맺으면서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사역자가 어디가서 일을 하는데
열심히 심고 가꾸고 노력을 했는데
열심히 심고 물을 주고 가꾸고 노력을 했는데
거기서 첫 열매가 났다면 굉장히 기쁜일이죠
구약성경 신명기에 보면
전쟁이 났다고 하더라도
남자를 징병할 경우
포도원이나 과원을 만들고
첫 열매를 따먹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합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죽게되면
다른 사람이 첫열매를 딸까 하노라!
그래서 첫 열매를 따는 기쁨이 여간 아니죠
교회를 개척하여 전도를 하는 경우
처음 익은 열매가 있다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저도 교회개척을 두 번 해 봤는데
그 때
첫 열매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헌신과 협력은
정말 귀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배부른 사람에게야 맛있는 것이라도 귀하지 않지만
처음 개척하면 너무 일꾼이 귀한데
한 사람이 예수를 믿어서 협력한다면
한없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의 첫 열매도 이야기 한 경우도 있고
아가야의 첫 열매도 이야기 합니다
스데바나라는 사람이 고린도 교회에서는 가장 건전한 일꾼으로 생각됩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성도를 섬긴다는 것은
일반 성도(교인)뿐 아니고
그 당시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이란
순회전도자 혹은 거룩한 사람들 중에 거룩한 사람들
성도들 중에서 특별히 하나님 일을 하기로 작정된 사람들이
방문 할 때
당연히 섬기는 것이 자기 당연한 책임과 사명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스데바나가 그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지금도 교회에 손님이 오면
대접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스데바나가 그렇게 훈련이 된 사람입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스데바나가 고린도 교회의 대표적인 중책을 가지고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주요인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이것은 이들이 에베소에 찾아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한 시대에는 모르지만
고대 사도바울이 사역할 당시의 교통사정은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가는 배가
날마다 있는 것이 아니고
빨라야 2-3개월 만에 있을 정도로 어려울 때입니다
그런 때에 바다를 건너서 에베소로 찾아 온 것은
성도의 사랑이 굉장했고요
이런 분들이 나중에 보면
터키의 부르기아에서 혹은 빌립보에서
로마에 갇혀 있는 바울을 찾아가는
깊은 애정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아쉬운 것이
모든 것이 옛날보다 풍성한데
서로향한 애정은 옛날에 비하여 너무 작은 것 같아 아쉬움이 늘 남습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원케 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유쾌하고 시원케한 것은
바울이 개척하고 어려울 때
이들이 재정적으로나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고
고린도에 쌓인 자신에 대한 오해를 시원하게 풀어주고
이런 여러 가지로 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은 이 모든 문제을 바울에게 묻고서 해결하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바울과의 관계를 가고 있는 자체를 꺼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선동하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자꾸만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바울의 반대파로 인하여 어려운 것을
이런 사람들이 온 것을 기뻐하므로
이런 사람들을 알아 달라고 이야기 합니다
16:18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
그리고 아시아의 교회들(에베소에 오자마자)
바울이 에베소에 하나의 교회만 열심히 해서
대형교회를 만든 것이 아니고
아시아에 들어온 날부터
두란노서원에서 열심히 제자들을 훈련시켜서
이 사람들을 파송하여
바울이 있었던 3년 동안에 많은 교회들이 개척된 것 같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고린도에서 건너 왔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이 건너와서
바울 곁에서 시중만 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 이미 교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장성해진 성도들은
오늘날 대형교회에서처럼 젖이나 먹고 있는 상태가 아니고
여기저기로 흩어져서 가정교회를 하면서
교회가 마치 풀뿌리처럼
마을마다 성도가 사는 모든 곳에
복음의 뿌리를 내리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교회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모임이 곧 교회이므로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 할 때
여러 교회가 동시에 개척되어서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자신도 가정에서
교회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골로세교회가 있는가 하면
바울에게서 배운 빌레몬이 집에서 교회를 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형화 되는 교회에 비하여
그 당시의 교회가 더욱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모이는 어떤 곳이든지 교회가 되고
두 세 사람이 모인 그들 중에 함께 하겠다고 하신 말씀처럼
어떤 마을에서든지 교회를 형성하는 모습이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더라도
5가정이 모이면
회당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거기서 모임을 갖게 되는데
오늘날 성도들은
너무 목회자에게 의지하여
목회자가 없으면 예배도 드리지 못할 정도로
연약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후서와 바울서신들을 통해서 보면‘
교회의 모습들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이 쓴 편지에는
교회의 모습이 불분명 한데
(가르침은 많지만 교회에 모습은 잘 보이지 않음)
바울은 교회의 소중함 알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더라도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섬겨서
바울 서신 중에는 초대교회의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김성윤: 성경의 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28 고린도후서
노우호: 지난시간에 고린도전서를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책이나 편지(서신서)를 읽을 경우
1장에는 서론이나 총론과 또는 문제의 발단이 있기 때문에
서신서 뿐만 아니라
각 성경의 첫 부분을 중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도 결론이므로 중요하고
고린도전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인간관계의 이야기나 최종 결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있으므로
더욱 중요합니다
가운데 것은 본론이므로 더욱더 중요하죠
그러므로
처음도 중요하고 마지막도 중요하므로
여기저기 보지 말고
차근차근 읽어서 편지 전체를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가 좋습니다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심정으로
그런 글들이 쓰여졌는지를 알아야만
무리한 해석을 하지 않고
건전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읽다가 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감정적, 개인적인 주관적으로
성경을 받아들이거나 해석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성경을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할 일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건의 객관적 사실을 바르게 파악한 다음에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건전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후서를 살펴봐야겠는데
신약성경이 대부분 서신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복음서도 어떤 면에서 보면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향한 복음서이고
마가복음은 로마 및 이방인세계를 향한 복음서입니다
누가복음은 데오빌로각하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서신형식이고
사도행전도 누가복음의 속편으로 데오빌로에게 보내는 편지고
요한복음은 다소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당시 온 세상에 창궐했던 영지주의 이단에 교회가 물들지 않을까 염려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함께 육체로 되어서 오셨던 분으로
강하게 증거하는 문서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서신입니다
요한계시록도
아시아의 7교회에 편지하노니!
하면서 시작합니다
이렇게 신약성경은 요한복음 외에는 모두 편지형식으로 쓰여 졌습니다
서신서(편지)는 논문처럼 골치 아프게 딱딱하게 쓰지 않거든요
정감이 있고 편안하게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일인데
때로는 편지이기 때문에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주고 받는 사람의 사정을 정확하게 모르면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했는가! 하면서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구약도 어떤 부분은 어려운 내용이 있는데
왜 어려우냐 하면
이스라엘 나라가 아닌 주변의 다른 나라를 책망하는 예언이 나오면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역사는 대충 알지만
이스라엘의 주변국들의 역사는 별로 아는 것이 없으므로
내용이 어려운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와서도
각 교회가 처했던 상황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편지이면서도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어려운 편지가 고린도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고린도후서는
성경학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편지입니다
편지의 전체 구조를 보면
앞부분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위로하고 사과하는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8장 9장에는 아주 조심스런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연보하자는
권면의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0장부터 13장까지는 격한 어조로 감정을 폭발하는데
바울사도가 편지를 왜 이렇게 썼을까?
성경학자들이 이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연보하자고 마음을 달래놓고
갑자기 감정을 폭발해 버리면
기분 나빠서 누가 연보를 하겠냐고
그래서 보문자체를 올바르게 파악하는데
고린도후서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른 서신들은 이런 곤란한 내용이 없는데
고린도후서는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만약 성경을 요절중심으로 기억하고 있다면
고린도후서에도 즐겨 암송하는 구절이 두어군데 됩니다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이정도 암송하면 그래도 수준급입니다
다시 말하면
편지 전체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렵고 골치 아파서 성경의 중요구절만 알고 넘어간다면
이런 말씀들은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목적에 별 상관이 없는 구절들입니다
이렇게 성경전체 66권을 한권도 재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편리하게 구절을 빼서 암송하고 활용하고 만다면
편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편지가 담고 있는 깊은 교훈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껏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이
이런 식으로 하고
강해설교를 한다고 하지만
편지 한 장을 한 두번 설교로 끝을 내야만
편지를 듣는 사람들도 쉽게 내용이 이해되고 마음에 담길 텐데
편지 한 장을 너무 긴 시간에 읽혀진다면
편지전체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은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편지를 받으면 단숨에 읽어야만
편지의 내용이 파악되는 것인데
한구절 읽고 일주일 지나고 또 다음 구절을 읽는다고 한다면
연결도 되지 않고 앞엣것은 잊어버리고
또 과잉해석이나 지나친 해석은
성경이 기록된 본래 목적에 벗어날 위험성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 중에 특별히 서신서는
가능하다면 짧은 시간에 단숨에 읽어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교회는 이렇게 합니다
왠만한 서신서는 하루저녁 설교나 혹은 두 번의 설교로 정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니까
성도들의 귀에 말씀이 들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편지가 오고간 사연을 먼저 알고
그 당시의 분위기와 사정이나
기록한 사람의 심정을 살펴본 다음에
그냥 편지를 쭉 읽으면
그냥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 할 때보다 쉽게
성경자체를 설명한 다음에
성경을 읽어주면 성경이 쉽게 마음속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를 읽어보면
위로한다는 말을 많이 하고 있는데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을 많이 위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두 번 갔다 왔고 세 번째 가려고 하는 내용이 있고
더 안타까운 일은
고린도전서를 디모데가 가지고 갔는데
그것을 받아본 고린도교인들의 반응이 문제였습니다
디모데가 가져간 편지를 읽고
고린도교인들의 오해와 잘못을 깨닫고
달라진 것이 아니고
그 편지를 받고서도
바울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어떤 교인 중에는
심지어 바울을 만삭되지 못하고 태어난 자 같다고 하고
바울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고린도교인들 중에 몇몇 사람들이 자주 이런 말을 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송구스러운 말이지만
바울은 외모가 출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키가 작은편에 속하고
머리가 대머리고
찐한 눈썹이 미간도 없이 붙었고
코는 메부리고
다리는 안짱다리
말은 따따부따
눈은 침침하고
몸의 질병으로 늘 옆구리에 찌른 것이 있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이처럼 외모가 훌륭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의 모습이 때로는 그 얼굴이 천사이고 때로는 사람이더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어떻든 바울의 영성이나 그의 진정한 실력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겉모양은 체구가 작고 결함이 있으면 멸시당하기 쉽고
또 바울은 웅변이 없었다고 합니다
앉아서 편안히 이야기 하는 것은
밤이 맞도록 할 수 있는 어른인데
서서 하는 연설을 박력이 없고 웅변이 없다는 철없는 소리를 많이 한 것 같은데
고린도 후서를 보면
이런 고린도교인들의 반응에 대하여
바울도 감정이 상하여
나도 말을 시작했으니까 할 말을 해야 되겠다고 하면서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감정폭발이 나옵니다
그리고 고린도에서 사례를 받지 않았는데 이것을 가지고
자신이 사도가 아니므로 떳떳하게 받지 못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고린도교회 일꾼들이 바울을 지원하기 위해서
에베소로 찾아가서 자금을 지원한 것이 있는데
여기 있을 때는 받지 않더니
먼데 가서는 공교한 자가 되어 이익을 취하는 사람이라고
못된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마음을 얼마나 상하게 했던지
바울이 육체적으로 고생한 것은 두고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것이 나에겐 큰 고통이었고 짐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이야기는 다음시간에 다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29 고린도교회의 문제들
노우호: 고린도 문제가 복잡해서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는데요
제일 큰 문제는 분파문제 이지만
이런 고린도내부의 문제보다도
고린도 교회와 바울과의 관계에서
문제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경우
누군가 그 문제를 수습하려고 할 때
당사자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여기에 보면
바울 사도의 사도직을 중상하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칭사도로 제멋대로 일을 하는 사람이고
12제자도 아니라고 하는
이 문제는 바울을 오래토록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를 읽어보면
너희는 사람을 외모로 보느냐고 하면서
책망하는 모습을 볼 때
바울의 외모를 가지고 시비를 하는 사람도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말에는 졸하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는
바울자신도 언변이 없는 것에 솔직히 시인을 하면서
나는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독신생활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오늘날도 교회교역자가 독신인 경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여성의 경우는 조금 낫지만
남자의 경우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젊은 여성들이 교회 나가게 되면
부모들이 염려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독신으로 생활 한 것이 좋은 점도 있지만
때로는 선교에 불편한 점도 많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는 박력이 없다고 합니다
바울은 말씀을 전할 때
말을 조용조용하게 편안히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설교에 담력도 없고 박력이 없다고 말 합니다
한번은 고린도에 방문할 계획이 있다고 했다가
바울이 가지 않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가지 못한 것인지 가지 않은 것인지 잘 모르지만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가지 않은 것은 너희를 아끼므로 가지 않았다고 하는데
고린도교인들은 말하기를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라면 온다고 했으면 와야지
온다고 해놓고 오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러므로 성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외모를 생각하면서
정말 바울(못생긴)의 속에 성령이 있는가!
바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고린도교회의 수준을 알 수 있겠죠?
김성윤: 예
노우호: 이처럼 말을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는
사례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천막 짓는 일을 하고 또 마게도니아 사람들인 선교비를 보내줘서)
바울이 사례를 받을 권리가 없어서 사례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고
복음의 장애가 되지 않도록
자신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말이 많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의 몸에는 질병이 있었는데
어떤 질병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본인에게도 큰 부담이 되고
바울에게 있던 사탄의 가시(질병)는
심지어 보는 사람들에게도 시험이 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너희가 이것을 버리지도 아니하고 업신여기지도 않고
그리스도 예수같이 천사같이 영접하였지 않았는가!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면
바울에게 있었던 치명적인 육체적 결함이 있었던 같습니다
병을 낫게 해보려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도 했던 것 같습니다
기왕에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시려면
자신의 병부터 낫게 해줘서 일을 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병은 많이 낫는데
바울자신의 병은 낫지 않으므로
철없는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자신에게는 죄가 있던지 다른 결함이 있으므로
병이 낫지 않는다고 하면서
바울이 마음을 상하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바울의 외모를 가지고 자꾸 무시하니까
고린도후서 10장, 11장에 넘어가면
자신에 대한 변론을 하는데
지금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고
화가 났기 때문에 기탄없이 할 말을 해야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울의 말 가운데
어떤 부분은 주룰 따라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내가 명하는 것이지만 주의 명령인줄 알라!
이렇게 구분을 해 놓은 곳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편지 속에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빼지 않고 그대로 성경으로 포함된 것은
바울자신은 주를 따라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바울은 완전히 주 안에 있는 사람이므로
그의 생각이나 감정이 상하여 주를 따라하는 말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가 감정이 폭발한 경우에도
주님 밖에 나가 있던 것이 아니고
주님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편지는 결국 모두 성경이 되었는데
바울 자신의 생각에는
이것은 주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화가 났기 때문에 내 할말을 다한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을 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남의 것을 가지고 자랑한다든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10: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바울을 반대하는 고린도의 사람들을 향하여 하는 말이죠
10:13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11장에 넘어가면
바울이 자랑을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11: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11: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11: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11:7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11:8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
이런 식으로 바울이 따지는 것입니다
11:9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11:10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11:11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11:12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라
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1: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11:16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11장 17절에 보면
11: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이런 말을 쓸 때는
바울은 정말 이 편지가 성경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고
그러므로 바울자신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그럴 때도 주님께서 바울을 붙들고 있었고
바울이 분노를 터트릴 때도
거짓이 아니고 또한 감정만이 아니고
사실을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11:18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11: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11: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11:21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11:22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나도 그러하며'는 원어에는 없습니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이렇게 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11: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그것이 뭐냐하면
고린도교회 같이 속 썩이는 교회를 위해서 염려하는 것이
더 큰 부담이라는 것입니다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11: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11:33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이렇게 12장까지 가면서
굉장히 자랑을 시도 하려고 하면서
무익하지만 내가 부득불 자랑하리니
주의 환상과 계시 받은 것을 이야기 하려고 감정이 끓어오르는데
예수님께 이제 그만! 바울 이제 그만!
바울에게 있던 육체의 가시를 통해
바울을 절제 시켰는지
자랑하다가 그만 두는 것을 봅니다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12: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12: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12: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이런 심정으로
고린도교인들에게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에 보낸 2번째(실제로는 4번째) 편지였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30 고린도교회의 문제들
노우호: 바울이 매우 격한 감정으로 고린도후서를 쓰서 보냈는데
고린도전서를 살펴볼 때
고린도전전서가 있었다고 말씀드렸듯이
그와 같이 고린도후서 편지 앞에도
또 하나의 편지가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 편지도 우리가 알 수 없는 편지인데
지금 이 편지보다 더 격한 편지일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그 편지를 보낸 뒤
그 편지를 받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하고 걱정되는 것입니다
그 편지를 받아본 사람들의 반응이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고 성내지 않는다고 하고선
편지 안에서 자신이 지금 화를 내고 있잖아!
이런 식으로 시비할 것이 뻔하다 말이죠
바울이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고린도에 디도를 보냅니다
디도를 보내서 고린도교회를 수습하게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디도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의 친동생이라고 전해집니다
디도는 아주 활달한 사람이고
어려운 곳에 파송하면 문제를 거뜬히 해결하는 훌륭한 일꾼이었습니다
디모데와 디도가 함께 바울을 돕고 있는데
디모데는 섬세한 면이 있는가 하면
디도는 대범한 면이 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조화를 이루면서 바울을 협력하는 것은 매우아름다운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앞에 어떤 편지(책망의)를 보낸 뒤에 마음이 편하지 않고
디모데는 사람은 착하지만 어려운 곳에 보내면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됨으로
성격이 강한 디도를 보내서 고린도 교회를 수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디도를 보냅니다
진작 보냈으면 숟가락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을
지금은 가래로 막아도 힘들겠다고 생각하면서
디도를 보냈습니다
디도에게 고린도교회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 올 때는
바로 에베소로 건너오지 말고
겐그리아, 아테네, 베뢰아, 데살로니가,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빌립보, 네압볼리
사모트라케, 드로아, 아드레뭇데, 버가모, 서머나
이렇게 위로 아가야에서 마게도니아로 돌아서 무시아쪽으로 오도록
코스를 정해주면서 보냈는데
보낸 뒤 몇 달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무 걱정이 되고 궁금해서
드로아쯤에 디도가 와 있으면 거기서 합류하여 복음도 전할 마음으로
드로아 쪽으로 마중을 나간 것 같습니다
드로아는 무시아에 알렉산드리아의 드로아스라는 곳인데
드로아에서 옛날에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갔던 곳인데
거기쯤 갔을 때 디도를 만나면
그곳에서 일을 하기위해 그쪽으로 갔는데
거기까지 갔는데도
디도는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2절을 보면
[고린도후서]
2: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2: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고린도교회 뿐 아니라
데살로니가교회, 빌립보교회 등
유럽에 있는 다른 교회도 말썽이 없는지 염려하는 마음으로
유럽으로 건너갔는데
사모트라게에도 오지 않았고
네압볼리에 가도 안 왔고
빌립보에 가 봐도 안 왔고
이쯤 되니까 바울의 생각에
이왕 길을 나섰으므로 고린도까지 가봐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것 같다 생각하고 계속 내려가서
데살로니가쯤 갔을 때
디도를 만날 수 있었는데
디도는 여유만만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이 묻기를!
'이 사람아! 어떻게 되었나?'
'어찌 그렇게 소식도 없이 사람의 피를 말리게 하느냐!'고 하니까
'예, 잘 되었습니다.'
'어떻게 잘 되었는데?'
'가서는 몇 사람을 짤라(교회 못나오게) 버렸죠!'
디도는 대범하게 일을 처리한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이 디도를 만나 보니까
디도는 바울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게(교회를 아끼는 마음에) 일을 하지 않고
가감하게 일을 처리 하는데
고린도교인들이 겁을 먹고
곧, 질서가 잡힌 것입니다
디모데가 갔을 때는
교회가 늑대와 이리가 우글거리는 교회처럼
교회가 아주 어려웠는데
디도가 갔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문제를 일으킨 몇몇 사람만 출교시켜 버렸더니
고린도 교인들이 너무 잘 순종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출교당한 교인들 때문에 가슴아파하면서
'그것을 그렇다고 잘라(출교)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사탄의 궤궤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닌데'
'그런 식으로 잘라(출교) 놓으면'
'사탄이 그 사람들을 이용하여 더 큰 일을 꾸밀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처리 했냐'고 하니까
'아니요!'
'그런 놈들은 가감하게 잘라서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처리해야 한다'고 하면서
디도는 사역하는 패턴이 사뭇 다르지요?
김성윤: 예,
노우호: 이렇게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잘 수습되었다는 것을 듣고는
바울은 지금까지 근심하던 것이 눈 녹듯이 녹고
감사하면서 고린도후서를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2장 13절에 보면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 했는데
2장 14절에 보면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에게서 나는 그리스도의 냄새가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향기가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의 냄새가 됩니다
그리스도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지옥의 냄새가 되겠지요
자기처럼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냄새를 풍기게 해서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의 향기에 의해 사람들이 달려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 주제에서 멀어져 다른 이야기로 빠져 들어갑니다
이처럼 바울은
넘치는 충만으로 인하여
어떤 이야기를 깊은 곳까지 끌고 가다가
한참 후에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깨닫고
다시 돌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7장에 5절 보면
[고린도후서]
7: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7:6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바울이 마게도니아로 건너 가니까
디도가 도착했다는 것을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7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7: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 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바울이 고린도후서 앞에 또 다른 (책망의)편지를 보낸 뒤
많이 염려하고 후회를 했던 모습이 보입니다
괜히 격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좀더 기도하고 좀더 참을 것을 후회 했지만
디도를 만나서 잘 해결 되었다는 보고를 들어보면
그런 편지를 잘 보낸 것입니다
바울이 때로는 감정이 폭발하여 말을 하지만
진리에 벗어나지 않고
감정(화)이 충만할 때에도 그의 입에서는 진리만 흘러나왔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도
성격이 참 유하고 낙천적인 면이 있지만
캐톨릭으로부터 굉장한 어려움을 당할 때
화를 버력 내는 경우에도
혈기를 부려서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니고
화를 내면 오히려 성령이 충만해 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정말 성자라고 할 수 있지요?
김성윤: 예
노우호: 공자의 경우도
70세가 넘어서는 마음먹은 대로 행동을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을 정도의 인격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바울과 루터의 경우는
감정을 폭발하여 화를 내지만
실수나 실언을 하지 않고 진리만을 말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7:13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7: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7:15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7:16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바울이 평소에 담대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모처럼 담력을 내여 격한 감정을 썼지만
오히려 그 문제로 인하여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를 이루게 되었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8장 9장은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연보 하자는 말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31 디도를 다시 고린도로
노우호: 바울은 마케도니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의 문제가 수습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울은 그 자리에서 고린도후서를 기록합니다
1년전에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연보하자고 했었는데
그동안 교회가 어려워지면서 연보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고
이제는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자네가 다시 고린도로 가서
미리 연보를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고
바울 자신도 에베소에 갔다가 다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이쪽 사람들의 연보를 모아서 고린도로 갈테니까
내가 갈 때까지 고린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린도교회를 어지럽히던 남은 불씨가 되살아나지 않도록
자네가 지금 이 편지(고린도후서)를 들고
곧 바로 고린도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디도를 다시 고린도에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 후에 바울은 에베소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사도행전 19장 21절에 보면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여기서 3차여행이 끝나고
다시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다시 헬라 즉, 디도가 기다리고 있는 고린도에 갔다가
그 다음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그 다음에는 로마까지 가고
더 나아가서는 로마를 본 후에는 스페인까지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케도니아에 미리 보내고
바울 자신은 아시아(에베소)에 얼마간 더 있습니다
얼마 있는 동안에 에베소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에서 가르치기를
사람이 조각한 모든 것은
(금으로 만들었든지 은으로 만들었던지)
그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가르쳤는데
에베소에는 유명한 아데미신전이 있고
그들이 섬기는 아데미여신은
풍요의신 혹은 다산의 신으로
유방이 18개나 되는 이상한 모양을 한 신인데
은장색들이 그 여신의 신상모형을 작게 만들어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바울이 3년간 사역을 하는 가운데
아데미신이든지 그 어떤 신이든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으므로
우상공장이 문을 닫게 될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에베소 사람들을 선동을 하여
바울이라는 사람이 아데미 신을 모독 할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우리 신이 경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선동 하게 됩니다
아시아 사람들이 상당히 선동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충동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터키 사람들을 보면
맑은 이성을 가지고 진지하게 주님을 섬기 못했기 때문에
초대 에베소교회나 여러 유명한 교회가
지금은 없어져 버렸거든요
김성윤: 예,
노우호: 선동적인 사람들은 골치 아픈 사람들인데
갈릴리 사람들도 약간의 선동적인 기질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감정적이고 선동에 잘 휘말리는 기질이 다소 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되면 참 곤란합니다
누군가의 선동에 교인들이 휘말리게 되면
교회는 어려워집니다
에베소에서 아데미신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큰 소동이 나고
사람들이 연극장으로 몰려가는데
연극장은
산 전체를 계단식으로 지어서
반원 부채꼴 형으로 만든 극장인데
좌석이 24,000명 들어 갈 수 있는 굉장히 규모가 큰 극장입니다
김성윤: 와~ 그렇군요
노우호: 그 큰 연극장에 에베소 시민들이 모두 몰려갑니다
크다 에베소사람 아데미여! 크다 에베사람 아데미여!
이런 구호를 외치면서 연극장으로 몰려갑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소동인지 모르고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전도하려고 멋모르고 가던 중에
아시아 관원인 바울의 친구 되는 사람들이
'연극장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지금 바울선생을 잡으려고 몰려가는 것이라고 알려주므로
바울은
'내가 여기를 떠날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 합니다
이럴 경우 바울은 순교하겠다고 미련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떠나라는 징조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에베소에는 자신의 역할이 끝이 났고
이제는 떠날 때가 됐다
이 정도 복음을 전했으면 복음의 불이 붙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땅에 불을 던지려 왔고
이 불이 붙었으면 내가 뭘 염려하겠는가 하면서
땅에 복음의 불을 붙이려 왔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예수 믿는 사람이 확실히 생기고
믿는 사람이 전도하다가 말썽이 일어나서
바울을 잡아야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가 되면 붙이 붙은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예수 믿게 했다는 것이 아니고
일단 불이 붙으면 불은 퍼지게 되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니까
바울 그곳을 떠나 또 다른 곳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바울의 소망은
예루살렘부터 일루이곤까지 복음을 거의 다 전했고
이제는 이쪽에는 일 할 곳이 없고
바울이 정말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하여
예루살렘에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연보한 것을 전달한 다음에
로마에 가서 불을 지르고 싶은 거죠
로마에 복음의 불을 붙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복음을 전한 다음에는
스페인까지 가겠다!
로마에 불을 지피고 나면 스페인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스페인이 땅 끝이었어요
스페인은 지중해 서쪽 맨 끝에 있기 때문에
스페인을 땅 끝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사도행전]
20: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0:2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20:3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헬라라는 것은 아테네 고린도를 헬라 혹은 아카야라고 하는데
20장 3절을 보면
거기 3달을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디도를 보내놓았지 않습니까?
김성윤: 예,
노우호: 디도가 거기서 연보를 모아온 것과
바울이 모아온 연보를 합하여 정리한 다음에
3달을 있게 되는데
3달 동안에 바울이 한 위대한 일은
로마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사도행전 20장 3절에 나오는 3달은
헬라 혹은 고린도에서 3개월 체류기간을 말하는 것이고
바울은 그 기간 동안에 로마서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책에 '여기서 로마서를 기록' 이렇게 표시를 해두면 좋습니다
로마서를 기록해서
고린도 맞은편 겐그리아항구에 교회가 있었나 봅니다
겐그리아교회에 뵈뵈라는 자매가 있었고
학자들은 여자 집사로 추측 합니다
일꾼이라는 말은
헬라어는 디아포노스, 영어로는 deacon(집사)이죠
이런 여자들이 일찍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아름답게 쓰임 받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편지를 전달하는데
남자들이 좋은 점도 있지만
남자들에게는 싸움을 잘 걸어오고, 싸워서 죽기도 하고
대체로 여자는 헤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니까
여러 남자제자들이 있을 것인데
이 소중한 편지를
어떤 이유로 뵈뵈라는 자매가 가져갔는지에 대하여
설명이 없으므로
이런 추측도 할 수 있습니다
뵈뵈라는 자매의 이름은
로마서 맨 끝에 한번만 나옵니다
바울은 헌신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여자 집사 뵈뵈에게 로마서를 맡겼는데
이 여자는 정확하게 이 편지를 로마에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쓴 편지(로마서)가 정확하게 전달 됐을 뿐 아니라
그 편지가 보존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물론 그 편지에 진리가 담겨 있으므로
성경으로 남겨지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지만
기록 할 수 있는 여건과
전달하는 과정과 보관되는 과정이
성령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에
성경으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로마서는 기독교의 보물이라 할 수 있죠
로마서는
연약한 여자인 겐그리아교회
뵈뵈 자매의 손으로 로마에 전달되었습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로마서]
16: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16:2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바울이 겐그리아지역에서 일을 할 때
뵈뵈가 헌신적으로 봉사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6장 3절에 보면
[로마서]
16:3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이 말은
그 사이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로마에 새로 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때
네로황제의 아버지인 글라우디오스 황제가
흉년으로 인하여 유대인추방령을 내렸는데
[사도행전]
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로마에 갔을 때는
이미 글라우디오스는 죽었고
네로가 통치하는 시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글라우디오스가 죽었으므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다시 고향 로마 쪽으로 간 것입니다
로마가 브리스길라의 고향이었다고 합니다
아굴라는 유대인인데 폰투스(본도)에서 나서
로마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지금은 로마에 가 있는데
로마에 이분들이 있는 이유는
로마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처가와 친정이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바울이 로마로 갈 계획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미리 가서 준비하려는 목적으로
바울의 선발대로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다음시간에 그 유명한 로마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132 로마로 보낸 편지
김성윤: 오늘은 바울서신의 대표적인 로마서입니다
노우호: 예, 로마서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구원의 도리!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칭의 즉, 의롭다함을 얻는 도리와 윤리 문제가 잘 다루어진
바울의 서신 중에 아주 역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한권만 잘 이해한다면
하나님 안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 어떤 것이지(기독교가 늘 강조하는 것) 깨닫게 됩니다
이 시간에는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세밀하게 할 수는 없고
큰 줄기를 간단하게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대개 편지가 오면 몇 개월씩 걸려서 읽으면 안 되고
편지가 왔으면 단숨에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교역자나 교사에게 질문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주 능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편지가 로마교회(성도)에 도착 했을 때
편지(로마서)를 읽는데
1년이나 6개월 걸리는 것이 아니고
단숨에 읽었을 것입니다
김성윤: 그렇죠
노우호: 아마 한 사람이 30분 정도 소요하여
소리 내서 읽었을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듣고 생각하고 질문도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성경을 이렇게 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는 로마를 얼마나 가고 싶어 했는지!
여러해 전부터 로마로 가고 싶어 했는데 매번 길이 막혔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여 길이 막혔는지 모르지만
바울이 매우 로마에 가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는
다른 곳에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남은 생은 오직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
당시 사람들이 땅 끝이라고 생각했던
스페인(스바냐)까지 복음을 전할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15: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여기에 나오는 일루리곤은
고린도에서 서북방 쪽으로 올라가면
아드리아해 해변쪽으로 따라 붙어 있는
비아이그나티아가도를 통하는 지방인데
달마디아까지 가지 않고 아가야와 달마디아 사이에 있는
이탈리아반도의 동편이고
발칸반도의 중서부가 되는 곳이 일루리곤지역인데
거기까지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시작되어
가파도기아, 갈라디이, 부루기아, 무시아,
아시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일루니곤
이렇게 전체적으로 복음을 편만하게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걸어간 대략적인 큰 길은
로마에서 동방으로 통하는
즉, 바벨론까지 가는
비아이그나티아라고 하는 유명한 길입니다
실크로드가 바아이그나티아가도와 이어지면서
동 서양을 잇는 가장 큰 길을 따라 있는
큰 도시마다 거점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일을 했습니다
개개인을 만나서
가정을 찾아다니는 축호전도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아니고
바울은 큰 지역을 확보하여
거기에 일꾼을 세우면
자기 할일은 끝났다고 생각 하는가 봅니다
그래서 그의 영역이
예루살렘에서 일루니곤까지 복음을 전했고
이미 누군가 그곳에서 일을 한 지역이나
다른 사도들이 일 하는 곳은
가능하면 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5장 20절에 보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교회가 있는 바로 옆에 교회당을 짓는데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기를 힘써야지
교회가 있는 곳에 경쟁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남의 터 위에 혹은 남의 처마 밑에 집을 짓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5장 20절에 보면
[로마서]
15: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15: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처럼 바울의 원칙은
세상에 교회가 없는 곳도 얼마나 많은데
교회가 있는 곳에 가서 다른 교회와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단들의 경우를 보면
세상에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교회명패가 붙어 있는 집을 찾아 다니면서
이미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서]
15: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스페인)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15: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이 말은 무슨 의미냐 하면
로마에는 이미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 너희가 알지 못하는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에게로 지나가겠다는 것이고
지나가면서 서로가 약간의 만족을 얻고
주고받은 은혜로 유익이 되었으면 좋겠고
여러분들이 이 편지(로마서)를 통하여 나를 알고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좀더 이해하고
내가 이 편지로 전하고자하는 복음을 이해하게 되면
내가 너희를 지나갈 때에
나를 스페인까지 갈 수 있도록
힘써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로마서를 쓴 것입니다
가능하면
복음을 듣지 못한 지역
교회가 없는 지역
전도자의 발이 닿지 않는 지역
이런 지역을 개척하는
정말 개척자 정신을 가진 바울의 행보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복음을 전혀 모르므로
자신이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 보다는
이미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함으로
서로 확인하며 일치감을 느끼면서
서로 협력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에서 3개월 체류기간에(헬라에 이르러 석달을 머문기간)
로마서를 써서 겐그리아교회 뵈뵈 여자집사를 통해 먼저 보내고
바울 자신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연보한 것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과 친척들의 구원을 위하여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는
로마서를 읽어보면 알게 되는데
바울의 여정은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로마로 가서 스페인으로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죽을 때는 고향서 죽겠다고 하지만
바울은
땅에 있는 고향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면서
호흡이 끊어지는 날 까지
복음을 가지고 복음을 듣지 못한 곳으로 달려가서
그곳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달려갈 수 있는데 까지 달려가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정신과 열정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면
유대인을 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믿게 하는
단, 1가지 방법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어
복을 받고 은총을 받게 되어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시기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기 민족을 사랑할수록
빨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 믿고 복 받게 하는 일에 힘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연보를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방인 세계에서
핍박받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이렇게 개척한 교회를 가르치고 권면하여
어렵게 모은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
안타깝게도
그 교회에서 체포되어
가이샤라 감옥에 2년을 갇혀 억류되는 어려움을 격습니다
이제는 로마서의 내용을 살펴봐야 되겠습니다
로마서를 세밀하게 살피자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므로
로마서를 안 가르치는 교회는 없을 것이고
로마서를 안 가르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죠?
세밀하게 듣는 것은 교회에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밀한 것보다도
로마서의 큰 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웠으면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통하여 로마 성도에게 하고자 하는 말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말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인데
한 걸음 물러서서 보는 것이 훈련되지 않았고
너무 세밀하게 보려고 함으로 더욱 어려워 지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로마서 전체의 윤곽이 어떤 것이며
바울이
어떤 심정과
어떤 믿음과
어떤 관심을 가지고
이 편지를 기록했는지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의 분위기를 되살리고
바울의 간절한 심정을 이해하는 입장에서
다음 시간에 로마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내용을 분류하고 구분하여
성도들이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33 로마서의 파노라마
노우호: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이 서신의 집필동기와 주제설명과 문안인사들이
1장 1절부터 17절까지 이어집니다
1장 18절부터 마지막절 까지는
죄 아래 그냥 버려져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이방인이거나 이방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율법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죄에 종이 되어 있는 사람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들!
율법도 없는 사람들!
이스라엘 밖에 있는 사람들!
이들을 이방인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버려두었다는 말을 3번씩이나 하는데
로마서 1장 2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내어버려 두었다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
28절에 보면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이렇게 3번씩이나 내어버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버린 자식처럼 내버려 두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로마서]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1:31 우매한 자요 배약(背約)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려 두면
이런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 완전하냐?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 완전하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혹은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 하면서도
악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의 연약함과 악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처럼 율법을 가진 사람들이 율법이 없는 사람들 보다 조금 낫긴 하지만
율법이 없으면 죄 아래에서 죄의 종노릇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율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율법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율법 앞에 서 보니까 자기가 죄인인 것이 더욱 빨리 드러나는 것이므로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즉, 율법 있는 사람이나 율법이 없는 사람이나
결과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인데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죄의 관계를 정상화 하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길이 무엇인지
4장에서 다루는데
4장에서 바울이 새로운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 아브라함의 믿음을 모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보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었는데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100살에 아기를 낳게 될 것이라고 했던 것과
사라에게서 생리가 끊어진지 오래인데
사라가 아기를 가진다는 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죠
이렇게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었더니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려고 한다는 사실을 믿을 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면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5장에 하나님과 화목 되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원수처럼 생각하고
죄의 종노릇하고
율법을 범하면서
하나님을 격노케 하던 인간들이
하나님과 화목 되어지는 교리를
5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사람은 어차피 종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유인인 것 같지만
사람은 어느 쪽이든지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죄에 순종하여 죄의 종이 되든지
의에 순종하여 의에 종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게 되든지
혹은 죄의 종으로 죄악을 범하게 되는데
어차피 종이 될 바에는
죄의 종이 되어서 사망에 이르는 것 보다
하나님의 의의 종이 되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복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죄의 종이 있고
의에 종이 있을 수가 있는데
6장 12절에 보면
[로마서]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가 인격적으로 누구에게 내 몸과 마음을 바칠 수 있는데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우리 자신을 드리게 되면
죄라는 것이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7장에서
어려운 이야기를 덧붙여 하게 됩니다
바울은 6장과 7장에서
원죄의 역할과 원죄의 영향을 다루면서
이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이방인들은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고
유대인들은 율법에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남편에게 종노릇하든지
율법이라는 아주 까다로운 남편에게 종노릇하든지
인간은
죄의 종노릇하면
죄의 삵은 사망이므로
반드시 지옥으로 가게 되고
그렇다고
율법에 종노릇하여
율법을 남편으로 모시고 있으면
편안하고 의롭게 되느냐!
율법의 남편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아내가 조금만 잘못하여도
반드시 지적을 당하게 되어
율법이란 남편 앞에서는
어떤 여자나 아내도 의롭게 인정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한 남편을 소개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는 것을 이해도 할 뿐아니라
용서도 하시고
우리가 잘못하면 인도하시고 고쳐주시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담당해 주시는
한 남편을 소개 하면서
죄를 남편으로 모실 것인가?
율법의 아내가 될 것인가?
새로운 남편인 예수그리스도를 모실 것인가?
3가지 경우를 대비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남편으로 모시고 있으면
우리 속에 있는 죄가 발동을 하여
옳은 줄 알면서 하라고 하면 반발을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계속 하려고 하는
못된 죄의 성질이 우리 속에서
율법에 반발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정욕이 발동해서
선을 행하려고 하면 더욱 악을 행하려고 하는
바울이 자신을 내면을 보면서
선을 행하려고 하는 나에게 악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악이 함께 있어서
결심할 때는 선한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결론은 싸움이 되고
부부가 좋은 남편이 되겠다고
이야기를 시작하다가 싸움이 되어버리는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선을 행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도무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제3의 남편인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길은
율법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
누구와 함께 죽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물에 풍덩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어버리면
죽었으므로
죄와 율법이 전혀 관계 할 수 없는 것이고
물속에서 건너편으로 올라 올 때는
죄와 율법을 결별하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죄와 전혀 상관없고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뒤
강 건너편에 올라와서 예수님을 남편으로 다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세례 받는 다는 것이
단지 씻는다는 의미뿐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죽고
죄 씻음 받고
예수님과 연합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의 죄와 율법과는 완전히 이혼하고
예스그리스도와 다시 만나서 재혼한 상태
이런 이야기를 6장과 7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8장에는
이렇게 된 사람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고
하나님께서 정죄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하여는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죄인에게 최고의 형벌이 죽이는 것인데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죄 값을 묻지 못하므로
정죄 할 수 없고
다시 산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았기 때문에
다시 산 사람에게는 옛날 법이 아무런 구속력이 없고
또 우리의 죄를 대신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들에게
엄청난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
8장에 나옵니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고
율법의 저주와 율법의 심판에서 자유하게 되어
정죄함이 없는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어
해방을 선언하듯이
로마서 8장에서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9장에는
다시는 육신을 ?i지 않고
영을 ?i아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34 로마서 8장
노우호: 오늘은 유명한 로마서 8장을 살펴봅시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수도 없음이라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확신에 찬 승리를 선포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김성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자
노우호: 예,
죄와 사망의 법이 억압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을 따라 행하는 자
이제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김성윤: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거하고 있는 자
노우호: 하나님의 영이 사람 속에 있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이고
김성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도함을 받는 자
노우호: 하나님의 영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늘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이제는 선한 길로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두려운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바(아빠)라고 부르면서
친근한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김성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죠?
노우호: 그렇습니다
남의 아버지를 '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잖아요?
김성윤: 그럼요
노우호: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고
하나님의 후사로서
하나님의 뒤를 이어서
김성윤: 하나님의 후계자
노우호: 예,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천국을 소유 할 자라는 뜻이죠
김성윤: 그런데 현재 이 세상에서는 고난도 함께 받는다고 하죠?
노우호: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광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을 얻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고난은
장래에 받을 영광과는 비교 할 수 없는
큰 영광에 참여 할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김성윤: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자' 라고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우호: 우리가 영적으로 구원받아서 자유하게 되었지만
아직 부활은 되지 않았잖아요?
김성윤: 예,
노우호: 영혼의 중생뿐 아니라
몸도 완전히 영화롭게 되는
'부활을 바라보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참고 기다리고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성윤: 그런데
'연약하여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자'
노우호: 예,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고 연약하여서
때론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도 모르고 있지만
그래도 거듭난 사람입니다
또 하나의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누구를 많이 사랑하면
당신 없이는 못살아!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 난자는
하나님 없이는 못산다는 자입니다
청취자 중에
하나님은 있으나마나 하고
세상 살아가는데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거듭났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이 거듭났는지 안 났는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있는지를
진단해 보면 됩니다
김성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노우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삼았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
우리가 믿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미리 알고 계셨고
언제부터 알고 계셨느냐 하면
창세전부터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김성윤: 미리 알고 계신 것 뿐 아니라
미리 정하신 자
노우호: 예,
이것을 예정이라고 하지요
미리 하나님께서 이미 정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면서 물리학자인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는데
'하나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전부터
예정하신 그의 뜻을
절대 주권적인 능력으로
역사 가운데 섭리 가운데
예정하신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세상의 천덕꾸러기나 만물의 찌꺼기
세상의 구경거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영화롭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김성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느냐 하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시죠
노우호: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소중하게 귀중하게 존귀하게 여겼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을 주고 우리를 샀는지를 알아보면 알 수 있죠
독생자의 피를 댓가로 지불하면서 우리를 사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위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아무도 대적할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그 누구도 대적하지 못하는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성윤: 그리고 모든 것을 은사로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노우호: 외아들 까지 주셨는데 아낄 것이 없지요
제일 소중한 것이 외아들인데
외아들까지 주신 분이 무엇이든지 주시지 않겠는가!
무엇이든지 은사로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성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람
노우호: 하나님께서 정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해버리니까
아무도 송사를 못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송사하고 참소하고 싶겠지만
하나님께서 최종적인 심판과 재판을 끝낸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가 받을 재판과 심판과 저주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의 집행이 끝났기 때문에
아무도 송사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정죄 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김성윤: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노우호: 하나님아버지만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독생자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우리를 살리려고 했다면
성부와 성자께서 우리를 그렇게 위하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김성윤: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들은 이미 심판이 끝난 사람들이죠?
노우호: 예,
하나님께서 이미 재판을 끝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우리들 죄의 심판을 끝냈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이 깨닫게 되었으므로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이 편지를 쓰면서
그 감격을 표현한 로마서 8장이
로마서 전체의 최고로 고조된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재판이 이미 끝나버린 자
또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실 뿐 아니라
독생자 예수님이 자기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우리를 위하시는 자
성령께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
성부, 성자, 성자 3위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택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위하여 간구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김성윤: 참으로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신다구요?
노우호: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간구하는 것을 받아서
하나님 아주 가까운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이
어떤 고민이 있어서 교회에 갔는데
여러분의 교회 목사님이 강단에 엎드려서 기도하는데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굉장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했던 바로 그분(예수님)이
하나님 바로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위해 날마다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참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가 중언부언하기도 하고
횡설수설하기도 하고
아주 이기적인 기도가 되기도 하지만
성령께서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들이 기도하고
교회 목사님이 기도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성령이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해 간구한다고 하면
김성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없겠네요?
노우호: 예,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는 경우라도
이런 기도 때문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지 않겠는가! 하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어려움이 닥쳐도
의기양양하게 뛰놀아도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하는 자는
환란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로서도
그 사랑을 도무지 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때로는
세상에서는 죽임을 당하기고 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같은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어려움일지라도 이제는 이런 사랑을 받아버렸기 때문에
넉넉히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세상의 어떤 유혹이나 핍박이라도
넉넉히 이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내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후사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자이고
죽음으로서도 끊을 수 없고
천사들이나 권세를 가진 자나
현제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도무지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향하여
가장 큰소리로 외치는 음성이 로마서 8장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
즉,
창세전부터 예정하시고
미리아시고, 부르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아들까지 주시기까지
위대한 사람이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진리를 믿고
예수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의 이름으로 고난도 즐거이 받는 그런 사람이 된 것이죠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아름다운 일에 동참하고
이웃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애를 태우면서 살아가는
충성하는 기회로 주어졌는데
헛되게 살 수 없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
잠시잠깐에 지나가고 나면
그 영화로운 나라에 서게 될 때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와!·~ 내가 이렇게 위대한 존재인 줄 몰랐다!
굉장히 놀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너무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지옥만 안간 것도 너무 고맙고 감격스러운데
이토록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내가 처음 예수를 믿은 그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귀한지!
바울과 같은 찬양을 하게 될 줄 믿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35 바울의 동족애
노우호: 지난시간에는 바울이 외치는 승리의 큰 함성을
로마서 8장에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큰 구원의 빛이
이방인에게 비췬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큰 승리를 깨닫지만
바울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낙심이 됩니다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골육친척)은 어떻게 되는가!
이런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율법은 유대인에게 주어졌지만)
유대인들은 구원(예수그리스도)을 거절하여
바울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소외되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고
견딜 수 없는 심정을
로마서 9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처럼 자기 자신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 동족이 구원받는 길이 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마음을 다시 가다듬어
전도의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은혜와 복 주시기를 작정되어 있고
미리 아시는 자들을 부르시기 때문에
가서 전파하는 사람이 전파하기만 하면
믿을 사람들은 믿는 다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듣지 못하고
듣지 못한 사람은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한 자를 부를 수가 없는 것이죠
전파하기만 하면
들을 사람은 듣고
믿을 사람은 믿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히 이방인들을 전도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총을 독차지 하는 것을 보게 되면
마침내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서
결국은 하나님께 돌아 올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10장과 11장에서 정리를 합니다
12장에 가면
바울은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 헌신을 권면합니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가 죄 가운데 팔려서
영원히 사망과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들을
하나님의 독생자의 피로 사셨지만
그래도
우리 자신들이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고집하고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강제로 우리를 빼앗아 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청취자들은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온전히 단번에 기쁜 마음으로 드려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소유가 아닌
남의 것을 억지로 끌어다가 쓰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려졌을 때
사람들에게 직분이 주어지게 되고
직분에 맞는 은사가 주어지게 될 것이고
은사에 따라서 봉사하게 된다는 것을
11장에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합니다
뭐가 되지도 못하면서
광장한 뭐가 된 것처럼 착각 하지 말고
예수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고
모든 성도들은 지체가 되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일사분란하게 봉사하라는 권면을 합니다
12장 후반부터 13장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다루는데
이것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것만으로 교만방자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삶을 사는 윤리적이 삶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윤리는
12장 9절부터 13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특별히 12장 9절부터 13장까지 있는
윤리적인 부분을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읽고
또 산상보훈도 주야로 읽고 묵상하면서
그대로 실천하려는 노력이 한국 사람에게는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가끔씩 매스컴에 나오는 이상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일반사람들이 본다면
광신자에 가깝고
윤리를 떠난 이상한 사람들로 비춰질까봐 염려가 됩니다
윤리를 떠난 진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건전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사람들의
선하고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살라고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5장 16절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로마서 13장에 보면
세상에 권세 있는 사람들이나 행정을 맡은 사람들에게
비협조적인 삶을 살지 말고
아주 건설적으로 협력하고
세금을 포탈하는 일은 하지 말고
공세와 국세를 어김없이 바쳐서
1등 국민이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실 로마시대에
어떤 악한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삶에 대하여 흠을 잡지 못했습니다
종교 문제 외에는 시비를 할 것이 없을 정도로 흠 없이 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지극히 윤리적이고 거룩해야 됩니다
14장과 15장에는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새신자가 있기 마련이고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비판하거나 흉을 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여
자기의 기쁨을 추구하지 말고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남은 여정은
이제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로 갔다가
스페인으로 가고 싶은 심정을 15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연약한 형제를 배려하는 마음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자칫하게 되면
새로 나온 연약한 심령들이 소외 될 수 있습니다
성도의 교재에서 소외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고
믿음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면
크게 문제가 안 되지만
처음 나온 사람들이 소외되면 위험합니다
한 생명이 교회 나온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거든요
이처럼 새 사람이 교회 나오게 되면
할 수만 있다면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해야 될 기쁨입니다
성경에 보면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온 일로 인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푸는 것을 보는데
한 생명이 교회 새로 나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정말 따뜻한 품이 느껴지도록
교회에 왔을 때
낮선 곳이 아니고
마치 어머니 품에 돌아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도록
교회가 평화롭고 온유하고 부드럽고 겸손하고 친절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울이 약한 자들을 위해서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만약 연약한 사람이
내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하여 실족하는 일이 생긴다면
자신은 평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할 정도로
바울은 자신의 유익보다는
타인의 연약한 심령을 염려하는
아름다운 심성을 가졌습니다
로마서를 읽게 되면
바울의 이러한 심정을 어느 정도 느끼게 될 것입니다
16장에 보면
바울은 여러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 같이 세상 넓게 멀리 다니는 큰 인물도
가슴속에 묻어 둔 고마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통신이 편리한 시대가 아닌데도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에 26명 정도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바울의 가슴속에 있었다는 것이고
바울이 기도 할 때마다 떠 올리면서
너희를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고 하면서
누구누구에게서 문안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성경을 잘 살펴서
바울의 간절한 심정을 이어받아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이 승리의 복음!
바울은 '복음'이라는 말이 나오면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한참 치우쳐서
복음을 설명하다가 자신이 하던 이야기를 잊어버릴 정도로
복음에 온갖 정열을 쏟아 붓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로마서)를 써서 보내고
자신은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
겐그리아 항구에서 배를 타려고 하는데
오순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가는 일행 중에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하는 사람들이
그 배에 함께 타고 있는 것을 알고는
바울은 배에서 내립니다
그리고 육로로 걸어서 마케도니아로 올라갔다가
다시 무시아의 드로아에 건너가서 1주일을 지내게 됩니다
드로아에서 1주일을 지나고
내일이면 떠날 쯤 되었는데
바울이 밤중까지 강의가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3층에서 강의가 진행 되었는데
창문에 걸터앉아 있던 유두고가 깊이 졸다가
창 밖으로 떨어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졸다가 깜짝 놀라 잠을 깨었을 것입니다
떨어지 유두고를 사람들이 안고 올라왔지만 거의 죽었는데
바울이 기도함으로 살아났습니다
유두고는 '다행이다'라는 의미인데
정말 이름대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런 사건이 있은 후에
바닷길로는 가지 않고
바울은 평소에 배를 많이 타는 것이 지치기도 하여
육로로 걸어서 아소까지 오게 되고
거기서 짐과 일꾼들은 배를 태워 보내고
자신은 아소에서 배를 타고 밀레토스로 오게 됩니다
정말 가고 싶은 곳은 에베소이지만
지난번에 에베소에서 소동(크다 아데미여!)이 난 적이 있기 때문에
에베소에는 가지 못하고
밀레토스에서 에베소의 두라노서원 출신들을 불러내어 마지막 작별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20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이 거기서 유명한 말을 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길에
환란과 결박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면
자신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 합니다
사명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바울의 자세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를 로마로 보내놓고는
마케도니아를 둘러서 드로아로 밀레토스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 달려간 길에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바울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36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노우호: 바울 당시의 아시아는 에베소가 중심인 그 아시아입니다
밀레토스가 있는 지역이 이오니아 지방이고
이오니아 위쪽이 아시아이고
아시아 위쪽이 무시아이고
가운데 쪽이 부루기아입니다
에베소 지역에서 약간 반원에 들어오는 지역이 아시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에
드로아에서 있었던 일과
밀레토스에서 에베소 지도자들
(에베소교회 지도자만 아니고 아시아 전체의 지도자를 말 함)
바울은 아시아 지역의 지도자를 모두 불러서 이별을 하고
예루살렘을 향하게 되는데
먼저 도착한 곳은 '두로'이고
그리고 '가이샤라'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1:1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1: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21: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21:5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21: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21:7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21: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21: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21: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21: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21:15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잠시 머무는 곳마다
바울을 위해 평소 기도하기를 쉬지 않던 사람들이 염려하기를
바울께서 이번에 예루살렘 올라가면
큰 환란과 결박과 핍박을 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예루살렘에 안 가도록 충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고 하니까
성도들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이라면
최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혹은 신앙생활에서 불편한 것은
마지막 여지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지 않고
끝까지 자기 고집대로 하려고 할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외아들이시지만
절박하고 목숨이 달려있는 기도를 하시면서
나의 원대로 하지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하면서
끝에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는 것을 봅니다
기도에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결국 체포를 당하여 매를 맞고
가이샤라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감옥에 있으면서 베스도, 벨릭스, 아그립바 왕
이런 여러 사람 앞에 공식적으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체포된 이유를 설명하면서도
자신의 개인적인 변명은 전혀 없고
모두 예수님 이야기만 하게 됩니다
나중에 바울이 남긴 글을 보면
'나는 매이나 하나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다'라고 고백 합니다
이름 없는 바울이 체포 된 것 때문에
만나기도 어려운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에게
예수님을 증거 하는 기회가 주어져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고 바울이 감옥에 갇히므로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습니다
체포되기 전에는 너무 바쁘게 사역하느라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는데
2년 동안 연금됨으로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서
그동안 계시 받은 것과 가르치던 것을
정리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에 바울과 늘 동행하던 누가도
아주 자유롭게 되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자유로운 2년 동안
팔레스타인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팔레스타인은 넓은 땅이 아니고 우리나라 강원도만 한 넓이이므로)
구석구석 뒤져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을 찾아가서(인터뷰 하듯이)
예수님에 관한 자료들을 많이 수집 했던 것입니다
앞에서 누가복음을 살펴보았듯이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심지어 사도들도 챙기지 못했던)
30가지나 되는 소중한 자료를 수집하게 되고
그 소중한 자료가 모아지게 되면서 2년의 세월이 지나게 되어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바울과 함께 로마로 가게 됩니다
로마로 호송하는 군인 중에 아우구스투스(아구스토)를 주목해 보면
이는 황제의 근위대의 백부장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27:1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 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적어도 로마까지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이고
강도나 절도를 저지른 다른 사람과
사회를 소란하게 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바울은 다르죠?
예
바울의 호송을 맡은 율리우스는
인격이나 신체적으로 훌륭한 인물로 황제의 친위대 백부장 이었습니다
로마의 군인들 중에 1등 군인을 뽑아서 황제의 친위대로 선택이 되는데
바울은 백부장 율리우스라는 친위대에게 맡겨져서 로마로 갑니다
27: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27: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
처음에 탔던 배는 아드라뭇데노 행선지의 배를 타고 갔는데
가다가 아시아의 밀레토스 근방에서 배를 내려
알렉산더리아 배를 갈아타게 됩니다
아마 길리기아의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서
루기아의 무라 성에 이르러
로마로 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27: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27: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성에 이르러
27: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27: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27: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성에서 가깝더라
27: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27: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27: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27:12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 편은 동북을, 한 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그 중간에 그레타(그레데)라는 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미항인 페어해변이라는 항구에 도착했는데
그 시기는 풍량이 있고 춥고 하므로 여행하기에 뱃길이 좋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겨울을 지났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선장과 뱃사람들이
여기는 항구가 너무 작아서
술집도 없고 여자도 없고 하다고
즐기기 좋은 큰 항구에 갈 것을 고집 합니다
적어도 베닉스에까지 가서 과동을 해야지 하면서 갈려고 할 때
바울은 가면 안 된다고 하는
마음속에 거리낌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백부장에게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바울은 손이 묶인 죄수이고
배에서는 뱃사람의 말이 더 힘이 있으므로
선장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죠
결국은 미향을 떠나서 라세아항구 쪽을 지나
그레데항구 쪽으로 방향을 바꾸려고 하는데
갑자기 섬 가운데서
사도행전 27장 13정에 보면
[사도행전]
27: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27:14 얼마 못 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27: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27: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27: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 가더니
27: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27: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27: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몰아쳐서
베닉스에 가지 못하고 지중해로 떠밀려 가게 됩니다
이 바람이 얼마나 무섭게 몰아 쳤는지
14일동안 햇빛 달빛 별빛도 보지 못한 채
배가 이리저리 떠밀려 가서
결국은 파선될 것 같으므로 모든 배의 짐을 바다에 버립니다
알렉산드리아 배는 이집트의 곡물을 싣고 로마로 가는 배라고 할 수 있는데
배에 곡식을 굉장히 많이 싣습니다
그리고 배에는 276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276명의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판단으로
배에 있는 곡식은 전부 바다에 버렸습니다
14일 동안 사람들은 먹지도 못하고(먹어도 모두 토하므로) 얼마나 시달렸는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모든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했을 것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고
그들은 혼이 다 빠져 버렸습니다
살 소망이 전혀 없을 때
밤에 천사가 바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사도행전]
27: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7: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7:26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이렇게 천사가 바울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바울이 아주 용기를 얻게 됩니다
배가 깨어지든 배가 바다 밑으로 가던지
배가 어떻게 가던지 로마의 항구에 도착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 확실함으로
바울이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정신이 없지만
바울 혼자만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파도가 몰려와도 별 두렵지 않고
더 큰 파도를 기대하며 파도타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믿음도 중요하지만 소망도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소망이 끊어졌기 때문에
소망이 끊어지면 절망이고 절망을 곧 죽음이죠
키엘케고르는
'소망이 없는 자체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소망이 끊어진 것은 사실은 죽음이죠
그때부터는 배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이 하자는 대로 합니다
이제는 선장도 필요 없고 백부장도 필요 없습니다
바울을 호송하던 사람과 뱃사람들은 모두정신이 없고
오직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바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
하나님께서 보장해주는 약속을 움켜진 사람은
영혼의 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닻을 내렸기 때문에
아무리 세상 바다가 흉용하다고 할지라도
거기 떠밀리지 않고
담대하게 276명의 영혼을 격려하는 장면을 봅니다
'여러분이여!'
'여러분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배와 물건만 손해가 있지만
'우리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므로 안심하시라'고 하면서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여
감사기도 하고 음식을 먹고
그렇게 떠밀려 가다가
멜리데(몰타)라는 섬(몇 년 전에 미소정상회담이 있었던 섬)
가까이 가서 배가 깨져버렸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도 생명에 손상이 없이
육지에 상륙하게 되는 이야기가
사도행전27장 28장의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27:27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27:28 물을 재어 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7:29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27: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27: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27:32 이에 군사들이 거룻 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27:33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27:34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27: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27:36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27: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륙 인이러라
27: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27:39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27:40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27:41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27:42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27: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27: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37 로마로 가는 길
노우호: 오늘은 우리가 멜리데 섬으로 떠나 보겠습니다
배가 파선되어 136명의 사람들이
멜리데 해안에 나뒹굴어져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장관일 것입니다
유라굴라의 광풍에 14일 동안 배에서 초죽음이 된 상태에서
바울의 위로와 격려로 인하여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해안 가까이에서 배가 파선됨으로
바다에 빠진 사람들이 해안에 떠밀려 나왔습니다
물에 젖은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있으므로
토인들이 불을 피워 사람들의 몸을 녹이고 있는데
바울도 부지런하여 어느새 나무를 한 아름 주워서 불에 넣는 순간
나무더미에 딸려온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토인들이 생각 할 때
바다에서는 용케 살았지만
독사가 무는 것을 보면
분명 살인자라고 판단하고
죽기를 기다려도 죽지 않으니까
돌이켜 신(神)인가 보다! 하고 놀랍니다
그 때
그 섬에 '보볼리오'라는 섬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로 인하여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바울의 기도로 그 병이 낫게 됩니다
토인들이 이 은혜를 갚는다고 3개월간 276명의 숙식을 모두 책임지게 됩니다
3개월 후(과동이 지난) 과동을 마친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서 로마로 향하게 되어
수라구사(시실리 섬의 동쪽 항구)에 도착하고
레기온(로마본토 이탈리아 최남단 로마 주둔군이 있는 곳) 도착하여
푸데올리(보디올)에 도착하게 되고
트리인(삼관=세 여관이 있는 곳, 로마의 외각40Km위치에 있음)에 도착하게 됩니다
삼관까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중을 나온 것입니다
피켓을 들고 파울로스 만세!
파울로스의 입성을 환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중 나온 것을 보고
이 사람이 누구관대
많은 사람들이 환영을 하고 있는지!
근위대 백부장 율리우스가 굉장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의 호송과정을 생각하면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율리우스가 황제의 친위대이므로
(당시의 로마 황제는 네로였음)
바울의 정치범에 관하여 황제에게 좋은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해서
유대인들의 대표를 불러 모아
자신의 변명을 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소개하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도 할례당들이 와서 자신의 일을 훼방을 할까봐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졸장부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안목이 열려 있었고
바울을 훼방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28장 30절에 보면
[사도행전]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바울이 연금된 것은 감옥이라 할 수 없고
가택연금형태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치장에서 미결수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바울자신의 셋집에서 생활했으니까
호송을 맡았던 백부장 율리우스의 도움도 있었겠고
바울이 로마시민권도 있었으므로
황제의 선처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셋집에 연금된 2년 동안
복음의 사역은 계속되었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기간동안에 옥중서신이라고 하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세서, 빌레몬서
'엡빌골몬'서신 4개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심문을 당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고
자신의 변명이나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언제나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편지를 기록한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모릅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2년, 로마에서 2년
모두 4년 정도 자유롭지 못하고 감금되었는데
이 동안에 바울이 자유로웠다면 교회가 3-4개 정도 더 세워졌을지 모르지만
그가 체포되어 감옥에 연금되면서
여러 개의 서신을 기록하게 되었고
높고 낮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기 때문에
감옥에 있다고 해서 자신의 복음사역이 위축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몇 개 더 개척하는 것보다
여러 위대한 서신서를 기록한 것은
바울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바울의 신앙고백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살펴보려고 하는 서신이 에베소서인데
에베소서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교회를 개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무엇인지 신학적으로 밝혀서 기록한 에베소서의 가치는
교회를 10개 개척한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많이 개척한다고 해도
교회란 무엇인지 밝혀 알지 못하면 교회가 반듯하게 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에 보낸 골로새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머리(예수그리스도)를 다루고 있고
에베소서는 몸(교회)을 다루고 있으므로
머리와 몸은 함께 연구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래서
머리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에 붙은 몸으로서의 교회!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이 두 서신은 따로 떼지 않고 함께 읽어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에베소서를 서신이 여왕이라고 하고
여왕이 충만하여(에베소서가 넘쳐) 골로세서가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두 서신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에베소서는 교회에 관한 내용이 많고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는
매우 개인적인(사적인) 내용입니다
빌립보교회의 교역자인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위문금을 가지고 바울을 찾아 왔다가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들었습니다
바울이 병이 낫기를 기도하고 애를 태우다가
병이 낫게 되어
개인적으로 위문금에 대한 빌립보교회에 감사와
에바브라디도의 병 나은 것에 대한 위로의 편지로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편지 속에 큰 진리가 있어서
성령께서는 이것을 성경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빌레몬서가 있는데
빌레몬서도 개인적은 작은 서신으로
온 교회를 위해 쓴 것도 아니고
어떤 지역을 위해 쓴 것도 아니고
빌레몬이라는 바울의 제자로
두란노 서원에서 진리를 배웠던 사람인데
가정교회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가정에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는데
주인집에서 도망을 나오면서 금품 얼마를 훔쳐서 나온 것 같습니다
로마로 도망을 와서 바울을 만나고
예수를 믿고 완전히 변한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용서하여 관대하게 받아 달라고 하는
바울의 부탁의 마음을 담은 편지입니다
이렇게 4개의 서신을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옥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고
자신이 셋집에 있으면서 밖으로 나가는 자유만 약간 제한 받는 정도이고
바울이 로마에서 진짜 옥에 갇힌 것은
두 번째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갑니다
마메틴 감옥이라는 유명한 감옥인데
사형수들이 들어가는 감옥입니다
이때 기록한 서신서가 디모데후서로
정말 사형수들이 갇히는 옥에 있으면서 기록한 것입니다
이제 에베소서 내용을 살펴봐야 되는데
시간이 너무 짧아서 에베소내용 전체를 파악할 수가 없고
에베소서는 교회론이라는 것을 알고 읽으면 좋습니다
바울서신들을 보면
앞부분은 이론적인 것을 전개하다가
이론전개를 마치고
그러므로 하면서 실천편을 전개합니다
이처럼 이론과 함께 반드시 실천을 강조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는 잘 정립하면서
실천면에서 등한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있지만 믿음의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신앙과 생활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신앙은 있는데 생활이 따르지 못해서
질타를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론적인 것만 보지 말고
반드시 이론에 따른 실천적인 삶을 살아서
신학적인 것과 윤리적인 면을 동시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함으로
1천만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은 것 뿐 아니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앞으로 교회에서 전도가 될 것이라 봅니다
지금처럼 윤리적인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이 되지 못하여
전도가 더욱 어려워 질것으로 생각 됩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반드시 윤리적인 면을 잘 살펴서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38 옥중서신들
노우호: 오늘부터는 사도바울이 로마에 있는동안에 기록한 서신서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옥중서신이라고 말하는 서신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이고
디모데 후서도 진짜옥중에서 기록한 서신입니다
그러나 보통 옥중서신은
엡빌골몬 4개의 서신을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지난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옥이지만 무지막지한 감옥이 아니고
바울의 호송을 맡았던 아우구스투스의 로마황제 친위대 율리우스 백부장으로 인하여
은혜를 입어서
감옥이 아니고 자신의 셋집에 있으면서
밖에는 나갈 수 없지만
오는 사람들은 모두 영접 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깊은 기도와 묵상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놀라운 내용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 기록 되는데
어떤 면에서는 바울의 신앙과 신학이 가장 무르익어서
최고 수준의 작품이 에베소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바울의 가장 대표적인 서신을 로마서라고 하지 않습니까?
김성윤: 예,
노우호: 그래도 수준이나 차원을 두고 비교한다면
로마서는 기독교의 기초에 해당하고
에베소는 그 기초위에 건물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서가 기독교교리의 기초가 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하는 것 위에
에베소서는 그 터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소중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수준이나 차원 면에서 가장 높은 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성윤: 에베소서가 내용면이나 신학적인 면에서
많은 서신들 중에 풍성하고 충만한 서신이라고 하던데요
노우호: 예,
에베소서의 서신은 충만과 풍성이란 단어가 제일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에베소서는 넘치는 책이라고 말을 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여 차고 넘쳐서 골로새서를 기록했다고 할 정도로
바울은 비록 육신은 연금되어 있는 상태지만
영적으로는 더욱더 충만한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옥에 갇힌 것은
오히려 복음에 진보가 된 것을 믿어라! 고 하면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 것을 권유하고
자신은 육신은 감옥에 매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매이지 않더라는 간증도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2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장부터 3장까지는 '교회론'이라는
아주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이 교회론을 시작하면서
교회의 사명이나 조직을 이야기 하지 않고
교회론을 전개하면서 예정론을 먼저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진행하시다가
자연발생적으로 교회가 생겨났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교회를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고
그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교회)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역사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AD62년경 기록되었다고 보는데
이 때는 사도바울의 나이도 60세가 넘은 노년을 바라보고 있고
바울이 약 3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30년 이상 교회를 개척하고 신학을 정리하고 계시를 받아
이제 그의 신학이 마무리 단계에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신학과 신앙과 인격이 무르익었고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도 없이 여유도 있고
감금되기 전에는 사역 현장을 다니느라 몹시 바쁘셨지만
4년(가이사랴2년, 로마에서 연금2년)의 긴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에베소서는 허급지급 쓴 것이 아닙니다
깊은 기도와 묵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문장이 아주 다듬어지고 풍성하고 충만한 문체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 서신입니다
김성윤: 서신 중에 여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요
노우호: 그렇습니다
성경학자들이 바울서신 전체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에베소서는 서신의 여왕이라는 말을 합니다
에베소서는 에베소교회만을 대상으로 쓴 것이 아니고
아시아 여러 교회가 회람하여
모든 교회가 이 서신을 읽도록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가장오래 시무 했던 곳이므로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이 가장 많은 교회지만
개인적인 문안 인사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편지의 끝에는 누구누구에게 문안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런 것이 없고
이 편지를 전달하는 두기고라는 바울의 연락책임을 맡은 자가 있는데
개인적인 사정(사적인 정황)은
두기고 입으로 너희에게 전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를 쓸 당시에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바울의 개인적인 사연을 적은 것이 아니고
공적인 서한으로 적은 것입니다
이전에 바울이 쓴 글들이 교회에서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안고
바울은 옛날 갈라디아서나 고린도후서를 쓸 경우와 같이
감정이 폭발했던 일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에베소서는 은혜가 충만해서
감정적인 의분이나 분노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감격하여 감격의 눈물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초창기 서신인 갈라디아서나 고린도후서의 경우는
마치 포도를 담은 자루 속에서 가스가 차서
금방 터질 듯한 감정이지만
에베소나 골로새서는 이미 포도주가 숙성이 되어
깊은 맛을 간직한 내용의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첫머리에
1장 1절과 2절에 바울이 늘 하는 문안을 하고 난 이후에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처음 시작하는 말이
찬송하리로다!
본론을 시작하면서
감격함으로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일반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4년 동안 연금되어 있는데 무슨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불평하리로다! 혹은 짜증나리로다! 라고 할 텐데
왜, 찬송하리로다! 하면서 감격하는가 하면
이렇게 조용하게 지내는 시간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당시 자유 했다면 교회가 몇 개 더 개척 되었겠죠
교회가 개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척된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되는가 하는
교회론을 기록한 것은
만고(오고가는 시대에)의 은혜가 되는 것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게 되고요
사도바울이 감옥에 연금된 사건은 불행한 일인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것이 얼마나 큰 흔적을 남겼는가!
에베소서라는 위대한 서신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교회의 모습을 다듬어가고
교회론을 정리하는데 아주 중요한 서신이 된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에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면서
4절 이후에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 이야기 하는데
여기서는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4절의 곧 이하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바울이 찬양 할 수밖에 없는 신령한 복)
첫째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는 것으로
우리가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면
미리 구상을 하고 설계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무턱대고 역사를 운영하다가
형편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미리 정하신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주사위를 던져봐서 그것으로 어떤 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뜻을 가지고 일을 하시는 분이지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들이 행동하는 것 봐가면서
일을 처리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그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서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깊으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택하시고
두 번째는
예정하시고
이렇게 하시고 무엇을 하시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순전히 일방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 깊으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우리를 아들이 되게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또,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시고
구속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구속하신 후에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해 주시고
우리에게 비밀을 알게 해 주시고
나중에는 성령으로 인치심으로
영원히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한
이런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는 다음시간에 조금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39 하나님의 우주적 목적
노우호: 지난시간에 에베소서를 공부하는 가운데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목적이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반석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밤하늘에 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낮에도 별이 있지만 햇빛 때문에 별을 볼 수 없지요
밤에는 별이 총총히 많이 나타나는데
도시 사람들은
시내의 조명이 너무 밝고 공기가 맑지 않아서
별을 잘 볼 수 없는 것 같아요
우리들은 하늘의 별들을 무심코 보지만
김성윤: 현대인들은 하늘의 별을 잘 보지 않습니다
노우호: 예, 그렇습니다
김성윤: 별 볼 일 없다고 호호호
노우호: 허허허
제가 밤하늘의 별들을 강조 하는 이유는
별을 보면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제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 광대무변한 우주 안에
얼마나 많은 천체가 있으며
그 우주 안에 은하계들이 있고
은하계 안에 태양계가 있고
태양계 안에 생명이 있는 지구가 있는데
제가 나름대로 신학을 하며 성경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하나님의 관심은 지구라는 별에 온통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하학적으로 보면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운행하고 있고
태양계는 우리은하의 중심에서 3만 광년 떨어져 있는 곳에 있지만
목적론적으로 본다면
우주의 은하계 어떤 다른 별이 중심이 아니고
태양계 안에 있는 지구야말로
하나님의 우주적 목적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온 관심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고
그 많은 생명체 중에서도 사람!
사람들 중에서도 선택되고 예정하신 사람!
예정하신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의 피를 쏟을 만큼
여기에 온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다른 별들은 아무런 생명이 없기 때문에 관리가 안 될 것이고
하나님의 관심도 적겠지요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계획과 사랑을 지구에 쏟아 부으셨고
그곳에 정성을 다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당신 자신의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외아들의 피까지 쏟으신 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것입니다
그 지구 안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우주적 목적이
정부나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우주적 목적입니다
따라서
청취자 여러분이 깊이 생각 할 것은
우리가 교회의 일원이 되었고 권속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정에 권속이 되어서
이제는 외인도 아니고 손님도 아닌
하나님아버지를 모신 한 가정의 형제자매입니다
또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로서
소중한 자긍심이 필요하고
우리의 사명도
(사회의 직장에서 맡은 일도 성실히 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교회에서 맡은 일들이 영원한 본업이라는 것입니다
이 본업(예수님 안에서 맡은 일)을 잘 하기 위하여
농사도 하고
상업도 하고
기업도 할 수 있고
이 교회가 평안하기 위해서 국가도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국가가 아니라
교회를 완성(예정된 자를 모두 불러 모으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주경영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것!
이것이 우주적 목적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지 알 수 있습니다
건축현장에서 흔히 거푸집을 볼 수 있습니다
본 건물을 세우기 위해 건물주위에 역어 둔 거푸집
이것들은 언제까지 필요한가 하면
안에 있는 본 건물이 완성 될 때 까지만 필요합니다
본 건물이 모두 완성하고 나면
밖에 있는 비개나 거푸집은 흔적도 없이 뜯어버리는 것이죠?
김성윤: 예, 그렇지요
노우호: 하나님께서도 우주적 목적인 교회 세우기를 마치고 나면
정부나 국회나 유엔은
본 건물(교회)을 짓기 위한 거푸집에 불과하기 때문에
본 건물(교회)가 완성되고 나면
세상은 아낌없이 헐어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정부나 조직들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영원한 것으로
교회를 위하여 땀 흘리고 충성한 것만
정말 영원한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만약 미신이나 우상숭배 하듯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가
세상적인 사업이 잘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외로 이런 생각을 가진 성도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긴 일이 영원한 본업이고
세상에서 여러 가지 경영하는 일들은 부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맡은 일을 잘 하기 위해서
직장이나 세상 사업도 열심히 하여야 하고
언제나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목적과 수단을(본업과 부업) 바르게 정립될 때
참 신앙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깨닫고 난 다음
그의 기도와 계획이 달라집니다
원래 그의 계획은 로마를 거쳐서 스페인까지 가는 것인데
바울은 깊은 기도와 계시를 통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고 난 다음에는
그의 계획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빌레몬서나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은 옛날에 개척했던 교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고
결국은 실제로 돌아옵니다
옥중서신 끝난 다음에 목회서신을 살펴 볼 텐데
바울의 남은 여정!
즉, 로마 옥에서 1차로 갇혔다가 풀려난 이후부터
2차 투옥될 때까지의 여정을 살펴 볼 것인데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비밀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기도와 목적과 계획도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김성윤: 그렇습니다
노우호: 모든 성도들이 에베소서를 통하여 교회론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서
기도가 달라지고 소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잘되고
내가 지옥에는 안 가고 천당 가고
내가 복 받고
나의 자식이 잘되고
나의 사업이 잘되는 것만 생각하여
나의 기도가
나의 소원 성취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내가 가진 소원을 이루고자 기도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회를 위하고
우리의 영원한 터전(유업)이 교회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교회가 잘 되는 것을 삶의 최고 목표로 삼을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다는 것에 대한 감격을
에베소 3장을 볼 수 있는데
교회론에 대한 이론적인 것을 정리하다가
[에베소서]
3: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바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직접 손으로 쓰지 않고
바울은 내용을 불러주고 비서가 받아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받아 적다가
바울은.... 하고
뒤에는 말이 계속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개를 들어 바울을 봤을 때
바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고 이방인을 위하여 쓰임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원하고 거룩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감격 때문에
나 바울은..... 하고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받아 적는 사람도 어떻게 할지 몰라
점을 몇 차례 찍어 놓고는 기다리고 있는 장면을 연상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뒤에 말을 이어가는데
[에베소서]
3: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를 깨달은 뒤
얼마나 감격했던지
스페인까지 가려고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옛날에 개척했던 교회 중에 대표적인 에베소교회
바울이 여러 교회를 개척했지만 3년씩이나 피땀을 쏟아 부은 곳은
에베소교회입니다
이 소중한 편지를 다른 곳에 보내지 않고 에베소에 보내는데
선교의 중심이
처음에는 예루살렘이 중심이 되었다가
안디옥교회가 중심이 되었다가
에베소교회로 옮겨가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에 이 편지를 전하면
아시아전체의 교회에 퍼져 나갈 것을 예상하고
에베소에 이 편지를 전달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에베소 1장 1절을 읽을 때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대신에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명칭을 넣어서 읽으면
실감이 더욱 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서신을 기록하여 두기고편으로 보내고
바울은 곧 뒤따라
이 편지가 읽혀지고 있는 교회를 방문하면서
그의 사역을 마무리 하는 것을 봅니다
즉, 교회가 상당기간 있어야 될 것을 알게 되어
교회를 조직화하고 바르게 세우는 것에 힘을 쏟게 됩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올 것이라는 것에 관심을 두고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교회를 조직해야 할 필요를 느끼면서
이를 위해 마지막 여행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에베소서 중에서 실천편이라고 하는
4장부터는 다음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소아시아의 교회들
140 교회론의 실천편
노우호: 지난 시간에 에베소의 1장에서 3장까지 이론편을 살펴봤고요
오늘은 4장부터 있는 실천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서신을 쓸 때
이론편과 실천편을 구분하여 기록합니다
어떤 것을 믿었다면
어떻게 생활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생활로 이어지도록
신앙이 생활화 되는 신앙생활을 강조합니다
만약 믿음은 있고 실천이 없다면
신앙은 있고 생활이 없다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키지 못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성경 지식은 상당한 것 같지만
실천이 모자라서
사회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4장부터의 내용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온 성도들이 마음을 다하여 배워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내용입니다
배웠는데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은
배우지 않은 것 보다 못하고
알고 있으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 입니다
여기 4장에 들어가면서
그러므로 하는 것은
1장, 2장, 3장에서 밝혔듯이
교회가 그처럼 존귀한 것이므로 뜻입니다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 할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세웠는데
그 부름에 합당한 행함을
4장 2절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절이 아주 중요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2절은 제쳐놓고 3절만 중요하게 외우고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을
중요하게 외우는데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2절에 있습니다
따라서 2절이 더욱 중요한 내용입니다
[에베소서]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지키기 위해서는
첫째가 겸손입니다
교회가 평안하지 못하고 은혜 받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겸손이라는 덕목은
기독교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다른 이론에서도
겸손이 덕목이 되지 못했습니다
겸손은 비굴한 자의 자기변명처럼
굽실거리는 것을 비굴한 자의 모습이라 보았는데
오직 기독교의 성경에서만 겸손을 강조합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덕목은 겸손이라고 하고
성경학자 '앤드류 머리'는
기독교의 덕목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 합니다
만약 교회에서 겸손하지 못하고
아직도 잘나고 똑똑하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 제일 먼저 말씀 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배울 것이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시지만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겸손하셔서 당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하신 임금이신데
우리에게도 제일 첫째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고 합니다
온유라는 것은
배운다는 것 보다는
성품인데
원어의 뜻은 중용과 관용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중용과 관용을 표현한 단어입니다
온유라는 단어는 번역하기가 아주 어려운 단어인데
중용과 곤용과 친절을 합하면
원어에서 의미하는 온유가 될 것 같습니다
교회란 누가 오더라도
온유하고 따뜻하여 어머니 품 같은 포근함을 느끼도록 가꾸어져 가야 됩니다
그런 환경이 되어야 새 생명이 거듭나게 됩니다
어미 닭이 알을 품는 장면을 연상해 보면
따뜻하게 품는 어미의 온기로 인하여
달걀이 중생하여 병아리가 나오는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달걀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지만
부화가 되지 않으면 새 생명이 탄생 할 수 없듯이
사람도 어머니 뱃속에서 한번 태어났지만
교회가 암탉이 날개아래 달걀을 품듯이 품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거든요
따라서
교회에서는 똑똑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온유하고 겸손한 것이 가장 귀한 덕목입니다
두 번째로
오래 참는 것입니다
오래 참지 못하고 조급하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알을 품은 닭이 너무 조급하여 알을 쪼아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성윤: 큰 일 나지요
노우호: 제가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암탉이 달걀을 품고 있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21일 정도를 먹는 것도 거의 먹지 않고
털도 빠지고 너무 초췌하게 되어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의 모습은 숭고하고 놀랍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런 내용이 있는데
운행하다는 것은 '맴돌다'라는 의미인데
마치 어미 새가 둥지를 떠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시면서
암탉이 그 날개아래 새끼를 품으려 한 것 같이
내가 너희를 품으려 했던 적이 몇 번이냐?
품으려고 하신 것입니다
품는 곳에 새 생명이 거듭나게 되고
품기 위해서는 오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미련한 자를 많이 책망하지만
그래도 조급한자보다 미련한자에게서 바랄 것이 있다고 할 정도로
참을성이 없는 조급한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도 성도들도 오래 참는 것
믿음도 오래 참는 것
소망도 오래 참아야 되는 것이고
사랑도 오래 참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교회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랑이 있는 곳에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고
부부도 가장 사랑하는 순간에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
교회에도 사랑이 충만할 때
새 생명이 중생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납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른 환경에서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자랐기 때문에
나와 생각이 모두 같을 수 없습니다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만 받아들인다면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성품이 다르고
배경이나 여러 가지가 다르므로
다양한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야지
만약 모든 사람이 같다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입니까?
김성윤: 예, 그렇군요
노우호: 매우 다른 사람이 있을 경우
아주 이질적이라고 배척 할 것이 아니라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조화를 이루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 입니다
다음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에 평안을 화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겠는데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를 분열시키고 이관시키려고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교회론을 알지 못하였고
에베소서 4장 2절을 중요하게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한국 교회는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고 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가 이제 100년이 지나고
이제 다른 100년을 맞이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에베소서 4장만 3절만 보지 말고
2절부터 중요하게 생각하고 읽어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될 줄 믿습니다
만약 우리의 몸에서
각 지체가 떨어져 나가 있다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몸의 모든 지체가 한 몸으로 붙어 있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가 되어 있을 때
업무를 잘 수행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몸이 하나이고
성령도 하나이요
부르심의 소망도 한 소망이고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한 분이기 때문에
교회를 서로 찢어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나누어진 교회는
행정적으로 교회(교단) 소속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진리 안에서 은혜 안에서 말씀 안에서 성령 안에서
다시 하나로 묶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방송을 통해서 진리를 함께 듣게 되면
공감대가 형성 되므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단만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교회에서 리드자(리드십) 혹은 머리만 되려는 생각보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의 맴버(맴버십)가 되는 정신을 가지고
구성원으로서 지체의 사명을 가지고 서로 섬기는 자세로
손이 발을 섬기고 발은 손을 섬기고
귀는 귀의 사명을 다하고
눈은 눈의 사명을 다 할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온전케 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5정을 보면
성도들이 빛의 자녀처럼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살 것을 바라고
가정에서는 아내는 아내 된 도리를 다하고
남편은 남편으로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에 관한 이야기도 하는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권하고
부모에게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교회를 지켜 나갈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에베소서를 자주 읽어서
교회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41 골로새서의 파노라마
노우호: 골로새서도 옥중서신이죠?
김성윤: 예
노우호: 지난 시간에 에베소서를 살펴보았는데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짝을 이룬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설명하고 있고
골로새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있으면 머리가 있어야 하고
머리가 있으면 몸이 있어야 하듯이
머리만 있고 몸이 없으면
이 땅에서 아무 일도 수행 할 수 없습니다
머리에 있는 뜻이 몸에 전달되어서
그 몸이 움직여 이 땅에서 뜻을 이루는 것인데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몸 된 교회를 설명하고 있는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함께 공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바울의 기획작(역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4장 16절에 있는 내용으로 짐작하기로
또 하나의 편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
4: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보통 학자들이 이 편지를 ‘라오디게아서’라고 하는데
라오디게아교회에서 온 편지를 골로새서에서 읽고
골로새서에 온 편지를 라오디게아교회에도 읽게 하라는 것인데
아쉽게도 라오디게아교회로 간 편지가 없어진 것입니다
여러 가지 학설과 견해가 있습니다만
어떤 학자는 에베소서를 에베소에서 읽은 후
라오디게아교회로 전달하여 읽고
다음에 골로새까지 가도록 지시했다면
에베소서가 곧 라오디게아에 전하라고 했던 편지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만약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낸 다른 편지가 있었다면
바울이 라오디게아교회에 어떤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지
궁금하고 아쉬움이 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라오디게아교회가 차지도 덥지도 않아서
책망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빌레몬의 아들 아킵보가 있었는데
(빌레몬은 빌레몬지방에서 가정교회를 하는 하나님의 종)
아킵보가 골로새교회에 교역자로 갔었는데
교회가 차지도 덥지도 않아서 목회가 재미가 없었던지
쉬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이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삼가 주안에서 받은 직분을 이루어가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4: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따라서
이런 저런 상황으로 봐서
라이오디아교회의 신앙이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해서
바울에게서 온 편지를 중시하지 않고
흐지부지 업어진 것이라 예상이 됩니다
1993년도에 라오디게아교회를 다녀왔는데
그 당시 가장 잘 살던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이나 계시록에 거명되는 지명 중에
라오디게아교회와 사대교회가 가장 부유하게 살던 곳인데
놀랍게도 지금은 교회만 없어진 것이 아니고
주민이 살던 마을까지 없어졌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지진이 나서 집들이 많이 파손되었던 때가 있었지만
로마 중앙정부의 복구비 지원을 사양 할 만큼 부유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살 산다는 것 자체는
모두에게 복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성지여행으로 아시아 7교회를 다녀 보았는데
가장 충격적인 것이
그렇게 잘 살던 도시가 지금은 동네까지 없어진 것이고
사대(리디아 왕국의 수도=사르디스)에 있었던 신전기둥들을 보면
정말 굉장합니다
그리고 리디아 왕국의 최고 영광이었던
크로이소스왕조가 수도로 삼고 있던 곳도 폐허로 변해 있습니다
폐허의 흔적은 남아 있지만
시골의 작은 마을처럼 완전히 망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선교본부였던 가버나움도 동네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가버나움은
므깃도, 하솔, 다마스크스 이런 곳에서 내려오다 보면
반드시 자나게 되는 교통의 요충지고
바닷가에서 아주 번창했던 마을이었으므로
가버나움 동네의 규모가 얼마정도 되는지 기대를 가지고 가보았는데
마을은 없고 국립공원관리사무소만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책망 받은 마을이
벳새다, 고라신, 가버나움인데
놀랍게도 그 3동네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마태복음]
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11:21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1: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11: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런 저주가 얼마나 힘이 있었던지
역사 가운데 마을은 종적을 감쳐버리고
옛날 찬란했던 시절의 무너진 돌무더기만 남아서
황량한 모습 이었습니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사대(사르디스), 라오디게아
이런 돈 많다고 배불렸던 마을들이
교회만 없어진 것이 아니고
마을전체가 완전히 없어져버린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살기에 좋아 보이는 위치인데도 마을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김성윤: 정말 안타까운 일이군요
노우호: 하나님 말씀의 한마디가 이렇게 무섭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천지창조를 말씀으로 하셨으므로 말씀 한마디가 얼마나 권위가 있겠습니까?
김성윤: 예
노우호: 하여튼 라오디게아에 보냈던 편지가 없는 것은 정말 아쉬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책은 골로새서인데 골로새서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닙니다
바울에게서 배운 에바브라가 개척했는데
에바브라는 두란노서원에서 배웠던 신실한 젊은 종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에바브라가 먼 길을 위문 온 것 같습니다
이 때 바울이 골로새교회에 보낼 편지를 썼는데
내용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기록한 책입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선재하신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계셨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마굿간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때부터 예수님이 계셨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창세전(어떤 피조물이 있기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성자 하나님으로 처음부터(선재)계셨던 분이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가 없었고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모습이신 예수님은
인간이 볼 수 있는 하나님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모든 권세와 정사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
하나님이 비밀인 그리스도
지혜와 지식이 충만하신 그리스도
마음의 할례를 베푸시는 그리스도
창조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구속자가 되시는 그리스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
언젠가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그리스도
그러면서도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거하시는 그리스도
마침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이처럼 골로새서의 기록목적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려고 합니다
일반사람들은 대개 예수님을 4대 성인(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중에 한사람이라고 배우는데
예수님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생동안 한 일은 목수일이고
공생애 기간은 3년 밖에 없고 3년 동안 굉장한 많은 제자를 가르친 것도 아니고
불과 12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3년 정도 천국을 말씀하시고 병 고치시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로 생각하지 않고
닺지 사람으로서의 예수의 삶을 가지고는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과 비교 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는 그런 사람들과 비교되실 분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골로새서와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다른 책으로는 예수님의 신성을 밝히는데 부족합니다
골로새서와 요한복음 요한계시록에서 밝혀주시므로
예수님께서는 전능자시고 하나님이시고 선재하신 분이신 것을 알게 된 것이죠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지식이 너무 고상하기 때문에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지식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은 점잖은 표현이고
원어에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철학 같은 지식을 똥으로 여긴다고 말할 정도로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마스크스로 가는 길에서
강열한 빛을 만나서 꺼꾸러지는 장면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데
그때 바울이 ‘주여! 누구이십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뉘십니까?’ 하고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날 모든 대답을 받은 것이 아니고
바울의 일생을 통하여 신학과 계시와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알게 된 것을 잘 정리한 책이 골로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를 함께 연결하여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잘 하시기를 바라고
이것으로 조금 미흡하다면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참고한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좀더 깊이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김성윤: 성경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42 빌레몬서 이야기
노우호: 오늘은 옥중서신 중에 아주 짧은 서신인 빌레몬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레몬서는
빌레몬이라는 개인에게 보낸 매우 개인적인 편지 인데
이렇게 짧은 편지가 어떻게 성경이 될 수 있었을까? 하겠지만
책의 분량만가지고 그 책의 가치를 평가해선 안 되고
빌레몬서는 내용이 짧지만
그 속에 진리와 교훈이 담겨 있고
특별히 기독교 교리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빌레몬도 바울에게 배우고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종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짐작키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두란노서원에서 바울에게 배웠던 사람으로
골로새 지방의 어느 지역에서 가정 교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 오네시모라는 종(노예)이 있었는데
어느 날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로마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골로새는 터키에 브루기아 지역의 중요한 도시인데
거기서 로마까지 갔다는 것은
오늘날 여기서 북경까지 갔다는 거리로
아주 멀리 국제적으로 도망을 했던 것입니다
로마의 큰 도시에서 숨어 살겠다고 도망을 갔지만
공교롭게도
그 넓은 로마에서 하필이면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바울을 만나게 되어 예수를 믿게 되면서
놀라운 이야기가 시작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는 모든 죄를 용서 받지만
사람에게 지은 죄는
그 사람에게 용서 받는 것이 아니므로
바울은 이것을 감안하여
하나님께 범한 죄는 용서 받지만
주인에게 범한 죄를 주인께 용서 받기 위해
빌레몬에게 이런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의 속건제의 정신과 비슷한 것으로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해결하고
하나님께 회개해야 하는데
사람에게 죄를 갚지 않고 말로만 잘못 했다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주인에게 돌아가서
주인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가 도망가다가 붙잡히면
십자가에 못 박아서 길에 달아 놓는 무서운 형벌을 받습니다
길에 매달아놓아 모든 노예가 볼 수 있도록 하여
노예가 도망가면 틀림없이 붙잡히고
붙잡히면 이와 같이 된다는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함이죠
이렇게 못을 박아 놓아도
건강한 노예들은 1주일 동안 죽지 않습니다
빨리 죽지 않고
밤의 추위와 낮의 더위와 탈수현상으로 기진하고 허기진 상태의
그 고통은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김성윤: 예, 정말 고통스럽겠군요
노우호: 예수님은 못 박혀서 6시간 고통을 당한 후 돌아가셨는데
예수님을 그 전날 많이 맞고 피를 많이 흘리고 약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빨리 돌아 가셨지만
일반 건강한 노예들은 1주일 정도의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도망간 발에 못을 박고
일하기 싫은 손에 못을 박아서 노예를 죽이는 사형제도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노예를 사형하기 위한 가장 잔인한 사형제도입니다
사형제도 중에 가장 단순한 것은
참수형이나 교수형으로 순간에 운명하게 하는 것인데
총살형도 있지만
모두가 잔인하고 고통이 따르지요
그러나 십자가사형고통보다 더한 고통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통을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신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주인에게 돌아가면
주인에게 용서 받을 수 있도록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레몬이 옛날에 바울에게 사랑의 은혜를 입었으므로
스승인 바울이 부탁하면
차마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면에서는
이 일이 마땅한 일이기 때문에
오네시모를 위하여 명령이라도 할 수 있지만
제자 빌레몬에게 자기를 낮추어
간구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두기고가 편지와 함께 오네시모를 데리고 갑니다
바울이 생각 할 때
편지만 보내서도 안 되겠고
오네시모에게 편지를 주어서 자신이 편지를 전하게 하는 것도
도중에 마음이 변할 수 있으므로
평소에 신실하게 여기는 두기고를 함께 보내는 세심한 면을 볼 수 있는데
오네시모의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죠
한 생명을 이렇게 사랑하고 세밀하게 배려하는 바울을 통해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8절에 보면
[빌레몬서]
1: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1:9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나이 많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되어...
이 구절을 읽으면서 빌레몬은 눈시울이 뜨거워졌을 것입니다
갇힌 중에서 복음으로 낳은 아들인 오네시모를 간구한다는 구절을 읽을 때
빌레몬과 그의 아내 압비아도 눈시울을 적셨을 것이고
편지를 전달했던 두기고도 마음이 울컥했을 것이고
두려운 마음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는
오네시모의 모습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빌레몬서]
11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12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바울은 이런 진지하고 감격적인 내용을 쓰다가도
마음의 여유를 가진 유머를 구사하는 것을 봅니다
오네시모의 뜻이 '유익하다'라는 뜻인데
그 이름을 가지고
전에는 무익한자 이지만 지금은 유익한자가 되었다고
유머가 담긴 내용은 빌레몬을 더욱 감동하게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진리 되는 증거는
무익한 자를 변하시켜서 유익한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알코올 중독자, 마약중독자, 해적, 깡패
이런 사람들이 변화되어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바울이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그가 자네 대신으로 나에게 봉사한다고 생각하고
오네시모를 내 곁에 두어도 좋지만
그렇게 되면 억지가 되는 것이고
자네의 선행이 자원한 것이면 좋겠다고 하면서
돌려보낸다고 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일로 인하여 오네시모가 자네 곁을 잠시 떠나게 된 것이
영원히 자네 곁에 있기 위한 과정이라면
더 잘된 것이 아닌가!
나쁜 마음으로 자네 곁에 있는 것 보다
이제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되어 자네 곁에 돌아 왔다면
더 감사한 일이 아니겠는가!
자네가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이제 오네시모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남이 아니고 주 안에서 형제처럼 생각하고
이 사람을 받아주는 것을 나를 받아주듯이 했으면 좋겠다고 하고
만일 이 사람이 훔친 것이나 재산에 손해를 끼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가서 직접 갚겠다고 하면서
이것은 자네가 나에게 사랑의 빚진 것과 상세하자는 것이 아니고
바울은 정말 갚을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을 편지에 담아서 보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영혼만 사랑할 뿐 아니라
육체로서의 기회도 소중하게 여기고
오네시모를 위하여 자신의 제자에게 간절한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를 읽은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했고
나중에 전설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교회의 큰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아브람 링컨이
빌레몬서를 읽다가 영감을 받아서 노예의 해방을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 링컨의 유명한 말은
'자유와 노예는 함께 있을 수 없다!'
미국은 자유를 표방하는 나라인데
어떻게 자유와 노예가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노예해방을 하게 되었는데
링컨은 빌레몬서 안에 있는 오네시모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노예라면 몰라도
예수 안에서는 사람의 노예가 있을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을 종으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전 세계역사의 흐름을 바꾸게 되었고
이 편지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노예제도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봅니다
이렇게 볼 때
빌레몬의 집에 있던 오네시모가 도망가게 된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만
이로 말미암아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고
또 바울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런 정성스런 편지로 말미암아 오네시모가 용서되고
세상에서 모든 노예들이 자유하게 되고
노예제도가 사라지게 됐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이런 의미에서
빌레몬서의 가치는 너무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김성윤: 지금까지 노우호목사님이었습니다
143 빌립보서 파노라마
노우호: 오늘은 옥중서신 중 마지막 책인 빌립보서를 공부하겠습니다
옥중서신을 성경의 순서에 따르지 않고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순서로 살펴보았고
오늘은 빌립보서를 보게 되는데
순서를 다르게 했던 이유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두기고가 전달하는 편지로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와 함께 같은 방향으로 가는 편지이고
빌립보(마케도니아 지역)는 다른 방향이므로
다른 사람에 의해 전달된 편지이기 때문에
성경의 편집순서와 다르게 살펴보았습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포스대왕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로
알렉산더 대왕이 재임할 때까지는
마케도니아의 수도였습니다
그 당시 마케도니아는 번창하였고 살기 좋은 도시였지만
지금의 빌립보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고
옛날 저자(아고)거리는
건물을 바치고 있던 돌들이 지진에 의해 무너졌는데
돌의 크기가 굉장한 것을 보면
도시가 번창했을 때는 웅장했을 것으로 추측 되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갔던 시기는
두 번째 전도여행 기간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두아디라의 자주장사 루디아라는 자매를 만나면서
교회가 시작 되었습니다
지금도 교회가 있는데
빌립보교회를 빌립보교회라고 하지 않고
'루디아기념교회'라고 합니다
지금도 루디아의 집이 보존되어 있고
큰 길 옆에는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루디아의 머리위에
바울이 물을 붓는(세례를 베푸는) 조각상이 있고
길 건너편에 루디아기념교회가 지금도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연금 되었다는 소식을
빌립보 교인들이 듣고는
바울을 위문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 빌립보교회는 갈등이 조금 있었습니다
당을 짓는 모습은 교회에 없어야 되지만
이런 일이 가끔 있는 것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갈등이 있게 되면
서로 긴장하고
미워하게 되고, 질투하게 되고, 시기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기도가 막히고 성령의 역사가 중단되어 버려서
교회는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 때 빌립보교회의 목회자는
'에바브라 디도'라는 분인데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디도가 있고 에바브라가 있고 에바브라 디도가 있으므로
성도들이 혼란스러울 수가 있는데
여기의 3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에바브라디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고
디도는 누가의 친동생으로 다른 사람이고
에바브라는 또 다른 사람입니다
김성윤: 동일인물이 아니군요
노우호: 예, 그 당시
디도(티투스)와 에바브라는 흔하게 자주 쓰이는 이름이었습니다
에바브라디도가 빌립보교회에 목회를 하면서
아무리 교회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평케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빌립보교회에 여호디아파와 순두개파가 있었는데
2파가 모두 바울은 존경함으로
로마에 있는 바울을 위문하는 과정에서
2파의 갈등이 하나가 될 것을 기대하면서 위문금을 모읍니다만
그러나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고
모금도 허영과 다툼으로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저쪽 파에서는 얼마를 했으므로
우리 쪽에서는 얼마를 하자!
이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마음 아파합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찢어 나누어지게 되었는가!
사소한 개인감정 때문에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찢어 나누는 것은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혹시 이 방송을 듣는 사람 중에
교회에서 이런 문제가 있다면
빌립보서를 읽어보시고 교훈을 잘 새겨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고 기쁨이 회복 될 때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뿐 아니라
성령의 역사도 계속 될 것입니다
교회가 분열되어 파당이 형성된다면
성령님은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어느 편을 지지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교회는 전도, 부흥, 발전이 안 되고
사랑과 은혜가 없습니다
교회 일을 기쁨과 사랑으로 한다면
힘든 일도 즐겁게 할 수 있지만
교회가 갈등구조에 놓이게 되면
작은 일도 만사 귀찮고 힘이 듭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은
몇 가지 사연이 있습니다
첫째는
에바브라디도 목사가 바울을 위문하려 로마까지 오면서
먼 뱃길로 인하여 몸에 몸살이 났던지 큰 병이 난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을 위문 갔던 에바브라디도가 병들어 누워있고
오히려 선생님 되는 바울이 간호를 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바울이 이로 인하여 걱정하면서
‘괜히 날 위문한다고 오다가 병을 얻어
‘주의 일꾼인 젊은 목회자가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바울이 너무 걱정을 함으로
누워있는 에바브라디도는
위문은 고사하고 오히려 위문 받고 있으니
민망하기도 하고 걱정이 가중되고
오랫동안 병이 낫지 않으므로
빌립보교회 교인들도 멀리서 소식만 듣고
먼 거리를 병문안 가지도 못하고 걱정하게 되고
또, 빌립보교회가 걱정한다는 것을 아는 환자는 더욱 걱정하고
이 일로 인하여 바울이 얼마나 걱정이 되었던지
전에는 아픈 사람에게 손수건만 얹어도 병이 낫곤 했는데
에바브라디도의 병은 여간 낫지 않습니다
이로 인하여 바울이 큰 근심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병이 호전되어 환자의 얼굴에 기운이 솟고
몸이 회복되는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기뻤던지
사실은 너나할 것 없이 병이 걸리지 않는 것이 더욱 감사할 일이잖아요?
그러나 건강하면 감사를 잘 안 합니다
그런데 병들어 죽을 고생을 한 뒤 병이 낫게 되면 크게 감사합니다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바울도 에바브라디도가 병이 낫게 되니까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지고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사에 아무런 기쁜 일이 없다가
속된 말로하면 이것으로 인하여
기쁨의 시동을 걸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쁨을 상실하고 긴장관계 속에 있던 빌립보교회나
바울 자신에게나
에바브로디도 환자에게나
다시 한번 기뻐함으로서
은혜를 회복해 보고자 하는 것이죠
사실 교회는 기쁨이 충만해야 봉사도 되고 전도가 됩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인데
사람이 화가 나서는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없지 않습니까?
김성윤: 예.
노우호: 교회마다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권면을 하는데 크게 2가지를 합니다 하나는 2장에 나옵니다
[빌립보서]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놀라운 권면이 문장이 끊어지지 않고
단숨에 바울의 입에서 나옵니다
마음에서 솟구쳐 오르듯이 이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권면은
4장에 가면 나오는데
나머지는 병들었다가 나은 이야기고
바울이 실제로 권면하고자 하는 것은 4장의 내용입니다
[빌립보서]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따로 서있지 말고
예수 안에서 둘 다 함께 세우는 것입니다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들은 양쪽 계파의 지도자인데
이 2사람은 모두 여자입니다
여성들이 주축이 된 교회는 좋을 때는 한없이 좋지만
잘못 갈등이 생기면
5-6월에도 서리가 내리고 새파랗게 굳어져서
도무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다시 권면하기를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김성윤: 성경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144 목회서신 디모데전서
김성윤: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출옥 후에 쓴 디모데후서를 살필 차례지요?
노우호: 예
오늘부터 바울이 남간 마지막 3편의 편지를 볼 것인데
3편의 편지는 디모데전서, 디도서, 디모데후서로
목회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 기록되었다고 하여
목회서신이라고 합니다
디모데와 디도는 사도 바울의 오른팔 왼팔과 같은 동역자로
일생동안 바울 곁에서 협력하던 사람들인데
이들이
잠시 떨어져 각 교회를 맡아 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바울이 로마에서 2년 정도 가택연금 상태로 있었죠?
김성윤: 예
노우호: 그 기간에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 4개의 서신을 썼는데
그 이후 바울은 곧 석방이 되었습니다
석방되었을 때 바울의 계획은 스페인으로 가야 되지만
그 전에 생각지 못했던 옛 개척교회로 돌아옵니다
왜 돌아오느냐 하면
가이사랴에서 2년 로마에서 2년 동안 감금되어 있으면서
기도하고 계시를 받고 성경을 살피는 중에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를 좀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은 개척한 교회에 가르치지 못한 내용이었고
그 내용이 너무 소중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석방되자마자 스페인으로 가지 않고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을 방문하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깊은 이해는
골로새서에 기록되었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바울이 깊은 이해는
에베소서에 기록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하는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교회와 교회조직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바울이 교회와 교회조직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깊이 인식하면서
교회에 대한 재정비가 매우 절실하고 필요하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으로 가지 않고 개척한 교회로 돌아오는데
이 여행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소개가 잘 되지 않고
신학교에서도 이 여행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채 덮어두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감옥의 가택연금에서 석방되어
어떤 여정을 거쳐서 순교에 까지 가게 되었는가?
이것은 디모데전서, 디도서, 디모데후서를 통해서 밝혀지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출옥 후 그레데로 간 것 같습니다
그레데는 지중해 가운데 있는 크레타라는 섬이 있습니다
크레타섬은 고대문명이 있는 곳으로
해상교통이 빈번한 곳이므로 사람들이 거칠고
심하면 거짓말도 잘하는 그런 문화를 가지 있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의 심성이 거칠고 강퍅한 것과는 달리
디모데는 너무 착하고 유순하기 때문에
디도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보내서 교회를 잘 돌볼 수 있도록
디도를 크레타에 남겨 두었습니다
그런 후 바울 일행은 에베소로 향하였을 것이고
에베소를 거쳐서 골로새서를 보낸 골로새로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편지를 보낸 뒤
반드시 뒤 따라 가보는 원칙이 있습니다
김성윤: 그런데 왜 안디옥으로 가지 않고 에베소로 갔을까요?
노우호: 에베소 지역에는 바울이 두란노서원에 2년간 가르쳤던 제자들이 많으므로
만나야 될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2년은 일꾼들을 세우기에는 미흡한 기간이지만
바울이 가장 오래토록 두란노서원에 날마다 강론 했으므로
안디옥교회 보다는 에베소교회가 중심이 되어
에베소교회 쪽을 선택 하였고
이쪽은 골로새, 히에라폴리스, 라오디게아 쪽인데
이곳을 ‘부루기아 지방 이라고 하지요
이곳들을 방문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레몬서를 보면
빌레몬이 골로새지방에 있는데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로마에서 풀려나오자마자
그레데, 에베소, 골로새, 히에라폴리스, 라오디게아 쪽으로 선회한 다음에
드로아로 올라갑니다
드로아는 터키의 서쪽 끝에 있으면서
유럽방향(마케도니아)으로 건너가려면 경유하는 항구인데요
그 때는 날씨가 더운 초여름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시기는 AD64정도 되는 더운 날씨의 초여름인데
날씨가 더우니까
외투나 무거운 짐 같은 것을 ‘가보’라는 형제 집에 맡겨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케도니아로 건너갑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면
사모트라게와 네압볼리, 빌립보로 건너가는데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보니까
그동안 교회들이 상당히 많이 변질되어
처음의 순수성을 잊어 버린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조직을 하게 되면
반드시 조직병이 생깁니다
좋은 예로
빌립보교회의
여오디아파와 순두게파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끝없는 신화와 족보이야기로
복잡한 사상들에게 오염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바울은 이곳들을 방문한 것이 천번만번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들의 문제와
전에 고린도교회의 문제도 복잡했잖아요?
(디도가 가서 수습을 하였지만)
김성윤: 예
노우호: 디도가 수습했다고 하지만
교회의 문제가 완전히 수습되어 온전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 당시는 신약성경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사역자는 막연히 구약성경의 어떤 부분만 가지고 있었고
교리가 확정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교회를 돌본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돌아봄으로
교회가 상당히 어려움을 격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마케도니아에서 예상외로 많이 지체될 것을 생각하면서
에베소교회에 디모데를 남겨두게 됩니다
그레데는 디도를 두었고
에베소는 디모데를 맡겨두었는데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마케도니아의 어느 지방에서
디모데에게 쓴 편지 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속히 돌아가려고 하지만
만일 내가 늦어지기라도 한다면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교회를 조직화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언제나 질서가 필요하고
감독이 있어야 되므로
장로나 집사를 세우고 여러 직분들을 임명하고
교회 안에서 지켜야할 기독교적 윤리를 정리하여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사도가 젊은 목회자에게
교회의 조직과 관리의 원칙을 알려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장로(감독)들을 세우는 규정과
어떤 사람을 집사로 세울 것인가!
대부분은 업적보다 인품(성품)을 더 중요시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편지를 목회서신이라고 하지만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성격이 상당히 비슷하고
디모데후서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디도는 그레데에 있으면서 교회 사명을 띠고 있고
디모데는 에베소에 있으면서 교회를 조직화 하고 관리해야 되는
중요한 사명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자신은 마케도니아에 가서
교회를 조직화 하기위해
장로를 세우고 집사를 세우는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앞에 쓴 편지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 하는 것
이런 것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는데
뒤에 쓴 편지(옥중서신과 목회서신)를 보면
종말에 관한 이야기는 빠져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예수님께서 오실 시기가 가깝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상당한 기간까지
이 땅에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둘러보면서 세상은 넓다는 것도 보게 된 것이죠
김성윤: 예
노우호: 그리고 할일이 너무 많고
교회가 조직적으로 체계화 되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거룩하고 튼튼한 교회의 기둥들을 세우고 조직화해야 한다는
바울의 의지를 엿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바울이 만약
디모데와 디도에게
내가 속히 갈 것이므로
조금만 기다려라
이렇게 되었다면 이런 서신이 없었을 것인데
바울이 빨리 가려고 하지만
만일(만분의 일) 늦어질 때
대신하여 에베소에서 장로를 세우고 집사를 세우는 일을 잘 수행하도록
만분의 일 까지도 대비하는 마음 때문에
디모데전서 같은 귀한 성경이 나왔고
디모데전서를 기준하여
장로나 집사를 세워
교회를 조직화 합니다
교회의 직책을 보면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고 집사가 있고 교사가 있고
권하고 위로하는 권사가 있는 것은 지극히 성서적입니다
그러나
케톨릭의 교황이나 주교나 신부, 추기경은
성경에는 전혀 없는 직분이므로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의 직제나 교회의 체계화 조직은 반드시 성경적으로 해야 하고
그 기준은 디모데전서나 디도서 잘 살펴보고
교회를 성경대로 세워가고 관리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김성윤: 성경파노라마 지금까지 노우호 목사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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