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서문
장로교회의 신학이란 유럽의 칼빈 개혁주의 정통보수신학과 생활화의 신앙을 주장하는 영국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도 이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영미 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에서 전래되고 성장해온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 맥락은 청교도주의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청교도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본서는 벨파스트 대학 교회사 교수였던 제임스 헤론 박사가 아일랜드 장로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집필한 핸드북이며, 특히 칼빈 탄생의 4백 주년 기념작품이다. 청교도 운동은 칼빈주의의 열매일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의 영구적인 확산과 그 영향의 결과이다. 칼빈을 외경하는 한국 장로교회는 신앙과 신학을 생활화한 청교도들의 역사를 통해서 그 근본적인 원리들을 분명히 깨닫고,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조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서론: 청교도주의 역사 연구의 가치성
1. 복음적 종교와 성직주의의 문제
청교도들과 그 대적자들 사이에 야기된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복음적 종교와 성직주의 사이의 문제이며, 신약적 기독교와 이교적인 종교의식들을 가진 중세주의 간의 문제인 것이다. 후자는 성직의 교황 개념이나 교황 조직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청교도들을 억압한 것은 중세주의를 육성하고 장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너 감독은 “그들, 복음주의자들은 지금 우리의 스우프를 마시고 있으나, 곧 우리의 고기를 먹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영국국교회의 역사는 이 말에 대한 끊임없는 증명의 역사이기도 했다. 청교도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문제점- 그것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것이다.
2. 도덕적 사회적 개혁을 위한 투쟁
청교도주의는 종교적 개혁은 물론 도덕적, 사회적 개혁을 지향했다. 그들은 인간의 권리를 위해 몹시 노력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의무와 책임을 상기시켰다. 전제정치에 대한 완강한 대적, 그것은 악과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단호한 대적이기도 했다. 청교도주의는 인간에게 하나님과 그의 법에 대한 개인적 만남을 가져다 주었으며, “지존하신 주권자”로서의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엄격한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법을 가정에서부터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확산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들은 장로제의 정치형태야말로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선포된 복음의 약속, 충실한 경건의 연습, 능력 있게 목회를 하는 목회자 그리고 성경을 실행하기를 매우 열망하는 지적이며,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을 배출하는 정치형태라고 깨달았다.
“제네바에서 주어진 새로운 도덕적 방침에 의해 신교운동은 교리논쟁에 빠지지 않고 구출되었다.”(마크 페티슨). 칼빈의 종교적 직관력은 사회적 훈련을 요구하는 인간 본성의 눈물겨운 필요를 식별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개인적이고도 동등한 자유를 엄격하게 스스로 부과한 법에 조화시키려 한 시도였으며, 도덕적 완전함을 추구하는 노력 위에서 인간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였다. 중세의 기독교는 개인의 깨달을 수 있는 권리를 교회에 양도한다든가 그의 양심을 사제에게 혹은 그의 의지를 왕자에게 양도해야만 한다는 등의 천하고 비도덕적인 개인의 굴복을 설교했다. 칼빈의 정책은, 개인 영혼을 적극적으로 교육하려는 당시의 혁명운동이 지향하는 바를 열심히 후원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생겨난 세력은 크게 신장되어 모든 나라들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에게 굴복하지 않고 싸웠던 사실도 제네바가 스페인에 대항했던 것에 비교해 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직 ‘칼빈주의가 유럽을 살린 것이다.’
3. 합법적인 정부를 옹호하는 청교도주의
‘시민의 자유와 종교적 자유’의 막대한 이익은 튜더 왕조와 스튜어트 왕조의 독재주의에 의해 핍박을 받아 온 청교도들에 의해 얻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혁명이 안정을 찾게 되자 그것은 영국 헌법에 입안되었고, 그 결과 청교도 투쟁에 깊고 영원한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에 의해 너무나 명백하게,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서 인정되어지고 있다.
흄은 그의 <영국사>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에 왕의 권위는 너무나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자유를 갈구하는 고귀한 불꽃은 오직 청교도들에 의해 점화되고 수호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은 헌법의 모든 자유를 이 비국교파인 청교도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영국 성공회의 성직자들은 무저항의 교리를 가르쳤고, 왕권과 모든 왕의 권력을 무질서하게 남용하는 일을 옹호했다. 심지어 법률을 무시하고 정의의 가면조차 쓰지 않은 채 매일 수백명의 결백한 희생자들을 고문과 죽음으로 몰고갔다. 물리적인 힘으로 전제군주를 대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청교도들은 합법적 정부를 만들기 위해 투쟁을 하고 글을 썼다. 그들은 교회정치에 사용되는 대의제도의 원리들을 정부에도 재현시키려고 노력했다. “장로교 사상은 영국 자유 헌법의 어머니이다”(그래탄).
“의무와 믿음의 기치 아래 우리 영국의 자유는 얻어졌다. 아무리 청교도주의의 많은 형태들이 쇠락되어질지라도 동일한 기치 아래 우리 자녀들에 대한 유산으로서 보존될 것이라는 것이 확실하다”.(가디너)
그린은 그의 <짧은 역사>에서 “청교도주의가 시민과 종교의 탄압 속에서 스코틀랜드를 구출했으며, 그 과정에서 영국의 자유를 동시에 구출해 낸 것이다.” “1688년의 혁명에서 청교도주의는 1642년의 혁명에서 실패했던 시민의 자유를 얻어낸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착실하게 청교도주의는 영국 사회와 영국 문학, 영국 정치에 그 순결성과 엄격함을 소개해 나갔다. 문예부흥 이래로 진보해온 영국의 전체 역사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측면에서 청교도주의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 영향은 영국 이외의 많은 곳에도 끼쳤다. 미국 역사학자 벤 크로프트는 “칼빈의 영향을 경시하거나 그 기억을 중시하지 않는 사람은 미국 자유의 기원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고 말했고, 화란의 법학자 프린스터러는 “칼빈주의에는 우리의 입헌적 자유의 근원과 보증이 담겨져 있다.”고 말했다.
4.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패퇴시킨 청교도주의
프라우다는 “영국의 해군력이야말로 종교개혁이 낳은 진정한 소생이었다.”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그것은 특히 청교도주의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그 운동의 박력, 정열, 격정”이 무적함대의 격멸로 열매 맺어졌고, 영국의 해군력을 튼튼히 다져 놓게 되었던 것이다. “그 운동의 박력, 정열, 격정”은 로쉘이나 화란의 칼빈주의자들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 대륙에서 쫓겨나자 바다를 그들의 천연적 안식처로 생각하여 진출했던 사람들, 그 결과 종교개혁을 바다라는 요람 속에서 생성시킨 사람들 속에서 나왔다.
5, 청교도주의가 가정에 끼친 영향
그린,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가정이라는 개념은 청교도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부인과 아이들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되었고, 남편이나 아버지는 자신들의 영혼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별하며, 그의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응하여 나아온 성도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6. 능력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 청교도주의
청교도주의는 위대하고 용감하며 강하고 고상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었다. “포도열매란 가시덤불 속에서는 자라지 않는 것이다”(그린). 청교도적 믿음만큼 강하고 확고하며 경건하고 순수하며 또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성격이란 없다. 성격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 그것은 인간에게 고귀한 목적을 갖게 하며 영웅적인 고난을 당하게 하며 훌륭한 인내를 발휘하게 하고 잘못된 일을 볼 때 영웅적인 저항을 하게 하여 결국 위대한 성취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영국에서의 청교도시대는 가장 번창되고 멋진 시대였다. 영국 역사의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위대한 이름 중 많은 이름이 청교도들의 이름이다. 성직자들, 정부 관료들. 청교도들은 실로 따뜻한 박애주의자들이었고, 신앙의 옹호자들이었다. 스펜서와 밀턴 같은 불멸의 시인들은 그들의 노래를 불렀고, 셰익스피어는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믿을 만한 증거가 있다.
7. 사회적 자립, 교육, 문화
역사 속에서 그처럼 뛰어난 일을 하고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청교도들은 완고하고 가혹한 적들과 오랫동안 격렬한 투쟁을 해왔다. 그들과 관련하여 일반 역사 속에 묘사된 그들의 모습은, 깊은 편견 아래 정치적, 종교적인 증오를 품고 그들을 공격하는 적들에 의해 주로 묘사된 것이다.
“여왕 시대에 신교 귀족의 대다수를 청교도가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을 듣게 되면 독자들은 아마 놀랄 것이다. 그들이 하원을 장악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또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사실이다.”(할람) 오랜 기간 동안의 영국의 훌륭한 혈통, 재산, 교육, 문화에 대해 말할 때, 그 커다란 부분을 청교도들이 차지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 시대의 가장 세련되고 개화된 신사들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보다 개화된 청교도주의는 그 안에 문예부흥 정신을 내포하였다.”(도우덴) “청교도들 가운데에는 도덕의 청순함과 가사의 행복, 신앙의 고수, 문화와 품위의 훌륭한 혜택을 지닌 남자들과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청교도 신사는 학자였고, 음악 애호가였으며, 문학 애호가였다.” 엘리자베스 시대 문화의 보다 밝고 우아한 측면이 청교도 신사의 기질과 조화를 잘 이루었다. “정부의 도움을 받아서, 즐거움을 증진시키고 인식시킬 수 있는 어떤 조직을 만들자는 제의는 정부의 관리나 왕당파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청교도인 밀턴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8. 여전히 살아 있는 힘
본질상 청교도주의는 사람들 중에서 살아 움직이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영어가 사용되는 어느 곳에서나 영국 사람, 스코틀랜드 사람 그리고 아일랜드 사람들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면 어디에나 청교도주의는 수많은 교회와 기관 그리고 가정과 사회생활에 분명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것은 다른 것과는 달리 하나의 특성을 형성하며 위대한 미국 공화국의 제도를 축조케 하고 독립을 위한 투쟁의식을 고취시켜, 그 결과 오늘날에는 그 나라의 태반이 근본적으로 같은 믿음의 본질을 갖게된 이러한 형태의 종교인 것이다.
왕성한 활력, 힘, 기업, 식민지를 포함한 많은 숫자의 인구들은 선교사들로서 모든 나라를 향해 퍼져 나가는 동안에 생긴 한 가지의 굳건한 줄기였다.
청교도주의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위대한 운동이 우리가 연구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청교도 정신은 우리의 국가적 생명과 역사 속에 깊게 스며들어 있으며, 종교에 깊이와 강렬함을 주었을 뿐 아니라 헌법에 자유와 넓이를, 애국심에 강함과 열정을 주었고, 높고 훌륭한 문학에 심원한 색채를 입혔고,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만약 엘리자베스의 ‘드넓은’ 시대와 크롬웰의 ‘철’의 시대에 ‘영웅적’이란 말이 적용되어졌다면 우리는 그 영예를 청교도들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복합적인 문명의 근원을 인식하고,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특성을 다듬었던 가장 능력있는 도덕적 영향을 인식하는 것은 청교도주의 역사에 대한 신중한 고찰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PP 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