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 평론
텅 빈 가슴/조용수
<시 평론 시인홍영수>
♣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은 2018년 10월부터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텅 빈 가슴/조용수
새벽 세 시 현관문
번호키 소리에 눈떴다
옆자리가 허전하다
누가 온 것도 아닐 텐데
고요한 이 밤
바람 마중 갔다 온 것인지
냉기가 돈다
들어오자마자
아들의 빈방 열어보고 한숨짓는다
애써 잠을 청하며 누웠는데
감기지 않는 눈가 촉촉하고
엄마 부르는 소리 기다리는
두 귀 쫑긋 세운다
적막이 흐르는 새벽
창가에 비친 달과 별빛도
가쁜 한숨 소리에 무겁다
소나기라도
세차게 내렸으면
조용수 시집 <관성의 법칙>, 시산맥사, 2020. 중에서~
케테 콜비츠 <피에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의 시체를 무릎에 안고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피에타(Pietà)> 像을 볼 때마다 유난히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이다. 여섯 살 어린 자식의 죽음을 맞이한 그녀,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이성과 감성은 이미 증발해버리고 오직 고통과 슬픔의 고체 덩어리로 굳어 있다.
어린 자식을 품속에 안고 한 손은 여린 손가락을 만지고, 한 손은 턱에 고이고 있는 엄마의 모습. 고고의 성을 터뜨린 분만의 고통을 넘어 또 다른 탯줄을 자른 것 같은 아픔이 혈관을 타고 흐르다 갑자기 멈춰버린 표정이다. 작품의 분위기마저 경직된 우울증으로 박제된 듯하다. 로맹 롤랑은 이 작품을 보고 “현대 독일의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이라고 했다던가.
이른 새벽, 4更에서 5更으로 접어든 시간‘번호키 소리에 눈떴다.’ 이른 출근일까 아님, 야근 뒤의 퇴근일까. ‘누가 온 것도 아닐 텐데’하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는 걸 보면 밤새워 근무하고 퇴근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옆자리가 허전하다.’고 한다. 화자의 옆지기가 밖에 나갔다 온 것이다. ‘들어오자마자’,‘아들의 빈방 열어보고 한숨짓는다’를 보면 그렇다.
왜 하필이면 ‘빈방’일까. 그리고 왜 ‘한숨 짓는’ 것일까. 우린 시상의 전개에서 慘慽(참척)의 아픔과 슬픔을 알 수 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 특히 엄마의 심장은 아픈 기억으로 부풀어 오를 것이고 자식을 잃은 슬픔은 되새길수록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비록 인생살이가 生住異滅(생주이멸)의 변화 속 삶일지라 하더라도…
자식을 잃은 부모는 한순간도 잊을 수가 없어 잠을 못 이루고 늘 회한에 젖어 눈물을 흘린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눈물이 아니라 상처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디선가 특히 적막의 밤이면 현관문을 두드리고 들어올 것 같고 창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부를 것 같은, 그래서 화자는 ‘두 귀 쫑긋 세운다.’ 그리고 엄마 아빠를 부를 것 같은 환청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자신의 행복을 덜어내서 아니, 다 모아 모아서 자식의 행복에 보태는 것이 부모 마음이기에 더 그렇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죽은 자식도 소생시키지 않을까.
허난설헌의 <哭子(곡자)> 라는 한시 일부를 보자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연이어 딸 아들을 잃고서 비탄에 젖어 피눈물 흘리며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무덤 앞에서 곡진한 슬픔으로 흐느끼는 허난설헌의 극한적 모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句에서는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이도다
하면서 피눈물을 흘리며 극한적 슬픔 토로하고 있다.
─ 필자는 경기도 광주, 중부고속도로 아래에 있는 허난설헌의 묘소를 두 번 갔다. 그녀의 묘역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봉분이 바로 아들, 딸의 무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하면 참척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밖에 없다. 술을 준비하지 못해 야생화 몇 송이 상석에 놓고 왔다. ─
어찌 콜비츠와 허난설헌만 그랬겠는가. 너무나 잘 알려진 고려 시대 가사인 <청산별곡>에서도 “올리도 갈리도 없는 밤일랑 또 어찌하오리까”에서 보듯 창가에는 별빛 달빛마저 가쁜 숨소리로 울먹이고 있다. 분명히 그가‘올리도 갈리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식을 잃은 비애를 읊은 정지용의 시 <유리창>에서도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와 같은 느낌으로 화자는 ‘별빛 달빛이 가슴 깊이 박히고’ 있는 가운데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를 떠올린 순간 차라리 세찬 소나기라도 맞으며 잠시라도 잊고 싶었을 것이다.
헬라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려면 다섯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한다. 그 다섯 번째의 마지막 강이 ‘레테’이다. 죽은 자가 레테의 강물을 마시면 이승의 모든 기억을 잊게 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망각의 강’이다.
그렇게 전생의 기억을 지워버리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평온을 얻는다고 한다. 비단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린 세상을 살면서 비탄과 고통, 때론 증오, 분노 등을 겪는데 이런 것들을 대부분 잊을 수 있다는 건 커다란 위안이 될 것이다. 비록 자식 잃은 슬픔이 무엇보다 클지라도 이제는 ‘망각의 강’물을 마시면서 마음의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치료를 할 때다. 슬프더라도 주저앉지 말고 지금의 상황에 충실 할 때다.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무덤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결국,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열 달을 품은 그 품속에 다시 품은 것이다.
어머니 앞에 자식의 죽음이란 없다. 다만 곁에 없을 뿐이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홍명근 기자 bcj2016@naver.com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첫댓글 이 시를 보고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그냥 느낌이 앞서니 말이에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사유는 누구나 있는 모양이에요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가슴 시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