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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미르, 하늘과 산, 신들과 인간들의 터전
윤명철 교수의 유라시아 기행 월간 휘즈노믹스 연재물의 일부입니다.
파미르!
왜 울림이 이리도 큰 걸까?
인류가 언제부터 이 곳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어떻게 그 존재가 전 유라시아에 알려졌고, 왜 관심을 갖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나 또한 20대 고개를 막 넘자마자부터 파미르를 가슴속에 담아두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울림과 신비로움으로 마주했다. 육당 최남선이 ‘불함문화론’을 주장하면서 파미르를 얘기했고, 많은 이들이 ‘파미르’하면 인간세계와는 동떨어진 특별한 존재들의 세계로 인식했다. 나도 20대 중반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연관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는 인류문명의 시원과 연관있을지도 모른다는 종교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당나무’ ‘신단수’ 등의 수행과 연관된 시집들을 내는 시절이었으니 아마도 우리민족의 엣신앙과 연관있을 거라는 추측도 있었을 것이다. 멀치아 엘리아데의 ‘우주산’ ‘우주목’의 개념과 의미 등이 나의 혼에 영향을 끼치면서 지구상의 지붕이라는 파미르는 당연히 특별한 존재로 다가왔다. 지금은 역사학자로서 유라시아 역사, 유라시아 문명과 연관하여 관심이 높아졌고, 또 내가 지향하는 신문명의 모델이 연관될 수도 있을까하는 희망 때문에 더더욱 집착하게 됐다.
사실 ‘파미르(Pamir-mt)’라는 울림과 감동을 주는 이 명칭의 어원과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대표적으로 페르시아의 언어에서 ‘미트라(태양)신의 자리’를 뜻하는 ‘Pa-imihr’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미트라교는 고대 페르시아안들의 종교인데, 꺼지않는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란의 동부지역에 살았던 파르티아인의 신앙이었는데, 훗날 로마를 비롯하여 유럽의 종교와 정신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인더스강에서 발전하여 불교와 융합하면서 미륵신앙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또한 페르시아어로 ‘산들의 기슭’ 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파미르 고원을 둘러싸고 있는 높고 거대한 산들을 고려한다면 타당성이 있다. 먼 거리에서 접근하면서 고원 위를 달리다보면 시야에는 오로지 산만 가득 찬 정경이 이어진다. 이란의 산들이나, 지구랏같은 조로아스터의 유적들을 보면 충분히 그럴 만 하다는 느낌이 든다. 일종의 우주산 개념이다.
중국에서는 ‘총령(葱嶺)’, 즉 ‘파고개’라는 의미의 명칭으로 불렀다. 6세기 초에 쓰여진 『수경주(水經注)』라는 지리서에는 ‘총령은 돈황의 서쪽 팔 천리 거리에 있는 높은 산이고, 산 위에서 파(葱)가 나므로 옛날에 총령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는 현실과는 관계가 없는 설명이다.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인 결과이다. 파가 없을 뿐 만 아니라, 고원위에는 교목이나 관목은커녕 식물다운 식물조차 자라지 않는 곳이다.
난 생각했다.
파미르가 이러한 다양한 의미를 지닌 명칭을 갖고 있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배의 대상이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우선 상징성을 들 수 있다. 고대 세계에서 사람들은 높은 산, 거대한 산, 만년 설산에 대한 특별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일종의 우주산의 개념 때문이고, 우리는 보통 ‘당산’으로 불렀다. 한편 파미르와 연결되는 天山은 주변의 모든 주민들에세 신령스러운 산으로 인식되는데, 중국어로는 하늘산이라는 의미이다. 타타르어로는 ‘킬로만’이라고 부르는데, 역시 하늘산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투르크어로 ‘텡그리(Tengri 천) 다르(Tar. 산)’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쿤룬(곤륜)산맥은 현지말로는 ‘머리를 말아 올린 검은 몸의 백성’이라는 뜻을 갖고 있단다.
그림
워낙 규모가 크고 넓은 데다가 자연환경에도 차이가 있고,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지역마다 차이가 있어서 일반적으로 중앙 파미르, 동부 파미르, 서부 파미르로 구분한다. 파미르 지방의 대부분은 타지키스탄의 고르노바다흐샨주에 속한다. 동쪽의 일부가 국경 지대로서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만나고, 남쪽과 서쪽은 강과 산맥으로서 아프가니스탄에 속한다. 이 곳을 ‘파미르 매듭(pamir knot)이’라고 부르는데, 이유는 거대한 산맥들이 뻗어나가는 핵에 있기 때문이다. 고원은 투르키스탄을 동서로 가르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경계를 이루고, 동서로 펼쳐져서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나누고 있다. 동서의 문명이 교류하는 대동맥인 오아시스로의 필수적인 경유지로서 ‘남로’와 ‘남도로’가 이 고원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여기에서 동서남북으로 유라시아의 전 지역까지 이어질 수 있다. 서아시아와 카스피해로 연결되고, 중국의 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파키스탄, 인도 등, 아프카니스탄의 북부로 이어진다.
두 번 째로 가는 길이다. 이른 봄날에는 거대한 몸통을 멀리 바로 보면서 횡단하다가 끝의 바로 발치까지 갔다. 눈이 덜 녹아 국경문이 폐쇄된 탓이다. 다시 찾아 이번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를 보고 국경을 넘어 두산베로 들어왔다. 이미 사마르칸드에서 타지크인들을 자부 본 나는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미리 생각하면서 다소 절차가 복잡한 국경을 넘었다. 트렁크를 끌며 메마른 먼지가 풀풀 이는 반쯤 모래자갈길을 걸어 도착하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몇 몇은 날 놀라게 한다.
그리이스나 로마에 온 듯 한 느낌이 들 정도로 지중해풍의 얼굴에 끝이 약간 꼬부라졌지만 큰 코에 큰 눈, 그리고 등짝이 두꺼운 거구들의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가장 중요한 도시가운데 하나인 ‘펜지칸트’ 시내로 들어가면서 만난 여자들은 새까만 생머리칼에 까무잡잡한 살색을 띄우고 있지만, 유럽풍의 얼굴이 남아있다. 피의 섞임, 몸의 섞임이 이리도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울 수가 있다니, 꼭 문화의 혼융, 습합만 찬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선하기 그지 없는 매혹적인 눈빛을 가진 여인들이 길을 걷고, 시장에서 꿀과 채소 등을 팔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가끔 질문을 던진다.
“얘들아. 세계에서 가장 예쁜 여인들이 사는 곳을 어디라고 생각하니?”
우즈베키스탄에 가면 김태희가 밭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들이 유행한 적이 있어서이다. 멋쩍어하는 학생들에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타지키스탄’.
그녀들은 투르크계의 피에 페르시아계, 그리이스계, 그리고 약간의 아랍계와 인도피도 섞였기 때문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그림 알렉산더의 생애 벽화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유라시아 교통시스템 속에 편재시킨 사람들은 페르시아계이다. 기원 전 6세기 중반 무렵에 페르시아 제국은 이집트를 평정하였고, 이어 동쪽으로 진출하여 아프카니스탄 북부와 이란의 동쪽인 파르티아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박트라(Baqtra, 아무다리아강) 강변에 도달하였다. 이어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Ⅰ세가 기원전 6세기 초에 중앙아시아의 아프카니스탄 북부, 아프카니스탄 중부 일대, 파키스탄 지역 가까이 진출하였다. 이때 타지크인들의 조상들은 페르시아에 복속되었다.
그 덕분에 오늘날 중국의 신장(신강 위구르 자치구) 지역은 월지라고 알려진 나라가 비단 무역을 주도하였고, 그래서 페르시아 문화와 ‘짜라투스트라’를 믿는 조로아스터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잔영을 드리운 것이다. 그러다가 서기전 4세기 전반에는 마케도니아의 젊은 알렉산더 대왕이 그 유명한 다리우스 Ⅰ세를 쫓아 서아시아를 건넜고, 서부 실크로드를 무섭게 달려와 기원 전 329년에 투란 지역의 도성인 ‘마로칸드’, 즉‘사마르칸드’에 도착하여 점령한다. 알렉산더는 중앙아시아에 그리이스 문화를 전파하고 이식하려고 다양한 정책들을 써가면서 노력했다. 또한 여러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알렉산드리아’ 같은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인 후잔트는 BC 329년경에는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였다. 지금도 알렉산더 건설한 성벽유지들이 남아있다.
알렉산더는 그 지역의 여자인 ‘록산나’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부하들에게도 현지 여인들과 혼인을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렇게 해서 국가정책으로 인하여 백인종과 황인종의 혼혈이 탄생하고 두 가지 다른 문화가 섞여 갔다.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판자켄트 등의 도시로 들어가면 지금도 그들의 외모에 페르시아인들이나 그리이스인들의 혈통이 많이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다시 험준한 파미르 고원을 넘어 타지키스탄,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지역까지도 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셀레우코스 왕국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부, 아프카니스탄은 기원 전 312년부터 이 들에 의해 통치되었고, 알타이 문화와 정복자들인 그리이스 문화 전통이 합쳐진 헬레니즘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
수도인 두산베로 들어갔다. 히사르 지역의 바르조프강가에 발달한 도시인데, 원래는 월요일 마다 큰 장이었던 마을이어서 월요일이라는 의미의 두산베가 명칭이 되었다.1920년대 말부터 쏘련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름이 스탈리나바드(Сталинобод)로 변했으나, 독립하면서 다시 두산베로 이름을 찾았다. 아직도 조용하고, 정리가 잘된 거리와 러시아 풍의 건물들은 번다하지 않고 비록 낡은 티는 나지만, 기품이 담겨있다.
두산베 박물관에는 다양한 종류의 유물과 지도, 민속품들이 전시되었다. 선사시대부터 시작해서 청동기 시대를 거쳐, 흔히 말하는 실크로드 시대의 유라시아 모든 다양한 문명이, 특히 지중해와 흑해문화가 돋보이는 유물들이 전시됐다. 놀라운 사실은 이슬람국가의 박물관에서 초기 불교의 귀하고, 아름다운 유물들이 전시됐다는 점이다. 와불 등은 어느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것이다. 초기 불교의 불상들은 서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불교문화가 발달한 인도 북부의 ‘간다라’ 지역은 동아시아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와 의미를 지닌 곳으로서, 인더스강 중류인 파키스탄의 페샤와르현에 속한다.
기원 전 1500년 경에 아리아인이 이 지역에 도착하였다가 인도로 들어갔으며, 그 후에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스렸으며,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이 입한 이후에는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된 곳이었다. 이러한 문화전통을 바탕으로 기원을 전후하여 몇 세기 동안에 ‘간다라 문화’라고 불리우는 독특한 형식과 내용을 지닌 불교문화가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이민족들이 인도로 오는 통로였으므로 불교같은 인도문화가 다른 세계로 전파되는 길목의 역할도 하였다. 또한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는 페르시아계 주민인 월지인들이 동쪽인 중국 지역에서 수입한 우수한 비단을 서아시아, 로마, 이집트 등으로 수출하였다. 그때 무역을 담당했던 월지인들이 기원 후에 남으로 이동하여 정착한 인도의 북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비단제품들이 발굴된다. 백제나 신라의 미륵 반가사유상, 일본의 광륭사에 남아있는 국보 1호라는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서양인의 피가 짙게 배인 아시아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우리 불교의 흐름을 찾으려면 이 지역을 봐야하는 것은 필수이다.
그림 힉소르
수도인 두산베를 출발해서 파미르로 향했다.
파미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산이나 고원이 아니다. 더구나 오랫동안 한반도에 갇혀살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아니다. 그 자체가 거대한 산으로서 독특하고 다양한 자연환경을 한 공간에 동시에 갖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부 남쪽에 있는데, 평균 고도가 5,000m이다. 코뮤니즘봉은 7495m, 레닌봉(7,134m) 인데 7000m 이상되는 거산들이 첩첩이 둘러싸여 있으며, 사방으로 10여 갈래의 산줄기들이 뻗어나가고 있다. 고원지역은 한랭한 반사막이며, 서쪽은 유년기의 깊은 침식 골짜기가 형성되었다. 강수량이 적지만 설산이 항상 녹아 흐르다보니 무려 170개에 달하는 천들이 흐르고 사레즈(Sarez)호수를 비롯하여 곳 곳에 크고 작은 호수들이 무려 400여 곳이 이상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카라쿨(Karakul)호수는 주변에 일반적인 산능선이나 마루와는 다른 선과 형태를 갖고 있어서 신비롭고, 맑은 곳이니 별들은 헤아릴 수 조차 없다. 빟하도 1,085개라고 하는데, 보진 못했지만 페드첸코(FedchenkoGlacier) 빙하는 72km나 된다고 하니 극지방을 빼놓고는 가장 긴 계곡 빙하이다.
파미르 고원의 서쪽은 조금 고도가 낮은 산들이 뻗어있다. 그리고 동쪽으로 흘러나간 시르다이랴강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길어서 3019km인데, 75% 이상이 키르기즈스탄을 통과한다. 우기에는 추이강물이 흘러 들어오기도 한다. 한편 서쪽을 흐르는 아무다리야강은 길이가 2540km인데, 대부분 타지키스탄의 영토를 통과한다. 이 두 강 사이에 발달한 비옥한 평원을 ‘트랜스 옥시아나’라고 부르는데,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투란(Turan)’이라 불렀다. 달릴 때 핏빛 땀을 흘린다고 알려진 ‘한혈마’가 생산되는 페르가나 분지도 여기 있다.
워낙 규모가 크고 넓은 데다가 자연환경에도 차이가 있고,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지역마다 차이가 심하다. 그래서 보통은 중앙 파미르, 동부 파미르, 서부 파미르로 간단히 구분한다. 파미르 지방의 대부분은 타지키스탄에 속하고, 동쪽의 일부는 국경 지대로서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만나고, 남쪽과 서쪽은 건트강과 산맥으로서 아프가니스탄에 속한다. 이러한 자연환경들이니 길 없는 길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땅 길은 바람결에 날리는 곡식 낱알들이 구르면서 만든다.
물 길은 산 이슬 방울, 눈 녹은 물방울, 아지랑이 머금은 구름 방울들이 만든다.
산길은 떼로 몰려다니며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를 휩쓸고 다니는 산늑대들이 만든다.
숲길은 두 그루 어여쁜 나무를 머리 위에 키우는 숫사슴의 검갈색 큰 눈망울과 갈라진 작은 발톱들이 흔적을 남기면서 만든다.
모래길은 작은 전갈들의 가시나무같은 다리들과 샛노랗게 익은 달빛들이 만든다.
얼음길은 바람에 밀리는 눈가루들과 눈 묻힌 채 질주하는 순록떼들이 만든다.
파미르 고원은 ‘파미르 매듭(pamir knot)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유는 거대한 산맥들이 뻗어나가는 핵에 있기 때문이다. 고원은 투르키스탄을 동서로 가르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경계를 이루고, 동서로 펼쳐져서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나누고 있다. 동서의 문명이 교류하는 대동맥인 오아시스로의 필수적인 경유지로서 ‘남로’와 ‘남도로’가 이 고원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여기에서 동서남북으로 유라시아의 전 지역까지 이어질 수 있다.
북쪽은 카르키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일부 지역과 맞닿아 페르가나 지방과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제라프샨 등 해발 3,000~4,000m에 이르는 산맥이 뻗어있다. 타지키스탄의 판지켄트와 사마르칸드, 부하라 등을 거쳐 서아시아와 카스피해로 로 빠져나가는 길이다. 동북쪽으로는 천산산맥의 서남쪽 끝과 만나면서 키르키즈스탄의 사리타쉬 지역, 그리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으로 연결된다. 동쪽은 곤륜(崑崙)산맥이 뻗어나가 북쪽으로 타림분지와 이어지는데, 오아시스 남도로의 호탄(和田) 등과 연결된다.
고선지는 카스카르(카스)를 출발해서 이 곳을 통과했고, 이 지역은 티베트 고원과도 연결된다. 동남쪽으로는 카라코름 산맥(Karakorum Mt)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으로 이어지면서 파키스탄, 인도 등과 이어지고, 또한 서쪽과 남서쪽은 힌두쿠시(Hindukusch)산맥을 통해서 아프카니스탄의 북부로 이어진다. 때문에 파미르 고원의 정상부는 상당한 거리가 아프카니스탄의 국경선과 마주하고 있다. 이 길을 전체적으로 활용한 집단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다만 몇 집단들이 이 길의 일부들을 활용하여 지우하거나 또는 진출을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그리이스 연합군이다.
그 밖에도 몇 개의 길들이 더 있다. 파미르 고원길은 인도양으로 나가는 길로 연결된다. 때문에 18세기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난 러시아의 남진정책과 이에 맞서는 영국의 북진정책이 충돌하는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길이다. 동부 파미르는 동아시아 지역과 연관되었는데, 간다라 문화와 불교 등이 중국의 돈황 등으로 전해졌다. 그 밖에 조로아스터, 마니교(조로아스터교와 불교가 융합), 네스토리우스 등이 전해지는 ‘종교의 길’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파미르길은 다른 길에 비하여 그리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다. 군대를 이끌고 파미르의 언저리를 넘은 사람들 가운데 알렉산더 대왕과 고선지가 있었다. ‘대당서역기’를 쓴 당나라의 승려인 현장과 신라 승려인 혜초도 파미르를 넘었다고 한다.
이렇게 주변의 모든 지역을 갈라놓고, 교통로의 인터체인지에 있다는 지리적인 환경으로 인하여 역사와 문화 또한 특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항상 다양한 종족들이 드넓은 고원의 둘레에 모여 살았지만, 서로 간에는 활발한 교류가 힘들었다. 또한 외부의 침략을 덜 받았으므로 자기 문화의 고유성을 보존할 수 있었고, 또한 자연과 연관성이 깊은 독특하고 원시적인 신앙과 샤머니즘 형태의 신앙들이 발달하였다. 조로아스터교, 불교, 이슬람교 등의 고등종교들도 이 곳의 전통 신앙과 습합한 모습을 띄웠으며, 그 흔적들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두산베를 출발해서 산길을 달리고, 호수가를 아득하게 내려다보면서 달리고, 흙먼지 이는 평원과 때때로 길을 점령한 채 유유히 걸어가는 소떼와 양떼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채찍질 소리만 내는 목동들의 보고, 아득하게 내려다 보이는 계곡들을 통과했다. 우선 남동쪽으로 230km를 달려 쿨롭에 닿았다. 주도이고,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라는데, 아무튼 공업도시라고 하지만 우리기 보기엔 한가한 시골마을 같다. 박물관에 들어가 민속품들을 보면서, 이슬람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도 또 다른 신앙이 있었고, 우리와 이렇게도 연관이 됐구나는 하는 사실들을 확인했다.
파미르인의 터전으로 피안지 강과 아프카니스탄이 둔덕들이 보이는 곳이다. 칼라이쿰은 강과 작은 평야가 있어서 척박한 와칸 회랑에서 오아시스를 이루는 몇 안 되는 마을 중 하나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19세기 러시아와 영국이 인도와 서남아시아 영토를 두고 경쟁할 때 양국 간에는 군사으로적 충돌하는 일을 막기 위해 자신들의 땅을 완충지대로 설정한 사실도, 20세기에는 구소련과 미국이 번갈아가면서 자기 나라를 침공해서 그동안 여러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로 외부와 격리된 오지에서 살아왔다.
파미르 고원에 본격적으로 접근하면서 처음 만나는 큰 도시는 ‘칼라이쿰’ 이다. 강이 흐르고, 군데 군데 농토가 조금씩 있어서 그나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다. 차를 세워놓고, 밭에 들어가 예닐곱의 식구들이 삽질 괭이질을 하는 것을 도와주고, 차도 나눠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한국을 알고, 부러워하는 산골 농부들의 말과 눈빛을 어떻게 받아들여햐 할지 난감하기도 했었다. 칼라이쿰에서 시원스럽게, 매우 야성적으로 큰 소릴 내지르고 하양핏물들을 쏟아내며 흐르는 건트강을 옆으로 끼고 하루종일 달렸다. 직선거리는 아주 먼 편이 아니지만, 산길이라서 돌아가는데다가, 국경선 때문에 많이 돌아가서 245km 정도를 달려서야 호루그에 접근했다.
고르노바다흐샨 자치주 주도라고 들어서 도시인줄 알고 약간의 기대감도 갖고 들어갔지만, 그저 조그만 시골 마을이고, 시장은 장터 정도의 수준이었다. 해발이 2,200m 정도 되는 곳이니 사람들이 많이 살 리가 없다.
그림 손님이 왔을 때 내놓는 음식들.
회색 벼랑 사이를 흰 갈기와 흰 핏물들을 쏟아내며 비명 속에 질주하는 골물들 보았다.
횟빛물이 때로는 굉음을 내는 건트강 너머는 돌산의 나라인 아프카니스탄이다. 메마른 산벼랑들과 그 틈에 박혀있는 산과 구분이 안되는 납작납작한 돌집들, 멀리인데도 아름다움을 빛처럼 뿜어내는 여인들이 어린 양떼들처럼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산길을 올라 모퉁이를 돌아 넘어 간다. 물가 곳곳에 세운 돌집들과 천들이 매달린 나무들. 어릴 적, 할머니 외할머니 따라 올라가 오색천 두른 도당할머니 나무의 딱딱한 살결 쓰다듬던 당산의 먼 먼 선조들을 보는 듯했다.
호르그는 마을에 도착하기 직전에 아프카니스탄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있고, 그 다리 끝에서는 국경시장이 열린다고 했다. 아프카니스탄이라는 묘한, 어쩌면 무겁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이므로 누구나 할 것 없이 호기심이 일어났다. 하지만 문을 닫았다는 소리를 들으며, 맥빠진 눈길로 다리 건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호르그는 제법 큰 마을이다. 꽤 큰 도시라고 알려졌지만, 우리 눈에는 조금 큰 산골마을일 뿐이다.
급하게 소릴 지르며 시내(?) 한가운데를 흐르는 판지강과 아프카니스탄의 언덕들이 코앞에 보이는 조그만 터전이다. 가보면 누구나 금방 느낄 수 있지만, 외부와는 접촉이 아주 곤란한 자연환경을 갖고 있어서, 외부로 노출되지도 않았고, 여기 사는 사람들도 바깥 세상을 모른 채로 근대까지 살았다. 방비를 고칠 일이 있어서 동네 골목길을 돌아돌아 시장으로 갔다. 크지 않은 터에는 장사를 하는 남루한 건물들이 서있고, 버스 종점역할도 하는 장바닥에서는 사람들이 북적북적 거린다. 가게는 주로 외부에서 들여온 공산품들을, 공터에서는 산골 마을에서 이고 지고 온 물건들을 펼쳐놓고 팔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천으로 지붕을 한 가게 구석을 차지한 소녀의 호기심에 찬 눈길을 받으며 타지키스탄제 공책 하나를 샀다. 마른 살점을 찢고, 솟구치는 선홍피 안에서 모락 모락 새어나오는 청춘의 연파랑 아지랑이들이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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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달리고 달려 점심 전에 드디어 고원에 올라섰다. 비명을 지르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파미르 고원에 올라서면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다.
달려온 길과 또 다른 파미르의 모습, 어쩌면 정수일지도 모르는.
그저 새파랑 하늘이 땅까지 내려 온 듯하다. 파미르는 한없이 넓고 거대해서 품이 너르다. 자연환경이 다양하고, 고도의 높낮이 뿐 만 아니라 날씨도 다양하고, 지형이 달라 빙하계곡이 있는가하면, 풀계곡과 풀들판이 끝없이 펼져졌다. 그런데 고원위로 올라서면 군데 군데 핏물 배인 듯한 보라색 들판도 있고, 소금기들이 배어나와 밀가를 묻힌 듯 희끗희끗 한 지형들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산들도 色이 있었다. 단색이나, 약간의 변색들이 어울어진 모습이 아니라, 다른 색들이 산의 여러 부분을 나누어서 물들이고 있었다. 푸른 산이라는 관용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모나고 급하게 위로 깍인 듯한 산봉우리들이 머리 부분에만 흰 눈을 가득 쌓고, 겹겹이 두터운 주름을 만들며 한쪽 방향을 향해 밀려가는데, 엄청난 힘이 느껴져 태풍을 맞은 해일처럼 보인다. 산들의 형태가 독특했다. 알프스, 천산, 알타이, 히말라야, 사할린, 우랄, 캄차카, ---. 그 동안 보아온 산들과는 형태가 달랐다. 모든 사물은 크고 작건, 뚱뚱하건 마르건 간에 비례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모든 사물은 아름답고,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파미르는 그러한 일반적인 비례나 균형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느끼기에도 생경하하고, 해석하려면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래서인지 더 신비스럽고, 더 감동적이고, 참기 힘든 매력이 듬뿍 담겼다.
바람이 몰아친다. 하늘서 내리꽂힌 바람, 눈가루를 담고 급하게 미끌어지는 바람, 메마른 흙과 마른 풀덩이들을 휩쓸고 오는 바람들이 섞여 소리를 갖고 온다. 찬 느낌이다. 한여름에 오한이 들 듯 한다.
빙풍(氷風)이었다.
세상의 가장 높은 곳, 하늘을 머리 맡에 두고 잠드는 사람들이 사는, 텅비고, 초록 색들이 빠져버린 횟빛 벌판에서 사납지만 매력적인 큰 바람결의 몸뚱이를 보았다.
뜯겨져 이 바람 저 바람에 쓸리는 마른 풀잎 덩어리들에 묻어 굴러다니는 잃어버린 어린 날의 신열과 외침, 감동들이 살아난다.
파미르 氷風
3십 억 년 동 안.
흰 눈망울로
터져버린 연분홍 신기들
칭칭 비끌어 맨 채로.
홀린 듯 춤추면서.
구름 속 결부터 뫼 뿌리까지
켜켜
무지개색 나이테처럼
아득하게 쌓여진,
불길에 얼룩진 화산재 찌끄러기들.
그
파슬파슬한 껍질들 위로
휘몰이 치며 접지(接地)해.
헤설피 굳은 무지개색 빙하에
다홍 송곳니 콕 박고
‘파샥 파샥’
녹 슬은 녹청색 소릴
뽑아 내
갓 입무(入巫)한 애무당의 입술마냥
수줍게 오무린 채로
뿜어내고 흩뿌린다.
메마른 수 십 만 옹달샘 안에.
3십 억 년 동안이나.
빙하 바람(氷風)들이.
마침내 무르갑(Murghab)에 도착했다.
호르그에서 300km인데, 타지키스탄에서 해발 해발이 3,650m인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다. 외국인들은 무르갑에 사는 주민들에게 ‘세계의 지붕’에 산다고 했다. 4000명 정도가 산다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중심부(?)인구가 많은 편도 아닌데, 주민들이 타지키스탄이 아니라 대다수가 키르기스인이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므로 잠시 걸어다니니 끝이 나버린다. 명물로 알려진 것이 ‘사르콜’ 시장이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늘 씽씽 불어대는 공터에 값싼, 푸른 색 칠들이 벗겨지고, 바래서 마른 쑥색을 한데다가, 여기거지 일그러진 중국산 컨테이너들을 다닥 다닥 붙여서 만든 시장이다. 물건들도 별로 없지만, 있어도 대부분은 주로 중국에서 사온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잡화들 뿐이이다. 국경의 도매시장이라고 하니 다른 지역에 판매하는 역할을 하고, 그래서 주름진 얼굴의 키르키즈스탄 아줌마는 무역상이라는 자긍심이 흘러 넘치는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다. 아무도 없을 것 같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눈 빛 깊은 여나문 명의 사람들만으로도 꽉 채워지는 텅 빈 곳 보았다. 하늘 올라 다니며, 동아줄 타고 내리며, 옛신 눈빛 옛신 입술 대물림한 사람들 보았다.
저녁에 일찍 자리에 들었는데도, 어질어질한 느낌이 든다. 고산병의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다. 게스트하우스에는 세계 온갖 곳에서 여행온 괴짜여행객들을 만나고, 안내해주는 키가 훌쩍 크고, 아시아인이면서 서양인의 골격과 이목구비를 갖춘 처녀가 있다. 지구상의 가장 높은 마을에 사는 그녀는 가슴 속에서 이는 유목민의 역동적인 기질과 세계로 나가고 싶어하는 바람은 어떻게 삭혀가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하늘 소리, 산소리, 흙 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구름소리, 안개소리, 빛소리, 꿈소리들 주렁주렁 걸린 늙은 무당의 귓바퀴가 보였다.
울렁증에 뒤척이다가 불편한 잠자리를 나와 길을 걸었다. 저며지다 저며지다 못해 ‘월현금’ 한 줄 보다 얄부른 몸뚱이로 매달린 그믐달이 보인다. 마지막까지 곁을 지키는 샛별과 함께.
또 달린다.
이 번에는 무르갑에서 함께 묵었던 백인 바이크족들, 자전거족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다. 염소 주둥이조차 들이댈 곳 없는 메마른 평원이다. 몇 개 마른 구멍 뚫고 들락거리는 물 빠진 털몸뚱이의 마르코폴로(고원 토끼)들만 생명체인 듯 하다. 명성을 날리면서 몇 군데에 흙인형으로 세워진 눈표범(雪豹)은 이정표 역할만 할 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파미르 꽃소리(花聲)
‘톡 톡’
새벽 녘 개밥바라기(金星)
야멸차게 좁은 등 보인 채, 막
길 떠나자마자.
白산 자락
버얼겋게 달구면서
맺힌 이슬방울들 보글 보글 끓여
흰 김들 게울 게울 피워 올리면서
분홍색 기지개 켜는 햇덩이.
야금 야금
맨 얼굴 드러내 가며, 새벽 아지랑이 묻혀 가며
너울너울 날라
껍질들 떼 내 새하얗게 빛살들 쏘아 댄다.
수 억 잎새에 엉겨 붙은 채
밤 내
초롱불 켰던 달님.
혼신 다해 햇님 오실 길 밝힌다.
‘톡 톡’
샛노랑 촛농들 떨구면서.
밤 내
화산재에 군데 군데 허물 벗겨지고
綠赤 산풍에 살점들 터져 나간,
달빛 좇아 이어지고 매듭진 산등성이로
오르락 내리락 질주하던
오만한 두 마리 눈표범(雪豹).
사지 쭉 뻗으면서 나동그라진다.
연분홍 불길들 지펴지는 꽃 평선 품 안에.
빙하 그늘에 걸린 바람살(風煞)들에 긁혀
네 눈두덩 위에
연보라빛 땀방울들 묻힌 채
바튼 숨 몰아쉰다.
‘톡 톡’
수 십 만 방울 그리움들 떨구면서.
석양 좇아 꽃평선 넘어 날라 간 갈까귀떼들
여명.
곡옥 같은 먹(墨)부리에 콕 물고 온 해알들
수 십 억 년
단 몸뚱이 식혀온 탄 무지개색 화산재 위로
우수수 떨궈.
수 억 만 꽃 색
수 십 억 꽃 내음
수 백 억 꽃 소리들과
혼절할 듯 비벼대고, 섞어댄다.
수 십 만 년 째 체한 묵은 한숨들
‘톡 톡’
연분홍 잿티로 틔우면서.
내 파미르,
무한의 꽃(꽃)평선.
수 천 만 년 동안
밤 낮 가리지 않은 채
갖은 꽃소리들로 만 채워가는 중이다.
넘칠랑 말랑.
눈이 의심을 느낄 겨를도 없이 입에서 먼저 소리가 터져나온다. 진초록 물이끼를 둥 둥 띄운, 해파랑과 진초록이 회오리질 하며 섞여진 청록색 하늘이 담겨있다. 횟빛 평지들 사이에 어디 산인지 꼭대기의 눈이 녹아 골골 새를 여린 몸 숨긴 채 스며들어 소곤소곤 흙 속을 흐르고 흐르다가 살며시 스며 나와 차오른 물밭들이다. 호수라고 부르기엔 민망해서 옹달샘이라고 부르지만, 또 다르다. 이렇게 어여쁘고, 신비하며, 청록색, 녹청색, 연초록색들이 섞일 듯 말 듯 하면서 찰랑찰랑거리는 옹달샘들을 본적이 없었다. 바이칼호에서도, 이식쿨 둘에서도, 천산 기슭에서도, 먼 샹글리아의 산 기슭, 알프스 산록에서도 이런 색깔이 살아 팔딱거리는 옹달샘은 본적이 없는 듯하다. 만년 흰 눈들이, 만년 빙하들이 햇살에, 달빛에, 바람결, 풀결에 녹아들어 찰랑거리는 중이다.
사람들은 파미르 고원위 옹달샘의 참모습을 사람들한테서 듣거나, 사진으로 봐서는 모른다. 직접 찬바람 스며들어 눈물이 배어나는 눈망울로 들여다보고, 약한 손바닥을 물결 겹에 찔러 넣어야하고, 알몸은 아니더라도 맨종아리로 걸어봐야만 조금 느낄 것이다. 오랜 시간, 많은 땀과 오랜 고통을 감내해야만 얻을수 있는 ‘美’가 아닐까?
파미르의 한가위 달샘
파미르 처럼 텅 빈,
채우려고 비운,
쏟아내고 비워진,
그런 空함이 아니라.
앗기고, 잊기고, 버려진 虛함 채우려 손깍지에 설豹 이빨 낀 채
힘겹게 회향한 초생달 한 쭉지 잡고
쭉 금근다.
싱싱한 파미르의 달 물 마시려고.
마셔도 마셔도 해갈될 수 없지만,
꼭 마실 맘도 안내키지만,
저들 위해 그 아까운 달 살에 흉터내는건 차마 못할 짓.
그래 살짝 긋고.
똑똑 떨어져
雪산 뜬 옹달샘에 채워지는
샛노랑 액만
혓바닥 담근 채로 사알살 핥으련다.
몇몇 동무들 불러와서.
이 한가위 새벽녘에.
'파미르(Pamir)'. 온갖 신들이 산다는 지구의 지붕.
군데 군데 생명의 생채기들만 째진 눈에 띄는텅 빈 공간으로 채워진 곳.
앉은 채로 ‘太極이 無極’이라고 말들 쉽게 하지만, 그 곳에 오르면 ‘無極이 太極’이라고 굳이 외칠 필요가 없다.
생명의 근원은 원래가 ‘無’이고 ‘空’이므로. 파미르는 수 천 미터에 달하는 온갖 큰 산들의 뿌리들을 묶은 ‘매듭(knot)’이다.
천 개의 빙하와 수천 갈래의 급하고 거친 물줄기들, 수 백 개의 크고 작은 호수와 옹달샘, 돌부스러기 사막들을 쏟아낸 태반이다. 메마른 품 안 대신 너른 둘레 둘레마다 사람들이 뿌리박을 자연을 풍성하게 키웠다. 그래서 유라시아 문화의 자궁이다. 사막. 존재한다면 무한의 자궁이다.
바이크족들과 함께 국경을 통과한다. 타지키스탄, 키르키즈스탄, 중국이 파미르 고원과 연결됬고, 지금은 안정됐지만, 쏘련과 중국이 국경분쟁을 일으켰던 지역이다. 군데 군데 허술한 나무와 철망으로 만든 국경선은 타지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과의 국경선이고, 시멘트 기둥에다 단단하고, 보기 흉한 철조망을 세운 것은 중국이다.
국경을 넘어 달리니 키르키즈스탄의 초원이 나타나고 천산의 흰 봉우리들이 줄일 짓고 있다. 마음이 푸근해진다. 사리타쉬로 들어왔다. ‘노란돌’이란 의미의 이 마을은 파미르 고원의 동쪽 아래 마을이며, 중국의 실크로드 서쪽인 카슈카르랑 연결되고, 키르키즈스탄의 두 번째 도시인 오시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예전의 실크로드의 중요한 주막이 있었던 곳이고, 지금은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우리같은 파미르 고원을 여행하는 외국인들이나 중국 트럭운전사들이 머무는 여관과 작은 식당에 두어 개 있는 마을이다. 작은 여관에 딸린 자그마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엄마를 돕는 조금 조숙한 소녀를 보고 동생이 아들이냐고 물어봤던 적이 있었다. 조혼이 워낙 일반적인데다가, 일찍 늙는 고원의 여인들이라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한 것이다. 뾰루퉁해진 표정을 못내 잊을 길 없어 이번에는 선물을 마련해 왔다.
그들의 삶과 미래를 그려보면 별별 생각을 다 떠올렸는데. 지금도 때때로 파미르 사람들을 떠올린다.
하루밤 묵은 물가 집의 젊은 남편과 아낙. 콕 박혀있는 느낌만 드는 산골짜기에 사는 저 젊은, 애같은 아낙네의 삶은?
'파미르(Pamir)'. 온갖 신들이 산다는 지구의 지붕. 군데 군데 생명의 생채기들만 째진 눈에 띄는텅 빈 공간으로 채워진 곳. 앉은 채로 ‘太極이 無極’이라고 말들 쉽게 하지만, 그 곳에 오르면 ‘無極이 太極’이라고 굳이 외칠 필요가 없다.
생명의 근원은 원래가 ‘無’이고 ‘空’이므로. 파미르는 수 천 미터에 달하는 온갖 큰 산들의 뿌리들을 묶은 ‘매듭(knot)’이다.
천 개의 빙하와 수천 갈래의 급하고 거친 물줄기들, 수 백 개의 크고 작은 호수와 옹달샘, 돌부스러기 사막들을 쏟아낸 태반이다. 메마른 품 안 대신 너른 둘레 둘레마다 사람들이 뿌리박을 자연을 풍성하게 키웠다. 무한의 자궁, 유라시아 문화의 자궁이다.
유라시아 지역의 상세한 내용들은
윤명철 지음 유라시아 세계의 이해와 활용 ,
유라시아 세계와 한민족 ,
천산을 넘어 알타이로드를 찾아서
천년 서사의 영토 극동 시베리아를 가다.
푸른 강역 한민족의 고향 바이칼을 가다.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로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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