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rning After (Gueule de bois), Indian ink and blue chalk, 1889, 47.1 x 55.5 cm
The Morning After(Gueule de bois) : la buveuse, vers 1889, Toile, 47.1 x 55.5 cm
(하바드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의 인생
1864년 11월에 프랑스 어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0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13,14세 때 양쪽 넓적다리가 차례로 좌상을 입고 정상으로 회복되지 못했다. 이로인해 다리 성장은 멈추고 상체만 자라 키가 150cm인 기형적인 신체구조를 가지게 됐다. 또래 아이들이 할 수 있는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지만 덕분에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는 행운도 얻었다. 그는 고호, 고갱, 마네 등과 같은 후기인상파 시대를 이끌어간 화가였으며 최신 일러스트레이터, 석판 인쇄(lithographer)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파리의 19세기 후반기의 보헤미안 라이프스타일을 묘사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몽마르뜨의 영혼”이라 불리우는 그는 물랑루즈, 파리의 카바레, 극장들, 그리고 창녀촌을 묘사하며 흔하지 않는 삶의 이면을 엿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알코올에 빠지게 됐고 결국 요양소에까지 갔으나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어머니는 아트 상인과 함께 그의 작품을 선전했고 작품판매이익금은 뚤루즈가 태어난 알비지역에 세워질 뮤지움을 위해 기부했다. 2005년 그의 작품은 $14.5milliom (145억)에 팔렸다.
화가의 모습 ((1864 - 1901)
화가의 초상화 (섬세한 얼굴, 정숙한 상체에 비해 하체는 부실하게 그려져 있다)
그의 작품 세계
뚤루즈 로트렉의 드로잉과 페인팅을 둘러보면 그만의 작품기법과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재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해 내 다른 장면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와 모양새를 표현해 내는 능력이 있다. 그가 그린 객체는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으며 초상화의 얼굴은 한결같이 조용히 숨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화판 위로 옮겨진 화가의 가슴 속 깊은 영혼의 울림이 관객들의 가슴으로 미어져 들어가는 것만 같다. 술잔을 앞에 놓고 둥근 탁자에 앉아있는 여인의 얼굴은 강렬한 펜 자국이 없는데도 눈가와 입가를 통해 모델의 슬픔과 화가의 외로움이 뒤섞여 있다. 관람객의 발길을 붙들어놓고 시선을 끌어낸다. 눈,코 입부분은 펜 터치가 불분명하게 느껴지면서 전체적으로 살아있는 분위기를 주는가하면 머리와 술잔, 옷 끝자락은 강한 펜터치로 인위적 생동감을 더해주면서 전체적인 조합을 이루어냈다. 먼거리에 있는 물건은 흐리게 처리하고 앞에 놓인 것은 굵고 강한 터치로 눈길을 끌고 있어 3차원적 공간감각을 살려냈다. 뚤루즈는 특히 빛과 어두움의 대조를 통해 입체적인 느낌을 부각시켰다.
Woman with a Black Feather Boa, 53 x 41 cm, 1892
화려하고 검은 의상을 입은 여인을 들여다보면 눈, 코, 입술 아래로 그려져 있는 강한 그림자로 인해 그녀가 입체적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게된다. 머리카락의 굵기와 색상에 변화를 주고 흘러내린 앞머리 옆으로도 흐릿한 그림자를 묘사하기 부드러운 펜터치를 사용했다. 그녀의 강렬한 눈빛과 강렬한 그림자가 그녀의 강렬한 인생을 묘사해 내는 것만 같다. 검은색상을 이용했으면서도 화려하게 보이는 것은 얼굴에서 사용한 섬세한 펜터치와는 달리 굵고 힘찬 터치로 빛과 어두움의 대비를 극명하게 살려냈기 때문인 것 같다.
Woman at her Toilet, cardboard, 67 x 54 cm, 1896 (Paris, Musee D'orsay)
목욕탕에 돌아않아있는 여성작품은 그의 펜터치가 얼마나 부드러운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는 가는 선을 중복되게 그려넣으면서 모델을 형상화했다. 선은 굵고 가는 차이가 없음에도 선을 중복해서 그려넣어 어두운 부분을 입체화시켰다. 특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면 일정한 굵기의 선들을 계속 그려주면서 뒤끝으로 묵어낸 모습이 얼마나 입체감있게 묘사됐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목욕탕에 앉아 상체를 벗고 다소 얼룩이 묻은 것만 같은 하얀 침대시트로 하체를 두른 채 등을 돌리고 넋없이 앉아있는 이 여인은 검은 부츠를 신고 있다. 알몸인 그녀는 왜 신발을 신고 있을까. 그것도 신고 벗기 힘든 갑갑한 부츠를.. 그녀는 몸을 씻기 위해 목욕탕에 온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주체할 수 없는 회한을 안고 아무 말도 없는 회색빛 벽을 그냥 보며 무언의 대화를 주고 받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고통스럽게 살아온 지난 날의 흔적 너머로 아름다웠던 자신의 영혼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Suzanne Valadon, 54 x 45 cm, 1886 (코펜하겐)
갈색바탕에 그려진 모자를 쓴 여인의 경우 역시 눈코입의 묘사는 선을 구별해낼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나 모자와 의상은 굵은 선을 그려녛어 구성에 변화를 주면서 생동감 넘치게 했다. 마치 몸은 가만히 있는데 옷과 장신구가 움직임을 종용하는 것만 같아 보인다.
Portrait de Gabriel Tapié de Celeyran adolescent, Fusain, 1882.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소년을 그린 뎃상에서도 그의 펜터치가 얼마나 안정적인가를 볼 수 있다. 얼굴은 그림자 부분을 제외하고는 펜의 굵기라든가 연결여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다리와 구두, 그리고 모자 부분을 보면 다소 거친 펜터치를 볼 수 있다. 그는 섬세한 얼굴과 거친 그 외부분을 구별하여 묘사해서 전체적인 조화와 생동감을 얻어낸다.
La blanchisseuse, 1889, Toile, 93 x 75 cm
탁자에 손을 기댄 채 창밖을 보고 있는 여인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탁자에 기댄 손과 어깨 쭉지에 힘이 들어간 것을 강조해 놓았다. 히프 부위의 좌측 골반부위도 살짝 올라가 있는 것이 오랫동안 서 있다가 다리가 아파 한쪽 다리에 힘을 빼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잠시 창밖을 본 것이 아니라 이미 아주 오랜 시간동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꼭 다물어진 입술은 절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면의 고통을 담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도 섬세한 펜터치로 입체감과 생동감을 주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보면 슬픔이 묻어난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모습인데도 모델의 가슴 저면에서 울리는 고통의 소리가 귓전을 여지없이 때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