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들은 문화적 동물이라 정의한다. 도대체 문화란 무엇이기에 그렇게도 사람이란 동물의 주된 특징이 되었을까.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화’하는 말을 인식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 문화가 서로 환경이 달라 문제가 되기도 한다. 더욱이 문화의 넘나듦이 심한 요즈음은 서로 다른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한 잣대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거리에서 보는 ‘영양탕, 사철탕’이란 말 하나에고 문화에 대한 여러 문제가 뒤엉켜 있으니.
1. 왜 보신탕은 이름이 영양탕, 사철탕으로 다양한가요?
우리가 요즘 거리에서 흔히 발견하는 ‘영양탕, 사철탕’이라는 보신탕 이름은 1988년 즈음에 갑자기 나타난 이름들이다. 이런 이름들을 보면서 우리는 화려한 1988년 올림픽 뒤에 가려졌던 씁쓸한 기억을 되살리지 않을 수 없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외국인들의 눈을 의식해서 미관상 보시 흉한 노점상과 불량주택을 대대적으로 철거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국 등의 유럽 동물 애호가들이 개를 잡아먹는 한국인을 야만인이라 욕하면서 올림픽 보이콧까지 불사하겠다고 나서자 우리 나라의 오핸 여름철 음식인 보신탕을 ‘혐오 식품’으로 법으로 규정, 읍 소재지 이상에서는 먹을 수 없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법을 피하기 위해 눈가림 용으로 만들어 낸 또 다른 보신탕이 영양탕이요 사철탕인 것이다.
먼저 이 보신탕 문제를 가지고 서로 다른 문화를 보는 여러 눈썰미를 따져 보자. 첫 번째로는 그것이 ‘어느 쪽은 옳고, 어느 쪽은 그르다’를 따질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점이다. 유럽 동물 애호가들의 주장은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타당하다. 그들의 입당에서 타당하다는 것은 그들의 문화에서 개를 식용으로 쓰는 것이 야만인의 짓과 같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는 그들의 조상인 유목 민족의 풍습에서 싹텄다. 유목 민족은 자주 옮겨 다녀야 하고 그러다 보니 튼튼한 집을 짓기보다는 쉽게 옮길 수 있는 집을 짓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야생 동물의 침입이 크게 문제가 되고 그러한 걱정거리를 덜어준 은인(?)이 바로 개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생활의 입장에서 보면 개는 친근한 동물이언정 유럽 사람들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왜냐 하면 우리 조상은 농경민족이기 때문이다. 농경 민족은 한 군데서 오래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집이 튼튼했고 야생 동물의 침입에 개가 큰 구실을 하지 못한다. 또한 늘 가난에 찌들어 영양 부족에 시달렸던 우리네 민중들에게 개는 몸을 보호할 수 잇는 고급의 단백질을 제공해 주는,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값진 음식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보신탕이 혐오스런 음식이라지만 과연 혐오스럽다는 것이 일률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문제이다. 어떤 민족이나 나라에도 다른 민족이나 나라의 기준을 보면 납득할 수 없는 음식 문화가 있다. 우리 나라 남성들이 즐겨 먹는 뱀탕은 서양인들이 혐오스러워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들이 먹는 말고기를 혐오스럽게 생각한다. 또한 그들이나 우리는 힌두 교인들이 먹지 않는 쇠고기를 즐겨 먹는다. 힌두 교인들은 굶고 있더라도 암소는 결코 먹지 안는다. 우리가 보기엔 미련한 것 같으나 그런 그들의 풍습이 그들에게 오히려 경제적으로 더 이득이다. 내친 김에 더 예를 들어보면 우리의 옛 선조들은 집을 지켜주는 거위는 그 의를 가상히 여겨 잡아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거위에 옥수수 가루를 분무기로 강제로 넣어 30g의 간장을 1kg으로 불려 놓은 ‘프아그라’를 고급 요리로 먹는다. 중국에서는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바퀴벌레를 볶아 데이트하는 남녀가 즉석 식품으로 즐겨 먹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민족의 음식 문화를 다른 민족의 습관과 규범에 의해 옳고 그름이나 도덕성 등을 평가할 수 없다고 본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해 보면 유럽인들이 개고기를 먹는 민족을 야만인이라 하는 문화 관점을 자문화 중심주의라 한다. 이에 비해 문화는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에 적합하도록 발생한 것이므로 어느 민족 또는 어느 지역의 문화가 더 낫다 낫지 않다고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문화 상대주의라 한다. 문화 상대주의는 문화다원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곧 문화는 다양한 양태를 띠는 것이고 선진국의 문화나 후진국의 문화나 모두 다양한 문화 속성의 한 가지라는 점이다. 그러나 문화 상대주의라는 것이 인간이 사는 모든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윤리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고, 문화 발전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어떠한 문화를 바라볼 때에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한다. 이를테면 애완 동물 사랑이라는 기준을 세우면 개고기를 먹는 우리 나라 문화 풍습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서민들의 영양 보충이라는 기준을 세우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기준을 실정에 맞게 적용하면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10진법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문명 국가나 3진법을 사용하는 아프리카의 어느 특정 국가나 나름대로 적합한 셈법이므로 어느 진법의 사용이 더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복잡한 현대 문명이라는 기준을 세우면 10진법이 더 편리한(발달한) 진법이 된다. 이를테면 10진법 79를 3진법으로 나타내면 2221(3)로 두 배로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준을 상대방에게 강제로 요구할 때는 문제가 된다. 앞서 예를 든 보신탕에 대해서도, 유럽의 동물 애호가들이 올림픽 보이콧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우리 나라에 대해서 자기네 문화 기준을 강제로 적용하려 했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문화에다 다른 사회의 문화기준을 그대로 적용하여 새로 법제정까지 한 태도 역시 문제가 된다.
어쨌거나 우리는 평가에 앞서 늘 해당 문화에 대한 자연 환경 또는 역사적 사회적 배경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활 문화는 자연에 대응하면서 또 사회 환경을 개척하면서 발달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차 마시는 문화가 일본과 중국에서 우리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발달한 것은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에 물맛이 없어 늘 끓여 먹는 습성 때문이고 중국은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워낙 물맛이 좋아 오히려 차보다는 물을 많이 마시는 민족으로 두드러진 것이다.
2. 문화 사대주의와 문화 제국주의
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에는 문화 사대주의와 자문화 중심주의가 있다. 또한 자신의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문화를 상대국에 강요하는 문화 제국주의고 있다. 문화 사대주의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쇄이고 문화 제국주의는 경제 침투를 쉽게 하기 위해 남이 은밀하게 채워주는 족쇄이다.
우리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나라나 민족의 문화를 무조건 좋아하는 것이 문화 사대주의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 민족을 오랫동안 괴롭힌 굴레이므로 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조선에 왔던 중국 사신이 숭어(秀魚) 맛을 보고 무슨 고기냐고 물었다. 통역관이 수어(秀魚)라고 대답하자 ‘水魚’로 잘못 알아듣고 하는 말이 비늘이 있는 고기가 모두 ‘수어(水魚)’인데 하필 이 고기만을 수어라고 하느냐고 했다. 그것은 사신의 착각이요 그의 무식에서 나온 말인데도 조선의 양반들은 그 후로부터 ‘秀魚’를 ‘水魚’로 써내렸으며 숭어를 ‘秀魚’로 쓰면 천자를 모독하는 행위로 비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자연 현상의 해석에서도 그러했다. 서해에서 밀물 때와 썰물 때의 차가 동해보다 큰 까닭을 양반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바닷물 흐름의 근원이 중국에 있으므로 서해는 중국에 가깝고 동해는 멀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던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보수 사대부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올바른 판단했을리 만무하다. 대표적인 최만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으로 큰 나라(중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엄히 따랐는데, 이제 글(한문)과 법도를 같이하는 때에 이르러 언문(훈민정음)을 만드신 것을 보고 듣기에 놀랍습니다. 때로 누군가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고전)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다.”라고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箋文:한자 글씨체인 전서체)을 모방하였을 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니 실로 근거가 없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찌 큰 나라를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세종실록(세종26년 2월20일)현대말 옮김.
위와 같은 기본 입장에 따라 언문을 배우면 학문을 게을리 하여 사리 분별력이 떨어진다고 까지 했던 것이다. 곧 한문을 해야 학문이 가능하다는 뜻이니 이는 언어 중심주의의 오류라고 할 것이다. 학문은 문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통하여 어떤 내용을 어떻게 습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니 사대주의가 학문의 본질마저 흐려 놓은 셈이다. 아직도 이런 언어 사대주의 또는 언어 중심주의에 빠져 한자를 섞어 써야 제대로 지식을 습득하고 말글살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있다. 더 나아가 영어를 섞어 써야 말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지식인들도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쓰는 말에도 이러한 문화 사대주의가 반영된 말이 있다. 중동, 근동, 극동 같은 낱말들이 그러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기준으로 보면 사우디 아라비아 지역은 서쪽에 해당한다. 그런데 우리는 중동이라 부른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지역을 극동이라 부른다. 이렇게 된 것은 유럽 사람들이 자기네 사는 곳을 기준으로 ‘근동(Near East)', '중동(Middle East)', '극동(Far East)’으로 나누어 부르건 것을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사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을 ‘지리상의 발견’이라 부르지만 이 또한 그들만의 관점 아닌가. 그곳에 오랫동안 살아온 ‘인디언(이 이름도 그들의 관점에서 붙여진 이름)’에게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지리상의 약탈’로 부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해외 여행이 활발해짐에 따라 문화 사대주의가 은연중에 배어 나오는 많은 얘기들이 있다. 다음 대화들을 읽어보자.
“영국의 공원에 가보니깐요, 모이를 들고 있으면 참새들이 손바닥에까지 날아와 앉더라구요. 과연 문명국이요, 신사의 나라지요.”
“하지만 솔개나 매 같은 큰 새들은 부호들이 애완용으로 기르는 꿩을 잡아먹는다 하여 모조리 쏴 죽인 바람에 씨가 말랐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유럽의 베란다에는 화초뿐인데 우라 나라는 속곳 나부랭이의 빨래 투성이뿐이니 외국 사람들 보기에 창피해 죽겠어요.”
“글쎄요, 꼭 그렇게 생각해야 할까요? 중부와 북부 유럽은 햇빛이 부족해서 빨래를 말린다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기에 널지 않을 뿐이지요. 볕발이 좋은 남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는 우리만큼 빨래를 열심히 널어 댄다니까요.”
“유럽의 잔디에는 잡초가 하나도 없구요, 지중해의 바다는 속이 들여가 보일 만큼 맑았어요. 우리는 언제 그렇게 될까요?”
“그건 말입니다. 그쪽 기후와 풍토가 잡초 성장에 불리하며, 지중해에는 플라크톤이 모자라 해초가 잘 못 자라는 것뿐이랍니다.”
“한국사람은 자동차가 지나가다 서로 살짝 스쳐도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주먹을 휘두르는 아우성을 벌리는데, 미국 사람들은 그럴 때 아주 상냥하고 신사적으로 타협을 하더라구요.”
“이걸 아셔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싸우지 않는 것은 전혀 싸울 필요가 없을 만큼 보험제도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고요. 그들이 웃으면서 주고받는 것은 바로 그 보험 번호입니다. 그들은 웃으면서 헤어지지만 나중에 보험회사를 통해 돈을 더 받아 내려 벌리는 짓거리가 얼마나 악랄한지. 그리고 우리에게는 자동차가 아직도 귀중한 재산이요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이지만 그들에게는 구멍 가게 갈 때도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 말하자면 구두 같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좀 찌그러지고 흠집이 나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이지요.”-김찬호, 「역사와 문화와 나」
물론 우리 나라가 항상 사대주의 문화에 푹 빠져서 살아온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배 계층에 한정된 것이고 대다수의 민중들은 우리다운 토속 문화인 이른바 전통문화를 끈질기게 발전시켜온 것이다.
한편, 문화 제국주의는 많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우라 나라가 큰 피해 국가이면서도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아 대부분의 고등 학생들에게 생소한 개념이다. 제국주의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중심부 국가)가 저개발 국가(주변부 국가)를 수탈하고 억압하는 체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곧 경제나 군사의 힘으로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것이 제국주의이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식민지 지배이다. 경제?군사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서 동시에 진행된 것이 문화 침투이다. 대표적인 보가 기독교 전파이다. 기독교 자체야 문제될 것이 없고 또 좋은 일도 많이 하였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과 함께 시작된 기독교 전파는 그들의 침탈을 도와주는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우리 나라를 황민화 교육과 일본말 보급,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왜곡을 통해 그러한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것은 피식민지 문화는 제국주의 국가의 문화보다 저급하다고 인식하게 하여 선진국의 문화를 후진국에 강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문화 제국주의는 식민지의 직접 지배가 대부분 끝나게 된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본격적이고도 교묘하게 나타난다. 곧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직접 지배 대신에 경제, 문화적으로 간접 지배를 하게 된 것이다. 곧 문화적으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고 자신의 문화를 대량으로 전파하여 신생국의 자아 의식의 상실과 여러 문화의 파괴를 통한 의식 구조의 왜곡을 획책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의 경우 학자, 언론인, 학생, 기술자 등을 대량으로 초청 교육하여 이들 유학생들이 각 나라의 엘리트로 성장하여 미국적 사고를 아무 비판 없이 수용케 하여 친미 여건을 마련하는데 이용했던 것이다.
3.마무리
이른바 국제화 시대, 정보화 시대에 문화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편견에 의해 일방적으로 수용되거나 전파되는 문화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전파 매체에 의해 그러한 점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문화에 대한 과학적 인식으로 우리 삶을 건강하게 하는 신나는 문화를 일궈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