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은 그저 아득하다.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아직도 머뭇거리게 한다. 어찌 보면 물고기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평전을 읽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작가의 진솔한 전기문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데이비드라는 과학자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서로 읽히기도 한다. 저자는 그의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왜곡을 비판하고, 우생학이 초래한 잔학상을 고발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의 부도덕함을 드러냄으로써 그가 현재까지 받고 있는 과분한 대접 또한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이름이 들어간 스탠퍼드 대학의 건물 이름을 바꾸는데 기여했다. 이를 위해 작가는 데이비드가 남긴 각종 자료를 치밀하게 분석했다. 데이비드의 우생학 자체에 대한 비판을 넘어 왜 그가 우생학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탐구했다.
그리고 그의 우생학은 인륜에 반해 자행한 일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수용소 생활을 한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데이비드가 우생학에 경도된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그가 평생 연구했던 물고기 분류를 인간으로 그 영역을 확장한 것으로 읽힌다.
우생학은 자의적인 판단기준으로 인간을 분류하고 그 결과 부적합으로 분류된 인간들을 제거함으로써 인간 종을 더욱 우수하게 할 수 있다는 황당한 믿음에 근거한다. 이는 자연발생적인 진화를 넘어 인간이 진화 과정에 직접 개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생학이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진화론에 대한 심각한 왜곡일 수밖에 없다. 그의 우생학은 이론의 차원을 넘어서 실제로 미국의 각 주에서 법의 탈을 쓰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적합이라는 굴레를 쓰고 죽임을 당했으며 강제적 불임시술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수용소에 가두어 가혹한 집단생활을 하도록 했다. 말하자면 그들의 삶은 그곳 수용소에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비참함이 진화의 너울을 쓴 우생학으로 자행된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데이비드의 우생학의 모태 역할을 하는 물고기 분류에 주목했다. 아마도 그의 우생학이 초래한 엄청난 현실 때문에 그의 물고기 분류에서도 뭔가 틈이 있을 것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왕이면 더 발가벗기도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이비드의 물고기 분류에 관한 연구업적은 대단했다. 지금껏 물고기 학명에 그의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이 100여 종에 이를 정도다. 어디에도 틈이 없던 그에게 빛을 준 것은 데이비드의 물고기 분류에 불어 닥친 보다 근본적인 문제였다.
작가는 전혀 뜻밖의 사태에 직면했다. 데이비드가 평생을 바쳐 분류해온 물고기가 사실은 모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분류학에서는 물고기, 즉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충격이었고, 자연스레 그 사실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조류, 포유류 등은 있지만 어류는 없다. 내 소박한 지식으로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이 진화 단계에서 어류를 거쳐 갔으므로 어류로서 고유한 종은 없다는 말인 듯하다.
다시 말해 육지 동물들은 어류가 뭍으로 올라와 진화한 것이다. 어류가 고유종이 되려면 육지에 특징을 공유하는 생물은 한 종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물고기는 한 종도 없으며, 어류는 모든 다른 종들과 진화 과정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저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품었고 평생을 몰두했던 신념이 얼마나 유해할 것인지를 철저히 드러냈다. 그 과정은 마치 명탐정의 추리를 떠올리게 했을 만큼 박진감도 있었다. 그러나 더러 행간을 따라가기 힘들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