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우리나라 최초의 성곽은 나무 울타리 목책(木柵)이었다.
2~3세기의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에서 나무울타리의 흔적이 자주 발견된다.
당시의 성이란 다만 나무울타리를 하고(樹柵) 흙을 쌓았기(築土) 때문에
흔적은 있지만 돌은 없다고 했다.
위례는 나무를 둘러 방어시설을 한 것으로 성곽의 가장 초기 형태이다.
"위례(慰禮)하고 하는 것은 방언으로 대개 사방을 둘러싼 큰 울타리를 뜻하는 것으로
위리(圍籬)라고 하는데 위리와 위례가 소리가 비슷해서 생긴 것이다.
목책을 땅에 세워 큰 울타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고로 위례라고 불렀다"
다산 정약용은 위례성을 울타리로 해석하였다.
그는 사방을 널리 둘러싼다는 위리와 음이 비슷하여 목책을 세우고
흙을 쌓아 만든 담을 위례라고 풀이하였다.
정약용은 한성백제의 첫 도읍지 위례성은 한강 북쪽임을 주장하였다.
혜화문 밖 10리 남짓한 지점인 삼각산 동쪽 한양동이 바로 하북 위례성이라고 하였다.
그 증거로는 옛성(古城)의 흔적이 있으며 또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 곳을
한양고현(漢陽古縣)이라 한다는 것이었다.
고구려와 신라에서 목책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행주산성과 진주성, 그리고 남원성에 부수적으로 목책이
설치된 일이 있다.
풍납토성은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판축토성이다.
판축토성이란 나무 기둥을 세우고 나무판을 댄 뒤 진흙과 모래, 나무껍질 등을
켜켜이 쌓아 다져만든 성을 말한다.
풍납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며 서의 둘레는 4km에 이른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북벽 약 300m, 동벽 1.500m, 남벽 200m 가량 되며
여기에 유실되고 남은 서북벽 250m를 가산하면 2.250m 가량 된다.
성벽의 너비는 30~40m 정도이고 가장 넓은 곳은 70m에 이르며,
복원된 북벽의 높이는 11.1m,
미복원된 남쪽과 동쪽의 높이는 6.2m 내지 6.5m 정도로 보고 되어 있다.
바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개로왕때의 기사이다.
"개로왕때 만년(왕 21년, 475)에 이르러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烝土築城) 곧, 그 안에 궁실과 누각(樓閣)과
대사(臺榭)를 건축하였는데 장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큰 돌을 마을과 하천에서 가져다가 곽을 만들어 부왕의 해골을 묻고
강변을 따라 목책을 쌓는데 사성의 동쪽으로부터 숭산(崇山)의 북쪽에 이르렀다.
이렇듯 거대한 역사를 일으키어 국고(國庫)가 마르고
백성들이 곤궁에 빠져 형세가 급박함을 累卵(누란)과 같았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국왕은 죽고
왕자 문주왕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백제본기를 총틀어 개로왕때 구촉한 이 성곽 공사는 가장 큰 토목공사였다.
엄청난 노동력이 소요되는 토성을 쌓는 공사였다.
흙을 쪄서 성을 쌓고라는 烝土築城(증토축성)법을 시도했다.
흙을 쩌서 축성한 이유는 벽돌처럼 딱딱 규격에 맞춰 대량 생산할 수 있고
공기가 단축되며 굳은 후에는 더 견고해지는 장점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자갈 한점 없이 채로 거른 듯 고운 흙으로 이 토성을 만들었다.
풍납토성은 평지성으로 올림픽 대교와 천호대교사이의 강동 풍납동 일대에 있다.
아래쪽으로 내려 갈수록 폭이 넓어지는 사다리모양으로
성벽의 폭이 약40m, 둘레 3.5 km, 높이가 10m,
면적은 약 76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풍납토성의 규모, 축조에 동원된 노동력, 주거지들의 ‘유구’와 유물을 통하여
강력한 백제의 힘을 느끼게 하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판축토성이다.
판축토성은 사방에다 나무기둥을 세우고
나무판을 댄 뒤 흙을 차곡차곡 다져 만든 성을 말한다.
이 같은 거대한 규모의 토성을 축조하려면 대규모 인력동원이 있어야 한다.
백제는 이미 절대왕권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입증하게 된다.
풍납토성의 외곽지역 재건축부지에서
해자(垓字·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파놓은 도랑이나 연못)로
추정되는 두꺼운 뻘층과 백제토기편들이 확인됐다.
해자의 경우 최대 50~60m로 거대한 성벽을 가진 성으로
성벽의 길이나 너비는 가히 자금성 이상으로 아시아 최대의 토성이라는 평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