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은 거짓말을 못한다 / 『뒤늦게 송장으로 나타나면 어떻게
하라는 건가?』
영화 「파이란」. 스물 셋의 중국여자 파이란이 난생 처음 밟는 한국땅.
입국 심사대. 심사원이 파이란을 몇 번인가 뚫어지게 바라보다 이윽고 입국허가 도장을 『꽝』 하고 찍는다. 첫 화면은 흑백처리된다. 우중충한 파이란의 삶을 예고한다.
어머니의 유언 『한국에 있는 이모를 찾아가라』는 말만 믿고 파이란은
인천을 찾는다. 그러나 이모는 이미 캐나다로 이민 가고 없었다.
파이란은 갈 곳이 딱히 없다. 직업소개소를 통해 위장 결혼을 한다. 한국에 눌러 앉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서류상의 남편인 강재는 인천 바닥을 핥는 「3류 건달」. 그러나 「3류 건달」은 강재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실은
「등외 인간」이었다.
강재役의 영화배우 최민식(38). 아무 역이나 받아먹지 않는다. 최민식의
인기에 편승, 서른개쯤의 시나리오가 들어왔으나 모조리 거절해 버렸다.
잘 나가는 배우로 목에 힘주는 게 아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役엔 혼신의
연기를 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처음 「파이란」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눈시울이 젖었다. 얼굴놀음이나 하는, 그저 그런 멜로물이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물론 그럴 경우 내게 출연 제의도 없었겠지만. 시나리오가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혀졌다. 이건 나를 위해 만든 배역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건 통상 과학적이라거나 논리적인 것과는 다르다. 느낌으로 와 닿아야 한다. 두 번째 읽으면 이미 「계산」이 들어간다. 순수한 맘에서 선입견없이 이 영화를 선택했다.
화면은 거짓말을 못한다. 마지못해 출연했다면 그게 그대로 화면에 드러난다. 그건 관객모독이다』
「파이란」의 감독 송해성은 서울 대일고교 1년 후배다. 이 영화를 같이
하면서 알게 됐다. 「파이란」의 원작은 아사도 지로의 단편집 「철도원」에 있는 「러브 레터」. 한국식으로 각색했다.
「파이란」은 지나온 각자의 삶을 반추케 하는 휴먼 드라머. 지난 4월28일 개봉됐다. 무대는 인천 항구. 극중 강재는 실제 최민식의 나이와 비슷한
30代 막바지. 각박한 세상살이와 타협하기엔 너무 여리다. 어정쩡한, 악착스럽지 못한 성격은 늘 「아웃사이더」로 머물게 한다.
비디오 가게, 구멍가게, 싸구려 술집 등이 맞물려 돌아가는 인천 뒷골목.
화면은 퀴퀴한 냄새가 묻어나는 곳을 비쳐 주면서 「파이란」은 더욱 더
「칙칙한 세상살이」를 강조한다.
강재는 깡패로 함께 시작한 동료를 보스로 깍듯이 모신다. 보스는 강재에게 「깡패 실격」을 선언한다. 강단도 없고 모든 일에 느슨해 깡패로서 출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뒤늦게 송장으로 나타나면 어떻게 하라는 건가?』
『강재씨는, 세상 참 재밌게 살아!』 후배 깡패가 강재에게 내뱉는 이 한
마디는 「인간 강재」의 총체적 인상을 던져 준다. 강재는, 늘상 후배들에게 술안주가 되고 씹히기만 한다. 심지어 구멍가게 아줌마까지도 시답지
않게 보는, 「한심한 사내」다.
파이란은 강원도 고성군 대진의 손빨래 세탁소에서 일하다 난치병으로 세상을 마감한다. 한편 어느 날 보스는 강재를 부른다. 자신의 살인죄를 뒤집어쓰라는 제의를 했다.
『네가 내 대신 빵(감방)에 들어가라. 넌 전과가 큰 게 없으니까, 10년만
살면 나올 수 있다. 대신 네 소원인 배를 한 척 사주마』
숙고 끝에 제의를 받아들인다. 어쩌면 「바닥 인생」을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같기도 했다. 교도소 갈 날만 기다리던 중 경찰이 강재의 집으로
들이닥친다. 지레 겁먹은 강재에게 경찰관들은 파이란의 사망통지서를 들이민다. 한동안 어리둥절하던 강재는 뒤늦게 「위장 결혼」했던 사실을
가까스로 기억해 낸다. 파이란의 장례를 치러 주기 위해 강원도 대진으로
간다.
屍身(시신)을 찾고 장례를 치른다. 파이란의 흔적을 더듬어 가면서 강재는
난생 처음 「자신의 과거」를 추스려 본다. 지우고 싶은 과거다. 그리고 따악 두 번밖에 보지 못한 서류상의 아내─파이란이 남긴 편지를 뜯어본다.
서툰 한글로 한자한자 또박또박 박힌 글씨.
「강재씨, 고맙습니다. 저와 결혼해 주셔서…. 이곳 사람들은 친절합니다.
그러나 강재씨가 더욱 친절합니다」
강재는 난생 처음 그리움의 대상이 됐다. 감사의 대상이 됐다. 묘한 감정이
일었다. 그에게 여자는 섹스 파트너일 뿐이었다. 난생 처음 「사랑」, 「그리움」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파이란의 주검을 보며 절규한다.
『뒤늦게, 송장으로 나타나면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냐?』
「파이란」의 매장 허가를 받는 과정은 너무 간단했다. 그래서 강재는 발광한다. 한 인간의 새파란 젊은 여자의 일생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간단하게 끝나느냐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