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치매’에 걸리지 않으셨나요?
휴대폰이 없어졌다. 어디에 뒀지. 집안을 구석구석 찾아도 없다. 외출 중인 아내에게 전화하려고 집 전화기 앞에 섰다. 아뿔사! 아내의 휴대폰 번호가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한참 기억을 더듬어 겨우 번호를 알아냈다. 다른 가족이나 지인들의 전화번호는 전혀 기억나질 않는다. 이럴 수가. 디지텔 시대의 새로운 증후군인 ‘디지털 치매’이다. 휴대폰 안에 가족이나 지인들 전화번호가 다 저장되어 있으니 전화번호를 외울 필요가 없다. 고작 외우는 전화번호가 두세 개 밖에 안된다.
디지털 치매는 휴대폰, 노트북, 네비게이션 등 디지털 기기가 우리에게 필요한 기억을 대신 저장했다가 알려 주기 때문에 여기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언어, 기억, 계산력, 의식이 크게 떨어지는 증상이다.
독일의 뇌과학 일인자로 불리는 정신병학자 만프레드슈피처는 2013년 자신의 저서‘디지털 치매’를 통해 디지털 치매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는 디지털 치매의 문제점으로 과도한 디지털 기기의 사용으로 인한 뇌세포 손상, 주의력·집중력 장애, 감수성 저하 등을 지적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는 공중 전화박스 안이나 집집 마다 뚜꺼운 전화번호부가 하나씩 있어서 펼쳐보면 되었다. 전화번호부는 각종 업소의 전화번호도 다 들어있어 아주 유용한 정보의 보고였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베스트셀러를 꼽으라면, 성경과 전화번호부가 서로 쌍벽을 이루었을 것이다.
전화번호부를 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가까운 지인의 집이나 사무실 전화번호와 주소 정도는 외우고 다녔다. 심지어 자주 가는 커피숍, 음식점, 가게 전화번호는 물론, 조부모 증조부모의 기일, 가족 생일, 모임 일정, 직장 행사 등도 저절로 머릿속에 장기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요즘은 뭐든 다 휴대폰이 대신해주기 때문에 굳이 외우거나 계산할 필요가 없다. 휴대폰이 똑똑하다고 해서 스마트폰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이에 의존하다 보니 뇌의 단기 기억이 장기 기억으로 이전되지 못하면서 기억력이 떨어진다. 이른바 디지털치매가 생겨버린다.
과거에는 한 번 다녔던 길은 머릿속에 남아있어 네비게이션 따윈 필요 없었는데 요즘은 네비게이션을 켜지 않고는 목적지까지 가는데 어려움이 생긴다. 네비게이션 도움 없이 운전하다 보면 엉뚱한 길로 들어서서 애를 먹곤 한다. 길치가 되어버린다. 기억의 중추 역할을 하는 대뇌의 중심인 해마가 ‘네비게이션이 있는데 도로 구석구석을 암기할 필요가 없지.’라며 직분을 망각해버린 탓이다.
퇴직한 또래 친구들이 모여서 정기적으로 치매예방교육을 하기로 했다. 치매예방에는 고스톱이 좋다고 해서 치매예방프로그램으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고스톱으로 정했다. 고스톱은 치열한 두뇌 싸움이기도 하다. 상대방의 패를 읽을 수만 있다면 백전백승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패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다만 상대가 내는 화투패를 보면서 수학적 확률로 추측할 뿐이다. 바닥에 나온 패를 다 기억하고, 내가 가진 패를 참고하면 상대가 가지고 있는 패가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그러면 승률이 높다는 얘기다. 고스톱 멤버인 친구들이 상대방의 패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패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고스톱 승률은 내가 제일 높다. 그래서 친구들이 나에게 고스톱을 잘 친다고 해서 ‘고박사’라는 박사학위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전에는 사람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사람치’, 길을 잘 모른다고 ‘길치’라고 불리 우던 별명이 요즘은 고박사로 불리고 있으니 영광이다.
고스톱을 치기 시작하면서 못 외우던 지인들 전화번호를 많이 기억하게 되었고 계산기가 없으면 암산은커녕 간단한 계산조차 잘 못하는 현상도 사라졌다. 고스톱 점수에 따른 돈 계산은 식은 죽 먹기다. 고스톱은 나에게 디지털치매 예방에 특효약인가 보다.
우리는 스마트폰 없이 살 수 있을까? 아마도 하루만 스마트폰 없이 살라고 하면 멘붕이 되어 패닉 상태가 될 것이다. 허둥대며 일상생활에 자제심을 잃게 될 게 뻔하다.
요즘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일을 하거나, 스마트폰을 보면서 밥을 먹는 이른바 ‘멀티태스킹’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이는 뇌에 과부하가 걸려 디지털치매의 원인 중 하나가 되는 것 같다.
하루에 한두 시간만이라도 스마트폰을 끄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집중해야겠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도 좋고, 수목원 산책길을 걷거나, 명상음악을 듣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 번에 한 가지씩 천천히,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디지털치매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2023.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