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경험하는 어떤 장면은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되어 오랫동안 기억나기도 한다. 2001년, 태국 북부 치앙마이 일대 산악지대를 여행하다 카렌족 마을에 들렀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난리가 났다. 마른풀 더미에 돼지가 누워 있고, 새끼돼지 여섯 마리가 올망졸망 달라붙어 젖을 빨고 있었다. 닭이 후다닥 지나가고, 병아리들이 어미닭을 죽어라고 쫓아간다. 여기저기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오리와 토끼, 연못가에선 어미 코끼리가 아기 코끼리에 물을 뿌려준다. 마을 사람들도 갓난아이부터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온 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생동감 있던 마을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이곳 풍경이 내겐 너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이렇게 모든 세대가 더불어 사는 모습은 한국의 시골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시골에서도 공장식 축산을 많이 하기 때문에 어미와 새끼가 같이 있는 장면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지금 세대에서 닭이 알을 낳고 품어 병아리가 태어나는 것을 온전히 지켜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여러 세대가 함께 살면서 생명이 순환하는 카렌족 마을을 보면서 한국사회가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시대’ 가장 큰 사건,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환경단체 녹색연합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개발로 파괴되는 자연을 지키고 싶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새만금, 4대강 개발, 경인운하, 골프장, 핵발전소, 초고압 송전망, 야생동물 멸종,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 가습기 살균제 같은 유해화학물질 남용, 원유 유출 사고 등.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경제활동’ 앞에서 ‘생명의 가치’는 무참히 짓밟혔다. 그러던 중에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다. 안전신화를 외치던 핵발전소가 폭발했고, 일본 전역이 방사성물질로 오염되었다. 우리 시대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이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이다.
핵의 평화적 이용을 목표로 개발된 핵발전소는 전기를 생산하지만 자연생태계에서는 생성되지 않는 방사성물질도 만들어낸다. 구소련 체르노빌 사고의 경고를 인류는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지난 10월 11일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후쿠시마 사고 당시 총리였다. 그는 말했다.
“과학기술은 인간을 행복하게도 만들지만 잘못된 사용은 인간을 불행하게도 만든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 사례이다. 인간과 핵발전소가 공존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고가 나기 이전에는 핵발전소의 안전성과 일본 과학기술의 힘을 믿었지만 사고 이후에 생각이 바뀌었다. 인류는 핵발전소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그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전 세계가 핵발전소를 포기하고 있는데, 바뀌지 않은 두 나라가 한국과 중국이라고 덧붙였다.
탈핵과 에너지 전환을 준비해야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녹색연합을 그만두고, 녹색당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탈핵과 같은 결정은 정치적 결단에 의해서 이뤄질 수밖에 없고, 탈핵정치를 하려면 정당이 필요했다. 독일의 2022년 탈핵선언도 사민당과 녹색당이 1998년 연정에 성공하면서 이뤄낸 결과였다. 양당 구도가 강한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탈핵을 위해서는 꼭 필요했다.
후쿠시마 사고 후에도 한국정부는 핵발전소를 계속 추가해서 짓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23기나 가동되고 있는데도, 2035년까지 기존 부지에는 11기를, 삼척과 영덕에는 신규로 4~5기를 추가 건설할 예정이다. 핵발전소는 짓는 데 10년, 운영에 30~50년, 폐로에 15~60년, 폐기물 처리에 10만 년이 걸리는 에너지 시스템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고리1호기와 월성1호기가 수명이 완료되었다. 고리1호기는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수명을 10년 연장했고, 정부는 월성1호기도 수명을 연장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수명이 끝난 핵발전소를 안전하게 폐쇄하고 그동안 우리가 사용한 핵발전소 전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계속 책임을 미뤄서 될 일이 아니다. 고리 1호기는 2017년까지 수명을 연장했는데, 잦은 고장 사고를 일으키고 있다. 고리1호기 반경 30킬로미터 내에 330만 명이 살고 있다. 고리1호기에서 사고가 나면 우리의 평온한 일상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다.
게다가 2012년부터 핵발전소 부품 납품을 둘러싼 비리가 쏟아지고 있다. 중고부품을 새것처럼 납품하거나 안전과 관련한 핵심부품의 시험성적서를 위조해 성능 미달인 부품을 납품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한전기술, 납품업체 사이에 돈이 오갔고, 한수원 간부 집에서 억대의 돈뭉치가 발견되었다. 핵발전소 사고의 위험을 모를 리 없는 사람들이 국민들의 안전보다는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저질러서는 안 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급기야 정부는 ‘원전마피아’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원전마피아는 정부 부처, 한국전력(한전)과 한수원, 학계, 언론계 등 핵발전을 둘러싼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로 이들이 한국의 에너지 정책을 결정하고, 그 속에서 이권을 챙기고 있다. 이런 원전마피아들을 기필코 제어해야만 한다.
공동체는 힘이 세다
핵발전소 없는 세상은 가능하다. 독일은 전체 전력의 21.9%를 재생가능에너지로 생산한다. 이미 핵발전 생산량(16%)을 훌쩍 넘어섰다. 독일 정부가 재생에너지법을 만들어 시민들이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에 투자하고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재생가능에너지에 돈이 투자되면서 기술은 발전했고, 일자리는 늘어났다. 독일에서 재생가능에너지 분야에서 창출된 고용만 36만 명이다. 독일사회는 핵발전이나 화력발전을 이용해 에너지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대량으로 소비하는 경제가 아니라 에너지를 적게 쓰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지역형 재생가능에너지로 생산하는 경제로 전환했다.
2010년 영국 남서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 토트네스를 방문했다. 토트네스는 2008년부터 주민들이 스스로 계획을 세워 2030년에는 핵에너지와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토트네스 사람들은 2030년까지 지금 사용하는 에너지량을 절반으로 줄이고, 필요한 절반을 재생가능에너지로 생산할 계획이다. 주민들은 재생가능에너지를 생산하는 일이 지역산업이 될 수 있도록 ‘토트네스 재생가능에너지 협동조합’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조합원을 모으면서, 풍력발전기를 세울 준비를 하고 있다. 필요한 전기를 지역에서 생산하고, 지역에서 소비하는 것이다.
토트네스 주민들은 기후변화도 석유 고갈도 이제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걱정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대안 계획을 수립하고 지금 행동하자고 말한다. 무엇보다 석유가 없이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탈핵도 수많은 공동체가 함께 목표를 세우고 행동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물질의 결핍이 불행은 아니다
우리 시대에 잘 산다는 건 어떤 삶일까? 우리 시대라는 말을 들으니 서글퍼진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참으로 각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좁은 국토에 빈한한 자원, 많은 인구, 개발과 성장을 향한 치열한 경쟁. 같은 출발선 상에 설 수 없는 약자들은 배제되고, 빈부 차이는 커져간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가 지배한다. 하루 5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한다. 전국 초·중·고 학생들의 자살이 사흘에 1명 꼴로 이어진다. 우리 시대를 버티기가 힘든 이들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세월호를 생각하고, 핵발전소 건설과 밀양송전탑을 떠올리고, 4대강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 온다. 이윤이 생명과 안전보다 소중한 사회에서 사는 것은 허공에 걸쳐진 외줄을 타는 것처럼 위태위태하다. 우리 사회가 다른 어떤 가치보다 경제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좋아한다.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예전엔 누구나 노래를 부르고 연극을 하고 음악을 연주할 줄 알았지만 이제는 가수들만이 노래하고 배우들만 연기한다.” 티베트의 라다크 지역에 현대 문물이 들어오면서 생겨난 분업화, 전문화, 객체화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이렇게 효율성을 위해 분업화와 전문화가 되면서 공동체보다 개인이, 삶의 즐거움보다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 중요해졌다.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서로를 돌볼 수 없기 때문에 돈과 가족밖에 믿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된다. 현대 사회는 물질적으로는 풍부해졌지만 정신과 감정적으로는 메말라가고 사람들 간의 관계는 단절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공동체를 회복하려면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를, 한국은 세월호 사고를 경험했다. 도쿄전력은 방사능 오염도를 알리지 않아 이이타테무라 주변지역 주민들이 방사능에 피복되었고, 세월호 선원들과 해경은 배가 가라않는다는 것을 승객들에게 알리지 않아 3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일본과 한국 정부는 똑같이 재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고, 그 결과 국민들은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숙제가 있다. 진실을 밝히고,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핵발전에 대한 잘못된 안전신화, 이익을 위해 안전을 포기하는 잘못된 시스템에 대해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 공동체가 신뢰를 회복하려면 진실을 공유해야 한다. 그런데 정보에도 가치판단이 개입된다. 가치 이전에 이권이 개입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우리가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이윤이 아니라 생명이다.
가치지향에 따라 얼마나 다른 판단이 내려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2012년 2월 고리 핵발전소 1호기에서 주전원이 끊기고 비상디젤발전기까지 작동을 하지 않아 원자로 내부 온도가 올라가는 중대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고리1호기 발전소장을 비롯해 한수원 임직원들은 이 사고를 은폐했다. 그들에게 법원이 내린 처벌은 기껏해야 벌금 200~300만 원이었다. 전 국민을 핵사고의 위험에 빠트린 중대 사고를 은폐한 것에 대해 재판부는 너무 가벼운 처벌을 내렸다. 핵발전소 사고에 대한 재판부의 인식 수준이 드러난 것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지난 5월 21일 안전기준과 대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핵발전소 재가동을 금지하는 판결이 나왔다. 일본 후쿠이지방재판소는 “지진의 흔들림에 대비한 예측치가 지나치게 낙관적이어서 원자로를 냉각하는 기능에 결함이 있다”며 간사이전력이 운영하는 오이원전(후쿠이현 오이군) 3~4호기를 재가동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 히구치 히데아키 재판장의 판결문은 두고두고 읽을 만한 명문이다.
“원전의 가동정지에 의한 불편은 전력공급의 안정성, 비용의 문제에 그치고 있다. 이 비용의 문제와 관련하여 국부의 유출이나 상실의 논의가 있으나, 비록 본건 원전의 운전정지에 의하여 많은 금액의 무역적자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국부의 유출이나 상실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풍부한 국토와 그곳에 국민이 뿌리를 내리고 생활하고 있는 것이 ‘국부’이고, 이를 되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 ‘국부의 상실’이라고 당 재판소는 생각한다.”
우리 시대에 잘 산다는 것
한국사회에서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단순히 경제적 성취만을 국부로 여길 것이 아니라, 이 땅에 깃든 생명들의 삶 자체를 아우르는 사유의 확장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일본은 후쿠시마 핵발전 사고를 통해 교훈을 얻어서 이런 판결이 났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도 똑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많은 것이 변하는 위기의 시대이다. 이전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지금부터라도 전환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아픈 사람들,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위로하며, 좀더 소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다시금 《오래된 미래》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해본다. “죽음의 시간에, 쌓아온 행적 말고는 한 조각의 부도 가져갈 수 없다. 우리가 하는 선하고 악한 행동이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만들어낸다”
녹색당 활동을 하면서 집회 현장에 자주 나간다. 청와대 앞에서 세월호 참사 정보공개를 위한 1인 시위도 하고, 밀양과 청도 송전탑 건설 반대 현장에도 가고, 쌀개방 반대를 위한 농민집회에서 발언도 했다. 집회를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약한 자들이 함께 살기 위해 힘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나는 우리 시대를 잘 살아가기 위해 녹색당을 선택했다. 녹색당의 정치는 소외되고 약한 자들과 현장에서 함께 하는 정치이다. 나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동시에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토트네스 사람들이 공동체의 힘을 믿고, 변화를 일구는 것처럼 나도 녹색당으로 모인 사람들을 믿는다. 그리고 생태적 지혜, 사회정의, 풀뿌리 민주주의, 비폭력 평화, 지속가능성이라는 녹색당의 강령을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이 시대에 잘 사는 것이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함께 꿈꾸고,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수 없으므로, 또 혼자만 잘 사는 것은 재미가 없으므로.
이유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에너지 정책을 전공하였으며, 녹색연합에서 미군기지, 야생동물보호, 국제연대 활동을 했다. 저서로는 《기후변화 이야기》 《동네에너지가 희망이다》 《태양과 바람을 경작하다》 《전환도시》등이 있다. 2012년 총선에서 녹색당 비례대표로 출마했으며, 현재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