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윈난성 여행 - 동방의 베니스, 800년 역사의 리장고성(麗江古城)
쿤밍-홍토지-리장-샹그릴라-후탸오샤 트레킹-따쥐마을-위룽설산 풍경구-수허구쩐을 거쳐 다시 리장으로 돌아왔다. 쿤밍에서 리장으로 올 때 밤 9시 58분 열차를 타고 다음날 아침 7시경 리장역 도착 후 바로 샹그릴라를 가기 위해 차오토우 마을로 향했기 때문에 그때는 리장고성을 제대로 보지못했다.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리장(麗江)은 하루 머물면서 이제부터 돌아볼 예정이다.
리장고성은 수허구쩐에서 멀지않은 거리에 있다. 수허구쩐의 여운이 채 가시지않았는데 빵차는 이미 리장 시내에 들어왔다. 리장고성 1.2km 표지판이 보이더니 곧 리장고성 남문을 지난다. 고성 중심지에 들어온 것 같다. 리장은 해발 2,400m의 고산지역으로 인구는 약 104만 명이며, 나시족을 중심으로, 한족, 바이족, 이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모여사는 도시이다. 숙소인 아잉객잔(阿瑛客棧)에 짐을 내려놓은 후 잠시 고성 거리를 돌아봤다.
리장고성은 이름 그대로 역시 고색찬란하다. 고성 입구 노점상이 팔고 있는 남방과일들이 먹음직하다.
울긋불긋한 중국식 목제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중심거리엔 전통 민속의상을 입은 소수민족 여인들이 자기식당이나 상점으로 호객행위를 하느라 시끌벅적하다. 도로가 미로처럼 뻗쳐 있어 처음 온 여행객들은 자칫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마침 지도를 파는 사람을 만나 먼저 리장고성 안내지도부터 한 장 샀다. 지도를 몇 분 훑어보니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숙소로 들어가는 골목길 코너에서 본 크라운 플라자 호텔이 표시되어 있고 우측 하단에 고성 남문도 보인다. 고성의 중심부는 쓰팡지에(四方街). 쓰팡지에 아래 무푸(木府)가 보이고 무푸 좌측에 완구로우(萬古樓)가 위치한 시지산(獅子山)이 눈에 들어온다. 시내 사방에는 파란 색의 수로(水路)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수헌 편저 ‘짱워 중국운남성 관광명소’ 책자에 의하면, 리장고성은 800년 전인 송(宋, 960-1279)나라 말기, 원(元,1206-1368) 나라 초에 축성됐으며, 명(明, 1368-1644) 나라와 청(淸, 1616-1911) 나라 때 최전성기를 누린 곳이라고 한다. 리장고성은 중국 소수민족 중 하나인 나시족(納西族)이 주로 살고있는 고성으로, 1254년에 이곳 나시족들이 원나라의 세조(世祖)에게 복속됐고 1276년에 리장루군민총관부(麗江路軍民總管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리장은 차마고도(茶馬古道)가 지나가는 곳이자 남방 실크로드의 시발지였으므로 각지의 다양한 물자가 이곳으로 모였다가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또한 흐르는 물자를 따라 중원의 문화와 불교, 도교, 기독교 문화가 들어왔으며, 이곳 나시족의 고유문화인 똥바문화(東巴文化)와 공존하며 발전하였다.
리장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97년 8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고나서부터이다. 리장고성은 ‘따옌쩐(大硏鎭)’ 혹은 ‘옌쩡(硏城)’이라고도 부르는 데 이는 고성의 주변이 마치 벼루의 가장자리 턱처럼 나무로 둘러싸여 있고, 벼루의 물 담는 홈처럼 호수가 있다고 해서 벼루 ‘연(硯’자를 붙여 부른 것이라 한다. 그런데 ‘연(硏)’자로 쓴 것은 간다는 의미의 ‘연(硏)’자와 벼루를 의미하는 ‘연(硯)’자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리장은 북부의 신성(新城)과 남쪽의 고성(古城)으로 나뉘며, 그 경계는 시내 중심부에 솟아있는 시지산(獅子山)이다.
‘고장난 시계’라는 특이한 이름의 한국식당에서 오랜만에 상겹살과 상추쌈으로 저녁식사를 한 후 고성 북문 쪽으로 저녁산책에 나섰다.
먼저 북문 유허광장(玉河廣場)부터 돌아봤다. 이곳은 관광객들이 여행지를 물색하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자 쓰팡지로 이어지는 식당주점가 입구이다. 성벽 모양의 거대한 황토색 벽이 제일 먼저 여행객의 시선을 끈다. 벽에는 사람, 동물 등 다양한 형태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마치 이집트의 옛날 벽화같은 모양이다. 또 ‘따수이차(大水車’라고 부르는 물레방아 뒤로 ‘世界文化遺産’이라고 쓴 장쩌민의 친필 조형물도 보인다.
날이 서서히 저물어가자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갑자기 춤판이 열리기 시작한다. 왠 춤인가 했는데 알고보니 나시족 여인들이 관광객들을 위해 벌이는 민속춤이란다. 나시족 전통의상을 입은 여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면서 춤을 춘다. 관광객들도 중간중간 그녀들과 손을 잡고 돌아간다. 마치 우리나라의 강강수월래와 흡사한 춤판이다. 필자와 함께 한 일행도 춤 대열에 끼어들어 그들과 흥겹게 춤을 춘다. 관광객들과 나시족 원주민들이 춤을 통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땀이 날 정도로 정신없이 민속춤을 즐긴 후 리장고성에서 유명한 동다지에(東大街)와 신화지에라는 주점가로 들어섰다. 좌우로 술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 길 우측에는 수로가 흐르고 목제다리로 술집이나 식당을 드나들게 되어 있다.
술집들이 대부분 문을 열어놓거나 창문 자체가 없는 오픈 주점이라 술집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 중국 전통술집도 있고 일본식 주점, 밴드가 있는 캬바레식 술집도 보인다.
가이드인 조나단 씨가 SAKURA라는 문패가 걸린 카페로 안내한다. 이름이 사쿠라여서 일본식 술집이겠구나 했는데 이곳 여주인이 한국여자란다. 간판 밑에 한글로 ‘벚꽃마을’이라고도 써 붙였다.
꼬치구이, 만두, 떡 등을 파는 노점상도 즐비하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남대문시장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다.
나시족, 이족 등 소수민족 전통의상을 입은 젊은 아가씨들이 손님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미소를 던진다. 밤이 술렁이는 환락의 거리. 세계각국의 여행객들이 모여드는 실크로드와 차마고도의 중심도시답다.
주점가를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쓰팡지에(四方街)로 이어진다. 쓰팡지에는 리장고성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120평 정도의 네모꼴 작은 광장이다. 쓰팡지에는 예전엔 ‘간지에(赶街)’라고 불렀는 데 이는 장날에 물건을 팔거나 사기 위해 모인다는 의미의 ‘간지(赶集)’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떠들썩한 곳으로 주위에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쓰팡지에를 기점으로 동쪽 방향의 동다지에, 시화지에가 유허광장에 이르고 남쪽 방향으로 우이지에(五一街)와 치이지에(七一街)가 뻗어내린다. 이처럼 길이 사방으로 뻗어간다 하여 쓰팡지에(四 方街)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일주일에 세차례 ‘다탸오(打跳)’라는 집체가무(集體歌舞) 행사가 벌어진다. 쓰팡지에의 한 가운데서 불길이 솟아오르면 관광객들은 이곳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손에 손을 잡고 음악에 따라 춤을 추며 횃불 주위를 돈다. 우리들은 날짜가 맞지않아 다탸오를 보지는 못했지만 대신 광장 가운데에서 전통 민속의상을 입은 소수민족 여인들의 춤을 구경하고 함께 사진도 찍는 등 관광객다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술집거리와 쓰팡지에를 본 후 완구로우(萬古樓)를 올랐다. 완구로우는 리장고성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나지막한 산인 시지산(獅子山) 정상에 세워진 누각이다. 다섯 층의 처마가 달려 있는 높이 33m의 이 누각은 1997년에 낙성됐으며, 이곳에 오르면 리장의 고성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완구로우는 원래 목씨(木氏)의 토사궁전(土司宮殿)인 무푸(木府)의 후원이었으나 지금은 시지산공원으로 되어 있다. 완구로우에서는 술이나 차를 마실 수 있게 되어 있다. 정자 테라스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고성의 야경을 즐겼다. 800년 역사가 불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듯 하다.
리장고성의 밤이 점점 깊어간다. 우리 일행은 다시 쓰팡지에 인근 상점가를 둘러봤다. 리장의 전통공예품이나 토산품들을 주로 파는 곳이다. 은세공품, 목각공예품, 소수민족들의 옷을 만드는 형형색색의 천과 전통의상, 팔찌목걸이 소품들, 옥(玉) 공예품, 꽃신, 보이차 등 실로 다양하다.
세공기술자가 은세공 장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나시족 등 소수민족 여인들이 베틀에 앉아 자신들의 전통의상을 만드는 천을 직접 짜는 장면도 볼 수 있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전통의상에 자리를 떠나기가 싫을 정도다.
나시족 고유문자인 똥바원(東巴文)책 및 종이가게도 보인다. 똥바문화는 나시족 고대문화 가운데 가장 찬란한 문화이다.
박광희 저 ‘중국 윈난성 인문기행 活化石’이란 책에 의하면, 똥바문자는 현재 1,300여 자 만 전해 내려온다고 하는 데 똥바 제사장들은 아직도 이 문자들을 이용해 책을 쓰거나 경서를 읽고 있다고 한다. 가히 세계 유일의 살아있는 도화 상형문자라 할 수 있다. 유네스코는 2003년 8월 나시족의 ‘똥바고적문헌’을 세계기록유산목록에 올린 바 있다.
똥바문자는 한 글자에 한 음을 갖는 상형문자도 있지만, 삽화 형식의 도화문자도 있다. 여기에 적은 숫자이긴 하나 형성자(形聲字)라거나 지사자(指事字), 그리고 가차(假借)문자도 있다. 똥바전통도서는 똥바교 경전을 포함해 2만 5,000여 권 정도가 보존되고 있다고 하며 이는 고대 나시족 사회의 백과사전이나 다름없다. 이 고적들은 나시족이 자체 제작한 두텁고 힌 종이에 글을 쓰고 제본한 것인데, 책의 크기는 가로 28cm, 세로 9cm이다. 똥바문자는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써나가는데 책의 매쪽 마다 석 줄을 썼으며, 매 줄 마다 직선으로 선을 그어 공간을 구분하였다. 똥바문은 처음에 나무판 위나 돌에 그린 흔적이나 기호였다. 즉 똥바문화의 발원지라 일컬어지는 중디앤(中甸) 바이띠(白地)나 찐샤지앙 연안의 절벽에서 암벽화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 가까운 시장에 가봤다. 새벽 장보러 온 소수민족 여인들로 하루가 분주하게 깨어난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새벽시장이지만 색다른 물건들도 눈에 띈다. 해발 5천미터 이상의 고산 눈 속에서 피어난다는 설연화, 야크 고기, 야생 비둘기 등도 보인다. 설연화는 말려서 팔고 있다. 전통의상인 칠성피견(七星披肩)을 입고 장보러 나온 나시족 여인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아침식사 후 이곳 리장고성의 통치자인 목씨(木氏) 관저였던 무푸(木府)를 찾았다. 숙소에서 불과 5분 거리. 어제 밤에도 지나쳤던 곳인데 입구에 무푸라는 현판이나 안내판이 보이지않아 이곳이 무푸인줄 몰랐다. 무푸 정문에는 ‘忠義’라는 글자가 현판처럼 써 있다.
위캔북스 발행 ‘China-중국 서남부 편’에 의하면, 중국 중앙정부는 13세기에 이르러 나시족의 리장을 복속시켰지만 지리적으로 중앙에서 너무 멀어 지방세력이지만 중앙정부에 호의적인 목씨 가문을 내세워 리장을 통치하게 했다고 한다. 목씨들은 22대를 내려오며 무푸를 중심으로 리장을 다스렸다. 목씨가 통치하는 고성 주위에 외벽이 남아있지않은 이유도 그들의 집권 때문이라 한다. 목씨가 통치하는 고성 주위에 성벽을 두르면 木자에 口자가 둘러쳐지는 데 합하면 곤란할 困자가 되기 때문에 성벽을 쌓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의 무푸는 규모는 웅장하나 1996년 지진 때 완파된 후 새로 지은 것이라 역사적 가치는 별로 없다.
성벽이 없는 성(城) 리장. 우리는 그곳에서 800년 간 면면히 이어온 중국 소수민족들의 생생한 숨소리를 듣는다.(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