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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이현영(李顯英)
1573년(선조 6) - 1642년(인조 20)
조선 후기에, 대사헌, 예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곡(蒼谷)·쌍산(雙山). 이귀지(李貴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희백(李希伯)이고, 아버지는 군수 이대수(李大秀)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장사랑 홍질(洪礩)의 딸이다.
1595년(선조 2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보직되고, 평안도평사·지평 등을 거쳐 수찬·교리·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 (광해군 2) 헌납이 되었다가 교동현감으로 나갔다. 그 때 인척인 이이첨(李爾瞻)으로부터 그곳에 유배중인 임해군(臨海君: 광해군의 형)의 암살을 종용받았으나 이에 불응해 미움을 받아 투옥되었다.
이듬해 다시 부수찬으로 기용된 뒤 서흥부사·예빈시정·봉상시정·필선 등을 역임하고, 161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1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대북파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은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사간에 등용, 1624년 경기도관찰사, 1625년 예조와 형조의 참판 및 대사헌, 1626년 이조참판, 1627년 동지중추부사, 1629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부제학·도승지·참찬관 등을 역임하고, 1632년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자 행호군으로 산릉도감(山陵都監)을 겸하였다. 이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대사헌, 예조·형조의 판서를 지내고 사직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양근(楊根)에서 의병을 일으켜 후금의 군사와 싸웠다. 이듬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못한 것을 자책해 사퇴했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642년 청나라 용골대(龍骨大)가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볼모로 삼아 심양(瀋陽)에 잡아놓고 조선 사신의 입국을 요구하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심양에 가서 한달 동안 감금되었다가 돌아오던 중 평양에서 죽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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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전당집 제12권 / 비명(碑銘)
이조 판서 이공 신도비명병서(吏曹判書李公神道碑銘 幷序)
내가 전조(前朝)의 옛 신하들을 살펴 보건대, 어둡고 어지러운 시기를 만나 죽음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서로 아첨을 일삼는 일을 면치 못했으나 강직하게 자신을 다스려 뜻과 절개를 떨어뜨리지 않아 거의 철인(哲人)의 법도에 가까웠으며, 인조(仁祖)가 반정을 일으킨 초기에 훈귀(勳貴)가 조정에 가득 차 서로 세력을 다툴 적에 그 사이에 참여하여 자기 소신대로 행동할 수가 없는 상황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몸을 일으켜 그 지조를 더욱 드러내고 아름다운 법도를 따랐던 분은 오직 우리 스승 판서 이공(李公) 한 사람뿐이다.
아! 공은 겉모습이 보통 사람보다 왜소하여 몸이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했으며, 말이 입에서 나오지 못하는 듯했다. 항상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방안에 엉긴 먼지가 가득하였다. 담담하기가 오래된 우물 같았으나 일이 있으면 매번 분발하였고, 의리를 보면 용맹하게 나아갔다.
영욕(榮辱)이나 이험(夷險)에 관련된 일에 이르러서는 취사(取舍)가 평소에 정해져 있어 비록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라 하더라도 빼앗을 수 없는 점이 있었으니, 이는 공의 수양이 전일하고 행동에 과단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여 보통 아이와 달랐으며, 장중(莊重)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덕망 있는 어른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았다. 조금 장성해서는 과거체 문장을 잘 지어 과거 시험장에서 소문이 자자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문과에 급제하여 선발되어 승문원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후에 평안도 병마평사(平安道兵馬評事)로 나갔다.
3년 뒤에 사간원 정언으로 발탁되어 시강원 사서와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고, 천거되어 홍문관 수찬과 교리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선조(宣祖)는 《주역》을 강론할 적에 선조(宣祖)의 학문이 고명하여 노사숙유(老師宿儒)라도 감히 한 마디 말을 보태지 못하였으나, 공은 매번 진강(進講) 때에 음성이 맑고 유창하며 강설(講說)이 정밀하고 타당하였으므로, 임금 역시 경청을 하였다.
마침 영남(嶺南)의 유생(儒生)이 상소를 올려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비난하자 정도(正道)를 미워하는 무리들이 그 말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시기를 틈타서 자신들의 묵은 감정을 풀려는 의도로 우계의 작명(爵名)을 삭탈해야 한다고 추론하였다.
대사헌 황신(黃愼)이 그 일이 무고임을 명백히 분변했으나 역시 이 일에 연좌되어 삭직되어 내쳐졌으며, 집의 이성록(李成祿), 장령 조익(趙翊), 민유경(閔有慶) 등은 계속해 일어나 힘껏 다투어 분변하였다.
공은 홍문관에 있으면서 차자(箚子)를 올려 그 시비를 밝히다가 결국에는 크게 시의(時議)를 거슬러서 외직으로 나가 함경도 도사가 되었다. 오랜 뒤에 지평에 임명되었는데, 대관(臺官)들이 예전의 일을 들어 탄핵하고 아울러 주의(注擬)가 잘못되었다고 논의하였다.
판서로 있던 자가 예전에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공과 일을 함께하여 평소 공의 지조와 행실에 탄복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함사(緘辭)를 통해 공을 대단히 칭송하며 변론해주었다. 갑진년(1604)에 영변부 판관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그곳 병사(兵使)가 궁중(宮中)의 세력을 믿고 범에 날개가 돋친 듯 호령을 하였다. 그가 비록 몹시 공을 꺼려 자못 스스로 움츠려들기는 하였으나 공은 이윽고 병을 핑계대고 돌아왔다.
병오년(1606)에 또 외직으로 나가서 은계 찰방(銀溪察訪)이 되었는데, 안렴사(按廉使)가 공의 고과(考課)를 하위에 두었다. 이는 공이 대관(臺官)으로 있을 때 기자헌(奇自獻)의 일을 논의하려 하다가 미처 실행하기도 전에 말이 미리 누설된 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공이 전후로 관직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은 사실상 이 때문이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였을 때 임해군(臨海君)을 교동(喬桐)에 유폐시켰는데, 공이 현감(縣監)이 되었다.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은 공과 인척관계로 비밀리에 화근(禍根)을 없애라는 뜻을 넌지시 비쳤으나 공이 성을 내며 응하지 않자, 갑자기 임해군을 감시하는 일을 소홀히 하였다는 일로 탄핵하여 공을 심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앞일을 예측할 수 없었으나 공은 마침 용서를 받아 석방되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 원년)에 서용되어 수찬, 정언, 지평에 임명되었다. 대사헌 김륵(金玏)과 장령 박사제(朴思齊)가 광해군이 사친(私親)을 추숭(追崇)한 잘못을 논의하며 고집하다가 견책을 받아 외직에 보임되었는데, 공은 헌납으로서 홀로 아뢰어 이를 반대했다.
얼마 후에 부묘(祔廟)하라는 명이 있자, 공이 양사(兩司)와 함께 합사(合辭)하여 그 일에 대해 논하고 예관도 역시 예법(禮法)을 들어 힘써 논쟁하니,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신해년(1611)에 정인홍(鄭仁弘)이 상소를 올려 퇴계(退溪 이황(李滉)),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두 선생을 비방하였는데, 말이 몹시 불손하였다.
그래서 성균관 유생들이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는데,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여러 유생을 중죄로 다스리려고 하였다. 이때 공은 홍문관에 있으면서 여러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유생들을 구제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했다.
이조(吏曹)에서 공이 일찍이 이조의 낭관으로 천거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허락하지 않자, 백사(白沙) 이 상국(李相國 이항복(李恒福)이 공의 의중을 알고는 천거하여 서흥 부사(瑞興府使)에 임명되었다. 임자년(1612),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신율(申慄)에게 음해를 당하여 결국 적을 체포하지 않았다는 죄에 연좌되어 파면되어 돌아왔다. 오랜 뒤에 사예와 장령을 역임하였고,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수하는 데 참여하였다.
계축년(1613)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을묘년(1615)에 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상기(喪期)를 마쳤으나 마음에 슬픔이 남아 그대로 시골에 머무르면서 몇 년 동안 나오지 않았다. 기미년(1619)에 비로소 군자감 정이 되었다가 얼마 후에 봉상시(奉常寺)로 자리를 옮겼다.
신유년(1621)에 규례에 따라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라 분병조 참의(分兵曹參議)가 되어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이에 앞서 사신으로 가는 이들이 바다에 빠져 죽는 일이 많았는데, 사람들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일을 사지(死地)에 가는 것처럼 여겨 모두 뇌물을 써서 피하니 여러 차례 사람이 바뀌어 공에게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공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꺼리는 빛이 없이 행장을 꾸리고 길에 올랐다. 이에 광해군이 칭찬하고 장려하여 형조 참판으로 승진시켜서 사신으로 보냈다. 계해년(1623, 인조 1) 여름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성상(聖上 인조(仁祖))이 반정(反正)을 일으킨 뒤라 노숙(老宿)하고 어진 이들을 불러들였는데, 도중에 공을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하였다가 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했다.
갑자년(1624)에 호종한 공로를 책록하고 가의대부로 품계로 올려주었다. 병조, 호조, 예조 세 관청의 참판, 한성부 좌ㆍ우윤, 부총관을 역임하였으며, 여러 차례 대사간, 대사헌,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정묘년(1627)에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서 비국(備局)의 일을 겸해 맡아보았고, 대사성으로 체직되어 성묘(聖廟)의 위판(位版)을 받들고 먼저 도성으로 돌아왔다.
무진년(1628)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임기를 마치고 나서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부제학, 도승지로 자리를 옮기고 전후로 동지경연사, 춘추관사, 의금부사를 겸대하였다. 임신년(1632)에 인목왕후(仁穆王后) 능(陵)의 역사를 마치고 난 후 공이 제조(提調)를 맡은 것으로 인해 그 상으로 자헌대부의 품계에 올랐고 도총관, 지의금부사, 한성부 판윤,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이조(吏曹)에서 홍문관의 수장은 마땅히 명망이 높은 사람을 기용해야 한다고 계청하여 파격적으로 공을 부제학에 임명하였는데, 이보다 먼저 이렇게 특별한 대우를 받은 이는 오직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등 몇 명뿐이었다. 얼마 후에 예조 판서로 자리를 옮겼다.
병자년(1636)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어떤 사건으로 스스로 탄핵해 면직되어 물러나 양주(楊州)의 시골집에 우거하였다. 겨울 12월에 청(淸)나라 군사가 갑자기 들이닥쳐 도성이 함락되었는데, 공이 변고를 듣고 성안에 들어가니, 대가(大駕)는 이미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떠나고 오랑캐 군사들만 가득하였다.
공은 산골짜기를 통해 양근(楊根)에 이르러 남한산성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울부짖다가 난리를 피해온 사대부들을 불러 모아 의병을 결성하는 한편, 원근에 격문(檄文)을 띄워 대의(大義)를 내세워 일깨우자 응하여 모인 자가 수백 명이었다. 용문산(龍門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공에게 군사를 궁벽한 곳으로 옮겨 적들의 예봉(銳鋒)을 피하라고 권하였다.
공이 울먹이면서 말하기를, “외로운 군사로 이곳에 주둔하는 것이 고기를 범에게 던져 주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차마 후퇴하여 일신의 편안함만을 도모할 수는 없다.”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랑캐가 과연 날랜 기병으로 습격을 해 오자 추격하여 지평(砥平)의 경계에 이르렀는데, 휘하의 군사 양응치(梁應治) 등이 화포를 쏘아 적을 물리쳤다.
얼마 후에 임금의 수레가 대궐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달려가 문안했다. 이때 대관(臺官)이 하루거리에 있는 재신(宰臣) 중에 임금을 호종하지 않았던 자들을 파면시켜야 한다고 논의하였는데, 유사(有司)가 제대로 살피지 않고 공을 그 속에 함께 기록해 넣었다.
공은 의탁할 곳이 없어 관동(關東)으로 옮겨가서 흡곡현(歙谷縣)에 이르러 호숫가에 띳집을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얼마 뒤에 연신(筵臣)이 공의 사정을 아뢰자, 임금이 즉시 서용하도록 명을 내려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서 나가지 않았다.
가을에 이조 판서로 부르자, 공은 도성문 밖에 나가 다시 글을 올려 해임시켜 주기를 청하고, 또 낮은 벼슬 버리고 높은 벼슬만 취한다는 혐의가 있음을 진언하였는데, 임금의 후한 비답을 받고서야 벼슬에 나갔다. 무인년(1638) 봄에 병으로 예조 판서로 자리를 옮겨 예문관 제학, 세자좌빈객을 겸했다.
경진년(1640) 봄에 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겨울 10월에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 등이 날랜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갑자기 의주(義州)에 이르러 급히 영의정, 이조 판서, 도승지 등 여러 관원을 불러들이라고 공갈협박을 하였는데, 맹렬하기가 우레와 같았다.
공은 빨리 말을 달려 하루에 이틀 갈 거리를 가서 7일 만에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는데도 오히려 기한을 어겼다고 질책을 받았다. 이는 공의 차남 이휘조(李徽祚)가 일찍이 심양(瀋陽)에 인질로 잡혀 갔기 때문에 혐의의 논란이 있어 더욱 사납게 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이 태연히 대처하며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저들이 위엄과 꼬임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점차 예의와 공경을 더했다.
신사년(1641)에 공이 예조를 맡고 있었는데, 그때 광해군의 부음(訃音)이 이르렀다. 공은 임금에게 아뢰어 궁중에서 발상(發喪)을 하고 백관들은 상복(喪服)을 입는 예를 거행하도록 청하였는데, 이는 후한 예를 따르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한두 사람이 매우 심하게 공격하자 공은 사람들의 논의를 피하여 교외로 나가서 상소를 올려 변론하였다. 임금이 여러 번 온후한 유지를 내리고 중추부(中樞府)에 임명하였으나 오히려 머뭇거리며 나가지 않았다.
임오년(1642) 10월에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가 세자를 데리고 봉황성(鳳凰城)에 머물면서 재신(宰臣)들을 불렀다. 공도 파견 인원 중에 있었으므로 봉황성(鳳凰城)에 들어가 대질 심문을 받았고, 의주(義州)에 머무른 지 한 달 만에 풀려나 돌아왔다. 그런데 피로가 쌓여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졌고, 안주(安州)에 이르러 비로소 고달픈 증상을 보이다가 평양(平壤)의 여관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실로 이해 12월 12일의 일이었다. 당시 나이가 70세였다.
세상을 떠나던 날에 행동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고, 얼굴빛은 어지럽지 않았으며, 끝내 집안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이틀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고, 조문과 제사를 규례에 따라 했으며, 특별히 명하여 길을 따라 호상(護喪)하게 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예우였다.
계미년(1643) 2월 19일에 장단부(長湍府)의 선영이 있는 서곡리(瑞谷里)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장사 지낸 지 1년이 넘어서 손자 이송령(李松齡)이 가첩(家牒)과 익녕부원군(益寧府院君) 홍 상국(洪相國 홍서봉(洪瑞鳳))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그의 아버지 참판공(參判公)의 명으로 와서 청하기를, “신도(神道)에 세울 비석이 이미 마련되었으니, 비명(碑銘)을 지어 주시기 바랍니다.”하였다.
사양해도 뜻대로 되지 않아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고려 말 한산(韓山)에 이곡(李穀)이란 분이 있어 비로소 문장으로 집안을 일으켜서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는데, 호는 가정(稼亭)이고,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다. 아들 이색(李穡)은 벼슬이 시중(侍中)에 오르고,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졌는데, 세상에서 목은(牧隱) 선생이라 일컫는다.
그 부자가 원(元)나라 조정의 과거에 급제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쳤고, 목은은 조선이 개국할 때 시종일관 절개를 지켰는데, 이 때문에 한산 이씨(韓山李氏)가 명망 있는 가문이 되었다. 여러 대(代)를 지나 대사간 윤번(允蕃)에 이르렀는데, 이분이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 휘 귀지(貴枝)는 풍저창 직장이며, 조부 휘 희백(希伯)은 사재감 정으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대수(大秀)는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모친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데, 관찰사 서주(叙疇)의 손녀이며, 장사랑(將仕郞) 질(礩)의 따님이다. 만력(萬曆) 계유년(1573, 선조 6), 4월 초6일, 을묘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현영(顯英), 자는 중경(重卿)이다. 진주 유씨(晉州柳氏) 고려 상장군 휘 정(珽)의 후손인 판결사(判決事) 사규(思規)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어질고 부덕(婦德)이 있었다. 공보다 2년 뒤에 태어나서 공보다 22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공이 귀하게 되자 정부인(貞夫人)에 추봉(追封)되었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기조(基祚)는 이조 참판이며, 차남 휘조(徽祚)는 현감이다. 장녀는 찰방 황면(黃沔)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참봉 홍중보(洪重普)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으로 딸 둘이 있는데, 장녀는 주부(主簿) 김안도(金安道)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거인(擧人) 이해악(李海岳)에게 출가하였다.
참판은 4남 7녀를 두었는데, 장남 송령(松齡)은 감역(監役)이고, 차남은 성령(星齡)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장녀는 사인(士人) 홍처정(洪處靖)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심약한(沈若漢)에게 출가하였다. 삼녀는 김홍진(金弘振)에게 출가하였으며, 사녀는 신여식(申汝拭)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어리다.
휘조는 5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규령(奎齡)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황면(黃沔)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구(震耈)와 태구(泰耈)이다. 장녀는 사인(士人) 이상구(李相久)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양여찬(楊汝纘)에게 출가하였다. 홍중보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송령은 아들 한 명이 있고, 규령(奎齡)은 딸 한명이 있으나 모두 어리다. 참판이 원종공신에 녹훈(錄勳)된 것으로 인해 규례에 따라 공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추증하고, 봉상시에서 시호(諡號)를 의논하여 충정(忠貞)이라 했으니, 아름다우면서도 지나치지 않다.
공은 자질과 품성이 아주 고매하여 자연히 도(道)에 가까웠고, 효도와 우애, 절약과 검소는 타고난 천성이었다. 지극히 정성스러우면서도 은근하고 독실하여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몸가짐을 간결(簡潔)하게 하여 포의(布衣) 때의 마음을 고치지 않았다.
평소에는 항상 옛날 성현의 글을 대하여 묵묵히 스스로 공을 쌓고, 고요하고 전일함에 한결같이 하여 억지로 수양을 하지 않아도 행동이 예의와 법도에 맞았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차에 조심하여 일에 합당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스스로 물러나왔다.
일시적인 군주의 희로(喜怒)나 권신(權臣)의 호오(好惡)를 거짓으로 따른 적이 없어 비록 우레처럼 성을 내며 거세게 배척할 때에도 음성과 안색을 바꾸지 않고 조용하고 온화하게 행동하며 이치대로 헤아릴 뿐이었다. 두 차례나 이조(吏曹)의 수장을 맡았는데, 전주(銓注)의 공정함은 근세에 비할 이가 없고, 청탁을 스스로 물리쳐 대문 앞이 물처럼 말끔하였다. 여러 번 정승 후보에 올랐으나 끝내 정승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아! 나는 어릴 적에 공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으나 자질이 떨어지고 공부를 폐하여 이룬 것 없이 지금은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해지고 말았으니, 어찌 공을 안다고 하여 공에 대한 일을 서술할 수 있겠는가. 다만 들으니, 공은 어린 시절에 백사(白沙) 이 상국(李相國)에게 학문을 배웠다고 하며, 역시 우리 부친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상국은 일찍이 그 바탕이 아름답고 지조가 굳세어 뒤에 반드시 세상에 크게 이름이 날 것이라고 칭찬했고, 우리 선군은 공을 평소에 중하게 여겨 연배를 낮추어 사귀었다.
대간(大諫) 이명준(李命俊)은 남을 인정하는 일이 적었는데, 공에게는 아주 자신을 낮추어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이윽고 지기(知己)의 친구가 되었으니, 선배들이 공을 추중(推重)하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이에 드디어 명(銘)을 지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가정과 목은 크게 일어나 / 稼牧勃興
해동의 으뜸이 되었네 / 冠冕海東
9대를 내려와서는 / 厥傳以九
총재공이 있으니 / 惟冢宰公
남아있는 목은의 초상 보면 / 牧老留眞
공은 실제 그 분을 닮았네 / 公實似之
어찌 겉모습만 닮았으랴 / 豈惟形肖
덕과 의리까지 닮았다네 / 惟德之義
혼란한 시절에 지조 드러내어 / 夷險著節
조상의 발자취를 잃지 않았네 / 不失祖武
시대는 지금이라 하나 / 其代也今
사람은 옛 사람 그대로라네 / 其人也古
산 높고 물 아름다운 이 곳 / 山高川媚
영원한 무덤이어라 / 萬世之藏
진실을 상고하려거든 / 有欲攷信
여기에 새겨진 글을 볼지어다 / 視此銘章
<끝>
[註解]
[주01] 이조 …… 신도비명 : 이 글은 이현영(李顯英, 1573~1642)에 대한 신도비명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
곡(蒼谷)ㆍ쌍산(雙山)이다.
[주02]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 맹분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역사(力士)이고, 하육은 주(周)나라의 역사이다. 맹분은 맨손으로 쇠뿔
을 뽑았다고 하고, 하육은 1000균(鈞)의 무게를 들어 올렸다고 하여 힘이 센 장사를 비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주03] 마침 …… 비난하자 : 경상도 생원(生員) 문경호(文景虎) 등이 최영경(崔永慶)의 죽음과 관련하여 정철(鄭澈)의 죄보다 성혼의 죄
가 더 크다고 주장하며 죽은 성혼을 죄 줄 것에 대해 상소를 올린 일을 말한다. 《宣祖實錄 34年 12月 20日》
[주04] 대사헌 …… 보임되었는데 : 사친(私親)은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恭嬪金氏)를 말한다. 광해군이 생모인 공빈 김씨를 추숭한
일로 그 일의 잘못에 대해 논하다가 김륵은 강릉 부사로, 박사제는 함경도 도사로 좌천되었다. 《光海君日記 2年 6月 11日》
[주05] 정인홍(鄭仁弘)이 …… 불손하였다 : 정인홍이 상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비방하고 문묘 종사가 부당함을 극론한 일을 말한다.
《광해군일기》 3년 3월 26일 기사에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주06]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 : 1612년(광해군4) 봄에 봉산 군수(鳳山郡守) 신율(申慄)이 도적 김제세(金濟世)를 붙잡아 혹독하
게 심문하자, 김제세가 ‘김직재가 반역(反逆)을 도모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황해 병사 유공량(柳公亮)과 감사 윤훤(尹暄)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고 김직재를 체포하여 올려 보냈다.
조정에서 김직재를 국문하자, 김직재가 ‘황혁(黃赫) 등과 함께 음모를 꾸며 순화군(順和君)의 양자(養子)인 진릉군(晋陵君) 이태
경(李泰慶)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고 자백하면서, 정경세(鄭經世), 정호선(丁好善), 최유해(崔有海) 등 많은 사람을 끌
어들여 옥사가 성립되었다. 그 뒤에 무고임이 밝혀져서 그 해 3월 10일에 정호선 등 26명을 석방하였다. 《燃藜室記述 卷十九 光
海君故事本末 金直哉之獄》 <끝>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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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吏曹判書李公神道碑銘 幷序
余觀先朝舊臣。當昏穢之日。不被其薙獮。則胥不免於脂韋。而能侃然自靖。不隕其志節。庶幾於哲軌。改玉之初。勳貴滿朝。氣勢頡頏。周章其間。不能無伸屈。而能超然自拔。彌見其操秉。允蹈乎休範者。惟吾師判書李公一人而已。噫。公狀貌不能踰中人。體若不勝衣。言若不出口。常闔戶靜坐。凝塵滿室。湛湛若古井。而遇事輒奮。見義勇趨。至於榮辱夷險。取舍素定。雖賁育有所不能奪焉。則蓋其養之專而發之果也。公生而穎異。異凡兒。莊重喜讀書。爲長德所賞識。稍壯善程文。藉藉場屋間。乙未捷詞科。選補槐院。俄出爲平安道兵馬評事。越三年擢司諫院正言。歷侍講院司書司憲府持平。薦授弘文館修撰校理,知製敎。宣廟方講易。聖學高明。老師宿儒不敢贊一辭。而公每進講。音吐淸暢。講說精當。上亦爲之傾聽。會嶺南儒士疏斥成牛溪渾。醜正之徒傅會其說。乘時逞憾。追論牛溪奪爵名。黃都憲愼辨其誣甚晢。亦坐削黜。執義李成祿,掌令趙翊,閔有慶等繼起而力爭之。公在玉堂。上箚明其是非。遂大忤時議。出爲咸鏡道都事。久之拜持平。臺官擧前事劾之。竝論注擬之誤。爲判書者曾按北路。與公同事。雅服公操履。至是因緘辭盛稱公以辨之。甲辰除寧邊判官。時制閫者恃奧援。號虎而翼。雖嚴憚公頗自戢。而公遂引疾而歸。丙午又出爲銀溪察訪。按廉置公下考。蓋公在臺端。欲論奇自獻事。未遂而語先泄。公之後先挫閼。實以是故也。光海初服。錮臨海于喬桐。公爲縣監。賊臣爾瞻於公爲姻屬也。諷以潛除禍根之意。公怒而不應。輒劾以不謹圉守。逮公于理。事將不測。會遇赦得釋。己酉敍授修撰正言持平。大司憲金玏,掌令朴思齊論執追崇私親之非。被譴外補。公以獻納獨啓爭之。俄有祔廟之命。公同兩司合辭論之。禮官亦據禮力爭。事遂中寢。辛亥鄭仁弘陳疏譏詆退溪,晦齋兩先生。語甚不遜。太學生削仁弘儒籍。光海震怒。將置諸儒于重典。公在玉堂。與諸僚上箚救解。不得請則求外補。銓地以公曾爲本曹郞薦不許。白沙李相國知公意。薦授瑞興府使。壬子金直哉之獄。佹中申慄之螫。竟坐不捕賊罷歸。久之歷司藝掌令。預修宣廟實錄。癸丑丁外艱。乙卯又丁內憂。外除仍處鄕曲。數年不起。己未始就軍資監正。俄轉太常。辛酉例陞通政階。爲分兵曹參議。充槎使。先是使臣多渰沒。人視朝天爲死地。皆以賕免。屢易而及公。公怡然無幾微色。治行戒程。光海嘉奬。陞秩刑曹參判以送。癸亥夏。竣事而回。聖上已反正。徵召耆喆。路拜公司諫院大司諫。又拜司憲府大司憲。甲子錄扈從勞陞嘉義階。歷兵戶禮三曹參判,漢城府左右尹,副摠管。屢拜大司諫大司憲吏曹參判。丁卯扈駕入江都。兼綰備局。遞爲大司成。陪聖廟位版。先還京都。戊辰出按關東。瓜滿拜刑曹參判。轉副提學都承旨。前後兼帶同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壬申仁穆王后陵役完。公以提調。賞加資憲階。歷都摠管知義禁府事漢城府判尹大司憲。銓曹以玉堂長官。宜用重望。啓請罷格。除公副提學。前是膺是數者。唯柳眉巖希春等數公云。遷禮曹判書。丙子拜大司憲。以事自劾免。出寓楊州村舍。冬十二月。淸兵猝至。都下崩潰。公聞變入城。則大駕已幸南漢。虜騎充斥。公由山谷到楊根。號哭於南漢相望之地。招集避亂士夫。結爲義旅。傳檄遠近。諭以大義。應募者數百。屯龍門山。或有勸公移軍僻處。以避賊鋒者。公泣謂曰。固知孤軍在此。無異以肉投虎。誠不忍退縮。爲自便圖也。未幾虜果以輕騎來襲。追至於砥平之境。麾下士梁應治等放砲却賊。俄聞乘輿旋軫。卽奔問闕下。臺官論宰臣之在一日程不爲扈從者罷之。有司不察。混錄公于其中。公無所棲托。轉往關東。止於歙谷縣。誅茅湖曲。爲終焉之計。頃之筵臣白公情迹。上卽命敍用。拜刑曹判書。陳疏待罪。仍不起。秋以吏曹判書徵。公詣都門外。再上章乞免。且陳舍輕趨重之嫌。被上優批。出就職。戊寅春。病移禮曹。兼藝文館提學世子左賓客。庚辰春。又拜吏曹。冬十月。淸將龍骨大等率輕騎數百。奄到灣上。急招領相吏判都承旨諸官。恐喝脅持。烈如雷火。公兼程疾馳七日。赴義州。猶責以違限。蓋以公次子徽祚曾質瀋陽。有嫌難。尤加侵暴。公處之晏如。不動毫髮。彼亦知其不可以威訹。稍加禮敬焉。辛巳公掌禮。會光海訃至。公啓請自內擧哀。百官變服之節。蓋出於從厚之意。而一二人攻之甚力。公避言於郊外。上疏陳辨。屢下溫旨。拜西樞。猶巡逡不出。壬午十月。淸使龍骨大挾世子駐鳳凰城。招宰執。公亦在遣中。入鳳凰城置對。留義州者一月。得釋還。而積𠫷頓撼。到安州始示倦。易簀於平壤旅舍。實是年十二月十二日也。春秋七十。卒之日。起居之節。無異平日。顏色不亂。終不言及家事。訃聞。輟朝二日。弔祭如例。特命沿途護喪。異數也。以癸未二月十九日。葬于長湍府先塋瑞谷里亥坐之原。葬旣踰年。其孫松齡持家牃若益寧洪相國所撰狀。以其父參判公之命。來請曰。神道之石已具。願有述也。辭不獲。則遂爲之述曰。勝國之季。韓山有李穀者。始以文學起家。官至贊成事。號稼亭。諡曰文孝公。其嗣穡。位侍中。封韓山伯。世所稱牧隱先生。其父子制科元朝名振天下。牧隱當大革之際。終始一節。以是韓山之李爲氏族之望。屢轉至大司諫。允蕃。於公爲高祖。曾祖諱貴枝。豐儲倉直長。祖諱希伯。司宰監正。贈吏曹參判。考諱大秀。仕官至郡守。贈議政府左贊成。妣南陽洪氏。贈貞敬夫人。觀察使敍疇之孫。將仕郞礩之女。以萬曆癸酉四月初六日乙卯生公。公諱顯英。字重卿。娶晉州柳氏。高麗上將軍諱珽之後。判決事思規之女。賢有婦德。後公二年而生。先公二十二年而卒。以公貴追封貞夫人。有二男二女。男長曰基祚。吏曹參判。次曰徽祚。縣監。女適察訪黃沔。次適參奉洪重普。側出二女。長適主簿金安道。次適擧人李海岳。參判有四男七女。男曰松齡。監役。次曰星齡。餘幼。女長適士人洪處靖。次適沈若漢。次適金弘振。次適申汝拭。餘幼。徽祚有五男四女。男曰奎齡。餘幼。黃沔有二男二女。男震耇,泰耇。女適士人李相久。次適楊汝纘。洪重普有二男二女。幼。松齡有一男。奎齡有一女。皆幼。參判曾參從勳。用例贈議政府領議政。太常議諡。諡曰忠貞。美而不溢。公資稟甚高。自然近道。孝友節儉。根於天賦。至誠婉篤。老而匪懈。飭躬簡潔。不改布素。平居常對古聖賢書。嘿自收功。一於靜專。不假修爲。動中禮則。至其晩年。彌謹於進退之節。事有不合。則必奉身而退。一時君父之喜怒。權貴之好惡。未嘗詭隨。雖霆轟擊排之際。不動聲色。從容溫克。裁之以理而已。再長天官。銓注之公。近世無比。干謁自屛。門庭如水。屢登枚卜而竟不大拜。人咸惜之。噫。余小子毀齔之年。執業於公門。而墮棄無成。至今髮種種矣。烏足以知公而述公哉。第聞公少時受學於白沙李相國。亦嘗叩質於吾先文貞公相國嘗稱其質美操確。後必大鳴於世。吾先君雅重之。折輩行以進之。李大諫命俊。於人寡許可。而於公深自遜挹。以爲不可及。遂爲知己友。先進之推重公蓋如此云。遂綴以銘。銘曰。
稼牧勃興。冠冕海東。厥傳以九。惟冢宰公。牧老留眞。公實似之。豈惟形肖。惟德之義。夷險著節。不失祖武。其代也今。
其人也古。山高川媚。萬世之藏。有欲攷信。視此銘章。<끝>
樂全堂稿卷之十二 / 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