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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간『郭趕, 1529년(중종 24) ~ 1593년(선조 26)』
조선시대 성균관사성, 공주목사, 강릉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원정(元靜), 호는 죽재(竹齋). 사인 곽지견(郭之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부사 김수돈(金守敦)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550년 형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552년 대동찰방 겸 수은어사(大同察訪兼搜銀御史)로 있을 때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심통원(沈通源)의 짐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모두 뒤져서 불살라버렸다. 이 사실이 관찰사를 통하여 조정에 보고되어 심통원이 파직당하자, 그의 보복이 두려워 미친 사람 행색으로 가장하고 소를 올리는 길로 서울을 떠났다.
그 뒤 10여 년 동안 피신하여 살았으며, 1566년 다시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당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의 부흥을 꾀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언관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그 뒤 공조·형조·예조의 좌랑과 정랑·통례원통례·성균관사성·장악원판사·사제감·종부시정·영천군수·공주목사·강릉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사원(徐思遠)과 함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을 찾아가 싸우다가 김성일이 죽고 진영이 와해되어 돌아오던 중 죽었다. 저서로는 『죽재문집(竹齋文集)』 2권 1책이 있다. 월암사(月巖祠)에 봉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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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사성 죽재 곽공 묘갈명 병서
(成均館司成竹齋郭公墓碣銘並序)
《시경》에 중산보(仲山甫)의 덕(德)을 칭송하여 “강해도 뱉지 아니한다.”라고 하였고, 맹자가 말하기를 “말로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성인(聖人)의 무리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강포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불씨(佛氏)를 통렬히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중산보(仲山甫)의 덕을 지녔고, 성인의 무리가 됨이 분명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고(故) 죽재(竹齋) 곽공(郭公)은 휘가 간(趕)이고 자가 원정(元靜)으로, 태어나면서부터 호방한 자질을 타고났고 문장을 일찍 성취하였으며, 《주역》에 또한 조예가 깊었다. 나이 18세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역임한 이력으로, 내직에서는 곧 공조(工曹). 형조(刑曹). 예조(禮曹)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郎),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장악원 판사(掌樂院判事). 사재감 정(司宰監正).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지나지 않았고, 외직에서는 청풍군수(淸風郡守). 금산군수(金山郡守). 정선군수(㫌善郡守). 흥해군수(興海郡守). 영천군수(永川郡守). 원주목사(原州牧使). 공주목사(公州牧使). 강릉부사(江陵府使)에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다.
공이 대동 승(大同丞)이 되어 수은어사(搜銀御史)를 겸하고 있을 때, 당시의 재상 심통원(沈通源)이 연경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무겁게 싣고 온 짐수레를 압록강(鴨綠江)가에서 불태우고, 치계(馳啟)하여 그의 직분을 파하여 백의(白衣)로 강을 건너게 하였다. 그러고는 대궐에 투소(投疏)한 다음 사모(紗帽)를 뒤집어쓰고 말 위에서 춤을 추며 떠나면서 거짓으로 미친척하여 화를 피하였던 것은 이미 보통 사람보다 매우 뛰어난 용기였다.
10여 년 뒤에야 비로소 전적(典籍)에 제수될 수 있었다. 전적은 언론의 책임을 맡은 직이 아니었지만, 자전『慈殿, 문정왕후(文定王后)』이 불교를 숭상하고 믿어서 양종(兩宗)의 명을 내리자, 임금부터 곡진히 따르시기에 이르는 것을 보고, 공이 항소(抗疏)하여 말하기를, “불교는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니,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국가를 재앙에 빠뜨림이 심합니다.
예로부터 불교를 숭상하고 믿는 독실함이 양(梁)나라 무제(武帝)와 고려 공민왕(恭愍王) 같은 경우가 있지 않았지만, 혹 굶주려 죽는 지경에 이르렀고, 혹나라를 망하게 하였습니다. 전하의 광명(光明) 정대(正大)한 정교(政敎)와 호령(號令)으로 양종의 명을 어찌하여 오늘에 갑자기 내리시는지요?.
더구나 양종의 설치는 곧 조종(祖宗)께서 뒤늦게 후회하신 것인데, 따라 지키고자 하심이 옳겠습니까. 지금 군액(軍額)이 날로 줄어드니 진실로 마땅히 구제할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나라 안에 승려의 무리들이 몇십 만인지 알지 못하니, 모두 환속(還俗)하여 농부로 돌아가도록 한다면 다만 군액을 충당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옛날에 이른바 ‘그 사람들을 사람으로 만들고, 그 거처를 보통 사람의 집으로 만든다.’라는 것이 이를 말함이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에게 세 번 간(諫)해도 들어주지 않거든 목놓아 울면서 따르고 허물이 없기를 기약하는 것은 곧 효(孝)입니다. 대개 자전(慈殿)의 허물은 곧 전하의 허물입니다. 전하께서 자전에게 유혹되지 마시고, 반드시 대순(大舜)이 점점 다스렸던 것으로 모범을 삼으신다면 자전의 마음을 돌리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글은 올렸지만 끝내 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이 시무(時務)에 마땅한 점이 있을 뿐만이 아니었으니, 임금을 인도하고 이단을 물리친 엄함이 과연 어떠하였던가. 오호라!, 이렇듯이 강하고 바름으로써 가령 조정에 우뚝 서서 바로잡고 보좌하는 직책을 맡았더라면 분명하고 우뚝하게 수립함이 마땅히 여기에 그치지 않았을 텐데, 끝내 어쩔 수 없이 견책을 당하였으니, 어찌하랴.
곽씨(郭氏)는 현풍(玄風)을 본관으로 하였으니, 고려 시대 금오위 교위(金吾衛校尉) 자의(子儀)가 비조(鼻祖)이다. 조선에 들어와 판사재감(判司宰監) 경(瓊)과 의영고사(義盈庫使) 득종(得宗)이 5, 6세조가 된다. 고조는 휘가 안방(安邦)이니 군사(郡事)를 지냈고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증조는 휘가 승화(承華)이니 진사이며, 김한훤(金寒暄)과 더불어 점필재(佔畢齋)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김. 곽 양 수재(金郭兩秀才)’라고 칭찬을 받았다. 조(祖)는 휘가 모(某)이니 현감을 지냈고 좌통례(左通禮)에 증직되었다. 고(考)는 휘가 지견(之堅)이고, 비(妣)는 상산김씨(商山金氏)이니 부사(府使) 김수돈(金守敦)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기축년(1529, 중종 24)에 태어나 계사년(1593, 선조 26)에 졸(卒)하였으니, 향년 65세이다. 선영(先塋)을 따라 본현(本縣) 구지(九池)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니 감찰(監察) 박순(朴純)의 따님이다.
아들 재용(再容)은 장사랑(將仕郞)을 지냈고, 재정(再定)은 참의(參議)에 증직되었으며, 딸은 승지(承旨) 이언영(李彥英)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의 아들은 순생(舜生)이고, 딸은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의 첩이 되었다. 재용은 아들이 넷이니 집(㠎), 추(崷), 인(嶙), 겸(岒)이다.
재정은 생원 인(嶙)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집은 아들이 넷이니, 생원 홍재(弘栽), 홍식(弘埴), 홍원(弘垣), 진사 홍장(弘章)이다. 추는 아들이 둘이니, 홍기(弘基), 홍해(弘垓)이다. 인은 아들이 셋이니, 지평(持平) 홍지(弘址), 홍도(弘堵), 생원 홍규(弘圭)이다. 겸은 아들이 둘이니, 홍연(弘埏)과 홍채(弘埰)이다.
하루는 공의 후손 무(堥)가 두와(蠧窩) 최흥벽(崔興璧)이 찬술한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공의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내가 일찍이 김동강(金東岡) 사우록(師友錄)을 보니, 공은 동강 및 정 문목(鄭文穆), 최수우(崔守愚) 등 여러 현인들과 맺은 교분이 매우 돈독하였다. 또 듣건대, 공은 낙동강가에 정자 하나를 지어 창주(滄洲)라 이름하고, 날마다 그곳에서 술 마시고 시를 읊조리며 물고기, 두꺼비와 즐거이 짝이 되었다고 하니, 그 수양한 바의 바름과 스스로 터득한 지취(志趣)를 대개 상상해 볼 수 있다. 나는 공이 평소 곧은 도를 행하여 구애된 바가 없었던 이유가 이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해]
[주01] 강해도 뱉지 아니한다: 《시경》 〈증민(烝民)〉에 “중산보의 덕이 유순하고 아름다워 법이 되도다.……부드러워도 삼키지 아니하고,
강해도 뱉어 내지 아니하나니, 홀아비와 과부를 업신 여기지 않고, 강포한 자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누나.[仲山甫之德, 柔嘉維則.
……柔亦不茹, 剛亦不吐, 不侮矜寡, 不畏彊禦.]”라고 하였다. 언론(言論)이 꼿꼿하여 강포한 자에 대해서도 겁내지 않고 탄핵할
것이라는 뜻이다.
[주02] 말로 …… 무리이다: 맹자가 한 말로, 원문은 “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이다. 《孟子 滕文公下》
[주03] 심통원(沈通源): 1499~1572.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용(士容), 호는 욱재(勗齋)이다. 좌승지, 경상도 관찰사, 예조참판, 좌
의정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551년(명종 6) 권력 남용과 뇌물을 받은 혐의로 삼사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
다.
[주04] 심통원(沈通源)이 …… 하였다: 최흥벽(崔興壁)이 지은 곽공의 행장에 “임자년(1552, 명종 7)에 외직으로 나가 대동찰방이 되어
수은어사를 겸하였다. 당시 재상 심통원이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짐수레가 성대하여 도로를 요란하게 하자, 공이 즉시 나가 그
짐을 수색하여 압록강 가에서 다 불살랐다.……심통원이 마침내 파직을 당하여 백의로 압록강을 건너니 조야의 사람들이 모두 칭찬
하고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심통원의 유감은 뼈에 사무쳤을 것이니, 척신의 세력에 의지하여 반드시 몰래 중상함이 있을 것이다. 공은 벗어나지 못할 줄
알고 대궐에 투소하고 나서 광화문 앞에서부터 사모를 거꾸로 쓰고 말 위에서 춤을 추며 떠났으니, 대개 거짓 미친 행태로 스스로 피
하였던 것이다.[壬子出爲大同察訪, 兼搜銀御史. 時相沈通源赴京還, 盛輜重攪擾道路, 公卽出而搜其裝, 盡焚之於鴨綠江頭.
……通源遂見罷, 以白衣越江, 朝野皆稱快, 而其憾則已次骨矣. 藉戚畹勢, 必欲有以陰中之. 公知不免, 卽投䟽闕下, 自光化門
前, 倒著紗帽, 手舞馬上而去, 盖佯狂以自避也.]”라고 하였다. 《蠹窩集 卷14 竹齋郭公行狀》
[주05] 양종(兩宗)의 명: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이미 양종(兩宗)의 선과(禪科)를 복구하고 원각사를 다시 세우려 하였다. 양종은 선종(禪
宗)과 교종(敎宗)을 말한다.
[주06] 굶주려 …… 이르렀고: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처음에는 도교(道敎)와 불교(佛敎)를 모두 믿다가, 나중에는 도교를 버리고 오로
지 불교를 독신(篤信)하여, 수백 권의 불서(佛書)를 짓고 불경(佛經)을 강론하며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여는가 하면, 동태사(同泰
寺)에서 사신(舍身)과 속신(贖身) 공양(供養)을 한다면서 정사를 돌보지 않고 억대의 재화를 낭비하다가 끝내는 후경(侯景)의 난
을 당해 굶어 죽었다. 《梁書 武帝本紀》
[주07] 나라를 망하게 하였습니다: 《태종실록》에 “공민왕은 부처 섬기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여, 처음에는 보허로 스승을 삼고, 뒤에는 나
옹으로 스승을 삼아, 운암사를 지어 항상 백명의 중을 기르고, 연복사를 수리하여 해마다 문수회를 베풀었다.
보허와 나옹은 모두 사리가 있고 득도하였다고 칭하였으나, 공민왕의 화를 구제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恭愍王事佛尤勤, 初以普虛爲師, 後師懶翁, 作雲庵寺, 常養百僧, 修演福寺, 歲設文殊會. 普虛懶翁俱有捨利, 號稱得道, 無救
恭愍之禍, 卒以亡國.]”라고 하였다. 《太宗實錄 5年 11月 21日》
[주08] 그 사람들을 …… 만든다: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 “이단의 사람들을 사람으로 만들고, 그 읽는 책을 불살라 없애고, 그 거처
를 보통 사람의 집으로 만들어 선왕의 도를 밝혀 그들을 인도하면 홀아비, 과부, 고아, 늙어 자식 없는 이, 병든 이들을 봉양할 수 있
다.[人其人, 火其書, 廬其居, 明先王之道, 以道之, 鰥寡孤獨廢疾者, 有養也.]”라고 한 데서 가져왔다. 《古文眞寶 後集》
[주09] 자식이 …… 따르고: 《예기(禮記)》 〈곡례 하(曲禮下)〉에, “자식이 어버이를 섬김에 세 번 간해도 들어주지 않거든 목놓아 울면서
따른다.[子之事親也, 三諫而不聽, 則號泣而隨之.]”라고 한 말에서 가져왔다.
[주10] 대순(大舜)이 …… 것: 《서경》 〈요전(堯典)〉에, 요(堯) 임금이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자, 사악이 말하기를, “소경의 아들이니, 아
버지는 완악하고 어머니는 어리석으며 아우 상은 오만한데도 능히 효로 화하게 하여 점점 다스려져서 간악한 데에 이르지 않게 하였
습니다.[瞽子, 父頑母囂象傲, 克諧以孝, 烝烝乂, 不格姦.]”라고 하였다.
[주11] 조정에 우뚝 서서: 원문은 ‘악립조단(鶚立朝端)’으로, 후한(後漢) 때 공융(孔融)이 예형(禰衡)을 추천하면서 “사나운 새가 수백 마
리 있어도 한 마리의 독수리보다 못하니, 예형을 조정에 세우면 필시 볼 만한 점이 있을 것이다.[鷙鳥累百, 不如一鶚, 使衡立朝,
必有可觀.]”라고 말한 데서 가져왔다. 《後漢書 禰衡列傳》
[주12] 의영고사(義盈庫使): 의영고는 조선 시대 궁중에서 쓰이는 기름ㆍ꿀ㆍ과일 등의 물품을 관리하던 관서이다.
[주13] 김한훤(金寒暄): 김굉필(金宏弼, 1454~1504)로,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ㆍ한훤당(寒暄堂), 시호
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평생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다. 갑자사화 때 극형에 처해
졌다.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저서로는 《경현
록(景賢錄)》, 《한훤당집(寒暄堂集)》, 《가범(家範)》 등이 있다.
[주14]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무오사화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
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佔畢齋集)》, 《청구풍아(靑丘風雅)》 등이 있다.
[주15] 조(祖)는 휘가 모(某)이니: 최흥벽(崔興璧, 1739~1812)이 지은 〈죽재곽공행장〉에 “조는 휘가 위이고 현감을 지냈으며 좌통례에
증직되었다.[祖諱瑋縣監, 贈左通禮.]”라고 하여, 조부의 휘가 위(瑋)임을 알 수 있다. 《蠹窩集 卷14 竹齋郭公行狀》
[주16] 두와(蠧窩) …… 행장: 최흥벽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교(士敎), 호는 두와ㆍ국옹(菊翁)ㆍ국전(菊田)이다. 최흥원(崔興遠,
1705~1786)과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두와집(蠹窩集)》이 있다. 곽간(郭趕)의 행장은 《두와집》
권14에 실려 있다.
[주17]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관
직은 대사헌, 이조 참판을 지냈다. 1589년(선조22) 기축옥사 때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 때에 석방되었다. 저서로는 《동강집(東
岡集)》, 편저로는 《경연강의(經筵講義)》 등이 있다.
[주18] 정 문목(鄭文穆): 정구(鄭逑, 1543~1620)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이다. 조식, 이
황의 문인이다. 공조 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한강집(寒岡集)》이 있다.
[주19] 최수우(崔守愚): 최영경(崔永慶, 1529~1590)으로,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다. 조식의 문인
으로,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1584년(선조17) 교정청 낭관(校正廳郞官)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
의 교정에 참여하고 곧 낙향하였으나, 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 때 무고로 국문 도중에 옥사하였다. 그 후 신원되어 대사헌에 증
직되고, 진주 덕천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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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成均館司成竹齋郭公墓碣銘 並序。
詩稱仲山甫之德曰剛亦不吐。孟子曰能言拒楊墨者。聖人之徒也。今有能不畏彊禦。而又痛闢佛氏者。則斯可謂有仲山甫之德。而爲聖人之徒審矣。故竹齋郭公諱趕字元靜。生而天質豪邁。文章夙就。於易又深。年十八擢第。所履歷內則不過工刑禮三曹佐正郞,通禮院通禮,成均館司成,掌樂院判事,司宰監宗簿寺正。外則不過淸風,金山,㫌善,興海,永川郡守,原州,公州牧使,江陵府使而已。當其爲大同丞兼搜銀御史也。焚時相沈通源赴京回輜重於鴨綠江頭。馳啓罷其職。使以白衣越江。卽投䟽闕下。而倒着紗帽。舞馬上以去。佯狂避禍者。已是大過人之勇。後十餘年。始得除典籍。典籍非任言責者。見慈殿崇信佛敎。至下兩宗之命。而自上曲從之。公抗䟽言佛無父無君。陷人心禍國家甚。自古崇信之篤。莫有如梁武帝麗恭愍。而或至餓死。或以亡國。以殿下光明正大之政敎號令。兩宗之命。奈何遽下於今日也。况兩宗之設。乃祖宗之所追悔。而欲遵守之可乎。今軍額日縮。誠宜有以救之。然國中緇髡之徒。不知其幾十萬。皆令還俗歸農。則不徒軍額之得充而已。古所謂人其人廬其居者。非此之謂乎。子之於父母。三諫而不聽則號泣以隨之。期於無過者乃孝也。夫慈殿之過。卽殿下之過。殿下毋諉於慈殿。必以大舜之烝烝乂爲法。則回聽不難矣。書上竟不報。然其言非獨有當於時務。其引君闢異之嚴。果如何哉。嗚呼。以若剛正。鄕使鶚立朝端。以任匡輔之職。則其犖犖樹立。宜不止此。而終無奈見枳何哉。郭氏出玄風。勝國時有金吾衛校尉子儀爲鼻祖。入本朝判司宰監瓊。義盈庫使得宗。爲五六世祖。高祖諱安邦郡事。選淸白。曾祖諱承華進士。與金寒暄遊佔畢門。見稱以金郭兩秀才。祖諱某縣監贈左通禮。考諱之堅。妣商山金氏。府使守敦之女。公以嘉靖己丑生癸巳卒。壽六十五。從先兆葬於本縣九池壬坐原。配密陽朴氏。監察純女。男再容將仕郞。再定贈參議。女李彥英承旨。側室男舜生。女學諭朴思齊妾。再容四男㠎,崷,嶙,岒。再定取嶙爲嗣生員。㠎四男弘栽生員,弘埴,弘垣,弘章進士。崷二男弘基,弘垓。嶙三男弘址持平,弘堵,弘圭生員。岒二男弘埏,弘埰。日公之後孫堥。以崔蠧窩興璧所撰狀示余。屬銘公墓。銘曰。
吾嘗觀金東岡師友錄。公與東岡曁鄭文穆崔守愚諸賢。交契甚篤。又聞公築一亭於洛水之上。名之曰滄洲。日觴詠其中。樂與魚蝦爲儔。其所養之正。自得之趣。槩可想已。吾知公生平所以直道行而無所拘者。其以是歟。<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