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해 한용운 卍海 韓龍雲
(1879 8 29~1944.6.29)
오늘 6월 29일은 만해선사(萬海禪師) 한용운(韓龍雲)이 입적한 날이다. 1944년이니 올해로 76주년이다.
외설악의 대표적 명찰이 신흥사(神興寺)라면 내설악에서는 백담사(百潭寺)가 그렇다. 백담사는 만해선사 한용운이 출가하여 처음으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곳이며, 뒷날 일제시대 불교계에 일대 폭탄선언이었던 <조선불교유신론>과 근대 한국 문학사에서 불후의 걸작으로 꼽히는 <님의 침묵>을 집필하던 역사적 산실(産室)이다.
만해선사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참으로 빛나는 발자취를 남긴 거인이요 민족의 참된 스승이었다. 그는 중생불교를 위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현대화에 앞장선 선승(禪僧)이었으며,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대의 질곡 속에서 열화 같은 투쟁정신으로 3ㆍ1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한 만해는 겨레의 설움과 아픔을 다정다감한 시어(詩語)로 어루만져준 탁월한 민족시인이기도 했다.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의 만해의 사생관은 말과 행동이 똑같이 서릿발처럼 차갑고 매서워 한평생 ‘님’을 향한 그 지조와 기개가 변할 줄 몰랐다.
“사람은 많으나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니라. 의리를 저버리고 지조를 변한 사람은 의식 불구자요, 자주 정신을 망각하고 민족을 반역한 사람은 개만도 못하다.”
일제에 정신을 팔아먹은 변절자들을 향한 만해의 질타는 이토록 추상과도 같았다. 비록 나라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바친 그에게 돌아온 것은 죽을 때까지의 가난과 고독과 핍박이었지만 만해선사의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불멸로 이어지는 위대한 민족정신을 남겼으니 그것이 곧 만해의 부처요 만해의 중생인 ‘님’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8㎞. 만해선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오르는 20리 백담계곡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단풍의 바다였다. 굽이마다 펼쳐지는 울긋불긋한 단풍의 물결은 너울너울 넘실대며 소리치는 찬란한 빛의 교향시와도 같았다. 아니, 그것은 물결이 아니라 차라리 뜨거운 불길이었다. 나무도 불타고 바위도 불타고 물도 불타고 온 산과 계곡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생사의 수레바퀴에 깔리고 인생의 고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 부족한 후생의 눈에 비쳐든 설악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 굽이 산길을 돌 때마다 온갖 원색의 파도가 저마다 함성을 올리듯 사방에서 몸을 떨어대고, 기암과 괴석 사이로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맑디맑은 계류수는 때로는 졸졸 속삭이기도 하고 때로는 소리꾼처럼 콸콸 촤르르 소리를 뽑는가 하면, 이 산 저 봉우리 그윽한 단풍의 숲 사이를 헤치며 노래하고 춤추고 파르르 날아다니는 멧새들과, 꼬리를 동그랗게 만 채 또르르 굴러가듯 달음질치는 다람쥐들은 내설악 백담계곡의 풍광을 더할 나위 없는 선경으로 꾸며주고 있는 듯하다.
하나, 지난날 만해선사가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첨벙첨벙 걸어서 건넜을 이 개울 저 개울에 이제는 멋없는 시멘트 다리가 가로놓여 오랜 비경의 시정(詩情)을 망가뜨려 버렸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만해가 출가하여 처음으로 사문의 옷으로 몸을 감싸던 곳, 원효성사(元曉聖師)의 불교 대중화 정신을 잇고 사상의 뿌리를 내려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던 곳, 시심의 꽃을 피워 <님의 침묵>을 탈고하던 역사의 현장 백담사.
뒷날 만해가 지은 <백담사사적기>에 따르면 이 절은 647년(진덕여왕 1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설악산 한계리에 절을 세우고 아미타상 3위를 조성 봉안하여 한계사(寒溪寺)라고 한 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계사는 불과 50년 뒤인 690년(신문왕 10년) 화재로 불타 없어져 그곳에서 30리쯤 떨어진 곳에 새 절을 짓고 운흥사(雲興寺)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에도 소실과 재건과 개명의 역사는 여러 차례 되풀이된다. 운흥사가 소실되자 다시 60리 떨어진 곳에 심원사(深源寺)를 지었고, 이 절이 소실되자 30리 떨어진 곳에 선구사(旋龜寺)를 세웠으며, 이 절이 불타자 다시 10년 뒤에는 옛 한계사 옆에 영취사(靈鷲寺)를 지었다. 그리고 영취사마저 소실되자 상류 20리 지점에 새 절을 짓고 백담사라고 개칭했다.
백담사라는 절 이름에는 이런 전설이 서려 있다. 절을 짓기만 하면 불이 나고 타서 없어지기에 불안해하던 어느 날 밤 주지의 꿈에 백발노인 한 분이 나타나더니 “대청봉에서 절까지 담(潭)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라.”고 이르고는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주지가 이튿날 아침 시킨 대로 담을 세어보니 꼭 100개였다. 그래서 절 이름을 백담사라고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에도 화재는 계속 났다. 1775년(영조 51년) 큰불로 백담사가 또 불타 없어지자 최붕(最鵬) 스님이 중건하여 심원사(尋源寺)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며, 1783년(정조 7년)에 중건하고 다시 백담사로 환원했는데 130여년이 지난 1915년에 또다시 화재로 전소해버렸다. 현재의 백담사는 1919년 4월 당시의 주지 인공선사(印空禪師)가 재건하여 이후 계속 중건 보수해왔다고 한다.
백담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경내에 1995년에 착공하여 2년 6개월 만인 1997년 11월에 완공 개관한 만해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에는 <님의 침묵> <조선불교유신론> 같은 만해의 작품 10여 권의 원본과 친필 등 110점의 유물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만해와 관련된 논문 작품 등 710점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이보다 앞선 1991년 6월 29일에는 만해선사 입적 47주기를 맞아 그의 시 ‘나룻배와 행인’ ‘오도송(悟道頌)’ 두 수를 새긴 추모시비가 세워졌다.
만해선사는 1879년(고종 16년) 8월 29일에 충남 홍성에서 청주 한씨(淸州韓氏) 응준(應俊)과 온양 방씨(溫陽方氏)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유천(裕天)이며 자는 정옥(貞玉)이었다. 만해(萬海 ․ 卍海)는 입산한 뒤의 법호요 법명은 용운(龍雲), 김연곡(金連谷) 화상으로부터 수계시의 계명은 봉완(奉玩)이었다. 뒤에 환속해서는 성북학인(城北學人)ㆍ목부(牧夫)ㆍ실우(失牛) 같은 아호를 쓰기도 했다.
그의 증조부 광후(光厚)는 정이품 무관직인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조부 영우(永祐)는 종사품인 훈련원첨정을 했으며 부친도 종오품인 충훈부도사를 지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만해의 굽힐 줄 모르는 불같은 성품은 집안 대대로 내려온 무골 기질에서 연유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출생지에 관해서는 홍성은 틀림없는데 몇 군데로 이설이 있다. 뒷날 3ㆍ1운동으로 재판을 받을 때에 조서에는 홍성군 홍성면 남문리라고 했는데, 망우리 묘소의 비문에는 홍성읍 오관리 591번지로 되어 있고, 이 밖에도 홍성군 서부면 남당리, 또는 결성면 성곡리 등으로 전해져 오다가 최근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의 생가가 복원되고 충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됨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어쨌든 홍성 사람들은 만해선사를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선생,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더불어 이 고장이 낳은 위대한 인물로 추앙하며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만해는 생전에 자신의 출신 내력에 대해 밝힌 적이 없으므로 그의 유년기와 소년 시대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몸집은 작았으나 어렸을 적부터 힘이 세고 담력이 컸으며 또한 총명이 비상해 신동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진도가 매우 빨라서 <동몽편>과 <소학>을 금세 떼고 편년체의 중국 역사서인 <통감>까지 독파했으며 일곱 살 때에는 사서삼경까지 두루 섭렵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 <대학>을 읽을 때 훈장이 옆에서 보니까 책에 붓으로 지운 자국이 많기에 이렇게 물었다.
“유천아. 네 책에 웬 먹물 자국이 그렇게 지저분하게 많은고?”
“예, 스승님. 이 정자(程子)의 주(註)가 제 마음에 들지 않기에 지워버렸구먼유.”
만해도 조혼하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열네 살 때 경주 김씨(慶州金氏) 정숙(貞淑)에게 장가를 들었다. 이들 사이에서는 외아들 보국(保國 : 輔國)이 태어났는데 그는 1948년 어머니가 작고할 때까지 홍성에서 모시고 가난하게 살다가 6ㆍ25때 좌익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만해의 혈육은 뒷날 재혼한 부인 유숙원(兪淑元) 여사(1965년 작고)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한영숙(韓英淑)이 유일하게 남아 남편과 함께 만해가 만년에 기거하던 서울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을 지켰다.
성혼을 한 만해는 처가를 오가며 더욱 한학에 정진하였고 열여덟 살에는 학동들을 모아놓고 훈장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 스물다섯 살이 되던 1903년까지 그의 행적은 분명하지가 않고, 가출에 이은 출가 동기도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만해가 집을 떠나 수행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04년 12월 21일 아들이 태어난 지 사흘 만이라는 설과 그 직전이라는 설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임중빈(任重彬)의 <만해 한용운>에 나오는 이야기요, 후자는 만해 자신의 기록이니 아마 본인의 말이 맞을 것이다. 임씨의 전기에는 만해가 부인 김정숙이 아들을 낳은 뒤 배가 아프다고 하자 불수산을 지어 오겠노라고 나간 뒤 그 길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고, 만해의 기록은 그가 1930년에 발표한 ‘남 모르는 나의 아들’이란 글에서 밝힌 내용이다.
- 그런데 내가 지금 별안간에 아들 이야기를 하면 혹 그 동안에 무슨 파계를 한 일이 있었는가 하고 오해를 하는 이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요, 실상은 내가 승려가 되기 이전 즉 속인시대에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나는 원래 충남 홍성 사람으로 구식 조혼 시대에 일찍 장가를 들고 19세 때에 어떤 사정으로 출가를 하여 중이 되었는데 한 번 집을 떠나면 승속(僧俗)이 격원(隔遠)하여 집의 소식까지도 자세히 알지 못하고, 다만 전편(傳便)으로 내가 출가할 때에 회임 중이던 아내가 생남하였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연전 기미시대(己未時代)에 나의 이름을 세상에서 많이 알게 되니까 시골에 있던 아들아이도 내가 저의 친부라는 것을 알게 되어 서울로 찾아와 소위 부자가 초면 상봉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한 집에 데리고 있게는 못 되고 경향(京鄕)이 낙락(落落)하게 피차 각거하니 남들이 나의 아들이 있는 것도 잘 알지 못하게 되었다. 나도 또한 누구에게나 그런 이야기를 별로 한 적이 없다. -
어쨌든 만해는 무자비하다 싶을 만큼 철저하고도 모질게 이승의 인연을 끊고 출가를 단행하였다.
처음 백담사에 들어간 만해는 바로 스님이 된 것이 아니라 물 긷고 땔감 해오고 불 때며 잡일하는 부목한이 노릇을 맡았다. 몸집이 작고 나이는 들었으나 힘이 장사여서 남보다 몇 배나 되는 나뭇짐을 지고도 끄덕 않고 묵묵히 일 잘하는 만해를 스님들은 모두 좋아하였다.
만해는 나무 하고 불 때고 청소하는 틈틈이 불경을 읽고 심오한 불법의 경지에 한발 한발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얼마 뒤 부목한이에서 처사로 승격된 만해는 본격적으로 불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천부적인 재능으로 일정한 스승이 없이 독학하다시피 하면서도 남들보다 훨씬 깨우침의 진도가 빨랐다. 이를테면 보통 학승들도 팔만대장경을 한 차례 읽는 데에는 3년이나 걸린다는데 만해는 불과 1년 반밖에 걸리지 않고 독파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철주야로 불법의 진리를 터득하고 해박한 선지식을 쌓을 수 있었기에 뒷날 동아일보 주필이던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가 “내 이미 팔만대장경을 다 보았느니라.”고 호언하자 대뜸 이르기를 “에이, 고하가 보았다는 것은 그냥 쌓아둔 것을 보았다는 말이겠지.” 하여 함께 있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등으로 하여금 한바탕 웃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만해는 1905년 1월 26일에 백담사에서 연곡화상으로부터 계를 받고 정식으로 불문에 입도했다. 처음 출가 삭발하면 사미승이 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만해는 나이가 든 데다 이미 경전을 섭렵하여 쌓은 지식이 많았으므로 대번에 250 비구계를 받았다.
그 뒤 만해는 외금강 신계사(神溪寺)로 당대의 고승 서진하(徐震河) 대사를 찾아가 교학의 가르침을 받고 돌아와 오세암(五歲庵)에 머물며 구법 수행에 용맹정진한 결과 어느 날 선정(禪定) 끝에 마침내 대오 대각하여 이런 ‘오도송’을 남기게 되었다.
男兒到處是故鄕 사나이 이르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幾人長在客愁中 몇몇이나 오랫동안 나그네로 지냈는가.
聲喝破三千界 한 소리 크게 외쳐 우주를 갈파하니
雪裡桃花偏偏紅 눈 속의 복사꽃도 빨갛게 나부끼네.
만해가 깨우침을 얻은 오세암은 백담사에서 영시암과 만경대를 거쳐 약 10㎞ 거리인 마등령을 오르면 나타난다. 본래 오세암은 자장율사가 선방(禪房)을 짓고 머무르며 관음보살을 친견하려고 기도하던 곳이라 하여 처음에는 관음암이라고 불렀는데 언제 누가 먼저 오세암이라고 개칭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오세암은 ‘신동 김오세’로 이름 떨쳤던 설잠선사(雪岑禪師)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한때 은거하던 곳이고, 뒷날은 만해가 머물며 참선 수행하던 뜻 깊은 역사적 고찰로서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르내리며 불도에 정진하던 만해는 고성 건봉사(乾鳳寺)와 양양 낙산사(洛山寺), 안변 석왕사(釋王寺) 등에도 오가며 머물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틈틈이 글로 쓰기도 했지만 아직 세상에 발표하지는 않았다.
만해가 일본에 다녀온 것은 그의 나이 서른 살이 되던 1908년 3월부터 10월까지였다. 나라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려는 적국의 형편을 실제로 찾아가서 한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고 여겼음인지 훌쩍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왔는데 뒤에 3ㆍ1운동을 함께 일으킨 최린(崔麟)을 처음 만난 것도 그때였다. 당시 최린은 도쿄의 한국 유학생 대표였다. 만고의 열혈남아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 역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총살한 것이 바로 그 이듬해인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귀국한 만해는 동래 범어사(梵魚寺)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가 박한영(朴漢永)ㆍ전금파(全錦坡) 스님 등과 조선 불교를 위해 힘을 합치기로 결의하기도 했지만, 쓰러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한두 사람 영웅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어서 1910년 8월 29일에 이 나라는 마침내 망국의 치욕인 경술국치를 당하고 말았다.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 것이 바로 그해였다. 수년에 걸쳐 구상하고 집필해오던 이 원고를 백담사에서 탈고를 했으나 발표하기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13년 5월 25일 불교서관을 통해 간행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나라가 망해버리자 만해는 팔짱만 끼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다시 행장을 꾸려 만주로 건너갔다. 만주에는 이미 먼저 건너간 이시영(李始榮)ㆍ이동녕(李東寧)ㆍ박은식(朴慇植)ㆍ김동삼(金東三) 같은 우국지사들이 자리잡고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만해는 그들과 힘을 합쳐 회인현 소야하에 의병학교를 세워 젊은 독립투사들을 기르기도 하고, 다른 지역의 독립군부대를 찾아다니며 격려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 만난 대동청년단의 김동삼과는 이후 죽을 때까지 떨어질 수 없는 친분을 쌓았다.
뒷날 김동삼이 왜놈에게 붙잡혀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쓸쓸히 세상을 뜨자 만해 홀로 나서서 그의 유해를 인수, 심우장 자기 방에 모셔놓고 5일장을 지냈다. 그리고 왜놈이 경영하는 홍제동 화장터를 마다하고 조선인이 운영하는 미아리 화장터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영결식장에서 만해는 대성통곡을 했다. 만해가 우는 것을 사람들은 그때 처음으로 보았다고 한다.
만주에서 돌아와 발표한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그때까지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조선 불교계에 폭탄선언과 같은 큰 파문을 던졌다.
당시 우리나라 불교계의 실상은 말이 아니었다. 군국주의 일제를 앞세우고 이 땅에 건너온 일본의 각 종파가 저마다 조선 불교계를 장악하여 좌지우지하고자 앞 다투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당시 해인사 주지인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꼭두각시가 되어 이른바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이란 것을 세우고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 불교를 통째로 왜놈들에게 예속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만해는 불같이 노했다. 친일 매국 사이비 불교도의 뿌리를 뽑고 고사의 위기에 처한 민족 불교를 구하기 위해 만해는 힘차게 떨쳐 일어섰다. 그는 1911년 1월 15일 순천 조계산 송광사(松廣寺)에서 박한영ㆍ진진응(陳震應)ㆍ김종래(金鍾來)ㆍ장금봉(張錦峰) 스님 등과 함께 대규모 승려 궐기대회를 열고 이회광 일파의 음모를 폭로 규탄하였다. 그리고 원종에 대항하여 임제종(臨濟宗)을 세우고 임시 관장서리에 선암사(仙巖寺)의 장로 김경운(金擎雲) 스님을 추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을 앞장서서 실질적으로 지도한 사람은 당시 33세의 만해였다.
만해는 임시 관장서리의 자격으로 지도자들과 함께 범어사로 가서 임제종 총무원을 설립하고 영남ㆍ충청ㆍ경기를 거쳐 서울까지 임제종의 포교망을 확충하니 그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바야흐로 청년 스님 만해가 조선 불교, 민족 불교의 지도자로 나선 일대 쾌거였다.
아아, 하지만 어찌하랴! 나라가 망하고 말았으니. 나라가 있고서야 제 땅에서 중 노릇을 해도 할 것이 아닌가. 한동안 통탄과 절망 사이를 헤매던 만해는 그렇게 해서 만주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만주에서 돌아와 35세 때인 1913년에 발표한 <조선불교유신론>은 만해의 불교 대중화, 근대화 운동의 이념을 담은 사자후였다. 그는 보살행과 자비행의 대승불교 실천을 위해 중생의 바다에 거침없이 뛰어들어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민족 불교를 깨우려 했던 것이다.
만해는 그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일찍이 불교를 유신할 뜻을 품고 마음속에 그려보았으나 다만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한 개 무형의 불교, 그 새로운 세계를 구구하게 글자로 엮어서 스스로 적막을 위로한다. 저 매화나무를 바라보고 잠깐 갈증을 면하는 것도 또한 숨을 돌리는 방법일 것이다. 이 유신론이야말로…… -
즉 자신의 불교 개혁론이 곧 자신의 몸을 태우는 불이요 갈증을 면하는 매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불교 유신이란 무엇인가. 만해는 이렇게 덧붙였다.
- 유신이란 무엇이냐.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 천하에 어미 없는 아들은 없다고들 해도 파괴 없이 유신이 없다는 사실은 간혹 알지 못한다. 어찌 서로 비교하는 배움에는 그리도 어두울 수가 있는가? -
낡은 것을 쳐부수고 그 터전에 새로운 가치 질서의 체계를 세우자는 만해의 불교 개혁론의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첫째, 소극적인 면으로는 조선 불교가 처한 비종교적․비합법적․비시대적․비사회적이며 토속적․미신적 구습의 폐악을 타파할 수 없으니 이런 썩어빠진 신앙의 정신 풍토부터 철저하게 때려 부수자는 것이다. 둘째, 적극적인 면으로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순수한 신앙의 윤리 질서를 확립하여 부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구현하자는 것이다. 셋째, 건설적인 면에서 시대의 변화에 따르고 사회적 요청에 맞추어 불교 대중화의 뿌리를 내리자는 것이다.
만해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산중의 불교에서 시중의 불교로 과감히 변모해야 하며, 염불당을 헐고 칠성각 산신각 따위도 없애며, 예불의식을 간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한 가지 찬반 양면에서 극단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대목이 있었으니 그것은 승려의 취처 문제였다. 즉 중도 아내를 데리고 살 수 있도록 하자는 매우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많은 오해가 뒤따랐지만 이는 구태의연한 겉치레나 형식주의를 싫어한 만해가 중생제도를 위한 포교의 방편으로서 승려의 취처를 허용하여 색욕의 미망에 빠지는 것을 막고 시대적 조류에 부응하자는 순수한 뜻에서 주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법은 대처 ․ 육식을 허용하는 일본 불교와 같은 맥락이란 뜻에서 보수적인 노장 불교 지도자들로부터 맹렬한 지탄을 받았다.
특히 박한영 스님 같은 개혁파의 동지로부터도 이런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지옥이란 게 없다고 하면 모를까, 있다면 자네 같은 사람이 들어가기 꼭 알맞을 것일세. 중들을 장가들라 하여 죄다 망쳐놓을 작정인가!”
이것이 아직까지 만해가 청정수행을 강조하는 비구승단의 일부 스님으로부터 비난받고 있는 까닭이다. 현재 종단적 차원에서 태고종(太古宗)만이 이런 종풍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한 뒤 만해는 통도사(通度寺)에서 팔만대장경을 간추린 국한문판 <불교대전>을 편찬 발간하고, 1915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영호남의 명찰 순례에 나섰다. 동시에 그는 가는 곳마다 수많은 청중 앞에서 불교 대중화와 불교 현대화를 역설하는 한편 잠자는 민족혼을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그는 천부적 웅변가로서 탁월한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다. 한 번은 강연회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여러분! 우리의 가장 큰 원수가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소련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미국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슬아슬한 언어의 곡예에 임검한 왜경은 말할 나위도 없고 청중 모두가 바짝 긴장하여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일본일까요? 남들은 모두가 일본이 우리의 가장 큰 원수라고 합니다.”
“중지! 중지하라!”
순사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고래고래 소리치며 호루라기를 마구 불어댔다. 그 다음 순간.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소련도 아니요 미국도 아니요 일본도 아닙니다. 그럼 누구냐?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겁니다! 우리 자신의 게으름,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원수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전국 31본산 주지회의가 열렸다. 당시의 주지는 대부분 친일 승려였으므로 만해는 꼴도 보기 싫었지만 꼭 나와서 한 말씀 해달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참석하여 이렇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해마다 정초면 총독에게 가서 세배를 하십니다. 조선을 통치하는 총독의 얼굴을 직접 우러러본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된 일이겠지요. 그런데 총독은 매우 바쁜 사람입니다. 조선 통치에 관한 온갖 결재를 하다 보면 똥눌 시간도 없는 게 당연할 거다 그겁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스님이 아닙니까? 남의 생각도 해줘야지요. 조선 총독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아예 만나지도 마시오. 부탁입니다.”
참으로 촌철살인의 기지가 비수처럼 번득이는 무서운 말솜씨였다. 언젠가는 이 총독부의 어용단체인 31본산 주지회의에 나가 이렇게 준열하게 꾸짖기도 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똥입니다 똥! 그런데 똥보다 더 더러운 건 무엇일까요?”
닭 벼슬보다도 못한 중 벼슬을 쓴 주지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꾸도 못한 채 만해의 자문자답을 듣기만 했다.
“그럼 내가 말하지요. 송장 썩는 게 똥보다도 더 더럽더군요. 왜냐하면 똥 옆에선 음식을 먹을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선 도저히 먹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송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역시 아무 대꾸도 없자 만해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지더니 이렇게 벽력처럼 고함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는 이처럼 걸어 다니는 활화산 같은 인물이었다. 만해의 일거수일투족,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대로가 항일투쟁이요 독립운동이요 민중해방의 보살행이었다.
1919년 역사적인 3ㆍ1운동을 주도할 때까지 그는 <채근담강의>를 펴내고, 서울 계동 43번지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하며 신문화운동을 통해 불교 대중화에 힘쓰는가 하면, 김법린(金法麟)의 중앙학림에서 강사로 후진을 지도 양성하기도 했다.
3ㆍ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에 불교계 대표는 만해와 백용성(白龍城) 스님 둘밖에 없었지만 3ㆍ1운동은 만해와 최린의 맹활약에 의해 천도교와 불교가 핵심을 이루고 기독교에서 남강(南岡) 이승훈(李承薰)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이루어질 수 있었다.
3ㆍ1운동 거사 준비를 위해 만해는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이른바 지도층이라는 저명인사들에게 많은 실망을 느꼈다. 33인의 대표로 추대된 천도교의 교주 손병희(孫秉熙)나 기독교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도 처음에는 소극적이었고 일선에 나서기를 꺼려했다. 특히 “독립선언보다도 일본정부에게 독립청원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월남과는 결별하고 뒷날 월남이 죽어 사회장을 지낼 때에도 장의위원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1919년 3월 1일 정오 민족대표 33인은 종로 명월관에서 역사적인 독립선언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여유가 없어 만해가 대표로 짧막한 연설을 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민족을 대표하여 한 자리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다 함께 독립만세를 부릅시다!”
그리고 일동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고 왜경들에게 붙잡혀 감옥으로 끌려갔다.
일제의 재판을 받으면서도 만해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잡혀가기 전에도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갇혀 있는 동안 사식(私食)을 넣지 말고 변호사도 대지 말고 보석 신청도 하지 말라.”던 만해였다. 또한 감옥 안에서도 마음이 약해 울고불고 추태를 부리는 동지들에게는 똥통을 번쩍 들어 던지며 야단치던 만해였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쓴 독립선언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뜯어고치지 않았던가.
“그대는 앞으로 조선 독립운동을 할 터인가?” “그렇다. 쉬지 않고 계속하겠다!”
그리고 옥중에서 만해는 지금까지도 명문으로 평가받는 「조선독립의 서」를 지어 일제의 총독정치,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919년 7월 12일 첫 공판에 이어 그 해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언도공판에서 최고형인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만해는 1922년 3월에 만기로 풀려났다. 그는 이미 44세의 장년이었다. 출옥하던 바로 그날도 무사히 지나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마중 나왔는데 그 가운데는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거부하거나 서명을 하고도 후환이 두려워 피신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내미는 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번쩍이는 눈빛으로 쏘아보던 만해가 가래침을 탁 뱉더니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대들은 남을 마중할 줄만 알았지 어찌 남에게 마중받을 줄은 모르는가!”
출감한 그는 안국동 40번지 선학원(禪學院)에서 기거하며 5월에는 학생회 주최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철창철학(鐵窓哲學)’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고, 또 10월에는 천도교회관에서 육바라밀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23년 3월 24일에는 법보회를 설립하여 대장경의 국역사업에 힘썼으며, 그 다음해에는 조선불교청년회 총재로 추대되었다.
유명한 시집 <님의 침묵>은 그의 나이 47세 되던 1925년 8월 20일에 백담사에서 탈고하여 그 이듬해 5월 20일에 서울 회동서관에서 출간되고 1934년 7월 30일 한성도서에서 재판을 찍었지만 이내 금서가 되었다. <님의 침묵>에는 대표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88편이 실려 있는데 하나같이 ‘님’을 주제로 한 연작시 형태이다.
만해가 애타게 사모하고 갈구한 님의 정체에 대해서는 발표 당시부터 오늘까지 일반 독자로부터 만해 연구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해석이 구구하거니와 어쨌든 <님의 침묵>은 침묵할 수 없는 ‘님’의 설움과 아픔을 아름다운 시어로 줄줄이 엮어내린 시대적 양심의 노래로서 우리 문학사와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불멸의 걸작이다.
1929년에 만해는 51세의 초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해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의거에 호응하여 만해는 조만식(曺晩植)ㆍ김병로(金炳魯)ㆍ홍명희(洪命熹)ㆍ허헌(許憲) 등과 함께 궐기대회를 열고 조병옥(趙炳玉)과도 힘을 합쳐 민중대회를 시도하는 등 줄기찬 항일투쟁을 벌였다. 또한 1931년에는 <불교>지를 인수하여 출판을 맡는 한편 청년 승려들의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만해는 1933년 55세 때 오랜 독신생활을 청산하고 나이 40이 넘도록 어느 병원의 간호원 일을 하던 유숙원을 만나 재혼을 하였다. 이 사이에서 외동딸 영숙이 태어났는데 영숙은 부친이 왜놈의 세상이 싫다고 호적을 갖지 않는 바람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만해로부터 글공부를 배웠다.
현재 서울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서울 성북구 성북동 222-1번지의 심우장은 만해가 만년에 거처하던 집이다. 단층 기와집인 심우장 오른쪽 만해가 쓰던 방에는 오세창(吳世昌)이 쓴 ‘尋牛莊’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만해나 부인이 돈이 없었으므로 친지들이 지어주었는데, 처음에는 볕이 잘 들도록 남향으로 설계를 했지만 만해가 총독부 있는 쪽은 보기도 싫다고 펄쩍 뛰는 바람에 동북향으로 짓게 되었다. 심우란 ‘소를 찾는다’는 뜻이니 곧 불가에서 불도를 구하는 것을 소를 찾는데 비유한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하루는 옛날 3ㆍ1운동을 함께 일으켰던 최린이 심우장으로 찾아왔다. 그는 이미 변절하여 중추원 참의라는 일제의 감투를 쓰고 있었다. 만해는 꼴도 보기 싫어 부인에게 없다고 하여 돌려보내라고 했다. 최린은 가용에 보태 쓰라면서 300원을 영숙에게 주고 갔다. 부인과 딸이 만해에게 혼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 길로 부인은 비가 퍼붓는 속을 달려 최린의 집을 찾아가 300원을 돌려주고 와야만 했다.
만해에게 혼이 난 변절자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독립선언서를 지은 최남선도 중추원 참의가 되어 만해는 평소에 아끼던 사람이 그렇게 망가져버리자 더욱 실망이 커 이미 죽은 사람으로 치고 있었다. 어느 날 둘이 길에서 마주쳤는데 만해는 못 본 척하고 그냥 지나쳐갔다. 육당이 쫓아가 앞길을 막고 아는 체 인사를 했다. “만해 선생. 오래간만입니다.” 그러자 만해가 육당을 생전 처음 보는 사람 보듯 하며 이렇게 물었다. “당신 누구요?” “나 육당 아닙니까?” “육당이 누구요?” “최남선입니다. 저를 잊으셨습니까?” 그러자 만해가 외면을 하면서, “내가 알던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사지낸 지 오래요!” 하고는 휘적휘적 걸어가버렸다.
또 한 번은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심우장으로 찾아왔다. 춘원은 <무명>이니 <이차돈의 사>니 <원효대사>니 하는 불교소설을 쓴답시고 곧잘 만해에게 찾아와 교리에 맞는지 틀리는지 물어보곤 했었다. 그런데 지조를 팔고 창씨개명을 하여 이광수 아닌 가야마 미쓰오 - 향산광랑(香山光郞)이 되어 자기 집으로 들어서자 만해가 벼락치듯 소리쳤다. “네 이놈. 너 같은 놈은 꼴도 보기 싫다! 냉큼 나가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거라!” 이광수는 말 한 마디 못하고 쫓겨 달아나고 말았다.
끝끝내 일제의 회유와 압력을 뿌리치고 서릿발처럼 매서운 기개와 지조를 지키며 외로움과 가난 속에서 만년을 보내던 만해 한용운은 조국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6월 29일(음력 5월 9일) 임종게나 유언 한 마디 없이 중생의 바다에서 열반의 바다로 영원한 여행을 떠났다. 법랍 40년, 세수 66세.
위대한 영혼이 떠나버린 그의 육신은 미아리화장장에서 태워져 재로 변했고, 몇 과의 치아사리만 남았다. 그의 유골은 멀리 한강이 굽어보이는 망우리공동묘지에 모셔졌고,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966년 74세로 세상을 떠난 유씨 부인이 그의 곁에 나란히 묻혔다.
만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정부는 1962년에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7년 10월에는 탑골공원에 만해용운당대선사비가, 1977년에는 부산 보광원에 ‘님의 침묵’을 새긴 시비가 세워졌으며, 1982년 6월에는 고향인 홍성읍 남장리 남산공원에 ‘알 수 없어요’를 새긴 시비가 세워진 데에 이어 1985년 12월에는 같은 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찾아오는 추모객들을 그윽한 눈으로 굽어보고 있다.
만해는 ‘꿈이라면’이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가르쳤다.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출세의 해탈도 꿈임니다.
우슴과 눈물이 꿈이라면
무심의 광명도 꿈임니다.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엇것슴니다.
글: 황원갑 <역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