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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과거제도에 실망,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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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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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다짐한 선생은 해서 거유 고능선 선생의 말을 듣고 청국을 조사하기 위해 떠나기로 한다. 인사차 진사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에게 들른 선생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함께 길을 떠났다가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선생의 사진(왼쪽)과 임시정부 주석 시절에 선생이 서명한 태극기(오른쪽) |
일본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국모시해죄로 처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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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중경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선생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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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직전 고종의 특사로 형집행이 정지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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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편 생활 시절의 선생(맨 뒷줄 오른쪽 첫 번째)의 모습. 해서 교육총회 학무총감 재임 시 광진학교에서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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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 경부국장 시절의 가족사진(1919~1922) 가운데가 맏아들 김인이며, 오른쪽이 부인 최준례 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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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앞 중앙)과 한인애국단원 사진(1932년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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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가 피난 중이던 시기 가흥에서 촬영한 사진. 중앙의 선생을 중심으로 송병조, 이동녕, 이시영, 조성환,
엄항섭, 조완구, 차리석 등과 그 부인들이 보이고, 맨 앞줄의 어린이들은 엄항섭의 자녀들이다
광복군의 국내정진 작전 중 일왕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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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환국기념 사진(1945.11.3, 맨 앞줄 가운데가 선생)과 선생의 영결식 장면(1949.7.5, 서울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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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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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카페 이달의 독립운동가 (http://cafe.naver.com/bohunstar.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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