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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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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진성/진보이씨(眞城?眞寶李氏)
이장희 추천 0 조회 72 14.05.10 14: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진성/진보이씨(眞城?眞寶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진성 이씨 (眞成李氏)의 시조(始祖) 이 석 (李 碩)은 누대로 진보현(眞寶縣)에 토착(土着)해 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진보현의 아전(衙前)으로 있다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그의 맏아자수(子修)가 충숙왕(忠肅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362년(공민왕 11)에 일어난 홍건적(紅巾賊)의 난(亂)때 전공(戰功)을 크게 세워 안사공신(安社功臣)으로 송안군 (松安君)에 봉해졌으므로 그 귀(貴)로 인하여 시조 석(碩)은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사 (密直使)에 증직(贈職)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 석(李 碩)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선조(先祖)의 본향지(本鄕地)인 진성 (眞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의 전통가문(傳統家門)으로 명망을 떨쳤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풍산현(豊山縣) 망천(輞川)에 터를 잡았던 송안군(松安君) 자수(子修)의 아들 운구(云具)와 운후(云候) 대(代)에서 중흥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조선(朝鮮) 초기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던 운구(云具)는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군수(郡守)를 역임했던 차남 양검(養儉)과 주부(主簿)를 지낸 막내 양호(養浩)가 유명했다.

한편 송안군 자수의 둘째 아들로 부정(副正)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贈職)된 운후(云候)의 아들 정(禎)은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한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고, 슬하에 아들 우양(遇陽)?흥양(興陽)?계양(繼陽)이 현달(顯達)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노송정(老松亭) 계양(繼陽)의 둘째 아들 우(?)는 연산

군(燕山君)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과 이조 및 병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한 후 승지(承旨)로 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4등공신(靖國四等功臣)으로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으며, 1508년(중종 3) 진주 목사(晋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下賜)받았다.

진사(進士) 식(埴)의 아들 6형제 중 넷째인 해(瀣)는 중종(中宗)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간(司諫)과 정언(正言)을 거쳐 직제학(直提學)?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예조 참판(禮曹參判)등을 역임했고, 예서(隸書)에 뛰어나 필명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황(滉)이 가문을 명문(名門)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특히 퇴계(退溪) 황 (滉)은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한 대 유학자(大儒學者)로 율곡(栗谷) 이 이(李 珥)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으며, 시문(詩文)과 글씨에도 뛰어났고 겸허(謙虛)한 성격의 대학자로 중종(中宗)?명종(明宗)?선조(宣祖)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명종(明宗) 때 대사성(大司成) 민 기(閔 箕)가 명(明)나라로 가게 되어 체임되자 당하관(堂下官)으로서 글에 능하고 재행(才行)이 있는 자를 선택할 때 부응교(副應敎)로 있던 퇴계가 천거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병을 빙자하여 사직하고 돌아가니, 임금은 친필로 쓴 수찰 (手札)을 내렸는데 그 내용에 <너는 탁월(卓越)하며 청간하고 세상에 드문 문장으로 공명을 탐하지 않고 촌(忖)으로 돌아가 한가로이 살고 있으니 염퇴 (恬退)한 뜻은 가상하나 항상 서울로 돌아오는 날을 기다렸다. 내가 어진이를 구하는 정성이 부족하여, 어진이가 조정에 벼슬하지 않으니, 내 마음이 결연 (缺然)하여 마음속에 잊지 못하노라. 내 비록 주문왕(周文王)의 덕(德)은 없으나 네 어찌 부춘산(富春山 : 한나라 엄자릉이 벼슬을 마다하고 숨어 살던 산)에 은거하기를 좋아하느냐. 속히 올라와서 간절히 구하는 뜻에 응하여다오>하였다.

「 석담일기 (石潭日記)」에 의하면 퇴계의 학문은 문장(文章)으로 말미암아 도학(道學)에 들어갔는데 의리(義理)가 정밀하여 주자(朱子)의 학설을 좇았으며, 여러 학자 학설의 동이(同異)점에도 통하였으되 옆으로 주자의 학설에 절충(折衷)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한가로이 혼자 거처하면서 전분(典墳)서적 이외에는 마음에 두는 것이 없었고, 때로는 수석(水石)을 찾아 소요하면서 시(詩)를 읊어 소산(蕭散)한 흥취를 붙이기도 하였다. 학자들의 물음이 있으면 언제나 자기의 얻은 바를 모두 기울여 수응할 뿐 학도를 모아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담박(淡泊)함을 좋아하여 부귀영화를 뜬 구름같이 보았고 의식(衣食)을 겨우 자급하면서도 그의 개결함은 남이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한양에 우거하고 있을 때 이웃 집 밤나무 두어 가지가 담너머로 뻗어 나와 밤이 익어 뜰에 떨어지면 아이들이 주워 먹을까 염려되어 담밖으로 던져 버렸다.

선조가 처음 즉위하자 모든 조사(朝士)들의 공론이 “ 이 황이 아니면 임금의 덕을 성취할 수 없다 ”고 하였으며, 임금의 뜻도 황에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황은 자기의 재능과 지혜가 대사를 감당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또 말세(末世)가 되어 도학자(道學者)로서 정치를 할수 없고, 임금의 좋은 정치를 하겠다는 마음이 성실치 못하고, 대신들 또한 학식이 없어 하나도 믿을 수 없으므로 벼슬을 간절히 사양하고 기어코 물러났다.

만년에 도산 (陶山)에 집을 짓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진력하면서 아들 준(寯)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후 비(碑)를 세우지 말고 다만 작은 돌로 전면에 < 퇴도만은 진성 이공의 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표시하라고 했으며, 병이 위독하게 되자 문인들을 불러 더불어 영결(永訣)하려 하므로 자제들이 권고하여 말리니, 황은 “죽어가는데 그들을 보지않을 수 없다”하고 명하여 옷을 몸에 걸치게 하고 여러 문생에게 이르기를 “평일에 나의 그릇된 견해로서 제국과 더불어 강론하였으니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하였다.

임종하던 날 아침에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 이르고, 저녁에 눕는 자리를 정제(整齊)하게 하고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아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생전에 자기의 묘명(墓銘)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나면서부터 치 (癡)였고, 커서는 다병(多病)하였다. 중년에는 어찌하여 학문을 즐겼으며, 늦게는 어찌하여 벼슬을 하였던고, 학문은 구할수록 오히려 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도리어 얽혀왔다. 출세에는 서툴렀고 퇴장 (退藏)할 뜻 굳혔다. 속 깊이 국은 (國恩)에 부끄러워 했고, 진실로 성인의 말씀이 두려워 높고 높은 산이 있고 졸졸 흐르는 물 있는 데서 초복(初服:벼슬하기 전의 한가한 생활)으로 돌아가 한가히 즐겨 뭇 비방을 생각해 보니, 고인이 이미 내 마음을 먼저 얻었거니, 어찌 오는 세상에서 오늘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리. 근심 속에도 낙(樂)이 있고 즐거움 속에 근심이 있다. 조화(造化)를 따라 사라짐(盡)이여,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그의 아들 준(寯)은 아버지의 유언으 그가 한양에 우거하고 있을 때 이웃 집 밤나무 두어 가지가 담너머로 뻗어 나와 밤이 익어 뜰에 떨어지면 아이들이 주워 먹을까 염려하여 담밖으로 던져 버로 예장(禮장)을 사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1품(一品)의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퇴계 황의 손자 안도(安道:준의 맏아들)는 선조(宣祖) 때 학행(學行)으로 목청전 참봉(穆淸殿參奉)에 천거되어 직장(直長)에 이르렀고, 그의 아우 영도(詠道)는 군기시 부정(軍器시副正)과 원주 목사(原州牧使)를 거쳐 군기감정(軍器監正)을 역임한 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했던 돈(? : 참봉 원회의 아들)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직강(直講)에 등용되어 부모 봉양을 위해 영천 군수(永川郡守)를 자청하여 효행(孝行)을 떨쳤으며, 지형(之馨)의 아들 명익(溟翼)은 숙종(肅宗)때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가 세곡(稅穀)의 수송을 쉽게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구한말에 와서는 퇴계 황(滉)의 10대손 휘령(彙寧)이 철종(哲宗) 때 동부승지(同副承旨)와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부총관(副摠管)에 올랐으며, 가학(家學)을 계송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했고「 십도고증 (十圖考證)」과 국문 시가(詩歌)인 「 방경무도사 (邦慶舞蹈辭)」를 지어 학문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고종(高宗)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했던 만도(晩도)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안동(安東)으로 내겨가 의병(義兵)을 모집하여(日本)의 침략에 항거했으며,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5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상소했다, 한일합방의 비분으로 자결하여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한일합방을 개탄하여 단식 끝에 순사한 중언(中彦)과 애국지사(愛國志士) 명우(命羽)가 유명했으며, 육사(陸史) 활(?)은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졸업하고 사회운동가로 활약하다가 1937년 서울에서 신석초(申石艸)?윤곤강(尹崑崗)등과 함께 동인지인「 자오선 (子午線)」을 발행하면서 < 청포도 (靑葡萄)> < 교목 (喬木)>등 목가풍(牧歌風)의 시(詩)를 발표했다. 특히 그의 시(詩)는 당시 피압박 민족으로서의 정치적 울분을 상징주의의 수법으로 나타내어 민족정신운동에 공헌했으며, 그의 작품이 담긴 「 육사시집 (陸史詩集)」을 발간하여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전통가문인 진성 이씨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회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성?진보 이씨(眞城?眞寶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4,428가구, 58,8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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