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당(書百堂:三賢之地=삼현지지)
서백당은 양민공 손소(孫昭)가 1454년(성종 15) 건축한 집으로, 월성손씨종택 또는 서백당(書百堂)이라고도 한다. 손소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孫仲暾)과 외손으로서 문묘에 배향된 회재 이언적(李彦迪)이 태어난 곳이다.
一자형 대문채 안에 ㅁ자집의 안채가 있고, 사랑 뒷마당에는 신문(神門)과 사당이 있다. 문간채는 정면 8칸, 측면 1칸의 홑처마 기와 맞배지붕이며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납도리집이다. 몸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의 ㅁ자집 평면으로 행랑채보다 상당히 높게 쌓은 기단 위에 납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다.
안채 역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대청 정면의 기둥만은 모두 두리기둥 4개로 처리하였다. 특히 안방과 건넌방의 귓기둥과 측면 제2기둥에 각각 두리기둥을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정원에는 경상북도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건축 당시에 심은 향나무가 있다.
서백당은 사랑채의 편액이며 송첨이라 쓰인 편액도 보인다. 대청의 난간이 참 인상적이다. 서백당의 서백이란 참을 인자 100번을 쓰면서 인내를 배운다는 뜻으로 최근에 지어진 당호라고 한다. 현재는 손소의 19대손인 손중만씨의 소유이다. 서백당은 건축연대가 양동마을의 모든 가옥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그 가치가 크며 대문채에서 한단을 높여 지은 사랑채가 특징이다.
무첨당(無忝堂보물 제411호:조상에게 욕되고 더럽힘이 없는 집)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대 문신이었던 회재 이언적(1491∼1553)선생 종가의 일부로 조선 중기에 세운 건물이다. 지금은 종손인 이지락 선생이 종손으로서 관리를 하고 있다. 이곳은 회재 이언적의 부친 이번이 살던 곳이라 하며 여강 이씨 대종가이며 사랑채, 안채 별당채 중에서 무첨당은 별당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의 장손 이의윤의 호에서 당호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건물 내부를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좌우 1칸씩은 온돌방이다. 대청은 앞면 기둥 사이를 개방하고 누마루에서도 대청을 향한 쪽은 개방되어 있으며, 뒤쪽과 옆면은 벽을 쳐서 문짝을 달았다. 평면은 ㄱ자형을 띠고 있고 둥근기둥과 네모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를 배치하고 있다.
이 건물의 기능은 상류주택에 속해있는 사랑채의 연장 건물로 손님접대, 쉼터, 책읽기를 즐기는 따위의 여러 용도로 쓰이던 곳이다.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별당건축의 기능에 충실하게 지은 건축물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무첨당에는 여러 편액들이 걸려 있는데 물애서옥은 중국의 사신 조광이 조선에서 학문에 이름높은 학자가 제일 많은 곳을 찾아 이곳 양동마을에 들러 물봉언덕의 학문하는 집이란 뜻으로 크게 감명받아 써 놓고 간 편액이라고 한다.
무첨당에서 보면 물봉고개란 곳이 있는데 이 고개의 이름은 조상에게 욕됨을 입히지 않음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과연 회재 이언적은 조상들에게 욕됨이 없는 삶을 산 것일까 한번쯤 생각해 보게 한다.
좌해금서는 흥선대원군이 대원군이 되기 전에 이 곳 양동마을에 잠시 머무르면서 쓴 편액이라 전해지는데 도난을 당해 최근에 모작 편액을 걸어두었다 한다. 좌해는 왼쪽에 바다가 있다는 뜻이니 영남지역을 말하고 금서는 거문고와 서책을 말하여 영남지역 선비들의 풍류가 드높음을 중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글이라 한다.
무첨당은 독락당에서 말년을 은거하며 보내기 전 회재의 부친 이번이 별당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며 이언적의 친자가 아니지만 양자로 들였던 이응인이 제사를 지내는 계후자로서 양동파의 후손이 되고 회재의 맥을 잇고 독락당과 옥산서원을 세우는 데 기여하는 친자이며 서자였던 이전인은 옥산서원 중심의 옥산파의 후손으로 분류되어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잇는다. 김안로와의 대립으로 귀향했을 때 회재 이언적은 자신의 행보가 여강이씨 전체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무첨당으로 돌아오지 않고 독락당으로 가서 거기서 두번째 부인에게서 서자 이전인을 얻고 살게 된다. 이 두번째 부인이 늙으신 부모를 공양한 것으로 인해 회재는 무척 아꼈다고 한다.
보기엔 상류층의 화려함의 극치를 누리고 있는 건물인 것 같지만 회재 정도의 이력을 가진 사람에겐 이 정도가 그렇게 크고 화려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회재는 양동마을의 이 무첨당에 곡식을 담아두는 큰 성주독을 마련해 두었는데 춘궁기가 다가오면 성주독의 곡식을 퍼내어 약 100kg의 쌀로 떡을 만들어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정도로 이웃과 함께 하는 철학을 펼쳤던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향단(香壇:보물20412호)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였을 때인 1540년에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손씨 대종가인 관가정(보물 442)이 같은 양동리에 세워지자 이에 외척의 입지를 마련하고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원래 향단은 99칸이었으나 화재로 불타고 현재는 56칸의 단층 기와지붕이다. 전면의 한층 낮은 곳에 동서로 길게 9칸의 행랑채가 있고 그 후면에 행랑채와 병행시켜 같은 규모의 본채가 있다. 그 중앙과 좌우 양단을 각각 이어서 방으로 연결하여, 전체 건물이 마치 ‘日’자를 옆으로 한 것 같은 평면이다. 따라서 행랑채, 안채, 사랑채가 한 몸체로 이루어진 2개의 마당을 가진 구조로 되어 있다.
조선의 사대부가 99칸의 한계를 가진 것은 오직 임금만이 100칸 이상의 궁궐을 지을 수 있다는 원칙을 정하고 그를 지켰기 때문이다.
내부는 온돌방과 마루를 서로 번갈아 배치하였으며 동단에 큰 대청이 있고 서단에는 곳간, 중앙에 제일 큰 온돌방을 두었다.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대문간은 앞채의 동쪽에서 세번째 칸에 마련하였으며 중앙의 큰 온돌방 북쪽에는 좁은 통로가 있어 이곳을 거쳐 그 안에 있는 마당에 들어간다. 사대부가의 격식과 품격을 갖추면서, 주거문화의 합리화를 꾀한 공간구성을 보이는 주택이다.
향단은 공간을 넓게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합리적, 효율적으로 공간을 활용하려한 독특한 구조로 양동마을에서 가장 건축학적 연구의 가치가 높은 가옥으로 유명하다. 특히 아기자기하게 공간을 활용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므로 오랜 시간 머물면서 그 독특함을 즐기면 좋을 듯하다.
특히 회재가 직접 지은 건물로서 회재의 정신 사상과 공간에 대한 합리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어 회재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가옥이라 할 수 있다.
관가정(觀稼亭:보물제442호)
조선 전기에 활동했던 관리로서 중종 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 손중돈(1463∼1529)의 옛집이다. 손소의 아들 손중돈은 조카가 되는 회재 이언적과 함께 양동마을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로 꼽히는 인물이니 이 집도 양동마을에서는 아주 중요한 집이라 할 수 있겠다.
언덕에 자리잡은 건물들의 배치는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이루는데, 가운데의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사랑채, 나머지는 안채로 구성된다. 안채의 동북쪽에는 사당을 배치하고, 담으로 양쪽 옆면과 뒷면을 둘러 막아, 집의 앞쪽을 탁 트이게 하여 낮은 지대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보통 대문은 행랑채와 연결되지만, 이 집은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대문의 왼쪽에 사랑방과 마루가 있다. 마루는 앞면이 트여있는 누마루로 ‘관가정(觀稼亭)’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문의 오른쪽에는 온돌방, 부엌, 작은방들을 두었고 그 앞에 ㄷ자로 꺾이는 안채가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살림을 하는 공간으로, 부엌, 안방, 큰 대청마루,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의 사랑방과 연결이 된다. 네모기둥을 세우고 간소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뒤쪽의 사당과 누마루는 둥근기둥을 세워 조금은 웅장한 느낌이 들게 했다. 사랑방과 누마루 주변으로는 난간을 돌렸고, 지붕은 안채와 사랑채가 한 지붕으로 이어져 있다.
관가정은 조선 중기의 남부지방 주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