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를 붉게 물들인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풍덩 빠지는 일요일 저녁 유람선 슈퍼스타 카프리콘 호가 평택항을 출발했다.
5박 6일 여행이 시작됐다. 슈퍼스타 카프리콘 호를 운영하는 '스타크루즈'는 최근 중국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를 피해 일본 규슈를 4월부터 왕복 운항하고 있다. 그 전에는 부산과 중국 대련을 운행했다. 기항지는 따뜻한 기후와 푸른 바다 때문에 '동양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가고시마와 일본인이 가장 여행하고 싶어하는 곳 중 하나라는 나가사키다. 크루즈 여행은 이동수단인 배와 숙박하는 리조트 호텔을 합한 개념이다. 번거롭게 짐을 싸고 풀지 않아도 된다.
이 때문에 크루즈 여행은 유람선 그 자체가 여행의 목적지라고 한다. 승선을 하자 승무원의 안내로 십투어를 하면서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실감했다. 길이 205m, 폭 25m의 호화 유람선 슈퍼스타 카프리콘호는 지상 10층 2만8천t급이다. 450개의 객실로 최대 1,350명을 수용할 수 있다. 골프연습장-수영장-도서관-탁구장-체육관 등 레크리에이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2개의 회의실도 단체관광객에게 유용한 시설이다. 최신식 음향 효과-조명-웅장한 무대 등을 갖춘 연회장(공연장 겸용-갤럭시 오브 더 스타)이 준비되어 있다. 비디오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비디오 아케이드도 있다. 레스토랑과 바(어드미럴 라운지-스시바-페-오션팔라스 레스토랑-타이판) 등의 시설도 갖추고 있다. 공해 운항시에는 카지노도 문을 연다. 첨단 특급 선상호텔이며 '토털 오락관'이다. 마치 바다를 떠다니는 호텔 같았다.
객실에 들어서자 스타 네비게이터라는 선내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네비게이터는 레스토랑 영업시간-액티비티-기항지 관광안내 등 다양한 선내 정보를 담고 있는 안내표다. 네비게이터를 돌리는 이유는 최대한 승객에게 불편과 간섭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여행길에 올랐다는 마음 때문일까. 승선할 땐 디카프리오 주연의 [타이타닉]이 떠올랐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눈에 많이 익은 배였다. 그랬다. 1998년 금강산 관광을 위해 탔던 '금강산 호'가 바로 슈퍼스타 카프리콘호였다.
첨단 특급호텔이자 토털 오락관
낯익다는 게 마음을 편하게 했다. 7층 갑판에서 바람을 마주하고 섰다. 서해 하늘은 속옷이 다 보였다. 쪽빛이었다. 오랜만에 본 하늘이다. 수없이 많은 별이 눈에 들어왔다.
바딧속을 들여다봤다. 갈라지는 물보라 속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길을 멀리 두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았다. 바닷속에도 화려하고 예쁜 꽃이 만발해 있었다. 오색창연한 나비도 날고 있었다.
여행에서 생략할 수 없는 것은 먹는 즐거움. 오션팰리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세계 각국의 다양한 뷔페 메뉴로 첫 선상식사를 마쳤다. 식사 중에는 카프리콘 호의 3인조 밴드가 각 테이블을 돌면서 [사랑해] [메모리] [아낙] 등 귀에 익은 곡을 연주했다. 여행객의 신청곡이었다.
출항한 지 3시간여가 지나자 휴대전화에서 '통화권 이탈' 신호가 나왔다. 배가 공해상으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신호다. 이 시각 갤럭시 오브 스타에서는 밤마다 열리는 마술쇼와 브라질 댄서들의 정열적이고 화려한 공연이 무르있고 있었다. 갤럭시 오브 스타에서는 주공연 시간 이외에 브라질 댄서들로부터 살사-삼바-탱고를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크루즈 스태프들과 함께하는 라인 댄스와 파라파라 댄스도 익힐 수 있다. 이렇게 춤을 배우고 감상할 수 있는 시간 이외에도 빙고 게임과 복권 추첨도 해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여행객의 주요 활동무대인 셈이다.
만남의 기쁨도 빠뜨릴 수 없어
출항 이튿날 배는 하루 종일 공해상을 운항한다. 늘 바다와 하늘은 닿아 있었다. 배의 움직임을 느끼게 하는 것은 배의 이동 궤적, 피었다가 사라지는 물보라뿐이었다. 여행에서 지루함은 오히려 약이 되는 법.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념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책 한 권 들고 6층 갑판 수영장 비치에 몸을 뉘었다.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이 몸을 간지럽혔다. 졸음이 몰려왔다. 꿈을 꾸었다. 나는 만경창파에 떠 있는 돛단배에서 한가로이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선상 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만남의 기쁨'이다. 승객은 물론 승무원도 여행의 동반자다. 만남은 인위적인건, 우연이건 간에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일까. 특히 선상의 만남은 그 인연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활용해야 하느냐는 계산된 만남이 아니다. 굳이 통성명을 할 필요도 없다. 피부색과 국적, 세대와 나이는 만남에서 중요한 요인은 아니다. 여행의 동반자로서 마음을 열기 때문일까.
그저 그 자리에서 만났다는 게 중요할 뿐이다. 노부부를 만났다. 자신을 "김씨(77세) 부부"라고 소개했다. 김씨는 "크루즈 여행이 취미"라면서 "크루즈 여행을 통해 150개 도시를 돌아봤다"고 했다. 크루즈 여행의 노하우를 물어봤다. 그는 "경비가 적게 들고 장기 여행의 부담인 짐을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게 장점"이라면서 "우리 부부는 배만 이용하고 기항지에서는 여행사 상품과 별도로 움직인다"고 말했다.
출항 3일째 육지가 그리워졌다. '조금만 기다리면/조금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 텐데./시간의 여신이여!/너는 게으름뱅이냐?' 하이네의 [그리움]이라는 시가 해오름을 재촉한 것일까. 날이 밝으면서 유람선은 가고시마와 사쿠라시마를 가랑이 모양으로 가르는 긴코만에 들어서고 있었다. 고등학교까지 가고시마에서 보냈다는 한 할아버지는 희미하게 드러난 후지산을 닮았다는 유노하라(白山)를 보면서 몇 십년 전의 학창시절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 주변에는 2명의 딸이 있었다. 여기가 어디고 저기가 어디며 그때 이런저런 일이 있다고 회상하는 그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기항지의 행선지는 사쿠라시마이었다. 가고시마항에서 페리를 타고 10여 분 만에 사쿠라시마에 도착해서 자동차로 15분 정도 달려 유노하라에 다달았다. 세계에서도 유명한 활화산인 사쿠라지마는 긴코만을 사이에 두고 가고시마에서 4㎞ 떨어진 화산으로 가고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사쿠라지마는 둘레가 52㎞이며, 기타다케(北岳 1117m)-나카다케(中岳 1060m)-미나미다케(南岳 1040m), 3개의 봉우리로 이뤄져 있다. 미나미다케는 지금도 활발한 화산활동이 진행 중이다. 지금까지 수십 차례 대폭발을 거듭했으며, 약 30억t의 용암이 흘러내려 해협이 매립되면서 현재와 같이 육지와 연결되었다. 이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사쿠라시마의 해안을 10여㎞ 더 늘렸다고 한다.
유노하라 전망대에서는 사쿠라지마의 3개의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왔으며 미나미다케에서 구름 같은 연한 연기가 피었다가 사라졌다. 전망대는 화산지역에 만들어져 있었고 짙은 회색을 가진 갖가지 형상의 화산석은 그 자체가 볼거리였다.
육지 그리울 때쯤 온천욕 '기쁨 배가'
이동한 곳은 텐문간 거리. 일본의 번화한 쇼핑가이지만 다이묘 정권 때 시마츠파의 주권에 밑에서는 많은 무인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서울 부심이나 지방도시의 번화가와 별 차이가 없었지만 유난히 서점이 눈에 많이 띄었다. 사쿠라시마에는 살구보다 조금 크고 귤과 비슷하게 생긴 비파라는 향토 열매가 영글고 있었다.
이부수키 온천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곳은 일본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바닷가에 누워 모래와 온천수로 즐기는 온천이었다. 모래는 화산의 영향으로 까만 빛을 띄고 있었다. 모래 위에 누우면 호텔 직원이 나무로 만든 커다란 삽으로 모래를 덮어준다. 10여 분이 지나면 몸 속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두번째 기항지인 나가사키는 원자폭탄 투하와 운젠 지옥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첫눈에 본 나가사키시는 마치 서양의 도시 같았다. 대부분의 주택은 서양식 건축형태로 되어 있었으며 담장은 담쟁이로 덮여 있었다. 일본의 개항지이며 기독교 문화가 가장 번창한 지역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 서양도시풍인 이유를 알았다. 나가사키의 향토음식은 카스테라.
운젠은 한마디로 살아 있는 화산을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의 제1호 국립공원인 운젠공원은 커다란 화산구였다. 운젠공원이 가까워지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차에 내리자마자 그 냄새의 원인을 곧 알 수 있었다. 유황연기가 곳곳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유황연기가 나오는 분화구 곳곳에 온천 원수를 얻기 위한 굵은 파이프가 꽂혀 있었다. 공원 관계자는 "운젠에서는 어느 곳에서든지 땅을 파면 온천수가 나온다"고 말했다.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온천수 색깔은 옅은 황토색에 초록색의 잎새를 띄워놓은 것 같았다. 20여 분이 지나자 손과 손톱의 색깔이 물색으로 변했다.
이밖에도 원자폭탄이 투하된 평화공원, 네덜란드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든 테마공원 하우스텐보스(Huis ten bosch)도 눈요기로는 일품이었다.
5일간의 여행은 짧았다. 여행의 최대의 묘미는 미련과 여운이다. 떠나고 싶은 마음,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즐거운 여행이다.
여행정보
▶여행코스:평택→가고시마→나가사키→평택
▶여행일정:5박 6일, 매주 일요일 출발.
▶요금:1인당 49만9천~1백49만원(2인 1실 기준, 싱글 요금은 정상 요금의 150%)*기항지 관광은 별도 비용.
▶가는 길:평택항행 셔틀버스가 덕수궁 앞에서 출발(왕복 2만원).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평택항 주차장 1일 5,000원.
첫댓글 혹시 배주인인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