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에 우리 배달민족에게 가장 기쁜 순간은 언제였을까?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아니었을까? 일찍이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그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추고 자신은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두 개골이 깨어져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할 정도로 학수고대했던 그날 광복, 그날이 왔다.
그때 살아보지 않았으니 광복의 기쁨과 설렘과 희망을 실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1945년 12월 1일자 신문을 검색해 보았다. 동아일보는1920년 창간하여 1940년 폐간 되었고 해방이 된 후 1945년 12월 1일 복간 되었다. 바로 12월 1일 복간되는 날 동아일보는 임시정부 환국을 환영하며 김구 주석 각하(당시 동아일보는 이채롭게도 주석 각하라는 호칭으로 기사를 작성했다)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임정요인 1차는 11. 23. 개인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왔다. 동아일보와거소인 죽첨장(경교장)에서 있었던 인터뷰에서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서 심신의 전부를 바치려고 생각할 뿐이다"고각오를 피력했다. 각원과 국무위원 명단에는 군무부장(국방부장관)에 약산 김원봉이 있었고 이승만은 구미외교위원회 위원장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여기서 한번 '만약'이란 가정을 해보고 싶다. 만약에 그때 미국이 임정에게 정부 자격을 인정하고 요인들이 정부 인사로 귀국하여 그대로 조각을 하였다면 우리 정부는 1919년에서 기원하여 그 후의 혼란도 훨씬 적었을 것이다. (만약의 두번째는 우사 김규식이 김구를 따라 남북연석회의에 가지 않고 미국의 지지를 그대로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런데 당시 미 군정은 이미 남한에 자신들의 통치 기관을 두고 점령국이란 지위를 확실히 하려고 했다. 이틈을 타서 서로 해방 공간의 헤게모니를 쥐려는 권력집단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수많은정치집단이 생겨났다. 물론 그 중에서 대의명분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은 '임정'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정치집단은 여운형의 '건준'이었고 이에 자극받은 우익은 지주세력을 중심으로 한국민주당, 즉 한민당을 결성했다. 우후죽순처럼 자고 나면 정치집단이 생겨났지만 이승만은 국제정치 전문가답게 결국 이 정국에서 헤게모니를 쥘 수 있는 키워드는 주한미군 바로 미군정임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군정을 움직이는 두 개의 힘은 도쿄에 있는맥아더의 연합군 총사령부와 여론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임정의 주석도, 대통령도 아니었다. 미국에 파견된 일개 사절단장 수준이니 쉽게 말해 임정 조각대로 한다면 직책은 주미대사격이었다. 그는 임정 중심으로 정국이 돌아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정은 대의명분을 가지고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이승만은 지지세력이 없었다. 그때 마침 지주집단인 한민당도 총수가 필요했다. 둘은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이승만과 한민당. 이렇게한국의 우익보수가 탄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