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한삼국지 140
(소설 삼국지 )
제1권 천하대란
제10장 국가의 붕괴 3)
군웅할거
한나라를 할거 하고 있는 군웅 중 가장 강한 세력은 동탁이었다. 원래 자기가 거느리던 직계 부대에다가 정원, 여포 등이 이끌던 병주 군벌, 황보숭이 지휘하던 서량정토군, 자신의 출신 지역인 서량에서 새로 모집한 병사 등을 병합해 군사적 세력이 가장 강했다. 동탁은 한수, 마등 등 서량의 반군세력들도 끌어들였다. 게다가 동탁은 명목상 존재하는 중앙 조정을 장악하고 천자를 끼고 있었다.
동탁은 워낙 포악한 성격이었다. 백성들에게 꿈을 설계할 안정된 생활이 아닌 포악한 공포정치로 일관해 민심이 이반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 외부에 지원세력이 없다는 것은 큰 약점이었다. 장안에 고립되어 관중의 험요지를 틀어막고 방어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동탁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지역은 사례 지역 중 경조, 좌풍익, 우부풍의 3개 군과 량주 지역, 그리고 병주 지역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주(冀州)는 아홉 개 군, 백 개의 현, 읍, 후국으로 이루어 있었다. 기주는 전성기 때 인구가 육백만 명에 육박했었던 큰 주이다. 게다가 물자도 풍성했다. 국세가 강했다. 기주의 궁노병은 강하기로 유명했다. 한복은 기주 목으로 부임한 후 업성에 근거를 두고 산동 반군의 맹주 원소의 뒤를 봐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기주의 남쪽 경계에 인접한 사례 주 하내 군에는 원소와 더불어 하내 태수 왕광, 분무장군 조조 등이 둔병하여 산동 반군의 주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원소의 세력은 병주를 근거지로 했던 장양과 어부라가 합세해 더욱 강해졌다. 원소는 산동 의군의 맹주라는 막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맹주는 단순한 상징적인 지위가 아니었다. 원소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매형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왕광의 예에서 보더라도 원소의 권력은 실효적이었다. 손견의 세력에 의지해 원소와 각을 세우고 있던 원술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원소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했다. 조조는 원소의 분무 장군으로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맹주로서 원소의 권위는 유대가 교모를 살해하고, 원소가 기주 목 한복으로부터 기주 지역의 권력을 탈취하는 등 군웅 간 쟁패가 시작된 후에도 상당기간 유지되었다.
장양과 함께 원소에게 귀부한 어부라(於扶羅)는 원래 남흉노 선우의 아들로서 우현왕(右賢王)의 지위에 있었다. 한나라 건국 시 한고조를 백등산(白登山)에서 굴복시킬 정도로 강했던 흉노는 한무제 시절 수차례의 토벌로 쇠약해졌다. 흉노는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다. 북흉노는 한나라의 지속적 토벌을 피해 유럽으로 이동하여 게르만 민족대이동의 방아쇠를 당겼지만, 남흉노는 한나라에 귀복해 장성 이남에 거주하고 있었다. 남흉노는 산서성 북방인 병주 지역에서 한족과 잡거하며 사실상 한나라 조정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중평4년(187년) 장순, 장거의 난이 유주에서 일어나 선비족과 연합하여 변방의 군들을 약탈하자 영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남흉노 병을 징발하도록 조서를 내렷다. 당시 남흉노의 선우(單于)는 강거였다. 선우 강거는 좌현왕(左賢王)에게 흉노 기병을 이끌고 유주로 가서 유주 목 유우를 돕도록 했다. 남 흉노인들은 선우가 한나라 황제의 지시에 굴종하여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전쟁에 흉노 병들을 징발하는 것에 분노했다. 게다가 난이 길어짐에 따라 조정의 징병 요구는 끝이 없어 흉노인들의 생업에 막대한 지장이 있게 되었다. 그러자 중평5년(188년) 우부(右部) 부락이 휴저각호(休著各胡) 백마동(白馬銅) 등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켜 선우 강거를 죽였다. 강거의 아들 우현왕 어부라가 새로운 선우로 선출되었다. 어부라의 선친을 살해한 반란의 주동 세력들은 어부라를 배반하고 수복골도후(須卜骨都侯)를 선우(單于)로 세웠다. 어부라는 자신을 지지하는 수천여 기의 기병을 이끌고 한나라 조정을 향했다. 종주국인 한나라의 지원을 얻어 선우의 지위를 되찾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영제가 붕어하고 천하대란이 일어나 어부라는 갈 곳이 없었다. 어부라는 하동에서 일어난 백파적(白波賊)과 합세해 하내의 여러 군을 공략했다. 이 때 주전이 하내에 파견되어 백파적과 어부라의 공격을 방어했다. 동탁이 집권한 후 사위 우보를 보내 이들을 격파하려 했지만 쉽게 제어하지 못했다.
하내의 백성들은 마을마다 보루를 쌓고 저항했고, 어부라는 전과 같이 약탈이 쉽지 않았다. 어부라는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선우로 옹립된 수복골도후(須卜骨都侯)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고립무원이 된 어부라는 하동(河東) 군 평양(平陽)에 머물렀다. 어부라는 전조(前趙)를 세워 오호십육국 시대를 여는 데 중요 역할을 하게 되는 유원해(劉元海)의 할아버지이다.
한편 병주 출신 무장으로 병주자사(并州刺史) 정원(丁原)에 의해 하진(何進)에게 파견되어 가사마(假司馬)로 있던 장양(張楊)은 하진이 십상시를 주벌하기 위해 전국의 병력을 동원할 때 명을 받고 병주로 파견되었다. 병주에서 천여 명의 병력을 모집한 장양은 병주 상당(上黨) 군에 머물면서 주변의 산적을 공격한다는 구실로 사태를 관망했다. 하진이 피살되고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장양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장양은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호관(壺關)에서 상당태수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장양은 무리를 이끌고 여러 현을 약탈하며 돌아다녔다. 무리의 수는 점점 늘어 수천 명이 되었다. 산동에서 의군이 일어나자 장양도 동탁을 토벌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하내로 진격했다. 장양은 원소의 휘하에 들어갔다. 어부라 역시 원소에게 의탁했다.
훗날 어부라가 원소에게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장양이 따르지 않았다. 어부라는 장양을 납치한 후, 장양의 병력을 이끌고 원소의 근거지인 업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원소가 보낸 장수 국의(麹義)에게 업(鄴) 성 남쪽에서 패배했다. 어부라는 방향을 남쪽으로 틀었다. 어부라의 협박에 굴복하여 원소에 대한 반란에 합세한 장양은 어쩔 수 없이 어부라에게 협조했다. 어부라와 장양은 여양(黎陽)에서 도요장군(度遼將軍) 경지(耿祉)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로써 어부라와 장양의 세력은 크게 떨치게 되었다.
동탁이 이 틈을 노려 장양에게 건의장군(建義將軍), 하내태수(河內太守)의 벼슬을 내려 회유했다. 이후 장양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하내에 주둔했다. 그러나 장양은 동탁과 원소의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연주는 산동반군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했다. 연주자사 유대(劉岱) 뿐만 아니라 진류태수 장막(張邈), 동군태수 교모(橋瑁), 산양태수 원유(袁遺), 제북상 포신(鲍信) 등이 연주에서 기병했다. 이들 장수들은 각각 군대를 독자적으로 운용했으므로 연주의 자사였던 유대가 연주를 홀로 지배할 수는 없었다.
유대가 전임 연주자사였던 교모를 습격해 죽이고 군사를 병합하자 연주의 반군들은 각자의 본거지로 흩어져 서로 의심하며 경계했다. 원유는 후일 원소에 의해 양주자사에 임명되었지만 원술에게 패하여 근거지를 잃었다. 유대는 청주의 황건적이 경내로 들어오자 이를 맞아 싸우는 과정에서 죽었다.
예주에는 예주자사 공주가 있었다. 공주는 주의 병력을 이끌고 산조에 가 산동군에 합류했었으나 유대가 교모를 죽인 후 각 주, 군의 군대가 본거지로 돌아갈 때 예주로 돌아왔다. 공주는 당시에 유행하던 청담사상에 젖어 있었다. 비현실적인 고담준론에만 능했지 세상을 제도하는 일에는 적성이 안 맞았다. 이름만 예주자사였지 실질적으로 예주를 장악하지 못했다. 원술이 손견에게 예주자사를 겸임하게 하고 예주를 침략할 때 패망했다.
초평 원년(190년) 산동 반군이 일어났을 당시 청주자사는 초화(焦和)였다. 초화는 원래 학자의 덕도 관리의 능력도 없었다. 권문에 줄 잘 서는 재주 하나로 청주 수장까지 오른 자였다. 초화는 점치고 무당 굿거리 하는 짓을 좋아하며 잡다한 귀신들을 믿었다. 사람을 만나면 허무맹랑한 청담(清談)을 논하기를 좋아하고 정사를 볼 때는 상벌의 기준이 없어 불공정했다. 초화는 여러 주, 군의 수장들이 다 산동군에 가담하자 병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대의가 아닌 보신이 목적이었다.
본래 청주는 풍요로운 곳이었다. 태산 이북과 황해바다 사이에 여섯 개의 군, 국과 65개의 현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성기의 인구가 삼백칠십 만 명에 달했다. 개갑을 갖추고 병장기로 무장한 병력 만해도 그 수가 매우 많았다.
황건적의 난 때에도 청주 경내에는 혼란이 없었다. 소규모 도적떼들이 황건적에 호응해 일부 지역에서 소란을 일으키다가 청주 관군이 토벌하러 가면 도적들은 깃발만 보고도 도망갔다. 청주 병력은 제대로 된 실전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초화 역시 군대의 지휘경험이 전무했다.
초화는 병력을 긁어모으는 일에만 급급해 군, 현을 방어할 병력을 남겨두지 않았다. 병력이 집결해 청주 관내를 출발하기도 전에 황건적이 북방에서 쳐들어왔다. 무리한 징병과 징발에 반발한 농민들이 황건적에 가세했다. 그러나 군, 현을 방어할 병력이 없었다. 초화는 치소가 있는 성 주변만 지킬 뿐이었다. 황건적이 전 주를 휩쓸었다. 황건적의 약탈이 장기화되자 백성들이 유랑하기 시작했다. 주 경내는 텅텅 비고 파괴된 잔해와 쓸쓸한 언덕만이 남게 되었다.
청주에서 세를 얻은 황건적은 기주, 연주, 서주 등 인근 주를 대규모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청, 서주의 황건적이라 한다. 사실상 제 2차 황건적의 난이라 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결국 초화는 성을 지키다가 죽었다.
공손찬, 조조 등에 의해 제 2차 황건적의 난은 진압된다. 원소가 장홍(臧洪)을 보내 청주자사를 대행시키며 백성을 위무하자 주가 간신히 안정되었다.
청주의 황건적이 서주에 침입했다. 중앙 조정에서는 도겸(陶謙)을 서주 자사로 임명했다. 도겸은 양주 단양(丹楊)군 출신이었다. 아버지가 여요(餘姚) 현장을 지낸 사인(士人) 출신이었지만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나이 열넷이 될 때까지 골목대장이 되어 제멋대로 놀았다. 같은 고향에 창오태수(蒼梧太守)를 지냈던 감공(甘公)이 도겸이 장래성이 있다고 보고 사위로 삼았다. 이때부터 학문에 힘써 유생이 되었다가 무재로 천거되어 노현(盧縣) 현령이 되었다.
도겸은 과거에 강족이 변방을 약탈하자 황보숭 장군 휘하로 들어가 강족을 대파하여 정벌했었다. 그리고 서량에서 변장과 한수가 난을 일으키자 사공(司空) 장온(張溫)의 참군사(參軍事)가 되어 서량에서 한수(韓遂)를 토벌한 적이 있었다.
오랜 전투 경험으로 단련된 도겸은 서주자사로 부임하자마자 경내로 들어온 황건적을 요격했다. 황건적은 주계 밖으로 달아났다. 이로써 서주는 황건적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백성들이 부유하고 그 수가 많았다. 곡식이 넉넉하게 남아돌았다. 예주, 청주 등 인근 주와 군에서 유민들이 피난을 와 서주의 인구가 늘어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다.
그러나 예겸은 동탁에 대항하는 산동 의병에 가담하지 않았다. 도겸은 조정을 받들고 군대를 양성해 지역을 굳게 지키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켰다. 도겸은 조정을 받들어 천하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동탁의 술수에 빠져 일시적으로 동탁의 휘하에서 낙양의 수비를 맡던 주전은 산동의 여러 장수들과 통모하여 내응하고자 했으나 호응하는 자가 없었다.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전은 모의가 발각되어 동탁에게 피습 받을까 두려워 직계 병력을 이끌고 형주 방향으로 달아났다. 동탁이 홍농(弘農) 인 양의(楊懿)를 하남윤으로 임명해 낙양을 수비하게 하자 주전이 이 소식을 듣고 돌아와 양의를 패퇴시키고 낙양을 정벌한다. 그러나 낙양은 동탁이 수도를 옮기며 파괴해 놓아 인구와 물자가 없었다. 주전은 군사를 다시 동쪽으로 물려 중모(中牟) 현에 주둔했다. 주전은 서신을 보내 동탁 토벌을 위한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이 때 와신상담을 하고 있던 서주의 도겸이 주전의 요청에 호응해 정병 삼천 명을 보내주었다. 도겸은 조정에 거기장군에 봉해 달라는 표문을 올렸다. 동탁이 이 소식을 듣고 이곽(李傕)과 곽사(郭汜) 등 부장에게 수만 명을 이끌고 가 하남에 주둔하면서 주전에 대항하도록 했다. 주전이 이들을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주전은 스스로 동탁에게 대적할 능력이 없음을 알고 중모에 머무르면서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도겸은 황제를 받들어 한나라의 황실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세상이 어지럽고 도처에 반군과 도적이 가득하여 길이 막혔지만 도겸은 암암리에 조정에 사절을 보내어 꼬박꼬박 공물을 바쳤다.
도겸의 이와 같은 노선은 낭야(琅邪) 출신 조욱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조욱은 동해(東海)군의 왕랑(王郞), 팽성(彭城)국의 장소(張昭) 등과 함께 서주 지방의 명사였다. 세 사람 다 젊은 나이에 학문을 이루어 장래가 유망한 신진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 중 장소가 나이가 가장 어렸다.
조욱은 나이 열셋에 어머니가 병에 걸려 삼 개월이 넘도록 낮지를 않자 몸을 돌보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간병했다. 본인은 마르고 수척해져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를 토할 정도로 어머니를 위해 울면서 기도했다. 고향 사람들이 모두 그를 효자라고 칭찬했다. 같은 군 동완(東莞) 현에 거주하는 처사 기관군(綦毌君)에게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배워 일가를 이뤘다.
조욱은 인품이 고결하고 청렴 강직했으므로 효렴으로 천거되어 거현(莒縣) 현장이 되었다. 그의 교화와 다스림이 나라의 표상이 될 만했다. 장각이 처음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을 때 조욱은 현의 군사를 이끌고 난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서주자사 파지(巴祇)가 조욱의 공을 제 일등으로 평가해 조정에 표를 올리면서 마땅히 상과 승진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자 조욱은 당연히 할 일을 가지고 상을 요구하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겸이 서주에 취임한 후 조욱을 별가종사(別駕從事),왕랑을 치중종사(治中從士)로 초청했다. 조욱이 왕랑과 함께 도겸을 설득했다.
“춘추의 가르침에 의하면 제후(諸侯)를 구원하는 것이 임금에게 충성을 다함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지금 천자는 서경으로 가 있으니 마땅히 사자를 파견해 왕명을 받들어 따라야만 합니다.”
도겸은 조욱의 말을 옳게 여겨 조욱을 조정에 파견했다.
장안에 파천해 있던 황제는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도겸을 안동장군(安東將軍), 서주목(徐州牧)으로 승진시키고 율양후(溧陽侯)에 봉했으며, 아울러 조욱을 광릉태수(廣陵太守),왕랑을 회계태수(會稽太守)에 임명했다.
이때 도겸은 소인배들의 아첨과 참소에 빠져들어 조욱이 자기를 팔아 공명을 샀다고 생각해 소원하게 대했다. 도겸은 조굉(曹宏) 등과 같은 소인배들을 신임했다. 이들은 남을 헐뜯기를 잘하는 간사한 자들이었다. 도겸이 소인배들의 아첨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서주의 통치는 군형을 잃고 어지러워지게 되었다. 형정이 불공정해져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도겸이 도리를 배반하고 사적인 인정에 따르는 통치를 하자 조욱이 나서서 충직하게 간언했으나 도겸은 들은 체하지 않았다.
도겸은 점차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작융(笮融), 궐선(闕宣)과 같은 흉악한 악당들과 연합했다. 궐선은 무리를 모아 천자(天子)를 참람했던 자였다. 도겸은 이런 자와 합세해 자신에게 추종하지 않는 지역을 약탈했다. 그 후 도겸은 궐선을 죽이고 그 무리를 자신의 세력에 흡수했다.
작융이란 자는 단양(丹楊) 사람으로 애초에 병사 수백 명을 모아 도겸에게 의탁해왔다. 도겸은 그를 신임해 광릉군과 팽성군에서 물자를 운송하는 일을 감독하는 권한을 주었다. 작융은 권한을 제멋대로 행사해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고 각 군에서 조달한 물자를 횡령했다.
작융은 세를 모으자 큰 절을 지은 다음 구리로 불상을 만들고 황금으로 도금한 후 비단 옷을 입혔다. 구리로 아홉 겹의 지붕을 만들고 그 아래 여러 층으로 된 누각과 회랑을 설치해 한꺼번에 삼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공간을 만들었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불경을 읽는 것을 의무화 했으며 자기의 관할 구역 내에서는 명령을 내리고 주변 군들에는 방을 붙여 불교신자들을 불러 모았다. 또 불사를 빙자해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가깝고 먼 곳에서 몰려든 무리가 오천여 호에 이르게 되었다.
작융은 일종의 사이비 종교 공동체를 구성해 자신이 수장이 되었다. 매번 불상을 목욕시키는 행사를 할 때마다 음식과 술상을 많이 마련해 길가에 늘어놓았는데 그 길이가 수십 리에 달했다. 행사를 구경하러 와서 밥을 얻어먹는 백성들의 수가 만 명이 넘었고 그 비용으로 수억 전이 사용되었다.
조조가 나중에 도겸을 정벌할 때, 서주에 큰 소동이 일어나자 작융은 남녀 수만 명과 말 삼천 필을 이끌고 광릉(廣陵)으로 도망쳤다. 광릉태수(廣陵太守) 조욱(趙昱)은 일단 피난해 온 작융의 무리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작융은 조욱을 죽이고 광릉군을 장악했다.
익주 지역은 익주목 유언(劉焉)이 장악해 사실상 독립정권을 수립했다. 유언은 자가 군랑(君郎)으로 강하(江夏) 군 경릉(竟陵) 현 출신이었다. 전한 시대 노공왕(魯恭王)의 후예였다. 노공왕은 전한의 6대 황제인 효경제의 아들이었다. 효경제는 아버지 효문제와 함께 선정을 펼쳐 ‘문경의 치(文景之治)’를 이룩했던 명군주였다. 후한의 장제(章帝, 후한의 3대 황제) 원화(元和) 연간에 그 후손이 경릉에 봉해졌는데, 유언은 그 집안의 한 지파 출신이었다. 유언은 종실로 임관되어 낙양령, 기주자사, 남양태수, 종정 등 요직을 역임했다.
중평5년(188년) 태상(太常) 벼슬에 있던 유언은 장차 한실이 어지러워질 것을 예상하고 지방에 한 거점을 마련하여 난을 피한 후, 기회를 보아 큰일을 도모하려는 야심을 품었었다. 그는 반란이 빈발하는 것을 핑계로 주목의 권한을 강화하고 조정의 중신들을 주목으로 내려 보내자고 조정에 건의했었다. 유언은 시중 동부(董扶)가 익주분야에 천자의 기상이 있다는 말에 탐욕이 자극되어 익주를 거점으로 삼아 자립할 계획을 세웠었다. 유언은 익주자사 극검이 부세와 요역을 남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에게 극검을 체포해 죄를 다스릴 수 있도록 자신을 익주목으로 천거해 줄 것을 주청했다.
유언이 조명을 받아 익주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도처에 난이 일어나 길이 막혀 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남쪽 형주로 가 동쪽 경계를 넘어 우회해 익주에 들어갔다. 이 때 시중 동부 역시 촉군(蜀郡) 서부속국도위(西部屬國都尉)로 임명되어 유언과 동행했고,태창령(太倉令)으로 있던 파서(巴西) 사람 조위(趙韙)는 벼슬을 버리고 유언을 따라 갔다. 동부는 조정에 있을 때 유가(儒家)의 종사로 불릴 정도로 명망이 있었고 후대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한다.
유언이 익주 경내에 들어왔을 때 서량 반군의 잔당인 마상(馬相)과 조지(趙祗)가 익주에 침입해 근거지를 마련하고 스스로 황건적이라고 칭했다. 익주는 전임 자사들이 탐학이 심해 백성들이 피로가 극심했다. 마상과 조지가 황건적을 자처하며 고통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선동하자 수천 명의 무리가 호응했다. 이들은 먼저 면죽 현령 이승(李升)을 죽였다. 세가 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세가 커지자 마상과 조지는 광한(廣漢) 군 낙현(雒縣)으로 진군해 익주자사 극검을 죽였다. 그대로 촉군(蜀郡)과 건위(犍為) 군을 공파해 세 개 군을 통합했다. 마상은 천자를 자칭했고 따르는 무리가 수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익주종사로 있던 가룡(賈龍)이 병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건위군 동쪽 경계에 머물면서 난을 피해 도망한 지방 관리들과 백성들을 결집해 천여 명의 병력을 모아 마상을 기습해 이들을 격파해 패주시켰다. 가룡은 유언을 모셔오게 했다.
유언은 자사의 치소를 면죽현으로 옮기고, 이산되었던 백성들을 수습해 어루만졌다. 부세와 요역을 줄이고 백성들을 관대하게 다스려 선정을 베풀자 민심이 회복되고 경내가 안정을 되찾았다. 익주는 서강과 남만의 거주 지역을 포함하여 관할 지역이 광대했으며, 소속 군(郡), 국(國)이 도합 열둘에, 현(縣), 도(道) 등 성이 백십팔 개나 되었다. 전성기 때의 인구는 칠백 이십 사 만 명에 이르렀다.
유언은 세력을 안정시켜 가며 자립하고자 하는 음모를 단계적으로 진행했다. 익주의 한중(漢中) 군은 태평교의 일파인 오두미교 교주 장수(張修)의 영향력이 있었다. 장수가 죽고 아들 장노(張魯)가 교주의 지위를 이었는데 난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을 받아들여 구휼해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장노의 모친은 제법 미모가 출중했다. 그녀는 유언의 집에 출입하며 유언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유언은 오두미교의 세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음모를 실현코자 했다. 장노를 독의사마(督義司馬)로 임명해 한중을 관리하게 했다. 유언은 은밀히 장노에게 한중에 있으면서 익주와 관중을 연결하는 잔도(棧道)를 차단하게 했다. 조정에서 관리들이 파견되면 장노를 시켜 살해하게 하고 조정에는 미적(米賊)들이 길을 끊어 조정과 연락을 유지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이로써 유언은 익주 내의 모든 일을 조정의 간섭을 받지 않고 처리하며 자기 세력을 구축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유언은 자신의 음모를 실현하는 데 장애가 되는 인물을 제거해갔다. 황건적의 잔당을 물리치고 자신을 구한 익주 종사 가룡을 내쳤다. 그리고 익주 경내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왕함(王咸), 이권(李權) 등 십여 명의 호강(豪強)들을 죽여 위엄을 세웠다. 호강이란 지역토착세력들로서 난세를 이용해 작은 군벌 행세를 하던 자들로, 소위 강도단(lobbing bandit)의 성격을 가진 무리들이었다. 유언은 이들을 제거했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보호를 제공해 주는 대가로 일정한 공납을 수취하고 있던 군소 벌열들을 소탕해 독점적 지배권을 확립했다는 뜻이었다. 이를 계기로 유언은 익주지방의 단 하나의 지역강도단(local bandit)으로, 다시 말하면 군벌적 영주(Warlord)로서의 세력 구축에 성공했다.
이 와중에 유언에게 살해당한 이권이란 자는 임공(臨邛) 현장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의 아들 이복(李福)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건위(犍為) 사람 양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를 계기로 건위태수 임기(任岐)가 종사 진초(陳超)와 함께 유언에맞서 군사를 일으켰다.
유언은 동탁에 대한 토벌군이 산동에서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병력을 집결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유언은 동탁을 토벌하는 일에는 뜻이 없었다. 자신의 지역인 익주를 지킬 생각이었다.
동탁은 유언의 세력을 묵과할 수 없었다. 동탁은 황제를 명을 위반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겸(趙謙)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유언에게 배신당했던 가룡을 조겸과 함께 익주로 보냈다. 동탁은 가룡에게 교위 벼슬을 내려 조겸이 이끄는 익주 토벌군의 선봉으로 삼았다
익주로 돌아온 가룡은 건위 태수 임기와 합세했다.
유언의 세력은 앞뒤로 적을 맞아 전세가 불리했다. 임기와 가룡 등은 촉군 출신으로 익주의 오랜 세족이었다. 임기와 가룡은 익주의 지리에 밝았다. 아울러 오랜 세족이었으므로 백성들은 그들을 은근히 지원했다.
유언은 익주를 장악한 후 익주의 토착세력들을 권력의 핵심에서 밀어냈다. 대신 관중이나 형주에서 난을 피해 들어온 외지 사람들을 중용했다. 유언을 따라 형주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을 동주병(東州兵)이라고 불렸다.
유언은 자신과 더불어 위기에 임한 동주병을 결속시켰다. 동주병의 단결된 힘을 바탕으로 임기와 가룡의 공세를 막아내는 가운데 청강(青羌) 족을 끌어들여 반격을 가했다. 청강 족이 가세하자 유언 군대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결국 임기와 가룡의 군대는 격파당하고 두 사람은 참살된다. 이로써 익주에서 유언의 세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형주는 원래 왕예가 자사로 있었으나, 손견에게 피살되어 주목이 없는 상태였다. 손견과 원술이 형주 남양에 근거지를 두고 세력을 떨친 까닭에 원술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 조정에서는 왕예가 피살되자 후임으로 북군중후(北軍中候)로 있던 유표(劉表)를 임명했다. 유표는 자를 경승(景升)이라 하고 산양(山陽) 군 고평(高平) 현 출신이었다. 황실의 먼 친척으로 노공왕(魯恭王)의 후손이다. 유표는 젊어서부터 소위 말하는 팔준(八俊)의 하나로 꼽혔다. 지금 전해지지는 않지만 장번한기(張璠漢紀)라는 기록에 의하면 유표는 젊어서 같은 산양군 출신의 빼어난 선비들인 장은(張隱), 설욱(薛郁), 왕방(王訪), 선정(宣靖), 공저공(公褚恭), 유지(劉祗), 전림(田林) 등과 교우를 맺었는데, 이들을 팔교(八交) 또는 팔고(八顧)라고 불렀다고 했다.
유표는 산양군 출신의 왕상(王暢)의 밑에서 수학했는데 왕상이 남양태수가 되었다. 태수가 된 왕상은 지나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
불과 십칠 세에 불과한 유표는 왕상에게 간했다.
“사치스러운 것이 윗사람보다 심하면 아니 되지만, 검소한 것이 아랫사람보다 더한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찌 중용의 도를 취하지 않으십니까. 이는 옛날 거백옥(蘧伯玉)이 홀로 군자 행세를 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한 것과 같습니다. 부군(府君)께서 공자의 밝은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백이, 숙제의 헛된 지조를 사모하여 따른다면 어찌 세상을 밝게 교화시키겠습니까!”
왕상이 대답했다.
“자네가 지적한 것은 대체로 옳으나 우선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네.”
이 일화를 통해 유표의 성품을 대략 파악할 수 있다. 유표는 한말 명사의 한 사람이었던 만큼 당고의 금을 피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팔고(八顧)로 불리던 명사 모두가 무함을 받아 체포되었으나 유표는 간신히 도망쳐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대장군 하진이 집권하고 당금이 해제되자 유표는 하진의 참모로 초청 받게 되었다.
유표는 키가 팔척이 넘었으며 풍채가 온후하면서 위엄이 있었다. 형주목에 임명될 당시에는 북군중후가 되어 맡아 궁성을 수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전투경험은 없었지만 군대 지휘경험은 있었던 셈이다.
유표가 형주목으로 임명되긴 했지만 임지로 바로 갈 수 없었다. 낙양에서 형주의 치소인 무릉으로 가는 길은 남양을 통해 바로 남쪽으로 가는 것이었으나 남양은 원술과 손견의 무리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었다.
형주는 몹시 어지러워져 있었다. 원술과 손견이 노양현에 둔병하면서 경사를 엿보는 데 주력하고 있었으므로 형주까지 관심을 둘 수 없었다. 손견이 북상하면서 자사와 태수를 살해하는 등 기존의 통치 질서를 붕괴시켰으므로 실력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병력을 끌어 모으고 세를 형성해 혼란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고자 했다. 이러한 소규모 군벌집단을 형성하는 데 가장 쉽게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향촌 조직과 집안 친척들이었다. 특히 강남(江南, 장강 이남 지역)은 자고로 씨족이나 종족을 단위로 한 향촌조직이 발달되어 있었다.
집성촌을 배경으로 군대를 조직해 일정한 지역을 제멋대로 통치하는 집단을 종적(宗賊)이라 불렀으며 종적의 우두머리는 종수(宗帥)라 했다.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할거하는 종적의 수는 수십 개가 넘었다. 이들은 다 역적 동탁을 토벌하고 원씨 가문을 위해 복수하는 것을 병력 동원의 명분으로 삼고 있었으며 대부분 원술의 추종세력들이었다. 이들 중 가장 유력한 자는 원술에 의해 장사태수에 임명된 오군(吳郡) 사람 소대(蘇代)와 화용(華容) 현장에 임명된 패우(貝羽)였다. 이들은 서로 병력을 이끌고 서로 치고 받는 등 혼란을 빚어내고 있었다.
유표는 남양을 피해 단기로 의성(宜城)에 도착했다. 의성은 남군(南郡) 소속의 한 현으로 전국시대의 이름이 언(鄢)이었다. 한때 초(楚)나라의 수도였던 만큼 전략적으로 가치가 높은 요충지였다. 남군은 전성기 때 인구가 칠십 오만에 달했던 큰 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양양(襄陽) 현에서 강릉(江陵) 현에 이르는 연도에 채씨, 괴씨, 방씨, 황씨 등 대대로 내려오는 명문가의 저택과 장원들이 연이어 늘어서 있는 강남 사족들의 본거지였다. 이 중 중로(中廬) 현에 사는 괴량(蒯良)과 괴월(蒯越) 형제는 학문과 지모가 출중한 것으로 유명했고, 양양현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채씨 일가는 집안이 융성해 세력이 가장 강했다. 채모(蔡瑁)는 채씨 집안사람들로 구성된 군대를 지휘했다.
유표는 이 세 사람을 초청했다. 조정의 명을 받은 정당한 주목이니 주를 장악할 수 있도록 협력해 달라고 요청하자 이들은 지지를 표명했다. 이들은 이미 주 안팎이 너무 혼란스러워 누군가 중심이 되어 질서를 잡아줄 필요가 있다는 점에 공감하고 있었다. 유표와 함께 형주를 수복할 계획을 모의했다.
유표가 물었다.
“종적들이 매우 성대하나 그 무리들은 조정에 귀의하지 않고 있소. 이것이 원술의 영향 때문이라면 반드시 재앙을 부를 것이오. 내가 병사를 징모하고 싶지만 모을 수 없을까 두렵소. 좋은 계책이 없겠소?”
먼저 괴량이 답했다.
“무리가 의탁하지 않는 것은 어짐이 부족해서입니다. 의탁을 해도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의로움이 부족한 것에 원인이 있습니다. 진실로 인의의 도(仁義之道)를 행하면 백성들이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돌아올 것입니다.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 것이 문제인데, 어찌 병사를 일으킬 계책을 물으십니까?”
지극히 유자다운 말이었다. 먼저 덕행을 쌓고 인의를 행하라. 그러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따를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인의를 행하고자 해도 행할 근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유표는 통치기반도 없이 떠도는 신세로 언제 누가 쳐들어와 해칠까 보아 아침 저녁으로 걱정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유표가 괴월에게 의견을 묻자 괴월이 입을 열었다.
“평화스러운 시대를 다스리려면 먼저 인의를 행해야 하지만 난세를 다스리려면 우선 권모술수에 의지해야 합니다. 병력을 운용하는 것은 수가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술은 교만한데다가 무모하고 소대나 패우 등도 다 무인으로 사려가 깊지 못한 자들입니다. 게다가 종적의 수령들은 탐욕스럽고 난폭하기 때문에 수하 사람들조차 불안해합니다.
이 괴월이 평소에 모아놓은 재산이 좀 있습니다. 사람을 종수들에게 보내어 재물로 꾀어 들이면 반드시 무리를 이끌고 찾아올 것입니다. 사군께서는 그 중 무도한 자들은 주살하고 재주가 있는 자들을 기용하면서 위엄과 덕을 행하면 백성들이 보따리를 싸들고 모여들 것입니다.
병사들이 모이고 백성들이 귀의하면 남쪽 강릉을 근거지로 삼고 북쪽으로 양양에 군대를 배치해 수비하면서 형주 여덟 개 군에 격문을 보내면 모두 평정이 가능합니다. 형주 관내가 다 평정된 이후에는 원술 등이 쳐들어온다 한들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자유(子柔)의 말씀은 지당하고, 이도(異度)의 계책은 매우 탁월하오.”
자유는 괴량의 자이고 이도는 괴월의 자였다. 유표는 괴월의 의견을 채택했다.
괴월을 사자로 보내어 종적들을 유인하니 찾아온 종수들이 모두 오십오 명이나 되었다. 유표는 종수들을 붙잡아 목 벤 후에 그들의 휘하 병력을 습격해 빼앗았다. 유표는 이들 중 항복한 자들을 다 자신의 부곡(部曲, 사병집단)으로 받아들였다. 유표는 일거에 형주 관내의 종수들을 쓸어버리고 휘하 병력을 접수해 대규모 군대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계획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있으면 오히려 재앙을 끌어들일 수도 있었지만 수순에 착오가 전혀 없이 깔끔하게 처리했다. 무엇보다도 괴월의 정확한 형세판단과 과감한 계획 덕분이었다. 이로서 괴월의 이름은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남군의 중요한 전략적 거점지인 양양은 강하(江夏) 군 출신의 종적 장호(張虎)와 진생(陳生)의 무리에 의해 점거되어 있었다. 유표가 괴월을 보내 회유하게 했다. 괴월이 필마단기로 양양성에 들어가 장호와 진생을 설득하니 항복했다. 장강 이남 지역도 점차 평정했다. 군, 현의 수령들은 유표의 위명을 듣고 자진해 인수를 풀고 자리를 내놓는 자가 많았다. 유표는 병사들을 모아 양양에 주둔했다. 양양은 중원과 가까워 천하의 변화를 관망하기 좋았다.
유표의 통치 지역은 남쪽으로는 영릉(零陵), 계양(桂陽)에 이르고 북으로는 한천(漢川)을 점유했다. 땅의 넓이가 사방 수천 리에 달했으며 갑주로 무장한 병력이 십만 명이나 되었다. 형주는 소속 군이 일곱 개, 현(縣), 읍(邑), 후국(侯國) 등 성이 백십칠 개, 한창 때의 인구가 육백 삽십 만을 넘었던 매우 큰 주였다.
유표는 형주 관내의 떼도둑들을 소탕한 후 학교를 설립하고 널리 유학자들을 초청했다. 백성들의 생활이 풍족해지고 학문이 융성했다. 형주가 안정되자 경사와 장안을 포함한 사례지역에서 이름난 선비들이 난을 피해 형주로 모여들었다.
유주(幽州)는 유우(劉虞)가 유주목으로 임명되었으나 중랑장 공손찬(公孫瓚)이 우북평(右北平)에 둔병하면서 유우와 대립했다. 장순, 장거의 난이 수년간 계속되었으나 공손찬이 이를 충분히 제어하지 못했으므로 조정에서는 유우를 유주목으로 임명했다. 유우가 지난 날 유주자사로 있으면서 융적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신뢰를 깊이 산 적이 있기 때문에 유우가 주목으로 간다면 장순, 장거의 외원 세력인 이들을 위무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유우는 동해공왕(東海恭王)의 후손이기는 하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집안이 쇠미해져서 황제와는 거리가 멀어졌으므로 현의 하급관리로 시작하여 차곡차곡 실적을 쌓아 유주자사, 감릉상(甘陵相) 등 지방관과 상서령(尚書令), 광록훈(光祿勛),종정(宗正) 등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친 사람이었다.
유우가 유주목으로 부임하여 호족들을 설득하니 구력거(丘力居) 등 호족의 수령들이 조정에 귀순하여 장순의 난이 진압되었고 조정에서는 유우에게 태위(太尉) 직을 수여하고 용구후(容丘侯)에 봉했다. 그러 산동에서 의병이 일어나 길이 막혀 조정의 명령이 유우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예로부터 유주는 변경에 접하고 있어서 선비, 오환 등 외적을 방어하느라 군자와 비용이 막대하게 소요되었다. 조정에서는 매년 청주와 기주에 이억여 전의 세금을 할당해 유주의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게 했다. 그러나 산동의 반군이 일어나자 도처에 도로가 단절되어 물품의 지원이 중단되었다.